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자 기도회(1)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마 26:37)
녹취자 : 김미현
우리의 목회 사역은 기도를 덜 해도 괜찮을 정도로 혹은 하나님을 덜 의지해도 괜찮을 그런 때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 사역 길이라고 하는 것은 휴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가도 휴식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옥 같은 휴가도 몇 번 보냈습니다. 휴식이 아닙니다. 육체가 조금 쉰다는 것이지 진정한 휴식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나 있지 세상에서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목회 사역 중 어느 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을 때가 없고 덜 기도해도 괜찮을 때도 없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특별히 기도해야 할 때는 분명히 있습니다. 목회사역에서. 그것은 벌써 이렇게 직감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이 없으면 목회자의 영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목회자로서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직감적으로 옵니다. 그것을 성도들이 공감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전혀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번에 제가 호세아서를 네 번이나 사실은 부흥회를 했는데 그 때 다루지 않은 부분을 이번에 말씀을 주셔서 제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때에는 얼마나 태평했습니까? 이스라엘의 최전성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호세아 선지자가 슬퍼했습니다. 이렇게 전혀 성도들이 눈치도 못 채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습니다. 교회적으로 자기의 맡겨진 부서에도 공동체마다 다 오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그런 위기가 올 수 있고 구역에도, 교구에도, 부서에도 당연합니다. 여러분 교사 해보셨습니까? 교사 해보면 느껴집니다. 하물며 목회입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의 못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명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거의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소명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리에 누구를 갖다 놓으면 못하겠습니까? 남들이 볼 때 그럴듯해 보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 교회에도 여럿 있었습니다. 거쳐 갔습니다. 안 됩니다. 그 중 한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넌 목회 안 된다. 김남준 목사의 명예를 걸고 얘기한다. 절대로 교회가 안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기도를 덜해도 되는 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평시에 하던 기도가지고는 안 되는 때는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말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제자들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한 적 있습니까? ‘너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으라고 하셨지 “이정도 되면 요즘 같은 때는 좀 쉬어도 된다.” 그러실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그런데 오늘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다른 제자들은 저기다 두고 세 명만 데리고 오셔서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있어서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당신 자신을 지켜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의 표정이 어땠습니까? ‘매우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때이냐 하면 매우 특별한 때입니다. 예수님은 기도 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서도 기도하시고 거리에서도 기도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매번 그렇게 피를 쏟으시면서 기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도 있습니다. 기도 그만해야 하는 때가 아니라 교회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오래 전에 정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놀라운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확신을 주십니다. ‘아 이제 끝났구나.’ 사람들이 안 믿습니다. “얼마나 난리인데 목사님 끝났다고 하십니까?” 끝났습니다. 이겼습니다. 그럼 기도를 그만해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보다는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무슨 얘기냐 하면 한 어떤 사역이 교회가 잘 서있던 교회가 우르르 소리를 내고 무너질 때에는 사람들이 갑자기 무너졌다고 하지만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갑자기 무너졌다고 하지만 삼풍백화점 무너져 내리는데 5초밖에 안 걸렸다고 합니다. 갑자기 무너져 내렸지만 속에서는 오랜 세월을 두고 피로가 누적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우르르 무너질 때 갑자기 무너진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야금야금 파고 들어와서 오랫동안 진치고 그렇게 하면서 그 속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어느 한 순간에 약화되었을 때 저항력이 강하면 몸도 웬만한 질병을 이깁니다. 저항력이 완전히 바닥에 내려갔을 때 역사합니다.
(예화) 어느 잡지인가 어디에서 봤는데 이렇게 남의 콧털이 이렇게 길게 나옵니다.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코털을 칼로 자르던가 해야 하는데 몇 개 세게 뽑은 것입니다. 이틀 후에 죽었습니다. 폐혈증으로 죽었습니다. 뽑았는데 그곳으로 균이 들어간 것입니다. 순식간에 피가 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습니다. 24시간 밖에 안 걸렸습니다. 죽었습니다. 한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서해 바다로 여름에 조개를 주우러 갔는데 아빠가 체구가 건장합니다. 아이들과 즐겁게 뛰어 놀았습니다. 저녁에 온몸에 열이 납니다. 아내가 약국에 가서 몸살 약을 사다가 먹였습니다. 그런데도 안 낫습니다. 그 다음날 병원에 갔더니 죽었습니다. 역학 조사를 해보니 발바닥에 작은 상처가 몇 개 나 있는 것입니다. 맨발로 돌아다니다가 조개를 밟은 것입니다. 찢어진 것입니다. 그곳으로 균이 들어간 것입니다. 온몸이 감염되어서 죽은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안 그럽니다. 들어와도 이깁니다. 면역력이 바닥으로 내려가 버린 상태입니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언제든 지도자들이 지도자의 역할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그것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돈하고 사람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이 이루어지고 여기저기서 그럴 듯한 행사도 하고 박수도 치고 그렇습니다. 한쪽에서는 못한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잘한다고 하고 별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 밑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무엇인가 작은 것 하나를 보고 온 공동체 자체를 큰일 난 것처럼 비관으로 몰고 가는 지도자도 안 되고 조금 좋은 것을 보고 나와서 온통 희망에 가득차서 그래도 안 됩니다. 어느 교역자가 와서 전임 목사님과 현 목사님을 비교하면서 전임 목사님은 무엇을 이야기해도 항상 비관적이어서 섬기기가 힘들었는데 이번 목사님은 무슨 비관적인 보고를 해도 너무 낙관적이어서 지금 괴롭다고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공정하게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무엇이 가장 어려웠느냐고 물어본다면 그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을 많이 알고 말씀을 잘 준비하는 것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제 3의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게 성격이 팔랑팔랑 해서 누구의 말을 잘 듣거나 귀에 말뚝을 박아도 안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경우에는 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들려오는 정보를 안 듣거나 작은 이야기 하나에 고꾸라져서 큰 일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것을 다 뛰어 넘으면서 정확하게 간파해서 어디인가 무엇인가 그것을 자기가 레벨을 여럿 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가장 어렵고 하루아침에 생기는 감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서 신령한 사람들이 되어져야합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교회가 기도를 덜해도 되는 때는 없다. 그런데 매우 특별히 기도해야 할 때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 조짐들을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데 아주 조각 조각 작은 것들이 돌아다니는데 그것을 연결해서 그 교회의 영적 상태들을 유추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불완전하고 조각난 조짐들을 연결해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정말 특별한 때였습니다. 제자들을 의지 했다기보다는 제자들이 만약에 이 시간에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정말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지 않으면 당신이 죽으시는 것은 문제가 안 되는데 시험에 들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제자들 자신을 위해서 깨어있으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당신을 다 버리고 떠나갈 것을 이미 아셨고 그리고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큰 섭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결국 이들의 의지로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결정적인 때에 주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한 아주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 대한 배신입니다. 좀 뒤에 보면 가룟 유다가 군인들을 끌고 오면서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배신이나 버리고 도망간 배신이나 오십보백보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없이 목회를 해봤는데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은혜를 안 받기로 작정한 교인을 은혜 받게 하는 것, 기도를 안 하기로 작정한 교역자들을 기도하게 하는 것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냥 자기 생긴 대로 사는 것입니다. 수없이 설교를 듣게 하고 말씀을 감화시키고 해도 안 들어가는 사람은 안 들어갑니다. 표면적으로는 다 예의를 갖추겠지만 직감적으로 스며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자신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깊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번이 아니라 정말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새로운 지평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목사가 되고 점점 시간이 흘러갈수록 변화의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역하느냐의 그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까 얘기한 영적인 위기를 간파하는 능력이나 이런 것도 결국 어디에서 옵니까? 기도에서 옵니다. ‘아 지금 특별히 기도해야 할 때이구나.’ 느끼고 실행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핀트가 안 맞을 수도 있겠지만 안 맞았던 때도 기도해서 유익이 없는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정말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부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여러분도 저 같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금도 그 때 부교역자 생활이 지금 담임 목사 생활보다 좀 한량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부교역자 시절은 없습니다. 모두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담임 목사님보다 더 많이 울었고 담임 목사님보다 더 많이 기도했고 누가 교회를 담임목사님보다 덜 사랑했다고 하면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 언제든지 저를 개인적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무엇인가 조언을 드리면 아주 귀담아 들으셨습니다. 실행하시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혼자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혼들의 무너짐, 평생 한 것이 그것인데 뭐든지 갖다 놓고 하면 설마 꼴찌 하겠습니까? 그리고 10명의 교역자 중에서 6번째나 7번째만 해도 목사님이 쫓아내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교회인데.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순간순간 위기를 느끼며 하나님 앞에 어느 시점에서 확 하고 매달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지 지체들을 확 다잡아야 할지 조금 풀어주어야 할지 이런 것들에 대한 감각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기도를 덜해도 되는 때는 없지만 특별히 기도해야 할 때는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해의 사역에서 몇 번 쯤 느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보며 국가를 보며 혹은 가정을 보며 여러분 교회를 보며. 공식적으로 기도회라고 하는 것 좋습니다. 할 수 있으면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혼자 그것을 깊이 느끼고 자기 자신이 홀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교회를 위해서 기도 많이 해야 할 때입니다. 마귀가 이기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무너지겠습니까? 영혼들이 가엾습니다. 목자는 순하고 자기를 따르는 양들만이 아니라 말 안 듣고 뛰쳐나가는 양도 자기 양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면서 그것이 바로 목회자의 어려움이고 지어야 할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이 금년에 다행히 학교도 다 졸업하고 마음을 기도에 깊이 쏟으십시오. 그래야지만 여러분이 목회 사역에 있어서 쓰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절대로 사람은 자신이 가본 데 까지만 성공하면 자기가 가본 곳 까지만 사람들을 이끌고 갈 수 있지 그 넘어서 까지는 못갑니다. 함께 가는 것 그런 것 없습니다. 자기가 가본 데 까지만 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시켜도 자기가 가본데 까지만 말씀을 가르쳐도 자기가 가본데 까지만 성공하면 자기가 깨달은 것까지 가르치는 것이지 못 깨달은 것은 어떻게 가르치겠습니까? 헌신도 마찬가지고 물질도 누구를 돕는 것도 마찬가지고 자기가 해본데 까지만 사람들을 데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엊그제도 목사님 만나서 얘기했지만 하나님은 참 자비로우시지만 어떻게 보면 잔인하시기도 합니다. 한 설교자에게 말씀의 세계를 열어주실 때에는 절대 안락한 침대에 누워서 새로운 말씀의 지평을 보게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심장을 발기발기 찢어서 뜨거운 피가 솟아나게 만드신 다음에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겨우 또 다른 디멘션의 설교의 세계를 보게 만드시는데 그것을 몇 개 정도 넘어가야 인생이 마감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도 너무 감사 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요즘 아우구스티누스를 쓰고 있습니다. 열심히 쓰고 있는데 그것을 쓰면서 너무나 감사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목회하면서 힘들고 아팠던 날들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이 완전히 새로운 말씀의 세계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회를 안했더라면 절대로 그런 말씀의 세계는 근접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책상 앞에서 공부하면 감은 잡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진수는 하나님이 한 설교자의 마음을 심장을 발기발기 찢으시면서 붉은 피를 솟아나게 하셔서 그래서 피로 설교하게 하심으로서 한 단계를 올리시고 또 다른 세계를 보게 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는 한없으니까 그래서 무엇인가 괄목할만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피를 토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많이 찢어져야 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근처에도 안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래에 대해서도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이 진짜 희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일 조금 지나고 나면 편안 할 때 그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설교자의 사명 자체는 시련이고 고난입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는 것 여러분이 얼마나 이해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정말 뼈저리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하였으니 고난에 참여함이 마지막에 나옵니다. 혈기왕성하던 시절에 아라비아로 갈 때만해도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겠습니까? 어린 바울이 사울이 무엇을 알았겠습니까? 그러다 이제 자신의 죄와 씨름하면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리고는 이제 교회와 함께 자신이 죽으면서 살아가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이 폴라누스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연합의 교리에 대해서 어마어마하게 풀어냈습니다. 이제 저 자리에 접근을 못해서 그렇지 개신교 역사에서 얼마나 위대하고 신비한 교리인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말 공정 공평하신 하나님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강의를 하거나 설교를 할 때 무엇인가 기독교의 진리의 세계를 꽉 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매우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깊이 만나주신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교회를 맡겨 주셨느냐가 아닙니다. 하다못해 요만한 분반 하나 맡겨 주었어도 올바른 방식으로 목회를 하면 심장이 찢어지고 그렇게 천국과 지옥을 오고가는 사역이 될 수 있지만 어마어마한 교회를 맡겨 주었어도 전혀 그런 경험 없이 굴러가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기 있다가 어디로 가면 그 다음에 또 승진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목회에 관해서 80%는 주일학교 교사였을 때 다 배웠습니다. 나머지 20%는 전도사 하면서 배웠습니다. 80%라고 하면 지금 배운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거짓말이지만 70% 배우고 나머지 10% 배웁니다. 죽을 때까지 다 못 배웁니다. 정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역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