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도회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 20:36-38)
녹취자: 원수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전도여행을 갈 때 밀레도라는 곳을 거칩니다. 옛날 철학자 탈레스라는 사람이 살았던 곳이고 그리스 로마 시대 때 아주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 장소였고 항구 도시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밀레도에 갔을 때 이미 로마시대 때 지어진 일만 팔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원형극장에 갔습니다. 일만 팔천 명이 거기에서 부르는 노래나 연극의 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고 하니까 대단한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유언적인 설교를 남기게 됩니다. 전도여행에서 대부분 바울의 설교는 불신자들을 향해서 준 설교였는데, 이 설교는 신자들, 그 중에서도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준 연설이었습니다.
왜 에베소에서 밀레도까지, 물론 그 당시에 마차를 타거나 걸어왔던 것으로 보면 엄청나게 먼 길이지만, 할 얘기가 있으면 다 하고 오지 왜 중간에 이 사람들을 불렀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아서 두고 온 교회들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고통과 염려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게 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역을 늘 열심히 했지만 소아시아에 들어와서 했던 말씀 사역은 바울의 생애에서 시간적으로도 3년이 넘는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는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올 때부터 엄청난 핍박이 있었고 하나님의 에베소에서의 위대한 부흥이 아니었더라면 교회가 설 수 없었을 것이다, 겸손과 눈물과 오래 참음으로 다 견디면서도 유대인들의 간교한 꾀의 시험을 끊임없이 당하고, 끊임없이 눈물로 각 사람을 일깨워서 훈계했다, 내 삶을 봐라 내가 너희 중 누구에게 금이나 은이나 의복을 내가 탐한 적이 있더냐, 나는 내 쓸 것을 나 스스로 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다’ 이렇게 자신의 양심에 꺼림이 없이 모두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억누르는 근심이 있었습니다.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와서’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단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가고 난 다음에 목자의 탈을 쓴 사악한 자가 와서 교회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가 가고 나면 리더십의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거나 핍박을 받거나 하면서 양떼들에게 커다란 손해를 끼칠 거라고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이 알았습니다. 상황을 두고 판단을 한 것일 수도 있고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평신도 중에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여러분 중에서도’ 에베소교회에서 온 장로들입니다. ‘제자들을 끌어들여’ 제자는 교인입니다. ‘제자들을 끌어들여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목숨을 걸고 목회를 했다고 그러는데 결과가 왜 이렇게 후지냐’ 그게 교회입니다.
(예화) 박윤선 목사님이 세상에 없는 신학자로 추앙을 받고 존경을 받았지만, 그 분 제자였던 박기천 목사님을 수시로 불러서 눈물을 글썽거리시면서 “박전도사, 우리 준호 좀 어떻게 해 봐.” 아들이 아직 회심을 안 했습니다. 끝까지 회심을 안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직 회심을 안했었습니다. 의외로 아주 경건한 목회자의 자녀들이 신앙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용기 목사님이 50대쯤 되셨을 때 교역자들에게 누구든지 우리 아들 회심시켜서 신앙이 들어가게 해 주면 자기가 모든 걸 해 주겠다고 했답니다. 지금 국민일보 하다가 감옥도 가고 사고 친 그 아들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데서 목회자들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신약 성경의 절반을 쓰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깊은 학문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웅장한 우주가 보였던 것입니다. 물질에 있어서 깨끗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가정도 없었으니까 자식들 챙기느라고 교인들 신경 쓰게 했을 리도 없습니다. 그랬는데 마지막에 결국 이렇게 우울한 결론을 내리면서 아시아 지방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르니까 그 먼 길을 떠나서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오늘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하고 아무 상관이 없지만, 결국은 교회를 찢어놓고 분열을 일으킬 사람들이 그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목회자건 성도건 누구도 교회가 너무 아름답고 좋아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러한 약점들을 남겨놓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결국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것, 그 몸으로 사는 것인데 거기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에서 실패하는 사람입니다.
(예화) 어제 장로들을 모아놓고 특별히 설교하고 싶은 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이 본문이 떠올라서 35분 설교를 했습니다. 가서 싸우지 말라고. 목회자가 한없이 부족하고 그래서 정말 존경이 안 된다고. 그것도 운명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공부를 안 한다, 그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설교가 은혜가 안 된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인격이 좀 추루하다, 그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합니다. 가혹하지만 그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입니다. 좋은 설교, 잘 갖춰진 교회의 교육체계, 인격적인 교역자 등 다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교회됨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36절에 보니까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그랬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이 “우리 모두 같이 기도하자”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을까요. 이제 목회자가 떠나가고, 떠나가는데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교인들의 마음이 가난해졌고 그래서 ‘다 크게 울며’ 그랬습니다. 그냥 흐느낀 게 아니라 소리를 내어서 울고 그 다음에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주후 4세기 정도까지 교회에서 성도들의 인사가 키스였답니다. 예배가 끝나면 서로 키스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목을 끌어안고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사랑. 생각은 다르고 결국은 마지막에 자기가 세워서 일꾼 만든 사람들이 앞으로 교인들을 끌어들여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할 그런 모든 전망들을 보이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끌어안고 깊이 사랑하고 그런 것입니다.
(예화) 잠깐 동안에도 자기네 목사님이 인격이나 신앙이나 너무 후지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두 완벽한 목회자가 있다고 치자, 그럼 당신을 왜 장로로 세우겠느냐?’ 물론 이것은 속으로 혼자 얘기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단점이 많고 저런 사람이 교회의 일꾼이 될까?’ ‘그런 사람들이 모두 완벽한 교회면 나 같은 사람을 담임 목사로 투표해줬을까? 더 훌륭한 사람을 찾지.’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오늘 이 교회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들과 헤어져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순교의 길을 가려고 할 때 깊이 울며 사도 바울의 목을 끌어안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보여줘야 할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 일치 속에서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 때로는 부딪히고 꺾이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