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린 말씀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50)
녹취자: 이미란
시편 119편은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불립니다. 말씀에 대한 많은 깨달음을 받으면서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알리터레이션’이라고 해서 두음법을 사용하여 작시했습니다. 즉, 히브리어의 자음이 22개가 있는데 그것을 한 글자당 8줄씩 시작을 한 겁니다. 우리말로 하면 ‘가’로 시작하는 문장을 8절을 만들고 ‘나’로 시작하는 말을 8절로 만든 셈입니다. 이렇게 했던 이유는 아마 자기의 재주를 뽐내기보다는 사람들이 암송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라 추측이 됩니다.
지금 읽은 이 부분은 히브리어의 ‘자인’, 우리말로 하자면 ‘쯔인’입니다. 해당되는 글자 중에 두 번째 절입니다. ‘이것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육체와 정신을 모두 포함하는 괴로움입니다. 그 괴로움이 어디에서 옵니까? 죄에서 온다, 뭐에서 온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강조하기보다 무질서를 말합니다. 나만 질서를 잘 지키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야지만 평안함이 옵니다. 그런데 시인이 잘못한 적도 있지만 처처에 악인들이 이 질서를 무시하고 이 질서를 깨뜨립니다. 그러면 경건한 사람들도 고통을 받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고통을 당하셨는데 예수님의 죄 때문에 당한 고통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깨고 들어오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우리의 고통의 문제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나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행복은 나 한 사람만의 행복으로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단정한 삶을 살 때 나도 행복할 수 있고, 내가 고통받는 문제는 내 문제만이 아니라 이웃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바로 이런 개념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망에 대한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천지 창조와 구속의 목적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죄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거꾸로 역추적해보면 결국은 왜 그러면 한 사람이 아무리 행복하여지려고 애써도 결국은 혼자선 안 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입니다. 인간이 처음부터 이렇게 연대적인 관계 속에서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다”라는 말이 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이 씨가 되어서 모든 사람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네아마티’라고 하는데, ‘나함’이라는 동사에서 나왔는데 ‘긍휼히 여기다, 후회하다’ 등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겁니다.
어떤 분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를 평가하면서 여기서 자연인으로 살기로 한 사람들은 바로 정신적인 불구자들이다.”라고 깨끗이 딱 정리를 해버립니다. 뭐냐면 자연이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살 수 없어서 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살을 부딪치면서 함께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결국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살아오면서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어떻게 깨달았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연 숲속을 거닐면서 자신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 숲속을 거닐면서 사람들과 있었던 일을 생각할 때 자기가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뭔가 자기 생각을 바꾸고 변화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영원히 진리입니다. “나의 스승은 사회다. 나의 스승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거울처럼 말입니다. 백운사에 올라가면 대웅전에 기둥에 네 개가 있습니다. 그중에 세 번째 기둥에 뭐라고 쓰여 있냐면 “세상 속에 있는 네가 너다”입니다. 무슨 의미냐면 ‘혼자 참선하고 있는 니가 아니라 사람 속에 있는 니가 너다.’ 그 사람들에게 비친 네가 바로 네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번쩍하는 어떤 성찰이 들어옵니다. 그게 기독교에서 가지고 있는 생각과 너무나 유사합니다.
그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고통이 무슨 고통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매우 큰 괴로움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그런 고통을 받을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모든 게 필요할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면 고통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결국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리고 고통은 결국은 올바르지 않은 질서 속에 있는 것이 올바른 질서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정상적이 아닌 일이 내게 일어났구나,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위치에 내가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다시 그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는 한 그가 그 질서를 떠나간다면 반드시 고통이 따르고 그 고통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설득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이 물처럼 녹고 그랬던 때가 모두 다 공통으로 고통을 받던 때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구름처럼 둥둥 뛰어주시던 그때 나를 고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 속에 시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위로입니다’ ‘이것’은 앞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위로입니다.’ 이 위로는 그냥 세상 사람들로부터 흔히 받을 수 있는 따위에 위로가 아닙니다. 바로 하늘의 위로입니다. 땅의 위로가 너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게 우리의 외로움을 덜어주잖아요. 근데 먹어도 먹어도 목마름이 해소되지 않는 설탕물 같습니다. 우리가 지체들을 위로하지만 우리는 위로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함으로써 결국은 궁극적인 위로자인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할 때도 아주 겸손해져야 합니다. 나 자신이 이 사람을 시여하듯이 내가 위로하고 이것을 통해서 내가 영혼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하는 것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지난번에 만난 사람인데 런선 시티미션의 바이스디렉터입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비디오 편지가 왔습니다. 이태원에 있었던 소위 스탠피드 압사 사건에 대해서 쭉 이야기하면서 너무 마음 아파하는 편지를 보낸 겁니다. 그리고 닷새 동안 정신없이 바빠서 집회 다니고 그러다가 돌아와서 저도 비디오로 촬영해서 보냈습니다. 이에 답장이 왔는데 내가 아니라 김성태 선교사한테 보내서 나한테 왔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위로를 느낀다.” 무슨 뜻이냐면 자기를 그것을 보낼 때 답장이 오리라 생각을 안 했는데 답장을 보내줘서 정말 고마운데, 고마운 게 나는 김목사님을 통해서 온 게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나에게 위로를 주시는 것 같다는 뜻입니다. 그게 위로에 대한 진정한 신학적 태도입니다.
우리가 위로하다 보면 항상 우리에게 언감생심, 내가 이 사람을 위로한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우월한 위치에서 내가 누구에게 뭘 베풀어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다. 그리고 내가 위로하는 이것이 저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해주는 도구가 될 뿐이다.’ 그 생각을 항상 겸손하게 가지고 사람들을 위로해야 하는 겁니다. 이 시인의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는 위로였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는가 궁금해집니다. 김수민 강도사, 본문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되었을까요? (대답) “살렸기 때문에…”
그래서 ‘키 이메라테카 히야테니’ 라고 했습니다. ‘이메라테카’는 ‘아마르’라는 동사에 온 겁니다. 이는 ‘말’입니다. ‘다바르’와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다바르’는 반드시 발화한 말, 소리를 내서 공기를 울려 퍼져서 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아마르’는 훨씬 광범위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와이요메르에 엘로힘 에히오르’ -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셨다’ 누구에게 말씀하신 겁니까? 언어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는데 누구에게 말씀하신 겁니까? ‘다바르’는 발화한 말이고 ‘아마르’는 생각(Thinking)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한 의미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이마레테카’라는 말은 당신의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무슨 소리가 나서 들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어떤 생각이 시인의 마음을 깊이 감동을 준 겁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다가 명백하게 요한복음 1장 3절에서 은혜를 받을 때도 있지만, 조용히 생각하다 보면 성경에 어디에 나와 있는지를 모르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은혜를 받는 때 없습니까? 말하자면 기록된 말씀과 하나님의 사유 속에 있는 모든 말씀을 모두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단수입니다.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의 어떤 하나님의 생각이 시인의 마음을 깊이 파고든 것입니다. 그랬더니 ‘히야테미’ 그것이 나를 살렸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살리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는 것이 마지막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살렸다고 할 때 이것이 시인이 계속해서 말씀과 자신의 영혼, 삶에 대해서 통전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결국은 이 구절을 놓고 보면 하나님이 살리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생각이 시인을 살리셨는데 그 살리시기 전에 시인의 영혼은 죽은 상태에 있었던 것이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인을 살려내셨다는 겁니다. 이 동사는 PL형 동사로 나옵니다. 그래서 ‘그냥 산다’가 아니라 ‘확 살려내다’라는 강의형 동사로 나옵니다. 점하나 찍힌 것이 그 차이를 나타냅니다. 죄를 지어도 ‘하타’라고 하는데 거기에 점을 하나 더 찍으면 죄짓는 게 인격의 특징이 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PL의 점 하나가 그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살려내는 것이 얼마나 드라마틱했는가를 보여줍니다.
불이 붙으면 그냥 연기가 막 나는 가운데 간신히 붙는 불이 있고 휙 던지면 확 하고 붙는 불이 있습니다. 불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붙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폭발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폭발하듯이 확 하고 불이 붙어 버리는 경험을, 살려지는 경험을 이 시인이 한 겁니다. 그러면 그의 영혼은 그 전에 어떻다는 걸까요? 영혼이 죽어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살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의 죽음은 뭘까요? 육체의 죽음하고는 다릅니다. 생명의 기운이 없고 힘이 없고 선한 일을 할 수가 없고, 그렇게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바로 피골이 상접해서 빼빼 말라서 뭐 하나 들고 있을 힘이 없습니다. 살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가리켜서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우리는 이렇게 말하죠.
그런 의미로 영혼을 생각하면 똑같은 겁니다. 너무 고통을 받고 혹은 죄 때문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영혼이 그로기상태에 들어 있어서 선한 일을 위해 분발할 수도 없고 올바른 일을 지탱해나 나갈 수도 없고 의를 행하면서 박해받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견딜힘조차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살면서 번 아웃을 경험하거나 하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우울증의 전조입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모든 게 싫어집니다. 그래서 가족을 여의거나 남편을 여의거나 하는 사람들의 공통 심리가 뭐냐면 몇 달 동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게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 에너지를 이 안에서 끌어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죽은 상태입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었는데 하나님이 한 말씀이 자기를 어느 한순간에 확 하고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꽃을 선물해도 기분이 좋고 아니면 펜을 선물해도 기분이 좋고 먹을 걸 선물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자신의 생명을 살려낸 의사가 준 생명이라는 선물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말은 뭐냐면 목회는 영혼을 돌보는 것은 자기의 경험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무 경험이나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죽은 영혼을 살려내서 그 말씀이 나에게 넘치는 위로가 되었는지를 간증하는 것, 그것을 더 잘 조직화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 그리고 내가 경험한 그 위로를 그도 경험하게 만드는 것 그게 목회입니다. 목양입니다. 그러니까 목양을 하는 사람의, 하나님을 끊임없이 섬기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때문에 자신이 가는 길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가 강한 사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이란 표현을 쓰는 겁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그렇게 주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