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열렬함(Fervency)
일시적으로 열렬한 기도로는 충분히 죄를 죽이지 못한다. 오래도록 그 열렬함을 유지하여야만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다. 순간의 열렬한 기도로 죄를 움츠러들게 하거나 정신을 잃게 할 수는 있지만 치명적으로 공격하여 죽이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화를 위한 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열렬함과 지속성을 함께 숙제로 부여받게 된다. 오늘날 신자들이 열렬한 기도를 계속하고자 하여도 실제에 있어서는 너무나 많이 그러한 열렬함을 쉽게 잃어버리고 다시 예전의 능력 없는 기도 생활로 돌아간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I. 열렬한 기도를 잃어버리는 이유
신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하여 성화의 효과를 가져오는 열렬한 기도를 잃어버리게 된다. 첫째는 영혼의 싫증 때문이고, 둘째는 실천의 규칙이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마음을 쏟지 않기 때문이고, 마지막 넷째는 힘없는 짧은 기도의 습관 때문이다.
A. 영혼의 싫증
첫째로, 영혼의 싫증 때문이다. 전혀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어도 열렬한 기도의 은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너무나 소수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은혜를 잃어버린 채, 고장난 영혼 속에 깃들인 죄가 이루어 놓은 고통의 열매들을 부여안고 냉랭하게 살아간다. 사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있어서 총체적인 싫증 속에 빠져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 정해진 기도 시간도 없으며 기도의 의무 자체도 무시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살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기도의 의무를 총체적으로 무시한 채, 정해진 기도 시간도 없고 기도의 실천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마음 안에 죄가 득세한 사람이다. 그가 외면적으로 어떤 경건한 삶을 흉내 내고 있든지 간에 그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건강한 성화의 삶을 이어가는 신자의 뚜렷한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과 자기 깨어짐이다. 교회에 착실히 출석하고 있더라도, 교회에서 어떤 중요한 직분을 맡아서 섬긴다 할지라도, 예전에 받은 말씀의 빛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지금은 은혜에서 멀어져 부패한 사람이다. 그의 마음의 세계는 죄에 대한 모든 저항력을 상실한 상태이다. 그리고 영혼이 그런 상황에 떨어지기 전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 열렬한 기도 생활로부터 물러가는 일이 먼저 있었다.
B. 실천의 규칙이 없음
둘째로, 정한 규칙이 없는 기도 생활 때문이다. 신자가 기도한다 할지라도 기도 생활에 있어서 스스로 마음에 정해 놓은 규칙이 없으면 열렬한 기도 생활에서 물러나기 쉽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가 되면 하고 안 되면 안하는 사람들로, 기도를 안 해도 기도에 대한 간절한 필요성을 지식적으로 거의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까지 미끄러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영혼의 갈급함 같은 것은 전무하다. 스스로 기도하지 않으며,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졌는데도 갈급할 줄 모르는 질병적인 상태로까지 들어가고 만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불은 의무라는 화로에 담길 때,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직도 기도의 실천을 위한 자기 규범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너진 기도의 세계를 다시 회복할 기회를 주셔도 활용하지 못하고 또 다시 뒤로 물러가고 만다. 스스로 의무를 부과하여 기도하는, 정해진 기도의 실천 규칙이 없는 신자의 영적 생활은 견고함에 이르기는 어렵고 실패에 이르기는 쉬운 것이다.
C. 마음을 쏟지 않음
셋째로, 마음을 쏟아 붓지 않는 형식적인 기도 생활이다. 비록 기도 생활의 규칙이 정해져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마음을 쏟지 않으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를 할 수 없다. 새벽 기도, 혹은 저녁 기도라는 형식이 아무리 굳건하게 남아 있다 할지라도, 그 정해진 기도 시간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기도 시간에 오랫동안 엎드려 있기에 남들은 굉장히 많이 기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기도 가운데 죄를 죽이는 영혼의 작용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은 기도의 형식은 있으나 기도의 능력은 사라진 상태이다.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의 실천이 없이 육체적인 성실함으로 기도 시간만을 지키는 사람들에게서 죄가 죽는 은혜의 역사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가 아니면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기도자 안에서 역사하는 죄를 죽이는 역사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너진 은혜의 세계를 다시 세우는 회복의 역사도 없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진실할 수도 없고 간절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을 수도 없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마음을 드리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특히 신령한 의무일수록 심령의 헌신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무가 가져다주는 신령한 효과를 누릴 수 없다. 기도는 이러한 사실의 대표이다. 마음을 쏟지 않는 기도 생활이 습관화됨으로써 신자 안에 죄가 쉽게 깃들이게 되고, 한번 깃들인 죄는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D. 짧은 기도
넷째로, 아주 짧은 시간밖에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기도 시간을 약속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며, 기도 가운데 마음이 실리기도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밖에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신자 안에 있는 죄를 효과적으로 죽일 수가 없다. 마음 쏟는 깊은 기도는 신자로 하여금 오래도록 기도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런 기도 속에서 신자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죄는 효과적으로 죽임을 당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음을 실은 기도라 할지라도, 아주 잠시 그렇게 기도할 뿐이라면 이러한 일이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죄를 죽인다 해도 설 죽일 뿐이다. 죄가 칼에 찔리기는 했는데,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칼에 찔린 채 날뛰는 것처럼, 기도를 하면서 죄의 기세가 누그러지는 것을 경험하는 대신 도리어 죄가 은혜의 자극을 받아 강력하게 날뛰는 것을 본다. 뜨겁게 기도하는 것 같은데도 성화에 있어서 진전이 없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열렬히 기도할 수 있으나, 그것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장시간 깊이 기도할 수 없도록 계속 방해를 받기 때문에 점차 열렬히 기도할 수 있게 하는 영적인 욕구를 상실하게 되고 만다.
올바르지 않은 기도의 실천은 성화의 진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올바른 기도라고 할지라도 오래도록 꾸준히 실천하지 않으면 죄 죽임의 능력이 약화된다. 성경을 보면, 짧고 열렬한 기도의 실천으로 커다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러나 열렬하기만 하면 짧은 기도라 할지라도 모두 그러한 능력을 불러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순간만을 본다면 그들의 기도가 짧았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그렇게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불러올 수 있기까지의 지속적이고도 긴 강열렬한 기도 생활이 있었다. 그래서 기도의 사람 E. M. 바운즈(Edward McKendree Bounds)의 지적은 두고두고 가슴에 새길 만하다. “개인 기도는 짧아야 하겠고, 특히 대표 기도는 반드시 짧고 간결해야 한다. 종종 예정에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즉각적으로 기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영적 교제에서 시간의 길이는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특성이다. 하나님과 대면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모든 성공적인 기도의 비결이다. 강한 능력을 느끼게 하는 기도의 실천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하나님과 많은 시간을 교제하는 데서 오는 산물이다. 짧은 기도로도 충분히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드려진 오랜 시간의 기도의 효과와 요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짧고 능력 있는 기도는 오래 지속된 보다 강력한 투쟁으로 하나님과 씨름하여 승리한 자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기도 생활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열렬한 기도에 많은 시간을 헌신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를 통하여 자기 안의 죄는 죽고, 마음이 성결해지며, 기도자 자신은 변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II. 열렬한 기도생활
A. 당신의 기도 생활은 열렬한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때 중에서, 마음이 출렁거리면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최근에 거룩한 슬픔이나 갈망으로 뼈아픈 통곡의 눈물로 혹은 신령한 기쁨이 주는 감사의 눈물로 자신의 기도 자리를 흥건히 적신 적이 있는가? 가장 최근의 경험이 언제인가? 성령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의 기도의 영은 마치 많은 물을 가득 담고 있는 댐과 같다. 수문이 열리면 거침없이, 누구도 막을 수 없게 쏟아져 나온다. 그러므로 열렬히 기도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기도가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치 지하수를 끌어올릴 때 수맥을 건드리자마자 물이 하늘 높이 분출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마음속으로부터 기도가 용솟음치며 터져 나온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그런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 그들의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갈망보다는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일쑤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매일 기도해도 그렇게 열렬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때가 거의 없는데, 나의 기도 생활은 아무것도 아닌가?” 이러한 반문에 대하여 이렇게 답하고 싶다.
기도에는 지성적이고 관념적인 기도가 있고,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기도가 있다. 전자는 우리가 생각으로 기도하고 우리의 말로 하나님께 우리의 구할 것을 아뢰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인 경험이 동반되지 않는 관념적인 기도이다. 마음 깊은 곳의 움직임이 없는 냉랭한 기도, 의무적인 기도의 실천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기도는 그 안에 영적인 기운이 없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실천 과정에서 죄를 죽이는 신령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후자는 열렬하고 뜨거운 기도이다. 의무감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의 실천이 아니라 내적인 욕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는 전 인격적인 체험을 동반한다. 그런 기도의 실천 안에는 영혼과 마음의 틀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기도에 관하여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쏘자. 쏘자. 하늘 높이 우리의 기도의 활을 쏘자. 우리 마음의 시위를 떠난 기도의 화살이 새들 날아다니는 첫째 하늘을 지나고, 악한 영들이 권세 잡은 둘째 하늘을 가로질러, 거룩하신 하나님 보좌가 있는 삼층천에 이르도록. 오늘도 힘차게 기도의 활을 쏘자.”
바로 여기에 교회 역사 속에 살았던 기도의 사람들의 영적인 비밀이 있다. 우리와 꼭 같은 성정을 가진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하였고, 전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기를 추구하였다. 그들은 땅엣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대신에 위엣것을 사모함으로 그 분의 은혜를 갈망하였다. 그들의 지성은 경건한 명상과 신령한 욕구, 하늘엣것을 바라는 목마름으로 가득 찼고, 그래서 그들의 기도의 실천은 열렬하였다. 기도 속에서 그들은 더욱 거룩한 갈망의 불을 지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그 갈망은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타올랐다. 이 모두 기도의 열렬함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떻게 기도의 사람이 되는지 생각해 보라. 열렬함이 없이 머리에서 맴도는 지식적이고 관념적인 기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지 않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실천으로는 일평생을 기도해도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기도할 뿐이다. 그러나 열렬한 기도는 먼저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를 하나님 앞에서 열렬한 사람으로 만들고, 그래서 토혈(吐血)의 삶을 살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있어서의 열렬함은 초기적 신앙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영적으로 깊이가 더해 갈수록 그런 열렬함이 점점 사라지게 된다는 식의 바보 같은 생각을 한다.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 정서적인 열렬함이나 마음 쏟아 부음은 결코 신앙의 초보적 증상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참된 기도의 진수이다.
B. 열렬함의 기원은 성령님
여기에서 열렬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육체적인 열렬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싣지 않은 채 고성으로 부르짖는다든지, 아니면 손바닥을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육체적 열렬함의 기도 행위들의 가치는 높게 평가될 수 없다. 마음을 바치는 기도가 더욱 중요하다. 물론 억제할 수 없는 내면의 욕구가 있을 때 신자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기도하셨다. 그렇다고 묵상 기도만을 좋은 기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온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기도할 때 영혼의 간절한 열렬함으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이다.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듯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을 길어 올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이다.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이 육체적으로 열렬해지고자 몸부림을 치는 기도 행위는 순결한 영이시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기도의 실천이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고성의 기도, 자신이 드리는 기도의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중얼거리는 방언 기도로 대부분의 기도 시간을 채우는 것은 참된 기도의 열렬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기도의 열렬함이란 기도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이다. 따라서 열렬한 기도란 마음의 피어린 펌프질을 통해 우러나오는 마음 깊은 곳의 사연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열렬함의 정체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의 보다 완전한 연합을 위한 진지한 열중이자 거룩한 열의로서, 하나님을 향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열렬함의 기원은 무엇일까? 이 열렬함의 기원은 성령님이시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는 성령님을 매개체로 해서 하나님의 인격과 교통하게 된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하실 때,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은 우리의 죄와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용은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면, 이전에는 한없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우리의 생각들은 덜 중요해지고 대신 하나님의 생각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내 인생과 내 마음과 내 신앙을 보게 된다. 예전에는 내 감정과 이익이 훨씬 더 중요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생각을 더욱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내 뜻이 훨씬 더 중요했는데,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고 소중한 일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진다. 깊고 열렬한 기도의 사람이 순종의 사람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C. 사모하는 자에게 부어지는 열렬함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기도 속에서 열렬해지는 것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효과라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성령님께서는 간절하게 기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렬하게 만드신다. 즉,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 드려서 기도하고자 하는 사모함을 가지고 그렇게 실천하려는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써 그들의 기도에 열렬함을 부어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열렬한 기도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없이 기도가 되면 하고 안 되면 말겠다는 식의 자세를 가진다면 이러한 열렬함에 이를 수 없다. 이처럼 성화의 영역에 있어서는 성령님께서 항상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역사하시는데,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III. 열렬함에 대한 그릇된 접근
그러나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그렇게 열렬해지는 비결이 무엇인가?” 이때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된 선택이 바로 기도의 실천에 광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다.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화하여 기도에 있어서 열렬해지는 수단으로 삼는 것도 바로 이런 시도이다. 그래서 마음을 싣지 못한 채 단지 큰 소리로 기도한다든지, 의미도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한다든지, 기도 속에 고행적인 요소를 도입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기도의 영역만큼 성령과 악령의 대립이 첨예한 곳도 없다. 그래서 기도의 실천 속에서 악한 영들의 역사를 경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열렬함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에 대한 참된 지식이 부족하거나 그릇된 방식으로 열렬해지고자 육체로 힘을 쓰는 것은 우리를 점점 참된 기도의 비밀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IV. 열렬한 기도에 이르는 길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열렬하게 하신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오류에 빠지지 않고 순종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을까?
A. 정직한 기도
첫째로, 정직의 빛이 필요하다. 정확하게 말해서,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성찰하는 정직함이 필요하다.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므로 열렬하게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진실해져야 한다. 과거에는 어떻게 살았든지 지금 마음을 쏟아 붓는 열렬한 기도를 하고 싶으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지적받는 일에 솔직하여야 한다. 그것에 대하여 정직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결국 진실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며, 그 앞에서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진실한 사람들은 대부분 온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그가 오늘 진실해진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 과정들이 성화의 동기가 되는 가운데 삶이 점점 온전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사람됨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신자가 거의 기도하지 않을 때, 기도의 영을 거의 잃어버린 채 총체적인 게으름에 빠지게 될 때, 결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지 그의 상태가 망가져 가고 있다는 것과, 기도에 태만한 것이 영혼의 적신호라고 하는 것과, 그 기도의 태만함으로 말미암아 몰려오게 될 영혼의 두려운 재앙과 위기에 대해서 깨닫게 하신다. 이때 사용되는 가장 주된 수단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이미 은혜의 세계가 많이 무너지고 죄의 지배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이 아예 들리지 않거나, 또 들린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상태에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버린다든지, 혹은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두워진 영혼이 빛을 받는 것인데, 그들은 그런 기회 자체를 자꾸 피한다. 그리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도 거기에 정직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반응해서는 결코 기도의 열렬함에 이를 수 없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그런 이들의 기도를 열렬해지게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해지고 진실해지는 것이다.
B.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
둘째로, 마음으로부터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마음의 욕구가 충분히 반영된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한다.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마음 깊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기도 시간이 입술의 기도로 채워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도자는 죄를 죽이는 데 있어서 효능을 나타내는 열렬하고도 신령한 기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따라서 기도를 할 때는 항상 많은 기도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머리에 떠오른 기도의 제목을 마음에 잠기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기도가 되어서 그 기도 내용에 자신의 진액이 피같이 배게 하여야 한다. 기도의 은혜가 메마른 상태에 있을 때, 처음에는 잘 안 되겠지만 몇 번에 걸쳐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기도의 열렬함에 불을 붙이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고 기도하면, 딱딱하게 굳어졌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동화되어 있던 자기 안의 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까지 인내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는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라. 그분은 진액을 쏟아 부으시면서 기도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씨름하는 장면으로 표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 제목이 있으면 그것을 그냥 입술로만 흘려보내지 말고 마음의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기를 애써야 한다. 뜻도 없고 마음도 실리지 않은 채 암기된 상태로 흘러나오는 기도의 공식화된 수사어구들은 모두 기도의 영을 말리는 것들이다. 기도 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마음을 실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지배 아래 있으면, 늘 자신의 기도의 언어에 마음을 쏟아 부어서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가 솟구치고 쏟아져 나오는 과정을 통해서 기도가 강력한 힘을 얻게 되면, 하늘 보좌로 살처럼 쏘아 올려진다. 또한 마음을 길어 올리는 펌프질을 통하여 내면의 더러운 죄들이 죽기 시작한다. 그런데 입술로만 기도하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미 마음의 펌프 자체가 녹이 슬어 버렸다. 그래서 굳어진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차가운 거절감과 거리감으로 메아리 되어 돌아온다.
이런 경우, 처음에는 신음 소리가 날 정도로 기도하기가 너무나 힘이 든다. 물론 그렇게 기도가 안 될 때 쉽게 기도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은 힘들 이유가 없다. 그러나 기도가 안 되는데도 마음으로부터 기도하려고 몸부림칠 때 기도자는 내적으로 많은 고통을 경험한다. 인내로 자신의 악한 고집에 맞서다 보면 탄식이 절로 나오고, 가슴은 금방 오그라들 것처럼 조여 오며, 등에 땀이 맺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를 다 버리시기까지 낮아지신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하실 때마다 자신의 진액을 쏟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만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그렇게 기도하셨다. 빈 들에 엎드려서, 광야에 홀로 서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그렇게 기도할 수 없는 세상을 위해 헌신하셨다. 우리의 기도 생활은 어떤가? 쏟아지는 마음의 피도 묻히지 않은 채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기도 제목들을 입술로 허공에 날려 보내고 있지 않은가? 아예 언어조차도 잃어버린 가운데 죽은 듯 엎드려 시간만 보낸 적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와 얼마나 거리가 먼가? 우리의 기도가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타오를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시대와 조국교회를 위한 주님의 마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C. 온전한 믿음
셋째로, 온전한 믿음으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성경은 믿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함께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서의 믿음이고, 또 하나는 믿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으로서의 믿음이다. 두 가지 관점 모두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성찰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본질을 주목하도록 만들어 준다. 기도 실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우리의 죄를 돌이키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변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기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선행 조건이다. 누구도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없이는 믿음을 행사할 수 없다(요 3:8).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진실하고 열렬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깊이 생각하고 그 사실을 기도의 실천에 적용할 수 있게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도 믿음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많은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간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그러므로 기도의 열렬함의 기초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뢰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만이 기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진지하고 열렬한 기도의 실천 속에서 우리가 성령의 작용을 통하여 순결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곳에도 소망이 없다는 절대 의존적인 믿음의 행사가 기도를 실천하는 동안 계속해서 우리를 주장하여야 한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에는 항상 하나님만 바라는 마음의 가난함이 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자의 열렬함은 모두 허위이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의존의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열렬함은 모두 이교적이고 자의적일 뿐이다. 마치 바알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신을 부르며 몸에 상처를 내었던 것같이 말이다. 그러므로 기도에 있어서 신적인 열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도자가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만을 앙망하는 경배자들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그분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총이 자신의 존재와 삶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믿음, 자신은 공로 없으나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그분이 자신을 긍휼히 여겨 주시리라는 믿음이 열렬한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D. 간절한 기도
넷째로, 간절하게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과 열렬함은 다르다. 기도에 있어서 열렬함은 맹렬하게 뜨거운 것을 의미하고, 간절함은 자신의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지길 바라는 하나님을 향해 매달리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참된 열렬함 안에는 언제나 간절함이 있고, 지속적인 간절함은 열렬함을 불러온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고 기도의 은혜가 충만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한다. 나와는 아주 먼 관계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심령의 아픔과 연약함이 내게 전해진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내 마음이 아프며, 그의 고통을 내 것처럼 여기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된다. 이는 그 기도 속에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가 그러한 간절함을 죽인다.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엉클어진 마음으로는 간절해질 수 없다.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고 기도의 영으로 충만할 때, 그에게는 사소한 기도 제목이라는 것이 없다. 모두 다 간절하고 열렬히 기도할 수 있는 제목들이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고 그래서 온전한 신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열렬한 기도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를 생각해 보라. 어떤 기도 제목이 사소하다는 것은 객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은혜 안에 있는 기도자의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아무리 작고 사소한 문제라 할지라도 절실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 자체가 절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면 좋고, 무시하시면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제목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간절한 기도의 실천 속에서 기도자의 마음의 틀은 재편되기 시작한다. 간절한 기도의 반복을 통하여 주관적으로 붙들고 있던 죄는 영혼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파악되기 시작하는데, 마음은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바치는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성령님께서는 기도자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시고 마음을 거룩한 방식으로 고양시키신다. 그리하여 본성을 따라 움직이던 육체(natural flesh)를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 육체(spiritual flesh)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1. 간절함의 정체
그러면 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간절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가 어떤 기도 제목을 가지고 간구할 때에는 항상 그에 대한 응답을 소망한다. 그러나 기도를 실천하는 중에는 그런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 계속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은 우리로 하여금 응답해 주실 것을 믿지 못하게 한다. 간절함은 그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응답의 소망을 붙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이다. 그러므로 간절함은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존재와 성품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그렇게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 안에 있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믿음보다도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관한 믿음이다.
가엾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갔는지를 기억해 보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25-30). 여인은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그것은 간절한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그러한 반응은 딸의 치유를 바라는 여인의 소망에 충격적인 장애였다. 그녀의 모든 희망을 뭉개 버리는 발언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뭐라고 말했는가? "맞습니다. 그렇지만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주님의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내게 주시면 내 딸은 낫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 이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서 기도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의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과 인격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 믿음을 붙잡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간절함이다. 그렇게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기도를 도우시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께만 강력하게 달라붙어서 연합된 그 기도의 열렬함은 사람이 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통상적으로 아무나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도우신다. 이것이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이 가져다주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때 그 기도 응답의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상황은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생겨나기 전까지만 간절한 것은 우리를 성화시키는 능력 있는 기도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간절할 수 있을 때까지만 간절해지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간절함이 아니다. 진정한 간절함은 그것을 지속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이다(롬 4:18).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응답을 바라는 간절함을 유지할 때, 그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은 성결하게 되고 내면의 죄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기도의 실천에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이 요구된다.
V. 왜 열렬함이 필요한가?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간절하고 열렬해져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신자 안에 있는 죄의 특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것은 대담함과 광기와 맹렬함이다. 그런데 그 맹렬함은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은혜의 세계를 공격함에 있어서 가장 잘 드러나는 특성이다. 죄는 우리의 영혼에 직접 달라붙어서 맹렬하게 공격을 한다. 아직까지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은혜들을 고갈시키고 자신의 지배력을 견고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말이다. 불이 났다고 소방서에 전화를 하면 소방서에서 무조건 수 십 대의 소방차를 몰고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불이 났는지를 물은 뒤, 제일 먼저 화재진압 지휘본부차가 소방차를 이끌고 출동한다. 이어서 화재의 크기에 따라 소방차가 더 이상 안 오기도 하고 수십 대의 소방차와 사다리차, 심지어 소방 헬기까지 동원되기도 한다.
죄를 화재라고 생각해 보라. 죄가 그런 맹렬함을 가지고 우리를 공격한다면, 우리가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로 죄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으면 죄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은혜들을 모두 잠식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공급되는 은혜의 통로들도 막아 버릴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2). 이처럼 죄는 우리의 영혼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우리를 완전히 무장해제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대항하는 우리의 무기는 바로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열렬한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일 수 있다.
성령님께서 죄를 죽이심에 있어서 가장 즐겨 사용하시는 도구가 바로 그러한 진실하고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의 실천이다. 기도를 통하여 거룩해지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자기 안에서 발견된 죄와 더불어 싸우려고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진실해지지 않고 어떻게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볼 수 있을까? 우리가 간절하지 않고 어떻게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열렬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맹공격하는 죄의 맹렬한 작용을 파할 수 있는가? 죄는 우리를 향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공격하는데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친화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 공격의 맹렬함을 파할 수 있는가?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를 지속할 때 그때 비로소 실제적인 죄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정직해지고 평판 좋은 사람이 된 것이 곧 죄와 싸워서 승리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적인 생각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내면의 죄를 죽이지 않고도 도덕주의에 의하여 길들여진 짐승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고, 이념의 머슴이 되어서 자신의 신념에 충성하기를 하나님께 충성하기보다 더 충실한 사람들도 많다. 그렇게 죄의 맹렬함에 대항하여 마음을 쏟아 붓는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는 치열한 공격을 퍼붓는다. 그렇게 진실하게 간절함으로 열렬히 드리는 기도는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처럼 힘있게 올라간다. 이렇게 간절하고 열렬한 믿음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의 전쟁터에 은혜의 원군을 보내어 죄에 지던 영혼의 싸움의 전세를 뒤집어 놓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주신, 은혜로써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A. 예수님의 열렬한 기도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항상 자신의 진액을 모두 쏟아 부으시며, 간절함으로 열렬히 기도하셨다. 성경은 말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이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의문을 던져 준다. 우리에게는 죄가 있고 게으름이 있고 부패성이 있어서 입술의 기도와 마음이 다르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을 깨뜨리는 자기 깨어짐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도는 간절하고 열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죄와 부패성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간절하게 피어린 통곡의 기도로 온 생애를 사셨을까? 죄가 없으시고 죄를 지으실 수도 없으신 주님께서 대체 왜 그렇게 뉘우치는 죄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가슴을 찢는 간절함과 열렬함으로 기도하셨을까?
이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미루어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가슴을 찢는 간절한 기도는 모두 자신 안의 죄와의 싸움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죄인들인 우리를 위한 중보 기도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우리가 죄와 싸우면서 받는 영혼의 고통이 예수님께 느껴지셨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셨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중에도 자신의 고통받는 육체를 생각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그분의 생애가 가슴을 찢는 기도와 피로 물든 통곡이 어우러진 간구의 연속이었던 것은 우리 때문이었다. 우리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무릎으로 사셨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 곳 중에 어느 한 곳도 그분이 무릎 꿇지 않으신 곳이 없고, 흘러내리는 땀과 쏟아지는 피가 흥건히 고이지 않은 곳이 없다. 한적한 곳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요단강에서, 산에서, 광야에서, 마지막에는 우리를 위해 매달리신 그 십자가상에서까지,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아무리 우리가 스스로 생애적인 소원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해도, 그것이 입술의 고백일 뿐이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마음의 피어린 펌프질을 통해서 기도의 실천에 마음을 쏟고 피를 적셔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순례길이 무릎으로 걸어간 길이 되게 해야 한다. 주님이 엎드리신 곳에 우리도 엎드리고, 주님이 흐느끼신 곳에서 우리도 울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실천에 얼마나 약한가? 입술로는 주님의 고난을 본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고난이 있는가? 예수님처럼 아프고 가슴을 찢는 거룩한 희생이 있는가? 더욱이 이 세상에는 주님께서 우리더러 자신처럼 살아서 그들에게 주님을 보여 달라고 부탁하신 잃어버린 영혼들이 너무나 많은데,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 그들을 위하여 대신 울어 주는가? 우리가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과 죄 가운데 미끄러진 자들을 위하여 울며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위하여 울어 주어야 할 만큼 불쌍한 사람들이다. 교회의 영광이 무엇일까? 행복해지기를 바라기보다는 거룩한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을 위하여 주님을 대신해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이 아닌가?
조국교회에 성도들의 애끓는 기도 소리가 밤마다 가득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이 세상을 위하여 가슴을 찢으며 애통해 하는 성도들이 가득한 조국교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우리는 멀리서 들리는 하늘나라 응원군의 말발굽 소리를 들을 것이며, 악한 세력들은 혼비백산할 것이다. 처처에 피 흘리며 쓰러진 악한 영들의 시체를 보게 될 것이며, 우리 주님의 이름은 드높여질 것이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는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모두 거룩한 사람들로 나타날 것이다.
B. 열렬함과 마음의 쇄신
이렇게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가 우리의 영혼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죄들을 효과적으로 죽인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하고 간절하며 열렬한 기도를 통해서 죄를 죽이신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의 실천은 죄를 죽이는 효과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신자 안에서 다시 죄가 쉽게 융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그러면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의 실천이 어떻게 죄를 죽일 뿐 아니라 다시 죄가 융성하지 못하도록 돕는 효과를 가져올까? 이것은 마음의 틀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마음의 틀'(frame of heart)은 마음의 지배적인 경향성, 내면에 자리 잡은 습관 내지는 지향성(志向性)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 사람이 기도에서 미끄러질 때를 생각해 보라. 처음에는 시간을 정해 놓고 열렬하게 기도한다. 그러다가 열렬함은 아직 남아 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기도의 시간이 짧아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열렬함이 사라지고 기도의 시간의 형식은 남지만, 나중에는 기도의 시간이라는 실천의 형식까지도 무너져 버리고 만다. 이러한 모든 변화의 과정에는 기도하기에 적합하던 마음의 틀이 기도와 같은 영적인 일을 실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마음의 틀로 바뀌는 일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의 은혜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을 때, 그래서 간절한 기도가 쏟아져 나올 때는 시간이 없어서 기도를 못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시간이 없어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전체적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반나절만 기도하지 않아도 갈급해서 견딜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신자가 기도의 영으로 충만할 때는 장소에 매이지 않고 기도한다. 어느 자매가 이런 고백을 했다. 자신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가정의 일로 기도가 방해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알고 보니 가정의 일이 방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기도를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자매는 은혜를 받고 보니 아이 기저귀 갈면서도, 설거지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더라고 말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시로 기도하라고 당부한다. 죄가 우리의 기도의 세계를 공격할 때는 먼저 기도 실천의 형식을 겨냥하지 않는다. 새벽 기도를 수십 년 동안 다녔는데 내일부터 당장 집어치우라고 유혹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 위해서는 마음이 그런 기도를 쏟아내기에 적합한 질서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공격한다. 육체의 부지런함은 기도의 의무를 실천하게 하지만, 그러한 실천을 열렬하게 하는 것은 은혜 안에 있는 영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죄는 마음을 공격한다. 은혜의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마음의 틀을 공격한다.
신자의 마음의 틀이 죄에 의하여 무너지고 나면, 그것은 마치 현이 풀어진 바이올린과 같다. 제 아무리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연주자라고 할지라도 현이 풀어진 바이올린을 가지고 예전처럼 연주할 수는 없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백전노장과 같이 기도의 바다를 헤쳐 온 신자라고 할지라도, 기도에 있어서 영원한 전사는 없다. 은혜 안에서 형성된 마음의 틀이 죄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나면, 기도자는 그 사람이어도 기도는 예전의 그 기도가 될 수 없다.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이르지 못한다. 풀어진 현으로 나오는 기도의 곡조가 예전의 그 아름다운 곡조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올리는 기도의 내용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는 영혼의 진지하고 열렬한 투쟁의 과정을 보시며 감동을 받으신다. 그러한 열렬한 기도의 실천 과정을 통하여 영혼과 마음에 들러붙어서 맹렬하게 공격하는 죄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도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람이다.
그런데 죄가 잠시 물러가지 영원히 물러가는가? 지금은 물러가지만 다음에 오면 그 죄가 이길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죄 가운데 살면서 무너진 마음의 틀들이 다시 세워지기를 바라신다.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의 과정을 통하여 죄가 쉽게 침투할 수 없는 견고하고 굳건한 마음의 틀이 다시 세워지기를 기대하신다.
이것이 기도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또 하나의 바람이다. 이러한 기도 회복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보다 더 많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