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사랑함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시 119:119)
녹취자: 박지성
시편에서 ‘에두트’(עֵדוּת) 히브리말로 ‘증거’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굳이 ‘증거’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말씀이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또 그것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기 때문에 ‘증거’라고 부릅니다.
시인은 악인과 하나님의 자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의 율례에서 떠나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바로 앞 절에 나오는데 악인과 동격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악인들이 잠시 이 세상에 번성할 수 있고 또 사람들의 눈에 띌 수 있고 또 그들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검불과 같은 사람들이고 마치 베어놓은 풀이 처음에는 무성한 것 같지만 햇살이 퍼지고 나면 모두 말라서 지푸라기가 되어 흩어지는 것처럼 악인의 결말이 그러하다고 가르칩니다.
이에 비해서 그들은 다 허무하지만, 하나님의 성도들, 그 증거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증거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오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입니다. 일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향하여 무엇인가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도 알고 보면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똑같이 인간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어떻게 하든지 그 진리를 자신의 표현으로 끌어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제가 요새 삼위일체를 묵상하고 있는데 어거스틴이 삼위일체 3권 1장 1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의 말과 문장으로 말하자면 마치 이륜마차와 같은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사랑이 이 마차를 몰아서 달리게 하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혹은 ‘아깃따뜨’니까 조르고 있습니다. 그 말과 문장이 두 바퀴라면 그 두 바퀴를 계속 굴러가도록 마차를 몰아서 이 두 개를 굴리도록 아주 ‘아깃따뜨’ 해달라고 조르는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말이 많아집니다. 사랑한다고 하는데 말이 없으면 싫증이 난 것입니다. 몸의 컨디션이 모두 정상인 상태에서는 느낀 것이 많으면 그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할라치면 그 말씀이 내 속에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은 결국 그의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이고 그 사랑이 이 선지자의 마음속에 불탔기 때문에 그는 도저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묘사가 사도바울의 서신에서도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지라”(라는 구절입니다.) 마음속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을 말하라고 우리에게 (계속)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큰 은혜를 받고 나서 늘 동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사람이 “내가 그를 만났다. 그가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말씀에 대한 사랑이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식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함께 식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항상 사랑으로 타오르도록 그렇게 우리 자신을 관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계속 불타고 그 말씀에 우리의 마음이 이끌리는 한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반드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이끌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디론가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비극은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이끌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목양한다고 할 때 목양이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가 돌본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가 사랑하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지도(그렇게 살지도) 못하지만, 설령 매우 훌륭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목양의 목표는 그 사람들을 우리 앞에 세워서 기죽게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가책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목양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돕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사역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함으로써 거기서 하나님이 얼마나 참되고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경험하게 하고 이제까지 자신이 참 아름답다 좋다고 느꼈던 것들보다 하나님이 훨씬 그러한 분임을 알게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얼마나 간사합니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마이크를 쓰다가 더 좋은 것을 만났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이 마이크를 쓸 수 없습니다. 한번 이미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똑같이 누군가를 강압하고 위협을 하고 겁을 준다고 해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말로 사람들을 깊이 설득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보여주고 자기가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이것을 사랑하는 것이 정말 행복하구나 하는 만족을 느끼게 해줄 때, 그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씀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안정적이고 평화롭고 행복한지를 (내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목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목양을 받을 때,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자신의 온 인격과 삶으로 보여줄 수 있을 때 그의 말이 신비한 능력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우리가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을 그 사람에게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드뭅니까? 거의 없습니다. 그냥 감동을 받으면 받은 대로 못 받으면 못 받은 대로 가만히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감화를 받아도 표현을 잘 안 합니다. 우리는 다만 확인할 수 없어도 조급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함으로써 결국 그 말씀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하나가 되고 성도들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요즘과 같이 시련이 많고 의외의 환경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이 많을 때는 더더욱 이 말씀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환경과 더불어 현실 속에서 씨름하지만, 우리의 마음의 눈은 환경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말씀의 아름다움 때문에 깊은 사랑을 경험하면서 그 현실을 극복해 나갈 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에 묶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이런 시련을 이겨나갈 수 있는 넉넉한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