기도를 돕는 고독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 하니라,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6:11-12)
녹취자: 서재임
우리가 이번 수련회 때도 느낀 것입니다만, 참 우리가 기도 많이 하지만 그러나 사실 기도중에서도 정말 주님과 사귐이 있는 기도는 참 너무 적습니다. 우리가 일평생동안 여러 일들을 만나면서 살지만은 정말 일생에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시간동안 기도하는 모습으로 있지만은 그러나 정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교제가 있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영향이 있는 기도생활을 우리들이 얼마나 하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에는 예수님이 손 마른 자, 손 마른자라고 했으니까 손에 마비가 왔다거나 발육이 부족해서 어쨌든지 간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의 손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것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람의 손을 고쳐주신 것을 둘러싸고 아주 커다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날 이렇게 병자를 고쳐주는 것, 이것이 일인데 안식일 날 이렇게 일을 해도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거냐 하는 커다란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결론은 이 예수는 율법을 파괴하는 자다. 그래서 살기가 등등해서 이제 예수님을 해해야 되겠다는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에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다가 커다란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런 커다란 위기와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주님이 어떻게 대처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십시오.
이때에, 이때는 그렇게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죽이려고 그렇게 사람들이 살기가 등등하던 그때입니다. 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이신 바로 그때에,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랬습니다. 참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의 환경이나 여건에 쉽게 동요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환경이나 여건에 쉽게 요동치는 사람들은 정말 마귀의 밥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정함이 없이 마치 밀을 까부르면 밀이 까불리듯이 그렇게 쉽게 날아가 버리고 그리고 마음에 정함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쉽게 요동치고 흔들리는 바다같이 말입니다. 그러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깊어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야 갈일이 저는 별로 없습니다만, 저는 동해, 서해, 남해바다, 세 바다 중에서 제일 싫은 바다가 서해 바다입니다. 우선은 지저분하기도 아마 세 바다 중에서도 가장 지저분한 축에 속하겠지만 서해 바다는 이런 표현해서 안됐습니다만, 꼭 변덕이 심한 여성 같습니다. 배를 타고 쭉 가면은, 파랗습니다. 갯벌 있는 데만 지나서 촥 들어가면 파랗습니다. 그리고 섬 근처에만 가면은, 물이 얼마나 맑은지 속에서 고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일 정도입니다. 그렇게 깨끗합니다. 그런데 소용없습니다, 하루저녁만 폭풍치고 풍랑이 일어나면은 말이죠, 바다 전체가 누런 바다로 변합니다. 그래서 황해라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는 몰라도 깊이가 얕으니까 풍랑이치고 하면은 금방 흙이 올라와가지고 바다 전체를 붉은 색으로 뒤덮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여건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은 평생 환경에 종이 되다가 볼일을 다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이라는 하는 것은 신앙이 있기 때문에 남들이 극복할 수 없는 수 없는 환경을 넘어서는 것 아닙니까? 불안해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인지상정이지만은 신앙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초연할 수 있는 사람, 모두들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지만 신앙이 있기 때문에 담대한 사람, 온통 우리의 생각이나 삶, 의식구조 모든 것이 뒤 흔들려서 더 이상 어떻게 하나님 앞에 중심을 잡을 수 없는 어려움 속에 떨어졌을 때에도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사람, 무엇 때문입니까? 신앙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복음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이 많은 반대에 부딪힌 것이 사실이지만은 이렇게 주위에서 예수님을 해 하려고 강력한 모의를 하고 그래서 둘러싸인 것은 특별히 초기 생애에는 비교적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상적이지 않은 매우 범상치 않은 커다란 일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평소에 하시던 일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삼킬 듯이 덤벼들어도 도저히 우리 안에 있는 평안을 흔들 수가 없다고 생각 되면 금방 그 환란의 풍파는 멎습니다. 멎습니다. 멎어버립니다. 그러한 든든함, 그러한 견고함,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런 철저함, 그 뿌리가 어디에 있었는가?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건에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은 흔들리지 않는 기도생활의 뿌리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뿌리를 내리려면 한참 있어야지만 뿌리가 내려갑니다. 내리자마자 내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오래 있지를 못합니다.
(예화) 엊그제도 저희 할머니 산소에 가서 풀을 뽑는데 금방 떨어져서 얼마 뿌리가 내리지 않는 것들은 툭툭 치면 다 뽑아집니다. 근데 제법 30Cm, 50Cm 자란 나무, 풀 이런 것들은 쉽게 안 뽑아집니다. 막 뽑으려고 하면 끊어지고야 맙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뿌리째 흔들어가지고 잡아 당겨서 뿌리를 뽑아내버렸습니다.
우리의 생활도 똑같은 것입니다. 기도의 뿌리가 깊이 내려질 때 그때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환경이 우리를 흔들어 놓으려고만 하고 우리의 마음이 환경에 쉽게 흔들린다는 것만 확인되면 우리의 거미줄 같은 신앙생활을 뒤엎는 것은 마귀에 있어서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시니까 우리가 이만큼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해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생활의 뿌리는 어떤 것이었는가? 우선은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는 기도 생활 속에서 이런 깊은 뿌리를 얻으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산으로 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산에서 생활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생활권은, 늘 죄인들이 있는 삶의 한복판에서 살면서 복음을 전하고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그들과 접촉하는 모든 기회에 복음을 가르치시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전하시는 그런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많은 군중들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심으시는 도구로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사셨던 것은 남이 모르는 그런 한적한 곳에서 주님을 만나는 생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아무리 한때 산을 뽑을 정도에 영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매일 사람들에게 부딪히고 생각하는 것이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세상에서 돌아가는 일 이야기, 눈뜨고 보는 것이 세상의 속된 이야기, 그리고 매일 매일 들리는 것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염려에 대한 것들, 그런 것들은 우리의 마음에 작용합니다. 보고 듣는 것들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속에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보면서 속에서 많은 쓸데없는 잡된 생각들과 더러운 생각, 선한 것이 가끔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아주 일부이고 그다음에는 보다 더 무가치한 것이나 혹은 해로운 것이 우리의 마음에 누적되어 쌓인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주님이 아닌 다음에야 악한 것들을 보면서 갑자기 선한 생각을 하고 불결한 것들을 보면서 순결한 생각을 하고 그렇게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이 기도하신 것 그 이상의 열심을 가지고 기도할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사실에 있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렇게 살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 고독하기만하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은 아니지만은, 찾아오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좀 홀로 있는 것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사랑의 밀어는,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남이 할 때 내가 너무 부끄러워지고 창피해지고 닭살이 돋는 경우 있습니다. 라디오에서 사랑하는 사람한테 사랑을 고백해 보라고 할 때 고백하는 사람 말입니다. 밀어는 그렇게 공개방송으로 오가는 것이 아닙니다. 둘이 있을 동안 오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저는 많이 봤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나는 자기 아내를 사랑한다. 자기 부모를 사랑한다,’ 공개적으로 떠드는 사람들 치고 속 내면에 들어가서 신통한 사람을 못 봤습니다. 속이 허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은밀한 곳에서 주님과 만나는 기쁨이 있을 때, 그때 참된 사랑의 밀어가 오기도 하고 가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한때 산을 뽑는 영력을 갖고 하나님의 입맞춤을 두 볼에 느낄 수 있는 탁월한 영적인 교재를 하나님과 가진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고독한 장소가 없는데, 고독한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그걸 유지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주님은 헛사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늘 고독한 장소, 고독한 시간을 찾아다니고, 고독한 기도자로서의 삶을 자처하셨습니다. ‘언제가 제일 고요할까, 새벽일가, 밤일까, 낮에는 섬겨야 하겠고, 어디가면 아무도 안 쫒아올까, 어디가면 심지어 내가 섬겨야 될 사람들이 없는 장소가 있을까?’ 그러면서 찾으신 곳이 산입니다. 산, 혹은 광야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바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필수적인줄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에 너무 바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에는 너무 분주한 사람들입니다. 시간을 떼 내어야 됩니다. 그리고 고독한 곳에 오십시요. 오늘도 우리 전도사님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까, 이 방법 저 방법 다해봤는데, 그래도 교회당에 와서 기도하는 것이 가장 방해를 덜 받습니다. 여러분 일주일에 하루정도 집에 늦게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월요일 날이나 목요일쯤, 아니면 토요일쯤 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 될 때까지 한 세 시간 집에 늦게 들어가면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까? 또 토요일 같은 날 직장마치고 봉사 안 해도 괜찮습니다. 와서 한 서너 시간 엎드려서 하나님과 외로운 시간을 갔다 가면은 뭔가 생활 자체가 스톱될 정도로 어려운 일을 만납니까? 요즘에는 토요일 날 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토요일 날 못 쉰다면, 새벽에라도 나와서 하나님 앞에 일주일에 단 두 번만이라도 그렇게 고독한 시간을 가지면 뭐 엄청남 변혁이 일어납니까?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살고,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다가 죽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말이죠, 중요한 것 먼저 해야 됩니까? 급한 것 먼저 해야 됩니까? 급한 것 먼저 하면서 일평생을 살면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의 노예가 아니라 일과 자기 일과의 노예가 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보십시오. 가장 어려운 위기와 살기가 등등한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주님이 택하신 것은 외로운 곳으로 나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조용히 있기를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저는 주위에서 그런 사람들 많이 봤습니다. 크게 범죄 하였거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대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도무지 혼자 있지 못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니 더 무서운 시간은 기도 시간입니다.
(찬양)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그 사람들은 그런 것 모릅니다. 기도시간이 아주 즐거운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미 그런 벽을 깨트리고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래도 혼자 있는 것이 무섭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이 자신의 죄 때문에 너무나 부자연스러워도, 그래도 그렇게 해서 그 죄와 무감각의 벽을 깨트리고 기도의 친밀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달콤한 함께 있음 보다는 쓰라린 홀로 있음을 택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죄를 씻어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사죄의 확신을 갖는 것은, 한순간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로 될지 모르지만, 그 죄의 찌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기도 속에 자신을 깊이 잠그는 오랜 동안의 거룩하고 정결해지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화) 제가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타락했습니다, 한 남자가.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사기도 치고 나쁜 짓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결국은 성적인 관계도 잘못 가져서 못된 성병에도 걸리고, 그다음에 너무 술을 먹고 폭음을 해서 위장도 다 탈이 났습니다. 간도 나빠지고, 결국은 범죄로 산 날입니다.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8. 15가 되어가지고 한번 용서해주자 그래서 특사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해방이 되었습니다. 밖에 나왔습니다. 그럼 모든 것이 끝났습니까?
용서 받았는데도 뭐가 남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끼친 결과와 영향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범죄하고 용서받은 감격을 말하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도 차라리 죄 가운데 빠져보고 싶다고 합니다. 바보 같은 짓입니다. 죄는 용서받았어도, 감옥 속에서 풀려났어도, 병을 고치는 작업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죄함은 없지만 정결케 되는 과정은 필요하단 말입니다. 결국 말입니다, 우리가 배우게 되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죄는 기도를 죽입니다. 깊은 기도는 죄를 죽이고야 맙니다. 그러니까 죄가 왕성하면 기도가 죽고, 기도가 왕성하면 죄가 죽습니다. 둘 다 왕성 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고독한 시간을 싫어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고 기도가 살아나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반듯한 신앙생활을 하고 아무리 모범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해도 죄가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서. 지금은 비록 상식과 여러 가지 여건으로, 여러분 자신의 타고난 통제력으로 그런 것들을 유지하고 있지만 어느 한순간에는 기도가 거의 소멸상태에 들어가고, 죄가 살아있는 결과가 어느 한순간에 드러나고야 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수박이 수박 가게에 모두 모였을 때는 그놈이 그놈 같습니다. 집에 와서 깨보니까 속이 다 골았습니다. 거기 있을 때까지 주인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일에 깊이 개입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언제 무너질 줄 모르는 건물 같은 것입니다. 열심히 크면 클수록 넘어지면 엄청나게 넘어집니다. 왜 그런 고독한 시간을 안 가집니까? 여러분 저도 직장 생활 해 봤습니다.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저는 새벽기도가 그 시절 그 믿음에 불가능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예 직장을 일찍 나갑니다, 6시 반 쯤, 내 마음을 좀 정결하게 해달라고, 물통에다 물 까지 퍼가지고 베란다에 나가서 유리창까지 깨끗이 닦고 30분, 다시 세수하고 깨끗이 씻고, 고요합니다. 상황실이나 사무실에 앉아서 말입니다.
(찬양)
내주여 뜻대로 행 하시옵소서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사무실에서 상황실에서 이것저것 여건이 안 될 때는 옥상 굴뚝 옆에서 하나님 앞에 찬송하나 부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 나는 감격을 느꼈습니다. 주님은 어디서든지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저녁때 집 올 때 교회 들러서, 저는 이제 집이 가까웠습니다. 주님 오늘도 하루 일과 잘 마쳤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40-50분 간절히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하루의 삶이 얼마나 감사하고 내일의 삶에 대한 기대에 넘칩니다. 여러분 왜 그거 못합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덜해서 그렇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중하게 여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교회세우고 제일 많이 설교한 것이 두 주제인데 하나는 십자가고, 하나는 기도였습니다. 근데 감동받는 것만큼 사람들이 살지를 않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동받고 찔림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기는 걸로 끝내니까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오늘 주님은 평소에 하시던 대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독한 장소와 시간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흩어져있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영혼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주님은 나사로의 집에서 가끔 쉬어가시는 것을 아주 즐거워하셨습니다. 주님은 늘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보다 하나님 아버지와 더 많이 만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한적한 시간을 택했습니다. 고독한 시간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에 퇴근해서 하루정도 늦게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매일은 힘들다고 하더라도 한주 정도, 하루 정도, 하나님 앞에 형제들 같은 경우 깊이 기도하고 새벽에 집에 들어가서 자면은 누가 뭐라고 그럽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바치는 그래서 외로운 시간에 하나님 앞에 홀로 두어서, 거기서 받는 고통이면 고통을 받고, 하나님 앞에 책망이면 책망을 듣고,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는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흘려만 보내지 말고, 구체적으로 한번 시도를 하십시오. 왜 그렇게 무겁습니까?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총알같이 우리들은 달려갑니다. 그러는데 우리들 어떻게 생활을 합니까?
(예화)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제가 퇴근하려고 하는데 아주 친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야, 오늘 우리 직장 바로 앞에 좋은 영화가 들어왔는데, 내가 극장표 2개 사놨는데 저녁사줄 테니까 나하고 같이 보자.” 난 쫒아갈 것 같습니다. 왜 안가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과 만나는 그 시간이 우리가 얼마나 즐거울 뿐만이 아니라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즐거움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결심을 해야 합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는 그런 교회입니다. 사람마다 여건이 틀립니다. 언제와도 하나님의 집에서 엎드려서 은밀히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 그래서 열려진 교회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상 그렇게 한적한 시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나와 오는 교회, 그런 교회,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교회입니까? 그런 시간을 찾고 또 찾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마지막으로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를 선택하는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큰일을 앞두고는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섬기는 가운데 커다란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일이 눈앞에 있으면 여러분들은 평소보다 더 깊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을 따라서 복음을 섬길 종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시간을 바쳐서 드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다시 새삼스럽게 말하지만,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은 TV앞에 앉아있거나 혹은 신문을 보는 그런 시간보다는 많아야 됩니다. 깊이 기도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사귐 속으로 들어가야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저도 척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지만 저의 좁은 소견으로도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런 것 같습니다. 저는 영어공부를 하면서 그런 걸 느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옛날보다 많이 다 잊어버렸지만, 한참 영어에 미칠 때는 실력이 이렇게 느는 것 아니라 이렇게 쭉 가다가 푹 뛰어오르고 쭉 가다가 푹 뛰어오르고 이런 걸 몇 번 느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도 난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나서도 기도 시켜서 기도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언젠가 하나님 앞에 기도로 매달리다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인지, 은혜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서 영안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올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경험한 사람인가, 저는 근처에 가다만 사람인가 아니면 그 근처에도 못 간 사람인가 하는 것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예전에 기도했던 깊이만큼으로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면은 기도의 상태는 언제나 예전에 깊이 들어갔던 그 한도 안에서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도를 깨트리고 더 깊은 기도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아주 매우 특별한 매달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이 목숨을 건 삶의 목표가 있어야 됩니다. 그게 없이는, 여러분 절대로 기도의 깊은 세계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마십시오. 확신합니다. 그런 시간 안 옵니다. 그런 시간 오지 않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생명을 건 목표가 없는 사람은 결코 생명을 건 기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정신병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타까운 일이 없는데, 왜 안타깝게 기도를 합니까?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건데, 안타깝게 이루어 주기를 원하시는 소원이 없는데 왜 안타깝게 기도합니까? 죽고 살 각오가 되어있는 어떤 목표가 없는데, 왜 목숨을 걸고 기도합니까? 정신병자입니다. 그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지 마십시오. 오늘 아침에도 잡지사에다가 글을 쓰면서 그랬습니다. 새벽기도 운동, 운동 가지고 새벽기도가 됩니까? 그건 단지 기회를 제공할 뿐입니다. 사람들을 기도하도록 불러 모으는 것은 성령 아니고 인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인사람들 기도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목표가 있어야 됩니다, 목표가. 그러니까 삶은 간곳이 없고, 불이나 때워서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려고, 기도의 능력을 해복시켜주면 뭐합니까? ‘몇 달 있다 손들고 옵니다.’ 할 사람들. 종교적인 말하자면 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될 제목이 없다면, 여러분은 삶이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 메이는 체험, 이것 없으면 여러분 삶이 실패하고 있는 겁니다. 간절한 삶의 소원이 있는데도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소원이 거짓이든지, 기도하지 않고 있는 그 상황이 거짓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정말 제가 이 사실을 반복적으로 말하는, 지금 말한 이 사실을 나는 너무나 깊이 심장이 터지는 것 같은 각성 속에서 깨달았기 때문에, 내 삶속에서 몸소 경험했기 때문에, 이 사실 만큼은 피로 쓰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 하나님 앞에 살고 죽지 않을 수 있는 목표가 없으면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의 체험은 한계가 있습니다. 깔짝깔짝하는 것만큼까지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고 하나님의 그 은혜로 말미암아서 영혼 속에서 충천하는 기도의 불은 다른 사람들 이야기나 듣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그런 것 없는 사람들은. 정말 그럼 도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까? 예수 믿고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을 받은 성도가 되었고, 이제는 내가 우리와 같은 죄인 살려주신 주님을 위해 살아야하는 것이 커다란 명제인데, 무엇이냐 말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가슴이 저밀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떨리게 하는 삶의 제목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목표가.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서도 감격이 없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감격이 없고,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봐도 떨림이 없고, 그런다고 해서 미친 듯이 세상에서 돈 벌어 오고 살고자 하는 것도 없고, 그거야 말로 평범한 삶이 아니라 매우 괴상한 삶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바로 마귀가 우리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삶이 바로 그런 삶입니다. 마약에 취한 것 같이 몽롱한 삶, 그리고 술에 취한 것 같이 분별력이 없는 애매한 삶,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수시로 정신을 차리고, 베드로 전서에서도 말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기도를 해라.” 그러면서 자꾸 세월이 흘러갑니다. 나는 요즘, 한 주 한 주 지나가는 것이 초침 소리같이 들립니다. 이제 얼마나 하나님을 더 섬기다가 죽겠습니까? 얼마나 강단에 서서 외치고 그러겠습니까? 오늘도 어느 출판사 사장 장로님을 만났는데, 쭉 얘기를 듣더니 자기가 오래 동안 출판계에 있었는데, 그런 얘기를 하십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 생각에는 생명이 있는 한 언제까지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목사님, 농익은 글은 잠깐 나오고 맙니다. 하나님이 쏟아 부어주실 때 미친 듯이 쓰십시오. 나중에 후회합니다. 그 말이 점심시간에 가슴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나는 아직 그 말의 깊은 의미를 모르지만은 그러나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것, 글을 쓰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섬기는 것 모두 ‘되’게 살아야 됩니다. 경상도 말로 ‘되’게, 마치 떡을 집어넣고 꽉 누르면 그 가래에서 농축된 떡이 어느 한 순간에 뚜껑을 열면 쏟아져 나오듯이 농축된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러다가 기운이 다 돼서 열조에게로 돌아가야 되는 겁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얼마나 남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70까지 그렇게 정열적으로 활동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래도 불과 이제 25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25년 전에 어땠습니까? 엊그제 같은 데 속히 흘러갔습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도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그냥 안일하고, 적당하고, 그저 예배나 드리고, 그저 가끔가다가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이나 받으면서, 그것 때문에 자기가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은 외모를 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큰일 납니다. 우리가 피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가 보내버린 헛되고 쓸데없는 수많은 날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떠내려 가버린 시간들, 하나님 앞에 후회할 날이 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커다란 죄 중에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인생을 낭비한 죄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정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시간밖에 없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매달릴 시간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그렇게 취한 것 같은 삶을 살아서 되겠습니까? 흐느적거리고. 기도회에 와도 그냥 흐느적거리면서 중심을 못가누고 돌아가고, 그런 삶을 몇 달 되풀이 되면 아주 선명하게 본인이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그것이 깊어지면 눈이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들겨 패가지고 고난이 오고 시련이 와도 이게 왜 그런지를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런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일평생 그리스도에게 종노릇하고 환경을 지배하고 상황을 통치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의를 위해 살아야 될 사람들이, 환경의 노예가 되고 여건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이 반복되는 실패의 삶, 그 실패에 적응하는 삶, 그것을 또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무지 몽매함, 그것을 또 은혜라고 생각하는 무지몽매함.
(예화) 어느 지체가 있는데 권고를 했습니다. 그런 삶은 불순종하는 삶이다.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건 너무 길다. 그다음 말이 재미있습니다. 목사님 이런 속에서도 제가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직감적으로 아직 멀었구나, 하나님이 도수를 올리셔야 되겠구나.’ 왜 고생하고 아파하면서도 그걸 못 깨닫습니까? 뭘 배우는 게 있습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이외에는 배우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화) 쿠웨이트가 이라크에게 점령되었을 때 국무장관이 비행기를 타고 이라크 중심지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쿠웨이트를 내 놓아라” 그러니까 사담 후세인이 그랬습니다. “뭔가 그러면 약속을 달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쿠웨이트를 내 놓으면 폭격 받지 않으리라는 약속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돌아가서 그 다음날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언가를 느껴야 됩니다. 그렇게 곤고하고 고통스러우면 그간 뭘 배웠습니까? 뭐 그렇게 불손 하는 삶속에서 배울게 많습니까? 배울 건 하나입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그걸 배워야지 아직도 더 배울게 남아 있습니까? 그릇된 길로 걸어가면서 기도의 영이 마르고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 사하여지고 영혼이 파리해져 가는데 그 불손종의 길을 계속 걸어가면서 뭘 배울 것이 있냐 말입니다. 그건 정말 배우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불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패역이 그 인격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속에서도 무언가를 배운다.’라고 하는 망발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뭘 가르쳐주실 것이 있습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되고, 그렇게 살면 고통밖에 없다.’ 그것밖에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 없는데 뭘 그것을 금방 배우면 되지, 뭐 그것을 오래도록 배웁니까? 더 배우는 것이 뭐가 있느냐 말입니다. 얼마나 더 가르쳐줘야지만 돌이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지함 위에 고집, 고집 위에 하나님을 향한 반역까지 겹쳤습니다. 생명이 있겠느냐 이것 겁니다. 한두 번 그렇게 살아봐서 생명이 없고 하나님과의 교재가 단절되는 것 같고 하나님이 내 삶을 싫어하고 계신다고 생각되면 그러면서 거기서 통분히 여기고 돌이켜 서야지,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 말고 뭘 배울게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이켜 설 때에 그 마음이 후일 유익이 되는 것이지 교만입니다. 교만. 그리고 실패를 견딜 수 있는 적응력이 늘어가는 것은 원동력이 하나님을 향한 반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억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속에서도 환경에 적응하고 여건에 적응해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반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 견디나 못 견디나 보십시오. 막무가내의 이 고집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반감입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반감을 가지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장단에 춤을 추셔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되겠습니까? 왜 그렇게 오래도록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배우면서 왜 그렇게 짐승스러울 정도로 무지하냐는 것입니다. 이게 숨이 턱에 받쳐서 말이 안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노란불이 깜빡거릴 때 그때 자신의 기도생활을 점검해야 됩니다. 그런 것 점검하기에 너무 바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환난이 와도 하나님께로 피하기에는 너무 바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는데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향해 증거 합니다. 기도 없이 사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불안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 합니다. 그런데도 순간순간 오는 자극들을 하찮은 것으로 떨쳐버리고 더 견고하게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까? 위로 받고 ‘괜찮아, 괜찮아’ 그러다가 팔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것이 났겠습니까? 담대하게 ‘의사가 와서 팔 안 자르면 당신은 죽습니다.’ 하고 큰 칼로 싹둑 잘라내고 몸이 사는 것이 났겠습니까? 어느 것이 났겠습니까? 정신 차려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가장 위기 속에서 주님은 의연하게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밤이 맞도록 하나님 앞에 전혀 다른 기도제목으로 기도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