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의 능력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창19:29)
녹취자: 표명희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위력 있는 중보기도는 어떤 조건을 갖춰야 되는가? 이런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 롯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그때 사실 멸망을 받았어야 마땅했습니다. 근데 그 속에서 롯이 그의 가족과 함께 유일하게 살아남았습니다. 근데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하나님이 롯을 생각하셔서 건져주셨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심판은 굉장한 심판이었습니다. 봄뻬이 최후의 날 거기를 꼭 가보려고 하는데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근데 참 희한 하더군요 베스비어스 화산이 폭발하면서 삽시간에 확 덮친 것입니다. 그 덮치는 가운데 한꺼번에 덮치면서 사람들이 생활하던 그 모습 그대로 재에 묻혀서 화석이 되 버렸는데 에로스 관이란 곳이 있답니다. 거기에는 미성년자 입장 불가인데 전부다 모아놓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어린 소녀가 나이 먹은 사람한테 겁탈 당하다가 화산재에 묻힌 그런 것들만 다 모아 놓은 것입니다. 한 남자와 여러 여자가 함께 육체의 관계를 맺는 그 런 화석들을. 하나님을 버린 도성이 마지막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가는 최후의 길이 우상숭배와 음란입니다. 이 도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보면 하나님이 한 도시나 한 국가를 서서히 심판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이처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순식간에 심판해서 형체를 남기지 않으시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가 그랬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땅에서는 기쁨의 샘이 터지면서 양쪽에서는 물이 쏟아져서 그래서 큰 심판을 당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지진과 함께 불비가 내리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멸망하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싶은 것은 따라서 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굉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때때로는 개인 개인을 향해 깊이 배려하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연합을 중요시하게 여기십니다. 한나라가 썩었는가 안 썩었는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만드시고 나라가 망하게 만드신 것은 그들의 죄가 무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속에는 모두 불경건하고 죄가 가득한 사람만 있었느냐? 그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와 같은 경건한 사람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성을 바라보고 우시던 예수님의 슬픔은 바로 임박한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주 70년에 디도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토벌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죽은 모든 사람들이 악한 순서대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개개인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영적인 유니티 즉 영적인 한 단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갈대를 가지고 측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그 측량 받는 것이 세 가지인데 하나는 뭐냐 하면 교회가 제일 먼저 측량을 받습니다. 교회가 먼저 과연 주님의 표준에 달하는가? 못 달하는가? 재고 두 번째는 재단이 잼을 받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예배가 하나님의 갈대에 의해서 측량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을 경배하기위하여 오는 사람들을 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관심은 유니티에 있습니다. 근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셔야 되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결정을 내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이 롯은 그쪽 동내에 가서 살기로 다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브라함의 곁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쪽 동네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쪽동네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함께 심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롯이 거하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거두실 때에 하나님께서 이 롯을 생각하셨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롯을 생각하셨느냐?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두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베드로서로 들어가 보면 이 롯이 그 소돔과 고모라에 살면서도 경건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저들의 불법한 행실에 고통 받는 의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 롯을 하나님이 심판 중에 건지셨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오는 대신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셔서 이 롯을 건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둘 사이에 어떻게 이 두 언급을 조화롭게 생각해 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이런 얘기입니다. 롯이 막상 아브라함을 떠나서 물이 많아 보이고 목축하기에 좋아 보이는 그곳으로 갔지만 그는 거기에서도 하나 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건하고 의로웠다는 의미는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부패한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그랬다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창세기는 이 문제를 더 크게 아브라함의 기도에 의한 것이라고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이 롯을 위하여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심판받는 가운데서 이 롯을 건져주셔서 그 재난을 면하게 해 주셨다 그 얘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두 가지 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중보기도가 이렇게 능력 있는 중보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를 받는 중보기도의 대상을 깊이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롯은 아브라함이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키웠지만 그러나 롯은 마지막에 자기에게 보이는 물질적인 것을 위해서 이 아버지와 같은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청산했습니다. 헤어지기 전에 아브라함은 말했습니다. 자 사방을 둘러보아라. 이제 여기는 너의 양떼와 너의 가축 떼와 나의 가축 떼를 함께 먹이기에 적합하지 않다. 봐라 이 넓은 들을 봐라. 네가 먼저 택하라. 네가 우 하면 나는 좌 할 것이요.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할 것이다. 네가 보기에 가장 좋은 땅을 네가 먼저 선택하라. 이렇게 말했을 때 성큼 나는 이쪽으로 갑니다. 이쪽이 내 땅입니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껏 저를 길러주시고 친자식같이 보살피셔서 여기가지 저를 데리고 오셔서 이만큼 키워 주셨는데 원하시는 것을 먼저 택하시옵소서. 남는 곳에 제가 가서 우거 하겠나이다. 그래야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은 롯이 떠나간 이후에 깊은 외로움에 사로 잡혔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때 그러한 깊은 어려움 속에 있었기 때문에 더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롯이 그렇게 아브라함의 마음에 쉽게 얘기하면 상처를 주고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이 깊었기 때문에 상처도 크고 배신감도 컸을 것입니다. 그랬는데도 이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이 아브라함의 기도가 능력 있는 중보 기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롯을 아브라함이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도가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하여 도대체 관심도 없고 기도하면서도 이 기도 제목이 그 사람 속에서 이루어 졌는지 안 이뤄 졌는지 조차도 확인 할 수 없을 정도로 관심이 없는 속에서 계속되는 그 중보기도가 얼마나 큰 힘이 있겠습니까? 먼저 중보기도가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중보 기도하는 사람이 중보 기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기도 제목이 자기의 기도 제목처럼 안타까운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기도할 때에 중보기도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특별히 이 롯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곳에서 심판을 받고 의인이 없어서 죽어가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그는 치를 떨고, 고통스러워했을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직접 그 일을 당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고 힘겨워 하면서 이 롯의 불행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중보 기도했던 것입니다. 중보기도 받는 대상을 깊이 사랑하니까 이 기도는 더욱 살 깊은 기도가 되었고 이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육체적이지 않고 영적이면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반드시 그를 위해 기도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중보기도 해야 될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그때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 응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중보기도가 위력이 있는 기도가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은 아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중보기도를 하고 또 실수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특별히 인정받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중보기도가 능력 있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인정해 줄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 삶, 하나님을 향한 태도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이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만한 사람이 되어야지만 그가 하는 중보기도가 파괴적인 놀라운 능력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중보기도의 위력 있는 기도생활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쓰는 것이나 신앙 생활하는 것이나 믿고 있는 진리의 내용이나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나 섬김이나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때 그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런 능력 있고 위력 있는 중보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의 삶이 인정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감화를 줄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그의 기도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간절하고 집중된 기도가 될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중보기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의무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능력 있는 중보기도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려는 대상들을 깊이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있는 기도가 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해서 중보기도에 많은 간증들을 갖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