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녹취자: 백지영
자, 그러면 저는 오늘 여러분하고 약속한 대로 “목회란 무엇인가”, 강의안을 보시면 재미가 없으니까 집에 가셔서 읽어보시고 이 시간에는 우리 성경을 한번 찾아보고 그리고 저를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제1장 9절부터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뜻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또박또박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아멘.
저는 성경을 읽었지만 이 구절만큼 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료하게 말해주는 성경구절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제가 녹음한 것 모두 드릴 테니까 필기하지 말고 저를 보십시오. 영상도 달라고 하면 다 드리겠습니다. 저를 보시면 됩니다. 메모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뭐냐 하면, 우리가 목회라고 말할 때 너무 광범위합니다. 제가 목회자가 되고 개척교회를 하고 5년이 지난 후에야 목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기도와 말씀에 전무(專務)하는 사람이 목사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와보니까 기도와 말씀에 전무해가지고는 교회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인이 와야지 말씀을 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전도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있어야 기도제목을 받을 것 아닙니까? 그뿐입니까? 교인들이 많아져서 이사할 때는 누가 고민을 제일 합니까? 돈은 누가 빌려옵니까? 아무도 대신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출판, 디자인, 심지어 조직관리,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코로나 나기 전에 주일에 한 4천7백 명 모였는데 나는 4만 7천명 직원을 가진 회사하기가 훨씬 쉬울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는. 47만 명 회사는 몰라도. 왜? 해고도 할 수 있고 모든 전권을 쥐고 있습니다. 목사는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에 호소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목회는 무엇이다.”라고 말했는데 여러분 중 아무도 일치를 안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오답을 말씀하신 분이 없습니다. 그렇게 많다 그 이야기입니다. 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선배들이 왜 종합예술이라고 했는지 이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H2O가 만나면 물도 되고 얼음도 되고 수증기도 되고 별게 다 됩니다. 그런데 본질은 H2O입니다. 그래서 오늘 궁금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이 이야기는 “무슨 일이 목회냐?” 이렇게 묻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그 모든 일 속에 하나로 통합되는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을 제 이야기로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늘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차례대로 따라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계속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관으로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저는 한 20년 전에 주기도문을 혼자 공부하면서 성경 전체를 보는 비결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것을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오백페이지정도 ‘주기도문’ 책을 냈습니다. 그런데 모든 신학자들의 공통적인 관측이 예수님의 주기도문은 즉석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려고 만든 게 아니라 평소 당신 자신이 하시던 기도의 패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끝날 때 그 주기도문을 외우라고 끝나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 패턴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패턴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 세계 역사의 전개에 대한 청사진이 그 주기도문 속에 응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예수님이 통곡과 눈물로 그 기도를 들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그 주기도문을 확대해서 보면 왜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었나하는 것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영어로 말하면 apple in eyes,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교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성심으로 목회자를 도왔고 그랬는데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처지에서 이 교회를 향해 고백을 한 것입니다. 한 번도 안하다가 편지를 쓰기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냥 평소에 늘 하던 기도를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기도하노라, 중간의 구절을 다 빼면,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여"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고 믿을 때 어거스틴의 해석이 그야말로 최고의 해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신학자이고, 제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천국에 가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우리 할머니하고 어거스틴 밖에는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저절로 만날 것이고. 사도바울보다도 오히려 더 보고 싶습니다. 정말 위대한 사람이고, 여러분들이 저의 충고를 따라서 어거스틴과 사랑에 빠진다면 여러분들은 탁월한 사람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요 옆에가 어거스틴 파크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전도란 무엇인가?”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던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전도다.” 그 사람은 거기서 이야기를 그쳤는데 저는 이 이야기를 보태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게 전도라면, 목회는 무엇이냐? 하나님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을 딴 것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 사랑이 계속 불타오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다,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은 목회를 잘 하는 사람이고, 세상의 모든 것을 잘해도 그것을 못하는 사람은 축구선수로서 키도 크고 인물도 훌륭하고 달리기도 잘하고 유니폼도 멋있고 매너도 훌륭하고 사생활도 깨끗한데 절대 골은 못 넣는 축구 공격수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에 상급 받을 때 골을 넣은 선수가 상을 받는 것이지 운동장에서 멋있는 유니폼을 입은 선수, 많이 달린 선수가 상을 받는 게 아닙니다.
요즘은 여러분이 아마 긴장하셔야 될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때만 해도, 93년도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그때도 이미 어려웠지만 그래도 개척교회를 생명 내 놓고 하면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개척하면 절반은 됐습니다. 지금은 이십 교회에 한 교회도 안 됩니다. 3년 안에 신도시에 있는 교회의 3분의 2가 이사 갑니다. 없어지거나 다른 데로 간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이지요. 점점 더 전도하기 어려워진다는 것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궁금하시면 내일이라도 한번 내가 사도행전의 삶을 살아보겠다고 그러고 전도사, 목사 이런 것 다 내려놓고 전도지하고 성경을 들고 마스크 쓰고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보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목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전도는 처음하게 하는 것이고, 목회는 그렇게 된 사람이 변심 안 하도록 계속 그 사랑으로 불붙여 주는 것이 목회입니다.
여기에 보면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그랬습니다. 그게 희랍어 성경에 보면 ‘페리세우에’라고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그림으로 그려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커다란 통이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목욕통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거기에 물을 계속 붓습니다. 물이 아귀까지 꽉 찼는데 멈추지 않고 계속 부으면 그 물이 바깥으로 흘러넘칩니다. 그 동작을 표현하는 것이 ‘페리세우에’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느냐 하면, 하나님을 적당히 사랑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계속 하늘로부터 부어져서 그 마음속에서 넘쳐나기를 예수 말씀하신 것처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한 것처럼 그렇게 사랑이 온전히 솟아 나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 여기 질문에도 이야기했는데 우리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목회를 하는 우리 자신이 이런 고백할 수 있습니까?
(찬양)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숨질 때라도 내 할 말씀이 어제보다 오늘 주를 더 사랑합니다.” 목회를 하는 우리도 그게 잘 안 되는데 남을 그렇게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을 할 때 그때 교수였습니다. 제가 91년도에 연봉을 4천만 원 받았습니다. 그것은 메이저신학교에 시니어교수들이 받는 대우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2년 만에 학교를 스스로 사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한 달 급여가 3분의 1도 안 됩니다. 백만 원인가 주었습니다. 교회에서. 애들이 둘인데 백만 원 가지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하여튼 하나님이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 인생에서 너무너무 잘 한 게 그 적기에 제가 사표를 내고 목회에 전념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때 저는 이미 주님을 깊이 만났고 말씀의 능력도 받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하도 울어서 조용히 좀 하라고, 설교는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설교를 다 듣고 울던지 말든지 하지 그럴 정도였습니다. 저는 1년 하면 3백 명은 못 모으랴, 내가 바보인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1년 했는데 60명 정도 모였습니다. 그 성적표를 받아들고 제가 참 겸손해 졌습니다. 그러다가 1년 더 있다가 "아, 이제 내가 나 자신을 던져야 할 시간이구나." 그리고 사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방송을 듣고, 책을 읽고, 교인들이 열렬히 전도하니까 사람들이 와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 저 사람들은 영원히 교회에 있으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3년 후에 남아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5년 후에는 아주 소수이고, 10년 후에는 아주 드믑니다.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마음이 전깃줄에 앉은 참새 같아서 변덕이 그렇게 심한 것입니다. 그 수많은 인간들을 데리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목회를 하는 그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능가하는 목회자의 자격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있는 사람은 비록 지식이 좀 적어도 목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목회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교회 담임목사로 누구를 생각하셨습니까? 베드로를 생각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자기 버리고 배신했던 그 녀석을 찾아가서 물어보신 게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스어로 세 질문이 다르게 나왔고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은 같은 말의 거의 반복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예수님 사랑을 경험한 사람, 소명이라는 것이 원래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아무 일에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소명입니다. 영혼이 너무 가엾어서 일상적인 내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다가는 어쩌면 내가 벌 받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어서 죽어도 다른 일을 못할 것 같은 게 목회의 소명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김세윤 박사님은 ‘divine enforcement’, ‘신적인 강제력’이라고 표현을 하고, 그 다메섹에서 그것을 경험한 게 종자씨가 되어서 바울 종교의 기원을 이루게 됐다는 게 박사학위 논문의 요지입니다.
아무튼 그런데, 그러면 그런 사랑이 사람들 속에 계속 일어나야 되는데 “How?” 어떻게 그렇게 해야 되겠느냐는 질문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정도 이야기하면 다들 설득될 것 아닙니까? “아, 맞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저의 이 목회의 본질의 정의, definition에 대해 부정하거나 저항하고 싶으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그러면 어떻게? "How"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북 치고 장구 치고 은사집회를 하는가 하면, 사람들을 쓰러트리는 빈야드식의 신사도 운동을 하는가 하면, 아니면 연예인들 불러다가 매일 간증집회를 하지를 않나, 아니면 사람들을 데리고 그냥 빈민가를 누비며 봉사를 하게 하지 않나, 다양한 방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전적으로 필요 없다, 잘못됐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교회 돈 빌려 오는 것이 목회의 한 수단이기는 하지만 본질은 아닌 것처럼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본질적인 수단은 안 된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그렇게 되느냐? 그것에 대한 답을 오늘 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희 사랑을”, 그러니까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글을 보면 희랍어 원문에도 똑같습니다. 결국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자기가 불러일으킨다는 게 아니라 자기는 도구이고 하나님이 그 사랑을 불러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하시는 게 아니라 어떤 도구를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첫 번째 도구가 먼저 나오는 게 “너희 사랑”입니다. 그게 희랍어 성경에 “아가페 해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고 했는데 그 사랑이 아가페입니다. 그리스사람들은 사랑을 부자지간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스톨게, 남녀 간의 육욕적 사랑을 에로스라고 했습니다. 형제지간의 가족애 같은 사랑을 필레아라고 이야기했고, 아가페의 사랑은 원래 신이 기원입니다. 우리 흔히 고등학교 다닐 때 아가페 사랑을 맹목적 사랑이라고 사회시간에 외웠습니다. 맹목적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원인이 사랑받은 사람의 장점 때문에 불러 일으켜진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그 주체 안에 무한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베네볼렌띠아'라고 합니다. '박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박애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듯이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이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해 아가페'가 사람들 속에서 이야기하는 114 전화 걸면 ‘고객님 사랑합니다.’하는, - 나는 짜증납니다. 나는 그런 사랑 받고 싶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말고 안내만 잘 해주면 된다 말입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무슨 호객이지요. - 그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해되시지요? 뭐냐 하면, 사람들을 모아놓고 최악의 목회 상태가 끈끈한 인간의 정으로 뭉쳐지게 만드는 게 최악의 목회입니다. 끈끈한 인간의 정으로 떼어놓을 수 없게끔 묶어놓는 것이 최악의 목회입니다.
30대 때에 저는 청교도에 푹 빠졌는데 청교도들은 한 사람이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목회자와 친하게 지내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을 청교도들은 매우 경계했습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목회 했어도 명백한 사유 없이 어느 교인과 밥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그냥 아무개 집사가 보고 싶으니까 밥 먹자 그렇게 목회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고 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전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흔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회할 때 3년은 참 너무 신혼 같다고. 난 그런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적인 사랑으로 뭉쳐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목사의 말은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이 아니라 그냥 이웃의 이야기로 들리기가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우리 초대 교회 때 선배목사님들이 그렇게 교인들을 사랑했으면서도 속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데 뒤웅 키면서 그렇게 하고, 그리고 교인들하고 사우나나 같이 다니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해 아가페’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서방신학자들은 ‘아가페’라는 말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아서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라고 불렀지만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져서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솟아나는 사랑을 ‘까리따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명은,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그 사랑을 교인들이 깨닫고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 나는 지순애(至純愛)라고 번역을 합니다. 지극히 순전한 사랑, 사욕이 섞이지 않은 사랑입니다. 반대가 ‘꾸삐띠다스’입니다. 육욕입니다. - 그런 순결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건데, 여기 말하는 게 뭐냐 하면 “너희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빌립보교회 교인들 마음속에는 아무리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미 그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이 문제를 잘 이야기했는데,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성향이 최초로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존 오웬은 불신자는 죄를 지어도 단일의지로 죄를 짓는데 신자는 복합의지로 죄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복합의지라는 게 무엇이냐 하면 육욕이 살아서 죄 짓고 싶은 의지가 있는데 이 밑바닥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는 의지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죽이고 이것을 어떻게 살리냐가 칼빈이 이야기했던 '모티피케이션'과 '비비피케이션'입니다. 모티피케이션 of sin, 죄는 죽이고, 비비피케이션 of grace, 은혜는 살려내는 것, 이렇게 해서 까리따스의 사랑을 충만하게 하는 게 목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 안에 있는 사랑을 북돋아서 살려내는 것, 그런데 무엇으로 그렇게 하느냐? 두 가지가 나오는데 “지식과 모든 총명”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지식을 ‘에피그노시스’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상세하게 설명하려면 그리스철학의 지식론으로 들어가서 많은 철학적인 이야기를 배경에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사도는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 무엇인가 하는 지식론에 대한 철학은 철학사까지는 못하더라도 고전그리스철학에서 지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몇 주간 공부해 봐야 될 정도로 매우 매우 중요하고, 그리고 이 사람들이 당시 헬레니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헤브라이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헤브라이즘에서 나오는 지식의 개념과 그 다음에 그리스어에서 나오는 지식의 개념들을 조화시키면서 성경을 풀어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결론만 이야기하면, ‘에피그노시스’에서 ‘에피’는 전치사입니다. ‘뭐뭐에 관하여’, ‘등등’, ‘대하여’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노시스’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기노스코’에서 왔습니다. ‘알다’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이 ‘그노시스’의 동치어가 히브리어의 ‘다 하트’입니다. ‘다 하트’라는 명사의 동사가 ‘야다’, ‘알다’입니다. 첫 번째 쓰인 것이 창세기3장에 나오는데,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낳으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옥스퍼드 영서사전을 찾아가보면 ‘know’라는 단어에, 'knowledge'라는 단어에 '성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섹슈얼 인터코스(sexual intercours). 그게 헤브라이즘의 흔적입니다. 킹 제임스 버전을 번역하면서 성경에서 영어의 뜻이 함의(含意)가 된 것입니다. 왜? 그 ‘야다’를 도저히 다른 단어로 번역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잘 아시겠지만 지금도 히브리에 가서 처녀가 "나 저 남자 잘 안다." 그러면 매우 큰 오해를 받습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마리아가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식이 뭐냐 하면,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두 가지인데, ‘에피그노시스’라는 말은 어떤 사물에 대한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고, ‘그노시스’라는 말이 함의하는 결정적인 의미는 경험적인 의미다 이 이야기입니다. 증명하면 제가 한참을 증명할 수 있는데 하나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죽든지 살든지를 이야기하다가 그 이야기를 합니다. 경험된 지식이 아니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벽보에 적힌 지식을 보고 목숨을 걸 수 있겠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 지식은 무엇이냐 하면 단지 책상에서 발견되는 지식이 아니라, 이 지식이 전달이 되어서 이 지식이 이해가 되어서 목회자 속에 삶에 피와 진액과 땀을 묻히고 이것이 언어와 논리의 형태로 전달이 되어서 저 사람에게 마음과 이성으로 받아들여져서 다시 그 사람 속에 체험된 지식입니다.
여러분들은 파스칼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파스칼이 팡세를 썼습니다. 팡세는 굉장한 책입니다. 오죽했으면 무신론자의 근대 비조라고 불릴 수 있는 프리드리히 니체, 제가 10대 때 한참 그 사람에게 빠졌었는데, 그 사람조차 무엇이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야기하는 인간론은 저 상스러운 기독교의 인간론이 아니다.” 제 이야기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종교개혁자 이런 사람들 다 상스러운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왜? 철학은 안하고 그냥 믿음으로 건너뛰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팡세를 읽어보면 인간이 무시무시하게 허무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어떤 사물 하나는 하나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든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만물이 있기 전에는 지식이 먼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관념으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 없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의 관념 안에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이 모든 사물들은 메덱시스, 목적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방의 용도가 술 먹고 댄스 하는 곳이라면 여기에 있는 물건들이 모두 달라져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이렇게 강의하고 예배드리는 곳이기 때문에 이 목적에 기여하지 않는 것들은 여기 하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계 전체가 그렇게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사물들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의 끝은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게 신학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모든 학문들을 하인으로 거느린 왕의 학문입니다. 여왕의 학문이고, 그 가장 가까이 있는 시녀가, 안첼라가 철학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철학들을 안 하니까 시녀 없이 이 왕비께서 온갖 험한 일을 하다가 보니까 품위가 없어져서 이게 부엌데기인지 여왕인지 구별이 안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래 신학의 전통이 아닙니다. 전부다 슐라이어 마허 이후에 생겨난 이상한 전통입니다.
아무튼 다시 돌아가면, 그 지식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적용을 하면, 그러므로 목회자는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이것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평신도보다 하나님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목회자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왜?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으니까. 봉사는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러면 안수 받지 말고 그냥 사회기관에 가서 봉사하십시오. 그래도 전도는 할 수 있지 않느냐? 전도자로 사시라는 말씀입니다. 목회자로 살지 말고. 그래도 교인들에게 베풀고 도와주고 그럴 수 있지 않느냐? 그러면 목회하지 말고 어느 목회자 아래 들어가서 그 일을 하면서 살면 될 것입니다. 목회의 소명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첫 번째가 지식입니다. 그래서 공부의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이지요. 학문을 하되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A Man of Books'가 아니라 'A Man of One Book' 성경을 공부하는데 성경에서 멈추지 말고 그렇게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칼빈 신학교에 존 볼트라고 하는 헤르만 바빙크 연구가가 있습니다. 장시간 만나서 토론을 했습니다. 지식의 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데 그분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통탄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현재 개신교 특히 개혁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에서 너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솔라 스크립투라’라는 것입니다. 솔라 스크립투라라는 말을 오해하는데 뭐냐 하면, 성경 하나만 들고 “이것이 다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솔라 스크립투라를 가르쳤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거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신앙과 행위에 궁극적인 준칙이 여기에 있다는 의미에서 이것 말고는 더 위에 있는 것이 없고, 이것과 동등하게 권위를 가진 것이 없다는 점에서 솔라 스크립투라지, "여기에만 진리가 있고 나머지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구조조차도 올바로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이야기했던 의도와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솔라 스크립투라를 외친 것이 목회자들의 무지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공감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부를 하되, 이게 밝은 빛입니다. 이것을 중심에 놓고, 그리고 여러 번 말씀드리는데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미친 듯이 원어를 공부해야 됩니다. 원어는 샘에서 물을 긷는 것이고, 번역된 성경은 샘에서 저 밑으로 내려간 개울에서 물을 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놓고 줄줄줄줄 해석할 정도는 못하더라도 틀린 것은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아람어, 저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신대원 다닐 때 구약성경 3분의 2를 파싱하면서 모두 읽었습니다. 아람어 본문까지. 노력을 해야 됩니다.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공부 위에 그 공부 외에도 가장 가까이 있는 인접의 학문들 인문학, 과학, 철학, 예술 등등의 모든 학문들을 공부를 하면서 여기에서 발견되는 진리들을 세상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엮어서 괴상한 시스템을 만들어내는데 그 구조를 이해하고 올바른 자리에 되돌려 놓아서 모든 지식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그게 목회자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테크니칼 스칼라(technical scalar)가 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총장님 같은 분들이 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칭의 하나에 대해서 15년을 연구했다, 그래서 세계적인 석학이 됐다, 나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배웁니다. 칭의만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논문을 읽고 최신 부품들을 준비해서 새로운 병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어셈블리(assembly)한 기술입니다. 작은 핸드폰 부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 업체들이 하는 데 그것만 합니다. 그것은 가공업자들의 몫이고, 그것을 다 조립해서 만들어내는 회사가 영향력을 끼치지 부품 하나 만들어내는 회사가 영향력을 기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 기술을 한국이 탁월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품업자가 될 사람도 필요하겠지만, 여러분들은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어셈블리해서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깊이 읽고 나머지 책들을 힘닿는 대로 깊이를 조절하면서 넓게 읽어야 됩니다. 상식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지식을 사용해서 모두 하나님을 알려주는 지식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어서 설교를 듣고 나서 밖에 나가면 세상이 다르게 보여야 됩니다.
한 15여 년 전 우리 교회에 치과의사 자매가 나왔는데 아주 어린 자매였습니다. 바로 의사가 됐는데, 간증을 썼습니다. 신문에다가. 그게 무엇이냐 하면, 열린교회 오고 나서 가장 큰 유익은, 예전에는 예배당에 와야지만 하나님을 느껴졌는데 이제는 출근을 하면서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와 풀포기,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를 보면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게 지식입니다.
두 번째, “모든 총명”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자가 붙었고, 그 다음에 “총명”입니다. 이 총명은 그리스어로 ‘아이스데시스’입니다. ‘아이스다노마이’라고 하는 ‘무서워하다’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도 많은 논의가 필요한데, 여러분들이 핸드폰에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성경은 현대어성경입니다. 히브리어는 현대어나 옛날 것이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똑같은데 그것 가지고 설교하면 나중에 실수합니다. 그래서 보면 거기에는 ‘누스’라고 나옵니다. ‘누스’는 그리스철학에서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육체, ‘싸르크스’와 대조되는 '누스', 정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총명 ‘아이스데시스’라고 했습니다.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 하면 이 ‘아이스데시스’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판단력입니다.
파스칼이 이런 말을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재미있습니다. 데카르트를 무지하게 싫어했습니다. 데카르트는 파스칼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이 아팠을 때 암스테르담에서 그 먼 길을 와서 파리에 와서 문병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스물세 살 차이 나는데 그 선배에 대해서 아주 냉담했습니다. 세상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망쳐놓는 사람이 데카르트의 철학이라고 그랬습니다. 파스칼의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성만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이성에만 논리가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도 독특한 논리가 있다. 이성의 논리는 이성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마음의 논리는 이성적으로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성의 논리만을 따르려고 하는데, 너무 이성적이면 그것을 미친 것이라고 부른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아주 핵심을 찌르는 이야기입니다.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지?” 상대방이 대답합니다. “그럼요.”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지?” “네.” “너 하나님 왜 사랑 안 하냐?” 막 구구절절이 이유를 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이 묻는 것입니다. “너는 너를 사랑하지?” “네.” “이유가 뭐냐?”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논리가 없이 나를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논리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파스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네가 널 사랑하는 게 불합리하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네가 너를 사랑하는데 이성적으로 네가 논리를 못 찾지만 네가 너를 사랑 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게 바로 마음의 논리이다. 그것을 이성의 잣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의 양심을 찾겠다고 MRI 찍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뜻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배를 갈라놓고 해부해 보면 양심이 어디에 있냐? 그런데 우리 중에 아무도 양심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그것을 측정하는 개념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이스데시스’는 총명입니다. 총명인데, 여기다가 모든, ‘파산’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범위를 이야기한다기보다는 깊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판단력이 아주 깊어서 정확해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호크마’입니다. 지혜. 그리고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했던 ‘소피아’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비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지혜의 비밀입니다. Mystery of wisdom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 세계에 대한 전체의 경륜이 예수를 종자씨로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왜? mediatorship in creation, 창조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스페르마타'처럼 사용해서 세계가 창조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세상의 종자씨처럼 역할을 하면서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을 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창조의 머리입니다. 예수님이 창조의 머리라서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게 하셨기 때문에, 결국은 진리라는 것이 탐구 가능한 이유도 헤르만 바빙크의 실제론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그 모든 만물 가운데 계시는 내재성 때문에 일관된 진리의 탐구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이게 신학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의학부터 모든 것에서 일관된 원칙이 발견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있는 내재성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던 것이 죄가 들어옵니다. 깨집니다. 그런 연결들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산산이 부서져 버렸으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일체의 가능성도 없고, 학문과 진리를 발견할 수도 없고, 세상은 카오스상태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진리도 발견할 수 없고 문명도 일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렇게 두셔서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 자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통해서 부활하시고 다시 보좌에 오르십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1장 10장에 나오는 ‘아나카펠레오’입니다. ‘아나’는 ‘다시’라는 뜻이고 ‘카펠레오’는 ‘머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 '총괄갱신론'이라고 부르는데, 사실은 안 맞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의 교부들은 '레카표튤라치오' 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다시 머리가 된다.’ 그런 뜻입니다. 첫 번째 머리가 되셨던 분이 구속을 통해서 모든 만물의 구원을 완성하실 때 다시 오류가 없이 모든 사람이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만물의 상호연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찬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더 많이 알게 된 사람이 더 온전한 판단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적인 판단력이고 도덕적인 판단력이고 자연적인 판단력을 모두 포함하지만 우선적인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부어주신다는 것, 세상 모든 만사가 우연처럼 돌아가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담겨져 있다는 것, 그리고 의미 없어 보이는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그 위대한 역사 전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역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거스틴은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참된 철학자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총명을 아는 사람이 철학자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정리를 다 하자면, 빌립보교인들 마음속에 하나님 사랑하는 게 있었는데 그것들은 사위어갈 수도 있고 불처럼 일어날 수도 있는데, 불처럼 일어나게 하는 수단이 둘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지식이 전해지고 총명이 일깨워질 때 그때 하나님 사랑이 확 솟아나는 것입니다. 잊히지 않는 그림을 그려드리면,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게 목표인데 두 개의 장작이 얹혀 있습니다. 첫 번째 장작이 지식이고 두 번째 장작이 총명이고 거기에서 계속 부채질을 하고 계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계속 타오르는 것입니다. 지푸라기를 한 트럭 정도 한번 태우는 광경을 들어보시면 어마어마한 굉음이 들립니다. 부~웅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불길이 그만큼 세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한 십분 타면 싹없어집니다. 그런 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점점 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 위에 지식, 지식 위에 지식 계속 새로운 것을 놓아주고, 총명 위에 총명, 총명 위에 총명을 더 낳아 주어야 되니까, 목회자는 끊임없이 지식과 총명에 있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앞으로 전진 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다 못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목표가 무엇이냐? 세 가지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첫째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두 번째는 진실하며, 세 번째는 허물없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뒤에 것은 생략하더라도 첫 번째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그랬는데, 여기서 희랍어 원문으로 보면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좋아 보이는 것들 중 진짜 좋은 것, 그러니까 좋은 것들 중 최상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기에 인생에 한번 걸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젊은이들은 마음 끌리는 대로 살아보는 게 인생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소위 이야기하는 카르페디엠을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말씀드리고 싶은 게 무엇이냐 하면, 그런 분별력을 키워주는 것이 목회의 목표다, 그래서 끌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책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질서 지워진 사랑이다. 사랑의 질서가 지워진다면 어디로 죄가 비집고 들어오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소중한 것은 많이 사랑하고 덜 소중한 것은 조금 사랑하고 쓸데없는 것은 안 사랑하는 것이 까리따스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기서 쓰인 단어가 ‘도키마조’라는 동사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어떤 것을 보면 “저게 진짜 꽃이야?” 할 정도로 조화를 기가 막히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무리 가까이 가도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서 꽃잎을 한번 찢어봅니다. 확 손에서 액체를 짜내면서 뭉개져버리는 것입니다. “어이쿠, 이거 진짜 꽃이구나.” 그런데 아무리 문질러도 변함이 없습니다. 뜯으려고 해도 안 뜯어집니다. 이것은 조화입니다. 그 행위가 도키마조입니다. 그게 바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체험적으로. 그래서 선해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들 중에서 진짜 최고의 선이 무엇인지를 시험해서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제 경험에 목회를 잘 하면 할수록 상담의 필요성이 떨어집니다. 상담하시는 분에게는 실망스러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제가 잘 하던 방법이 있었습니다. 상담을 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옛날 교회 목사님이 나에게 이렇게 상처를 주고 이랬는데 내가 지금 목사님 미워하고 있는데 이것이 옳습니까? 그리고 이 교회에서 또 이런 상처를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말로 어떻게 설득하겠습니까? 그래서 책을 한 서너 권을 주고 설교테이프를 한 30개 정도 줍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바빠도 당신 만나줄 테니까 두 달 후에 이것 다 듣고 읽고 와서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적습니다. 집에 가서 열심히 숙제를 합니다. 뭐라고 답이 오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만날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답을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단답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를 보여주는 맥락에서 그 문제가 어떤 문제인지를 가르쳐 주어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선생님이 계시지만 의사선생님이 뭐라고 말을 했으면 환자가 몸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를 하고 그것을 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미신이 되는 것이지요. 어느 의사선생님들이 두 시간에 한 번씩 물을 한 컵씩 먹어야지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벽 두시에 일어나서 물먹고 네 시에 일어나서 물먹고 여섯시에 물먹고,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또 너무 물을 많이 먹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선생님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가운데서 분별해야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목회자가 다 가르쳐 주느냐 이것입니다. 우리교회에도 상담사가 열심입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이고 박사과정에 있고 총장님도 너무 잘 아시고,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상담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상담이 필요 없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분별력을 가지고, 주체성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판단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세워주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분별력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보십시오. 플라톤이 이런 이야기를 질문을 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예쁜 것과 선한 것이 있을 때 예쁜 것에 마음이 더 끌리는 것일까?” 플라톤도 그것을 너무 궁금해 했습니다. 그 사람은 거의 수도사처럼 사셨으니까 본인은 아마 안 그랬나봅니다. 그런데 또 향연으로 들어가면, 말년의 작품으로 들어가 보면 이야기가 또 달라집니다. 아주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자녀가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입니다. 외계인이지요. 북한이 그래서 못 쳐들어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특수부대도 못 막는 중2입니다. 내일이 기말고사입니다. 그러면 이성적으로 뭘 해야 됩니까? 공부를 해야 됩니다. 점수를 받아야 되니까. 그런데 게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이지요? 게임은 예쁜 거고 공부하는 것은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선한 것보다는 예쁜 것에 끌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쁘다는 말은 외관적으로 예뻐 보인다 그 뜻입니다. 거기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대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매들에게, “내가 불행해지지 않는 방법 가르쳐줄게. ‘너 아니면 나 죽어버릴 거야.’ 이런 녀석이 나타나면 혀를 깨물고 결혼하지 마라. 절대 그런 사람하고 결혼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 사람은 선한 것보다 예쁜 것에 먼저 마음이 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같이 살면 잘 살 것 같은데 한번 그렇게 해 볼래? 이런 사람이 훨씬 더 믿을 만하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너 아니면 나 죽어버릴거야.’ 그걸 여러 번 이야기한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얘기할 사람이고. 그런 점에서 선해 보이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진짜 선한 것도 있고 가짜로 선한 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오해의 구름을 싹 걷어내고 하나님이 볼 때 더 베스트를 판별할 수 있는 그 판별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하며” 그랬습니다. ‘진실하며’라고 하는 단어가 ‘에일리크리네’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에일리’하고 ‘크리네’가 만난 것이다 이렇게 보고, ‘크리네’는 ‘크리오’, 판단하다에서 온 것이고, ‘에일리’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햇빛’이라는 뜻이 있고 가루를 내리는 ‘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전자를 따르게 되면 ‘햇빛에 비추어 본’, ‘햇빛에 비추어서 판단한’ 그것이 되고, 후자를 따르면 ‘체질을 해서 판단한’ 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둘 중의 무엇이 진짜 올바른 해석인지 책을 읽어도 판단이 안 섭니다. 그런데 어느 것을 선택하든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햇빛’이라고 본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그때에도 위조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조 가지면 제일 먼저 햇빛에 비춰보는 것입니다. “아, 이거 아니야. 이거 위조야.” 그렇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곡식이나 광물을 놓고 체질을 하면서 돌과 금속을 갈라내는, 말하자면 쌀과 겨를 걸러내듯이 그렇게 걸러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진실하다”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솔직하자는 뜻이 아니라 진리에 부합하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입니다. “그래 내가 사람 죽였다. 하나도 아니야. 내가 열 명 죽였어. 어쩔래?” 이것은 솔직한 것일 수는, 자백하는 것일 수 있지만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미안해. 내가 그 물건을 훔쳤어. 정말 나도 지금 너무 후회가 돼.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봐.”라고 눈물을 흘리면 이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진실한 사람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말씀 사랑입니다. 시편 150개를 놓고 마지막에 편집할 때, 유대인 학자들이 편집을 하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언제 편집되었는지는 학설이 여럿이지만 편집을 합니다. 연대순은 아닙니다. 그래서 1권을 편집할 때에는 창세기에 관한 것을 모읍니다. 2권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오경의 구조와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권을 만들어놓고 1권 1장의 1편에 무엇을 놓을까를 이 사람들이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고르고, 고르고, 고르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골라놓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하는 소위 이야기하는 ‘아쉐르’에 대한 시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아쉐르’는 그리스어로 ‘마카리오스’라는 단어인데, 복은 복인데 이것은 ‘베라카’하고 다릅니다. ‘베라카’의 복은 일반 섭리의 복과 영적인 모든 복을 다 포괄하는 의미의 복입니다. 그래서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다 할 때는 ‘아쉐르’가 아니라 ‘베라카’입니다. 그런데 ‘아쉐르’는 언약관계에 있는 사람이 받는 spiritual blessing입니다. 복에 두 가지가 있는데 providential blessing, 섭리적인 복이 있고 spiritual blessing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굉장히 고귀하게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까리오이 호이 카탈로이”, “심령이 정결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두뇌 속에 있었던 기본적인 단어가 ‘아쉐르’이고, 그리고 아마도 시편 1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 복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행복이. 그런 것들을 고려를 하면서 보면 결국 진실한 사람은 관심사 자체가 거짓과 함께 영화를 누리기보다는 진리와 함께 죽임을 당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조선시대 때 나이 열다섯 살쯤 되면 성인식을 합니다. 그리고 성인식을 하면 이제 선비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선비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칼입니다. 선비와 칼은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도(道)가 있고 이 위에 칼이 있습니다. 나는 이 경전에 나오는 도(道)를 따라서 살 것이며 세상이 나를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강요할 경우에는 나는 목숨을 끊는다, 그래서 왕이 맘대로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세자 영화 보셨습니까? 거기서 왕이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꼬셔가지고 저 녀석 없애버려야 된다고 나한테 주청을 하라고 합니다. 그날 가서 목을 맵니다. “전하, 사람의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또 꼬입니다. 가서 또 목을 맵니다. 왜? 왕에게 칼을 들고 올 수는 없으니까. “전하 그렇게 사시면 아니 되옵니다.” 이게 끊는 게 뭐냐 하면 대의(大義)입니다. 그 자체가, 죽음이 그냥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살이 아니라, 탁 자를 때 피가 확 솟아나오는데 그게 언어입니다. 선비의 언어입니다. 마지막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사람은 모두 진리를 따라 사는 데에 최고의 관심사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에 아무리 성공했으면 뭐합니까? 그리고 세상에 기가 막힌 대접을 받고 살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진리에 입각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떠받드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과연 그런 목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까요? 밥벌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삯꾼이 처음부터 삯꾼이 되는 게 아니라 관심을 진리에 갖지 않는 사람이 삯꾼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없이” 그랬습니다. 이것은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크게 세 가지인데, 신학적으로 흠이 없고 그 다음에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것입니다. 그 윤리적인 것 안에는 인격적인 것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나 이태리를 여행해 보시면 가끔 BC3세기, 4세기, 심지어 플라톤 시대 때 조각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막 숨결이 느껴집니다. "야, 이게 벌써 이천오백 년 전이야." 그런데 큐레이터의 설명이 황당합니다. “그렇게 너무 우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십시오. 저런 것들은 고물상에서 싸구려로 거래됩니다.” 아니, 주전 5세기 것이 어떻게 헐값으로 거래가 되느냐? 사연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석회석이 많이 납니다. 대리석이나 이런 것들이 이탈리아 지방에서 많이 납니다. 이태리대리석이 최고입니다. 아주 굉장히 돌이 무릅니다. 그래서 잠자리 날개 옷 같은 여자들의 옷을 다 조각을 해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얼굴부터 조각을 했는데 여기쯤 조각을 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스톱해버렸습니다. 조각가가 죽었던지 아니면 변심을 했던지 작업을 안 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돌멩이입니다. 그래서 싸구려라는 것입니다. 그게 만약에 완성이 되었으면 값이 달라지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나만큼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러면 안 되는 것이지요. 신학교 다닐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한번은 대학을 떨어졌고 두 번째는 대학을 붙었는데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하고 인연이 안 닿았습니다. 그래서 못 갔습니다. 저는 영문학자하고 수필가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몇 번을 죽고 싶었는데 영어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올라오자마자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뉴스위크, 아무 별 어려움 없이 그냥 읽었습니다. 그렇게 영어를 좋아하고 그랬는데, 고등학교 때 그렇게 살았습니다. - 무엇을 이야기하다가 이리로 갔나 모르겠네. 아, 허물없다는 이야기 - 그러다가 신학교를 (갔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직장을 다녀야 됐기 때문에, 또 결혼을 일찍 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내가 신학에 전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들은 진짜 감사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눈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너무 공부하고 싶은데 이 직장에 매여서, 또 직장 일을 잘 못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셉처럼 직장생활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쨌든 그런 때 일이었는데, 결혼하고 얼마 안 됐는데 본교회가 멀어서 새벽에 근처에 있는 교회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새벽기도에 가면 통근버스가 올 때까지 한 한 시간 반 정도 기도할 시간이 납니다. 일찍 가면. 남의 교회 가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제목이 너무 많습니다. 머릿속에 다 써가지고 가는데, 3분의 1도 기도하기 전에 기도의 모든 화살이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기간이 한 2년 되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면 한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총장님처럼 미국에서 산 적도 없고 나는 미국에 보름 이상 있은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영어가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말로는 잘 표현이 안 됐습니다. “Oh My God, I am sorry for what I am.” 내가 나인 것이 하나님 정말 죄송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내 존재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그것 때문에 너무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내가 누를 끼치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 회개의 기도를 한 2년 했습니다. 우리 집사람은 목회하고 나서 한 3년 그런 시간을 보냈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소리 내서 하는 기도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흠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너무 많습니다.” 그것도 과일로 치자면 최상품의 과일인데 살짝 흠이 난 게 아니라 여기저기 벌레 먹고 썩어있는 것, 한 2년 동안을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써서 늘 품고 다녔던 성경구절이 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게 저의 평생 품고 다니던 성경구절이었습니다. 유명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큰 목회를 해야 될 그런 계획도 없었고, 아니면 공부를 많이 해서 이다음에 작가가 되겠다는 그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냥 사람들에게 아무 기억이 안 돼도 좋으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이 없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고 그래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면 나도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을 갖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사람 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허셀포드 목사님이 자기 설교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얘야.” “나리 어디로 갈까요?” “저 북극성을 보고 계속 가거라.” 배를 저어서 가는 것입니다. “아직 멀었느냐?” “북극성을 아무래도 지나친 것 같습니다.” 북극성을 보고 노를 저으라는 뜻은 비행기를 공중에 띄워서 그 별에 착륙시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별을 보고 계속 가면 항로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온전해지기를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가자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하에도 많은 메시지들이 남아 있습니다만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식사하시기 전에 오늘 강의 들으신 것에 대해서 질문이 있으시면 해주시면 제가 답해드리겠습니다. 질문이나 아니면 본인의 의견이라도 좋습니다.
(질문) 예전에 사두개인하고 바리새인들이 사회에 영향력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과연 무엇이 빠졌길래 하나님을 정말 사랑해서 공부했던 사람들이었고 당대 지식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을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시대 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는 쉽게 이야기하면 정통적인 구약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정통적인 구약종교는 여호와의 종교입니다. 그 종교의 핵심은 지금 제가 가르쳐드린 내용하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계시의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구약시대니까. 여호와를 경외하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경외하고, 세상 모든 만물이 주를 위해 지어진 것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근본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게 유대교가 역사적으로는 구약종교를 통해서 나오지만 신학적으로는 이게 옆으로 이렇게 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 속에 오해의 안경이 쓰여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보면 파란색인 이 종이를 붉은 렌즈를 끼고 보면 이게 보라색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게 보라색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벗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예수님이 오셔서 참된 것을 말했을 때 박해를 받으셨던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너희들의 눈이 어두워져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구약성경만이라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제대로 간직하면 내가 누군지 너희들이 알아보았을 것이다, 시므온과 안나 같은 사람이 정통적인 여호와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셨을 때 그런 사람들은 빨리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 그때 약속하신 그분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완고하게 눈에 가리어져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것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시대가 우리에게 끼워준 색안경을 벗어버리는 것, 그 오해와 편견을 벗어버리는 것, 그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답이 됩니까?
(질문) 그러면 현 시점에서 적용이 가능할까요?
(답변) 그렇지요. 요즘 같은 경우에는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있다가 아마 우리 교역자들이 책을 나누어주실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가 하는데,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같은 것들이 제가 2012년에 썼지만 철학, 과학, 역사, 문학, 심지어 도시미학까지 다 망라하면서 어떻게 그런 것들이 렌즈가 씌어있나 하는 것을 밝혀서, 그것을 벗고 문명의 세계를 바라보면 너무 눈부시고 찬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된다 이것입 니다. 답이 되었습니까?
(질문) 저는 질문은 아닙니다. 질문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소감도 괜찮다고 하셔서 제가 이 강의도 그렇고 이번 학기를 하면서 들었던 약간의 제 개인적인 소감이 공부를 많이 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사실 많이 드는 것 같아요. 사실 입학할 때 솔직한 마음은 빨리 졸업해서 빨리 사역하고 싶은 그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라이센스의 느낌이 컸던 것 같아요.
(답변) 선생님, 빨리 졸업하고 의사되려고 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나요?
(질문) 입학하기 이전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조금 수업을 듣고...오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러면서 그리고 내가 진짜 모르는 게 많구나 하는 것을 많이 깨달았습니다. 방학 때 원래 계획 했던 것 중의 하나가 어거스틴의 고백록이라든지 제가 안 읽었던 책들도 읽지만 예전에 읽었던 것 중에서 좋았던 책들을 다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답변) 옛날하고 조금 다른 느낌이지요?
(질문)예, 제가 그래요. 그리고 제가 학기 초에 다시 읽었던 책이 이재철목사님의 비전의 사람 이런 책을 다시 읽었었는데 너무 다르게 느껴지는 거예요. 이런 내용이 있었나? 이런 내용이었나?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 부분이 이번 학기 제가 대개 많이 깨닫고 회개하고 저의 부족함을 많이 보고 그랬던 것 같아서 저는 오늘 강의에서 그런 부분을 제 스스로 많이 돌아보게 되고 그래서 지금 어떤 지엽적인 질문을 하기보다 많이 듣고 배우고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저는 소감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답변) 예, 또 혹시 몇 분 더
(질문) 히브리어 헬라어 말씀하셨는데 저도 신학교 오기 전부터 성경을 읽으면 너무 궁금한 거예요. 원뜻이 뭔지 내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신학교 와서 사실 예상하지 못했던 헬라어 배우지 그리고 히브리어....학기 중에 너무 버거웠거든요? 왜냐하면 여섯 과목을.... 정말 성실하게 매주 해도, 중간고사 때는 교수님들도 특히 그러신 것 같아요. 너무 낙심하지 않도록 시험은 또 쉽게 내주시고. 너무 힘들게 하게 하셔서 중간고사 두 번 봤는데 첫 번째 때 힘들다가 두 번째 때 탁 올라왔어요. 이제 분사를 따라잡아야지 하고 올라가서....기말 때 다시 절망적이더라고요. 분사 나오는데 이걸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외우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 수많은 표들을 갖다가 붙이는데 나중에는 이것저것 다 섞여가지고 해석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면서....그렇게 해서 한 학기를 지나도...어떻게 해야
(답변) 제가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 열심히 했는데 나는 이게 안 되는구나.” 그러는데 저도 사실 히브리어를 맨 처음 강의를 들었을 때 저 교수님이 뭘 알고 강의를 하시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냐 하면 본인도 잘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다가 해도 안 됩니다. 사실은 접었습니다. 학부 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학원에 왔는데 히브리대학에서 공부하신 분이 첫 시간을 강의를 해주시는데 첫 시간은 알파벳하고 여러 가지 우스개 소리하시다가 끝났고, 둘째 시간 딱 들으면서 “아, 내가 길을 잘못 들었구나.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 틀렸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좋은 책들이 많이 있으니까 보시는데,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올바른 방법을 찾는 것 그래서 좋은 선생님이나 아주 좋은 교제를 만나는 것, 그리고 두 번째 남들도 내가 해 본 만큼은 했고 그러니까 그들이 해 본 지점에서 멎으면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총신에서 우리 때 해마다 학생들이 3백 명 정도 쏟아져 나왔는데 교수님 표현에 의하면 히브리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일 년에 한명에서 두 명 나온다고 그랬습니다. 저는 티에치엠 논문을 키텔의 제3판과 그 다음에 각주를 비교해서 티에치엠 논문을 썼습니다. 제 논문은 교수들 논문심사가 15분 만에 끝났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쳐서 피나도록 공부한 사람만이 어느 정도 그 벽을 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몰입을 해서 몰입 학습을 해서 됩니다. 예를 들어서 8월 한 달은 내가 히브리어와 함께 보내겠다, 그리고 하루에 한 열다섯 시간은 공부하겠다고 세우셔야 됩니다. 저는 신대원 다닐 때 민주화 때 휴교했는데 열다섯 시간씩 공부했습니다. 학교에서 세 번 쓰러졌습니다. 영양실조였습니다. 펼쳐놓고 공부하지 않습니까? 어느 단계에 딱 가고 나면 이렇게 모세오경을 펼쳤는데 이렇게 했는데 한 페이지가 읽히는 것입니다. 직독직해로. 그때의 그 통쾌함은 고등학교 때 뉴스위크지 읽을 때의 통쾌함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엄청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어서도 안 되는 게, 결국은 히브리어를 공부하지 않습니까? 제가 우스운 이야기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그리스어를 배우려고 학원에 갔습니다. 학원이라기보다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전도사님이 와서 너무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부티나 보이셨습니다. 거기에 있는 모든 학생들에게 자장면을 쏘고 그러셨습니다. 알고 보니 이단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뭐냐 하면, 자기는 헬라어를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 교주님의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무슨 문제가 나오느냐 하면, 희랍어를 안다고 성경 해석의 객관성이 저절로 확보되는 게 아니라 그 한 단어 단어가 가지고 있는 theological meaning, 신학적인 의미들을 별도로 탐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조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깊이 있는 설교를 이다음에 하고 싶으면 성경에 관한 한 단어를 많이 알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단어의 뜻을 알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의’하고 나오면 넘어가지 말고 theological dictionary, 신학사전을 놓고, 한글로 번역된 게 좋은 게 있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대개 영어나 독일어로 된 사전을 보는데, 좋은 사전을 갖다놓으면 - 요새 많이 나옵니다 - 펼쳐놓고, ‘라이셔스네스’ 혹은 ‘디카이오쉬네’(라는 게 무슨 뜻인지를, 거기서는 단어만 설명한 게 아니라 그것은 어학사전에 나오고 theological dictionary에는 이 의미가 구약부터 시작해서 신약까지 어떻게 그리고 호메로스그릭, 에티카그릭에서 어떻게 되는지 다 설명이 나옵니다. 그것을 꼼꼼히 읽어보고, 특히 Early Christians Lerlature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볼 때는 그게 우스운 것같이 보여도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 때 그런 과정을 계속 밟는 사람이 한 10년 정도만 하면 그렇게 안하고 그냥 떠드는 사람하고 비교 안 되는 지식이 축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 그러면 그 그림이 확 떠오릅니다. ‘구속’ 그러면 구속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그런 식으로 공부를 같이 해야 됩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를 잘 하려면 카근네이트를 반드시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필로로지컬, 컨트라티브 필로로지라고 해서 히브리어를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웃기느냐 하면 히브리어사전 요만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를 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 사전을 가보면 이 사전이 이것을 번역한 성경을 갖다놓고 사전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입니다. 사실 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어의 40%의 당시의 의미를 잘 모른다고까지 과격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헌을 다 없애버렸지 않습니까. 그리고 많지가 않습니다. 문헌이. 그래서 결국은 할 수 없이 무슨 공부를 해야 되느냐 하면 히브리어를 하다가 보면 나중에 이제 히브리어를 본격적으로 공부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우가리더를 공부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아카드어, 수메르어. 저는 수메르어까지 하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때려치웠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복음전하는 자가 되어야지 내가 토판이나 끌어안고, 저는 신대원 다닐 때 혼자 독학해서 싸이러스 고든의 우가레틱 텍스트 6백 페이지짜리를 독학해서 끝내서 저는 토판 읽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마리토판, 18세기 22세기 아브라함시대의 토판 같은 것도 다 나옵니다. 재미있습니다. 재미는 있는데 예수님이 거기 없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한 수십 개 되면 한번쯤 살아보겠는데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그리고 재능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를 지도하던 교수님이 아무소리하지 말고 너는 (돈을) 대줄 테니까 거기 가서 자기 스승들한테 배워서 구약학자가 되라고 그랬는데 저는 그냥 청교도를 탐구하면서 설교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거기엔 또 영적인 체험이 있는데,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공부해 보시면 압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