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고난과 자기죽음
녹취자: 조경훈
목회자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한마디로 말하면 고난의 길 위에 선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한 인간으로서, 또 한 신자로서 살아가는 갈등이 있고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예전에서부터 가난했습니다. 심지어는 가정으로부터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목회자는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죄인에 불과하면서 진정한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압박을 받으면서 말씀으로 깨어져야 할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속에 근심과 밖에 근심이 그칠 날이 없는 것이 목회자의 길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소위 “How to do theology(신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신학을 공부하는 자세를 이야기 할 때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 번째는 ‘오라치오(oratio)’ 기도, 두 번째는 ‘메디타치오(meditatio)’ 묵상, 세 번째는 ‘텐타치오(tentátĭo)’ 시련입니다. 끊임없이 시련을 당하면서 진정한 목회자가 되어간다고 루터는 본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도록 가르쳐 줄 뿐 아니라 그 지혜가 얼마나 참되고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능력이 있고 위로가 되는지를 경험하도록 해주는 시금석입니다.” 이 말과 마찬가지로 마르틴 루터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루터의 독일 저술들에 대한 비텐베르그(Wittenberg) 에디션의 서문에서 마르틴 루터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비텐베르그 대학에 다닐 때 성적표를 보면 사실 마르틴 루터는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비텐베르그에서 공부를 마치고 영적인 성장이 거듭되면서 고난 속에서 그는 계속 공부를 하게 됩니다. 자기가 무명의 수도사였는데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됐고 쓸모없는 사람이었는데 쓸모 있는 신학자가 된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쥐똥처럼 보잘 것 없는 내가 후추(그 당시 후추가 어마어마하게 비싼 향신료여서 과장을 하자면 금하고 후추하고 똑같은 무게로 달 정도로 비싼 향신료였습니다) 같은 고급 향신료에 빗댈만한 신학자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면 나는 이게 교황주의자들 덕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악마의 분노로 나를 공격하고 탄압하고 괴롭혔습니다. 말하자면 저들이 나를 꽤 좋은 신학자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내가 그런 고난을 안 받았다면 저는 이런 사람이 못 됐을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1:8) 라고 말합니다. 목회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운명적인 고난이 주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 보면 ‘아! 저 사람 참 쉽게 편하게 영광을 받으며 가는 구나.’ 라고 보이지만 그것은 밖에서 보이는 모습일 뿐이고 속에 들어가면 위대한 인물들은 나름대로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하늘나라에서 눈을 뜨고 싶은 그런 내면세계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 견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목회를 하면서 온갖 모함 비난 이런 것들을 목회자는 겪습니다. 더군다나 목회자에게는 형사 처벌권이 없습니다. 말을 안 들으면 감옥 에다가 가둬버리면 되겠는데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존 오웬 목사님은 옥스퍼드 부총장이던 시절에 공부 안하고 계속 대들고 말썽부리는 학생들은 지하 감옥 에다가 가둬 버렸다고 합니다. 신학교마다 지하에다 감옥을 만들어서 공부 안하는 사람은 그냥 가둬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모함과 비난을 목회자는 사랑으로 견뎌야 합니다.
칼빈은 조용히 연구실에 묻혀서 공부나 해야 할 아주 내성적이고 세심한 학자풍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은 그런 약한 사람을 들어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마르틴 루터의 뒤를 이어서 개혁을 실질적으로 마무리를 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여겨집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닌 벌떼 같이 많은 대적자들에게 그는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제네바에 시의원인 피에르 아모(Pierre Ameaux)라는 아주 악한 인물입니다. 그는 칼빈이 피카르디(Picardy) 출신으로서 거짓교리를 전파하는 불량한 목회자라고 소문을 냅니다. 더 나쁜 사람은 제롬 히에로니무스 볼섹(Jerome Bolsec) 이라는 거짓말쟁이인데 그는 “칼빈은 구제불능이며 짜증나며 사악하고 불만족으로 가득 찬 사람이며 동성애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여성들에게 껄떡거리는 인물이다. 손 뻗을 만 한곳에 있는 여성은 모두 다 가지려고 한다.” 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그 사람의 이런 소문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습니다. 약 2세기 동안 칼빈의 저작이 잘 안 읽히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제네바의 목회자 가운데 장 뜨롤리에(Jean Trolliet) 라는 인물은 기독교강요를 놓고 온갖 비난을 다 퍼부었습니다. 예정론에 대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드는 악한 이론이라고 공격을 합니다.
이레나 베커스(Irena Backus) 는 17세기 연구에 있어서 대단히 유능한 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서 논문을 씁니다. 그 논문의 220~203쪽 사이에서 볼섹의 모함을 드러내면서 이야기 합니다. 볼섹이 칼빈을 악의적으로 비난했던 것은 칼빈에게 원인이 있었다기보다는 칼빈의 제자인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에게 있었습니다. 데오도르 베자는 칼빈이 죽은 후에 칼빈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전기를 씁니다. 데오도르 베자는 칼빈을 기독교역사이래 최고의 경건함 속에서 살았던 인물로 본 것입니다. 저는 칼빈의 후기 모습이 진짜 그랬을 것이고 데오도르 베자는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칼빈이 최고 성화의 상태에 도달한 속에서 그의 임종까지를 지켜보면서 진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볼섹은 그것에 대해서 반감을 품었고 정반대의 자료들을 모아가지고 책을 냅니다. 볼섹의 악의에 찬 비난은 베자가 자신의 영적 멘토로 삼은 칼빈을 사도들이나 중세에 어떤 신학자들보다 더 순결한 삶을 산 인물이었다고 추앙을 했는데 그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칼빈을 성적 타락자라고 비난한 것은 소문에 근거한 것이고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접적인 목격에 의한 것이 아니다 라고 인정을 했습니다. 의미 있는 논문이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지막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사도행전에서 얘기를 합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19) 이것이 그렇게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탁월한 학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아야 했던 목회자의 모습입니다. 능력하고는 상관이 없고 능력이 많으면 많은 것만큼 고난을 피하는 게 아니라 더 큰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능력만 달라고 합니다. 능력만 받으면 어려운 일도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고 조금 일을 해도 열매를 많이 거둘 수 있을 것 같은데 십자가가 크다는 사실을 함께 생각하면서 함께 기도해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겨서 그것을 세상 법정으로 가서 고소를 하고 고발을 한다면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낮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자기 자신이 몸소 실천했던 그 본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장이라고 불리는데 제가 한 25년 전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고린도후서 12장을 읽다가 아주 깊은 은혜를 받았고 지금도 저 말씀이 나의 한 축이 되었습니다. 알다시피 고린도교회의 문제 중에 하나는 사도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놓고 사도바울이 자기가 진짜 사도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머지 제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계실 때에 예수님을 보필했던 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나 진짜 사도가 맞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고백을 합니다. ‘내가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너희 가운데에’ 사도의 가장 중요한 표징은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밀치고 더 중요한 표지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참음’입니다. ‘내가 사도가 맞다. 왜? 내가 증거가 있는데 내가 이렇게 많이 참았지 않느냐? 내가 예수께서 직접 불러주신 사도가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참을 수 있겠느냐? 그러고도 또 증거가 필요하다면 나에게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있다.’ 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그렇게 참게 만든 것은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원리가 세 개나 나오는데 거의 같은 단어가 반복이 됩니다. 그것은 ‘오래 참다’ ‘매크로듀메오’(μακροθύμω)입니다. ‘매크로’(μακρο)는 최대한이고, ‘듀메오’는 ‘견딘다’라는 뜻입니다. ‘매크로듀메오’는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입니다. 다음으로는 ‘덮어주다’ ‘스테고’(στέγω)입니다. 저 단어가 명사로 쓰이면 덮개가 됩니다. 그리고 ‘아래에 머무르다’ ‘휘포메노’(ὑπομένω) 입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목회에서 오는 많은 고통들을 인내로서 이겨야 됩니다. 사랑으로 이길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극한 고통을 참아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 한 예가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미국에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이고 그 당시로서는 새로운 학문의 풍조인 뉴턴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던 기독교 지성인이었습니다. 교육학자이고 영문학에서도 이 사람의 글은 읽어야 할 중요한 재료입니다. 이 사람이 남긴 저작이 출판된 것이 25권 정도로 되어 있는데 분량으로 따지면 약 18,000 페이지 정도 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이 사람이 외할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노스 햄턴(North Hampton) 교회의 담임목사가 됩니다. 예일 대학교를 13살에 들어가서 17살에 수석으로 졸업을 하고 2년 후에 그 학교에 교수가 됩니다. 그런 학문적인 재능을 덮고 그는 목회자가 됩니다. 그 당시 교회에 관한 중요한 것들을 의회에서 결정했는데, 시의회에서 중생의 경험이 없이도 세례에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결정을 내립니다. 조상 대대로 예수를 믿었으면 그 사람이 뚜렷하게 반기독교적인 행동으로 불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한 그냥 세례를 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찬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노스 햄턴 교회도 할아버지 때부터 그 노선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것은 아니다 라는 신학적인 결론을 내리면서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당시 동부에서 가장 큰 교회였고 정말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는데 결국 그는 쫓겨나게 됩니다. 아이가 11명이나 됐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1750년 6월 5일 날 존 어스킨(John Erskine)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넓은 바다에 내던져 졌습니다. 나와 내가 부양해야 할 많은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게다가 좀 더 손에 잡힐만한 것을 위해 열리도록 제가 의지할 만한 어떤 문도 제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고 결국 정든 교회에서 쫓겨나서 인디언 선교사가 됩니다. 그때 조나단 에드워즈가 마지막 고별설교를 남깁니다. 그때 설교제목이 ‘심판 때에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 이라고 하는 유명한 설교입니다. 그 설교 속에는 교인들을 미워하는 어떤 감정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판단했든지 간에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그 분의 심판대 앞에 우리가 서는데 그 날 만날 수 있도록 우리가 살자 그거였습니다. 이 후에도 몇 번 더 가서 설교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이러한 목회의 소신이나 자신은 그렇지 않는데도 어떤 고난을 통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때 마다 메뚜기처럼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전도사들도 조금만 힘들면 메뚜기처럼 한 1년 있다가 폴딱 뛰어서 좀 더 좋은 교회로 가고, 가고 하는데 그렇게 사역을 해버릇 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올 때에도 그것을 잘 견디면서 시인의 고백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시31:19-20)
목회자가 제대로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려면 자기와 똑같은 사람들이 되도록 사람들에게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빛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른 것을 용납하는 사랑을 배워가야 됩니다.
그렇게 보면 사람들마다 다 다릅니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른 것처럼 자연적이고 영적인 은사 같은 것들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다양한 서로 다른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김태희가 아무리 예뻐도 1,000명의 김태희가 대구 번화가를 한꺼번에 걸어간다면 무섭지 않겠습니까? 어쩌다가 한 사람 예쁜 사람이 있어야지 참 예쁘다 멋있다 그러지 얼굴이 똑같은 사람들이 한 1,000명이 걸어가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이게 매트릭스도 아니고. 어쩌다 한 사람이 노래를 잘 해야 감동이지 모두 꾀꼬리 같으면 어떡하겠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모두 힘을 합쳐서 어떤 예쁜 사람을 빛내주는 역할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을 잘못 적용해서 ‘우리같이 공부 못하는 사람이 있어야 공부 잘하는 사람이 빛나지.’ 그러면 안 됩니다.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여기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란 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목사 같은 사람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빨간 하트를 하고 있는 사람은 성령 충만하고 불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 위에 있는 사람은 지금 냉랭해 졌고, 네 번째 있는 사람은 기도는 하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부패해져 버렸습니다. 맨 뒤에 나자빠진 사람은 마음이 부패한 것을 온 몸으로 고백하며 ‘나 예수 믿기 싫어요.’ 하면서 뒤로 누운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교회라는 울타리 속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떡하겠습니까? 목회자는 이때 칼을 번쩍 들고 ‘빨간 표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잘라버려.’ 하면서 조폭처럼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교회는 누가 갑이냐 하면 은혜 받은 사람이 영원히 을이고 하나님 얕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갑입니다. 그래서 갑질들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갑질을 하던 사람도 은혜를 받으면 할 수 없이 을이 되어서 갑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갑들도 나중에 을이 되고 나면 그 갑이 얼마나 창피한 존재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도 목회하면서 그런 험한 꼴은 안 당했는데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주일날 설교를 하는데 누가 ‘이의 있습니다.’ 하고 일어나더니 야지를 하더랍니다. 젊은 목사님이 주일날 설교를 하는데 수백 명 교인 중에 한 사람이 일어나서 야자를 하는데 설교시간에 어떠했겠습니까? 결과가 어떻게 됐냐고 목사님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이 겨울이면 늘 귀 마개와 목도리를 하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건널목을 건너다가 기차소리가 안 들려서 한 방에 갔다고 합니다. 자기를 대적하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죽은 얘기들을 하는데 무섭습니다. 왜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태어나서 그렇게 갑질을 하다가 죽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이 목회자에게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미숙한 지체들을 용납하는 마음이 목회자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인데 고난을 자기 죽음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목회 현장에는 끈임 없는 고통이 있기 마련인데 고난을 잘못 다루면 사람에게 한이 맺히고 인간성이 망가집니다. 목회자는 우울증에 걸리겠습니까? 안 걸리겠습니까? 많이 걸립니다. 암은 걸리겠습니까? 안 걸리겠습니까? 많이 걸립니다. 암의 주된 원인이 스트레스입니다. 기쁨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앎 걸릴 확률이 낮습니다. 목회자가 고난을 많이 받는 것은 힘도 없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당하는데 그 고난을 생산적인 요소로 자기에게 활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자기 죽음입니다.
여기 보면 세포가 독거미한테 물려가지고 시커멓게 썩어가는 것입니다. 세포의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네크로시스’(necrosis)의 죽음과 ‘아포프토시스’(apoptosis)의 죽음이 있습니다. 13~4년 전의 일인데 제가 신학공부를 하다가 생물학을 배워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그때 생물학 뿐 만 아니라 천문학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제가 과외선생을 불러다가 1년 동안을 집중적으로 생물학과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나에게 가르쳐 준 박사과정에 있던 그 사람은 그 의미를 모를 것인데, 나는 배울 때 이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 깨달음 중에 하나를 여러분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희랍어로 ‘네크로시’하면 죽은 자를 가지고 혼령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것을 말하는데, ‘네크로시스’는 타의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보듯이 화상, 타박상, 독거미 같은 것에 쏘여서 유해물질들이 자극됨으로써 세포가 팽창하면서 시커멓게 괴사해 버리는 것입니다. 세포의 타살적 죽음입니다.
이에 비해서 ‘아포프토시스(apoptosis)’의 죽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 이유가 과학적으로 안 밝혀졌는데 세포가 스스로 자살을 합니다. 무엇이 그것을 명령하는지 그 기제는 모릅니다. 어쨌든 이 아포프토시스(apoptosis)의 죽음은 아주 단기간에 이루어집니다. 아주 성성한 세포가 무슨 이유에선지 자살을 해버립니다. 스스로 죽은 세포는 식세포에 의해서 삼켜지고 리소솜(lysosome)에서 소화가 돼 버립니다. 거기서 ATP(adenosine triphosphate)라고 하는 화학에너지가 나오고 그것이 옆에 있는 세포에 전달되어서 세포라는 공장을 돌리는 에너지가 됩니다. 영양분을 섭취되어서 그것으로 새로운 세포가 성장하게 합니다. 죽은 세포에서 얻은 생산물이 살아있는 세포에 활용되는데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유지되는 신비가 나옵니다. 우리 몸에 많은 세포가 있습니다. 뇌세포 같은 것은 한 번 죽으면 거의 재생이 안 됩니다. 어떤 세포는 몇 일만에 어떤 세포는 수 십 년 만에 다시 재생이 됩니다. 우리 몸 전체는 60조 개의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세포를 60조 개의 꼬마전구가 로 비유한다면 그것들이 수시로 깜빡 깜빡 거리면서 죽어가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세포가 재형성이 됩니다. 세포의 자살적인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생명이 있는 동안에만 일어납니다. 아주 신기합니다. 이런 것들 속에는 아주 신기비한 신학적인 비밀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포가 깜빡거리면서 죽어야 되는데 어떤 특정한 부위에서 세포가 안 죽겠다고 버팁니다. 아무도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을 안 하면 세포가 살아 있으니까 영양분이 필요한데 다른 곳에 있는 것들을 막 잡아 댕깁니다. 잡아 댕기면 세포가 분열을 하면서 늘어나는데 죽는 세포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부분만 굉장히 커질 것이고 덩어리가 됩니다. 그것이 암입니다. 암은 엄밀히 말하면 너무나 충만한 생명 덩어리입니다. 아무도 안 죽으려고 하는 생명 충만한 덩어리가 암입니다. 결국 안 죽겠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몸 전체는 죽어버립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빠가 바람피우고 애들이 속을 썩이고 해도 아내 한 사람이나 남편 한 사람이 자기가 죽어서 가족을 살려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가정은 안 무너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없으면 사실 교회가 아닙니다. 거기에서 누군가는 그런 고통 속에서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나와야 됩니다.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을 절대로 안하면 자기는 안 죽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한꺼번에 죽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보는 것 아닙니까?
여기까지만 깨달았으면 그렇게 감동을 안 받았을 것인데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몇 달 동안이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모양이 독수리같이 생겼다고 해서 독수리 성운입니다. 지구에서 약 7,000 광년 떨어져있습니다. 생성 시기는 약 550만 년 전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런 것들은 과학적으로 측정이 가능한 것입니다. 저기에 보이는 먼지처럼 생긴 것의 정체는 우주 먼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분자들의 덩어리라고 보면 됩니다. 별들이 생애를 끝내고 마지막에 백색왜성이 된 상태에서 펑하고 폭발을 합니다. 폭발을 하면서 태양과 같이 있던 별들이 먼지로 모두 흩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별들의 일생이 끝납니다(물론 수십 억 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별들이 어떻게 생기느냐 하면 별들이 폭발을 해서 그 별들의 먼지가 떠돌아다니다가 뭉칩니다. 뭉치면서 핵반응이 일어납니다.
비유를 하자면 상암 월드컵 경기장 만 한 곳에 수소 분자를 모두 모아 놓았다고 칩시다. 그것을 축구공 크기 만하 게 압축을 하면 약 6,000만 도에 이르는 엄청난 태양과 같은 불덩어리가 됩니다. 원자력은 많은 폐기물을 만드는 문제들이 있어서 인공태양을 만드는 플라즈마는 연구를 지금 하는 것입니다. 태양처럼 빛이 나니까 지하실 같은 곳에 그것을 놓고 물 끓이고 전기도 일으키고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무공해 청정자원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장시간 동안 그것을 계속 타오르게 만들 수 있느냐가 기술의 관건입니다. 차세대에 굉장히 중요한 산업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나라도 열심히 투자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게 뭉치니까 핵반응이 일어납니다. 점점 농도가 진하게 응축되면서 잔뜩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온도가 너무 높아지면 폭발이 일어납니다. 쾅하고 터질 때 물질의 변이가 일어나면서 거기서 떨어져 나옵니다. 여기 보면 떨어져 나온 점들이 있는데 저기에서 새끼처럼 매달려 있다가 하나씩 떨어져 나온 새 별입니다. 여기 가운데 보이는 곳에 기둥 세 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기둥이 제일 긴데 이 기둥의 길이가 빛의 속도로 4년을 달려가야 될 길이입니다. 태양까지 빛이 8분밖에 안 걸립니다. 결국 이것으로 발견하는 것은 별들이 만들어 지는 것도 앞에 있던 별들이 폭발하면서 남긴 먼지로 만들어지고 그 별들이 태어날 때도 폭발하면서 태어납니다. 별들이 폭발을 하며 자신을 불태우고 사라진다는 것은 자신을 재료로 삼아서 그 다음 별들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신기합니다. 인간의 몸에서 부터 시작을 해서 네크로시스와 아포프토시스로 시작을 해서 마지막에 별들의 폭발에서부터 그것이 마지막에 빌립보서로 넘어갑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 안에 사는 이 그리스도시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 이니라” 라고 얘기합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할 때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겨서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가 계신 상태를 말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최고의 진정한 인간 주체성을 회복한 시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숙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유로운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욕망과 타락 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부패한 본성들이 우리를 참된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고 종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육체의 혈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소명을 받고 목회자가 됐는데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씩씩거리면서 성질을 부리고 탐욕이 가득 찹니다. 목회자도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저런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혈기들을 자기 자신이 다스리지 않으면 좋은 목회자로 시작했어도 좋은 목회자로 끝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적 성숙과 십자가.’ 끌레르보(Clervaux)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 칼빈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수도사였을 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신학자였습니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체의 이기심 없이 당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사랑 안에서 자신에게 가장 합당한 사랑을 받으십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까리따스 라고 말합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을 깨달은 인간이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개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입니다.
칼빈이 고난의 길을 걸었던 목회자로서, 고난을 얼마나 많이 겪었는지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비호감입니다. 뾰족해가지고 말이지 까다롭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성숙시키는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의미한다. 그런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십자가를 삼으셔서 믿음으로 십자가 지는 사람들을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고난은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신앙이 있어야 됩니다. 이 교회에서 조금 생활비 더 준다고 폴짝 옮기고 좀 더 큰 교회에서 오라고 한다고 홀딱 가고 작은 교회는 안 가려고 하고 왠지 큰 교회 목사님은 인사도 좀 허리를 많이 숙여서 해야 될 것 같고 조그마한 교회 목사님은 왠지 지나 나나 비슷한 것 같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함이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1:20~21)
이것으로서 저의 발표를 마쳤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면 대답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질문1 - 고난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요. 목사님께서 목회를 오래 하시면서 교회 개척하시고 사역을 하셨는데 목회자로서의 행복을 느끼시는지요?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 길을 가고 싶다는 마음 안에 주님과의 어떤 깊은 비밀이 있을 것 같은데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1 - 감사합니다. 저는 원래 엄마 아빠는 예수를 안 믿으셨는데 고모들이 예수를 믿어서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가 14살 2개월 되던 해에 기독교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를 스스로 떠났습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말하면 중학교 2학년 2월 달 쯤 3학년 올라가기 직전이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교회를 가는 때였습니다. 갑자기 논둑길을 걸어서 서울 근교에 있는 교회를 가야 되는데 갑자기 슬픔이 확 밀려오면서 엎드러져서 막 울었습니다. 그때 나의 마음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 그리고 세상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지막 네 번째 신은 존재하는가? 그런 의문을 많이 가졌지만 어른들은 답해주지 않았고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의 설교는 티끌만큼도 도움이 안됐습니다. 어린 나이에 내가 볼 때에 예수 믿는 어른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한참 울다가 눈물을 닦고 일어나면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 후로 한 6년 동안의 세월을 혹독하게 지냈습니다. 문학 작품과 철학책들을 읽고 했지만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되었지만 나는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내가 정말 목회자가 딱 맞다 이렇게 생각한 적은 단 하루도 없습니다. 목회는 나에게 언제나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고 설교는 이국의 언어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하는 가정이 신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면 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목회자가 될 것이냐 안 될 것이냐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이 길이 매우 힘든 길이라는 것, 그나마 위로가 있다면 점점 주님 앞에 갈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 길은 이 세상의 영광을 받는 길이 아니니 그런 것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걸으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질문2 - 집사로서 교회를 섬기다가 교사로서 사역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게 담임 목사님이 회의를 하시면서 자기의 양은 성도들이고 같이 일하는 사역자들은 자기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양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를 하시는 것을 보면서 사역의 현장에 나가 보니까 믿을 만 한 분은 하나님 밖에 없구나 하고 절실하게 느낍니다. 사역자들을 향해 격려와 위로.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는 현장에서.
답변2 - 나는 그 목사님의 얘기에 백 퍼센트 동의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은 양이고 전도사들은 사역자들이기 때문에 내가 택해야 한다면 양을 택해야 한다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먼저 출발해야 될 것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성도나 담임목사나 부교역자 전도사뿐만 아니라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특수한 관계는 성도는 무작정 섬겨 주어야 하는 관계이지만 사역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독자적인 사명을 하나님 앞에 받아서 직업적으로 목회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니까 요구하는 바가 좀 더 수준이 높고 철저하다는 면에서는 구분이 되지만 양떼와 사역자 둘을 놓고 맞대결로 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양떼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은 목회자들에게도 하면 안 되고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격려는 양떼들에게도 필요한 격려라는 점에서 저는 훨씬 더 통합적인 사고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양떼로 있는 경우에는 일을 잘하든 못하든 내가 데리고 있어야 되는 양떼지만 한 사람이 사역자가 되어서 자기 일을 못할 때에는 목회자 개인 뿐 만 아니가 교회 전체에 금방 누를 끼치고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위치에 있다는 고민은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들이 항상 가장 조심해야 될 것은 목회자 자신은 교회에 일꾼처럼 생각을 하고 교회와 담임목사는 그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양떼처럼 생각하면서 교회가 사랑으로 한 모습을 이루어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3 - 신대원을 다닌 지 한 달이 지났는데 말씀을 듣고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었는데 현재 한국교회에서 들을 것이 있는 설교 그런 것들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어거스틴 수업을 듣고 있는데 어거스틴의 책을 읽으면서 이 분은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쓰셨나 하고 생각을 하는데 너무나 방대하고 어려운 정보들을 받아들여서 과연 이것을 교회 성도들에게 좀 수준 있게 전달을 해야 되고 그 수준을 점진적으로 높여가야 하는 게 맞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때에, 혹시 한국교회에 목회자들, 신학도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전달하시고자 하시는 메시지와 도전이 있으신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3 - 저는 천국에 가서 사람들 중에 가서 만나고 싶은 사람은 우리 할머니하고 어거스틴 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할머니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어거스틴이 나에게 가장 큰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서구 철학사에서 인류의 모든 지식들을 집대성해서 렌즈처럼 다시 뿜어냈던 두 인물이 있는데 한 사람은 플라톤이었고 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이슬람 철학에서는 아베로에스(Averroës)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역사가 흘러가다가 서구 사상이 유럽을 지배하면서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융성을 통해서 서구의 사상들이 근대이후로 주도권을 잡아온 것이 사실인데 그런 서양철학의 역사도 결국 그 문을 연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였다고 봅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인류의 모든 철학이 플라톤의 해석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플라톤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을 철학적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나는 어거스틴 이후에 모든 서구의 신학과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같은 사람들은 해체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원전이 어거스틴의 책입니다. 쉽게 말해 해체주의자들은 어거스틴에게서 통합을 배웠기 때문에 해체를 배운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정말 위대한 인물이고 그가 약 250여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저는 모두를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거의 다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어거스틴을 아는 지식에 제대로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거스틴을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교회에 어거스틴 파크가 있을 정도로 그를 좋아했고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120독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거의 외웠고 50세 때에 그 분을 깊이 만나고 라틴어를 독학하려는 마음을 먹었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어거스틴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제가 쓴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어거스틴은 바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다른 신학자들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이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현실 도피적인 공식이 아니라 한 인간존재로서 어떻게 이 실존적인 고민을 안고 주체성 있는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 고민을 신학 속에서 녹여 낼 때에 보다 굳건한 신앙으로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럴 때 늘 말합니다. 말만 하지 말고 일단 읽어라. 닥일. 닥치고 읽어라. 우선 어거스틴의 책을 『신국론』을 비롯해서 『고백록』, 『참된 종교에 관하여』 등등 우선 너 댓 권을 읽고 그 다음에 이야기를 하자 이 이야기입니다.
질문4 - 다원주의가 심각한 시대인데 신은 하나다. 종교는 하나다. 이렇게 말하는데 합동측 교단 빼고는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에 대부분 가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합동측이 끝가지 이 하나님의 진리를 끝까지 수호하기 위한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4 - 세월이 아무리 바뀌고 이 사상에서 저 사상으로 넘어가도 인류의 모든 구성원이 백 퍼센트 동의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입니다. 평화를 싫어하는 사상이나 주의는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나 자유주의자나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나 모두 평화라는 것에 대해서 모두 공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묘하게 뚫고 들어오는 것이 진리에 있어서 모든 갈등을 없애버리자 하는 것이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는 모든 문제들을 절대적인 규범을 가지고 보지 않고 다원화해서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런 것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 쪽에서는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산이 있는데 북벽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고 서쪽으로 비스듬히 오르는 길이 있고 락 클라이밍을 하듯이 동쪽으로 오르는 벽이 있는데 동서남북 어디로 올라가든 올라가면 정상은 하나다. 출발하는 곳은 달라도 각각 마지막에 진리에 도달하기 때문에 굳이 어느 길로 진리를 찾아 가느냐는 문제를 삼지말자 라고 설득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학문에 그런 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학을 공부해도 철학 박사학위를 주고 철학을 해도 심리학을 해도 역사를 해도 모두 철학 박사학위를 줍니다. 그 얘기는 계속 공부를 해 나가서 마지막 위로 올라가면 그런 것들이 통합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진리가 모든 학문과 규범 속에 농도는 다르지만 함께 혼재한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교도 속에서도 우리는 참된 진리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파편적이라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하나하나는 사실인데 그것들을 잘못 엮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굉장히 잘못된 세계관을 가르쳐 준다는 것을 우리들이 경계할 뿐입니다. 어거스틴도 이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합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그런 이교도 속에 있는 진리들을 진리인 것으로 드러내고 그것을 그들이 왜 잘못 사용하고 있는지를 밝혀내서 그 진리가 원래 소속한 것이 이교도나 이방의 철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에 있다는 것을 회복해 내는 것이 신학의 임무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에 있어서 절대성을 거부하다 보니까 도덕적인 기준에서도 상대성을 인정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왜 살인이 나쁘냐? 그 시대가 하지 말자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왜 우상숭배가 나쁘냐? 교회가 하지 않기로 우리가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약속이 파기되면 얼마든지 선악의 기준이 바뀔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원주의를 반대합니다. 진정한 통합과 평화는 우리들이 진리가 아닌 길을 걸어가서 진리에 도달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주님을 만나고 성경을 진리고 받아들인 그 속에서 하강하면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좋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라. 두 번째 죽도록 목숨을 걸고 공부하라. 이만한 나이 때 에는 한 학기에 한 두 명 정도는 공부하다가 병원에 실려 가야 됩니다. 정신병원까지는 아니라도 내과 정도까지는 실려 가야 됩니다. 세 번째 치열하게 기도하라. 네 번째 하나님과 모든 사람에게 신실하라.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