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지속성(Continuance)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려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의 방향 설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기도할 때에 우리의 마음의 깊은 곳에서 그 열렬함이 흘러나와,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진액과 땀과 피로 적셔야 한다. 그래서 죄가 거하기에 적합했던 마음의 틀은 변화되고 거룩한 생활은 성숙되어 가야 한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간절함과 열렬함으로 길어 올린 기도가 아니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열렬한 기도만이 가지는 성화의 작용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열렬함이 있다고 해서, 성화를 가져오는 기도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도를 통해 죄를 죽이고 거룩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열렬함뿐 아니라 지속성도 필요하다.
I. 기도의 지속성과 성화의 진전
바리새인들도 많이 기도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하나님께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사실상 거의 기도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기도라고 하는 은혜 수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변화된 적이 거의 없으면서도 자신들이 많이 기도했다고 하는 생각 속에서 산 것이다. 이런 잘못들은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반복될 수 있다. 오늘날 성화의 진전이 없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냉랭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드리며 기도한 적이 있는데 왜 성화에 있어서 이렇게 진전이 없을까?" 그것은 지속성의 부족으로 인해, 그러한 기도를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도 간헐적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는 기도가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마음이 전체적으로 굳어지고 마음의 틀도 변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종종 죄인의 마음을 각성시키셔서 마음이 흔들리게 하시고 마음으로부터 기도가 흘러나오게 하신다.
기도에 있어서 이러한 경험의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신자는 기도하지 못하던, 수렁에 빠진 영적 생활로부터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기도의 씨름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 기도의 씨름을 통하여 죄를 죽이는 데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대평가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기도가 순간적으로 어떤 진지함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죄는 거의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가 일시적으로 기도의 열렬함을 회복하였을 때에는, 영혼이 각성된 상태라 순간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지만, 사실 이때 죄는 죽은 것이 아니라 움츠러든 것이다. 마치 집안에 들어와 활개를 치던 도둑이 어두운 집안에 환한 불빛이 들어오자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서 숨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도둑은 불이 꺼지고 주인이 들어가면 다시 자기 일을 계속할 것이다. 죄도 그렇다. 따라서 열렬하다 할지라도 일시적이고 간헐적인 기도로는 죄를 죽이는 효과를 가져올 수 없다.
우리 주위에 일시적으로 진지해지는 습관적인 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죄 죽임을 열렬하고 진지하게 드리는 한두 번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원리를 전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죄 죽임은 그러한 기도의 응답의 형태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원리에도 어긋나고 믿음의 원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새 언약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식의 죄 죽임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랬더라면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한번 죽었었노라."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II. 기도에 대한 그릇된 통념
그런데 신자들은 한순간 기도가 간절해지면서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는 듯한 경험을 하고 나면, 그렇게 기도했으니 반드시 응답될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성화는 한두 번의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향한 매우 큰 미움의 감정 때문에 영적 생활이 지장을 받고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한순간 마음이 쏟아지면서 회개의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제가 여태껏 누구를 미워했는데 용서해 주십시오. 미움의 감정들이 자꾸 생겨나는데, 하나님, 이 모든 것들을 제 마음에서 싹 씻어 주시고 제가 그를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 마음에 깊은 감동이 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셨고, 미워하는 마음도 씻어 주셨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기도가 응답되어 미워하던 사람을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일은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죽이려고 애쓰며, 그 사람을 사랑하려고 오랫동안 힘쓰지 않는 한 말이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恨)은 자기 땅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그 땅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적으로 믿음의 원리를 따라 순종하며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 이겨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싸움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투력에 달려 있었던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은, 서로 팽팽하게 피를 흘리고 싸워 대부분의 군사들이 목숨을 잃은 후,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많았기에 승리를 선언한 일반적인 개념의 전투가 아니었다. 여리고 성은 빙빙 도니까 와르르 무너져 버렸고, 요단강은 들어가니 물이 말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승리를 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병력이나 군사의 힘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지를 보고 싶으셨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하라',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라고 한다. 사실 이렇게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받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심리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의뢰이자, 절대적인 순종을 포함하는 영적 활동으로 반드시 영혼의 변화를 불러온다. 참된 믿음은 늘 삶 속에서 부단히 실천되며, 순종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미움의 죄를 짓던 신자가 어느 날 마음을 쏟아 부어 기도했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 마음을 녹이시면서 기도를 열납하시는 것을 체험했다. 그래서 자신을 옭아매던 미움의 문제가 모두 해결된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후, 자신 안에 미움의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신자가 혼란을 경험한다. 하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기를 근거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혼란에 빠질 이유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성화는 한번 뜨겁게 기도해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저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게서 미움을 다 지워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열렬히 우러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증거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들으심은 "오냐, 네게서 미움을 다 지워 주겠다."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의미이다. "그래, 네 기도를 내가 듣는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순종하면서 그 사람을 용서하려고 애쓰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거라. 그러면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의 힘을 공급해 주마. 그러면 너는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의지하거라." 그런데 한두 번 그렇게 기도할 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실천이 없다. 그래서 다시 미워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성화에 대하여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응답해 주셨으니, 자기를 독수리처럼 잡아채서 미움의 절벽에서 사랑의 둥지로 옮겨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성경적인 생각이다.
III. 지속적 기도의 필요성
A. 마음과 영혼의 자유함을 얻기 위해
여기서 우리는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의 필요성을 본다. 진실하고 간절하며 열렬한 기도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를 성화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오랜 세월을 두고 떨어지는 물방울로는 바위가 패이지만, 한번 들어붓는 바가지의 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오히려 그는 매일 매일 기도하면서 아직까지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움과 끝까지 남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본성을 죽여 가야 한다. 이것
이 성화의 방식이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를 살면서 수많은 유혹과 죄의 열렬한 공격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서 지속적인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령이다. 마음을 드리는 그 열렬한 기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 진지하고 정직한 기도가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분의 자유는 단번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개떡같이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분명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신분의 자유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상태의 자유도 필요하다. 즉, 우리의 내면 세계인 마음과 영혼이 죄로 말미암은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한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는 내 아들이라.'고 불러주셔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다운 사람들이 됨으로써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우리도 행복할 수 있다. 지속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마음과 영혼에 이러한 자유를 준다.
오늘날 조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생활의 큰 문제 중 하나는 기쁨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이 너무 희미하기 때문에 자신의 하나님 자녀 됨에 대한 확신이나 복음에 대한 담대함이 부족하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은 마음과 영혼의 내적 자유이다. 이러한 내적인 자유가 있으면 생활하면서 환경에 대해 불평하거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게 기쁘고 감사할 수가 없다. 이전에는 세상 유혹이 밀려오면 불안하여 떨었고 시련이 오면 괴로웠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우리 마음과 영혼 속에 있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자유 때문이다. 신자가 이러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를 죽이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은 이러한 죄 죽임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의 실천을 통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짧게 기도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청교도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길고 간절한 기도는 악마에게는 불쾌한 것이고, 죄 된 육체에게는 지겨운 것이다. 열렬한 기도의 실천이 오래도록 지속되어야만 우리가 그 기도를 통해서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는 그 마음을 삶을 위하여 준비하고 살아갈 때는 그 마음을 기도를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의 정서가 언제나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하며, 우리 자신의 마음을 잘 추슬러 기도하기에 적합한 상태를 유지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됨을 능가할 수 없는 것이다.
B. 기쁨을 누리는 기도를 위해
이렇게 복음적인 성화의 원리를 가르쳐 주면 사람들은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아아, 이거 정말 예수 믿는 것이 장난이 아니구나. 마음으로 기도를 짜서 드릴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런 기도를 실천하라는 거잖아. 죄를 죽이고 내적인 자유 속에서 복음의 약속들을 누리며 사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구나.' 그러나 그것은 죄의 지배를 받으며 그 결과인 악과 고통 가운데 사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가벼운 짐이 아닌가? 더욱이 죄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멸망 밖에 주어지는 것이 없지만, 이렇게 죄를 죽이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생명의 나타남이 있다. 여러분은 지금은 비록 기도가 메말라 있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하나님 앞에 열렬하고 진지한 기도의 은혜를 소유했던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간이 짧았을 수도 있고 길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새벽 기도 나가고, 밤에도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고, 집에서는 건넌방에서 문 잠그고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조금만 기도해도 기도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은혜 가운데 있어서 마음과 영혼의 틀 자체가 기도하기에 적합하고 죄가 거하기에 좋지 않은 은혜로운 틀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묵상하면 바로 기도가 시작되었었다. 기도만하면 눈물이 나오고, 간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때는 기도하는 것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때에 그렇게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붓는 그 기도 시간은 얼마나 달콤한 시간인가?
그러므로 열렬히 기도하되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무거운 부담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지금 그 기도의 감미로움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의 틀들이 너무나 육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속적인 기도가 놀라운 기쁨과 행복이기보다는 무거운 노동과 희생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IV. 지속적인 기도 실천의 장애, 게으름
그러면 그런 기도 생활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근본적으로는 죄 때문이다. 죄는 기도를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두 가지,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앞에서 영혼의 싫증은 열렬함으로 극복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육체의 게으름으로, 이것이 바로 기도 생활을 지속적이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이 게으름의 정체는 빗나간 자기 사랑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옛 자아(sinful flesh)를 말한다. 새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땀 흘리고 피 흘리기까지 예수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옛 본성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주인이며 왕이고 싶어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성령님을 근심시키면서도 자기 자신의 좋은 것은 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명백한 불순종이라도 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바로 게으름의 정체이다. 따라서 게으른 본성은 늘 하나님께 대항한다.
하나님: "이렇게 살거라."
우리: "싫어요."
하나님: "왜?"
우리: "힘드니까요. 내가 싫으니까요.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게으름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죄가 게으름의 탈을 쓰고 들어오면 영혼의 경계를 받지 않는다. 게으름은 거룩한 의무를 태만히 하고 자기의 육체를 하나님보다 더 위하게 한다. 그리고 죄는 그런 게으름을 이용하여 우리 안에 들어온다. 마치 적군의 병사들이 아군의 복장을 하고 문지기들이 서 있는 성문을 유유히 통과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육체의 게으름을 없애고 대적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육체의 게으름은 영혼의 싫증과 손잡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기도의 불을 끈다. 그 이유는 기도가 영적인 것이긴 하지만 육체가 영혼의 요구에 응하여야 실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의 실천에는 부지런한 육체와 열렬한 영혼이 하나같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을 위하여 반드시 육체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육체가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지만,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신령한 일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다. 예수님의 육체는 죄 없으신 육체였지만 우리의 육체는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 구석구석 죄성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육체는 우리의 영혼을 다루는 것과는 다르게 다뤄야 한다. 그러면 죄를 죽이는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을 위하여 육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그것은 세 가지로 대답될 수 있다.
A. 게으름을 물리치는 비결
1. 육체를 가혹하게 다룸
첫째로, 육체를 가혹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아무 때나 육체를 가혹하게 다루라는 것이 아니다. 선하고 신령한 목적을 위하여 복종하지 않는 육체를 다룰 때에 한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성경은 우리에게 영혼을 어떻게 다루라고 말하는가? 시인의 경험을 생각해 보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낙심한 영혼과는 이런 대화가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 스스로 추스르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나 게으른 육체는 그렇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단호한 모본을 가슴에 새기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여기서 사도가 고백한 바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은 당시 로마 시대에 무자비한 상전들이 노예를 다루던 방식이다. '복종하게 함'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둘라고고'(δουλαγωγω)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노예를 삼다, 노예라고 주장하다, 노예를 다루듯이 엄한 규율을 따라 다루다'라는 뜻이다. 신자가 죄악의 게으름에 빠지려 하는 육체를 다룰 때에 노예에게 하듯이 가혹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영혼: "기도하러 가자."
육체: "힘들어, 나 잘래."
영혼: "그래? 많이 힘들어? 그러면 어떻게 하지....... 기도하러 못 가겠네. 할 수 없지."
영혼과 육체 사이에 이러한 대화가 오가면 그 사람의 기도 생활은 이미 끝난 것이다. 죄가 이기도록 길을 열어 주는 셈이 된다. 오히려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혼: "기도하러 가자."
육체: "힘들어, 나 기도하러 안 갈래."
영혼: "뭐라고 이 망할 자식 같으니. 당장 일어나지 못해? 두들겨 맞을래?"
노예 제도가 있던 시대에 엄격한 주인과 게으른 노예 사이에 인격적인 대화 같은 것은 없었다. 주인은 노예를 무섭게 길들일 뿐이었다. 악하고 지혜로운 주인은 자유롭던 사람을 노예로 삼기 위해서 먼저 그에게 노예의 마음을 심어 주었다. 철저하게 채찍으로 다루어서 주인이 나타나면 두려움 때문에라도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이다. "당신의 주장은 신학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영혼과 육체를 통일적으로 봐야 하고 육체의 욕구도 들어주면서 돌봐야 하지 않는가?" 당연하다. 육체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자야 될 시간에 자고 싶다고 한다든지 먹어야 할 시간에 먹고 싶다고 한다든지 병이 났으니까 약을 달라고 한다든지 하는 욕구는 우리들이 계속 들어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한번 쓰고 말 일회용 육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보배로운 영혼을 담고 있는 질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하는 바는 육체가 하나님을 거스를 때를 이르는 것이다. 성령의 소욕을 거스를 때 말이다. 육체가 주일날 교회 가기 싫어서 텔레비전 보고 놀겠다고 하는데, 분명히 기도하러 가야 할 시간인데 누워서 책 보다가 자겠다는데, 방탕하고 싶어서 술 먹으러 가겠다는데, 그것을 그런 식으로 돌봐 주어서는 안 된다. 신자가 그렇게 육체에 진다면 그것은 육체에 종 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자들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은 "저희의 신은 배요"(빌 3:19)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 육체는 혼을 내주어야 한다. 그것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의 의무를 실천하며 사는 것에 대해서 육체는 순종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 목사가 되었는데도 어느 날 새벽에는 그냥 자고 싶을 때가 있다. 어찌 이것이 나만의 경험이겠는가? 새벽에 기도하러 가려고 일어났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그러면 환경과 육체의 게으름이 딱 만나게 되고, 게으름을 합리화한다.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빗길에 자동차 사고라도 나면 주의 영광 가리지.' 게으른 육체의 설득에 은혜에 싫증난 영혼이 휴식이라는 카드를 선택한다. 그 날은 새벽 기도 못하는 것이다. 내가 『새벽 기도』라는 책에서도 밝혔듯이, 다시 한 번 그러한 상황을 이기는 비결을 소개하고 싶다. 나는 오랫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새벽 기도가 힘들게 느껴지는 때에 피곤을 이기고 일어나는 효과적인 방법을 터득하였다. 그것은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에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마음속으로 '충성' 크게 외치고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께 거수경례하는 심정으로.......
2. 그리스도와 하나 됨
둘째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을 가로막는 육체를 쳐서 복종시킬 때 경험하는 자신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투영하는 경건의 기법이다. 이것은 교회 역사상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의 교리(The doctrine of conformity to Christ)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전한 성도로 만드시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의 풀무에서 단련하시고, 은혜의 생수로 위로하신다.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으며 그분 안에서 자신이 죽는 것이 실제적으로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신다. 게으른 육체의 끈질긴 간청을 뿌리치기 위하여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삶 속에서 실재화되는 것을 경험함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렇게 죽을 때에 성령님의 위로 속에서 영혼의 소생을 경험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신의 삶 속에서 다시 실재화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이 자신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오면서 실재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실재화되어 가는 과정을 통하여 신자는 부패하고 죄 된 성품에서 벗어나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의 게으름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노예처럼 내 육체를 쳐서 다루어도 한계가 있다. 어느 상황에 가면 육체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계속 나를 이렇게 몰아가면 당신의 육체인 나는 죽는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긍휼을 구하며 자비한 마음에 호소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육체를 아주 비정상적인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다 준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속게 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의 경험이다.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그리스도께 이입시키면서 그리스도와 성례전적으로 하나 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예수님의 생애는 어떠한 생애였는가?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 바로 앞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집을 심방해서 고쳐 주신 사건들이 나온다. 이 모든 일과를 끝내시고 숙소에 돌아오시니 각색 병든 사람이 가득 있는데 그 많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하나 기도 해 주시고 고쳐 주셨다고 나온다. 아마도 오늘 우리 시각으로 새벽 두 시는 넘어서 잠드셨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한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나는 약 십오 년 전에 이 성경 구절을 읽고 많이 울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구절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예수님의 고단한 지상 생애가 가슴에 밀려오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기도하러 가셨다. 흠 없으시고 죄 없으신 그분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안식과는 거리가 먼 생애를 사셨고, 그렇게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시면서 우리 잘 때 안 주무시고 우리 먹을 때 굶으시고 우리가 쉴 때 기도하셨다는 사실이 해일처럼 가슴에 밀려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곤히 잠들어 있는 제자들이 깰세라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나오셔서 아직은 어두움이 도망하지 못한 캄캄한 들판 저편으로 기도 처소를 찾아서 사라지시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나는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 내게 있는 고난은 고난이 아니다.' 하고 말했다.
새벽 기도에 대한 생각도 떠올랐다. '왜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셨을까?' 성경을 살펴보니 별 큰 뜻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새벽 시간에 기도를 안 하셨으면 오전이나 오후에 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시는 시간만큼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실 시간을 축내셔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불쌍한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기도하시고 그들이 깨어 있는 시간에는 자신도 깨어 있어서 그들을 섬기셨던 것이다. 어디서 하나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가? 오히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섬기러 오신 노예처럼 사셨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가. 금마차 타고 왕의 대로로 다니셔야 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사 그렇게 고단한 생애를 사셨다. 그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살아 있는 동안 뼈 갈고 살 깎아 주님을 섬기리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때에 종종 사용하던 나의 아호(雅號)를 버리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노예'로 칭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만을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지상생애들을 많이 묵상하면 우리가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모른다. 육체가 게을러서 쳐서 끌고 가면 눈물 흘리고 사정하면서 기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도록 우리 맘을 약하게 하는 때가 있다. 그때 가장 훌륭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다. 아무리 뻔뻔스러운 육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뵈면 그렇게 게으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영혼은 게으른 육체에게 말할 수 있다. "봐라, 이놈아.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봐라. 이렇게 자기를 아낌없이 주심으로 널 구속해 주셨는데 게으름을 피워? 이 망할 놈 같으니라고. 당장 나오지 못해!"
우리 예수님의 생애는 고단한 노역과 몸부림의 연대기였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희생적인 지상 생애를 묵상하면 단숨에 게으름이 죽는다.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와 하나 됨의 교리를 쉽게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신령한 사유를 통하여 육체는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된다. 기억하자. 성화에 이르는 지름길 같은 것은 없다. 쉽게 참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제시된 길은 대부분 거짓이었다. 그런 길이 있었으면 예수님께서 왜 우리보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겠는가? 그렇게 쉬운 길이 있었으면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겠는가? 그런 길은 없다. 여러분들이 나의 책을 읽었다면, 가장 자주 들었던 화두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참다운 신자가 되어가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그 체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붙들려고 한다고 해서 붙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자신의 전 삶이 십자가의 정신을 구현하는 일 없이는 그 체험이 유지되지 않는다. 자신의 전 삶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삶을 살 때 그런 삶의 틀 안에서 십자가의 경험이 현재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고 고백한다(빌 3:10-12).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아는 일'은 하나였다. 그리고 그 모든 신비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격의 비밀을 알아갔는지 그 지식을 얻는 방식을 보라.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현재적인 체험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도를 알아갔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신의 온 생애를 건 추구였다. 좇아가고 달려가야 할 추구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경험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격의 비밀들을 알아갔다. 그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만큼 거룩에서 자라갔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은 무한한 감화를 준다. 그리고 자기를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열렬하게 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묵상은 게으름을 퇴치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비결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 속에서 항상 상기했던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죽음, 부활과 이후에 나타날 그 재림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 예수님을 위한 희생이 있는가?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절대 그렇게 수고하지 않았겠지만 오직 예수님 때문에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희생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기도는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십자가이다.
3. 기도의 습관을 확립함
셋째로, 규칙적인 습관을 확립하는 것이다. 게으름에 빠지려는 육체를 다루는 또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은 기도 실천에 있어서 규칙적인 습관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눅 22:39). 유대인들이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한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사실, 기도가 잘되고 열렬히 기도를 실천하고 있을 때에는 그런 습관의 틀 같은 것들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영혼의 열렬함이 육체의 게으름을 이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이런 기도의 욕구가 열렬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를 지탱해 주는 좋은 방법이 습관이다. 습관을 수립함으로써 기도를 실천하는 일을 의무로 지워 주는 것이다. 견고한 의무의 틀은 경건이라는 내용물을 보호하는 그릇이 된다. 내용물이 없을 때에는 견고하고 질 좋은 포장이 쓸모없지만, 좋은 내용물이 있을 경우에는 그러한 포장재가 내용물에 대한 아주 좋은 보호막이 된다.
육체가 다소 게으름을 피우려 하는데, 새벽에 기도하러 나가는 건강한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에 육체는 가혹하게 다루지 않아도 고분고분하게 영혼의 요구에 순종한다. 그러나 그러한 습관 자체가 저절로 열렬한 기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습관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하다. 기도의 습관조차도 형성하지 않은 것은 태만한 것이다. 나는 외국에 가서도 한국의 새벽 기도 시간이 되기만 하면 저절로 잠이 깬다. 날짜선이 바뀌어도 몸이 기억하는 시간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기도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영영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는 발판으로 삼게 된다.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기도의 사람들은 모두 기도 실천에 있어 규칙적인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아직도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가? 아직도 기도하는 장소가 확정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대들은 갑옷을 입지 않고 전쟁을 하는 것이다. 지금은 열심 있는 기도가 우러나오기 때문에 기도를 실천하실 것이지만, 조금만 환경이 어려워지거나 육체가 게으름을 피우면 그대들은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기도 생활을 원한다면 규칙적인 기도의 습관을 굳건히 하라. 그 단련된 굳건함이 여러분에게 성숙된 경건을 가져다 줄 것이다.
V. 열렬함과 지속성을 잃어버린 기도 생활의 비극
교회에는 연약한 사람도 있고 강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 규칙적인 습관이 없는 사람 중 영적으로 강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참 신자 되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자신에게 기도의 세계가 없는데, 규칙적인 기도의 시간도 없고 기도의 실천을 결심하지도 않는데,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에 대한 실천적인 경험도 없는데, 가끔 교회에 우르르 모여서 받는 은혜에 참 신자가 되는 기대를 모두 거는 것은 옳지 않다. 광야에서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 홍해를 건넜고, 만나를 먹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엎드러졌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그와 같은 다수의 무리 중 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하고 열렬한 기도, 그리고 그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 없이는 결코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고는 결코 온전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지 못한다. 이제 마음에 결단을 할 때이다. 살아있는 기도로 살아 있는 삶을 살겠는가? 아니면 죽은 기도로 죽은 것과 방불한 삶을 살 것인가?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신앙생활의 이치는 변하지 않는다. 죄의 강압을 이기기 위해서는 은혜의 힘이 필요하고, 죄의 속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얼음 같은 총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신자의 마음속에 살아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은혜를 기도하는 자에게 베풀어 주신다. 한 신자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찾고 있을 때, 그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의 어두운 마음에 찬란한 진리의 빛이 비칠 때, 그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의 욕구가 마음 안에서 솟아나기 시작하면, 그 기도의 열기를 끄고자 하는 죄의 대적의 활동도 더욱 열렬해진다. 그러므로 신자는 기도할 수 있을 때에는 기도할 수 있기에 기도하여야 하며, 기도할 수 없을 때에는 기도할 수 없기에 더욱 힘써 기도하여야 한다.
VI. 기도 생활의 대적을 처단하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도를 통해 성화되기를 원하는 신자들은 기도의 실천을 가로막는 두 대적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 두 대적은 첫째로 기도의 열렬함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열렬함으로 지속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 생활을 나태하게 만드는 주범은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으로, 영혼의 싫증이 열렬한 기도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육체의 게으름이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을 방해한다. 따라서 거룩해지고자 하는 모든 신자는 일평생 이 두 대적과 싸워야 한다. 이 두 대적에 대한 이김 없이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기도도 없기 때문이다. 그토록 순종하며 살기를 원해도 그렇게 살 힘이 없었는데, 열렬한 기도를 지속적으로 실천 할 수 있게 되자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받게 되었고,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견고하게 세워진 기도의 통로로 무한한 하늘 자원이 흘러들어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메마른 대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 줄기 강물이다. 그가 존재함으로 메마른 땅에 풀이 돋고 숲이 우거진다. 그가 살아감으로 황량하던 대지에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한다. 기도의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 메마른 벌판에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로가 되니 말이다. 보고 싶지 않은가? 울창한 숲 속 하늘 향해 곧게 뻗은 수많은 나무들같이 기도 사람들이 세워져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라고 외치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로 살아가는 세상을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시려는 그 기도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