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자가 복 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녹취자:장미연
복음서를 아무리 찾아봐도 주님이 했다는 이 말씀은 안 나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이 말씀이 안 나옵니다. 물론 비슷한 말씀은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안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이 말을 지어냈을 리는 없고 그래서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아마 이 말씀은 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예수의 어록을 모아놓은 자료집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구전의 형태로 전달되었을 것이고 그것들이 주 자료가 되어서 결국은 복음서들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신약학자들은 그것을 ‘타로기야’라고 일단 가설을 세웁니다. 아마도 ‘로기야’에서 그 자료를 사도바울이 이때쯤 되면 아직 복음서가 다 쓰여지기 전이니까 아마도 그런 예수의 어록들을 접하면서 초대교회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신앙을 돈독히 했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는 사도바울도 그런 자료에 자연스럽게 접근했을 것이다. 전승되어오는 자료에. 그것들이 신약학자들이 이 구절을 해설할 때 쓰는 가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친히” 라고까지 이야기했으니까 사도바울이 이것을 그냥 허투루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거다 이렇게 봅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받는 것을 좋아하지 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인 본성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단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새롭게 하소서 간증에 나가서도 그 얘기를 했는데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화를 버럭 내시면서 “호적을 파가라” 그렇게까지 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못됐지요. “예, 아버지 호적 파서 창씨개명 하겠습니다.” 그럴 정도로 마음에 쌓인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서 깊이 회심하기 전이었습니다. ’이 집안하고 인연을 끊는 것쯤은 나한테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믿었는데도. 그렇게 하고 신학 공부의 길을 접어 들었는데 참, 신기한 게 진짜 고난을 당하는 그때가 되니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대 옆에 같이 친구로 같이 잘 다니던 전도사가 있었는데 총신 입학하고 나니까 집을 얻겠다고 사당동을 돌아다니더니 드디어 얻었다고 하면서 “전도사님, 전도사님 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어.” “무슨 기적인데?” 돈은 없고 해서 사당동으로 이사는 와야 해서 복덩방에 이야기를 하고 찾아갔는데 주인이 집이 이렇게 지하실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1층은 아닌 반지하라고 하기에는 가보니까 훨씬 상태가 좋아요. 3분의 1 지하쯤 됩니다. “아니 그런데 뭘 하는 분이세요?” 그러고 물어보더래요. “우리 남편은 전도사에요.” 그랬대요. 주인이 갑자기 90도 폴더인사를 아줌마가 하더니 “아휴, 주의 종이 오셨냐고. 그냥 들어와서 사시라”고. 돈이 모자란다고 하니까 그냥 있는 것만 내고 들어와서 사시라고. 그래서 자신들은 그거 절반만한 크기를 얻으려고 했는데 아래층 전체를 쓰게 됐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집에 들어오는데 아주 야릇한 소외감이 느껴지는 겁니다. 그 친구는 돈이 꽤 있었거든요. 학교 다닐 때도 무역회사에 부장하면서 야간학교 다니면서 내 전도서 7만 원 벌 때 70만원씩 월급을 받았거든요. 영어도 잘하고. 나도 상당히 착하게 산거 같은데 내가 그 친구보다 기도를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럴까? 그런데 그건 예고편이었어요.
진짜 곤고하고 영양실조로 두 번인가 세 번을 학교에서 쓰러지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아침에 학교로 공부하러 갈 때 우리 집사람이 오백 원을 줍니다. 총신 구내식당에서 점심 사먹으라고.. 그걸 탁자에 슬며시 놓고 갔다니까요. 그럴 정도로 가난하게 사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도와줄 수 있는 우리 할머니는 능력이 없으셨고. 오죽했으면 처가집에서 장모님이 쌀자루를 이고 오셨어요. 어쩜 그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요. 요즘도 친구들 만나면 “목사님 나는 생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연락이 왔어. 땅이 몇 천 평이 있는데 내 책을 읽고 은혜를 받았다고,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그걸 굳이 내놓겠대.” “그런데?” “교회로 내놓으라고 하니까 한사코 싫고 목사님 개인 앞으로 드리고 싶다그러네.” 또 오면서 야릇한 소외감이 느껴지는 거예요. ‘난 왜 그럴까?’ 아무리 내가 설교할 때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시면 돈을 주시고 많이 사랑하시면 영혼을 어루만져주신다고 그랬는데 아니 둘 다 주시면 어디가 덧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그게 “받는 것은 부러워하지 말아라”
두 가지 때문에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부러워하지 말아라.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이유에서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시는데 그에게는 주시고 나에게는 안 주셨습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걸로 끝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면 설명할 수 없어도 그걸로 끝나야 합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봅시다.
벼르고 별러서 백화점에 가서 거금 35만 원을 주고 토트백 하나를 샀습니다. 1년 반을 벼르다가 샀습니다. 그러고 그날 저녁에 잠을 못 잤습니다. 옆에 끼고. 아침에 일어나서 호호 불며 닦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직장에 왔더니 직원이 “이거 봐, 천오백만원 짜리 구찌 백이야.”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닦는게 아니라 저 위에 휙 던졌습니다. 상대적으로 이 백이 너무 후져보이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뺏어갑니다. 사라지게 합니다. 그거를 비교적인 생각으로 살지 말고 절대적인 생각으로 하나님과 살아야 합니다. 나는 몰라요. 그런데 저 사람은 주셨고 난 안 주셨어요.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아프리카 선교사로 아주 열렬히 사역하고 지금 한국에 와있는 김철규 선교사가 그때 수석으로 들어왔거든요. 맨날 “난 학교 오면 형님 때문에 좌절을 느껴요”. 그랬어요. 공부도 잘하면서 “왜 그래?” 그러니까 “형님 체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예요?” 어쨌든 17시간을 오광 놓고 히브리어 성경을 읽었고 22시간을 물통, 오광, 빵 놓고 에세이를 썼습니다. 또렷이 기억합니다. 편안한 의자가 아니라 나무 의자였습니다. 집에서. 체력이 받쳐줬으니까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남을 보면서 상대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그렇게 좌절을 느끼는 겁니다. 농담이겠지만은 좌절을 느끼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는데 저 사람은 주셨고 나는 안 주셨습니다. 그거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림막을 치고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받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러워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하나님이 어쨌든 허락하지 않은 것을 내가 욕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욕망을 갖게 되면 마음에서 감사가 사라집니다. 35만원 짜리 백을 가슴에 품고 잠을 못 이뤘는데 천 오백만원 짜리 백을 보고 나니까 갑자기 이거 50개 팔아야지 저걸 사겠구나. 생각이 드는 겁니다. 감사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더 복이 있는 길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주는 것입니다. 받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지 말고 주는 것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제도 횃불팀이 대학생들이 왔잖아요. 제가 아침에 계란 하나 하고 야채주스 한 잔 먹거든요. 강의를 하는 데 계속 나오는데 나중에 어지러워요. 당이 떨어져서. 그래서 12시 조금 넘어서 12시 10분쯤 끝냈는데 질문이 계속 쏟아져서 1시에 거의 끝났어요. 막 정신이 혼미해져요. 허겁지겁 도라야끼 하나를 다 먹었습니다. 2시쯤 끝나고 나니까 힘이 없어요. 직원이 물어요. “힘들지 않으세요?” “당연히 힘들지. 공과공부 원고 써야하는데.” “왜 그렇게 힘든데 그걸 하세요? 해줘야 될 의무도 없는데.” 내가 그랬어요. “그 사람들이 좋아하잖아.” 나는 힘든데 그 사람들이 너무 감격해서 돌아가는 겁니다. 그걸 보면서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일생을 그런 기쁨 속에서 사신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이 주는 삶. 베푸는 삶입니다.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고 나 때문에 누구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자신을 준비하십시오. 저축 안 하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나중엔 누를끼치게 됩니다. 나는 그런걸 너무 몰랐습니다. 저축하세요. 과하게 하지 마세요. 자기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나머지를 흘려보내는 겁니다. 그것이 돈이든, 재능이든, 혹은 시간이든, 교제든 무엇이든지 간에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 때문에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거기서 보람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기억나지요? 예수님을 처음 영접하고 제일 먼저 울었던 것은 내 영혼 때문에 울고 두 번째는 남의 영혼 때문에 울고. 그게 우리의 회심의 경험입니다.
그러면 오늘 살펴보면 사도바울이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 돈도 넉넉한데 왜 저렇게 짠돌이처럼 굴지? 쟤 좀 도와주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거는 자기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너 이 사람한테 도와줘라. 라는 식으로 하고 자기는 스스로 잇속을 챙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묵묵히 내가 몸소 본을 보였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일을 해서 그 돈을 벌어서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공적 자금처럼 생각하면서 자신과 동역자들을 도왔던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남의 돈으로 남을 구제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잔데 쟤 좀 가난한데 도와주지. 진짜 씨알머리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런걸 비난하는 겁니다. 그것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바울이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그 비결이 일체에 탐욕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에 은이나 아무에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 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 정도 됐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걸 갖다가 줬겠습니까? 어거스틴도 당대에 최고의 목회자였고 최고의 사상가니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존경하던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겁니다. 그러면 막 한없이 가져오는 겁니다. 그것도 참 많이 배웠습니다. 제일 멋있는 것은 “싫어. 이 딴거 안받아” 이래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거스틴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받았습니다. 그걸 다 모아서 날을 잡아서 그걸 꺼내서 다 팔아서 가난한 수도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수도사들을 위해 썼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반듯하면서도 그 반듯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함이나 인간적인 정이 없음 같은 걸로 그렇게 발휘되지 않았던 겁니다. 어거스틴은 외투 한 벌 받지 아니하였더라. 그렇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고백합니다. 자기에게 좋은 옷을 갖다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입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모두 모아서 팔아서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보면서 ‘도와주지 다른 사람이 나를 좀 도와주지.’ 둘다 생각하지 말고 몸소 자신이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되어 모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기가 삼성그룹 이재용씨인데 만약에 회심을 해서 예수만을 위해 살겠다고 했다면 마음만 먹으면 교회도 지어주고 다리도 놔주고 우주선도 쏘아 올릴 수 있겠지요. 돈 많으니까. 그런데 나는 작은 월급으로 열심히 아끼고 살아서 한 달에 남는 여유가 20만 원 밖에 안 돼요. 거기에서 10만 원 저축하고 나면 10만원 밖에 안 돼요. 이 사람 보면서 교회도 지어주지. 뭐 주지. 그런 생각하지 말고 그 10만원이나 나누어주라. 이 뜻입니다. 사도바울이 어디 성경을 뒤져보면 부자들하고 친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지금쯤이면 한 번 교회에 대표자로서 부자들하고 만나서 한 번 큰 헌금 좀 해보라고 할만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런걸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5만원의 여유가 있으면 그 범위 안에서 아무리 했는데도 천원 밖에 여유가 없으면 그 범위 안에서 주는 자가 되었느냐? 하고 묻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 약한 자들을 돕고 그랬습니다. 약한 자라는 게 뭘까? 신체적으로 병이 들어서 약한자 만을 가리키는 건 아닙니다. 이거는 종합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든 면에서 약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월한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은 사도바울이 그런 사람을 많이 도왔다고 하니까 그 사도바울은 그 약한 자보다는 훨씬 강한 자였을거 아닙니까? 그런데 참 궁금한 건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9절에서 30절 찾아보십시오. 우리같이 한 번 읽어봅시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겠느냐 내가 부득불 강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그 뒷 절에서는 “내가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우리 하나님이 아신다”고까지 이야기하니까 이건 그야말로 진짜 가식이 없는 일점의 보탬도 없는 진실성을 가지고 이야기했다고 우린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강해서 약한 자들을 도와준 게 아니라 나도 약한데 약한 자들을 도와준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아무 근심 없고 성공한 사람이 내가 너무 비참한 형편에 처했는데 와서 “남준아 참 근심이 많겠다. 어렵지?” 이야기할 때 감동을 더 많이 받을까요? 이 사람도 끼니가 간 곳이 없고 너무 환란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려움을 당했어요. 내가 보기에는 자기 코가 석 잔데 와서 손을 꼭 잡고 “얼마나 어려우십니까?” 하면서 아주 작은 금액의 봉투를 내미는 거예요. 어느 쪽이 더 감동이겠어요? 부자가 될 때까지 나는 가난해서 누구를 도울 수 없다. 죽을 때까지 아무도 안 도와주다가 죽습니다. 내가 능력이 생기면 다른 사람을 도와주겠다. 언제쯤이면 능력이 생길까요? 어디에 어려운 교회 좀 돕겠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잖아요. ‘우리 교회도 지금 너무 어려운데.’ 내가 한 번 회상해 보았습니다. 지하실 교회에서 내 적금 통장 천 오백만원 깨서 열린교회 개척한 이래 여태까지 한 번도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한 번도. 우리 상가교회 일억원 도와줬는데 아마 그거 교회 경상비로 썼으면 재정부에서 좋아할 거예요. 그렇게 늘 어렵지 않은 적이 없어요. 빚이 없었던 적이 없고. 그리고 걱정을 안 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고 나면 자신이 약하다라고 생각하면은 죽을 때까지 주는 자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냥 자기도 약하지만 내가 약한 거보다 더 약한 사람에게는 나는 강한자니 나도 없지만 더 없는 사람에게는 나는 있는자니 흘려보낸다라는 생각을 가질 때에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35절을 다시 한번 보시면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라고 나옵니다. 그러면서 “복이 있다 하셨음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히랍어 성경에 ‘마카리온’이라고 나옵니다. 이게 팔복 말씀하실 때에 ‘마칼리오 호이 카탈로이’ 말씀하셨을 때 그 단어입니다. 이것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입니다. 누구를 도와주면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다. 잠언의 말씀도 나오지만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렇게 약한 자를 위해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영혼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영혼의 풍족한 복을 내려주신다. 하나님이 직접 어루만져주시는 놀라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진짜 연약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베풀어 주었을 때 돌아오는 기쁨은 받은 사람이 기쁜 그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루만지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생을 살면서 이렇게 끊임없이 베풀고 나누어 주어서 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