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만난 예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1-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 부활하신 후 일어난 첫 사건을 다른 세 복음서보다 상세히 보도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예수께서 묻히신 무덤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이 지난 첫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아직 새벽인 시간에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하기 위해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마태복음 28장 1절이 말합니다.
수평으로 굴처럼 파서 만든 무덤이었는데 당시 이런 무덤을 굴러가는 돌로 입구를 만들어 막고 더욱이 봉인까지 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녀들은 향품을 드리러 가면서 무덤 문이 닫혔을까봐 근심하였습니다. 누군가가 그 문을 열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덤에 도착했을 때 뜻밖에도 이미 그 돌문은 굴려져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3절과 4절은 이 장면을 이렇게 보도합니다.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시신이라도 찾아보려고 갔는데 거기서 뜻밖에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덤 앞에 있는 것 같은 어두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들려오는 죽음의 소식들, 그리고 이로 인해 받게 되는 많은 사회적인 고통들이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비록 현실이 이렇게 절망적인 무덤과 같은 상황이지만 신앙은 바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변화되게 만드는 것이 신앙이니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주를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II. 무덤에서 만난 예수
무덤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렇게 무덤 문이 열린 것을 보고 그는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요한에게 달려가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아가 무덤으로 함께 달음질하여 달려갔고, 베드로는 더 빨리 달려가서 우선 무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보니까 예수님의 수의인 세마포가 놓여있는데 거기에 머리를 쌓던 수건은 한곳에 쌓던 대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사라 것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A. 울고 있는 여인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돌문이 이미 열렸고, 내부도 확인하였으니 누군가 시체를 가져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더 큰 설움에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리아는 마음이 동하여 무덤 속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본문 11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라고 했습니다. ‘울고 있더니’라고 번역된 이 말은 그리스어로 ‘클라이 우싸’(klaiousa)인데 이것은 소리 없이 흐느끼는 동작이 아니라 크게 소리를 내서 우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는 그녀의 슬픔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의 시신조차도 찾을 수 없었기에 터져 나온 울음이었습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고,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던 예수 그리스도 가시는 마지막 길에 귀한 향품이라도 넣어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조차 모두 집에 가버린 이 무덤 앞에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일까요?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환한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로마 병정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 중 누군가가 그녀를 발견하면 그녀는 무덤 문을 열고 봉인을 뜯은 후에 무덤 문을 열고 예수의 시체를 빼돌린 범인으로 지목되기 십상이었습니다. 이후에 일어나게 될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재앙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갈릴리 근처에 살던 여인으로서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가엾은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 9절이 말하기를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일곱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개수가 일곱 개라기보다는 아마도 평범하게 귀신이 들린 일반적인 상태가 아니라 매우 심각하고 흉악한 상황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귀신이 들렸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인생이라고는 차마 할 수 없는 망가진 삶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그녀의 망가진 영혼을 고쳐주셨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후로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특별히 그분이 가르쳐 주신 진리의 말씀에 목마른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 39절에서 42절에 보면 예수 방문하셨을 때에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는 일로 바빴으나 예수님의 발 곁에서 한 말씀도 놓치지 않고 그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했던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께 값비싼 향료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겨 주었던 여인이었고, 병들어 가엾어 누워있는 나사로의 누이였다고 요한복음 11장 2절이 증언합니다.
이후로 그녀의 삶은 이제 예수를 위한 삶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도시와 촌을 두루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동행하며 자신의 온 마음과 소유를 드려 이 복음이 전해지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복음 8장 2절과 3절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흉악히 귀신들린 데서 건져주신 그 이후로 예수께만 붙어있던 변절할 줄 모르는 여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예수님이 3년 동안 그렇게 사랑하시고 함께 먹고 마시고 자며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고, 요한 한 사람이후에 십자가 아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 육신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함께 그 십자가 현장에 마지막까지 있었던 여인이었다고 요한복음 19장 25절이 증언합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수습되고,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청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가져다가 자기 소유의 무덤에 장사하고, 돌로 그 무덤을 막고 봉인하는 광경까지 지켜보았다고 마가복음 15장 47절이 말합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한번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 후 그분 곁을 떠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며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해준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시고, 시신조차 없어졌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소리를 내어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슬픔이 빚어낸 울음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사랑의 진실함과 깊이는 그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나타나는 슬픔의 크기로 증명이 됩니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찾은 자들은 열두 제자들도 아니었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물고기와 떡을 먹고 배불렀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온갖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아 새 삶을 산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무덤을 찾아온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많이 사랑하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마리아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많이 사랑했으나, 그녀는 예수께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과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누구를 위한 무슨 구속의 비밀인지를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지식의 분량에 있어서 우리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자신을 다 드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그분이 살아계실 때나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나 그 사랑은 동일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예수 죽었을 때 더 뜨겁게 타올라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를 위해 바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신앙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신의 인생에 목적이 무언지도 모른 채 살았습니다. 육신의 좋은 것을 행하며 자기의 만족을 위해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 기껏해야 인류에게 도덕적인 감화를 끼친 4대 성인 중 한 분으로만 알았던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나 죄를 지은 우리의 허물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보였던 반응은 큰 눈물이었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신앙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하나님을 더 아는 것, 무지해지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 못 느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선한 의지를 갖는 것 거기에서 돌이켜 악을 향하는 것, 모두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경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장면은 시인들이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는 광경입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거기서 만난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눈물 흘리는 광경이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을 자녀 삼아주신 것에 대해서 감격해 하는 그 마음이 경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동안 우리에게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한 시간이 있었습니까? 참된 신앙과 경건이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거늘 오늘날 신자들을 보면 마치 돌 가슴, 철 마음 경연대회를 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차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점점 커 보이고, 하나님은 점점 작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녀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적 죽음이라는 것과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생명과 육적인 부활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지식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으나 그 지식 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전부로써 사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갈망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 이 모든 세상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적적으로 만나주시고, 절망과 슬픔을 변하여 희망과 기쁨이 되게 해주시나니 눈물로 주님을 찾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만나주신 예수
마지막 두 번째는 만나주신 예수님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여전히 울다가 허리를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했는데 놀랍게도 예수의 시신이 있었을 그 자리에 앉아있는 두 천사를 발견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천사들이 질문했습니다. 마리아는 말했습니다.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였습니다(요 20:13). 그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셨습니다. ‘여자여’라는 이 그리스어 ‘구나이’(gunai)라는 이 단어는 단수 호격(呼格)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에 단독으로 나눈 대화였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분이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동산지기인줄로 착각하고 예수의 시신을 옮겼다면 어디에 모셨는지 알려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그녀의 이름을 친근히 불러주셨습니다. 그 이름을 불러주실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살아생전에 그렇게 흉악하게 귀신들려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던 그녀가 단정한 사람이 되었고, 이후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거룩한 여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모든 꿈과 소망을 그리스도 예수께 걸고 그분을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드리고, 그분의 발을 자신의 머리로 씻겨 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섬겼던 그 여자를 불러주실 때에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당신은 죽으셨으나 아끼던 제자들도 당신을 버리고 다 갈 길로 갔지만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와 심문과 처형에 이르는 과정, 마지막 시신이 수습되고, 장례되던 그 모든 과정까지 함께하면서 당신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서러운 울음소리로 나타내었던 이 여자를 보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은 “이름으로도” 아시는 최고의 친밀함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큰 징벌을 받게 되었을 때 모세는 눈물로 하나님께 돌이켜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매달릴 때 그가 호소한바 중 하나가 예전에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라는 호소였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3장 12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마리아야” 라고 불러주신 이 이름으로 불러주신 것은 비록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시지만 여전히 이 여인을 향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삶의 껍데기를 색칠하는 것도 아니고, 그 껍데기를 집어내 팽개쳐 버리고 막사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앙은 격하게 솟아오르는 감정의 덩어리도 아닙니다. 신앙은 그렇게 하나님이신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만남입니다. 즉, 영이신 하나님과 영혼을 가진 사람이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보고 듣고 만져서 알게 하시고, 그 기록을 남겨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이 예수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모든 상상되는 현상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이며 이것은 영적인 만남인데 그 만남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경험되고 의식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면 그의 영혼의 변화가 오고,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비록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고 그것 때문에 마음에 끊임없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만물을 초월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자신의 영혼으로 만남으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자신의 삶 도처에서 느끼며 그 하나님 때문에 웃어야 할 현실 속에서 눈물을 배우고, 흐느껴 울어야 할 고통 속에서 환희를 느끼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모든 생애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당신의 피붙이처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오늘 목 놓아 울고 있는 이 가엾은 여인에게 “마리아야” 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이렇게 당신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절망과 슬픔 속에 있지만 거기서 자기가 사랑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을 만나고자 눈물로 찾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꿈꾸지 못했던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진실한 사랑은 가지고 있었고, 흘려도 흘려도 마르지 않는 그 사랑의 눈물은 가지고 있었으나 시신에게 향품을 넣어주려고 온 이 여인이 다시 살아나신 영광스러운 예수를 만날 기적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이 여자의 죽었던 마음도 다시 살아났으니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간절히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과 시련의 때에 간절히 예수를 찾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을 찾아 장사 지내기 위해 무덤에 갔으나 뜻밖에도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평소처럼 자기를 사랑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함없는 다정함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을 증언하였습니다. 본문 18절은 말하기를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릴 큰 능력을 이미 받은 사도들이었고, 친밀함에 있어서는 누구와 비할 데 없을 정도로 3년을 함께한 사도들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은 마리아의 증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미천한 사람이었으나 절망 중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의 위대한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시체나 찾고자 무덤에 오르던 슬픔의 새벽이 기쁨으로 변하는 아침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이 살아나셨기 때문에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지금 다시 살려내시는 그 생명의 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무덤과 같은 좌절 속에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비록 잠시 좌절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피할 수 없는 이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여러분들은 다시 기쁨과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빈 무덤 앞에 통곡하던 이 여자의 울음소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기쁨으로 요동쳤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싶어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이 주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눈물로 찾아 사랑으로 만나고, 새 생명과 힘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