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기도할 때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꺾이지 않는 기도: 간절함(행 12:5) 2003.10.1 수요예배 1
2. 기도, 위기상황의 전면승부(행 4:29-30)2003.10.8 수요예배 13
3. 위기 속에서 주어진 응답(행 4:31) 2003.10.29 수요예배 21
1. 꺾이지 않는 기도: 간절함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12:5)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교회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계획들을 이루고 싶어 하시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즉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루신 죽었던 영혼의 거듭남, 그 재창조를 통해서 그렇게 거듭나고 주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을 영적으로 하나로 묶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이 세상과 모든 만물들을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해나감으로써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튕겨져 나가려고 하는 자신의 부패한 본성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들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이 교회에 속해 있어서 그 속에서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또 말씀을 듣고 무엇인가 우리 신앙생활을 위한 편리한 것들을 교회가 제공해 주기 때문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거듭난 사람들은 모두 교회의 일원이 되어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영적인 연결을 실제적으로 공고히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끊임없이 영혼이 강건해지는 비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이 진실하고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순종함으로써 살아가며, 그렇게 됨으로써 교회가 참으로 힘을 얻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교회가 건강하고 순결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게 됨으로 인해서 여러분 자신이 그 교회의 영적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신앙생활은 절대로 개인적일 수가 없습니다. 내가 오늘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그 삶이 나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의 문제이고, 내가 오늘 시험에 들고 죄에 굴복하는 것은 나를 더럽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를 더럽히는 것이고, 나 자신의 영혼을 망치는 일일뿐만 아니라 교회를 망치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영혼의 강건한 상태, 삶의 진정한 활기와 행복, 이 모든 것들이 교회와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영적으로 실제적으로 이렇게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항상 혼자도 모든 것을 잘해야 하겠지만 함께도 모든 것을 잘해서 교회의 실제적인 그리고 영적인 연합을 촉진해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 증거들,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큰 은혜와 놀라운 사랑, 이런 많은 사건들이 실려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가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주님이 행하신 크고 놀라운 기록들이 성경에는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가 골방에 들어가서 아무도 보지 않게 은밀히 기도하는 것만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모여서 마음을 합하여 온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는 그것을 하나님은 또한 기뻐하시고 그것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도행전 12장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열한 사도가 있었고 또 가룟 유다의 뒤를 이어서 맛디아를 뽑아 열두 사도로 맞추어서 사도행전 1장에서 교회가 모이기 시작했고 2장에서 성령을 받음으로 본격적으로 교회가 형성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도 예루살렘 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는 세 사람이었으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리고 요한이었습니다. 세 사람 다 예수님이 이 지상에 계실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었고 또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남다른 권위를 성도들을 향해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12장에서 이 헤롯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고 야고보를 죽여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렇게 훌륭한 교회의 대들보와 같은 지도자가 그렇게 큰일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이 선교 비교적 초기에 어이없게 단칼에 목이 베어져서 죽임을 당하게 되지요. 그것을 보고 백성들이 너무 기뻐하는 것을 알게 된 헤롯은 베드로마저도 그렇게 죽이기 위해서 생각을 하고 그리고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졌을 때에 예루살렘 교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제가 어디 외국에 집회를 나갔는데 오다가 죽었다더라. 그 시체도 못 찾았다더라. 그 소문이 들리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아마 내가 만약에 성도인데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의지하는 목회자가 만약에 죽었다, 하루아침에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되었다고 느낄 때 그 불안함과 그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이루 말할 것 없을 것입니다. 전 백번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는 저를 목양 해주는 다른 목사가 제 옆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한번 평신도 입장이 되어서 정말 그랬을 거다. 내가 학창 시절에 존경하고 사랑하는 은사 한분이 돌아가셔도 그렇게 며칠동안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데, 하물며 매주 만나고 매일 영혼에 영향을 주고 그를 통해서 내가 거듭나고 그를 통해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앞으로도 그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런 목회자가 교회에서 사라졌다 할 때 그 받을 충격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에 휩싸였던 그 말할 수 없는 야고보에 대한 사랑과 슬픔, 그리고 교회의 이 훌륭한 지도자들조차도 거침없이 목을 치는 이 헤롯정권의 무모함에 비추어볼 때 교회에 어떤 칼바람이 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순교 속에 죽어갈까? 하는 엄청난 두려움이 삽시간에 예루살렘 교회를 휩쌓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에 기도했습니다.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거나 아니면 로마에 진정서를 올릴 탄원 위원회를 결성하거나, 아니면 시위를 통해 해결해 보기 위해서 투쟁 위원회를 구성하는 대신에 온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새면 베드로도 죽을 것이라고 하는 소문이 파다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기둥 같은 두 지도자를 잃어버리고 남은 지도자들은 이제 체포 영장이 떨어져서 수배될 것이고, 그러면 교회에 어떤 위기가 닥칠지 아무도 모르는 정말 무서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전 이번에도 미국 집회를 하면서 그리고 돌아오면서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와서 받아가지고 가는 배급소 정도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도 구호품을 나누어 주던 광경이 생각이 납니다. 동사무소나 아니면 공회당 같은데 사람들이 쭉 줄을 서 있고 그리고 밀가루나 이런 것들을 봉지나 자루에 담아 주던 기억이 납니다. 공회당 같은데 사람들이 쭉 줄을 서서 밀가루 한 봉지라도 받아가려고 주는 건 조금 주는데 부대자루는 큰 것을 가져와서 줄줄이 기다립니다. 그리고 한 되 박씩 받아 가기 전까지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그 공회당에 있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리고 어린애나 어른 할 것 없이 쭉 서지요. 옛날에는 성당에서 우유가루 같은 것도 나눠 줬어요. 그 우유가루를 갖다가 신기하게 쪄서 과자처럼 만들어 먹기도 하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든 관심사가 오직 그 공회당이었어요. 그리고 성당이었어요. 그런데 일단 받아가지고 돌아서면 그 공회당과 자기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불이 나든지 도둑이 들어와서 부수든지 거지가 와서 자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벽에다 낙서를 하든지 개가 와서 오줌을 싸고 가든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왜? 어차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밀가루나 우유가루였지 공회당이나 성당이나 예배당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그렇게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정말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의 영적인 본질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정말 오늘날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교회에 와서 받아가고 그것으로써 끝나고 그것을 교회가 더 이상 제공해주지 못하거나 그렇게 제공해주는 일에 있어서 부족해질 때에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 그것이 오늘날의 교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교회의 영적인 특성을 얼마나 알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에 와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가고 그리고 그 이상 그 교회자체를 사랑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그런 편이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때에는 더더욱 우리들이 이런 진리들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오늘 이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교회에 닥치는 어려움들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골방에서 집에서 홀로 기도할 뿐 아니라, 또한 함께 모여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 앞에 한 마음이 되어서 교회 그 자체를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본적이 언제일까? 한번 물어보십시오. 20명씩 30명씩 교구에서 50명씩 100명씩 혹은 구역에서 10명씩 15명씩 함께 모여서 무릎을 꿇고 골방에서 하던 기도가 아니라 이제는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한마음이 되고 그리고 한뜻이 되고 너 나를 구별할 수 없이 공통된 소망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망을 품고, 그렇게 가슴을 찢으며 간절히 기도해 본적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되물어 보는 것입니다. 마치 아무상관 없는 사람들이 시간이 되고 음식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르르 몰려 와서 각자 앉은 자리에서 한 숟갈씩 퍼먹고 그리고 밥상 흐트러뜨리어 놓고 그냥 이빨 쑤시며 바깥으로 나가서 다시는 그 식당을 다시 밥 먹으러 올 때까지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만약에 우리가 교회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대단히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하늘같은 예루살렘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그 훌륭한 야고보 사도는 목이 베어졌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이 함께 엄습했을 때에 그들은 도저히 골방에서 각자가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모였고 그리고 모이지 못한 사람들도 모두 한마음이 되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가 그렇게 기도할 때 각자 골방에서 기도할 때 역사하셨던 것과는 또 다른 역사를 그 교회에 허락하심으로 말미암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온 교회 위에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셔서 하나님이 교회를 버리시지 않는 것과 그리고 그 교회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모든 교인들의 가슴 속에 깊이깊이 아로새겨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아무리 많이 변하고 인터넷을 통해서 설교를 접할 수 있고 심지어는 실시간으로 위성방송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심지어는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도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온 교인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온 교인이 함께 마음을 합해서 동일한 제목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러한 합심 기도는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그 필요성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1907년에 평양 대 부흥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장대현 교회의 큰 집회를 앞두고 선교사들이 모여서 넉 달 전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2시간씩 모여서 기도하기로 했는데 선교사중 몇 사람들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은 너무나 많고 매일 그렇게 모이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했을 때 어느 선교사가 단호하게 거절하고 “보십시오, 지금 저 영국 웨일즈에서는 부흥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 웨일즈의 부흥의 영향을 받고 감화를 받은 선교사들이 간 인도지방에서 특히 카아시 지방을 중심으로 엄청난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어서 수많은 영혼들이 회심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게 역사적으로 1904년에서 1905년 1906년 그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식을 듣고 중국에 모여 있는 선교사들이 기도하기 시작했다는데 “우리 조선에서 이런 성령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기도할 시간을 접고 우리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오히려 기도할 시간을 별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다면 성령님이 더 크게 역사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매일 2시간씩 모여서 기도하던 것을 바꿔서 4시간으로 늘릴 것을 제안합니다.” 그렇게 제안했을 때 그 제안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바쁜 통에 온 선교사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하루에 4시간씩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장대현 교회의 역사적으로 기록이 남는 1907년 1월에 대 부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개인이 골방에서 하는 기도도 사용하시지만 함께 모여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고, 그것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 속에 있는 모든 영적인 연결을 강화시키시고, 그들이 모두 한마음과 한뜻이 되게 하시고,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서 개인이 교회 속에 녹고 교회가 개인 속에 녹아들어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드러내는 가운데 부르짖는 그 기도를 사용하셔서 꿈에도 그리워하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느 정도 은혜를 주시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필요를 위해서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정말 필요한 것은 개별적인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교회를 향해서 말씀 하시는 음성이 무엇이고 교회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써 함께 연합되어 있는 이 교회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하고 이 교회는 전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무엇을 사모해야 되는지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기도하며 각자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아버지 앞에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 꿈에도 그리던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교회는 그를 위하여 빌고” 많은 예루살렘의 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들은 모두 개개인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느 시기든지 어떠한 은혜 아래 있든지 개개의 문제가 없는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깝게는 개인의 건강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족들의 행복에 이르기까지, 물질의 염려로부터 시작해서 자녀교육과 사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문제들을 개개인이 다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골방에서는 그것들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함께 모인 이 사람들의 기도의 제목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기둥과 같던 야고보 사도는 목이 달아나고 그리고 베드로마저도 죽임을 당할 텐데 “하나님 이 교회를 어찌하시렵니까?” 그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면서 그들의 마음은 한 가지 제목으로 모아졌고 모아진 그 초점은 하나님 앞에 뜨거운 기도가 되어서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때에 강력하고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어렸을 때는 돋보기를 가지고 장난하며 잘 놀았습니다. 돋보기 하나를 가지고 한 지점에다 비추고 또 한 아이가 다른 돋보기를 가지고 그 지점에다 또 비추고, 또 한 아이가 돋보기를 가지고 와서 다른 지점에서 한 곳을 향해 비추면 세 개의 렌즈의 초점이 모아지면서 그 추운 겨울날에도 종이가 불붙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가 하나님 앞에 문제없는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개인적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은 아름다운 것이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기도와 함께 동시에 교회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고 또한 영혼이 놀라운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질문을 해 볼까요?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기신 말씀이 무엇이었죠?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승천하실 때에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오백 명이었다고 그래요. 그랬는데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한 사람들의 숫자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은 120여명의 성도들이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그 숫자를 비교 해보면 그 사이에 380명이라는 사람은 참여하지 않았거나 참여하였어도 중간에 돌아갔거나 그렇게 된 것이죠. 120명이 기도했습니다. 뭘 기도했을까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성령을 주실 것을 기다리라고 그러신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마 성령을 기다리라고 그랬으니까 그게 부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하여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예수님이 구하라고 한 것을 기도했겠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겠죠.
그런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들에게도 개인적인 문제가 없었을까요?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에 그들이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어느 지점인지는 모르지만 갈 사람은 다 가고 한마음이 되었고 그리고 간절히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성령강림 사건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떠나갔던 380명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때 성령의 불을 받은 120명의 사람들이 이제 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으로 돌풍을 일으키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후에야 다른 사람들도 와서 은혜를 받았겠지만 그 처음 성령 부어주시는 그 놀라운 역사에 참여했던 그 영광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와 교회적인 관심사,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개인의 기도제목과 교회의 기도제목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다 보면 정말 성령님께서 기도 속에 은혜를 주실 때에는 내 기도의 계획이 소용이 없어요. 나는 갈 때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 위해서, 우리 동생 만사형통, 우리 형 물질축복, 시집 못 간 나이 많이 든 여동생들 모두 시집가는 것 .......등등 잔뜩 써 가지고 왔는데 어느 순간에 성령이 역사하시기 시작하면 그 기도제목과는 상관이 없고 성령님은 성령님이 바라시는 바대로 기도 하게끔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그래서 손해가 납니까? 나는 우리 아버지 건강, 우리 엄마 물질의 축복, 우리 형 만사형통, 다섯이나 되는 내 동생 빨리 시집가는 것, 쭉 적어가지고 갔는데 그것을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아주 안 좋게 인도하시면서 “왜 하나님 이렇게 내 기도제목을 안 들어 주십니까?” 그러면 “네가 교회 왔지만 온 교인이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은혜를 위해서 기도하느라고 그 기도는 네가 뺏잖아.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 기도를 들어 주겠냐? 거래는 분명히 해야지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거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그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의 기도제목들을 찾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요.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기도에 깊이 참여하는 역사가 교회를 위해 함께 빌 때에 많이 나타납니다. 지금 일일이 증거를 다 댈 시간이 없지만 어쨌든 그런 놀라운 역사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옥문이 열려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오는 꿈도 꿀 수 없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유익을 누가 받게 되었습니까? 온 교회가 함께 누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구역예배를 해도 왜 그렇게 애절함이 너무 없어요. 특히 주일날 교회에서 하는 것을 보면 먹는 것들은 왜들 좋아하는지 밥 실컷 먹고 무슨 과자를 또 먹고 커피 마시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그 다음엔 온 구역의 식구들이 함께 손잡고 뜨겁고 간절하게 기도해서 구역예배가 끝나고 나면은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여졌구나. 그리고 네 안에서 일하는 그 하나님이 내 안에서도 일하시고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한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섬기고 동일하게 우리의 마음에 사무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모함과 기대들이 있구나.’ 이런 것들을 확인하고 가슴이 ‘정말 우리는 하나구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한 몸 되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인바 되었고 그리고 우리는 각자 삶의 환경이 다르고 주소는 달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마음이 하나이고 그리고 정말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삶의 환경은 달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구나. 내가 그런 인생의 좌표 위에서 그런 목적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이 사람들이 나의 동지이구나.’ 이런 것을 느끼고 헤어질 수 있는 그런 구역모임이 되어야 하잖아요?
나는 구역장 여러분들에게 깊은 각성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정말 그러기 위해서는 일주일 동안 자신이 그런 모든 일에 있어서 모본이 되고 정말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개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이고 우리가 동일한 그 구속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그 일체성을 갖고 돌아가는 그런 구역모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냥 형식적인 얘기 나누고 그렇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이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교제나 하다가 일어나는 그런 모임을 이끌어 가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선한 목자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인 모든 지체들이 시간이 흐르면 점점 함께 모였을 때 하나의 공동된 목표를 가지고 우리 모두가 한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요청에 대해서 점점 더 의식하는 바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돌보고 그들을 지도하는 이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너무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영혼을 사랑하고 정말로 영혼들을 위해서 섬기기 위해서 자기가 부름을 받았다면 이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가 기다려도 이 세상의 행복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수시로 “하나님이 지금 부르면 얼마나 좋겠냐.”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러지요. “ 아, 나는 그래도 목사님 마음 아프게 해 준적 없는데.......” 존재 자체가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아프게 한적 없어도 여러분 살아 있는 것 보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아픔이에요. 그러니 더 완전하시고 비교 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떻겠어요?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때
그러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도 거룩해지지 않는 이유는 뭐냐면 기도도 별로 안하지만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보고 자기 마음만 알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려야 해요. 여러분은 알 수 있어요? 지금 우리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본적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를 내려다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예배 한 번 드리고 뭔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 때문에 자기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또 다른 교만에 빠져서 기도도 하지 않고 겸비해지지도 않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도 없이 머리만 커져가는 여러분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한번 생각해 본적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진리를 많이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것대로 살아가지 않고 변화되어가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한 많은 지식은 이후에 여러분들이 받을 심판을 더 많이 예고할 뿐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구하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정말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항상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힘써서 모여서 기도하고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이 교회와 교회를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영적생명에 관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지를 깨닫고 그 일을 위해 많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렇게 몸으로 많은 시간을 기도하느라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못했던 것, 기도하기만 할뿐 하나님께 효도하지 않고 살 때보다 너무나 하나님 중심으로 효도하기 위해서 공경하기 위해서 차마 빼놓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기도하지 못했던 것들을 오히려 하나님이 그때 더 잘 이루어 주십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예화)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우리의 자식중 하나가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그랬지’ 그러고 맨 날 와서 부모를 조르기만 하면 부모는 열심히 조를수록 신경질이 나는 겁니다. 인간은 돼먹지도 않은 녀석이 맨 날 기도하는데 고집으로 부모를 꺾으려고 그런다고 그러면서 뒤통수나 한 대 얻어맞아요. 기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자신이 변해가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되는 것이지, 열심히 기도해가지고 하나님 손목 꺾어서 주머니에 뭘 훔쳐 오려는 그런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자식이 마음에 들어봐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교회 생활도 잘하고 사람들만 만나면 사람들이 칭찬하고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봐요. 그러면 뭘 달라 하지 않아도 맨 날 가는 거예요. 뭐 필요한 것 없니? 뭘 좀 줄까? 춥지는 않니? 그렇게 먹어서 되겠니? 따뜻한 옷을 사줄까? 뭐가 필요하니? 돈 줄까? 그러면 돈도 많이 줘요. 왜? 속 썩일 때는 돈 주면 항상 주머니 속에 돈 주면서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이 돈 갖고 또 뭔 짓을 할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애가 착해지면 돈도 자꾸 주고 싶어요. 어차피 그것가지고 잘 쓰니까 돈을 주면 그것을 다 모아서 헌금도 하고, 가난한 사람 구제도 하고 그러면 더 사랑스럽지요. 그러니까 자꾸 주는 거예요.
오늘 여기 와서 여러분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해봐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이 교회를 향해 주고 싶어 하시는 그 소원, 교회를 향해 갖게 하시고 싶은 그 바램을 따라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해 봐요. 그러면 하나님이 오랫동안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던 것들을 그 사람이 마음이 당신에게 합해서 들어주시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에요. 나는 솔직히 목사로서 여러분들에게 개개인의 어떤 시시콜콜한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것을 잘했다는 것은 아니에요. 다 기도하면서도 그런 것까지 다 기도해야죠. 그런데도 솔직히 잘 안돼요. 그런데도 다만 어떤 것을 느끼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맡겨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고 순전하고 온전한 삶으로 주님의 마음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셔.’ 그래서 내가 그분도 참 하나님 많이 사랑하시는 목사님이신데 훨씬 선배 목사님이시지요. 그분 목회 잘하고 계시죠. 그분 만나서 개인적으로 잠깐 대화를 나누시면서 그러셔요. 기도 얘기가 나와서 “아, 김 목사 말도 마.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신지 어떤 때는 내가 이러이러한 제목으로 기도를 좀 해야 될 텐데 하면 할 기회를 안주신다.”는 것이에요. 왜? 벌써 이루어 주시니까. 전혀 그런 일이 있나 하는 표정인데 그럴 때 아멘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러시는 거예요. 설교하러 강대상에 올라가는데 전 강대상에 대한 욕심이 없거든요. 진실하게 말씀이 선포되는 것에 대한 욕심이 있지. 깡통을 놓고 설교하면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런데 너무 편해 설교하기가. “목사님 강단에서 내가 많이 설교해봤지만 진짜 설교하기가 편하네요.” “아, 김 목사 말 마. 강대가 있는데 너무 불편하고 교회랑 어울리지 않아서 아, 새것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시간이 없어서 기도는 못하고 그저 ‘주여’ 그러고 끝났데요. 그러고 저녁때 들어갔는데 새벽 기도에 올라와서 그 기도를 하려고 그랬는데 어느 집사가 오더니 그러더래요. “목사님 아무래도 이 강대가 아닌 것 같은데 제게 꼭 한번 강대를 교회에 해 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뭐예요? 그것 지금 막 내가 기도 하려고 그러던 건데”
그런 간증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 안하고 ‘목회자를 위해서 왜 기도해? 지 기도로 지가 살지’ 그러고 그냥 자기 것만 위해서 기도하는데 어쩜 그렇게 오래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시냐 그러는데 사람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어 봐요. 그러면 여러분 밖에서 애들이 막 우는 소리가 나는데 남의 집 애하고 자기 집 애하고 울면 뉘 집 애 쫓아가겠어요? 그거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안 쫓아가면 그것은 계모지. 계모도 그렇게 안 해. 사랑스런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그 교회를 위해서 지체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해 봐요. 그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 제목까지도 들어 주십니다. 좀더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요. 그 다음 넘어 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뭐라고 그랬냐 하면 이렇게 나와요. 어떻게 빌었다고 나오죠? “간절히” “간절히 빌더라.” 그런데 이 희랍어 단어가 ‘에크테노스’ 라고 하는 단어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어디서 왔냐하면 ‘테이노’라고 하는 동사에서 왔어요. ‘엑스’는 ‘바깥으로’ 라는 뜻이고 ‘테이노’는 ‘뻗다’입니다. 그러니까 ‘에크테이노’가 되면 ‘쭉 뻗는 것’을 의미합니다. 쭉 뻗는 것과 간절한 것이 무슨 상관이 있나? 이런 생각이 들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진짜로 원래의 의미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자면 ‘간절히’라는 말이 ‘꺾이지 않게’ 그런 의미라는 말입니다. '꺾이지 않게 그렇게 쭉 뻗어가도록 하나님께 빌더라.' 그런 얘기입니다. 얼마나 재미있어요? 그림 같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는 해요. 그런데 모든 기도가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모두 진실해요. 그런데 모두 진실한 기도라고 할지라도 모두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어떤 기도는 진실하게 출발했는데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데 동일하게 기도했는데 진실하게 기도했지만 거기까지 다다르지를 못해요. 절대로 다다르지를 못해요.
(예화)하늘에 새까만 꼭대기를 향해서 날아가는 전투기를 향해서 소총을 겨누는 사람은 없어요. 그것은 몇 백 미터 못 날아가고 비행기는 몇 킬로미터 꼭대기에 떴는데 쏴봐야 나 여기 있소 그렇게 알려가지고 기관총 사격이나 봤지 그걸 왜 하겠어요? 그런데 미사일은 맞춰요. 허공을 뚫고 몇 킬로미터를 날아가서 필요하면 몇 십 킬로미터 몇 백 킬로미터를 날아가서 비행기를 맞춰요.
우리의 기도가 진실하다고해서 하나님 앞에 모두 똑같은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기도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진실해야하고 그 진실한 기도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의 가장 중요한 요건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기도가 똑같은 효력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에요. 효력을 불러오는 기도는 꺾이지 않는 기도에요. 꺾이지 않는 간절한 기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교부들은 이 기도를 활을 쏘는 것에 비유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말하기를 “쏘자, 쏘자. 기도의 활을 쏘자. 오늘도 우리의 온 마음을 모아서 우리의 마음에 시위를 당겨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의 활을 쏘자. 새가 날아다니는 첫 번째 하늘을 지나 악한 영들이 판치는 두 번째 하늘을 뚫고 삼층천으로 날아오르기까지 우리의 기도의 활을 쏘자.” 그것이 결국 뭐냐면 꺾이지 않는 꿋꿋함의 비결이 간절함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환경에 의해서 꺾일 수 없고 내부적인 염려나 근심에 의해서 꺾일 수 없고 마치 하나의 과녁을 향해서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는 활시위를 떠난 활처럼, 그 과녁에 꽂히기 전까지는 어떠한 난간과 바람도 뚫고 날아가는 그 활시위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진 화살 끝에 뾰족한 것이 오로지 그 과녁 하나에 박히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던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끝을 예리하게 벼려서 하나의 기도제목을 향해서 하늘을 향해 간절히 날아오르는 화살과 같이 그런 마음이 되게 해야 됩니다.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날아갈 때 쉬었다 가는 법이 없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법이 없이 삼킬 듯이 오로지 그 과녁 정 가운데를 향해서 날아갑니다. 우리의 기도도 모든 기도의 능력이 이런 꺾이지 않는 간절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꺾을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너무 간절하면 육체의 연약함도 이 기도를 꺾을 수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님의 기도가 그런 기도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면서 기도할 때 육체의 힘이 모두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그 기도를 끊이지 않았더니 천사가 와서 예수님께 힘을 주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를 계속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힘을 더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그렇게 떨어지는 그 간절한 기도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에 의해서도 꺾이지 않는 그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난과 그 끔찍한 죽음의 위협 앞에서 사람의 몸을 가지신 예수님께 어찌 육신적인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두려움의 바람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벼려진 활촉을 가진 예수님의 그 기도의 활을 땅에 떨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모든 유혹과 모든 근심도 물리칠 수 없었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홀로 땅에 두고 가야하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사랑의 정도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르는 기도의 그 활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간절함으로 기도했을 때 무엇에 의해서도 꺾일 수 없었습니다.
전 여러분들을 보면서 목회자로서 느끼는 것은 참 착해요. 그러나 교만하진 마세요. 비교적 착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은혜를 받고 기도를 하면 진실해요. 저한테도 깊이 느껴져요. 그런데 열렬한 간절함이 결핍되어 있어요. 잠시 진실하다가 다시 또 때가 묻거나 잠시 따끈따끈한 마음이 되다가는 다시 또 식어져요. 그리고 다음에 와서 또 뉘우쳐요. 그렇게 해서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위대한 일들을 위해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없어요. 꺾이지 않는 단호함과 꿋꿋함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것은 기도의 간절함, 한번 하나님 앞에 결심하고 내린 일들에 대한 강인한 집착,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겠노라고 기도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했지만, 그 다음날부터는 잠 오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또 즐거움을 위해서 마음으로 범죄하고 싶으면 범죄하고 이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수없이 진실해져도 항상 진실해지는 그 순간만 기도의 은혜가 있을 뿐 제자리에서 맴돌고 더 이상 영적인 삶에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돼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피 끓는 삶입니다. 제가 이번에도 미국에 가서 목사님들 모아놓고 “내가 새로운 목회방법 하나 가르쳐주겠다.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목회방법을 내가 소개해 주겠다.” 다들 눈이 반짝반짝 하셔요. “뭔지 압니까? 토혈 목회, 피를 토하는 목회, 그리 안 되기 때문에 교회가 자꾸 병들어요.” 오늘도 비행기 날아오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더 많이 죽고 더 많이 피 토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 텐데.......
토혈의 기도, 생각해 봐요. 마음에 깊이 사로잡힌 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크고, 복음을 통해서 나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게 하셨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피를 토하는 마음, 그렇게 살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피를 토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을 다 불태우고 없애버려도 꼭 그렇게 되고 싶고,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나에게 이 큰 은혜를 주시고 이 찬란한 복음의 빛을 주신 예수님께 마지막에 가서 뭐라고 말할까? 몰라서 못 산 사람들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변명하면 될 것이고,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 뵙지 못했다고 변명하면 되겠지만, 예수님도 만나고 인격적인 사랑도 알고 진리도 깨닫고 복음의 비밀도 터득하고 있는 우리가 만약에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우리가 변명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렇게 많이 구원해 주셨고 그렇게 많이 깨닫게 하셨고 많이 사랑해 주셨지만, 더 많은 빛을 주셔서 우리의 죄도 보게 해 주셨고, 거룩함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셨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보다 우리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 이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도다.
인애하신 우리 구주 의의 심판 하시는 날
곧 가까이 임하는데 믿는 자여 어이 할고
눈을 들어서 사면을 봐요. 나는 이번 10월에도 중국 가는데 중국만 갔다 오면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어요. 이번에 미국 가서도 느꼈어요. 너무너무 할일이 많아요. 할일 없는 사람은 나한테 시간 좀 줘요. 너무너무 할일이 많아 사방에서 하나님이 주의 일꾼을 부르셔요. 진리를 모르고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 주님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유리하며 방황하는 사람들, 얼마나 이 세상이 할일이 많고 정말 추수할 일꾼들이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어떤 때 변화 안 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어쩌면 이 일보다도 더 생산적인 일이 있을지 몰라.’ 왜? 너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목숨까지 걸기로 작정을 했는데 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인도자가 없이 모여서 성경 읽으면서 예배드리는 중국에 있는 그 많은 지체들. 생각해 보세요. 600~700명이 모이는데 오죽 와서 예배를 인도해 줄 사람이 없으면 여기서 가져간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놓고 주일 예배를 드려요. 한번 가서 설교해 주면 얼마나 고마워 하겠어요? 내가 만난 청년은 예수 믿은 지 3년 된 이제 29살 청년인데 목회를 하는데 얼마나 모이냐니까 만 명이 모인데요. 이제 거듭난 지 2~3년 밖에 안 된 젊은이가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오죽 하나님이 맡기실 데가 없으시면 그 젊은이한테 1만 명의 사람을 맡기시겠어요? 그것을 나누어지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어요? 너무너무 할일이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 은혜 조금 받고 나면 맨 날 자기 문제만 가지고 씨름하다가 날 새요. 은혜 좀 받고 나서 뜨거워지면 또 하나님의 뜻대로 좀 살아볼까? 이러다가 또 무슨 돈도 없고 애들도 속 썩이고 남편이 어렵고 지지고 볶고 하다가 다시 또 가서 펄떡 퍼져서 죄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고,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냐하면 다 알아요. 3번씩이나 공부를 해서 다 정리가 되어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 다 가르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끊지 못하는 세상사랑,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창조의 목적을 위해서 살도록 은혜를 주시는데 그 은혜가 쓰여 지는 곳이라고 하는 것이 기껏해야 자기 허덕이고 살아가는데 그러다가 볼일 다 보고 그것도 뭔가 결단을 하고 자기를 차고 나가고 뛰쳐나가서 그래서 무엇인가 에크테이노 쭉 뻗어서 꺾이지 않는 열심 으로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미션을 찾아서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을 보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장엄한 은혜의 지식들이 자신 속에 일어나는 정욕들이 불러 일으켜지는 것들을 덜 태우는 그런 용도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주신 주님이 보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관건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를 보면서 말이죠. 교회를 보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시고 이 교회의 지체로 삼아 주셨는데 거기에 한 몸의 일부가 되어서 이 교회가 이 세상을 끌어안는 어머니로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끌어안고, 그리고 이미 끌어안고 있는 신자들을 잘 가르치고 그래서 창조의 목적과 상관없이 튕겨져 나가서 살아가는 불행한 인간들에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힘을 공급해 주는 도구가 되고 그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는 실제적인 지식과 도전들을 주고,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그런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교회의 한 일원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기도학교 사경회를 시작해요. 해마다 하는 것이에요. 해마다. 그런데 좀더 강력한 변화가 필요해요. 와서 그냥 말씀을 엔죠이 하고 말씀의 은혜 받으면서 여름 가을 동안에 있었던 마음의 근심을 털어내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진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셔서 우리의 심령에 비수를 꽂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으시고 그래서 우리를 새 사람 만드시고 매일 일어나는가 하면 넘어지고 섰는가 하면 쓰러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에크테이노 쭉 뻗어서 무엇에도 쉽게 꺾이지 않는 그 꿋꿋함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교회를 세워놓으신 그 목적을 위해 기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생을 살아야 되잖아요? 기도합시다.
2. 기도, 위기상황의 전면승부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29-31)
지난 시간부터 교회가 기도할 때라는 시리즈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는 초대교회가 처음 맞이하게 되었던 커다란 핍박이 4장 전체에 걸쳐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붙잡혀 갔고 그리고 거기서 말할 수 없는 문초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혹독한 고문과 문초로도 이 사도들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예전에 성령받기 전에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의 충만한 부어주심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받게 되자 그들은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 복음에 대한 확신에 불타는 사람들이 되었는데 그 복음에 대한 확신에 불타는 마음 한복판에는 자기를 위해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사도들이 받았던 그 불 한복판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행하신 일들의 의미를 온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생의 모든 고통 하는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경험했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 뜨겁고 진실한 사랑이 복음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종말이 임박한 사람들처럼 힘써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그 놀라운 은혜밖에는 아무 희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언제나 그 복음을 항상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 복음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 안에 있는 적대감과 반감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자 하는 반역하는 죄의 경향성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은 그런 죄의 경향성을 버리고 하나님과 화목한 길로 돌아오도록 부르는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항상 모든 사람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복음을 통해서 눈에 비늘이 벗겨지는 경험을 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자기에게 주신 그 구원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자신들이 막연히 알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생각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의 경험을 통해서 매우 분명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났으니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 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 전에는 어떠한 하나님과의 화목도 없고 그들 위에 진노가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 복음은, 죄를 사랑하고 죄 가운데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죄인의 귀에 들리는 기쁜 소식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복음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강력하게 역사하는 곳에는 그 복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역사도 강력하게 일어났지만 그 강력하게 역사하는 복음 앞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반역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기반이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런 일이 이 4장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들이 한 일은 무슨 거리를 소란하게 한 일이 아니었고 무슨 폭력으로 시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소란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동이었지 결코 그 사회를 망가뜨리거나 해치거나 이웃의 평안을 깨뜨리는 그런 종류의 소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싫어하는 무리들이 사도들을 붙잡았고 그리고 문초했습니다. 포박되어서 끌려가 힘없이 문초를 받고 있는 이 사도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강력한 성령의 권능을 힘입었던 사람들이었고 병든 자를 낫게 하고 그리고 죽은 자를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성령의 권능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금 아무런 힘없이 또 공교롭게도 문초를 받는 그 자리에서는 어떠한 기적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문초하면 문초를 당하여야 했고 때리면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모습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 보여주신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권능과 권세를 한 몸에 가지신 분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당신이 마땅히 당해야 할 핍박을 피하시거나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몸에 지워주신 그 십자가의 무게를 경감시키신 적이 없었던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능력 많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능력 많이 받으면 고달파요. 그리고 능력 많이 받으면 편하게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밭길을 가야해요. 능력을 많이 주시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일도 양도 많이 주셔서 그래서 고달프게 사역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런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서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쫓아 능력을 따라”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능력의 분량에 맞추어서 그것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런 뜻입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당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또 한번 커다란 소동을 맞이하게 되었겠죠.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갔고 사도들이 끌려갔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끌려갔고 아마 교회는 정말 불안하고 근심과 걱정에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사도들이 실컷 얻어맞고 그리고 성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도들이 석방되었지만 그들이 받았던 이 혹독한 문초는 기독교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의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사실 있었던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모두 고했습니다. 그때 성도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아, 이제 큰일 났다. 드디어 이 로마당국이 우리에게 여태까지는 우리를 유대교중의 일파라고 생각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주었는데 왜냐하면 당시 로마시대 유대교는 많은 특권을 누렸어요. 왜냐하면 민족종교였기 때문에 종교정책에 대해서는 그 나라의 고유한 종교에 대해서는 로마가 상당히 관대했어요. 왜냐하면 어차피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제국을 종교적으로 통합할 수는 없다고 지혜롭게 판단한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땅덩어리의 그 다양한 종교를 통합할 수 없다고 보았고 만약에 통합한다고 그것을 무력으로 억누른다면 종교적인 반감이 로마에 대한 대항으로 번져서 제국을 통치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두 가지만 잘하면 그냥 묵인해 주었습니다. 황제를 잘 숭배할 것, 두 번째는 세금을 정확히 낼 것. 두 가지만 하면 나머지는 상당한 부분 자유를 주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기독교와 유대교간의 갈등이 초창기에 있었지만 로마는 유대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거기에 개입을 해서 덕을 볼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죠. 그런데 이미 성령강림 사건을 시점으로 해서 결국 기독교는 유대교의 품에 있다가 정체를 드러내고 바깥으로 유대교의 일파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면서 완전히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파악하고 눈치를 채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직적이고 강력한 박해가 이제 예고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전에는 유대교 사람들로부터만 박해를 받으면 됐었는데 이제는 빌라도와 헤롯 같은 로마에서 파송된 지역의 총독들을 맞서면서 핍박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게 되었을 때 이것은 여기 기독교인들에게 최초의 박해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그 두려움이 어땠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무시무시한 두려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로마와 협의를 하고 종교의 자유를 정치적으로 쟁취하기 위해서 데모를 하거나 사절단을 파견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하나님 앞에 온 교회가 그 소식을 듣고 간절히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자신들 앞에 펼쳐진 선교적인 상황이나 교회적 위기를 계산하고 생각하고 염려하고 머리를 싸매는 대신에 사도들의 그러한 보고가 있자마자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도 없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우리의 눈길을 끌어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비는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이 하나님이 우리를 하감하여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아 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의 모든 삶의 상황을 지켜보고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분이고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품상 모르시는 것이 없고 하나님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사건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 우리를 하감하여 주시옵소서하는 이 기도는 단지 일반적으로 만물을 모두 아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를 기억해 달라고 하는 그 말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특별한 상황을 하나님이 기억해 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커다란 핍박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에 특별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었던 것이죠. 언제든지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우리가 특별히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이 상황이 매우 특별한 상황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많이 사랑하시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어린 소자 하나도 모두 예수의 피로 사신 생명이기 때문에 손상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그 사랑하는 교회의 몸을 뒤흔들고 핍박으로 상처를 받게 하심으로써 그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그 모든 성도들이 특별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할 시기에 마음이 하나 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실제적인 연합을 공고히 하시는 일들을 하십니다. 교회를 이처럼 어려움을 통해서 섭리 속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섭리와 경륜은 우리들이 쉽게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놀랍고 뛰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으로 그리고 아주 뜨겁고 놀라운 사랑으로 이렇게 교회를 어려움 가운데 잠시 버려두는 것 같이 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흩어졌던 교회의 마음들을 고정되게 하고 성도들 사이의 흩뜨려졌던 실제적인 연합들을 마음을 모으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이 어려운 때를 허락해 주셨고 이 어려운 때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인도를 받던 이 예루살렘 교회는 누구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한 마음으로 간절히 매달려서 기도하게 되었던 것이죠. 이게 바로 성숙한 교회, 은혜 받은 성도들이 있는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교회에서 은혜가 사라지게 되면 모든 성도들은 어쩜 그렇게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도를 해도 기도도 별로 안하지만 어떻게 기도를 해도 기도제목들은 모두 자기중심적이에요. 그래서 자기를 위하고 자신이 중심이 되는 그런 기도의 제목들로 가득 차요. 그런 식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되죠.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게 될 때에는 교인들이 어쩜 그렇게 교회가 당한 아픔과 어려움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그리고 그 교회와 그 교회를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낙심하는 대신에 그 상황이 바로 온 교회가 마음을 하나로 묶어서 하나님께 자신들의 이 교회적인 상황을 하감해 주시도록 한 마음으로 매달려야 할 시기로 알고 그것을 활용하는 놀라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마지막 하나님이 부르시는 순간까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 가운데 하나는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처한 영적인 상황이 어떠한 줄을 알고 교회가 처한 어려움과 난간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리고 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듯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 교회를 위해 간절히 비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고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가 처한 상황을 놓고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지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교회가 처한 상황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그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기도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교회가 처한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이 교회의 상황이 나의 어떤 기도의 섬김을 원하는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다니는 것과 헬스클럽을 다니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것 말고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어떤 상황 속에 놓여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상황 속에서 아픔과 기쁨을 함께 하면서 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교회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 느껴질 수 있을까요? 정말 이 교회는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나는 그 머리에 붙어 있는 한 지체이고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한 지체가 된 것처럼 내 눈에 가장 연약해 보이는 한 지체 한 사람 한 사람도 그 몸에 붙은 나와 같은 한 지체라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예전에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너무 아름다운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핵가족화와 현대화 속에서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적인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런 세상적인 풍조를 거슬리며 살게 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은혜의 복음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풍조에 떠밀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삶은 철저히 교회의 처한 상황을 헤아리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아플 때 함께 울고 교회가 기쁠 때 함께 웃고 그리고 교회가 고난을 당할 때 자신도 함께 괴로워했습니다. 더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고 그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버리고 떠나가는 그런 신앙생활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라고 하는 사실들을 성도들이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형편을 살피고 그 형편이 특별할 때에 하나님께 그 교회의 상황을 하감해 주시도록 주께서 은혜를 주시도록 그래서 이 교회가 나를 구원하기에 능하고 나를 변화시키기에 능하고 나를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주기에 능했던 것처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고 변화시키기에 능한 교회가 되도록 교회의 형편을 살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들은 복음과 결별하기로 한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의 이기적인 신앙생활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대한 의식이 없는 그런 방종한 교회생활을 정말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형편을 깊이 헤아리고 그 교회의 몸을 통해서 주님이 느끼시는 아픔과 고통, 기쁨과 희열에 동참하면서 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비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기도제목은 정면승부의 기도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정말 통쾌한 느낌입니다. 정면승부 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면승부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첫째는 뭐냐면 담대히 주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지금 왜 사도들이 그렇게 견디기 힘든 문초를 당하고 와서 그 어려웠던 일들을 이 교회에 고하게 되었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에 그 일로 인해서 강한 핍박이 오게 되었고 사도들이 잡혀가서 문초를 당하게 되었고 교회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 앞에 내건 대안이 정면승부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사람들의 신분을 위장하고 복음을 전하러 나아가는 횟수를 줄이고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에 물을 타기로 합의를 보는 대신에 오히려 담대히 주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승부입니까? 담대히 주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얼마나 통쾌합니까?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정말 좋습니다. 왜 좋으냐면 어려운 일이 한 번 싹 스치고 지나갈 때 아니 스치고 지나갈 필요도 없어요. 스치고 지나갈 필요도 없고 어려움이 온다 하고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 그때 비로소 누가 하나님을 향해서 얼마나 믿음이 있는지 그리고 누가 교회를 정말 예수님의 몸처럼 사랑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응도 여러 가지 입니다. 한숨 형 -주휴여~사실 핵심은 “주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뒤에 토해 놓는 한숨이 원래 주된 목표에요. “주여, 휴우~”-한숨 형. 그 다음에 뭐냐면 회피 형 낙관 형- 무슨 뜻이냐면 “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뭐 다 잘되지 않겠습니까? - 회피 형 낙관 형.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은닉 형이에요. 사라져버리는 사람. 교회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잠깐 갔다가 다 평정이 된 다음에 다시 오는 것이죠. 여기 오셔서 지난 번 입당예배 때 축사도 하신 총회장 지내시던 예 목사님 교회건축을 하면서 어떡해요? 선배 목사님들에게 한번 자문을 구했죠.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그러셔요. 600명이 모일 때 교회를 지었는데 다 나가고 300명이 남더래요. 그런데 300명은 그 다음엔 죽여도 안 나가더래요. 상황이 더 어려워지는데도 끝이래요. 더 이상 이젠 안 나간대요. 교회를 짓고 다 정돈을 하니까 나갔던 300명이 다시 다 들어오더래요. 이것은 은닉 형이에요. 숨는 거죠. 다 쓸데없어요. 오직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믿음 형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했는데 사도들이 박해를 받았다. 그러면 이들은 우리가 복음전하는 것을 싫어하는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 가운데 두려움이 가득 하겠지.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정말 저들이 아니라 우리구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위한 기도예요 이것은. 그렇잖아요? 저들이 담대히 듣게 해 주시옵소서. 그게 아니에요. 저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혹은 이렇게 담대하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저들이 복음의 참된 본질을 알고 우리들을 대적할지라도 우리는 정말 무서운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적이구나. 그리고 여기서 어떤 위축과 두려움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생각하고 담대하게 이 예수의 복음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아브라함 링컨의 평소의 연설이 그것이었습니다. “정말 우리의 두려운 것은 우리의 적들이 우리보다 얼마나 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 편에 속한 사람인가가 문제입니다. 두려운 것은 그것입니다.” 이것을 안 것입니다. 이것을 이 사람들이 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런 대목을 보면 우리가 담대히 주의 말씀을 설교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이 아름다운 말씀을 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죄송스러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참된 복음을 전하면 강단의 설교자들을 잡아 간답니까?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정직하게 증거하고 추호의 타협이 없이 칼날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면 우리에게 어떤 해가 미칩니까?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목마르고 곤고한 수많은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군데군데 복음을 싫어하는 교회는 나오지만 사실상은 결코 신자일 수 없는 악한 사람들이 불평을 하겠지만, 그러나 도처에 굶주리고 메마른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아마 칼날 같은 복음의 말씀을 피 묻혀서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만족할 것이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아가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과 복음이 없는 자에게 미칠 하나님의 진노와 복음을 받아들인 자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전할 때 누가 우리를 핍박합니까? 그리고 그 핍박은 정말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그런 종류의 핍박입니까?
보십시오. 사방에 어두움이 가득하고 복음 전하는 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한 칼 가는 소리가 들리는 이 살벌한 시기에, 지도자들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끌려 돌아왔을 때에도 그들이 내놓은 대안은 정면승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담대히 주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는 피어린 기도였습니다.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정말 그렇게 정면승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 몰라요. 만약에 이 설교단이 선명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타협하면 그것은 죽음의 위협 때문도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욕심 때문일 것이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핍박 때문이 아니라 창피한 것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 하고 말이죠. 우리가 이 어리석은 복음 때문에 구원을 얻게 되었고 우리가 이 어리석은 복음의 도를 인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도를 얻게 되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복음을 부끄러워 할 수 있겠습니까? 핍박 속에서도 이들의 기도제목은 담대히 말하게 해 달라는 그런 간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루마니아의 차오체스크 정권하에서 기독교의 자유가 없는 때에 은밀히 설교하고 글을 쓰고 이렇게 해서 하여튼 죽기까지 복음을 전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붙들어 가서 이제 마지막 문초를 하면서 “이제 마지막 기회다. 네가 이제 예수를 이제 안 믿는다고 말하고 여태까지 설교를 하거나 글 쓴 것은 참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면 살려 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 심문을 마지막으로 사형이다.” 그때 그 목사님이 말했답니다. “만약 내가 여기서 한번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이제껏 내가 쓰고 외친 말씀을 부인하면 세상이 나와 함께 내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잊으려니와 만약에 내가 여기서 믿음을 지키고 그대들의 손에 죽는다면 여기서 죽은 내 피는 이제껏 까지 외쳤던 내 말 속에 스며들고 내가 썼던 모든 글 속에 스며들어서 이 세상 내 책이 있는 어느 곳에서든지 그 말씀이 들고 일어나서 이 세상을 뒤엎을 것이라”고 말하고 순교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말 토혈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피를 토하는 것같이 살았던 사람들, 피를 토하는 것처럼 기도하고 피를 토하는 것처럼 섬기도 죽기를 각오하고 위협의 칼날 앞에서 담대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말하기 위해서 신앙의 정절을 꺾지 않았던 사람들, 그런 사림들에 의해서 예수의 복음이 전해져왔습니다. 오후에도 이 본문을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안일한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무엇을 위한 것인지 우리는 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리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피 흘림이 있습니까? 정말 우리들이 피 흘림이 있는 삶을 삽니까?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서 피 흘림이 있는 그런 삶의 부분들이 있다고 우리 스스로 증언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는 토혈의 생애였습니다. 그 길이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진리를 말씀하셨고 그 진리의 빛 가운데로 영혼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에 신명을 바치면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복음을 전하면 전하지 못하게 하는 무리의 핍박과 훼방이 꼭 있었고 예수의 사랑을 펼치면 그 사랑을 펼치지 못하게 가로막는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예수님의 온 삶에 녹아 쏟아지는 그 토혈의 생애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온 생애는 모두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아름다운 본과 그분의 희생과 그분의 충성스러운 생활 모두에 그리스도 예수 자신의 피가 용해되어 있는 그런 생애였습니다.
보십시오.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그들은 상황을 바꿀 수가 없다면 우리들이 더 담대해지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이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항상 마음속에 불퇴전의 용기를 가지고 살겠다고 하는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속에 있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마당을 쓸고 통을 퍼도 그런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신앙 속에서 그런 마음속에 에너지가 없는 사람들은 살았다하나 이제는 모두 죽은 사람들입니다. 환란의 바람이 오면 모두 쓸려 나가는 낙엽들입니다.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열렬함, 그리고 자신에게 주신 소명과 교회에 위탁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책무에 대한 불붙는 책임감, 그리고 상황에 의해서 절대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중단될 수 없다고 믿는 불붙는 신적인 확신, 이런 것들이 살아 역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의 정욕을 따라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일 것이며 아무런 삶의 좌표도 없고 목표도 없기 때문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흔들리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단호함과 그리고 위기에 처한 상황을 보면서 그 위기 속에서 더 큰 능력을 예비하고 그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된 교회들을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로 다시 돌이키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경륜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 오늘날의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무슨 생각이 드는가하면 일평생 기도하고 꿈지럭거리고 살았는데 한번도 살기는 살았어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기는 살았는데 맨 날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살다가 끝난 거예요. 몸부림은 쳤는데 그냥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몸부림을 쳐서 항상 하나님과 교회에 부담만 주면서 살았어요. 뭔가 거기서 빠져나와서 담대하게 주의 말씀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전하는 그런 적극적인 일을 위해서 살지는 못하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 삶을 살아요. 보십시오.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들은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상황이 어렵다면 우리는 그 상황이 주는 위협보다 더 큰 담대함이 있으면 되겠구나.’ 이렇게 승부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들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해 준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 다음에 정면승부의 기도의 세 번째 요소는 뭐냐면 성령의 역사를 구한 것입니다. 그 기도가 무엇이라고 나오느냐 하면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냐하면 어떤 사회사업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에게 병을 고쳐주겠다 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 자체가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신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표적과 기사라는 말이 그것을 뒷받침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 고침,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다양한 기사와 표적들의 그 효험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창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표적과 기사의 목표는 기사를 행하고 표적을 행한 사람들에게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병 고친 다음에 사람들이 이 베드로와 요한을 보면서 모두 주목하였을 때 “너희가 어찌하여 이 사람을 낫게 한 것 때문에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사람을 고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시다.” 사람들에게 그 예수를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완악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미루어 볼 때에 그들에게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그들이 결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자신들의 구원자라고 하는 이 복음의 본질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잊지 않고 항상 병을 낫게 하고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일으킬 때는 항상 누구의 이름으로 말했죠? 그래서 오늘 여기서도 얘기하는 중이예요. “주의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 핵심에 병을 고치고 기적과 역사를 일으키고 할 때 모든 그 일의 중심에 사도들은 항상 자신을 내세우는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음을 입었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고치시느니라.”하면서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앞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병 나음과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사건 배후에 계신 그들의 육체의 고통보다 훨씬 더 비참한 영혼의 고통과 그 영혼의 절망의 상태에서 그들을 건져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3. 위기 속에서 주어진 응답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그렇게 커다란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리고 실제로 박해를 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교회에 위협이 오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게 되었을 때 그때에 많은 사람들은 위기를 느꼈지만 그 위기 속에서 이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했을 때 그 위기는 오히려 아주 놀라운 은혜를 받는 기회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을 보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더라.” 고 되어 있습니다.
핍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들에게 누구도 우군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그리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다는 소식은 아직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었어요. 불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희망을 갖게 되었고, 그들은 열렬했으나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정말 그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소수였고 그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수였으며, 그들은 확신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정신병자 취급했습니다. 드디어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고, 그 박해는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만이 아니라 이제는 로마의 관원들로부터 직접적인 박해를 받는 그런 길로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때 그들은 처음 당하는 이 엄청난 핍박 앞에서 얼마나 두려워 떨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고 예수님이 그들의 편이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눈으로 뵈올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러한 위기 가운데 있는 교회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 위기를 놀랍게 바꾸어 주셔서 교회로 더 교회되게 하시고, 오히려 그 핍박과 고난 속에서 교회에 위탁된 사명을 잘 이룰 수 있는 그런 길들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 위기 속에서 이 백성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큰 축복이 세 가지 나오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이었습니다. 이것이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의 백성들에게 강림하실 때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 자신의 임재를 보이셨지만 그중에 많이 하나님께서 택하셨던 방법 가운데 하나가 이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불로, 때로는 빽빽한 구름 사이로 우뢰와 같이 말씀하심으로, 때로는 세미한 음성으로, 때로는 이렇게 진동하는 역사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거기에 계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노아의 홍수로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광야시대에 와서는 고라 자손들을 징벌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는 땅을 진동하심으로써 당신이 거기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곤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지만 아직까지도 구약의 많은 신앙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에 그 구약에 있는 신앙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모인 곳이 진동하는 이 사건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 그 하나님의 임재와 진동을 생각나게 해주었을 것이고, 그 임재로 말미암아서 이 사람들은 커다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인상정도라고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충격과 놀라운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인 곳을 진동시키시면서 보여주신 것이 당신의 임재였다면 이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이 지금 왜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가슴을 안고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까? 죄를 짓고 도망 온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것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거하고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서 순종하다가 핍박과 고난을 당했지요. 그렇게 핍박과 고난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이 기도회를 통하여서 온전히 하나님께 기울어졌고 그리고 이 핍박의 먹구름이 가득 번지는 이 두렵고 무서운 상황과,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이 하나님의 복음전파라는 엄청난 대명 그 사이에서 그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에 땅이 진동하며 주님의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 얼마나 기뻤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어려움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 어려움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당신 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당신이 지금 그렇게 기도하는 우리 옆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그 현존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주님이 여기 계신데 그리고 그 주님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계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시는 가운데 내 옆에 오셔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당신의 임재를 보여 주시는데 그러면 그 다음엔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설교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이 계시면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더 이상의 기도 제목이 필요 없습니다.
이들이 기도하면서 이런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은혜가 충만한 시대 속에 살고 있었고 여기에 나타난 이 무리들은 더더욱 주님의 은혜에 사로잡힌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자신들은 너무 미약하고 자기를 핍박하는 세력은 너무나 엄청나다고 하는 이 현실적인 비교의식 속에서, 낙담하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런 어려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쉽게 받을 수 없는 놀라운 선물을 이 사람들에게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선물이었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모인 곳이 진동하는 광경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핍박과 고난을 받고 오면 눈물이나 닦아주고 흐르는 피나 닦아주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모인 곳을 뒤흔들기 시작할 때 구약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이 사람들은 너무나 선명하게 보았고, 그리고 그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후에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커다란 충격적인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중에서 정경 선지자라고 하는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의 예언이 주전 4세기경에 끝납니다. 그리고 그 400년 세례요한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역사적으로 이 시기는 예언의 침묵기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는 구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너무나 심한 불순종과 우상숭배와 죄악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계시의 침묵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때 이후로는 계시의 암흑기가 되고, 세례요한에 의해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지기 전까지는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나타났던 그 놀라운 기적들, 구약에서 면면히 이루어지는 그 놀라운 기적의 광경들이 멈췄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뭔가 있었다면 기록이 되었겠죠. 그리고 심지어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이보다 더 큰 이는 없다”고 말씀하시던 세례요한이 등장했을 때에도 그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일들이 사라진 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적인 임재의 경험뿐 아니라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들이 구약에 여러 차례 나타났었는데 그것을 우리는 구약의 부흥이라 부를 수 있는데 그런데 사라진 것이죠. 그러다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그것이 아스라이 잊혀지고 있을 때에 모인 이곳이 진동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났죠. 이런 진동이 일어났어요.
그때에 이 백성들이 구약에 대해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 상당한 기간 동안에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가 멎어있는 상황에서 이 구약의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증거라 볼 수 있는 모인 곳이 진동하며 흔들리는 역사를 경험했을 때 이들이 받았을 그 위로와 엄청난 신앙적인 충격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정말 위대하신 하나님이 지금 핍박받고 있는 자신들과 함께 하고 계시고 언제든지 당신의 현존하심을 자기들 가운데 드러내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들은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현존으로 함께 하실 때에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이 터치고, 요단강이 마르던 그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의 뒤를 자신들이 잊고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어려운 때에 어려움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움 당한 환경, 커다란 박해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환경,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오히려 하나님이 그것을 계기로 삼아서,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몰랐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놀라운 기회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가보면 야곱이 세겜 땅에서 돈은 좀 벌었을지 모르지만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그리고 그들로부터 보복을 받을 큰 위험에 놓여 있을 때에 그는 정말 누구도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벧엘로 올라가게 되었고 그 벧엘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의 얼굴을 구하게 되었을 때에 그때에 거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뵈옵는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되죠.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위기는 파멸로 이르는 입구가 되지만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위기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뭘 하고 살든지 어디 가서 살든지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그 시선을 떠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가끔 와서 나보고 축복기도 해 달라고 그러는데 물론 해 달라 그러면 열심히 기도해 주지요. 한번도 기도해 달라고 그러는 것 제가 거절한적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일인데 어느 지체가 와서 기도를 해달라고 그래요. 내가 보기에는 옳은 길로 가지 않아 그래서 그렇게 하지마라 그랬더니 그 가르침은 순종은 안하고 축복기도를 해 달래요. 그래서 내가 생전 안 그러는 사람이 그때 안 해줬어요. 그리고 내가 한 얘기가 있어요. “그대의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면 내 축복이 필요 없고, 그대의 가는 길이 불순종하는 길이라면 내 축복이 의미가 없다.” 그러지 않겠어요? 내가 해 놓고도 가만히 생각하니까 참 명언이야. 그렇잖아요? 옳은 길이 아니라서 나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성경말씀으로 가르쳤는데 그것은 순종 안하고 축복기도 해달라고 그러는데 네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면 내 축복이 필요 없고 네가 가는 길이 바르지 않다면 내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냐? 중요한 것은 네가 어디에 살든지, 어디 가서 살든지, 또 어느 때에 살든지 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가 아무리 크고 강대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면 그 대적은 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싸움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이 사람들이 핍박 속에서도 얼마나 순종했는지는 무얼 통해서 알 수 있는지는 그렇게 박해를 받고 그리고 무시무시한 핍박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들이 기도했던 것은 더욱 담대히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해 달라는 것, 그리고 그 크신 역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 그러니까 그들은 생사를 걸고 하나님 편에 섰는데 핍박과 고난이 와도 그들은 핍박과 고난을 받을지언정 하나님 편에 서 있기를 원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들을 버려둘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주님이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위대한 임재를 경험하게 해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던 것이죠.
두 번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한다면 성령의 충만함은 그들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저의 성령의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한 것 같은데 그런 건 모두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런데 둘 다 필요해요. 제가 한 15년 전에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범죄 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예를 들면 하나님 앞에 불평하는 장면도 나오고, 원망하는 장면도 나오고, 또 그 다음에는 바알 브올의 사건에서처럼 이방인들과 함께 우상을 숭배하고 성적인 범죄에 빠지는 것도 나오잖아요. 그때에 한 15년 전에 성경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이 사람들이 그 범죄의 현장에 기적이 언제나 따라다니는 가운데 그 기적 옆에서 그 기적 아래서 그 기적을 보면서 범죄 했겠구나.’ 그렇죠? 예를 들자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힘도 만나 먹고 난 힘 아니에요? 원망하는 것도 보통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만나 먹고 낸 힘이에요. 그것을 입증하듯이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셨어요? 고기가 이빨 사이에 있을 때에 원망하여서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고기 어디서 났냐는 거죠. 하나님이 보내 주신 거예요. 그걸 먹고 아직 다 씹지도 않고 이빨 사이에 끼어서 이쑤시개로 이빨 정리도 아직 못했는데 그 기적의 고기를 먹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거예요. 그들이 투덜대면서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고 마늘, 외, 부추 그런 것들을 그리워하던 그날 아침도 만나로 배를 불린 아침이었단 말이죠. 하늘에는 뭐가 있었을까요? 그렇죠. 태양이 뜨겁게 내리쬘까봐 기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구름 기둥이 있었고 우상숭배하고 간음하던 그때에도 밤이었다면 불기둥이 간음하는 그들이 있는 그곳에 어디에서든지 그 불기둥을 볼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것으로 범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적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큰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는 외적인 역사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도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일어난 것이 저절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외부에서 일어나는 이런 기적적인 역사 말고도 또 뭐가 일어나야 돼요? 내적으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야 돼요. 그런데 그 내적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가 뭐냐 하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굳이 둘을 비교한다면 외적인 역사가 놀랍게 일어나서 두 눈을 뜨고 보면서 내적으로 아무런 역사도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보다는, 눈을 떠서 기적의 놀라운 광경을 외적으로는 보지 못해도 내적으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사람들이 훨씬 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기적을 많이 본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어요. 무덤이 터지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하늘은 캄캄해지고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보았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을 리는 없어요. 그랬더라면 그 순간에 복음화가 되었겠지요. 왜? 유월절이니까 모든 유대인들이 거기에 모였을 때니까 엄청난 유대인들이 모였을 때니까 말이죠. 달라야 됐어요.
이 사람들은 이런 핍박을 만나기 전에도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으니 그 충만함이 이들로 하여금 자신을 구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목적에 온전히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게끔 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해주고 우리 주님 앞에 고정되게끔 만들어 주었어요.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주심으로써 능력으로 충만해지고 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들이 가득해지는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무얼 통해서? 위기와 고난을 통해서. 그것들이 저절로 이런 충만함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위기와 고난 속에 직면하였던 이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놀라운 역사를 가져다주신 것이죠.
그래서 이쪽 편에서 보면 신자가 당하는 고난과 핍박, 혹은 어려움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적으로 자신이 쇄신될 수 있는 기회에요. 영적으로 자기 자신이 놀랍게 쇄신될 수 있는 훌륭한 기회에요. 영적으로 자기가 놀랍게 쇄신될 수 있는 그 특별한 기회가 바로 이런 고난과 어려움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과 어려움이 사람을 항상 내적으로 쇄신하여 성령으로 충만하게 함으로써 그의 구원 받은 동기를 새롭게 하고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에 전념하게 만드는 효과가 항상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그런 고난과 어려움 속에 그런 효과가 자동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과 고난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무엇보다도 그 믿음을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로 표할 때 그때에 그 고난과 어려움이 속에 들어가서 삭혀져 그러면서 아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거죠. 그러면서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말 충만한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내적 쇄신의 기회가 되는 것이에요.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는데 농작물을 심잖아요. 상추나 무나 이런 것, 가을에 무나 배추 같은 것을 심잖아요. 그러면 거기다 이제 거름을 주잖아요? 거름을 주고 땅을 비옥하게 한 다음에 거기다 곡식을 심으면 잘 자라잖아요? 그런데 신기한 게 농작물을 심어놓고 집에서 먹다 남은 음식물 같은 것 아깝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땅을 파고 밑에다 주면 우리 생각에는 땅속에서 썩으면서 부드럽게 거름이 될 것 같은데 작물이 다 죽어요. 거기서 소금기가 나와서 다 죽어요. 그런데 사람이 먹고 인분으로 나와. 그 나온 것을 푹 썩혀서 짚 같은 데다 섞고 짐승의 통도 마찬가지죠. 오줌 같은 것도 다 삭혀서 독소를 빼버리고 그 삭힌 것을 흙에다 덮어두면 아주 비옥한 땅이 되어서 농작물이 아주 크고 실하게 잘 자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영혼에 그냥 고난을 -우리의 영성이 자라나는 토양을 흙이라고 본다면 - 갖다가 그 흙 속에다 확 묻어 버리면 그러면 뿌리가 망가져요. 이걸 믿음으로 잘 삭히고 기도로 이것들을 모두 용해해서 이 고난 속에 깃들여 있기 쉬운 독소적인 성분을 다 빼버리고 주님의 은혜로 그것을 승화시켜서 우리의 영성이 자라나는 우리의 인격의 토양에 이것을 묻을 때에 그때에 정말 고상하게 피는 것이에요. 여러분 한번 보세요. 정말 여러분들이 보기에 늘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 그리고 인격적으로 예수 믿으면 믿을수록 교회생활 하면 할수록 나는 이상하게 사람이 망가지는 것 같은데 저 사람은 점점 우리 주님을 닮는 것 같다. 자존심 상해서 인정하긴 싫지만 그러나 그렇게 내 마음 속에서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치고 고난이 없는 사람들이 있으면 한번 이름을 불러 보세요. 하나님과 동행하면 살았던 모든 사람들 중에 고난과 어려움, 위기와 좌절의 순간을 맞이하지 않았던 온실에서 자란 것 같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정말 선택한 사람에게만 고난을 주시고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고난을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돼요. 그래서 철이 들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래서 나는 그 신앙의 인격의 아름다움이 눈물과 통곡 속에서 피는 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도 이번에도 중국 갔다 오면서 나의 살아온 과거를 -요새는 애들하고 수수께끼 합니다. 얘들아, 시계가 어떻게 가냐? 그러면 째깍째깍 가지요. 내 나이쯤 가면 시계가 칙칙폭폭 그러면서 가는 거야. 멈출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지나가요. 그런데 진짜 한두 시간이라도 헛되게 보내면 마음이 곤고하게 괴로워서 배길 수가 없어요. 그렇게 시간이 칙칙폭폭 그러면서 지나가요. 십대 때에는 시계가 소리를 안내고 그냥 가요. 20대 때에는 째깍-째깍 그러고 가는 거예요. 30대 때에는 째깍째깍 그러다 40대 때에는 째깍째깍, 째깍째깍 그러고 가요. 그리고 50대로 접어들면 칙칙폭폭 칙칙폭폭 그러고 가요. 다른 사람 얘기를 들어보니까 은퇴하고 70대쯤 되면 다시 칙-칙-폭-폭 그러고 간대요. 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이제 천천히 시간이 가요.
정말로 무섭게 지나가요 그런데 과거를 이렇게 돌아보면 하나님이 나를 계속 깎고 다듬으시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져가고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내 마음이 주님의 은혜로 가득 차고 성령께서 오셔서 내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는 그런 작용들은 항상 범벅되는 눈물 속에서 경험되어졌지 월요일 날은 비가 와서 좋고 화요일 날은 눈이 와서 좋고 그런 아주 가벼운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때에는 그런 성화의 작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시인도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곤경과 어려움, 혹은 박해나 고통스러운 역경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온전하지 못한 것들을 다 씻어내고 내적으로 다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적인 쇄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제공해 주시는 훌륭한 기회에요. 그래서 성령 충만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은혜의 학교와 고난의 학교는 항상 담장도 없이 한 캠퍼스에 붙어 있어요. 그래서 오전 수업은 고난의 학교에서 공부하고 오후수업은 은혜학교에 와서 은혜를 받는 거예요.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면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제가 외국에 가서 설교를 하다가 목회자들 있는데서 이 찬송을 불렀어요. 집회가 다 끝났는데 어느 젊은 분이 와서 그래요. “목사님이 그 찬송 부를 때 제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왜 그랬느냐고 했더니 목사님의 자기고백처럼 느껴지더라는 거죠. 아 그걸 어떻게 눈치 챘냐고 그랬죠. 얼마나 고난이 많으시면 그 찬송을 부를 때 자기의 마음이 아프겠냐고 그래요. 내가 그랬어요. “그렇지만 너무 불쌍하게는 생각하지는 마세요. 고난보다도 넘치는 위로가 있었으니 너무 동정의 눈빛으로 나를 보지 마라.” 그런 거죠. 그런데 관건은 뭐예요? 기도예요, 기도. 기도가 없이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쥐뿔도 배우는 게 없어요. 마지막엔 뭘 배우느냐 하면 자기인생 더럽게 재수 없다는 것만 배워요. 아무것도 배우는 게 없어요. 고난은 꼭 뭐와 같으냐하면 꼭 똥 같거든요. 그런데 그 똥이 시간을 두고 삭히는 가운데 거기에서 독소가 빠져나가면 훌륭한 거름이 되듯이 부지런히 거름을 삭혀서 비료를 주는 농부는 정말 지혜로운 농부예요. 그런데 그런 것이 없이 그냥 뿌려주면 곡식이 막 죽는 거예요 독소 때문에. 그런데 기도가 바로 그래요. 고난은 어떤 것이든지 좋은 게 아니에요. 좋다는 것은 나중에 해석을 한 것이지 좋으면 자기 혼자 실컷 당해 보라지. 내거까지 가져가서. 다 가져가요 다. 모든 사람 것 받아 가지고 해보라고. 하나만 맛봐도 죽을 지경이에요. 그런데 기도는 그 고난 속에 깃들여 있는 독소를 모두 사라지게 만들고 그리고 그것을 아주 훌륭한 거름 같은 걸로 만드는 것이죠.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문학적으로 비유가 썰렁하죠. 고난을 똥에 비유하니까. 다시.
여러분, 지금은 금을 수입도 많이 하고 우리나라에서 금을 캐는 광산이 없지는 않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옛날에는 금값이 워낙 비싸고 노동자들의 품값이 싸니까 강원도 쪽으로 가면은 사금을 캐는 곳이 많았어요. 광산에서 금이 든 흙을 갖다가 잘게 빻아요. 그리고 부유법이라고 그러는데 그것을 넣고 물에다가 계속 거품을 불러일으키면 부유방식에 의해서 질량이 같은 것끼리 모여요. 마치 쌀 까부르면 겨와 진짜 쌀알이 분리되듯이, 그러면 노란 금가루가 많이 있는 흙을 끌어다가 그걸 다시 해요. 그래서 결국 거기서 금을 모읍니다. 그때까지 바위와 흙, 이런 것들이 아주 잘게 찧이겨지고 그러는 가운데 금들이 모아지고 그래도 불순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용광로에 넣고 뜨거운 불에 녹여서 액체 상태로 만들면 완벽하게 분리가 되는 것이죠. 그것을 여러 번 거쳐서 만든 것이 순금 혹은 정금이라고 해서 그것은 굉장히 비싼 거예요.
그것이 무슨 얘기냐 하면 가치 있는 것은 그렇게 고난의 풀무 불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잖아요. 내버려두면 그것이 내 인생을 망쳐요. 여러분, 신앙 없이 모진 인생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인간성이 어떤지 한번 보세요. 막 험난하고 칼날투성이에요. 오히려 평안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사람들이 성격이 원만해요. 가끔 보면 고난과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들이 신앙이 훌륭해지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고난이 그것을 저절로 갖다 주는 게 아니라 기도의 풀무 불에 그 고난을 녹여서 그래서 고난 중에 함께 묻어있는 더러운 성분들은 빼버리고 정금과 같은 것들만 모아질 때에 그때에 그가 내적으로 정말 변화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끊임없이 경험하는 가운데 그 사람이 정결한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뭐라고 그랬어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 정말 제가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평탄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없어요. 모두 고난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었고 고난의 길을 걸어왔을 뿐만 아니라 그 고난과 시련을 당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의 불로 그 시련과 고난을 제련한 사람들이에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정결해지고 제련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때로는 핍박도 주시고 역경도 주시고 주님 이외에는 아무도 의지할 길이 없는 그런 곤란도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냥 바보같이 견디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 쇄신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어려움에 두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고난이 이들이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이 아니라 더욱 치열하게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담대함을 더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불이 확 났을 때 무조건 물을 뿌린다고 해서 불이 꺼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거기에 적절히 대응해야 합니다. 기름 같은 것들이 붙어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큰 불길이 일어날 때 물을 끼얹으면 물위에 기름이 뜨면서 돌아다니면서 불길이 삽시간에 번져요. 마찬가지로 고난이 있어도 그 고난 속에서 믿음이 맹렬하게 타오르면 그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그래서 자기의 사명을 오히려 더 훌륭하게 감당해 나가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때로는 신앙의 길을 걸어가다가 돌아가는 것 같은 때가 있어요. 물이 흘러가는 것을 이렇게 보세요. 물이 직선으로 가고 싶어도 앞에 바위가 막고 있으면 ‘돌아갈 바에야 안가’ 그러고 거기에 모두 멈춰 서질 않고 물길 있는 곳으로 따라 돌면서 결국은 자기 가고 싶은 방향대로 흘러갑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목숨 걸 일이 아닌데 목숨 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꼭 목숨을 걸 일에는 목숨을 안 걸어요. 그게 문제죠. 전혀 목숨 걸 일이 아닌데 바보같이 그런 가치가 별로 없는 것에 목숨을 거는 거예요. 그런 때에는 오히려 돌아가는 것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때는 그런 지혜가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가려고 할 때 항상 환경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것만은 아니에요. 그러면 그게 어떻게 고난의 길이 되겠으며 그게 어떻게 십자가의 길이 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사명의 길은 언제나 고속도로처럼 나 있는 그런 사명의 길은 없어요. 만약에 그런 길을 주면 사명의 길을 다 걸어가기 전에 우리들이 변절하고 말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명의 길을 걸어갈 때 때로는 길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우리를 시험하기도 하시고 또 길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정말 우리 속에 그 사명을 완수해야 되겠다고 하는 열렬함이 우리 안에 불타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지금은 세계 어디를 다녀 봐도 그래도 우리나라가 도로를 참 잘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도 부족한 게 많지만 옛날에는 강원도 한번 가려면 특히 여름 방학 때 갈 참이면 정말 몇 시에 도착하는지 하나님만 아시지 운전기사도 모릅니다. 붕-하고 달렸는데 가보니까 다리가 끊어졌어요. 그러면 거기서 한없이 기다려서 버스를 배에 싣고 그러고 건너는데 몇 시간 걸려서 건널지도 모르고 가다가 막 달려가다 보면 갑자기 강 언덕에 붙어있는 길이 반쯤 푹 파여서 강 아래로 쓸려 내려가 버렸어요. 그러면 거기를 살살 피해서 가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와서 그제야 가마니 부대를 가지고 온다, 뭘 한다 하면서 동네 사람들 군인들까지 와서 흙을 집어넣어서 길을 만들고 가고 또 산속으로 좀더 들어가면 비가 좀 내리고 나면 길이 모두 떠내려가고 개울만 생기는 경우가 있어요. 그때에는 또 철사 줄을 가지고 트럭에다 묶어서 짚차를 끈다, 아니면 소달구지가 나와서 개울에 빠진 트럭을 끌어낸다, 그렇게 하면서 없는 길도 만들면서 여행을 했는데 그게 우리의 사명의 길입니다.
교회가 좋은 뜻을 품으면 앞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뿐이지 대로를 저절로 열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올바른 뜻만 세우면 모든 길이 고난도 없이 저절로 열리겠네요. 그러면 기도할 필요도 없죠. 사람 차면 땅 주실 것이고 기도하고 나면 건물이 기적적으로 세워질 것이고 헌금할 필요도 없고 그럴 것 같죠? 안 그래요. 모두 고혈을 짜내는 헌신 속에서 선교의 역사가 이루어져 가는 거예요. 그 대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데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에요.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렇게 하시는 거죠.
이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고난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일의 크기만을 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일의 크기가 아니라 일에 임하는 그 사람의 마음과 희생의 분량을 보시면서 그를 평가 하신다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서 주님을 의지하고 감당해 나가려고 하는 그 마음 중심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당신의 사명에 충성 했는가 충성하지 않았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역경과 어려움 속에 있으면 우리들이 흔히 제일 먼저 양보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주의 일을 하냐? 환경이 이렇고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내가 예전처럼 섬길 수 있겠느냐? 상황이 이렇고 입장이 이런데 내가 어떻게 예전처럼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이들에게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본적인 시범 케이스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잠시 두려움에 떨었을지 모르지만 더욱더 담대히 예전에는 귀에다 대고 소곤소곤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면 이제는 큰 소리로 전하고 그리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을 이렇게 담대하게 자신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힘이 무엇이었죠? 고난 속에서 드린 기도가 이 놀라운 일들을 가져온 것입니다. 여러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상이 그렇게 크지 않아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 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 많은 눈물을 흘리고 고생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명 감당이에요.
제가 처음 예수 믿고 회심하던 그 교회는 교인 한 30명 40명 모이던 교회였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참 감동적이었던 게 있어요. 오늘날 우리들은 그 정도로 섬기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뭐냐 하면 지금이야 변두리가 아니지만 그 당시야 서울 맨 끝이었으니까 사실 말만 서울이지 혜택은 시골 혜택밖에 주어지지 않는 곳이었는데 그러니까 당연히 수준이 낮고 코흘리개 애들은 교회당에 오는데 가르칠만한 제대로 교육을 받은 자원이 없어요. 그런데 그 60년대 말 70년대에 시골에서 청년들이 많이 올라와서 공장생활을 하잖아요? 공장이 많았어요. 걔네들이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복음 전하면 그것을 듣고 예수 믿기도 하고 또 시골에서 은혜를 받고 올라와서 서울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도 하고 해요. 그런데 뭐 과자공장, 직물공장, 심지어는 기와 찍는데 가서 일하는 애들, 봉제공장, 가발공장 그런데 다니죠. 그러니까 저녁 때 되면 다리가 핏줄이 터질 정도로 퉁퉁 붓고 그렇게 노동에 시달리고 그러던 때였거든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게 주일은 낮에는 예배드리고 밤에는 밤 근무 들어가고, 그렇지 않으면 밤 근무에 나와서 자지도 못하고 세수를 하고 교회를 오는 것입니다. 어쨌든 예배는 지켜요. 그런데 여름 성경학교에 봉사하기 위해서 공휴일 가서 대신 일을 하는 거예요. 3.1절, 어린이날, 광복절......,그런데 1년 동안을 그렇게 일을 하고 모아 가지고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한테 잘 얘기를 해야 돼요. 그래서 그 때에 가서 대리 근무를 하고 그 날짜를 하나씩, 하나씩 모아두었다가 여름 성경학교를 합니다. 그때는 여름 성경학교를 이틀 삼일 이렇게 안하고 최소한 4일 5일 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모은 그것을 가지고 여름 성경학교를 합니다. 사실 고등학교도 옳게 나온 아이들이 없죠. 그런데도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면 하나님이 그렇게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서 영혼들을 회심시키시는데 난 오늘날 그 정도 회심의 역사만 일어나도 한국교회 어린이 교육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더 좋은 건물, 더 많은 교육을 받은 교사들이 더 좋은 교재를 가지고 성경을 가르치는데 옛날 같지 않아요.
그런데 그게 결국 뭐냐면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려는 간절함, 그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 놀라운 역사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을 때까지만 하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고, 괴롭지 않을 때까지만 하고 마는 것은 고난 받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환경이 할 수 있게끔 허락할 때까지만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인내하고 매달리고 사명을 감당해 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들은 더 이상 이렇게 하나님이 맡겨 주신 복음전파의 사명에 몰두하면서 살아서는 안 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담대하게 내가 누구를 기쁘게 하랴? 어떻게 내가 얻은 이 복음인데 내가 어떻게 깨닫게 된 이 복음이고 어떻게 소유하게 된 구원의 은혜인데 담대하게 스스로에게 외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는데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다고요? 고난 속에서도 기도하니까 이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걸 입증이나 하듯이 오늘 이 진동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는 이 일이 일어난 상황을 “빌기를 다하매”라고 합니다. 고난을 주실 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기도의 분량도 이렇습니다. 그 기도의 분량이 꽉 차니까 그 때에 하나님께서 터치시면서 모인 곳을 진동하게 하셔서 주님의 임재를 보이시고 그리고 그들에게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내적으로는 그들을 놀랍게 쇄신시켜서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새로워지게 하시고, 그리고 고난 속에서 더더욱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모든 놀라운 역사가 기도할 때 교회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이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