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비함과 기도의 힘
때에 내가 아하와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스 8:21)
녹취자 : 김세나
일주일동안 말씀과만 씨름하면서 정말 오래간만에 보냈습니다. 사실은 많이 쉬웠냐고 물어보는데 쉬지 못하였습니다. 하루에 4시간 정도 많이 자면 5시간 정도 자고 이렇게 말씀을 씨름을 했는데 하여튼 그렇게 잠을 안 자고 혼자 있으니까 밥 먹는 것도 식당에 가면 뭐 좀 시키면 그것 1인분 안 되요, 그래가지고 아침에 초코파이 먹고 그렇게 보냈는대도 아 정말 새로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자, 이번에는 겸비의 중요성을 느꼈는데 사실 지지난주까지는 막막했습니다. 뭘 전해야 하나. 그러다가 이제 가서 본격적으로 맞딱뜨리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요한복음 6장 68장,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그 말씀을 가지고 영혼의 싫증 문제를 전하기로 그렇게 가닥을 주셨어요. 오스트리아에서 제가 그것을 일주일동안 메모한 것, 거의 책 한권 분량인데 잃어버렸습니다. 찾을 수만 있다는 확신이 있었으면 제가 만사 재껴 놓고 오스트리아에 가서 제가 그것을 가지고 올 것인데 결국은 그것을 못 찾았어요. 그래서 그 섭리를 참 알 수가 없었는데 덕분에 제가 겸비해졌습니다. 이 주제가 내 가슴을 엄청나게 할퀴고 지나갔기 때문에 언젠가 토해놔야 하는데 할퀴고 지나간 흔적만 있지 무엇을 할퀴었는지 흔적이 없으니까 고심을 하는데 마음이 겸비해졌어요. 조금. 그런 가운데 열어주셔서 아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만약에 그것 아니었으면 철저하고 방대한 분량의 내용들이 안 나오고 그 안에서 맴돌다 끝났을 것이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간에 그 싫증, 영혼의 싫증이 육체의 게으름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그러한 깨달음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일깨워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기에서도 똑같이 그러한 경험을 에스라가 한 것이죠. 아호와 강가에서 금식을 했는데 그 금식은 집중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집중하지 않는 사역, 삶, 모든 것에 있어서 물러가는 부패는 있을 지언정 발전은 없습니다. 풍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은 모두 이 집중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드렸고 그 다음에 보여준 것은 겸비함이었습니다. 이 겸비함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겸비함은 항상 그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를 의미하는 거죠. 그래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겸손이라는 것 그 자체가 사람 앞에 서서 그 사람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면서 낮아지는 것은 겸비 혹은 겸손이 아니라 비굴입니다. 그것은 비굴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겸손은 탁월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앞에서 우리의 비참함을 깨닫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있는 것으로 가장 완벽한 모델을 보여주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범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그 창조의 본래의 선에서 이탈한 이탈한 그러한 악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악함을 깊이 이해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악이라는 것도 결국은 중요한 주제인데, 어거스틴이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총체적인 범위에서의 선으로부터 협소한 범위의 선으로 옮아가는 악이다. 모든 사람이 다 유익하지 않은 악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에게 모두 유익한 선이라는 것도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 악을 그 온전히 모범을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깨닫게 되는 거예요. 왜, 그 분이 가장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계셔야 할 자리에 계신 탁월한 아름다운 분이며 뛰어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예요. 그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 그 형상을 따라 만든 하나님을 보면서 겸비해 지는 거예요. 그게 정상입니다.
그러한 겸비한 마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익이 몇 가지가 있어요.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부당한 가치 부여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거죠.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교만으로부터 멀어지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를 공정하게 평가하지 않아요. 그러한 어리석음으로부터 그 겸비한 심령은 그런 어리석음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 자신의 존재의 가치에 대한 부당한 평가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한낯 종일 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종처럼 사용하여도 감사해요. 쓰시는 것이 감사해요. 그런데 자신이 평가를 잘못하는 거예요. 나는 레벨이 종의 레벨의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종처럼 쓰시려고 하면 반감이 생겨요. 그러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거예요.
두 번째 겸비함은 우리의 마음이 있는 그릇된 사람 때문에 엉클어진 우리의 마음의 틀들을 정돈 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겸비해 질 때 이 외에는 잠시 관심이 옮아갈 때는 있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막을 수가 없어요. 누구도 막을 수가 없어요.
(예화) 옛날에 김동길씨가 참회록을 썼는데, 참회록을 한번 읽어 보니까 그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면서 싸우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죽도록 두들겨 맞으면서 피투성이가 된 거예요. 그러면 가다가 감방에다가 집어 쳐 넣으니까 밖에서는 자기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는데 피가 막 흐르는 가운데 망신창이 되어 엎드렸는데 그 속에서 의욕이 불붙듯 솟아 오르더라는 거예요.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려서, 그 나이에. 이게 인간이란 말이에요.
어떤 순간에도 우리들이 결코 이 세상에서 겪는 환란이나 시련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움츠려 드리게 할지 모르지만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할 수 없어요. 많이 누리는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아무것도 못 누리던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에요. 신앙은 근본적으로 마음과 영혼의 종교에요. 겸비함은 이것들을 털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세상을 향한 그릇된 것들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그것들이 격렬하지 않아도 이렇게 마음이 기울면 영어로 말하자면, untuning이라 해요. tune이 흐틀어 지는 거예요. untuning이라 해요. 그래서 마음 자체가 untuned frame 이 되는 거예요. 그것들이 겸비한 마음이 될 때에 그 때에 이 틀들이 다시 조종이 되는 거죠. 새로워 지는 거죠.
(찬양) 시시 때때로 주만 봅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녹으면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릴 때, 사랑하는 것이 있어요, 그 순간에? 아무것도 없어요. 일대일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렇게 털어내버리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이 겸비한 그런 역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이런 겸비함이 있을 때 어떤 일이 생겨날까요. 하나님을 온전하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들이 늘 살아가면서 아, 인간은 인간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셔야죠. 목회하는 사람들보고 잘하는 사람들 못 하는 사람들 모두 물어봐요. 아, 어떻게 이렇게 힘든 데서 목회 하세요. 다 하나님의 은혜죠. 습관처럼 자동적으로 나와요. 중요한 것은 conviction 이에요. 그렇게 확실해야 해요.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존재다. conviction. 강력하게, 그것은 겸비한 마음이 없이는 안 되잖아요. 정말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전도사 때 더 그랬죠. 목요일이 되면 걱정이 되기 시작되고 금요일이 시작되면 두렵고 토요일이 되면 겸비해 지는 거예요. 저 돌덩이 같은 영혼들을 내일 무슨 수로 만나나. 저 강적들을. 집에서 있을 수가 없어요. 보따리 싸가지고 교회에 가서 할 말이 없죠. 천부여 의지 옵소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 가리이까.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려고 하다 보니까 더러운 거예요. 내 죄를 씻기 원하여 피 흘려 주시니 그 겸비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옵니다. 기도하는 거죠. 그러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나아가는 거예요. 거기에서 컨퍼미티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나는 지금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실지 모르지만 세월이 좀 더 지나가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참된 설교자의 길을 다행히 걷게 된다고 할 것이라면, 오늘의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한 사람이 목회를 하면서 그 사역 때문에 얼마나 거룩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이 컨퍼미티 투 크라이스트의 경험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다 내려오는 거예요. 겸비하지 아니하고는, 집중하지 아니하고는 불가능해요. 겸비하지 않고는 불가능해요. 한 초점을 향해 불붙는 마음이 없이는 그렇게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께 이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사도바울의 표현을 보면 얼마나 격렬해요. 우리가 미쳤어도 주를 위해서 미쳤고 정신이 온전해진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정신이 온전해요.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 뒤의 것은 다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간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어느 한 지점을 향해서 불타오르는 것을 보여 줘요. 그러니까 이 삶의 진한 초점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로 겸비해지지 않아요. 한명의 영혼을 놓고도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며 겸비해 질 수 있고 수십 만명을 모아놓고 목회하면서도 겸비해지지 않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정말 겸비해져서 그래서 내가 이 목회를 이끌고 간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주님이 내가 이 목회에 최대의 방해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가르시고 만약에 나를 가르시고 갈라진 내 육체 사이로 난 길을 주님이 걸어가셔서 그래서 우리의 영혼들을 변화시키실 수 있다면 정말 내 육체를 갈라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내고 싶다. 그러한 철저한 것이 필요한 거예요.
아무리 봐도 성경이 이야기 하는 선한 목자는 반드시 유능한 목자는 아니에요. 유능한 목자를 지향하지만 만들어 질 때부터 유능한 목자는 아니에요. 베드로를 주님이 삼으셨을 때, 언제 베드로가 지도자 노릇을 해 봤겠어요. 유능함이 아니에요. 차이는 뭐냐 하면 선한 목자에게는 선한 마음이 있어요. 타는 듯한 마음이 있다 이거예요. 아주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그게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선한 목자인가, 삯꾼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갈림길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매 순간 마다 겸비해져요. 그래서 정말 겸비해져요. 그런데 그런데 우리들이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진공상태에서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가운데 그렇게 깊이 겸비해지는 것을 불가능해요.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이 겸비해 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셔요. 상황을 제공하셔서 그래서 그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겸비해 지도록 만드시는 거예요. 이게 그 상황이에요. 아하와강에서 소식이 들려오는데 고속도로 뚤려서 무슨 아파트 다 지어놓고 입주하러 가는게 아니라 이야기에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 때 그러한 상황에서 잠시 하나님이 홀로 에스라 홀로 버려진 것처럼 그런 상황을 만드시는 거예요.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의 섭리가 깃들여 있는 거예요.
(예화) 나는 전도사 때는 아니었는데 처음에 그 회심하고나서 두 번째 간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어요. 총각 집사로서, 25, 24. 25살 이럴 때였는데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목사님이 주일학교를 나한테 맡겨줘서 정말 열심히 했죠. 은혜 받고 나서 그 때는 거의 저는 거기에서 목회의 기본기를 거의 다 배웠어요. 나는 뭐 전도사도 아니고, 전도사 주지도 않았어요. 교회가 조그마해서. 여름 성경학교 때 지하에 애들 모아 놓고 십자가 설교하고 기도하면 아이들이 막 얼마나 놀랍게 회개하는지 몰라요. 바닥에 막 아이들이 눈물로 이렇게 질퍽질퍽 할 정도로 걸어가다가 미끄러질 정도로 말이지. 그렇게 아이들이 한번 기도회를 인도하고 나면, 온 땀이 전부다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그렇게 은혜를 주셨는데 그 사실은 뭐 집도 없고 가정도 없고 연애도 안 하고 그랬으니까 진짜 교회 밖에 몰랐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아주 그냥 너무너무 가슴 아픈 사건을 경험했어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내가 맡아가지고 주일학교를 하는데 목사님이 어느 순간에 일언방구도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 반을 뚝 잘라가지고 그 초등부 부장을 임명을 했어요. 유년부 부장을 임명을 했어요. 그 친구도 총각이었는데 정말 제가 왠만하면 동의를 하겠어요. 맨날 저녁마다 술 먹고 담배피우는 애거든요. 교회 와가지고 청년 애들 교구 가서 담배 피우고, 가다가 술 사 먹고 이러는 애인데, 걔를 부장이라고 한 거예요.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면도칼로 이 어린아이의 가슴을 긁는 것 같아요. 부분적으로는 성령께서 주시는 고통이었고, 부분적으로는 나의 아집에서 오는 고통이었을지 모르는데 그 사건을 겪으면서 내가 깨달은 거예요. 뭐냐 하면 내가 여태까지 이 교회에서 봉사했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그런 마음이 들어요. 내가 하나님보다는 이 목사님을 얼마나 많이 의지했는가. 그리고 목사님이 칭찬해 주시고 목사님이 인정해주고 이러한 것들을 얼마나 엔조이하면서 살았는가를 깨달았어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절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셔요. 그러면 나중에 아주 쓸모없는 사람에게 종속된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환경을 허락하셔요. 그래서 가장 뛰어난 영적인 그 세계를 지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처참하도록 하나님 의지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위기를 주셔요. 위기를 주셔요. 그런데 처음에 어려움이 올 때에 우리의 영혼은 안일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늘 있는 일일거야. 한쪽에서는 위기라고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리고 그릇된 안전을 자꾸 취하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그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한없이 겸비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내가 섬기고 있는 조그만 부서가 어느 한순간에 중국의 대륙보다도 더 크게 느껴지고 내가 데리고 있는 몇 명 안 되는 지체들이 온 인류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분히 낮아지게 되는 거예요. 겸비해 지게 되는 거죠. 잘 들으십시오. 영혼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는 목회자의 손에서 영혼들의 가슴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를 짓밟고 넘어와요. 죽은 목회자를 밟고 넘어와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흘러가는 거죠. 그렇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역사에요. 그래서 십자가 지는 길이에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겸비해져요. 더군다나 하나님이 싸인을 보여 주실 때, 네가 하는 사역이 건강하지 않다. 네가 하는 사역을 통해서 나는 너와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주고 싶다. 그러실 때, 그 때 깊이 겸비해져야 해요.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아까 말씀드린 세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마음으로 그래서 목회자의 눈은 항상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눈일 수밖에 없어요. 왜, 정말 그런 영혼들이 보여요. 돌아오면 기쁨 때문에, 슬픔 때문에.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되는 것이에요. 이번에 있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봤더니 이제 7300일 남았어요. 사역할 수 있는 시간이. 정확하게, 7300일. 그래서 그 183칸을 이 쪽에 칸을 내면 이 쪽으로 40칸을 내고 모눈종이를 만들어서 하나씩 지우면 인생 70이 끝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순식간에 지나가요. 그래서 요새는 엎드려 기도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게 그거예요. 하나님, 내 나이 50입니다. 살아온 세월이 너무 남보다 더 이상 배 이상 몸부림치며 살았지만 바람을 잡는 것과 같았어요. 이제 여러분들 정말 나 같은 전처를 밟지 말고 정말 세월을 아껴 쓰면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그러한 인정이 없는 삶을 살지 말고 기쁨을 이기시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아도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그런 겸비한 낮아짐으로써 그렇게 철저하게 낮아져서 그렇게 살아야 해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하루에 한 번씩 우리가 영혼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마음이 무너지면, 영혼이 서요. 일어선다고요. 그 목회자가 일어서면 그렇게 가시 고기처럼 일생 내내 주님께 피와 살을 드리고 사악한 영혼들에게 뜯기고 또 신실한 영혼들에게는 나누어주고 그렇게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목회자의 인생이에요. 그 날까지 이 겸비는 우리의 친구가 되어야 해요. 항상 친한 이웃처럼 되어야 해요. 그래서 겸비해질 이유를 날마다 발견해야 해요. 그렇지 않아요. 교회 문을 열고 탁 들어갈 때,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런 것을 경험해 본 적 없어요? 하나님 내가 목회자입니다. 하나님 내가 목회자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