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TS 아침채플2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 26:6-13)
녹취자: 백지영
한 여자가 와서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데 예수의 머리에 향유 한 옥합을 부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당시 문둥이는 이스라엘 회중 속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적으로 이 사람이 문둥병을 앓고 있었을 사람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아마 문둥병에 걸렸다가 나음을 받은 사람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쩌면 이 사람이 예수님의 기적적인 병 고침으로 나음을 받고 그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초청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사람을 바리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것들을 전부 다 종합해서 보면 아마 이런 결론이 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시몬은 바리새인이었는데 문둥병에 걸렸고 그러다가 나음을 받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한다고 하는 것은 형제가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인공은 사실은 문둥이 시몬이 아닙니다. 여기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주인공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이전에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고 예수님의 이 식사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면밀하게 무엇인가를 준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어쨌든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께 부음으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이 여자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들이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말이 없는 섬김입니다. 이 긴 성경의 기사 속에서 제자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예수님의 말씀도 나오고 또 문둥이 시몬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그런데 이 여자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여자의 섬김은 말이 없는 섬김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사역하고 계시니까 아마 잘 아실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조금 일을 하면서 말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 섬기면서 자신에 대해서 교회가 많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일체의 말이 없이 주님을 섬겼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말 많은 사람들은 섬김의 동기가 예수님 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섬김의 동기가 너무 많고 혹은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섬기면서도 그 섬김을 통해서 주님이 홀로 만족을 받으시는 것에 자신은 충분히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늘 이 여자의 경우처럼 예수님 한분을 바라보고 섬겼기 때문에 말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만나면 자기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자기가 불만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을 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말이 없이 섬겨야 합니다. 섬기는 동기가 사람이라면 사람이 그것을 알아주지 못할 때는 섭섭할 수 있습니다. 또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는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섬긴 것을 기억을 못하시거나 잊어버리시거나 혹은 무시하시거나 그러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말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 한 분을 바라보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이 여자의 섬김은 눈물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이 기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거기서 이 여자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이 어떤 의미일까요? 아마도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신 은혜에 대한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이것도 일입니다. 대개 돈과 사람, 자원 이런 것들을 묶어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하는 사람들은 경영의 지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목회를 한다고 하는 것은 경영 그 이상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왜 지금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그러지 않고 왜 여기에 와서 이렇게 공부하고 있습니까?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그 은혜에 대한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눈물이 옛날에 있었지만 현재도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들판에 서 있는 바위와 같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들판에 서 있는 바위야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변함없이 거기에 서 있지만 흐르는 물은 오늘 흐르는 물은 어제 거기를 흘렀던 그 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한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섬기는 모든 것이 주님을 향한 눈물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서 주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섬길 수 있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에 눈물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 눈물이 한때만 있어서는 안 되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날 동안에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주님 앞에서 죽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그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눈물의 섬김은 그 교회를 비옥하게 합니다. 저는 그것을 매일매일 경험합니다. 작년 12월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1월 초에 인도차이나에 선교와 관련된 출장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장 계획을 다 잡고 있었는데 일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무슨 이유인지 교인들이 많이 출석을 해야 되는 연말연시인데 그 출석 인원이 확 줄었습니다. 그때에 제 마음이 갑자기 긴장이 되면서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출장 계획을 취소하고 그래서 목회자들이 모두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을 열고 우리의 목회에 복을 주시도록 모든 목회자들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다시 많은 영혼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아주 특별한 주였는데 그렇게 기도하고 난 그 다음 주에 52명이 한 주에 우리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그것은 저희들에게도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목회자의 눈물은 교회를 비옥하게 한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큰 교회를 섬기고 있느냐, 교회에서 담임목사냐 아니면 동공이냐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자세로 주님을 섬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눈물이 있는 섬김으로 우리 예수님을 섬기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최선의 것을 드리는 섬김이었습니다. 섬기는 데 그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을 바치는 섬김이었습니다. 당시 이 향유는 언제든지 시장에 내다가 팔 수 있는 재산 축적의 수단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금이나 그런 보석처럼 말입니다. 창녀요 창기였던 이 여자가 웃음을 팔면서 모아놓았던 것들이 이 향유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팔았다고 하는 것은 이 여자의 희망이 물질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최선의 것을 예수님을 위해 바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90프로쯤 헌신한 사람 100명과 100퍼센트를 헌신한 한 사람 중 어느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은 자신의 최선의 것을 모두 드려 섬긴 사람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후 2 세기를 살았던 교부 이그나티우스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말하자면 기독교를 가르친다는 이유 때문에 핍박을 받아서 투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성품이 신실하고 사랑이 많은 목회자였습니다. 신자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까지도 이 목회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이 이그나티우스는 훌륭한 사람이니 로마를 위해서라도 죽이지 말고 살려달라고 탄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탄원은 상당한 영향력이 있어서 로마 조정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곧 석방이 될 수도 있는 처지였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제자들이 감옥에 와서 면회를 하며 선생님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구나티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구명하려는 운동을 그만 두십시오. 나는 여기서 나의 최선의 것을 우리 주님께 드려서 섬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최선의 것은 바로 이그나티우스의 생명이었습니다. 최선의 것을 주님을 위해 섬기는 것만큼 훌륭한 일이 없습니다.
목회가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짜증을 내거나 힘들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내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앞에 내가 최선의 것을 드리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더 좋은 것으로 여러분들에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동도 전하여서 기념하리라고 말입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최선의 것을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왜 복음을 전합니까? 왜 불신자들을 예수 믿게 만드는 것입니까? 그들의 모든 불행은 무엇 때문입니까? 진정으로 사랑해야 될 예수님은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자신과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 아닙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을 설득해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안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사람들을 그 사랑 안에서 하나로 묶는 것,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