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라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완성되어 예루살렘이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자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1-7)
녹취자: 이 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일곱 집사를 세우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기는 점점 더 이제 구제해야 될 사람이 많아지고 사무적인 일에 사람들이 신경이 갈리다가 보니까 도대체 영적인 사역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일들은 믿을 만한 사람을 투표해서 그래서 맡기고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리라. 이렇게 뜻을 표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막상 그렇게 시작을 하고 그렇게 이제 시작을 했는데 정작 사도들이 직접 고백하는 것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그렇게 돼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하는 일에 왜냐하면 공개하는 일에 그걸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 이렇게 반성을 해놓고 정작 본론에 들어가서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에 전념하리라 이렇게 결론이 난 겁니다. 이것은요 새로운 발견이 아니에요.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두 개의 중요한 직무가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면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어요. 제사장들을 기도하는 것과 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와 제사장이 공통 분모가 있었는데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선지자의 직무를 사실은 사도들이 재발견한 거예요. 말씀의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이었느냐 이것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결론에 도달을 했는데 정작 본론에 가서는 기도가 먼저 나오는 거야. 결국은 뭐냐면 기도와 말씀 사역이 양면의 동전과 같은 걸 보여주는 거죠. 말씀 사역에 전념한다 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설교하는 일에 전념한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서 열렬한 기도가 있고 그 기도에 전념할 때에 그가 전하는 말씀이 말씀이라고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선지자도 등급이 있지만 그러나 이제 훌륭한 선지자들을 다 보려면 결국은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냐면 사람마다 그 시대에 준 메시지들이 조금씩 조금씩 달랐어요. 호세아는 배교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했습니다. 미가는 또 정의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 했고 하박국 선지자는 믿음을 촉구했어요. 이렇게 강조점이 조금씩 조금씩 다르지만 뛰어난 선지자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예요. 깊은 교제. 그것이 사역의 특징을 결정짓는 것이었어요.
아까도 우리 식사하면서 잠깐 얘기했지만 제가 75년도에 회심을 했는데 회심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맘때쯤 되면 모든 목회자들은 다 기도원으로 갔어요. 한 주가 아니라 길게 하는 사람은 한 한 달씩 그리고 짧게 하는 사람들도 최소한 두 주간 정도씩 올라가서 연말과 연초에 걸쳐서 그래서 가서 일 년 목회 계획을 짜고 간절히 기도하고 심지어는 52주 설교할 그 본문을 다 정해가지고 내려오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 추운 때에 그 시골의 기도원에 가서 이런 시설이 어디에 있어요? 한얼산 기도원 각자 자기가 냄비하고 쌓아 가지고 가서 그 불을 때서 자기가 밥을 해 먹던 시절인데 이런 좋은 시설이 어디 있어요. 기껏해야 이제 구내식당 같이 만들어 놓고 밥하고 국하고 줄 텐데 독방이 어디 있어요. 목사님들조차도 최소한 아주 운이 좋으면 두 명에 방 하나 그렇지 않으면 세 명 심지어 네 명에 방 하나 주고 평신도들은 그냥 교회당에서도 추운데 한 이불 속에서 그냥 엎드려서 자고 새벽에 기도드렸어요. 꽉 찼어요. 그리고 연초에 기도원 가는 것은 마치 오늘날의 연말연시에 그 관광지에 숙박업소 잡는 것만큼이나 힘들었어요. 꽉 찼어요. 그래서 목회를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이나 작은 교회 하는 사람이나 큰 교회하는 사람이나 다 갔어요. 열렬히 기도했어요. 그렇지 않은 목회자들을 그 시대에 별로 본 기억이 없어요. 그렇게 해서 올라와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 교회당도 아니고 저기 뭐야 벼랑 끝에 가서 그 칼바람을 맞으면서 담요 뒤집어쓰고 고구마 가지고 올라가서 열렬하게 부르짖었어요. 그게 우리가 그 교육을 못 받았는데도 그 당시에 생명력 있는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 됩니다. 들어보면 근데 그래도 그 속에 피와 눈물로 땅이 녹아있고 목회자들이 신앙이 있었어요.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랬어요. 크나 작으나. 이런 뭐 툭하면 금식하며 기도원 올라갔다고 40일 철야기도 한다 그런 어떤 열렬한 야성들을 너무 잃어버렸어요.
이제는 하나의 목회직 자체가 평범한 회사원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그 속에 열렬한 야성이 없는 거예요. 일은 하는데 영적으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요. 기억하세요. 선지자들을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헌신했던 사람들이었고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리는 일에 헌신하던 사람들이었어요. 물론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가르쳤지만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설교하는 삶을 그리고 그 시대의 모세오경을 외쳤던 사람들이 선지자들이었어요. 목숨을 내놓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흘리고 죽어가고 신약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후에 순교했던 사도들의 후예예요. 그런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해요. 그리고 정말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그런 큰 결심을 가지고 우리들이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현대에 와서 사역이 너무 다양해졌어요. 예전에는 단순했어요. 설교, 기도, 신방 하나 더 하면 구제, 전도 그게 다였어요. 그렇게 많은 교육 프로그램도 없고 전부 다 한 80년대 이후에 태어났어요. 그게 다예요. 성경공부도 별로 없었어요. 설교 듣고 열렬히 기도하고 열렬히 교회 봉사하고 열렬하게 예배드리고 성도들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해 주기 위해서 심방 가고 그게 다였어요. 너무 심플했어요.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예수 예수 믿은 것은 바른 증거 많도다 살았던 거예요. 이런 외침이 아마 여러분 살아서 내가 마지막 얘기하는 사람이 될지도 몰라요. 목회자는 그 속에서 어떤 결기가 느껴져야 해요. 죽음을 불사하는 결기가 느껴져야 해요. 그게 신앙에서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열렬하게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열렬한 기도모임을 인도하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 앞에 성결해지고 싶다 라고 하는 열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성도들에게 성결하게 살라고 외칠 수 있겠어요. 주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하자 라고 말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목회가 얼마나 어렵냐면 목회자가 땀을 흘리면 교인들은 놀아요. 눈물을 흘리면 겨우 땀을 흘리고 교인들이 눈물을 온통 쏟게 하려면 목회자의 심령에 피가 흘러야 해요. 겨우 그렇게 되는 게 목회에요. 오늘 보면 많은 일을 했어요. 그 자기 사도들이 그 자기 영광을 위해서 했겠어요? 뭐 연보는 많이 들어오고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고 그거 구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해. 하다가 보니까 그 발이 수렁에 빠지듯이 한없이 일 속으로 떠밀려 가는 거예요. 일이 망가트리게 되는 게 아니라 해서 일을 하지 말자 그랬어요? 아니 어떻게 일을 안 하고 목회가 되겠어요. 일을 안 하고 어떻게 목회가 되겠어요. 목회도 일인데. 들어가서 기도만 한다고 그렇게 해서 목회가 되겠어요.
외국의 공대장 출신의 젊은이 특강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질문을 받았는데 한 말이 집어치우고 일어나서 이불이나 똑바로 개시요. 일어나서 이불 하나 똑바로 못 개는 사람이 무슨 인생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냐고. 목회도 마찬가지예요. 그건 자신이 영혼의 상태하고 상관없어요. 사명이에요. 설교하고 목회하고 신방하고 오늘날에는 변화된 사회의 요구에 발맞추어서 성도들을 심각할 정도로 정신이 산지사방으로 찢겨 나가는 시대 아니에요. 또 그렇게 안 하고는 생존할 수가 없을 정도의 시대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자유가 없어요. 죄가 나오면 자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어느 정도의 재산이라고 얘기하죠. 재산이 없으면 가진 것이 좋고 당장 내일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 하면 자유가 없다고 했어요. 맞아요.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내몰리면서 살아가요.
그런 속에서 결국은 목회는 이제 옛날처럼 그렇게 단순한 네 가지만 해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하는 그 속에 아주 매우 매우 괄목할 만한 능력이 나타나면 또 모르겠어요. 근데 그런 사람이 몇천 년에 한 둘이지 몇 명이나 되겠어요. 나는 기도하고 설교에 의해 딴 거 다 필요 없어도 넉넉히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다. 몇 사람이나 그런 사람이 있겠어요. 나도 그렇게 못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는 일을 해야 되는 거예요. 평생 죽을 때까지 우리는 목회를 하느냐 일을 해야 해요.
그래서 건강이 매우 중요합니다. 목회자는 자신의 몸이 신앙과 자신의 몸이 최고의 자산이에요. 건강을 위해서 각별히 힘을 쓰고 그 잃어버리면 아무 일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결국 열렬히 일하면서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될 본질은 여전히 있는 거예요. 왜요? 독이에요. 그것이 있는 한.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많은 일을 하세요. 그러나 목회자에게는 직접 하는 은사보다도 시키는 은사가 뛰어나요. 그래 적재적소의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골라내서 기가 막히게 일을 주고받는 사람은 그 일을 놀랍게 감동적으로 받으면서 일하게끔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는 한 번 해보고 넘기고 한 번 해보고는 길을 만들어 놓고 넘기고 넘기고 그러면서 정작 목회자 자신은 두 가지 두 개의 날개로 그 모든 것들을 함께 날아오르게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게 뭔지 아세요. 그게 기도와 말씀이에요.
모든 성도들에게 머리를 숙이게 만들고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그 목회자의 말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요소가 3개가 있어요. 그게 권위예요. 그 권위 권위주의는 스스로 그것을 주장하는 거지만 원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걸 권세라고도 이야기해요. 엑스시아이. 그것은 형식상의 권세가 아니라 실제로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권세예요. 그 권세는 권위는 크게 세 가지 연원 연원으로 나타나는 거죠.
첫째가 뭐냐면 영적 권위에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설교를 매끈하게 하는 목회자들은 가끔 봐요. 흔하지는 않아요. 설교가 깔끔하고 아주 괜찮다고 아주 가끔 있어요. 문제는 뭐냐면 그 속에서 영적인 권위가 느껴지는 사람은 아주 드문 거예요. 그래서 그 영적인 권위는 성령의 능력, 그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령으로 강력하게 그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예요.
딱 둘이에요.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 그리고 충만한 기도의 사람. 요새 EM바운즈의 책이 있죠. 그분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에요. 목회사역에서 은퇴하고 난 다음에 하루에 여덟 시간씩 들었어요. 그 사람도 목회사역 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기도 못 했어요. 그렇게 기도하는 건 이상한 거 아니에요. 뉴욕을 가는데 한 목회자가 같이 아침 식사를 하는데 자기는 이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데 하루에 아홉 시간씩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그랬더니 아침에 나와서 아홉시에 나와서 여섯시까지 기도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아침 아홉시부터 여섯시까지 대신에 너무 존경스러운 게 아니라 미쳤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침 9시 전에 교인들이 다 출근할 시간이니까 목회를 못할 거고 여섯시에 끝나면 집에 들어가서 밥 먹으면 자는 건데 그러면 굳이 목회자 안 해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느냐?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어떻게 기도만 할 수 있겠어요.
충만한 성령의 사람이 돼야 해요. EM바운즈 그분이 대표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런 어떤 영적인 권위 그걸 가지고 있어요. 그게 말하자면 목회자를 권위 있게 만드는 첫 번째였어요. 그게 뭐냐면 성도들이 못 만난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깊이. 그리고 성령의 깊은 체험을 가져야 해요. 이게 단순히 신비 체험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그 사람의 설교 기도하는 거 그리고 성령을 회중을 인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친구가 목회하는 교회에 담임목사님이 상이군인이에요. 다리를 절어요. 어느 날은 자기 친구를 불러다가 설교를 시켰어요. 맹인이에요. 맹인인데 부목사가 사회를 보고 맹인 목사님이 나와서 설교를 했어요. 그리고 인제 예배가 다 끝났어요. 그리고 부축을 해서 여기에 부목사님이 같이 와 있어요. 옛날에 상이군인은 무식하고 인생 벼랑 끝까지 간 사람들이었고, 갈고리 달고 행패 부리고 나라에서 주는 돈도 받고, 그러니까 사회 보는 부목사님이 나이는 어리지만 “도대체 당신이 목회를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부목사님이 허튼 소리하는 것도 아니고 기도로 예배 시작하고 찬송 부르고 기도회 하는데 인도하고 마이크 강사 목사님에게 넘겨준 것밖에 없는데, 이 이 소경들은 맹인들은 특히 예민하잖아요. 그걸 이 기도 많이 하는 목사님이니까 그걸 다 느낀 거예요. 그 부목사의 영적인 권위를 이렇게 다하는 거예요. 함량 미달이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목회를 하겠느냐? 그게 영적인 권세가 없는 거예요. 부족한 거야. 아무 교인이 목회자들에게 와서 당신은 다 잘하는데 영적인 권위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아무도 이런 얘기 안 해. 진짜 간이 배 밖에 나오는 사람이나 목회자하고 이별할 사람이나 하는 이야기지 윤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얘기지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지 않아요.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거고.
그래서 내가 얘기해요. 로이드 존슨 목사님이 목사님 설교에서 하는 말이 있는 거 비상하리만치 신령한 사람이 돼야 한다. 그게 무슨 고고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주님을 깊이 만나고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세계에 갔다 온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느껴져야 해요. 세례요한처럼 저는 하나님께로부터 본향을 받았으니 라고 했듯이 이게 느껴지는 사람이 돼야 해요.
그 어떤 사람이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는지 아세요. 신학 공부는 하나님의 관하는 지식을 전해 주는 거죠.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은 성령님이에요. 그런 지식들이 성령의 도구는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성령일 수는 없어요. 아무리 그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게 그 신학을 진술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성공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거 받은 그 자체는 아니다.
이제 그가 수없이 바이든 대통령의 초상화를 다양하게 다 보고 동영상을 본다고 할지라도 한번 만나서 악수하고 포옹한 거하곤 다르잖아요. 그런 것이 바로 영적인 권위가 느껴지는 근원이에요.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하나님 앞에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 그리고 기도 많이 하는 사람. 가장 중요한 거예요. 그거 없이는 나머지 권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 번째가 뭐냐면 인격적인 권위, 인격적인 권위라는 것은 뭐냐 하면 말씀에 합치하는 성품과 삶이에요. 그거는 완전한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것을 자녀들도 다 알아요. 엄마 아빠가 못 돼도 매일 매일 좋은 엄마 아빠가 되어 가려고 하는 부모인지 아니면 그냥 개념 자체가 없어서 갈 길이 잘못 풀어서인지 그 아이들도 알잖아요.
누구는 모르겠어요. 여러분들이 성도들을 이렇게 목양을 하는 것을 보면 부족하지만 그래도 예수를 잘 믿으려고 하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왜 모르겠어요. 물론 너무나 그런 기간이 길어서 진짜 인격적으로 이렇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삶과 말씀이 아주 일치하는 사람이면 더 좋겠죠. 그러나 그것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고 성화의 도상이 있잖아요.
제가 서른아홉의 교회를 개척했을 때 지금은 열정이 모자라겠어요? 뜨거웠지요. 나는 그렇지만 그때는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열정은 있었지만. 교인들에게 상처를 많이 줬어요. 그 대신 시원하게 한 방 날리는 일은 잘했어요. 고개도 못 들게 만들어준다든지. 그러니까 그런 것을 주인을 닮아가는 게 끝이 없잖아요. 그것을 끊임없이 저 사람이 주님을 닮아가고 있다 라고 하는 그것을 이게 알게 해줘요. 그게 권위의 두 번째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선한 목회자들이 착한 목회자들이 인격과 삶이 일치한다는 것.
마지막 세 번째가 뭐냐면 사람이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는 것, 그 자체가 놀라운 권위예요. 그 권위를 몰라주면 그건 아직 철이 아니에요. 기다리면 무릎 꿇을 때가 와요. 어떤 사람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를 오랫동안 하고 나면 그게 자신의 품속에 들어오는 게 느껴지는 거죠. 나이와 상관이 없어요. 그런 것 중에서 최고의 첫 번째 원인이 그렇다면 영적인 권위에요. 그런 권위를 갖는 사람들이 돼야 하는 거죠.
그래서 청교도 중에 존 게이츠키 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목사들이 모여서 신앙고백을 작성하는데, 신론에 있어서 하나님을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게 이제 그 날의 주제였어요. 길레스키가 기도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기도를 하는 순간 간절히 이제 기도를 했어요. 기도가 끝났을 때 목사님이 한결같이 그때까지 태어나서 들어본 기도 중에 하나님에 관한 진술 가운데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진술 가운데 길레스피 목사의 오늘의 기도만큼 그걸 가장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 기도 내용을 오늘 기도하신 그 내용을 기초로 신론을 작성하자. 유명한 기도가 시작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 기도가 끝났을 때 다시 땅으로 내려왔어요. 그 다음 큰 감격을 받았어요. 그런 영적인 권리가 어디서 오는 거겠어요. 단지 이 머리통에서 나온 거겠어요? 그럴 리 없어요. 길레스키를 능가하는 신학자는 얼마든지 많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영적인 깊은 권위에요.
그래서 설교시간에 이야기했듯이 회중들에게 당신들의 제일 큰 문제가 문제 뭔지 아냐? 그게 뭐냐면 일주일 동안 하나님 거의 생각 안 하면서 사는 게 그게 제일 문제다. 근데 똑같은 문제가 목회자들의 문제예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하나님 생각하면서 일해야 하지 않느냐. 쉽게 얘기하면 그냥 글로 하는 거지. 글로. 이게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이 그 사람을 저절로 생각나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하듯이 그러잖아요. 사랑하면 설거지하는데 자꾸 그 사람이 생각이 나요. 일이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해요.
결국은 뭐냐면 결국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안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해서 안 하는 거야. 기도를 안 되니까 못하는 거예요. 안 되는 걸 내버려 두면 못하게 되고 못하니까 안 하게 되고 안 하니까 못하게 되는 거죠. 악순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 기도 안 하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거예요. 목회자 가운데도 안 되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그런데 결국은 아무리 기도에 자기 자신을 받쳐야 해요. 그래서 이런 모임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뭐냐면 자기들끼리 개인 기도에 열렬히 해야 하는 거야. 기도 모임 인도하는 거 일도 아니에요.
최근에 경험했던 재미있는 얘기해줄까요? 우리 스태프 목사님들이 제주도로 수련회를 갔어요. 박순영 목사 교회에서 지인 수련회 모임에 들어갔어요. 우리 부부에게 방을 하나 주었어요. 그날 엄청나게 바람이 불었습니다. 진짜 오랜만이었어요. 아니 그게 피곤해서 자려고 하면 잠이 안 와요. 우리 집사람은 곯아떨어졌어요. 나는 침대에서 자려고 하는데 잠이 안 왔어요. 처음에는 약도 먹었어요. 그날 약을 딱 보니까 딱 두 알 가지고 간 거야. 2박 3일인데. 바보 같은. 그러니 어떻게 해요.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그리고 밤중에 12시에 일어났어요. 기도를 시작했어. 그리고 밤을 꼬박 새웠어요. 열렬히 기도를 했어요. 이렇게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오랫만에 한숨도 못 잤어요. 그 다음날 아침에 간단히 먹고 기도를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인제 내가 인도를 해야겠다. 그래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했었어요. 진짜 소수가 모여서 그 부부 세 부부가 모여서 기도했지만 진짜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해주시는 기도를 기도회를 했어요. 아침에. 그게 사실은 목회자들이 모였을 때 제일 어려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함께 해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보면 간절히 기도하고 능력을 받아서 그래서 모였을 때에 여러분 자신이 다른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은 계획 속에서 되는 게 아니고 자신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 돼야 해요. 이것이 말씀 사역과 나뉘어지지 않아요. 표현도 다듬어지지 않고 논리도 좀 모자란 것 같은데 이상하게 가슴을 쿵하고 울리고 지나가는 그 어떤 그 힘이 그게 성령의 역사예요. 말씀 속에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
서울역에 가면 대우 옛날에 대우빌딩 있던 그 뒤편에 보면 남산을 배경으로 가면서 남대문 교회가 있어요. 진짜 오래된 교회예요. 그 옛날에 배용준 목사님이라고 계셨어요. 살아계셨으면 100살이 훨씬 넘으셨을 것 같아요. 제가 1983년도쯤에 그 목사님과 그게 벌써 70세가 되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40년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셨어요. 그러니까 시골에서 찢어질 듯 가난해서 학교 소사를 했어요. 소사가 뭔지 알아요. 초등학교 졸업한 애가 학교에 취업을 해서 선생님들 책상도 닦아주고 걸레질도 하는 관리 소년 같은 사람을 소사라 했어요. 소사. 그래서 나이 든 소사도 있지만 소사라고 학교의 관리 관리사를 소사라. 지금 너무 찢어지게 가난하니까 소사가 됐어요. 소사가. 먹지도 못했어요. 키도 자그마하신 분이었어요. 얼마나 일본인 교장이 감동을 받았는지 너는 뭐를 하든지 할 얘다. 너무너무 열심히 하니까 그러니까 이제 아침 새벽에 나가가지고 옛날에 일본 강점기 때 물을 타는 사람이 있어요. 설탕이 이렇게 밀가루 반죽처럼 걸쭉합니다. 그걸 장작을 떼서 위에다가 그걸 퍼서 콘크리트처럼 부으면 ?? 그게 마르면서 불이 붙어요. 근데 그게 ?? 마른 풀을 올려놓으면 불 받기가 어려운데 그것을 물 칸을 올려놨으니 그것을 새벽에 나가서 다 그것을 펴놓고 선생님 그리고 교장 선생님을 맞이하는 거예요. 일본인 교장 선생님이 너무 감동을 받았어요. 그리고 얘야. 넌 뭘 해도 되겠다. 소원이 뭐냐? 교장 선생님 전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해서 좋은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7살 때 주일학교를 다니는데 너무 이 아이가 가슴이 아파요. 여기 수백 년 먹은 고목나무가 있어요. 그 마을 어귀에. 거기에 신이 있다는 거예요. 온 동네 사람이 수십 년 동안 거기에 절해요. 얘가 너무 가슴이 아프니까 매일 그 나무 앞에 가서 무릎을 꿇어서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되는데 우리 동네 사람들이 이 나무를 하나님보다도 더 섬깁니다. 내가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으니 하나님 이 나무 좀 없애버려 주십시요. 벼락이 떨어져가지고 완전히 그 나무를 불태웠어요. 그것을 자기의 기도 때문에 응답했다고 그 일곱 살짜리가 굳게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런 정도의 신앙을 갖고 이 일본인 교장 선생님은 얘를 데려다가 그 저기 뭐야 그 학교 공부를 시켜주었어요. 그래서 들어간 학교가 오산학교예요. 그래서 하고 그 다음에 일본으로 유학을 시켜줬어요. 그리고 일본에서 공부하고 왔어요. 한국에 와서 목사가 되었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그 교회를 개척하신 겁니다. 그 당시에 42년이 됐다고 하니까 지금 한 80년이 되었겠네요.
그때 중학교 때 기억이었어요. 근데 그때 중학교가 지금의 중학교하고 똑같아요. 그러니까 그때 먹지도 못하고 쪼금 했지요. 그때 막 교회가 부흥기니까 전도사를 써야 되잖아요. 조사라고 했어요. 조사. 전도사를 써야 되는데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니까요. 진짜 사법고시 붙은 사람만큼이나 드문 때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했냐면 그래도 전도사는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신앙이 좋은 중학교 학생을 데려다가 전도사로 쓰면서 학비를 조금씩 대주는 거예요. 그걸 뽑는다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 지망을 한 거예요. 급하게. 째그만하고 맞지도 않는 교복을 입고 푹 눌러 쓰고 하는 시험 삼아서 수요일날 설교를 해보아라. 이렇게 장로님 한 분 계셨는데 그 저기 걸어오는 용모를 보면서 뭐야. 그리고 이제 비웃었는데 이 10대 초반 중반이 될까 말까하는 한 13살 14살이 된 그런 소년이 후보로 올라와서 수요예배 설교를 하는데 머리도 벅벅 깎아 가지고 담임 목사님 안 계시고 이제 교인들이 몇 명인지 모르겠어요. 기껏해야 한 100여명 모였겠지. 어떻게 되었느냐? 교인들이 의자에 내려와서 대굴대굴, 결국은 비웃던 그 장로님이 그 전도사한테 푹 빠져가지고 자기 딸을 어떻하든지 엮어가지고 결혼시켰어요. 삼일 만에. 그런데 그 쪼그만 아무것도 없는 그 소년이 그 당시에 일곱 살 때 그렇게 다져진 순교신앙으로 설교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설교를 듣고 외모로는 아무것도 아닌 그 설교를 듣고 온 교인이 대굴대굴 굴렀어요. 그것을 그 현장을 보면서 교인들이 하는 말이 나는 본 적이 없는데 북한 사람들이 작박구리라고 하는 아주 조그만 벌레가 있데요. 그게 별로 힘도 세지 않는 벌레인데 그걸 비유해서 작박구리가 대동강을 건넜다는 말이 유행했데요. 벌레 같아 보이는 그 소년 같은 전도사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은 벌레가 대동강을 헤엄쳐 건너온 것과 똑같다 라는 뜻의 얘기에요. 그게 무엇입니까? 영적인 권위예요. 기도의 사람이에요. 열렬하게 기도하는 사람이었어요.
한국에서 그 당시에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순복음 교회(이하 녹음상태가 좋지 않아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결국은 그렇게 영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에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기도를 해야 되겠는데 올 한 해 동안에 올 한해만이 아니겠지만 기도를 기도 목회를 해야 되겠다 라고 말하는데 나는 본인 자신이 기도의 사람이 돼야 한다. 기도 속에서 아무도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해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우리가 괄목할만한 말씀의 사람이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얘기하고 싶은 건 소리 내서 기도를 해야 됩니다. 개인적으로 혼자 기도할 때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혼자 조용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함께 성도들과 모여서 기도를 할 때는 열렬하게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해야 돼요. 근거가 뭐냐? 성경에 근거가 있어요. 그리고 두 번째 근거가 성경에서 그 시인 시인이나 성직자들이 부르짖는 그 위급할 때에 한 대표적인 기도가 묵상 기도가 아니에요. 부르짖는 기도를 해요. 마음에 있는 샘 솟듯이 터져 나온 그런 갈망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것이었어요.
세 번째는 뭐냐면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성도들과 기도회를 인도할 수 있겠느냐 이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자기 자신이 그렇게 소리 내어서 기도할 열렬함이 없는데 어떻게 기도회를 인도하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한 번 목회자가 열렬하게 기도회를 인도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면 그런 영적인 권위에 순복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열렬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야 돼요. 성도들이 아무런 힘도 없고 맥도 없이 그렇게 기도회를 인도해서는 안 된 거죠. 말씀을 전하고 그리고는 열렬하게 한마음이 되어서 성도들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통성 기도가 생활하게 되어 있어야 해요.
이러한 어려운 난관 속에서 그래도 교회가 힘 있게 뻗어나가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목회자들이 열렬하게 기도하는 교회예요. 그리고 모일 때 계속 끊임없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교회예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성도들을 위한 기도회 모임이 되지 않아요. 그 속에서 마음을 실어서 열렬하게 기도해서 성도들이 거기에 기도회 불을 붙여서 가지고 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올 한해 기도 목표를 세우고,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정말 부끄러움이 없이 내가 여태까지 했던 사역의 한계를 한 번 넘어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도록 그렇게 열렬히 기도해야 되요. 그때에 목회의 재미를 알게 되고 하나님이 그 능력이 부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거지요.
이런 기도가 없으니까 교구에서 회심의 역사가 안 일어나. 그걸 목표로 하지도 않고. 그걸 제대로 하는 교역자라면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교회 가면 설교 시간에 태반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게 무슨 그게 예배를 드리겠어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전도사나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렇게 집중할 능력이 10%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충만하게 설교를 해서 뭔가 지금 저 사람이 알 수는 없지만, 뭔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이 들게 그렇게 설교를 해야지요.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불이 있지 않아요.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겠어요. 그러니까 열렬하게 목회에 그냥 회심이 없으면 목회의 영광 목회의 영광은 회심의 영광이고 회심의 도전의 영광이에요.
사람들이 회심을 하고 회심한 사람들은 계속 은혜를 받으면서 회심의 은혜가 샘솟듯이 솟아나게 하는 것이 목회의 영광이에요. 그런 일을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기도하지 않고 볼 수 없잖아요. 뻔히 나오잖아요. 7절에서. 허다한 무리들이 그 도에 복종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들이 직접 구제할 때에는 안 일어나던 놀라운 일이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니까 교회는 흥하고 많은 사람들이 허다한 무리들이 그 교회에 복종하는 영적인 권세가 다시 한번 무겁게 그 사람들에게 주어졌거든요.
우리가 이런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이 이번 금년에 나의 교구에 내가 맡고 있는 이 교구에 이 부서에 하나님이 구원을 주십시오. 회심을 주십시오. 그리고 라헬처럼 울부짖어야 해요. 아이를 낳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죽어버리리라.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이 영혼들을 탄생을 시켜달라고 부르짖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기적의 역사를 본다면 그때 우리의 목회예요. 그렇게 하면서 부교역자 생활을 한 사람이 한 교회를 붙들고 나아갈 수 있는 권세를 갖게 되는 거야.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사역을 해서 내년에 여러분 이제까지 목회하면서 보지 못했던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게 되게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