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교회 목회자 홈커밍데이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17-24)
녹취자: 조경훈
세월이 오래 흘러가도 목회를 맨 처음에 시작했을 때 제 마음속에 있었던 하나의 신학적인 확신이 점점 더 굳어져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회심이 없이는 목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목회자들을 양떼들을 돌보도록 부르셨지 짐승들을 돌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여러분들이 목회를 오래 해보셨으니까 점점 더 실감이 나겠지만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목양이 되지를 않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목양을 잘 받아들이는 것처럼 해도 그것은 나쁘게 이야기하면 가식적인 것이고 좋게 이야기하면 그냥 본성적으로 목회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물론 회심한 사람이 언제나 목양을 잘 받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신학적인 원리로 보더라도 분명한 것은 회심 없이는 목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도 이런 확신을 훨씬 더 굳게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목회를 그만두는 날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져가셔도 마지막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주셔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이 회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내용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남긴 유언적인 설교이며 사도 바울은 이 설교를 밀레도에서 하게 됩니다.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항구도시입니다. 철학자 탈레스의 고향이기도 한데 그 사람이 모든 만물의 본질이 물이라고 말한 것이 이해가 갈 정도로 온 동네가 물로 꽉 차있는 동네이고 굉장히 발달한 문명을 가진 도시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기에서 장로들을 청해서 설교를 남기는데 예루살렘에서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심정적으로는 이것이 유언이었다고 봐도 됩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 온 첫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3년이 넘는 세월동안 병 고침, 설교, 사람들을 모아서 교육하는 것, 제자들을 삼는 것 등 많은 사역을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오늘 유언적인 설교 속에서 정리를 하면서 자기가 했던 다양한 사역들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사역의 내용이었는데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그의 사역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얼핏 생각하기에 이 설교는 불신자를 향한 복음전파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 우리가 죄인이고 회개해야 하는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동등하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지 항상 똑같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잘 세워진 교회를 향해서 쓰고 있는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서도 아주 명확하게 이 두 개의 핵심적인 메시지의 내용들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신학적으로 회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깨닫는 회개입니다. 그 회개와 함께 그리스도 이 외에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길에 대해서 포기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고 해서 우리들이 지금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인지도 몰랐고 하나님이 계신지도 몰랐기 때문에 예전에는 이런 구원의 개념이 우리에게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있는 것으로는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구원의 길을 찾았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예술을 해서 몸을 불태워 볼 거야.” 이것도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아주 저급한 사람들은 “나 돈 많이 벌어서 예쁜 여자한테 장가 갈 거야.” 그것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 공부를 많이 해서 학자가 되고 싶어.” 또 어떤 사람은 “나 가난해도 상관없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데로 살 거야.” 그것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면서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구원이 필요한지를 몰랐기 때문에 각기 그런 방식의 구원의 길을 찾으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아무 욕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 소원도 없고 밥벌이나 하고 아내와 애들과 함께 그냥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나는 많은 것도 바라지 않아.” 그것도 구원의 길입니다. 이런 모든 구원의 길을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포기합니다. 그것을 안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다 내려놓고 기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 분 이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다고 하는 신앙입니다. 전자가 하나님 앞에 인생의 목적을 잘못 설정하고 살아온 날들에 대한 후회라면 후자는 누구를 의지하며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신을 신뢰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순종은 절대적인 의존에서 나옵니다.
목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중의 하나는 온 교인을 우리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절대로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세상을 향해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회심이 우리의 목회에 목표가 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대다수의 많은 목회자들이 회심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한다. 신자는 이렇게 교회를 섬겨야 된다.”라고 설교를 하는데 그것은 장애인들을 모아 놓고 9초 8에 100미터를 주파할 수 있는 방법을 강연하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대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없고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에 자신의 의지를 꺾으려는 뜻도 없고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도 없고 거룩한 것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정체입니다.
핵심은 우리가 목회사역의 목표를 분명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목회의 역량은 크게 두 가지에서 나옵니다. 첫 번째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심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회심한 사람들의 은혜를 아주 고도의 설교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 사람들에게 계속 보여 주어서 회심의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자가 목숨을 걸어야 할 두 가지입니다. 목회의 한계라고 하는 것은 다른 한계가 아니라 이 두 가지 일의 한계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어떤 일을 반복해서 하는데도 하다가하다가 안 되면 그것을 포기하게 돼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의 이야기처럼 그것을 합리화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보다 약속에 가능성을 던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매달리면 바울과 같은 위대한 부흥은 주시지 않겠지만 나에게 반드시 이런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의 목회를 소식을 거의 다 듣고 있는데, 지금쯤이면 목회를 하면서 상당부분을 어떤 의미에서는 좀 오래된 목회자들은 목회를 접을 때 쯤 되어있는 시점까지 온 것입니다. 벌써 오래된 분들은 목회기간이 10년 15년 됩니다. 첫 번째로 변화가 많이 일어나지 않으면 목회자 어느 부분에서는 마음으로 접게 되어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거나 교인들이 변하지 않을 때 마음을 내려놓고 느긋해질 수 있는 목회자는 나쁜 사람입니다. 그는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두 번째로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잘 되지 않을 때 마음이 안타까워야 되는데 인간적으로 조바심이 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입장을 포기하거나 잘못하기가 쉽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목회하시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뒤를 이어서 온 알 티 켄달(R. T. Kendall) 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분의 논문은 사실 17세기 정통신학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논문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최고로 극우파에 서있는 칼빈주의적인 논문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도 읽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게 나중에 왜 그랬냐고 그러니까 그 사람의 논문과 설교 이런 것들을 다 보면서 지금은 좀 미숙하지만 엄격한 칼빈주의의 길을 뚜렷하게 걸어갈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로마서 강해할 때 1,000명 1,200명 씩 모이던 교인이 알 티 켄달이 와서 300명 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런 극우파의 칼빈주의 논문을 쓴 사람이 마지막에 토론토에 빈야드(Vineyard) 교회 사람들을 불러다가 은사집회를 하는 것을 보고 우리 모두 경악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조바심이 만들어 낸 현상입니다.
그러면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불타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불타는 마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오늘 마지막 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월요일 날 총회에서 청소년 목회 세미나로 와 달라고 하도 사정을 해서 수련회를 늦게 가면서까지 거기에 갔는데 눈이 오고해서 사람들이 많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회심에 대해서 쭉 설명하면서 회심의 목회가 얼마나 제대로 된 목회인지를 거기에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가 한 예화를 들려주었습니다. 7-8년이 넘은 오래전이었는데 인턴쉽을 하다가 ‘회심’이라는 주제에 꽂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15명되는 인턴쉽을 하는 분들에게 무슨 부서를 맡고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초등부, 유년부, 중고등부, 청년부, 어떤 사람은 장년부 등이었습니다. 그러면 “한 달 시간을 줄 테니까 가서 교사들과 구역장을 통해서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들이 진짜 회심했는지를 우리 한 번 조사해보자.”라고 했습니다. 주제에 대해서 도전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기쁨으로 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는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전도사 생활을 할 때는 감히 볼 수 없는 퍼센티지로 회심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도 아니고 성경이 얘기하는 표준적인 것을 가지고 얘기를 했는데도 어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친구는 45명의 초등부를 담당하고 있는 형제였습니다. 그 아이들을 한 달 동안 선생님들에게 위탁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45명에 대한 일대일 상담을 끝냈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에 그때 그 형제의 모습이 번개를 맞은 것처럼 혼미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고 회심문제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아이들을 상담하게 됐는데 신학생의 양심으로 45명 중 확실하게 구원받은 아이들은 5명, 권사님, 장로님, 안수 집사님, 집사님들의 아이들 대부분이 구원 못 받은 상태였습니다. 구원 받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아이들의 수가 8명이었고 이들이 모두 구원받았다고 치면 13명이고 그렇지 않고 신학생의 양심으로 확실히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이 5명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림잡아 반타작만 치면 9명 내지 10명은 확실하게 구원받았고 나머지는 회심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초등부 때 까지는 아이들이 부모의 강압에 의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중등부 올라갈 때 떨어집니다. 중등부는 문화, 사고방식, 성 등 모든 것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고등부 올라가고 대학부 나갈 때에는 결국 구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미끄러진 그런 수많은 사람들을 교회에서 만나고 보게 됩니다. 제가 그 사람들도 회심에 대해 조사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의사들이 제일 안 하는 게 건강검진이라고 합니다. 충격을 받은 게 의대 교수들이 너무 안 좋다고 해서 며칠 결근하고 MRI 찍어보면 위암 4기, 간암 말기 이렇게 판정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해가 안가서 왜 그러냐고 제가 물어보았더니 건강검진에 대해서 제일 소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의사들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제가 이해가 안 갔는데 나중에 이해가 됐습니다. 영적으로 자신을 점검해 보는 일에 있어서 제일 약한 사람들이 목회자들입니다. 설교를 늘 할 뿐이지 말씀의 MRI에 자기를 비추면서 그 결과를 보고 고민을 하고 아파하는 것에 약한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 졌기 때문에 말씀이 떠오르면 머리에서 나와서 입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평가하고 진단하지 자기를 점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얘기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입니다. 두루마리를 먹어라 해서 사도 요한이 먹었더니 씹을 때 입에서는 너무 달콤했는데 뱃속에 들어가니 죽을 것처럼 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고통을 맛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모여 있는 교역자들에게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정말 당신들이 회심을 원하느냐?” 그랬더니 “아멘.” 하고 대답했습니다. 진심으로 원하는지 물었더니 진심으로 원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바랍니까?” 그랬더니 정말 바란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정말 원하는지 물으니 정말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누구를 담당하고 있는지 물으니 중등부를 담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여기가 중등부 실인데 그 아이들이 모두 회심해서 주님의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당신 여기서 못 박혀서 죽을 용의가 있습니까?” 대답을 한번 해보시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희망한다는 것과 목숨을 걸고 그것을 원한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명색이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이고 목회자인데 왜 좋은 것을 바라지 않겠으며 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일인데 그것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원하는 게 진짜 원하는 것인지, 목숨을 버릴 정도로 원하는 것인지, 라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자의 마음속에 그렇게 하고자 하는 치열하게 불타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충성된 종과 대충 사는 사람을 가려내는 하나의 분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돼 있는 목회의 정신을 우리가 가질 때 그것이 설교에도 묻어 나오고 신방을 할 때도 묻어 나오고 심지어 강의를 할 때도 묻어 나오고 심지어는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권면의 말을 할 때도 묻어 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넘을 수 없는 어떤 한계는 우리에게 생명을 요구합니다. 다시 한 번 얘기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목회에서 어떤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주셔서 그것을 인식 할 때 그 한계는 우리에게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서 목숨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목숨을 내놓으십시오. 그러면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죽게끔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다시 살 기회를 주셔서 그 다음에 도전할 수 있게 하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어떤 자세로 이 일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3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시아에 들어와서 목회한 경험을 얘기 합니다. 자신의 목회의 자세를 얘기합니다. ‘너희도 본 바니’ 그것은 은밀하게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점수를 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인식할 수 있도록 삶으로 드러낸 목회의 자세 네 가지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눈물’입니다. 얼마나 울 이유가 많았으면 아시아에서 3년 반 동안의 목회를 생각할 때 딱 떠오르는 생각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났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있는 목회입니다. 목회를 어떤 사람들은 놀이처럼 하라고 그러는데 목회가 우리 생리에 맞는 것일까 솔직히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엊그제도 제가 크리스채너티와 인터뷰하면서 “나에게 목회는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고 설교는 영원히 이북의 언어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도 목회가 좋고 설교가 기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닙니다. 설교를 자기네 나라 말처럼 설교하고 목양이 자신의 생업처럼 느껴져서 즐겁게 사역해도 우리 자신을 그렇게 한다고 칭찬해서는 안 되고 이런 나를 본받으라고 얘기해서는 더군다나 안 됩니다. ‘모든 눈물’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눈물로 보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이 겸손은 사람 앞에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하잘 것 없고 무가치한 인간인지 십자가 앞에서 깨달았기 때문에 낮아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비굴함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겸비함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 속에서 대상 파괴적이고 분노에 이글거리는 것이 없이 사람들에게 거칠 것 없는 목회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되는 일이 참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굉장히 어려운 시기에 목회사역을 했고 나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는데 이 자리를 빌어서 제가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하고 미안하게 생각을 합니다. 어제도 수련회를 갔다 왔는데 한 번도 제가 싫은 소리를 안했습니다. 벌써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들도 이미 여러분들이 세워놓은 전통 속에서 어떻게 사역해야 할지를 많이 배우게 돼서 스스로 잘 하는 친구도 많고 특히 수석 부목사님들, 교회학교 디렉터나 부목사님들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환경이 또 자기를 가르칩니다. 집에서 개판 치던 애들도 일단 훈련소 들어가면 단정한 아이들이 되듯이 우리 조 목사나 김 목사가 이분들의 수고의 덕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이 분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은 제 마음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즘 친구 목사님들 만나면 내 별명이 “그럴 수 도 있지.”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누가 막 그러면 옆에서 “그럴 수도 있지. 인간인데.”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면 “인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합니다. 나도 “어떻게 그럴 수 가 있냐.”가 옛날에 잘 쓰던 말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 인간이니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에게 여러 번 들었겠지만 사랑의 가장 뚜렷한 열매는 헌신이나 희생이 아니라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을 얘기할 때 성경은 언제나 관계를 가지고 들어와서 그것을 말합니다. 부당하게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부당하게 대하고 때로는 어디 가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겠는가 하고 목회자로서 확 때려 쳐 버리고 싶을 때에도 참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내게 맡겨주신 양떼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참는 것입니다. 그 참음이 무한정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못 참습니다. 기질적으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하면서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한없이 본성에 의해서 참지를 못합니다. 그것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결국 넓게 보면 흘러가는 하나님의 강물 같은 섭리 속에 떠있는 하나의 낙엽일 뿐이고, 결국 나의 인생도 그 섭리의 강물을 따라 떠내려 간다고 생각을 하면 내게 까불던 사람도 별거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20년이나 10년 전에 나하고 목회하면서 나한테 혼날 때 죽을 것 같았고 괴로울 때도 있었고 교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때도 있었고 등등 많았을 것입니다. 지금 지나고 보면 다 지나갔고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는 현실에 코 박고 살기 때문에 관조적인 입장에서 자기의 인생을 남의 인생 내려다보듯 못하는데 어려움을 당하거나 고통 중에 있는 성도들이 있으면 제가 심방할 때 항상 빼놓지 않고 권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 인생을 남의 인생 보듯 해라. 거기에 지혜가 있다. 정글을 헤치고 지나는 자세로 하지 말고 경비행기를 타고 밀림 숲을 날아가는 사람처럼 생각하면서 네 인생을 남의 인생인 것처럼 생각해라. 그럴 때 지혜가 생겨난다.” 결국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구나. 흘러간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오래 참으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미 여러 번 설교했지만 나는 20여 년 전에 고린도후서를 읽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가지로 대적을 당했지만 가장 자존심 상하는 대적 가운데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만 든다면 하나는 ‘사도 바울이 그렇게 능력이 있는데 왜 저렇게 늘 아프냐’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다메섹 가는 길에서 모든 사람이 객관적으로 그 광경을 본 것도 아니고 자기 혼자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들었다고 하고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하는데 ‘정말 그가 사도냐?’ 사도는 원래 예수님 생애를 동참한 사람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린도후서에서 내가 사도된 것은 오래 참음과 표적과 기사라고 편지를 씁니다. 그 당시 사도로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세메이온(σημειον)’ 기적 이었습니다. 그 전통이 아직도 내려와서 가톨릭에서는 성자로 시성(Canonization)을 하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기적에 대한 증언이 있어야 됩니다. 없으면 만들어 내서라도 뒤에다 붙여야 됩니다. 그 기적이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시승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그러니 그 당시에는 얼마나 중요한 조건이었겠습니까? “나. 사도야. 내가 이렇게 기적의 목록을 한번 제시해볼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 사도 맞아. 맞거든. 내가 이렇게 오래 참았잖아. 내가 사도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참을 수 있었겠냐? 이거 가지고 부족하다고? 내가 표적과 기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으켰다.” 이것을 보조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로 부름 받은 그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확실하게 큰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섬기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데 사람이 진실하고 온갖 시련을 당합니다. 그런데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딱 엎드려서 일체를 참고 견딥니다. 팔딱거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로 견딥니다. 가슴앓이를 하고 심장병을 앓고 심지어 암에 견디면서도 버팁니다. 그게 다입니다. 섬기는 게 없으면 그게 다입니다. 그렇게 다 살고 나서 왜 목회를 못했느냐고 했을 때 나는 다 견디는데 온 힘을 소진하느라 전도도 할 수 없었고 교회 성장도 할 수 없었고 연구도 할 수 없었고 책도 읽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닙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눈물도 흘리고 겸손해 졌고 많은 것을 견뎠습니다. 유대인의 간교라고 나오는데 그 단어가 복수로 나옵니다. 그렇게 많은 유대인의 간교한 꾀들이 있어서 죽음의 고개를 넘나들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주님을 섬겼고 결국 결과를 하나님 앞에 만들어 낸 것입니다.
주전 327년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대파하고 인도를 향해 진격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희랍군대는 기동성이 특징이었습니다. 그 전까지의 군대들은 많은 숫자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트럼프 같은 그런 전투 방식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런 군대는 쓸모가 없다고 보고 완전히 새로운 전투방식을 개척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페르시아의 26만 대군하고 싸웠던 전투인데 4만 명이 26만 명하고 싸워서 박살을 냅니다. 그 전술은 완전히 강력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힘이 세고 기동력이 뛰어난 4만 명의 사람들이 26만 대군의 가운데를 찢고 돌파를 해서 두 쪽을 내고 4만 명이 또 돌파를 해서 다시 두 쪽으로 냅니다. 그러면서 결국 그들이 한데 뭉치지 못하게 갈라내면서 하나씩 하나씩 각개 전투로 적군을 쓰러트리는 것입니다. 몇 번이 갈라지고 나면 페르시아 대군에게는 두려움이 확 음습을 하고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그것을 틈타 공격해서 승리를 합니다. 그런 후에 그는 인도로 갑니다. 뛰어난 기동력이 있는 부대였는데 행군이 너무 늦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조사를 해 보니까 페르시아에서 노획해온 어마어마한 노획물들을 마차에 바리바리 싣고 싸가지고 가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것들은 군사들에게는 기쁨입니다. 성경에도 노획물의 기쁨이라고 나옵니다. 노획물을 가지고 가서 그 병사들에게 상급으로 나누어 주고 중요한 보물들은 곳간에 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중에서 꼭 필요한 것만 싣고 나머지는 전부다 가던 길에 벌판에 쌓아놓고 불살라서 다 태워버립니다.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에서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이런 일을 계획하는 것이 실행하는 것보다 쉽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소수의 병사들은 불만스러워 했지만 대부분의 군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필요한 것만 남기도 모두 불태웠다. 그러자 군대는 다시 전투의욕에 불붙게 되었다.”
우리들은 목회를 하면서 근심, 염려, 욕망, 때로는 두려움 이런 너무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돌격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회자 자신이 날렵하게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장군이 뒤에 배낭 메고 전투지휘를 하는 것 보셨습니까? 저는 방패를 든 장군도 못 봤습니다. 칼 하나 들고 지휘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페르시아 군대가 그리스를 쳐들어올 때 스파르타에는 레오니다스(Leonidas, BC 487~BC 480)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이미 페르시아 사람들과는 어떤 타협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관했습니다. 페르시아 사자들이 와서 위협을 했을 때 그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전쟁 이외에는 없다고 통촉을 합니다. 알다시피 그 당시 그리스 국가는 폴리스 국가였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대군이 밀려올 때 그리스가 대적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폴리스들이 다 마음을 합해서 하나의 연합군을 구성해야 합니다. 온 그리스가 멸망할 위기에 처해 있는데 정치인들은 자기 잇속을 앞세우느라 탁상공론이나 하고 정치공작이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레오니다스가 300명을 이끌고 그리스 중동부 지역인 테르모필레로 갑니다. 그 지역은 평평한 평지에 유독 거기만 높이 15미터 정도의 언덕이 있었고 그 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안 되는 딱 길목이었습니다. 정치계는 내버려두고 연합군을 구성하지 못하고 300명의 군인이 자기들끼리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고자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그 일화를 다룬 영화가 “300”이라는 영화입니다. 역사의 기록을 찾아보면 300명이 아니고 300명과 레오니다스 왕을 지지하는 그리스 연합군 700명을 합쳐서 1,000명이 갑니다. 어쨌든 그 길목을 300명의 군사가 지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을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거기를 뚫고 통과를 해야 되는데 군대를 보내면 다 죽고 군대를 보내면 또 다 죽는 것입니다. 쌓여진 시체를 넘어서 페르시아 군대가 오는데도 계속해서 시체가 쌓이는 것입니다. 그 때 300명이 막았던 페르시아의 군대가 100만 명입니다. 백만 명의 대군이 300명, 정확히 말해서 1,000명의 군인에 의해 막혀서 공격할 길목을 통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그들이 거기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막아줬기 때문에 그리스 도시들은 정신을 차리고 군대를 규합해서 전쟁을 하게 되고 마지막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함으로써 페르시아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 때 기록에 보면 군인들이 방패와 창으로 싸웁니다. 영화에서도 보면 페르시아 군대가 엄청나게 활을 쏘면 300명의 군인들은 완벽하게 방패로 막을 만들어서 화살을 피하고 칼로 공격해 오면 완벽하게 하나의 전차처럼 대열을 이루면서 사이사이로 칼을 내밀어서 침략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기록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은 싸웠다. 칼이 다 부러질 때까지 방패가 걸레가 될 때까지 싸웠다. 마지막에는 무기가 없었다. 팔 다리가 잘린 군인들은 이빨로 적을 물어뜯으며 항거했다.” 지금도 클로노스 언덕에 가면 비석이 있는데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오! 나그네여. 스파르타에게 말해다오. 우리가 여기에 누웠다고, 약속을 지켰다고.”
한 마디로 얘기해서 목회는 죽고자 하는 전사의 결의가 필요합니다. 세월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어느 시점에서 깊이 결단을 해야 합니다. 순간순간 교인들에게는 따뜻하게 대해도 이 속에서는 자신을 항상 군인이 자신을 기꺼이 전쟁에 바치고 왕에게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마음으로 전쟁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생명조차 아끼지 아니하노라고 고백 했던 것이 바로 로마시대의 군인들에게 흔히 있었던 전쟁의 정신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을 군대와 병사로 묘사한 것도 사실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위로를 드릴지 힘을 줄지는 모르지만 저는 최근에 내 마음을 많이 스쳐가고 있는 주제입니다. 새롭게 발견한 주제가 아니라 이미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목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24년이 지나가는 지점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날들은 너무나 빠르고 속히 지나갑니다. 어렸을 때, 청년 때 와서 이렇게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니까 우리의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