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아뢰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녹취자 : 김지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여기에 많은 메시지들이 있지만 나는 오늘 한 단어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소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희망, 통곡, 눈물 이거는 하나의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는 구절입니다. 이게 “간구와 소원” 번역이 좀 애매합니다. 여기에서 간구는 기도라는 단어입니다. 소원이라는 단어가 좀 애매합니다. 소원은 그리스어로 ‘케이아스’라는 단어인데 이게 그냥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간청입니다. 그래서 서플리케이션(supplication)이라고 KJV에서 번역을 했고, NIV에서는 패티션(petition)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결국 탄원입니다. ‘기도와 탄원을 올렸고’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따로 있고 탄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뒤에 있는 탄원이 기도의 성격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곧 탄원을 올렸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여기서 탄원이라는 말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케이아스’라는 단어인데 우리말로는 적합하게 옮길 만한 단어가 없습니다. 흔히 탄원하면 우리는 그냥 이렇게 뭐 동네에서 탄원서를 낸답니다. 그럴 때 탄원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 걸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소원’으로 번역을 하는데 꺼지지 않는 바램입니다. 끌 수 없는 바램입니다. 소원이라고 만약에 굳이 쓴다면 열렬하게 타오르는 소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성격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능력은 소원의 크기에서 나옵니다. 소원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기도가 흐리멍덩하고 흐리멍덩하게 기도하니까 응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셔도 그것이 정말 기도 응답이구나라는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식구들 편안하게 해주시옵소서.’ 세상 쓸데없는 기도입니다. 의미 없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실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응답을 확인할 길도 없습니다. 감격도 없습니다.
요동치고 있는 어떤 가정이 있습니다. 환란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사고를 내고 아들은 감옥에 들어가고 할머니는 병원에 암 선고를 받아서 입원했습니다.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 속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 부인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심방을 통해서 느끼고 돌아와서 ‘김 집사의 가정을 기억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정상적인 목회적 눈물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겠습니까? 그것이 이 ‘케이아스’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소원은 강력한 것입니다. 문제는 소원이 없으니까 기도가 열렬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거의 안 가지만 우리가 사우나에 갑니다. 저녁 늦게 마지막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매표소에서 이야기합니다. “시간이 30분밖에 안 남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괜찮습니다. 샤워만 하고 나오면 됩니다.”해서 들어갔습니다. 탕에 이렇게 있는데, “손님, 죄송합니다. 이제 물을 빼야 되겠습니다.” 와서 드레인을 확 여는 것입니다. 그것이 빠지는 데서 물이 워낙 많으니까 시간이 걸립니다. 거기다 한번 발을 넣어본 적 있습니다. 발을 넣어보면 어떻게 됩니까? 애기라면 위험할 정도로 빨려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쫙 빨려 들어갑니다. 힘을 버티면 ‘촤아악’ 소리를 내면서 물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원입니다. 마음 한쪽이 어느 한쪽으로 확 쏠리는 것입니다.
소원은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향은 하나입니다. 방향. 그래서 선배 목사님들이 자기 목회자 사무실을 뒤에다가 목양의 이정표로 써놨던 것이 ‘목양 외에 아무것도 안 하겠다.’ 그 뜻이 아니라 ‘모든 방향이 목양이라는 방향으로 쏠리게 하겠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교역자들이 기도를 흐리멍덩하게 하는 이유는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교역자로 임명을 받고 1년 만에 그만둡니다. 그 이야기는 6월부터 그만 둘 궁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마음이 있습니까? 거기에 소원이 있습니까? 이제 6개월 후에 떠날 텐데 그것이 열렬한 기도가 된다면 거짓말입니다. 몇 개월 후에 그만둘 텐데, 이미 벌써 마음이 떠났는데 무슨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모든 것이 그냥 자기의 의무를 따라가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커다란 조직 속에서 회사 생활하듯이 굴러가는 겁니다. 그것은 수고해도 노동이지 사역이 아닙니다. 사역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은 마음을 다 드려서 쏟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소원이 무엇인지 여러분 자신에게 반문해보십시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소원입니까? 그리고 그 소원 이야기만 하면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포기할 수 없는, 그렇게 절대로 접을 수 없는 그 소원이 있습니까? 아주 너무 심하면 ‘그 소원이 안 이루어질 바에야, 내가 차라리 이렇게 선 채로 내가 돌이 되겠습니다.’ 아니면 ‘내 눈을 그냥 감겨주시옵소서.’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 강력한 소원이 있습니까?
목회자는 부르심 자체가 그 빛에 대해서 증거해서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분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새로 믿게 만들고 믿는 사람은 더 잘 믿게 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소원입니다. 그것이 만약에 소명이 안 되고 있다면 소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처음부터 소명을 받지 않았든지 아니면 받기는 받았는데 성화 생활이 흐지부지되어서 그 소원 자체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물어봐야 될 것은 ‘내게 진짜 소원이 있는가’, ‘그 소원이 뭔가’, 병원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위해 그래서 그 병이 낫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에서 자기가 맡고 있는 영혼들이 변화되기를 원하는 소원과 양립할 수 없는 소원이 아닙니다. 엄마 병 낫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교구의 식구들이 회심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한 불타는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마음은 양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소원이 있습니까?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까? 여러 개의 소원이 있는데 여러 방향이 아니라 한 방향입니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이 다 고쳐주시고 나서 “내 소원대로 되리라” 그러셨어요. 그 여자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가지고 나온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 살려달라는 소원 그거 하나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죠? 어린 아이가 질병에 걸려서서 아이가 죽어 갑니다. 엄마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이 아이를 살아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소원이 없습니다. 이 아이가 그 병마에서 벗어나는 거 그것이 절절하게 이 가슴 속에 사무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 소원이 충만히 있는 사람이 사명감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확실히 모자라도 그런 (소원이 있으면) 사명감이 있는 것입니다.
소원이 있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증거가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소원이 있는데 그 소원이 현실적으로 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둘 중에 하나입니다. 소원을 접든가 아니면 그걸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는가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의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입니다. 의로운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의에 목 마르는 것입니다. 만족스럽지 않고 슬프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강력하게 소원이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팔복의 사람은 소원의 사람입니다. 하늘 가치에 대한 열렬한 소원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기도가 흐리멍덩하고 기도가 거의 스펀지, 스티로폼 엉덩이처럼 돼서 앉기가 무섭게 일어나는 이유, 앉아서 엎드려 있는데 조는 이유, 기도는 모양으로는 하는데 이 마음이 뜨겁게 치솟지 않는 이유는 결국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통곡과 눈물이 없으면 그 소원은 진실한 소원이 아닙니다. 진짜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소원은 그 소원이 안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그것이 소원입니다.
연애 시절 우리는 빠집니다. 연애할 때 나는 기도를 제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도 사랑에 빠지잖아요. 근데 한 번 휙 던져보고 아니면 말고 하는 사람은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나는 이 사람과 맺어지지 않으면 나 조용히 눈을 감고 싶다. 그럴 정도가 진짜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꼭 들어준다는 거는 없지만 그것이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 같은 사람은 사랑을 그냥 아주 간단하게 광기라고 했습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못하게 하는 광기라고 했습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건데 광기입니다. 이성간의 사랑입니다. 눈을 멀게 만들고 다른 세상을 (살게 합니다). 그 현명한 정치가들도, 현명한 현자들도 사랑 앞에서 눈이 멉니다. 그것이 소원입니다. 그러면 진짜 소원은 강력한 것이 소원입니다. 강력하지 않으면 소원이 아닙니 다. 그것은 바람입니다. 사투리로 말하면 바램입니다. ‘그랬으면 좋을 텐데’ 희망입니다. 희망과 소원은 다릅니다.
기도의 모든 역사는 강력한 소원에서 나옵니다. 강력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 기도가 통곡을 몰고 오고 눈물을 몰고 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항상 통곡과 눈물로 드린 기도입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기자가 5장 7절에서 이야기하는 이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서의 대제사장의 기도를 염두에 두고 쓴 글입니다. 주석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무엇입니까? “진리로 저희를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을 떠나는데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제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는데 이후에 이루어질 일들이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근데 저들이 정말 하나되고 그리고 진리 안에 있고 서로 사랑하는 흩어지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 소원이 너무너무 강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강렬하냐면 잠시 후에 십자가에 못 막힌 자신의 죽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입니다. 그 소원이 통곡과 눈물을 몰고 온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아이 목사님이 또 너무 치우쳐 이야기하시는 게 아닌가’하겠지만, 그것이 진실하기만 하다면 통곡과 눈물의 깊이가 소명감의 깊이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확실히 좀 부족하고 조금은 기술이 모자라도 무릎을 꿇었는데 통곡과 눈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예수에 살고 예수 위해 죽겠다고 하는 억누를 수 없는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그것이 소명감입니다. 그것이 없는 거는 보험회사입니다. 보험회사 다니는 직원도 자동차 딜러가 지난달에 얼마나 많은 인센티브를 받았는지를 쭉 설명을 하면 그리고 새로 뽑은 차를 보여주면 보험 딜러도 10년 하든 때려치고 자동차 딜러가 될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소원이 아닙니다. 소원은 다 때려치고 거기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원입니다. 그래서 소원의 강도가 높은 사람이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고 싹수가 있는 사람이고 앞으로 하나님이 크게 써보실만한 인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바운즈 읽었잖아요. 통성기도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다. 시름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마지막 승리에는 집회도 안 나갔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기도에 헌신했습니다. 그것이 소원입니다. 예수님은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지만 기도 곧 소원입니다. 마음속에 불꽃처럼 타올라서 도저히 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소원입니다.
우리 때만 해도 그런 소원에 불타는 사람들이 모두는 아니었습니다. 근데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학식도 얼마 안 되는 목사님인데 그 소원에 불타는 게 느껴집니다. 성도들이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그 소원이 불탔습니다. 대접을 잘 해주지만 목사님은 대접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뭐 굳이 그 대접을 마다하고 고행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언뜻 언뜻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대한신학교 다닐 때 채플 시간이 되면 통로가 꽉 차지 않으면 채플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매일 채플이 열렸는데, 학식도 별로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내가 수석으로 졸업했으니까 그것이 증명하잖습니까? 그렇게 학식이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있었습니다. 설립자 김치석 박사 자신이 그때 전국이 2만 8천 개의 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동네가 28000개였습니다. 그분이 “너희는 이만 팔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샘을 파라.”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설교할 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를 하시고 학생들은 그 설교를 들으면서 통곡했습니다. 그리니까 생생합니다. 내가 신학을 가는 과정에서 대한신학교에서 학문적으로는 별로 그렇게 얻은 게 없습니다. 여러분 딱 하나 뭐냐면 신학을 어떤 식으로 해야 되는가를 역설적으로 배웠습니다. 그런 통곡과 눈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감입니다. 근데 제일 큰 문제는 그런 사람으로 보는 것이 매우 희귀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무언가 치우시고 유별한 사람으로 보이지, 저 사람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보기를 보여준다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소원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다 보니까 진짜 소원에 불타는 사람들을 왕따시키는 것입니다. 감정에 치우친 사람 이렇게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스스로 이걸 터득해야 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진봉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EM바운즈에게도 조나단 에드워드의 이 부의 경험과 조나단 에드워드의 기도 생활 그의 거룩함의 추구가 엄청난 영향을 줬습니다. 브레이너드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레이너드의 처절한 기도 생활, 평생 그 사람이 끼고 다니다시피 한 책이 데이브 브레이너드의 생애였다고 합니다. 그걸 보면서 이거를 확실하다고 느끼고, 그리고 지나친 열정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자기가 진짜 이 사람 같은 소원이 있는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너 마지막 이제 오늘 눈을 감고 네 생명과 바꿀 수 있는 소원이 뭐냐’라고 할 때 그것이 목양이 아니면 그 사람은 사명이 없는 것입니다. 죽어도 양떼들, 교회 여기에 꽂혀 있고 그것이 1순위가 되어야 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제 소원이 뭔지 알았습니다. 두 번째는 소원이 없는 것은 영혼의 질병 상태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러면 그 소원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그런 강렬한 소원을 가게 하는 근원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사랑에 빠진 모든 사람은 순정파가 됩니다. 순정파가 안 되면 사랑을 빙자한 정욕입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간판으로 내거는 것입니다. 성적인 욕구를 가지고 누구에게 접근해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진심으로 사랑해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저 사람으로부터 이익을 얻어내고 싶어도 사랑한다고 접근을 합니다. 가운데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은 순정이 아닙니다. 순정한 사랑이 하나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결국 그러면 열렬한, 간절한 소원이 없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거나 사랑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그냥 불타올라야 할 죽음에 이르기까지 갈망해야 할 소원이 희망사항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위대한 능력은 소원의 예리함과 힘 차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군대 갔다 왔으니까, 초수는 유효 사거리가 있고 최대 사거리가 있습니다. 유효 사거리는 맞으면 직방으로 죽는 게 유효 사거리입니다. 최대 사거리는 타원이 갈 수 있는 최대의 거리를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M16이 3km를 날아간다고 칩시다. 삼백 미터 한 번씩 맞으면 그냥 뻥 뚫리면서 죽어버립니다. 장기가 파열되서 죽어버립니다. 근데 2990m에서 맞았습니다. 정말 툭하고 맞는 거에요. 그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가 없습니다. 또 마찬가지로 소원이 강력하면 소원이 강력한 거기에서 기도의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하늘에서 불이 확 떨어지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근데 이제 기도의 능력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또 초월적인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존 오웬은 그걸 초월적 은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초월적인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두 번째는 내제적인 은혜를 우리 안에서 이렇게 불러 일으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이렇게 그 초월적인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은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면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결혼하고 1년 있다가 간절히 기도하면서 성령의 불을 체험했습니다. 그때 나 통성 기도 안 했습니다. 이 찬 바닥에 엎드려서 목상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순간 그리고 물이 내게 임하면서 생전 내가 해보지도 못한 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런 초월적인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 편에서 보면 간절할 때 거기에서 기도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열렬함이 저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소원의 간절함에서 나옵니다. 교역자가 목회자가 기도를 하는데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의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것을, 여태까지 살고 있는 기도하는 자리에까지 나오기까지 살았던 삶, 지금 기도하는 순간의 관심사, 기도가 끝나면 나아가서 살 내일의 삶을 모두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거나 현저하게 부족한 사람입니다. 성도들이 말을 할 때 행위라는 것을 읽어야 합니다. “요새 기도생활 하지?”, “아, 제가 지금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고 저런 일이 생겨서 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예전에 그보다 더 어려울 때 불에는 불이라고 산불이 번지면 이쪽에서 바람이 이쪽에서 불을 같이 지르잖습니까? 바람이 이쪽으로 불기만 하면 그래서 이쪽에 불이 넘어와서 태우지 못하도록 탈 것을 미리 다 태워서 아예 없애버린 것입니다. 그랬듯이 예전에는 더 어려운 일을 겪었는데 그때는 맞서 싸우면서 더 열렬히 부르짖고 기도한 것입니다. 사생결단으로. 그런데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덜 어려운데 못 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기도를 못 한다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 향한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사랑의 깊이와 소원이 간절하면 정확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기도 인도가 어렵고 설교가 어려운 이유는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라 바로 말씀에 올라오기 바로 전까지 강력한 소원에 바로 잡혀 있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거는 그냥 설교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온 삶을 다스려서 그 설교가와 같은 방향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 소원도 희열해지고 강렬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히는 세상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비명을 지르며 죽고 싶어 하는 것이 선지자들의 심정이었잖아요. 그것이 결국 사랑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의 리더십을 회복시켜 주시는 장면이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부록입니다. 20장으로 끝내도 되는데 부록입니다. 왜냐하면 21장이 없으면, 배반한 제자들이 전부 다 그 다음 장에서 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누가 이거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이에 예수님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도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21장을 끼워넣으신 것입니다. 21장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리더십의 회복입니다. 뭘 물어보셨습니까?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현재형으로 물어보셨습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주님을 사랑하게 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목회 사역의 기반 자체가 부실한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서 순수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사랑은 배타적인 것입니다. 우리 애들이 있는데 자기 아빠한테 옆집애가 와가지고 무릎에 안기면 애들은 난리가 납니다. 걔네들의 질투는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이성만의 사랑만이 아니라 다른 사랑도 스토르게의 사랑이나 필리아의 사랑도 그리 독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간절하지 않기 때문에 소원이 줄기 차지 않은 것입니다. 소원이 줄기차지 않으니까 시시해지면서 기도에 매가리도 없고 소원도 강렬하지도 않고 그리고 모든 게 안 기쁜 것처럼 아주 혼탁한 가운데 자기 할 일을 힘겹게 하는 것입니다. 일 자체를 좋아해서 신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 헌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통곡과 눈물이 없으면 소원이 아닙니다. 소원이 없으면 기도하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EM 바운즈가 첫 장을 다 시작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섭리는 방법과 제도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위에 부어지는 것이다” 제가 <신학 공부 이렇게 했다> 할 때 인물로 점을 찍어서 구약시대부터 교회사 시절까지 그려 온 것입니다. 인물의 점을 찍으면 그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향이고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 하나님이 어떤 방향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끌고 가시는지가 이미 뚜렷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한 아이의 탄생 앞에서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그것 하나로 하나님의 행할 길이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비록 역사적으로 있었던 위대한 기라성 같은 인물 축에는 못 써도 하나님이 줄을 긋고 싶은 변곡점에 있는 사람은 되려고 하는 마음이 가져야 합니다. “나는 명예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큰 직분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냥 소박하게 한 교회의 목회 나오면 살다가 죽겠지만...” 괜찮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에서 무슨 교단장을 하고 무슨 통장을 하고 무슨 회장을 하고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 이렇게 줄을 그어서 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그어서 가면 세례 요한은 당시 대제사장 같은 사람하고는 게임도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점입니다. 근데 하나님은 점을 그쪽으로 그리지 않으시고 그 태어난 한 아이에게 줄을 그리시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러 가셨습니다. 무슨 소린지 알겠습니까? 그리니까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들이 마치 욕망해서 그 자리에 오른 것처럼 생각하면 그것이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열정이 없고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강력한 소원이 없는 것을 정당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정이 없는 것은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이름 없이 빚도 없이 살고 싶지 그건 너무 당연합니다. 근데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해야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크게’가 아니라 ‘주의 눈 앞에 큰 자가 되며’ 세례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주의 두 눈 앞에서 큰 자가 되며. 앞으로 큰 자가 될 것이다. 세례요한이 어느 자리까지 올라갔습니까? 얼마나 높이 올라갔습니까? 얼마나 그 큰 권세를 세상 권세를 가졌습니까? 왕족들과 유대 왕과 무슨 연계를 맺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게 쓰임 많은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그런 강력한 소원이 없는 것은 사랑의 부족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기도가 희미하다, 힘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기도의 깊이를 제한하고, 제한된 기도의 깊이는 사랑을 제한합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할게요. 사랑의 깊이는 기도가 더 못 깊어지게 하고 더 깊어지지 않는 기도는 사랑이 더 깊어지지 못하게 합니다. 시편에도 보면 “주께서 나의 음성을 나의 소리를 들으므로 내가 주는 사랑하나이다.” 기도 응답과 사랑을 매우 밀접하고 관계가 됩니다. 기도 안 하거나 강력한 기도의 소원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응답에 감격이 없습니다. “우리 교구 식구들 모두 편안하게 해주시옵소서.” 아니 그 어떻게 응답을 하겠습니까? 근데 그 아까 그 집사님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 하다가 도저히 마음이 안 드니까 그를 위해서 금식까지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어머니가 낫고 그다음에 아들이 교도소에서 풀려나고 남편이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인 못지않게 기도한 이 사람 속에서는 막 가슴이 벅차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 예수 믿은 것을 받은 증거 많게 만들어서 ‘이야, 이 막다른 상황에서도 이렇게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주 앞에 불을 지으면 역사가 일어나는구나’를 체험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독점적인 사랑을 받는 것 같은 감격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나한테 외투 한 벌 생긴 거 아니고, 돈 뭉치 하나 떨어진 것도 아니고, 나의 급수가 세상에서 내 직급이 올라간 것도 아니고, 근데 모든 걸 세상에 명품을 다 가진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집에 와서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응답해 주셨다’ 그것이 바로 강력한 소원 가지고 있는 사람의 특권이고, 그 강력한 기도의 소원을 못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런 특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자체가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그냥 뭐 특별히 사랑하지 않지만 애들 생각하면서 그냥 사는 마지 못해서 사는 부부처럼 그냥 그렇게 둘 중에 하나 누가 죽어도 특별히 눈물 흘릴 이유가 없는 부부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사역하는 목회자들 많습니다. 아주 아주 많습니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소원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생각이 거기에 고정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떤 물건을 사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냥 생각나자마자 그냥 막 달려가서 확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많거나 낭비벽이 심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에 사고 싶을 때 바로 그 가게로 달려가지 않고 ‘에이, 이게 뭐 필요할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생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면 그 다음은 그것이 없는 것이 매우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도의 은혜>에서도 나옵니다. ‘하루에 아홉 번씩인가를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회생활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같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밤에 기도시간에 혼자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제목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생각을 자기의 마음에서 떠나지 말게 하자라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내가 설교할 때 당신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은 거의 생각 안 하면서 일주일 동안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근데 주의 일을 하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 기도 때 하나님 생각하고 내가 오늘 새벽 기도 올 때까지 거의 하나님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에 몰두 하고 일과 하나님이 어떻게 관계되어야 하는지 깊은 생각이 없이 살아갑니다. 사랑을 회복하는 첫 번째는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에펠탑을 세웠습니다. 세계 박람회 하는 기념으로 하나 세웠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문화적인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이게 아직도 철거를 하는 것입니다. 창문을 열고 이렇게 보니까 서 있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막 탄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또 사회 참여가 대단하잖아요. 이 유고한 역사를 가진 파리의 문화를 여러분 구시가지 육층으로 제안하는 거 알죠? 옛날 건물이 물을 끌어올리는 게 육층밖에 못합니다. 나머지 신축 건물들 다 육층에 맞춰서 짓습니다. 근데 라데팡스 지역은 괜찮습니다. 신도시쪽은 개방되어 있습니다. 구도심은 6층으로 다 돼 있습니다. 그래서 몽마르트 언덕에 올라서 내려다 보면 판타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다 6층으로 똑같은 높이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모시고 사단이 올라가서 보여준 세상이 그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판타지 같습니다. 이게 현실이 아니지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거기에 불쑥 솟은 에펠탑이 거기 서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랬다고 합니다. 그 보통 쇠입니다. 그냥 뭐 특별하지도 않은 쇠입니다. 그러니까 뭐 시뻘겋게 녹이 쓴 것도 다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뿔이 납니다. 그래도 이제 그게 미국에서 넘어왔고 그 주민에게 약속했습니다. 20년 후에 주민 투표에 붙여서 20년 후에도 싫다고 그러면 참고하겠습니다. 20년 후에 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파리 없는 에펠탑은 생각할 수 있어도 에펠탑 없는 파리는 생각할 수 없는 랜드마크가 돼버렸습니다. 지금은 너무너무 파리시민의 사랑을 받는 말하자면 구조물이 된 것입니다. 왜 그래 이 20년 동안 매일 보면서 ‘에이씨, 제기랄’ 이렇게 욕을 했었는데 보니까 그리고 나서 이십 년 후에 투표를 하겠다는데 저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해 보니까 너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못하더라도 무릎을 자주 꿇는 게 좋은 게 뭐냐면 기도할 때는 최소한 하나님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생각하면서 생각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면 사랑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정서를 정서적으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개방하는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 생각이 나의 마음에까지 들어와서 나에게 사랑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책들은 많지 않습니다. EM 바운즈의 책 같이 이렇게 정곡을 찌르면서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펴줄 책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 정서적으로 여기 뜨겁게 다가오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의지입니다. 놀라운 것은 마음이 행동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의 감정이 뒤따라 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지성의 중에서 지성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의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야기하냐면 ‘일단 순종하면 지성이 밝아진다. (녹음 음질이 좋지 않아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의 은총이다.’ 생각 속에 계속 머무는 사람보다는 그냥 생각이 좀 모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하고 순종하는 것이 그거 자체가 믿음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지성을 맑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내가 목회자라면 목회를 그만두지 않는 한은 목회자의 사명은 이것이고, 내 직무는 이것이고 이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거기에 자기가 행위로서 참여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면 하나님이 그 삶을 우리에게 회복하게 해주십니다. 죄가 있으면 용서해 주시고 허물이 있으면 사해주시고 깨닫지 못하는 걸 깨닫게 하셔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이 다시 사랑하게 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제 다시 뒤로 돌아가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한 소원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없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걸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생각과 정서와 의지가 바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해보십시오. 기도하는데 주님이 오늘 밤에 나타나셔서 목회자로서 ‘요한아, 목회자로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 ‘글쎄, 그 뭐라 그럴까 되게 많이 있는데요.’ 그렇게 더듬겠습니까? 아니면 즉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가슴에 머무르니 한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아이를 살려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오셔서 ‘요한아, 목회자로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실 때 탁 튀어나올 소원이 의외로 없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원이 간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기도는 하는데 그것이 이 케이아스는 안 되는 것입니다. 패티션은 안 되는 것입니다. 서플리케이션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일반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소원이 없을 때 기도는 자꾸 일반화됩니다. 그래서 두리 뭉실해집니다. “성도를 평안하게 해 주시고 저의 오늘 하루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모든 일에 복을 주시옵소서. 머리가 될 때 꼬리가 되지 말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의미 없는 기도들을 계속 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원이 강력하면 그런 거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래 내가 일반적으로 너에게 복 주마”, “아니 그거 말고 우리 박 집사님 가족을 고쳐주시옵소서. 제가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나이다.”
제가 아이를 낳았잖습니까? 아이를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를 하면 통곡과 눈물이 나오고 교인을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하면 통곡과 눈물이 나옵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목회 사역이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매일매일 응답의 감격이 너무너무 가슴이 벅차도록 가슴이 시리도록 감동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놀랍게 응답해 주십니다. 정말 멀리 있는 줄만 알았는데 하나님의 도움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 응답에 더 뜨겁게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소원이 더 치열하게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천하는 화양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끌 수 없는 하늘 높이 어디까지 솟는 불이 되는 것입니다.
목성과 돌아다니는 운석이 충돌을 했습니다. 1993년도인가에 일이었습니다. 관측이 됐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불꽃이 일어났는데 그 길이가 1900km입니다. 그러니까 목성이 지구의 100만배입니다. 이렇게 길다는 게 막대기처럼 불꽃이 생깁니다. 그것이 충천하면 화염입니다. 무엇으로도 끌 수가 없습니다. 충천하면 화염과 같은 소원이 치솟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불꽃처럼 사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에서 모든 선지자들에게 그거 안 가진 사람은 그 책에서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설교자를 태웠던 불이고 그것이 바로 또 사도 바울이 마음속에 가졌던 김재현 박사가 이야기했던 실제적인 강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 없는데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화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된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그리스도를 떠나는 내가 너희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졌다라고 이야기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가 거룩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거룩해집니다. 그래서 주님만 사랑하게 됩니다. 옛날에 마음을 두드렸던 바운즈의 이야기는 아무리 좋아도 설교 본문도 사라지고 설교 제목도 사라지고 심지어 설교 내용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자의 모습은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 살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걸 말해주는 설교자를 통해서,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았던 것처럼 설교자를 통해서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서에서 이야기했던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도 또한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기 바랍니다. 교구에서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소원을 가지십시오. 기도하라고 성도들만 그냥 푸시하지 말고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매달려 보십시오. 그러면 성도들이 그 마음을 읽고 따라옵니다. 우리는 뭔가를 가지면 여기에 이렇게 들어가서 뭘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불로 튀어나와가지고 우리 기도합시다. 하나님 자신이 먼저 이 마음에 불 붙여져서 그래서 이것이 간절한 소원이 되게끔 이렇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에게 기도 시간의 의무를 지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잠깐 눈을 감고 기도하고 일어나면 두 시간이나 두 시간반 금방 지나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장시간의 기도를 하게 되는 거고 깊은 기도를 하게 되고 그 기도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어느 날 설교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