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꼬일 때 기도하라
(2018년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2018년 10월22일-10월2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9년 2월 21일
목 차
1. 아브람을 복 주신 방법(창 13:14-18) 2018.10.22.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
2. 미래가 두려울 때(창 14:1-7) 2018.10.23.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6
3. 시험을 당했을 때(창 22:1-2;12;16) 2018.10.24.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1
4. 갈 길이 막혔을 때(막 2:1-5) 2018.10.25.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6
인생이 꼬일 때 기대하라(2018.10.22. 가을말씀사경회새벽1)
아브람을 복 주신 방법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ᅟᅳᆯ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제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라함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르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창 13:14-18)
녹취자 : 김세나
여러분들이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조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선택함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선택을 받고 12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복 주시기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13장으로 넘어오는데, 뜻하지 않은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데라라는 사람이 아브라함과 나홀을 낳았고, 형제인 하란이 롯을 낳았는데 그 하란은 아비 데라보다 먼저 갈데아 우르, 고향에서 죽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자기 아들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브라함은 결혼을 했으나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이좋게 롯과 함께 한 가족을 이루며 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주셔서 아브라함은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지금 가나안 땅에 거하고 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가축의 떼들이 점점 늘어나고 롯의 가축들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러자 이제 한정된 우물, 목초지 이러한 것 때문에 양측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광경을 아브라함이 보면서 롯에게 도저히 좁은 공간에 같이 있을 수 없으니 롯에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한 친족이라. 가족과 같은 관계다.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아브라함이 통 크게 제한을 합니다. “자, 네 앞에 온 땅이 있다. 어차피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데 네가 보기 좋은 땅을 택하여라. 그러면 나는 반대편으로 가서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마.” 그랬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니 물이 넉넉하고 가축을 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롯은 요단 지역을 택하게 됩니다. 이제 동쪽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각기 서로 제 갈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자기가 간 요단 지역에 소알 땅에 거하면서 그 장막을 계속 옮겨서 마지막에 소돔에 이르게 됩니다. 그 큰 도시 가까이에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차피 소나 양이나 짐승들도 생산하는 가축인데, 소비자들이 가까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면 훨씬 더 비싼 값에, 편리하게 많이 팔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을 간단하게 하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얼마나 가슴 아픈 사건이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고, 그리고 롯도 아버지를 잃고 홀로되고 자신도 자녀가 없는 상태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맨주먹에서 목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 이 아브라함에게는 롯이 어떻게 보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이제껏 돌보고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 때문에 큰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이 갈등이 있을 때 오히려 자기가 양보하고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았을 텐데, 그는 아브라함이 “자, 네가 먼저 갈 곳을 택해라.” 할 때 가장 물이 넉넉하고 가축을 치기에 제일 좋아 보이는 땅을 자신이 먼저 선택하는 뻔뻔스러움을 보였습니다. 아주 쉬운 말로 이야기 하면 아브라함에게 인생이 한번 크게 꼬인 것입니다. 자식이 없이 조카를 그렇게 알뜰살뜰하게 돌보고 긴 세월을 가족같이 살았을 때, 아마 아브라함은 그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주는 후손처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어그러져 버렸습니다. 아브라함 홀로 남은 이 넓은 들에서 횡 하니 롯의 가축들과 식구들이 떠나가 버린 것을 보면서 그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이었겠습니까. 명백하게 인생이 뭔가 중요한 시점에서 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괴로움으로 잠 못 들어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이렇게 인생이 꼬일 때 하나님은 무엇인가 아주 놀라운 일을 행하실 조짐이 보입니다. 조건은 단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제 14절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세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이 복 주시기 전 이별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롯과 헤어져 아브라함 가정 홀로 있게 하셔서 그들에게 이미 약속하신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큰 복을 하나님이 내리기로 하신 것입니다. 제일 먼저 롯과 헤어져 이별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관용으로 롯에게 누가 봐도 가축을 기르기에 최고의 지역인 그 땅을 롯에게 양보하고 이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떠나간 후에 하나님은 마치 자기가 롯을 불렀던 것처럼 자기를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별하게 하신 것은 인생이 꼬인 것 같은 가슴 아픈 사건이었으나 그 사건 후에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복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을 앞에서부터 보지 말고 뒤에서부터 거꾸로 보면 하나님은 롯과 함께한 가족이 아니라 롯을 떠나가게 하고 아브라함 가족에게만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축복으로 주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꼬인 것도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있습니다. 그 큰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한 가지를 보십니다. 꼬인 인생이 모두 복을 받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이 꼬인 것 같았을 때, 하나님 앞에 토라지거나 사람을 원망하거나 분쟁을 하거나 복수를 하거나 이러한 혈기를 사용하면 꼬인 것은 계속 꼬여서 그 사람의 인간성도 꼬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생이 꼬였을 때 나는 알 수 없지만 이 꼬인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인생이 꼬이지 않았더라면 전혀 갈 수 없었을 완전히 새로운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선하고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전심으로 신뢰하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리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꼬일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아직까지 보지 못 하였던 비상한 축복의 역사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저 평범할 때에는 예상대로 일이 되고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되었습니다. 그것들이 나의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번 보십시오. 내가 마음먹은 뜻대로 하나씩 둘씩 셋씩 계속 이루어질 때 인간은 비상하게 나를 그렇게 형통하게 해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기를 의지하기가 일쑤입니다. 더욱이 그렇게 모든 것이 잘 전개될 때 인간은 교만해집니다. 모든 것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잘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의 계획일 뿐입니다. 더 큰 계획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종종 나는 예상하지 못하게 인생이 꼬였을 때 나는 도저히 계획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나가십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너무나 의외의 일이고 때로는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롯과 헤어질 때처럼 가슴 아픈 사건을 경험하게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면 도저히 갈 수 없었을 새로운 인생의 길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긍정적인 결절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롯과 헤어져 쓰라린 가슴으로 아파했을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약속을 주십니다. 첫째는 ‘땅에 대한 약속’이고, 두 번째는 ‘자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땅은 바로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휴손의 유업으로 주겠다는 약속이었고, 그것이 감격스러웠던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 옛날에 땅 주인이 있을까, 맡는 사람이 임자이겠지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 임자가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할 때 일평생 “나는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입니다.”라고 입에 달며 살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거기에서 자기 소유의 땅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먼 훗날 이루어질 것인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되고, 이 민족이 이제 바로의 땅에서 번성한 후 하나님의 극적인 기적에 의해서 탈출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이스라엘을 건립하게 될 미래를 바라보며 말씀하신 것이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어서 나라를 세우게 하신 것은, 그 나라가 결국 역사 속에서 한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성장한 후에 결국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모두 망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리라고 하신 말씀이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땅은 사라졌으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이 영적인 이스라엘 자손으로 형성되어 그리스도께서 오실 나라가 그렇게 번성하여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거기까지는 잘 알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신과 자손에게 이 드넓은 땅을 주셔서 그 땅을 다스리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원대한 나라에 대한 꿈을 주셨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의 숫자가 그 마을, 가족, 국가의 강력함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백성이 많아야만 농사를 많이 지을 수 있고 그래서 곡식을 충당하고 백성이 많아야만 그 중 많은 군사들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창 13:15) ‘티끌’은 ‘먼지’입니다. 땅의 먼지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자손을 줄 것이고 그들이 “네가 보고 있는, 좌우로 위아래로 다닐 수 있는 그 모든 것”, 엄격히 말하면 그 이상의 땅을 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니까 믿었지만 이게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토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 그렇게 알 수 없지만, 갈대아 우르 정든 고향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나그네로서 살아갈 때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당하였을까요? 그때 하나님이 “네 자손이 티끌과 같아서 네게 보이는 온 땅에 거주하리라”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실감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복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복을 롯과 찢어지고 난 후에 아브라함과 그 가족만을 남겨둔 상태에서 하나님이 예기치 못했던 큰 복,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늘 한이 되었던 그 큰 복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사라와 결혼하여 아이를 쑥쑥 낳고 그 아이들이 십 수 명이나 되었더라면 이 약속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복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없다는 것은 집안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고, 세월이 좀 더 흐르고 나면 그야말로 멸문에 이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이 주겠다는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정말 가슴 뛰는 위대한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타국 생활에서 가슴에 깊이 맺혔을, 한처럼 맺혔을 땅과 자손에 대한 복을 언제 약속해 주셨습니까? 너무너무 사랑하던 롯과 찢어져서 그의 가슴이 아픈 때 이제 깊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을 롯이었습니다. ‘사랑하며 사는 이 끝이 결국 이것 밖에 안 되나?’ 하는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을 순간에 하나님이 예기치 비전을 아브라함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반드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이 꼬일 때 그것이 바로 예기치 못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꿉니다.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내가 달라는 대로 해주세요. 왜 이러십니까. 제가 내린 판단이 제일 훌륭하니 그것을 주십시오.’ 그러지 말고 주님께 맡겨 보십시오. ‘하나님, 제 판단은 여기까지입니다. 주님이 내 인생을 꼬이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내가 모르는 새롭고 위대한 일을 나에게 보여 주십시오. 내가 잘 모르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만 순종하겠나이다.’ 전혀 다른 길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데려가실 것입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그 가운데 아브라함이 한 일은 언제 그 일이 이루어지려나, 언제 아이가 태어나고 자손이 되고 언제 그 큰 땅을 자신에게 주시려나, 그와 같은 고민을 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18절에 “아브라함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리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에서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았더라”(창 13:18) 아브라함이 선택을 받은 후에 이제 12장 7절에서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난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았고…”(창 12:7) 8절에도 “제단을 쌓았고”라고 나옵니다. ‘제단을 쌓았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게는 피붙이처럼 오랫동안 함께 사랑하며 살았던 롯이 살점이 찢어지듯이 나에게 떨어져 나갔고 이 친구는 아브라함 삼촌이 “자, 너 좋아하는 땅 택해라.” 그러면 여태껏 입었던 은혜를 기억해서라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니에요. 아버지 같은 삼촌. 어떻게 내가 먼저 땅을 선택하겠습니까? 삼촌이 가장 좋은 땅을 먼저 고르십시오. 그러면 저는 후에 삼촌과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나이다.” 그래야 맞지 않았을까요?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너무 이기적이고 나쁜 말로 하면 싸가지가 없는 조카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 살면서 이렇게 배은망덕하고 때로는 싸가지 없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신의 인생이 저 인간을 만나서 꼬였다고 하는데 그러한 롯을 만난 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롯에게 떼어놓아 오직 그에게만 주실 큰 복으로 데리고 가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한 것이 사랑이 깊으면 배신도 깊은데 배신이 깊으면 상처도 많을 텐데 일체 원망하지 아니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조용히 ‘너나 나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다투게 하지 말자.’ 이익을 초월해서 롯에게 양보하며 좋은 땅을 택하게 합니다. 일평생 목축업을 했으니 어떤 땅이 좋은지 너무나 잘 알 텐데 이것을 양보하고 롯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어 화평을 추구합니다. 화평을 추구했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더 큰 땅과는 비교 안 되는 어마어마한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이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복 주시는 분이시구나!’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이제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생활로 자신의 인생의 중심을 삼겠다는 무언의 큰 결심이었습니다. 한번 이 단을 쌓아놓고, 한번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았겠습니까? 거기에 거주하는 동안 그 제단은 하나님께 올리는 헌제의 장소가 되었을 것이고, 그는 이렇게 마음을 다해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항상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기를 향한 위대한 약속에 그 제사를 통해 사랑의 줄로 하나님께 묶이는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잠시 인생이 꼬였지만 그것이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평범한 상황을 통해서는 평범한 복을 주시지만, 비범한 꼬임을 통해서는 하나님은 더 놀라운 복을 주신다는 것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인생이 꼬이는 것은 우리 인생에 늘 있는 일입니다. 그때마다 여러분들이 분노하고 사람을 미워하고 때로는 이러한 상황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혈기로 자기 자신의 길로 가버린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복을 발로 걷어차 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에게는 커다란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징벌하시고자 결심하시면 피할 사람도 없고 복을 주고자 하면 그것을 막을 인간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잠시 인생이 꼬였다면 믿음 없이 한탄하고 염려하고 그 사건에 매여 사람과 평화를 깨뜨리고, 절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아브라함의 인생이 꼬였을 때 그가 상상도 할 수 없던 위대한 전환을 준비 하셨듯이 여러분들을 위해서도 그러한 전환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하나님이 신실하고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예배생활을 하십시오. 더욱 마음을 들이는 진실한 예배, 삶의 모든 처소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찾는 경배의 정신으로 산다면 언젠가는 오늘 꼬인 이 인생 때문에 가슴 벅차도록 내 인생 꼬이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꼬일 때 기대하라(2018.10.23. 가을말씀사경회새벽2)
미래가 두려울 때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아가 이르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인의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니라”(창 15:1-7)
녹취자 : 김세나
아브라함의 인생이 다시 한 번 꼬입니다. 그렇게 친아들 같던 롯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하고 이제 그와 헤어지는 아픔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미 연로한 사람이었으니 젊은 롯이 옆에 있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였겠습니까. 그가 자기를 배신하고 떠난 것은 명백히 아브라함의 인생이 꼬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단을 쌓고 본격적으로 경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다시 한 번 인생이 꼬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서 잘 살 것이라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당신 조카 롯이 전쟁에 휘말려 자신과 가족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왕이라고 해봐야 작은 마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네 나라의 왕과 또 네 나라의 왕이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롯은 그 소돔 땅에 거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쪽 편에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전쟁에 휘말리면서 결국 소돔의 왕은 패하고 이제 이 조카 롯은 끌려가 당연히 재산까지 빼앗겼겠습니다. 한때 자신을 배신 아닌 배신을 하고 그리고 부자와 같았던 정든 관계를 끊어버린 괘씸한 조카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신의를 지킵니다. 조카를 많이 사랑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한 나라의 왕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복을 주셔서 큰 부자였기 때문에 자기가 돌보고 있던 가축 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잘 훈련된 무사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318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이제 롯을 구하러 달려갑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아브라함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전쟁의 판세는 바뀌고 이제 아브라함의 도움으로 소돔 왕이 다시 승리하고 롯과 그 식구들을 모두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얼마나 순수한 사람인가 보십시오. 소돔 왕으로서는 너무도 고마운 일이었으니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전리품을 아브라함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혹시라도 누가 이 사건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롯을 순수하게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전리품에 탐이 나서 이 전쟁에 끼어들었다는 말을 들을까봐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창 14:23-24)이렇게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엉겁결에 개입하여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자신은 가축을 기르는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잠시 패배한 것 같았던 사람들은 일평생 전쟁에서 단련되어 온 나라였고, 나라가 작아도 왕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군사를 거느리고 복수하기 위해서 달려올 텐데 그때 그는 자기 집안을 지킬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마 나날을 두려움과 근심 속에서 보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상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했는데, 이 말씀의 내용이 14장과 15장 사이에 아브라함의 심경을 추측하게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창 15:1) 얼마나 두려웠으면 주님이 나타나셔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겠습니까? 더욱이 이 사람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신앙으로 말하면 아직 초신자였습니다. 그 큰 사건을 경험하고 그는 보복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가슴에 신앙의 불을 지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방패’는 전쟁에서 치명적인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는 매우 중요한 장비입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도 큰 방패 뒤에 바짝 붙여 몸을 숨기면 어느 화살도 그 군사를 명중시켜 죽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혹은 칼의 공격을 받아도 방패로 막을 수가 있고 창의 공격을 받아도 그 창을 빗기게 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렇게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참 미묘하지 않습니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 방패를 쓸 일이 없게 해 주마.” 왜 이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공격하려던 모든 자들을 하나님이 정리해 버리시면 방패를 쓸 일이 없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것이 신앙의 묘미이고, 인생의 묘미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도 여전히 시험꺼리가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단히 무장하여도 여기저기에서 유혹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세상에 사는 동안 안 일어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인생이 꼬여야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보호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조카 롯과 헤어진 것, 그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 그 분을 경배하기 위해 단을 쌓은 것, 그리고 왕들과 싸우며 롯과의 신의를 지킨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나는 너의 방패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누구도 나를 해하지 아니하고는 결코 너를 헤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시인 다윗은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정처 없는 도망의 길을 황급히 떠났습니다. 그때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라고 말입니다. 그는 제일 먼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이십니다.” 지금은 자신에게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으나 나는 주님의 보호 그늘 아래 있기를 바란다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과 다윗의 사이의 연대가 주전22세기에서 10세기이니 거의 1200년 이상 차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던 사람들의 신앙의 공통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미묘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사랑하실수록 우리에게 나쁜 일이 안 일어나게 하시질 않고 오히려 그 일이 일어나 명백한 피해가 예상되는데도 하나님 자신이 방패가 되어 주셔서 우리에게서 그것을 막아 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아주 분명하게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이 말씀을 들은 후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 큰 전쟁에 예기치 않게 끌려들어 네 나라 왕을 원수로 만들었으니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 떠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나는 너의 방패요.”라고 직접 말씀하셨을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든든하였을까요?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하늘에 계신 줄만 알았던 하나님이 자기와 같이 수시로 인생이 꼬이는 사람에게 오셔서, 그래서 자신을 파멸시킬 모든 세상의 불행과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것을 믿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어떤 일 때문에 두렵다면 그 일은 이미 일어난 것이고, 일어난 그것 때문에 꼬이는 일들이 생긴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결절점에서 신앙이 요청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이삭, 야곱, 요셉, 이 사람들의 생애를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신앙이 이렇게 자란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랍니다. 이렇게 자라는 지점마다 항상 꼬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꼬이는 일을 통해서 꼬이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 나의 지혜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눈을 뜨며 그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 성품의 시행방식에 대해 배워갔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깊은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마도 아브라함에게 더 큰 격려가 되었던 것은 ‘방패’라는 말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방패는 질 전쟁을 이기게 하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살을 막고 창과 칼을 피하게 할 수는 있으나 그렇게 해서는 전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공격이 있어야 끝납니다. 방패는 하나님이 꼬인 인생 속에서 아브라함을 보호해 주실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상급이라는 말씀은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승리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적극적으로 말해서 방패는 네가 받은 복을 빼앗아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의미라면 상급은 이제껏 받지 못하였던 사랑, 위로, 승리, 재물, 모든 좋은 것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까지 말씀하심으로써 최고의 좋은 것을 그에게 복으로 줄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겠습니까? 제일 먼저 1절에서 실제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영광중에 만나게 되는 놀라운 상급을 받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만남은 말씀이 찾아오신 만남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초창기에 막연하게나마 우리 하나님을 따라가면 이 갈대아 우르에서 사는 것보다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희망이 구체적으로 발전했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자기를 다루신다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는 사탕발림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하며 어떻게 말하면 그분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믿음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믿음으로 그것들을 이겨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마음은 단련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눈에는 기적이 보이지 않고 눈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기를, 하나님 뵈오며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확실한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나타나셔서 이 아브라함을 만나 그의 신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인생이 꼬일 때 이렇게 신앙이 성장하는 것을 굳게 믿고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4절에서 씨를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늙어가고 있었고 그에게는 후사의 희망이 없었으니 그 나이에 사라도 자신도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에 이 사람들의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 상속자가 없으면 그 집에서 오랫동안 가족처럼 헌신한 종이 그 주인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일생동안 충성하여 정들었을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에게 자신의 상속자의 지휘를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보태기를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창 15:3) 이러한 뜻으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한 번 그에게 임하여 이르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창 15: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요즘 같은 우리 시대의 남자들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또 다른 지평의 기쁨과 기대를 아브라함에게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들’은 ‘벤’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본 ‘벤허’라는 영화에서 그 ‘벤’입니다. 이 ‘벤’은 아마도 ‘바나’라는 동사에서 나왔는데 ‘집을 세운다.’라는 뜻입니다. 아들이 없으면 그 집이 텐트처럼 쳐 있다가 그냥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그 몸에서 나올 씨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인생이 꼬이는 것 같았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아브라함에게 그 몸에 직접 자식을 주셔서 상속자가 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으니 이 가슴 벅찬 감격은 인생이 꼬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만날 수 없는 기쁨의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은 더욱 놀라운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5절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끌고 밖에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는 공해도 없고 완전한 청정 환경이었으니 아마 밤에 보는 별들의 수가 우리들이 도심에서 보는 별의 수와는 비교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짜 그러한 청정지역 벌판에서 별을 한번 보고 나면 비로소 그때 정말 하늘에 이렇게 많은 별이 있구나 생각하며 감탄하게 됩니다. 하늘에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빛나는 별들이 하얗게 붙어 있습니다. 누가 감히 그것의 수요를 헤아리고자 시도할 수 있을까요? 별들은 별들에게서 멀지 않고 다닥다닥 붙어 심지어 은하수가 되어 흐르나니 누가 그 수를 헤아리려고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너의 자손이 저렇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혼자 몸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지만 이제 그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미리 예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그냥 짐승이나 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아브라함과 하나님 앞에 불려 나와서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다. 내가 너에게 자손을 주리라. 그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여 이 세상을 향한 나의 경륜을 이루리라.”고 하는 말씀 사이에 차이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꼬일 때 기대를 가질만합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꼬이는 인생을 맞이하는 사람이 모두 이러한 복을 받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꼬인 인생이 두 번 꼬이고 두 번 꼬인 인생이 세 번을 꼬여 인생을 계속해서 나락 아래로 끌어가고 패대기쳐서 삶의 희망을 접게 만듭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조건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조건이 인생이 꼬일 때 가슴이 설레며 기대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6절이 말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신약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의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이 꼬일 때 좌절하고 두려워합니다. 예상대로 꼬인 인생은 그 다음에 불행을 가져오게 되고 하나의 불행은 다음에 이어질 불행의 예고편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 곧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이 꼬일 때 그는 기대에 찬 마음으로 가슴이 설렙니다. 왜냐하면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어떤 하나님의 간섭이 바로 이 시점에 있을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그분의 수중에 있으니 그 분이 나를 지켜주는 방패이시고 그 분이 나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 것이라고 하는 믿음! 그것이 바로 꼬인 인생의 매듭을 풀게 만들어주고 생각지 못하였던 복된 방향으로 내 인생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나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만 인생이 꼬이는 매듭의 지점에서는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매일 기도하지만 그렇게 인생이 꼬일 때에는 특별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매일 밥을 먹지만 그렇게 인생이 꼬일 때에는 금식해야 합니다. 매일 편안히 자지만 그렇게 인생이 꼬일 때에는 철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그렇게 기도하지만 이때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말씀을 다 듣고 나서 아브라함은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그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까, 마음속으로 여전히 자신의 상식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다 중간을 쪼개고 쪼갠 것을 마주대어 놓고 새는 쪼개지 않았을 그때에 해가 졌고 아브라함은 잠자고 두려움과 흑암이 그에게 큰 어두움과 같이 또 다시 두려움이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길로 임하셔서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면서 아브라함에게 고대 근동의 언약체결 방식을 동원해서 “나 여호와가 나 자신의 생명을 걸고 너와의 약속을 지킬 것을 보여주노라.”하고 언약체결 의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한 단계 더 나아간 신앙으로 우리 하나님을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인생이 꼬이는 것 같을 때 다시 주님을 굳게 붙드십시오. 그 시점에서 하나님이 행하실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인생이 꼬일 때 기대하라(2018.10.24. 가을말씀사경회새벽3)
시험을 당했을 때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1-2)
“사자가 이르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내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함이라” (창 22:16)
녹취자 : 김세나
22장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드려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첫머리에 보면 “그 일 후에…”라고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그 일이 복수로 나옵니다. “그 일들이 있은 후에” 라고 하였으니 실로 많은 일들이 하나님과의 만남, 이번 하나님과의 만남 이전에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주거에 관하여 계약을 맺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고, 사라가 이삭을 낳고,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는 것,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전쟁, 두려움, 주님이 나타나신 것, 역순으로 보면 많은 일들이 있고 난 후에 한참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인생이 다시 한 번 꼬이는 일이 생깁니다. 그것은 자신이 잘못하여 생겨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점에 꼬이게 만드시는 것 같은 명령을 내리십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시험한다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정말 그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충격을 가한다든지 혹은 어떤 물건을 깎아 낸다든지, 다른 조건에 두어본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시험한 내용이 바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명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를 자신이 갖고 싶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약속으로 주신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관습대로 자신에게 후사가 없으니 오랫동안 내 곁에서 자식처럼 자신을 도와주었던 엘리에셀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하고 그가 자신을 위해서 자식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이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고 그 몸에서 씨로 태어난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라도 아브라함도 처음에 이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덜컥 임신을 하고 드디어 100세에 아이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거를 회상해 보면 이 하나님의 명령은 매우 자기 모순적인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몸에서 태어난 씨가 꼭 필요하다고 믿으셨기 때문에 주셔놓고 이번에는 필요 없는 것처럼 데리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끔찍한 번제라는 방식으로 이 아이를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이 고생 저 고생 참 많이 하였습니다만, 꼬여도 꼬여도 인생이 이렇게 꼬인 적은 없었을 것이고, 그 꼬인 것이 대부분 자신의 실수나 사람들의 악 때문에 꼬였는데 이번에는 소위 전능하시다고 하는 그 분이 자신의 인생을 꼬이게 해 버리신 순간이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도 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었을 때, 많은 것을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변론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12장에서 22장까지 오는 이 긴 세월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가 생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고 두려우신 분이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대해서 토를 달 수 없다는 신앙이 생겨난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할 때에는 주님과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녕 없애시겠나이까, 하면서 의인의 숫자를 가지고 논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때쯤 되어서 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두려움과 공경심 때문에 하나님께 감히 왜 주셔놓고 지금 또 데리고 가시려 합니까, 그것도 가장 끔찍한 제사의 방식으로 데리고 가시려 하나이까,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언약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이 자신을 다루어 오실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이 여기에는 무엇인가 깊은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비록 하나님이 그를 죽이셔도 그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명령에 대해 일체의 토를 달지 않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갠 다음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2절과 3절 사이에 날짜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니까 그 기간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22장을 보면서 받는 인상, 그리고 성경 여러 곳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서 칭찬하고 있는 구절들을 볼 때, 특히 히브리서 11장을 볼 때 이것은 즉각적인 순종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외아들을 독자로 바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나무를 벌려놓고 그 아이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놓고 이제 번제를 드리듯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그를 불러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렇게 부르면서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12:12) 꼬인 것 같은 인생의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인정을 받게 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믿음에서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순종해 보기 전까지는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남들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에는 ‘왜 그것을 순종을 못 해?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아멘 해야지!’ 그러나 그 명령이 자신에게 떨어지면 얼마나 순종하는 것이 어려운가 하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반대 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이 이렇게 자기의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명령일 경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자신의 독자 이삭, 100세에 낳아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세상의 모든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 아들, 그를 주님 앞에 잡고자 하였을 때 그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자신 안에 이러한 믿음을 하나님이 주셨구나, 그리고 이 믿음은 기꺼이 순종하는 믿음이구나,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한번 하나님 앞에 큰 순종을 하고 나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이 순종하였던 당사자는 영적인 근육이 생기는 것 같은 힘을 얻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자기를 능히 도우시며 기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건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설마, 아직도 아브라함의 마음속을 도저히 아실 수가 없어서, 어쩌면 이 인간이 가짜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이 실험을 하듯이 이 시험을 주셨는가?’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해서 베푸신 시험이었습니다. 정말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이었는데, 자신도 이정도의 명령에 실제로 순종할지 안할지 장담하기 어려웠는데 이제 이 상황에 부딪히면서 아브라함은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고 선택하시고 또한 어떠한 능력으로 자신을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는가 생각하며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 그 분을 의지하는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믿음이 발휘되는 것을 보면서 틀림없이 그보다 작은 하나님의 명령에는 기꺼이 순종할 결심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완전한 연합의 관계가 생기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꼬일 때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을 시험해 보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시험에서 우리가 어찌 반응하여도 하나님께 새로운 사실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참 새로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수준을 한 단계 아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나 저에게나 인생의 어느 한 시점들이 있습니다. 늘 기도하느라고 애쓰며 살았지만, 특별히 그 때에는 마음을 쏟아 부으면 이 기도제목에 승부를 내지 않으면 나머지 내 인생은 없는 것처럼 매달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실제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해서 매달린 적도 있고, 주님이 우리를 감동시켜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소원을 품게 하셨기 때문에 그 기도제목이 절체절명의 기도제목이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중심을 쏟으며 기도하게 되면, 막상 기도하기 전에는 내가 그렇게까지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 생각하였던 한계들을 뛰어 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에 잊히지 않은 학습이 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인생이 꼬일 때면 기대를 갖게 됩니다. ‘아, 지난번에도 이렇게 크게 인생이 꼬이는 것 같았는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이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났구나.’ 생가하면서 인생이 꼬일 때 하나님이 나에게 이전에 가보지 못한 길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찌르는 시늉을 하면 천사가 말릴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죽여도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때 번제의 역할을 하였던 이삭은 갓난아이가 아닌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험은 아브라함에게만 시험이 아니라 다 자란 청년이 거의 된 이삭에게도 잊히지 않는 시험이었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온전한 신뢰가 깨어지는 것 같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번제물이 되어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는 그 순간에 갖게 된 이삭의 충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다행히 이삭이 그냥 그 아버지의 착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고 할 때 그것은 자신을 살리는 광경을 보면서 아버지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을 넘어서는 신앙과 그리고 그 아버지가 의뢰하였던 하나님이 자기를 죽음에서 건져내시는 것을 보면서 이삭 역시 하나님 앞에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7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7-18) 제일 먼저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이 복은 이 세상에 있는 복과 신령한 복을 모두 포괄한 의미에서의 복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 되신 것처럼 아브라함을 당신과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지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주님은 잘 모르시는 것처럼 말하며 우리의 행복의 요소를 구체적으로 구하며 거기에 집착합니다. “돈을 주세요. 건강을 주세요. 집을 주세요. 차를 주세요.” 이렇게 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아니하고,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마도 큰 복을 주셨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기로 한 사람과 그리고 하나님이 심판하기로 한 사람들은 세상이 막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복 주시기로 결심하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 안에는 하나님 자신이 있어서 그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누리며 살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에 있어서 한 맺힌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에 가나 그는 기를 펼 수가 없었고 그리고 자신의 집안에 식솔들은 있었으나 집안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한처럼 맺혀있는 이 약점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그에게 “네 자손이 번성 할 것이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많이 자란 민족이 그 자체가 영광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애굽에서 많이 번성하였으나 번성하면 번성할수록 그들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대적을 이길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이 커다란 시험이 있고난 후에 말씀하시기를 “네 씨가” 여기에서 이 씨는 단수이지만 군집의 의미를 갖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너의 많은 자손이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전쟁에서 성문을 수중에 넣고 그 성문을 부수면 전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번성하는 자손만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번성한 자손들이 강성하여 그들을 향하여 악의를 품는 대적들의 문을 지배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보다 비상한 세 번째 복이 주어지는데 “만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어 성경대로 하면 “모든 사람이 네 안에서 (혹은 너 때문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면 아브라함이 누린 복들을 그들도 누리게 되면 아브라함을 대적하고 악을 행하게 되면 그는 또한 여호와의 원수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게 될 이러한 정도의 복을 아브라함에게 주셔서 그 자신이 하나님을 닮아 모든 사람에게 복을 받게 하는 인물이 될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크게 인생이 꼬인 것 같았을 때 하나님은 예전에 우리가 받을 수 없었던 비상한 복을 주십니다. 꼬인 사람 모두에게 그것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이 꼬였으나 그래서 이성의 이치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으나 눈에 보이는 삶의 사태들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 않고 오직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순종하는 사람, 바로 그러한 순종을 주님 앞에 온전히 보여드릴 때, 그 때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꼬인 그 인생을 통하여 당신이 가지고 계신 위대한 섭리를 펼쳐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인생을 살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꼬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크게 꼬인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크게 꼬였으면 그 크게 꼬인 것 때문에 하나님이 보여주실 위대한 역사도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꼬였을 때 좌절과 침체 속에서 엎드러지는 사람과 꼬였을 때 마음이 뛰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은 전자의 사람과 다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천하의 모든 만물, 심지어 내 인생 전부가 그 분의 손 안에 있고 나는 그분의 수중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한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나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지혜로 꼬인 나의 지혜로 당신 의지하면 펼쳐 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을 향하여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과 세상에 대한 사랑은 끊임없는 두려움을 낳습니다. 그러나 삶의 동기를 자신에게 내려놓고 내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다, 내가 사는 것도 주님을 위한 것이요 죽는 것도 주님을 위한 것이다라고 정리를 하고 나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삶에 대한 더러운 집착, 허락되지 않은 것에 대한 비정상적인 애착, 이러한 것들 때문에 우리는 인생이 꼬이는 것 같을 때 겁이 나고 두렵고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셔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으니 그러니 나의 인생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내 인생을 사용 하옵소서, 할 때 미답의 길에 들어서 만나지 못한 위대한 하나님을 찬송하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갈 길이 막혔을 때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도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품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 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로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1-5)
녹취자: 김세나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병 고치시는 사역을 병행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병든 자들을 고치신 사역이 두드러졌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깝게 말하면 그만큼 사회가 의료혜택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병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렇게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많은 사역이 그 이유 때문이었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 치유 사역 뒤에는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병자들을 고쳐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천국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이 불쌍해서 병을 고쳐 주시지만 항상 그 병 고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가 기대되었으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올 때 고쳐 주셨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심으로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렇게 낮고 천한 인간 뿐 아니라 병에 걸려서 오히려 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멸시를 받는 그러한 인간들조차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셔서 넘치도록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병 고치는 사역은 예수 오심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아주 중요한 싸인(sign)이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복음서에는 병든 자를 고치는 이야기가 사도행전과 함께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풍경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는 잘 지어진 유대인의 회당이 아니라 어느 집에서 이 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고 있었는데,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그저 오는 사람에게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질병은 나아야 하겠지만 만약 영혼의 질병이 치유되지 않는다면 그 육신으로 또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며 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을 고쳐 주시면서 동시에 영혼의 고침을 받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이 모여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도를 말씀하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단순히 병 고침만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육신이 매우 연약하여 혹은 불치의 병을 가지고 세상의 의사들이 희망이 없다는 판정을 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의원에게 가 그러한 판정조차 못 받아 본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불행의 끝자락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도 의지할 수 없게 되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인생의 벼랑 끝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서서, 성경에는 모였다고 되어 있지만 그곳에 사람들이 더 많이 들어가려면 서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큰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니, 감히 그 말씀에 거스르거나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때, 기상 천해한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말씀을 전하시는데 천정이 소리가 나며 움직이더니 부두둑 찢겨나가고 거기에 네 줄로 매달아 침대가 내려옵니다. 거기에는 중풍병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의 도를 전하는 것을 잠시 멈추시고, 그 중풍병자가 내려온 다음에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소자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선언하시며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 상을 가지고 집에 가라” 그러자 이 남자는 자신이 메어 왔던 작은, 지금 쓰는 것과 같은 침대가 아니라 소파 같은 낮고 가벼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들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3절에 보면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 올 새 무리 때문에 예수께 데려 갈 수가 없으므로” 계획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고치신다니 거기에 가서 안수기도라도 받아볼 요량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보니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들이 계획한 일이 꼬였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침대에 누워 있는 이 중풍병자의 낙심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그 꼬인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중풍병자가 주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아마도 깊은 사랑으로 이 환자의 고통에 아파했을 일행들은 창조적인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그리고는 지붕에 올라가 구멍을 냈습니다.
그 당시 지붕은 오늘날과 같은 지붕이 아니라 지붕에 사람이 올라가서 생활하고 그러기 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주택마다 조금 달랐지만 일반 서민 주택은 나무 가지 몇 개를 놓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르고 나무 가지를 놓고 진흙을 놓는 식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뜯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뜯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남의 집이었으나 워낙 중풍상태에서 죽어가고 있는 이 환자를 고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였기 때문에 이제 예수계신 곳 바로 거기에 침상이 떨어질 수 있도록 올라가서 잠시 지붕을 뜯는 작업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침대에 중풍병자를 내려 보냈으니 남의 집을 뜯어 놓은 것은 칭찬할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그 속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을 읽었던 것입니다. 네 사람만이 아니라, 아마도 말 못했을 중풍병자를 포함해서 그 모든 사람이 간절히 주님이 아니면 이 사람을 비참한 중풍의 상태에서 건져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여 살려 주소서! 하는 깊은 몸부림으로 주님을 찾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죄에 대한 고백이 나오지도 않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회개하는 저들의 마음을 보셨고 그래서 “네 죄를 사함 받았느니라”라는 말로 “네 병이 나았느니라” 말을 대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네 사람에 의해 떠 매어 왔던 중풍병자는 자신의 침상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살다가 인생이 조금만 꼬여도 낙심을 하거나 분노가 치솟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이제까지도 그렇게 꼬이고, 꼬이고 꼬인 길을 걸어서 여기에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는 가는 길을 막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꼬이게도 하시고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떠남으로 불순종하고 잘못된 일을 해서 스스로 우리의 인생의 미래에 꼬일 매듭을 만들어 놓습니다. 때로는 자신은 아무 의도가 없으나 항상 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며 인생이 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 인생이 꼬였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스스로 그것을 잘 풀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이 없다는 뜻은 아무 것도 해결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생을 꼬이게 만들었던 근원적인 일들을 우리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합니다.
(예화) 이번에도 PC방에서 멀쩡하게 생긴 젊은이가 알바생이 천원을 거슬러 주지 않는다고 시비가 붙어서 32번을 찔러서 무참하게 살해했습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뭐가 자신의 뜻대로 안 되어도 기다렸더라면, 살면서 나쁜 사람들을 만나 손해를 볼 때 일을 올바르게 해결할 마음을 가져도 증오심이 없었다면 그렇게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지 않았겠습니까?
보십시오. 이 사람이 예수께 네 사람에 의해 떠 매어져 왔을 때, ‘자, 이제 내가 예수를 만나는 구나. 눈먼 자 저는 자 귀먹은 자 그리고 심지어 중풍병자까지 일으켜 세우시고 혈루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셨다지. 아, 이제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이 지긋지긋한 중풍에서 벗어나는구나.’ 부푼 꿈을 안고 찾아갔으나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빗발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인생이 꼬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꼬이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들보다 제일 먼저 예수님을 만났고 또한 예수님은 그것을 보면서 극구 칭찬하시면서 “너희들이 그를 구원하였도다” 그를 메고 온 사람들과 특별히 그렇게 해서라도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이 중풍병자 안에 있는 믿음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칭찬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신앙의 증거가 많은 이유는 하나님은 내 예상대로 길을 열어 주시기 때문에 믿음의 증거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의 증거가 많은 이유는 정말 요셉의 고백처럼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어 주셨도다” 라는 고백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우리의 뜻대로 안 되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 크게 선한 것을 준비해 주셨고 그래서 좋아 보이는 길로 갈 때에는 좋은 결과가 아니었을 텐데, 좋아 보이지 않는 길로 들어섬으로써 진짜 좋은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향해 늘 변하여도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알 때뿐만 아니라 모를 때도 당신의 자녀에게 최고의 것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말하고 그가 마지막에 8장에서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오랜 인생의 경험 사역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리의 통찰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문제는 하나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렇게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지만, 우리들이 두려워합니다. 작은 파도를 보고도 마음이 조려서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내 예상에 빗나간 상황이 일어났을 때 못 견뎌 하고 두려워합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면 나를 가장 좋은 곳으로 이끌 것이라고 하는 믿음, 그 믿음으로 매 순간 예수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거나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오늘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 뜻대로 안 되는 것 같아서 낙심하고 슬퍼하였지만, 결국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그 안 된 일을 통해서 자신에게 더욱 좋게 해 주셨던 일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인생의 남은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이렇게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