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1._고신대섬김의날
고신대 섬김의 날
녹취자: 황인준
성막은 직사각형으로 된 텐트였습니다. 큰 방은 약 열두 평, 작은 방은 여섯 평짜리로 되어 있고 주위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습니다. 이것을 성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해 주신 양식대로 제작이 되었고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앞에 열두 평짜리 방을 성소라고 부르고, 뒤에 여섯 평짜리 방을 지성소라고 불렀고, 그 지성소는 일 년에 한 차례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해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바로 거기에서 등불을 밝히는 규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막의 제도를 계시해 주셨을 때, 놀랍게도 이 성막을 물돼지 가죽으로 지붕을 얹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창문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아주 캄캄합니다. 처음 제작했을 때는 아주 깨끗하고 예뻤겠지만 수없이 바람과 햇빛을 맞으면서 오랜 세월이 지났을 때, 멀리서 본 그 성막의 모습은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해달의 가죽으로 덮은 천막이니 거무튀튀하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그 어떤 외모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과 대조적으로 성막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은 굉장히 화려해서 청색, 자색, 홍색 실과 다양한 양식으로 만든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그곳에서 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불빛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등잔불을 밝히는 규례를 여기에 적어놓은 것입니다.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일지 모르지만 왜 하나님이 몇 개의 창문을 널찍널찍하게 내놓아 주셔서 바깥에서 빛이 들어오게끔 하셔서 섬기게 하시질 않으시고, 빛이 일절 들어오지 않게끔 막으신 후, 오직 등잔불만 밝혀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는지 생각은 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추측과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저의 생각에는 나름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신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 태양 빛이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막의 등불을 밝히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이 빛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하나님이 가르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캄캄한 성막에 등잔불이 빛나고 있고 그 불빛을 힘입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목회자들, 교회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위탁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이 모든 지식의 빛. 빛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진리를 하나하나를 채집해서 자기 생각을 연결해서 자의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사실 진리의 빛들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연결했을 때, 참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일반 계시의 빛이든 혹은 특별 계시의 빛이든 그것이 학문을 통해서, 이성을 통해서 발견되는 자연적인 지식의 진리이든 영적이고 사변적인 진리든 모든 빛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안에는 이 세계에 대한 관념이 있으셨습니다. 시간상으로 따질 수는 없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 안에 있는 세계에 대한 관념이 세계의 탄생보다는 앞섭니다. 결국 하나님 안에 있는 관념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되게 했고 창조된 모든 세계의 지식은 하나님의 관념 안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지식의 범주를 벗어나서 창조될 수도 없고 유지되고 보존될 수도 없고 종말을 맞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관념 안에 있으니 결국 모든 지식의 근원은 칼빈이 말했듯이 오직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은 하나님 안에서 주님을 아는 지식을 발견하고 그 빛으로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교회와 모든 자연 만물들을 비추어보며 설명할 수 있는 학문이어야 하고, 참된 신앙은 모든 사물의 개별적인 지식을 통해서 모든 사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아는 대로 나아갈 때,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별자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모든 개별 사물을 해석하게 해주어 하나님이 누구시고 세계가 무엇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음으로써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되는 한 사람은 달변가일 수도 있고 유능한 행정가일 수도 있고 혹은 예술에 대해 아주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찬양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학문에 뛰어난 소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도 아닙니다.
오늘날, 감히 개척하겠다고 용기를 내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척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종종 말합니다. 개척의 비전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개척의 비전이라는 말은 좀 우스운 말입니다. 개척에 무슨 비전이 있겠습니까. 사명이니 하는 것일 겁니다. 그보다는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진리의 빛이 내 안에 있는가, 내가 이것을 어떻게 혼자 간직하고 살겠는가, 이 열정이 내 마음속에 너무나 커서 도저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목회의 소명입니다. 목회 소명의 가장 큰 근원은 목회를 지망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진리의 빛에 압도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어떤 식으로든 소명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명은 자기 자신 인생의 계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는 영광의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재작년에 작고하신 제임스 패커에 대해서 이야기 들으셨을 것입니다. 청교도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거장이었습니다. 그분이 쓴 책 중에서 500만권 이상이 팔린 책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의 첫 부분은 스펄전이라고 하는 영국 설교자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그가 설교 속에서 진술해내는 하나님에 관한 아주 아름다운 묘사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에 관해 이렇게 탁월한 진술을 할 수 있었던 설교자가 코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19~20세가량 된 젊은이였다니 무엇이 이 젊은이를 이런 탁월한 설교자로 만들었을지 거기에 대한 대답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히브리말로 ‘다트 엘로힘(da‘at Elohim)’입니다. ‘다트’는 ‘야다(yada)’라는 동사에서 나오고 ‘야다’라는 동사가 처음 쓰인 것이 ‘아담과 하와가 동침한다’에서 처음 쓰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한 관념은 그리스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에 대한 관념과 사뭇 달랐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의 관념은 아주 실천적이고 경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트 엘로힘(da‘at Elohim)’이라는 단어는 호세아 4장에서 ‘이 백성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그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원동력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에서도 후기에 가면 이 지식이 초기의 개념하고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지식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필로소피아()’라는 단어를 서방 교구들이 ’스끼엔띠아(Scientia)’라고 번역하면서부터 결정적으로 지혜의 개념이 오해되기 시작하고 근대 데카르트 이후로 수학과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모든 학문은 결국 수학에 따라서 설명되는 것이어야지만 학문이라고 할 정도로, 오죽했으면 ‘신이 사유한다고 할지라도 수학을 뺴놓고는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쪽으로 기울면서 사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고대 그리스 전통에서 나왔던 유서 깊은 지식에 대한 개념들이 변질이 되어 버리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진리의 빛이라고 할 때, 이것은 객관적으로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진리의 빛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의 빛은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완전히 인간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칸트 같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이 진리는 주관과 객관의 걸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비판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합리론과 경험론을 통합하면서 지식의 원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의 빛은 내가 인식하지 않는 한 그것이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진리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객관적으로 있는 진리이신 하나님이 있고 주관적으로 내가 그 진리를 받아들여서 그것이 내가 내면적으로 느끼는 진리에 대한 인식과 진리가 객관적으로 일치하면서 내 안에서 그것이 어떻게 인간으로서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알게 하는 지혜의 정수가 신학입니다. 그래서 마르틴루터가 결국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신학은 하나님 앞에 잘 사는 것. 그 자체가 신학입니다. 지식의 빛을 충만하게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 가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지식 없이는 진리가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공부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꾸준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벼슬을 못 하고 돌아가신 사람들의 심리를 쓸 때, 제사 지낼 때 있는 게 아무개 학생부군신위라고 합니다. 그 뜻은 평생 배우다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생 태어나자마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특별히 하나님 진리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 3년 동안 이 공부는 목사라는 면허를, 설교자라는 면허를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교육입니다. 이 3년을 통해서 앞으로 혼자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맛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교 3년 교육의 의미입니다. 이 공부해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여러분들이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책 읽기가 싫으세요? 아마 목사의 소명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목사는 책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모든 책 중에 한 책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한 책이 가운데에 있고 그 가운데를 수많은 책이 원을 그리며 에워싸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원을 크게 그리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좁게 그리는데 얼마나 멀리 나가서 원을 그리든지 그 모든 원은 항상 원의 중심점에 있는 성경과 연관 지어진 학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셔야 합니다. 저는 공부 안 하는 신학생들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후원을 많이 해주고 학생들의 복지를 증진하지만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오기 위해서는 일단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한 모든 사람이 진실한 목회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안 했던 사람이 진실한 목회자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일단 공부하고 봐야 합니다.
두 번째는 아무리 여러 가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는 그 지식이 진정한 지혜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의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의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주나이즘의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지식의 단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굳게 붙든 것은 겨우 조상 대대로 믿어온 유대교의 전통. 그거 하나밖에는 없었고 그것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차일(遮日)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눈의 비늘이 벗겨지게 됩니다. 영적인 눈의 비늘도 벗겨집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분을 만나면서 역사와 종교와 이 세계의 모든 의미가 찬란한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경험을 깊이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데 그는 예수가 죄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셨다면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고 하나님이 살리셨다면 하나님이 죽이실 리 없었는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대한 지성적인 큰 혼란을 느끼다 그 속에서 대속의 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분이 아니라는 것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으셨다는 사실이 바로 그 아들을 하나님이 살리셔야 했던 이유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캄캄한 마음에 찬란한 지식의 빛이 들어오면서 모든 세계와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불이 환하게 켜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눈에 모든 인류의 역사와 그 속에 펼쳐진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찬란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거기서 창조적으로 멀리 갈수록 흐려지고 종말적으로 갈수록 흐려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찬란한 빛 때문에 창조로부터 타락, 그리고 구속과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대구원 서사시가 역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교회의 의미가 드러나고 교회의 지체인 자신의 인생에 존재의 목적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신약 성경 전체의 절반을 저술하게 만든 사도 바울의 지성을 깨운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결코 우리에게 성경의 기록자로 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필요한 것은 주님을 깊이 만나라는 것입니다. 자꾸 나이가 들면 ‘나 때는’이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저는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한 학기 끝나면 무조건 기도원 들어가서 일주일 금식했습니다. 왜냐하면 여름 방학 때 들어가면 한 학기 묵은 때를 벗겨내고 성경학교를 위해서 금식하고 2학기 끝나고 들어가는 겨울 금식은 신년도 목회 사역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갈 길을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항상 당연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역자 중에서 ‘담임 목사님, 제가 아무래도 년 초에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 금식하고 와야 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라고 저에게 손들고 부탁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 기도를 안 하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뒷산도 좋은 곳이 많은데, 열렬한 기도 속에서 예수를 깊이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여러분 자신이 그 앎대로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실천에 달려 있습니다. 그 실천을 통해 자신이 일종의 실천 이성을 체득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실천해본 사람이 가장 잘 알게 됩니다.
두 번째로 이 등불의 빛이 그렇게 찬란할 때, 거기에 쓰인 등불을 밝히는 재료가 있었습니다. 기름이었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회자가 학자일 수도 있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제가 히브리 성경으로 읽다가 가슴이 벅찼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감람을 찌어낸 순결한 기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세맨 자이트 자크 까띠뜨’라고 나옵니다. ‘세맨’은 ‘기름’이고 ‘자이트’는 ‘감람’입니다. ‘자크’는 ‘순결하다(Pure)’라는 뜻이고 ‘까띠뜨’는 ‘까따뜨’의 수동분사 남성입니다. ‘까따뜨’는 ‘스트라이크’ 혹은 ‘Beat’ 혹은 ‘Brake(깨뜨리다)’의 뜻입니다. 이 뜻은 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감람요를 치료목적부터 건강, 식용, 제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올리브를 짜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연자맷돌 같은 곳에 잘 익은 올리브 열매를 쏟아놓고 연자맷돌을 돌립니다. 올리브가 부서지고 으깨져 질척한 상태가 됩니다. 그것을 프레스에 놓고 누릅니다. 그러면 많은 양의 기름이 나옵니다. 그 대신 그것은 순수하질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허드레 용도로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진짜 좋은 기름을 얻으려면 그렇게 빻습니다. 감람을 깨뜨리고 압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자맷돌 같은 것의 가장자리에 홈이 파여 있어서 그것들을 펼쳐놓으면 기울기가 있으므로 서서히 기름이 흐르게 됩니다. 그렇게 추출한 기름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소량을 추출하지만 아주 맑은 기름이 됩니다. 불순물이 섞인 것에 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나는데 순결한 기름은 그을음이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기름이 여기에 쓰이기 적합한 기름이 됩니다.
결국 신학에 있어 중요한 것은 개념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의해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마음속에서 생각 속에서 이성적인 개념으로 가지고 있는 일만 마디의 지식보다는 자기의 땀과 피가 묻어난 열 마디 진리의 말씀이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것입니다. 입으로 발화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의 귀에까지 다다르고 아주 뛰어나면 그의 머리에까지 다다르지만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씀은 그 사람의 마음에까지 다다라서 그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 깊이 깨뜨려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구가 있고 그 위에 수천수만 개의 인공위성이 돌고 있지만 지구를 떠난 뒤로는 한 번도 지구와 만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학교를 다니고 목회하고 공부하고 유학을 가지만 계속 주님의 주위를 맴돌 뿐 주님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 되어서는 그에게 어떤 깨어짐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한 설교자의 말이 짧은 말인데도 우리의 가슴을 깊이 울리기 위해서는 그 설교자에겐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 동안 그 말씀 앞에서 깨어지는 시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도 그것 없이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거룩한 웅변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그러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주일이나 이주 일 혹은 몇 주일에 한 번 정도는 성경을 읽다가 펑펑 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깨뜨려지는 경험 없이 어떻게 마음에 깊은 우물에서 진리의 물을 길어 올려서 사람들에게 먹여줄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다가 혹은 어떤 책을 읽다가 거기서 깊은 진리를 깨닫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자기가 너무너무 밉도록 자기 자신이 깨어져 본 경험이 언제 있었습니까?.
저는 최근 6개월 동안에 니체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전체적으로 그의 사상에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기독교를 뒤집은 그 사람의 사유 속에서 많은 통찰을 배우고 반성해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니체조차도 자기 깨어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아에는 병리적인 자아와 건강한 자아가 있는데 건강한 자아가 나를 지배하지 않고 수시로 이 병리적인 자아가 자신을 욕망으로 몰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때 단호하게 이것들을 거절하고 싸워서 이기는 자기 극복이 없이는 누구도 위버멘쉬를 꿈꿀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인간은 인간말종이 되는 길이라고 담론을 냅니다.
그렇게 무신론을 주장했던 철학자도 자기 깨어짐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자기 깨어짐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누구든지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여기서 말하는 것이 물리적 흔적이 아니라 자기 안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의 말씀을 외칠 때에 마치 그 진리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것처럼 설교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된다면 어디를 가서 교회를 세우던지 반드시 교회는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