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망치 않고 기도하는 믿음(눅18:7-8)
오늘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누가복음에서 보겠습니다. 18장입니다. 7절, 8절 보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커다란 하나의 권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도 1장에서 말하길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권세입니다. 그 권세는 그 권세 중에 가장 커다란 권세는 우리가 기도하고 무엇을 구하면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그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언제든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라고 하는 그 자체가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나겠다 그래도 광화문 네거리에 가서 대통령 좀 만나게 해달라고 그러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습니다. 하물며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과 언제든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를 갖는다 라고 하는 그 자체는 어마어마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가 바로 그런 특권을 활용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그 자체에는 권리라고 하는 측면과 의무라는 하는 측면이 함께 섞여있어요. 그런데 너무 한쪽에서만 보면 안돼요. 양쪽 다 함께 생각하면서 봐야한다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자녀는 결국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됐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구하면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기본적인 자격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근데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의 기도,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시기 전에 뭘 말하느냐면 모든 택하신 자들을 말씀하시지 아니하고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우리들은 크게 두 가지 사실을 보게 되는데 하나는 원한이라는 단어와 또 하나는 밤낮 부르짖는 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이 원한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뭘 보여주나 하면 기도의 제목 그 자체가 얼마나 절실하고 간절한 기도의 제목인지 마치 그가 원한을 품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절박하게 느껴지는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그런 말씀입니다. 모든 위대한 기도의 능력의 첫 걸음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물론 간절한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들으시는 모든 기도는 반드시 간절한 기도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원한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이렇게 늘 살아가면서도 이 원한이라고 하는 것은 늘 살아가면서도 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상황에 따라서 이 생각도 하고 저 생각도 하고 우스울때도 있고 일을 할 때도 있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있고 쉴 때도 있고 잠잘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삶의 모양은 시시각각으로 다양하게 변해도 이 원한은 밑에 깊이 깔려 있는 거예요. 내가 지금 웃지만 이 웃는 것은 잠시 물 위에 일어난 거품에 불과하고 실체는 이 원한이에요. 그래서 가슴에 한이 많은 사람들은 뭔가 그 사람 말에 동의를 하거나 가슴에 깊이 맺혀있는 그 한을 생각나게 하는 말만 건넬라치면 눈물과 설움이 복받칩니다. 왜냐하면 기뻐도 그 기쁜 것은 표피가 얇은 흙과 같고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아주 매우 커다란 원한의 실체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죠? 우리가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어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밥 먹으면서 기도해요. 그렇죠? 아무리 우리가 특별한 기도제목이 있어도 직장 집어치고 기도할 수 없어요. 다니면서 기도하잖아요. 그죠? 제가 목사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일생일대의 중차대한 문제였어요. 그래도 밥은 안 먹었지만 9시 되면 딱딱 직장출근하고 퇴근하면서 기도했어요. 그렇죠. 일상적인 삶과 결별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그리고 결별하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결별 안하고도 깊이 기도할 수 있는 때는 얼마든지 있다는 거죠. 근데 그러한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직장에를 나가고 밥을 먹고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를 하고 일을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표피적인 것일 뿐이고 이 밑바닥에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원한과 같이 원한의 특징은 뭐예요? 풀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가 없어요. 우리에게 그런 기도제목이 있느냐?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시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기대하셨던 우리의 기도생활 중 하나는 기도생활의 강도에요. 이 문제는 강도의 문제에요. 강도. 기도생활의 강도. 그게 뭐냐 하면 늘 주서 섬기는 기도제목이 아니라 그 기도제목들 중에서 특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 그리고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주님이 오셔서 이것이 옳다 그르다고 판단을 해주시거나 이것이 내 뜻이다, 내 뜻이 아니다 라고 선언을 해주시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만져주시는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나머지 그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야 할 그 기도의 제목이 우리의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원한처럼 남아 있느냐. 우리들이 무슨 생각이 마음에 떠오를 때, 이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건지, 인간으로부터 온 건지 헛갈릴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그거를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람으로부터 온 생각은 처음에는 열렬하고 뜨거운데 그 열렬하고 뜨거웠던 것이 열렬하고 뜨겁게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점점점점 사라져요. 근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은 처음에는 하찮아 보이고 그리고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됐는데 열렬히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점점점점 그 일에 대한 소원이 뜨거워질 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입니다. 그러나 양쪽에 해당되지 않는 또 다른 경우도 있을 수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처음에 열렬하게 뜨거웠던 생각이 기도를 하나도 안했는데 끝까지 계속 열렬하고 뜨거울 때, 그건 무슨 얘기냐면 육신적인 생각이 떠올랐는데도 그것들을 분별해낼 수 있는 기도의 은혜가 쏟아 부어지지 않으니까 육신적인 생각이 계속 불붙으면서 오래가는 거예요.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생각인데 처음에는 우리의 마음이 매우 영적인 것들에 둔감해져있기 때문에 희미한 감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요. 그런데 열렬히 기도를 해야지만 살아나거든요. 마치 불을 피울 때, 재가 많이 묻어 있으면 불이 꺼지지는 않지만 살지도 않는 것처럼, 그래서 후 불어서 재를 날려버린 다음에 씨알이 남은 그 불을 불어서 큰 불을 붙이게 되는 것처럼, 처음에는 작은 생각이 주어졌는데 마음이 너무나 영적으로 둔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잘 몰라요. 그런데 계속 기도를 안 해요. 그러다 결국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렸어요.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네 가지 경우를 말하면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냐면 기도를 간절히 해서 그 기도하는 제목자체가 풀리거나 혹은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깊은 이 원한이 맺힌 것 같은 그런 깊은 갈망이 되도록 까지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뜻은 잘 드러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수없이 매달려 기도해도 잘 모르는 오리무중과 같고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뭐 할일이 없어서 여러분하고 수수께끼 하겠어요? 문제는 뭐냐 하면 자기를 비우지 않는 것과 열렬한 기도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언제 여러분들에게 물은 적이 있죠?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인가? 그러면 여러분들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이 뭔지를 생각해보면 여러분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어요. 때로는 하나님 앞에 그릇 행할 때도 있고 불순종할 때도 있어요. 근데 그것보다도 그 맨 밑바탕에 있는 그 커다란 실체가 뭐냐 이거에요. 그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그것들이 해결되거나 응답되지 않으면 한이 되어 버릴 것 같은 그러한 제목들. 누르기만 하면 통증을 느끼는 그런 기도의 제목들이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런 기도의 제목이 없는 삶은 초점이 없는 삶이에요. 그런 기도제목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열렬한 삶을 살 리가 없어요. 한 사람의 신앙생활이 열렬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에요. 그건 하나님 앞에 뜨거운 사랑이 없다 그런 이야기하고 통한다 이거죠. 또 하나는 ‘밤낮 부르짖는’ 이라는 형용사에요. 이거는 뭘 의미하냐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원한 맺힌 사연을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이 밤낮 부르짖는 백성들이어야 된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밤낮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죠? 쉼없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 기도의 제목이 매우 위급하고 다급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열렬하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조건이 된다 그런 말씀입니다. 근데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주님이 이렇게 열렬하게 설명을 하시고 나서 근데 좀 김이 빠지는 것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인자가 다시 올 때, 그러나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여기서 이 믿음은 ‘그냥 믿습니다.’ 라는 믿음이 아니라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하면 열렬하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꾸준하고 열렬한 기도생활이에요.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뭐죠?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결론은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근데 그 말은 맞는 것 같아요. 제가 국민학교 때가 중학교 다닐 때에 교회에 가면 특징이 기도하는 것이었어요. 진짜에요. 그래서 우리 주일학교 다닐 때 배운 찬송이 ‘교회는, 교회는 기도하는 집, 날마다 모여서 기도하는 집, 교회는, 교회는 전도하는 집, 날마다 흩어져서 전도하는 집, 교회는, 교회는 봉사하는 집, 날마다, 날마다 봉사하는 집.’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었다는 거죠. 근데 기도 거의 하지 않아요. 60%, 70% 넘는 기독교인이 하루에 10분미만 기도해요. 한 시간 이상 기도하는 사람은 백 명 가운데 두세 명 될까 말까해요. 근데 그게 언제나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마지막 때로 다가올수록 세월이 흘러갈수록, 점점점점 더 기도가 약해지는 거예요. 근데 그게 영적인 역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세가 다가오면 사람들 마음이 굉장히 분주해지고 나뉘어 질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미 미리 보신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삶이 너무 너무 분주해요. 교통이 발달되면서 하루에 처리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됐던 일들을 하루 속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서 문명의 이기들이 발달하면서 사람이 편해지냐 하면 더 고달파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은 촉진되고 세상에 대한 관심은 점점 늘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유치원 다니는 애들도 바빠요. 너무 바빠요. 학원 여기 끝나면 저기, 여기서 저기로 여기서 저기로, 이렇게 모두 바쁜 삶을 살아요. 근데 기도생활에 대해서 예수님 말씀하시길 말세에 믿는 자를 몇이나 믿음을 보겠느냐, 다시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다시 말하면 변함없이 그렇게 가슴 저미는 것 같은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나를 위하여 가지고 그리고 나에게 열렬하게 기도하고 간구하는 그 그리스도인의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백성을 볼 수가 있겠느냐, 예수님께서 그거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기도는 하나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의무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격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지금도 기도할 시간이 없다 그렇게 생각을 만약에 말을 한다든지 생각을 하면 삶의 우선순위가 굉장히 많이 바뀐 거예요. 바쁜 것만 계속 쫓아가다가 마지막에 살아봐요. 그러면 껍데기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정말 껍데기밖에는 남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있어서는 급한 일보다는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 일부터 먼저 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죠. 시간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평생을 살아도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 실직을 당한다든지, 불구가 되어서 침대에 누워있지 않는 한 우리의 인생에서 시간이 남는 적은 거의 없어요. 그런 일은 없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환경을 자꾸 탓하지를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돼요. 그래서 삶을 단순화해야 돼요. 과도한 취미생활 억제해야 돼요.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억제해야 돼요. 분주하게 다니는 것 억제해야 됩니다. 특별히 지난 2년을 지내면서 여러분들은 김목사의 생활태도가 굉장히 많이 바뀐 것 하나를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간파하셨을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집회를 많이 안나가는 거예요. 물론 지금도 많이 나가는 편이에요. 다른 사람에 비해서. 근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깊은 깨달음을 주셨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내가 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받아들일 경우에는 내 자신이 소진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라는 거예요. 무론 그것도 제 자신의 능력의 한계라 그렇게 생각해요. 집회를 가면서 충전을 받고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비행기가 날라 가면서 공중 급유를 받듯이 새벽기도 시간에 이렇게 엎드려서 몇 시간 있고 그러지 않아도 그냥 집회 막 날라 가면서 옛날에 걸출한 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집회하기 위해서 비행기 타고 날라 가면서 막 기도하면서 막 불같은 충전을 받고 그리고 막 집회 장소로 이동하는 중에 짚차 속에서 막 불을 받아가지고 막 펄펄하고, 그렇게 못 살아서 미안해요. 근데 난 안돼더라구요. 그런데 점점점점 요구가 늘어나요. 엄청나게 늘어나요. 그때 나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선배들의 이렇게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근데 제가 이런 비유를 하니까 너무 불쾌하게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꼭 뭐하고 똑같으냐면 설교자는 오렌지주스하고 비슷해요. 뭐가 맛있는 게 있다. 저 사람 데리고 오면 뭔가 좋은 게 있다 그러면 전국의 교회들이 빨대가지고 덤벼드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막 빨아먹어요. 그리고 다 빨고 껍데기 나오면 탁 버리는 거예요. 다시 돌아보지 않아요. 그래 어느 한 순간에 그런 진실을 보게 되었어요. 아, 그렇구나. 그리고 정말 내가 한 순간에 몇 사람에 깊은 영향을 주는 그런 삶이 아니라 뭔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정말 이것을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렇게 뜻을 세우고 딱 결심했어요. 딱 2년 됐어요.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제가 이 교회당을 거의 비우지 않게 해주셨죠. 그래서 심지어는 동남아 갔다가 수요일이면 돌아왔잖아요. 그렇게 마음을 딱 정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도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어요. 말세 되면요, 우리를 그대로 방임하면 막 어마어마하게 분주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니요 라고 하는 말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요긴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배웠어요. 거기서 한번 서서 강연을 하거나 설교를 하는 것이 모든 설교자들이 부러워하는 자리라고 할지라도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된다 라고 하는 것들을 배웠어요. 심지어는 ‘NO' 했기 때문에 매우 절친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혹시 금이 가는 일들이 일어나도 역시 ’NO' 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심지어는 교인들이 내게 요구를 해도 'NO' 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주님이 염려하시는 것처럼 결국은 허우적대다가 내가 다시 올 때에 믿는 자를 너희 중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그 말씀에 그대로 적용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배우게 됐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정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면 여러분들과 함께 만나서 돌아가는 성도들이 여러분들을 보고는 ‘아, 그래 맞아. 내가 더 기도해야겠구나.’ 그런 걸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요. 어느 지체가 우리 교회에 와서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간증을 한번 나한테 하는데 그런 얘기를 해요. 교회 와서 누구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한동안은, 한동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한동안은 교회에 와서 누구하고 얘기를 해도 돌아갈 때는 주먹을 딱 쥐게 되더래. ‘그래 맞아. 성경에 깡통이야. 난 성경을 읽어야 돼.’ 항상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동일한 교훈을 우리들이 줄 수 있어야 돼요. 어떻게? 돌아가고 나면 기도해야 돼. 그렇게. 교회 와서 막 교제하고 갔는데 그래 나도 머리 자를 거야. 나도 볶을 거야. 겨우 그런 결심을 했어요. 나도 짧은 치마 입을 거야. 아니에요.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는 모든 괴롬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그 분도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어요. 그 분도 아직 빈들에 나아가서 기도하고 있는 그 순간에 일거리가 그분을 불렀어요. 깊은 밤 숙소에 들어가시면 수많은 병자들이 그분이 주무시던 숙소 앞을 가득 매웠습니다. 그래도 환경이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막지를 못했죠. 그죠?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기도하면서 살라는 아버지의 부탁에 순종하신 삶의 결과였어요. 그리고 그것은 그 분에게도 고통을 이기는 씨름을 동반한 것이었어요. 근데 심방을 하면서 이렇게 보면 정말 이 사람 기도 안하면 큰일 나는데 그런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렸으면서도 뭘 믿고 기도 안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더라구. 나는 그분들의 영혼을 매우 우려합니다. 그렇게 되면 안돼요. 기도해야 돼요. 그렇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