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해 목회하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 1:9)
녹취자: 조경훈
저는 목회를 하면서 종종 목회자의 자녀들이 교회에 등록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부모님은 오래전에 목회를 해서 은퇴를 하셨고 자녀들이 교회에 등록을 하는 경우입니다. 또 남편이 소천하시고 사모님이 홀로 남은 가운데 교회에 등록하셔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좀처럼 교회 속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했더니 목회자인 남편과 부모님이 목회를 하면서 교회에서 고통 받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교회에 깊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큰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깊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한 편으로는 왜 신앙이 저렇게 약할까? 라는 생각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목회자는 사명이니까 어쩔 수 없이 이런 저런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겪었어도 자녀들까지 함께 그 고통을 겪은 것이 얼마나 크길래 교회에 대한 저런 두려움이 생겼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대체 목회라는 것이 무엇일까? 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신구약 성경 중에 오늘 읽은 구절만큼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이야기 해주는 구절을 못 만났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사도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어쩌면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죄수의 몸으로 밖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쁨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빌립보라는 도시는 로마황제가 로마에 오고 싶지만 너무 길이 멀어서 로마에 못 오는 사람들을 위해 로마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려고 세워놓은 계획도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못 가더라도 빌립보에 와서 그 아름다운 건축과 잘 정돈된 도시를 보면서 빌립보가 이러하니 빌립보가 본을 땄다고 하는 로마는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다운 도시일까? 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빌립보라는 도시를 지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가지고 역으로 하늘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일까?를 너희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생각나게 만들어주어라. 하면서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목회란 무엇일까요? 사실 목회를 20년을 한 후에도 저는 목회자 무엇인지에 대한 명쾌한 그림이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소명을 받을 때는 그저 기도하고 전도하고 말씀을 전하면 그것이 목회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해 보니까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은행에서 융자를 얻는 것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디자인, 직원들 채용하고 선교하고 건물을 짓고 하는 일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어서 도대체 내가 목사가 되겠다고 눈물을 흘릴 때 이런 일을 하려고 목사가 됐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던 어느 때 이 성경구절을 만나면서 제 생각을 또렷하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감옥 속에 갇혀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기가 이 감옥 속에서 그들을 위해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는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이것이 바로 목회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회를 위해서 정치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정치는 목회가 아닙니다. 인간관계가 목회를 위해 필요할지 모르지만 인간관계가 목회는 아닙니다. 성경을 잘 가르치는 것이 목회에 꼭 필요하지만 지식의 함양 그 자체가 목회라고는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회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이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여기서 ‘점점 더 풍성하게 하다’ 라고 할 때 ‘풍성하다’는 그리스어도 페리셰우(περισσευω) 라는 단어인데 물통 같은 것이 있는데 물을 너무 많이 부어서 바깥으로 넘쳐흐르는 모습을 표현하는 동사입니다. 그것을 말론카이말론(μαλλον και μαλλον), the more and the more 점점 더 많이 바깥으로 흘러넘치기까지 사랑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목회라고 하는 말입니다.
언젠가 조엘 비키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가 막히게 설교 준비를 하고 기가 막히게 기도를 하고 정말 흠 잡을 데 없이 설교를 했는데도 교인들이 은혜를 받지 못할 때에는 한 가지가 빠진 것이다. 그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교인들을 향한 눈물어린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목사가 목회를 해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목회의 목표를 그렇게 정하고 나면 사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예수님이 실패한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르실 작정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 정치 잘 하냐? 너 인간관계에 능숙하냐? 좋은 대학을 나왔냐? 심지어 가문이 쓸만 하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 가지를 여쭈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스어 성경에 세 번의 질문이 조금씩 다른 원어로 나오지만 결국은 똑같이 사랑하는지를 세 번 물은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교회를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수없이 많은데 목회의 길에 들어서게 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저는 원래 목사는 교인들 코 묻은 돈을 먹고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혀 이 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영문학자가 되고 싶었고 수필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내가 그 길을 가지 못하게 상황이 가로막았습니다. 결국은 목사가 됐습니다. 우리 모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상황은 모두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처럼 우리가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깊이 만났을 때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주님의 은혜로 정말 주님만을 사랑하는 최고의 사랑지킴이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18세기에 위대한 전도자 조지 윗필드는 정말 헌신적으로 자신의 삶을 다 드려 복음을 전했고 53살의 꽃다운 나이에 과로로 숨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렬한 사람도 자기의 소명이 식을 때마다 찾아가는 곳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회심한 예배당이었습니다. 술집보이였던 그가 세계적인 복음전도자가 되고 마음에 소명이 식을 것 같을 때 자기가 회심한 교회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키스를 하면서 ‘내가 여기서 주님을 만났다’ 되새겼던 것입니다.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목회의 보람이 무엇입니까? 한 30년 목회하는 동안에 즐거운 일들도 있었고 괴로운 일들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너무 괴로워서 오늘 저녁에 눈을 감으면 내일 아침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눈을 뜨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통틀어서 그래도 우리에게 보람을 안겨주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좋은 사택, 훌륭한 차 그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만족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감격이 넘쳐서 짐승 같은 사람이 변해서 거룩한 성도가 되고 이웃에게 손가락질받던 사람이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 행복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이 기도입니다. 내가 설교하고 내가 말씀을 가르치고 심지어 내가 살아있음으로써 성도들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회에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우리의 설교와 목회를 통해서 하나님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위대한 신학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에서 전도란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전도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져서 항상 바깥으로 넘쳐흐르는 인격과 삶을 갖춘 사람들이 되게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직도 목회자로 살려주신 것을 우리 모두 믿읍시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철철 넘쳐나게 할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 자신이 항상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넘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라면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라고 말합니다. 지식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입니다. 에피는 무엇에 관하여, 무엇에 대하여 라는 뜻이고, 그노시스는 지식이라는 뜻인데 이 지식은 우리들이 이성으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체험으로써 아는 지식입니다. 그노스코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동치어가 야다인데 야다가 처음 쓰인 곳이 창세기 2장입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에서 이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이 지식은 체험적인 지식을 가리키기 때문에 사도바울도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라고 말했습니다.
에피그노시스, 모든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에 점점 넘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이 세계에 존재하기 전에 논리적으로 하나님 안에 모든 창조된 만물들에 대한 지식, 관념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논리적으로 그 관념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대로 모든 것이 창조되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물을 겉모습만 보고 대충 알면 그런 가보다 하지만 그 사물을 철저한 지식으로 파악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그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생각이 옮아져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의 핵심이 성경이고 성경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만물들에 대한 지식이 함께 둘러싸이면서 한 분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지식의 체계입니다. 이것 때문에 모든 인간이 학문을 해서 어느 정도 진리를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것을 그리스도 실재론이라고 부르면서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 가운데 계심으로 진리를 발견해 낼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목회의 본질은 사랑을 충만하게 하는 것인데 사랑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진리에 관해 올바른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달해도 그것이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수는 있지만 지식이 없이 사랑이 불러일으켜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는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진리와 함께 씨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무엇이 참 진리이고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무엇이고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지를 고뇌하면서 성경을 통해서 신학을 통해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해야 하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그것으로써 성도는 설교자의 능변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는 평생 학문인이어야 합니다. 학자까지는 못 되더라도 학문을 끊임없이 하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함께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또 하나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지식과 총명을 수단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불길처럼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총명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스어 성경에 아이스떼시스(αἴσθησι)라고 나오는데 동사 아이스따노마이, ‘놀라다’ 라는 단어에서 옵니다. 한마디로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 혹은 판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총명은 직관적으로 어떤 사물을 보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믿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리를 우리에게 인식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던 무신론자의 어두운 마음에 진리의 빛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이 믿음인데 이것이 바로 총명입니다.
그림을 그리자면 이런 것입니다.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 타올라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불길입니다. 밑에 두 개의 장작이 있습니다. 하나의 장작은 지식이고 또 하나의 장작은 총명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의 장작은 말씀에 관한 지식이고 또 하나는 충만한 믿음입니다. 이 두 개의 장작을 태우며 사랑의 불길이 계속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화장터를 방문하면 모두 전기로 시체를 태워서 불과 한 시간이 되기 전에 가루가 뼈가 되어서 유골이 나옵니다. 예전에는 그것을 장작으로 다 땠습니다. 장작으로 때다가 잘 안되면 사용한 소재가 지푸라기였습니다. 바짝 마른 볏짚만큼 어마어마한 불길을 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논에서 볏짚들이 타오릅니다. 그런 볏짚을 집어넣어서 시체를 태웠습니다. 문제는 볏짚은 한 트럭을 갖다 부어도 불과 몇십 분을 타지 못하고 불길이 사위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잘 마른 장작은 끊임없이 집어넣으면 불길이 계속 솟아오르게 마련입니다.
목회자는 제일 먼저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두 팔이 닳도록 공부를 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성경과 신학 학문을 통해서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0년 20년을 한 목사에게 설교를 들었는데 그 지식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목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 자신이 총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마음속에 늘 불붙어있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고 목회의 연한이 오래될수록 믿음보다는 경험을 의지하게 되고 나이가 어리면 믿음보다 자기 지식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린아이처럼 마음속에 충만해져서 살아야 합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훌륭한 목사님이었고 교수님이었던 분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성공한 열 교회 중에 한 교회라고 불릴 정도로 큰 목회의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너는 한국으로 돌아가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더랍니다. 그래서 한국에 나와 보니까 교수도 갈 만한 자리가 없고 집값이 얼마나 비싼지 자신이 가진 재산으로는 식구들과 거처를 마련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아빠가 ‘이런 부르심을 받았는데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너희들이 기도를 좀 해 다오’ 하고 기도하고 있었답니다. 아빠의 보고를 듣고 모든 식구들이 풀이 죽어있는데 다섯 살짜리 막내아들이 이렇게 묻더랍니다. 아빠! 그렇게 어려우면 하나님이 도와주셔도 안 되는 거야? 그 한 마디가 목사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하고 내일 일은 날 몰라도 나는 간다. 하고 미국에서 목회자의 최고의 영광인 평생 목회하겠다고 사인하라는 것을 거부하고 보따리를 싸가지고 전셋집을 얻어서 한국의 유수한 대학의 교수로 오셔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목사의 마음이 항상 믿음으로 충만해질 리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불일 듯 일어나게 하는 성도들로 만듭시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목표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은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 1:10) 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분별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는 이유는 목회자 잘 섬기라고? 아닙니다. 교회를 잘 섬기라고?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잘 분별해서 심지어 교회가 그릇된 길로 가면 그 교회를 올바른 길을 가게하고 목회자가 잘못된 길을 가면 그 길은 안 쫒아 갈 수 있을 정도의 분별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목회라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분별하다’ 라고 하는 우리말 성경에 쓰인 단어가 그리스어로 도키마조(δοκιμάζω)입니다. 그냥 육안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으면서 분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날에는 여기 놓인 탁자를 나무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나무가 비싸서 MDF라는 나뭇가루를 찧어서 만든 판에 흔히 래핑이라고 하는 플라스틱 껍질을 붙입니다. 전 세계에서 최고로 이 기술이 발달한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호텔에 가도 저게 진짜 나무인지 가짜 나무인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궁금한 나머지 자동차 열쇠로 한번 긁어보면 비로소 껍질이 벗겨집니다. 그것이 도키마조입니다. 그런 식으로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사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목회를 하는 이유는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성도들이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천지가 한창 극성을 부릴 때 동네에 있는 한 교회는 한 교구가 모두 따라서 신천지로 가버렸고 장로님도 가고 부목사도 함께 신천지로 가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별력을 키워주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잘 목양해서 거짓이 난무하는 이 때에 이 시대와 진리를 올바르게 분별하여 살게 하기 위해 우리를 목회자로 불러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진실하여’ 라고 했습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에일리크리네스(εἰλικρινής)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합성어인데 ‘에일리’라는 단어와 ‘크리네스’ 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크리네스’는 ‘크리노’, 판단하다 라는 단어에서 왔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에일리’ 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을 ‘햇빛’이라고 봅니다. 햇빛을 통해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지폐 같은 것들이 위폐가 아닌지 검증하기 위해서 햇빛에 비춰봅니다. 그러면 그 재질을 보고 진폐다, 위폐다 라는 것을 가늠해 내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학설은 ‘채’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바구니에 가루를 집어넣고 흔들면 고운 가루는 빠져나오고 굵은 가루는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어서 구분하는 도구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저는 둘 중에 무엇을 취하든지 결론은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에일리크리네스라는 말은 엄정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 통과돼서 진실하다고 인정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진실’ 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 와는 다릅니다.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지만 진실은 진리에 합치하는 인간의 도덕적인 무엇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진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모든 사랑은 진리라는 기준이 있어야 하고 진리라는 기준에 합치할 때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와 사람이 보지 않을 때, 여럿이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가 꼭 같은 사람이 진실한 사람입니다. 진실은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리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목회하는 목표는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사람이 보든지 보지 아니하든지 진리에 합치하여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목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나 되거나 교단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거나 혹은 교회라는 건물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진리를 중심으로, 진리를 사랑함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교인들이 가지는 목회자에 대한 존중심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교회 안에는 목회자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돈 많은 사람, 더 훌륭한 가문과 더 우월한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목사님이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그를 본받기 위해서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존경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결국 진실이라고 하는 가치를 세상은 버렸습니다. 이제는 그런 진실을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사회에서도 심지어 법정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절대적으로 진실하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회에서 이 진실이 무시되어 버리고 이 진실을 언제든지 거짓으로 호도하고 속아 넘어가 주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정말 진실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진실이 사라질 때 교회는 세상과 다른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하기 쉬워도 진실하게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방배동에서 교인이 갑자기 많아져서 도저히 그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고 건물주가 건물을 개발해서 오피스텔을 만들 테니 방을 빼라고 해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정직과 진실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은 쉽지만 그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경험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 년 전 일이었습니다. 교회를 지을 땅을 사게 되었는데 안 판다고 해서 사정을 하니까 그 할아버지가 도대체 내 땅을 왜 그렇게 살라고 하느냐고 해서 ‘교회를 짓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교회? 일주일만 생각을 해 봅시다’ 하고 일주일 뒤에 갔더니 그분이 그 땅을 가져가시라고 하셨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 분은 26살에 한경직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고 안수를 받아 장로가 되신 분이었습니다. 7-80년대에 가발공장과 전자제품 공장으로 사업을 하다가 팔순이 다 되어서 은퇴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정말 좋은 분이었습니다. 땅을 사라 그래서 얼마입니까? 물으니까 천 평에 36억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250억 300억이 갑니다만 그 당시 교회 돈이라고는 천오백만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들려오는 두 번째 이야기가 저를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36억에 해 주는데 조건이 있다. 30억으로 계약서를 쓰고 6억은 현찰 비자금으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경우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건축위원들에게 물어보니까 80프로 이상이 목사님. 그게 관례입니다. 20년 전이었으니까 더더욱 괜찮습니다. 다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회계사를 불러서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까 목사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부를 두 개를 쓰셔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니다 목사가 되어서 어떻게 장부를 두 개 쓰겠느냐? 세금이 얼마냐고 물으니 3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집주인은 36억에 팔겠다는 땅을 저희가 자진해서 39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주인은 계약서 하나만 쓰는데 3억을 더 주겠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9억에 샀습니다. 세상에 주겠다는 돈을 깎는다는 사람은 있지만 더 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돈이 없어 은행에서 융자 내기도 너무 힘들어서 태어나서 돈 때문에 가장 많이 고통을 받았던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 결정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그때 얘기했습니다. ‘이중 계약서를 쓰고 예배당을 세우면 후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겠냐?’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완벽하게 진실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이 하루에 평균적으로 수백 번의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진실해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성도들을 목회하는 목회자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허물없이’ 라고 했습니다. 아프로스코포스(ἀπρόσκοπος) 라는 단어인데 흠집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주 커다란 배가 있다고 칩시다. 모두 훌륭한데 끝에 살짝 흠집이 있으면 가격이 뚝 떨어지고 선물용으로는 전혀 적합하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흠 없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목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목회자에게 흠이 없는 목회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회개를 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나는 날마다 나는 죽노라’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할 수 있는 한 흠이 없는 삶을 살고자 몸부림치고 애쓴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얼마일지 모르지만 남은 생애동안 우리가 이렇게 목회를 하다가 주님께 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