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설교자가 되어가는가
녹취자: 김경애, 백지영
제가 교회에서 과외를 계속 받았습니다. 제가 이 나이에 대학을 편입할 수 없으니까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순수하게 제 사비로 천문학, 물리학, 의학, 생물학, 심리학 등등을 공부했는데 그때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선생님이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천문학은 아는데 천문학의 의미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분은 천문학을 가르쳐 주고 나는 신학을 가르쳐 주면서 1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독수리 성운을 보면서 어느 한순간 인간의 몸과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를 보면서 6개월 동안을 거룩한 경이로움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하늘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느끼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감동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여러분들에게 어느 정도 어필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저에게는 일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고 그 이전부터도 그랬지만 모든 세계 전체가 칼빈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극장입니다. 아는 사람만큼 즐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퀴나스의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시간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관념이 먼저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관념이 먼저 있고 그 관념에서 그 관념을 따라서 세계의 창조가 실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창조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관념과 연결이 되고 하나님의 관념은 당연히 하나니까 통일성이 있습니다. 중구난방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하나가 서로 연결된 것들을 연결된 가운데 이 세계에 모든 것들이 창조되고 그것들은 서로 상호 교통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Communication이라고 하는데 서로 상호 교통하면서 미학적으로, 역학적으로, 존재론적으로 그것들이 전부 다 아주 아름다운 구조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을 공부할 때 유의해야 합니다. 신학 하나만 공부하면 고집쟁이 비슷하게 되고 소위 이야기하는 삶의 렐레만시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어떻게? 신학은 뭔가를 주장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연결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제일 못하는 것이 전도설교입니다. 이것은 진짜 딜레마입니다.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 한 명도 없이 완벽하게 불신자로 예배당이 꽉 찼을 때 가장 당혹스러운 사람은 목사입니다. 이 훈련이 안 되어있는 것입니다. 안 되었다는 것은 설교를 못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평소에 교인들에게 그렇게 유창하게 설교하던 사람이 불신자를 놓고 설교할 때는 설교가 안되는 것입니다. 또 예전처럼 하면 신자에게 하듯 설교하면 불신자들은 용어부터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따로 떨어져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래의 신학의 전통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신학의 전통은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신학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초기 태어날 때부터 생각해보면 아무도 기독교인이 없습니다. 최초의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예수가 최초의 기독교인이자 마지막 기독교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기독교인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모두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말씀의 사역자가 된다는 것 자체는 불신자에게 설교하기 위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교회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어떤 문제가 생겨나느냐 하면 예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설교의 Need와 예수를 이미 믿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의 설교의 Need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선교지에 가보면 대부분의 선교지에서 제가 공통으로 큰 난점을 느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전도의 열정에 불타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고, 할렐루야! 예수 구원을 계속 설교하는데 그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꽤 많은 수가 모였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설교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대단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C.H Dodd라는 신학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Apostolic Preaching and Development라는 아주 유명한 고전과 같은 책입니다. ‘사도들의 설교와 발전’이라는 것인데 오래된 신학자입니다. C.H Dodd의 의견을 내가 완벽하게 모두 다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합니다. 그것은 설교를 Kerygma와 Didache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비신자를 향하여는 Kerygma의 설교였고 Kerygma라는 것은 케릭스 ‘선포하다’ 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직선적으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죄인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너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부활하셨다.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런 이야기들이 기독교의 근본진리들인 Kerygma입니다. 이것은 비신자를 향한 설교이고 이미 신자가 된 사람들은 이것에 충분히 동의하고, 알고,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Didache의 설교라고 본 것입니다. Didache는 디다스코라는 그리스어 동사인 ‘가르치다’ 에서 온 것인데 어떻게 나뉘느냐 하면 Kerygma는 기독교의 근본진리에 대한 선포이고 Didache는 그것에 기초한 가르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처음에는 가슴에 확 와닿았고 아까 제가 제기했던 문제들에 대한 훌륭한 답이 되었는데 실제로 신약성경에 들어가서 내가 조사를 해보니까 이 C.H Dadd의 이야기가 꼭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개념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래서 C.H Dadd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이렇게 잘라져서 이쪽은 비신자용 복음인 Kerygma의 설교, 신자용인 Didache의 내용은 윤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리와 복음을 갈라놓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것이 쌈박한 설명처럼 다가오는데 이것이 진짜인가 하고 신약성경을 조사해보았습니다. 특히 이것을 조사할 때 복음서를 조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사실은 교회라는 공동체가 제대로 성립되어서 Setting 된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고 나서입니다. 우리가 제도적인 교회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그 Setting을 가지고 그때를 기준으로 해서 성경을 낱낱이 살펴보니까 Dodd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은 어느 학자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조사해본 것입니다. 물론 C.H Dodd의 논리를 가지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사해보니까 이것은 C.H Dodd가 말한 것처럼 이렇게 횡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이것은 마치 커다란 밧줄 두 개를 합쳐서 꽈배기를 꼬듯이 돌아가는 것이 Kerygma와 Didache의 구조입니다.
엊그제도 목회자들이 모였는데 다 대단하신 분들이 모였는데 그 가운데 ‘복음만 설교하니까 힘이 없더라 그래서 복음을 설교한 다음에는 반드시 윤리를 설교해야 한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한 목사님이 ‘나는 생각이 다르다. 복음이 이미 윤리를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설교하고 이후에 윤리를 설교해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복음이 이미 그 안에 윤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윤리를 따로 설교해야 할 정도로 복음을 설교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복음을 설교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잠깐 논쟁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두 가지가 딱 횡으로 갈라지거나 혹은 밑에는 Kerygma 위에는 Didache 이런 식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가 서로 엮이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성경도 저기에 두고 왔고 그냥 Free 하게 강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5장을 펼치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생축과 제물이 되셨느니라.’ Kerygma입니까? Didache입니까? Kerygma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Kerygma입니까? Didache입니까? Didache입니다. 그 뒤에 똑같이 반복해서 ‘예수 죽으셨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생축과 제물로 드리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사랑해라.’ 그다음부터는 계속해서 Didache로만 이어지느냐 하면 아닙니다. 또 Kerygma가 나오고 Didache가 나오면서 마치 샌드위치 위에 샌드위치로 계속 사이에 들어가듯이 그렇게 성경이 꽈배기처럼 되어 흘러 들어가는 것이 성경의 구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오늘의 강의에서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꾸 목회자의 윤리적인 삶에 대해서 공격받습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못 하면 ‘설교도 못 하는 것이 사는 것도 개떡 같다.’고 욕을 하고, 설교를 잘하면 ‘입만 살아있지, 사는 것은 거지 같다.’고 공격하고, 그리고 둘 다 못하면 ‘아니 둘 다 못하는 주제에...’라고 공격하니까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지탄을 하거나 그럴 때 좋은 청취자가 되어야 합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미워하는 사람의 이야기 속에 진실이 더 많이 담겨있다.’ 사랑하면 그것이 선입견이 되어서 잘못을 그냥 못 봅니다. 못 보거나 아니면 그냥 눈감아 줍니다. 그런데 우리를 미워하면 미워하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지 않은 것도 잘못했다고 뒤집어씌우는 경우도 있지만 에누리 없이 직접 공격하기 때문에 어떤 진실 즉 Fact가 숨김없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공격을 받을 때 그것을 아주 신중하고 겸손한 청취자가 되어서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어거스틴도 자기의 고백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명예욕에 관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120번을 읽었으니까 거의 외웠는데 ‘혹 어떤 사람이 나를 혹평할라치면 나는 그 사람이 무엇인가 저 사람은 잘 모르기 때문에 나를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하고, 누군가가 나를 칭찬해주면 싹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 마음이옵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담백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그대로 듣습니다. 그 대신 휘둘리는 것은 안 됩니다. 요즘은 너무 기독교가 언론과 사회에 편해 되어서 예민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그렇게 예민했으면 이미 다른 목회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신문과 방송에 잘 보이기 위해서 재롱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 들 때는 너무 슬픔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윤리적인 삶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조금 있다가 본론을 말씀드리겠지만 거룩함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에게 있어서 윤리라는 것은 거룩함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과 동떨어진 열매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 루이스 베르콥이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영적인 선 즉 Spiritual Goodness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선을 상실한 윤리의 대표적인 본보기가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에게 아주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나빠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이라 하느냐 하면 저들의 마음은 본받지 말고 행위는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유감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윤리라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부터 한 원천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프랑스어판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라비비엔 오흐돈니’라고 프랑스어로 씁니다. ‘라비비엔 오흐돈니’ 번역하면 ‘오흐돈니’는 분사입니다. 그래서 ‘오흐네이티드’라는 뜻입니다. 질서 지워진 선한 삶입니다. 그러면 질서가 지워졌다는 표징이 있을 것 아닙니까? 군대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싶을 때 제일 먼저 무엇을 합니까? ‘기준!’ 그러지 않습니까? ‘기준!’ 그러면 그 한 사람을 중심으로 좌우로 정렬을 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점이 없으면 질서도 없습니다. 그 기준점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저는 신학적으로 오늘날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기독교를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김용옥 씨가 쓴 책 가운데 ‘사랑하지 말자’ 라는 책을 읽어보신 분 계십니까? 한번 읽어보십시오. 저는 그 책을 창가에 서서 한 권을 다 읽었습니다.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200페이지 넘는 책인데 제목이 ‘사랑하지 말자’라는 책인데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진짜 그의 사상은 동의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글쟁이입니다. 한 단락을 읽으면 한 페이지를 안 읽을 수 없고, 한 페이지를 읽으면 한 Chapter 안 읽을 수 없고, 한 Chapter를 읽으면 그다음 Chapter를 읽어야 합니다. 창가에 서서 한 권을 완독했습니다. 내려놓으면서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이 김용옥 씨가 결국 기독교는 사랑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개뿔 사랑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것을 보면서 그때는 이미 내가 아우구스투누스를 깊이 들어가면서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들을 체득하고 난 다음인데 ‘야 도올 선생! 당신은 있지도 않은 것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서 무차별 포격을 가했는데 그것은 사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것은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이 아니라 기독교를 잘못 배운 사람들이 전파하고 보여준 사랑이었는데 그것을 공격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잘못 믿은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오류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회가 되어 한번 만나면 기독교의 사랑이 무엇인지 내가 가르치고 나면 당신은 반드시 ‘우리 사랑하지 말자’ 라는 책이 아니라 ‘그러면 사랑해야겠구나!’ 라는 책을 당신이 다시 쓸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재미있습니까? 이렇게 아무것도 안 가지고 올 때 재미있습니다. 원고를 가지고 하는 것보다 재미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러면 Kerygma하고 윤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보면 모든 Kerygma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Kerygma 심지어 ‘너는 멸망 당할 것이다.’ 라는 Kerygma도 사랑이 없으면 그냥 통보 없이 정리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랑하시기 때문에 멸망 당한다고 경고하시는 이유는 돌이킬 기회를 주시니까 모든 Kerygma는 사랑이 반영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 Kerygma 없이는 사실 Didache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모든 Didache는 그 속에 Kerygma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두 가지가 함께 같이 섞여가는 것입니다. 참다운 윤리적 교훈을 말하기 위해서는 Kerygma를 말하지 않을 수 없고 Kerygma를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된 윤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들을 때에는 ‘아! 첫 번째 대지는 Kerygma이고 두 번째 대지는 Didache구나!’ 가 아니라 끊임없이 ‘예수가 우리를 위해 생축과 제물로 자기 자신을 바치셨구나!’ 하는 눈물 어린 감격 속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감격을 갖게하게 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칼빈의 괄목할만한 근대의 칼빈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 Thomas Henry Parker라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쓴 ‘칼빈의 설교’라는 책을 보면 한 30년 되었는데 제가 그 책을 번역했는데 구할 수 있으면 구해서 읽어보십시오. 아주 Excellent 한 책입니다. 칼빈이 자신의 설교 속에서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설교에 있어서 Familiarity 즉 친밀성입니다. 그러면 그 친밀성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자기가 경험을 직접 한 이야기는 언제나 전달할 때 심지어 말이 어눌해도 Familiarity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자신의 마음 사이에 친밀성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추장사를 불러서 배추 이야기를 물어보면 원고가 필요 없습니다. 무슨 원고가 필요하겠습니까? 배추 이야기를 하면 실감 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낚시꾼에게 반도체에 대해서 물어보면 원고를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런데 낚시꾼에게 고기 잡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이야기하는 순간에 이 사람 앞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릴이 던져집니다. 200kg짜리, 300kg짜리 참치하고 10시간, 12시간을 씨름하는 광경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한없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놀라운 것은 시종일관 Familiarity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친밀하게 Fact와 Story 사이에 간격이 없이 일치된 가운데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는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경험한 이야기도 아니고 경험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가끔 강의 요청이 들어옵니다. 시간이 있습니다. 갈 수 있는 시간도 있고 강의할 용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제가 지금 내 관심사를 떠났습니다. 그 사람은 옛날의 내 책 중 무엇인가를 읽거나 아니면 감동 받고 그것을 Revival 해주기를 바라면서 나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No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옛날에 내가 열정적으로 쏟았던 주제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최근의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주제는 책에는 없습니다. 책은 이미 다 과거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기쁜 소식을 드리겠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에 제 새 책이 나왔습니다. ‘깊이 읽는 주기도문’에 이어서 ‘깊이 읽는 여덟 가지 복’이 나왔습니다. 아주 예쁘게 양장본으로 나왔는데 오늘 한 권씩 모두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책을 손에 쥐시면 기독교 책 가운데 이렇게 예쁘게 만든 책을 못 봤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기술로 만들었습니다. 그 대신 의무가 있습니다. 모두 블로그에 글을 올리시든지 서평에 글을 올리십시오. 그러면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제가 한 권씩 더 드리겠습니다. 똑똑한 주최 측에서는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책은 이미 관심이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들의 최근 학설은 써낸 저서에 있지 않습니다. 가장 최근의 학설은 강의안에 있고 그것도 Update가 안된 것입니다. 가장 Update 된 학문에 대한 정보는 이 안에 있고 강의실에서 사이 사이에 터져 나오는 이야기 속에 최근의 그의 관심사인 정보가 묻어있습니다. 그래서 똑똑한 주최 측에서는 강의를 요청하기 전에 부지런히 인터넷으로 들어와서 내 세미나와 강의한 것을 보면서 최근에 김 목사의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찾아냅니다. 그랬더니 몇 년 전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수업을 하는데 어거스틴에 대해서 강의해달라고 철학 쪽에서 요청이 왔습니다. 내가 안 갔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예의가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달 반을 남겨놓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강의가 뭐 슈퍼에서 물건 사는 것이냐? 최소한 4개월은 남겨놓고 부탁해야지... 어떻게 한 달 반을 남겨놓고 요청하느냐? 나는 갈 수 있지만 안 간다고 그래라.’ 무엇을 가지고 강의하느냐?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 두 왕국에 관해서 이야기해달라고 하는데 내가 예루살렘과 바벨론에 대해서 강의를 못 하겠습니까? 그런데 안 간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그것을 찾아서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Catch 해서 오라는 데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나는 다른 스케줄을 Cancel 하고라도 갑니다. 왜? 그때 내 마음속에 말하고 싶은 열정이 있으니까 갑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고 싶은지 아십니까?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절대 설교 안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본인이 전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설교하면 만날 기도하라고 설교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기도만 하고 다른 것은 안 하는 사람입니다. 또 죽어도 성경만 읽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만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는 어때야 합니까? 그것이 모두 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설교는 전공이 없습니다. ‘나는 전도설교 전공이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것은 디모데서에 의하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그것은 전도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완전한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성경을 주신 목적과 설교를 하게 하신 목적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종속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설교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이바지하는 방식으로 설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선한 일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마치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된 자라.’ 라고 할 때 그 선입니다. 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시간이 한없이 가지만 어쨌든 그 선입니다. ‘보넘’ 혹은 ‘보니따스’ 혹은 ‘토브’ 혹은 ‘아가도스’입니다. 그 선은 결국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있게 하고 싶으셨던 그 상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천적인 선입니다. 그것의 성격 자체가 총 포괄적입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 걸쳐서 설교해야 하는데 삶의 모든 방면에 걸쳐서 설교할 때 그 모든 방면의 설교가 모두 Familiarity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요약되느냐 하면 존 오웬이 목회자론에서 이야기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사람이 설교하는 대로 순종했을 때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를 볼 수 있도록 육화하기 위해서 사람을 설교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존 오웬의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목회자를 세운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훨씬 더 완벽한 천사를 세우셔서 말씀을 수종 들게 하지 않으시고 똑같이 연약한 형제 중 우리를 불러서 목회자가 되게 하셨을까? 그 이유가 똑같이 하나님이 그렇게 연약한 자를 말씀으로 어떻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게 하고 디모데서에 의하면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런 완전한 사람.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Perfect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무결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랄 수 없이 키가 다 큰 사람. 보통 일반적으로 고등학교 2학년쯤 되면 다 커서 더 이상 안 큽니다. 그렇게 다 자란 Full Grown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게 하고 또 모든 선한 일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그것을 볼 때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이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는데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호소력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영상을 보여주면서 나레이션까지 함께 던져주는 것이 호소력이 있겠습니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림을 보면서 영상을 보면서 나레이션이 함께 나오면 그러면 놀라운 감동이 주어집니다. 설교자를 그렇게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천사가 아닌 사람을 설교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또 다른 유익이 무엇이냐 하면 설교자가 완전한 사람이냐 하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진짜 저 사람은 좀 설교단에서 사라지면 기독교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그런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 우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칼빈이 진짜 목회자적인 심성을 보여줍니다. 오웬은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안 합니다. 그런데 칼빈은 따뜻하게 감싸면서 이야기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설교자 자신이 부족한데 완전한 것을 보여주는 것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모자라던 사람이 점점 더 완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 최고의 교육이고 죄인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대목에서 교인들은 '아멘'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 교인을 만났는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기 목사님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그 칭찬의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프라이드를 타고 다니신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벤츠를 타고 다닙니다.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아주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목회자를 세우신 목적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숙케 하시는 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송할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칼빈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인데 불완전한 목회자를 세우신 것이 교회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성인 숭배 사상에 빠집니다. 그런데 너무 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그를 꽉 붙들어 주시도록 매일매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연합의 힘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Jeremy Taylor라는 사람이 자기의 책 속에서 청교도 후기 사람인데 Jeremy Taylor가 이야기하는데 신자의 가장 큰 의무 중 하나를 이야기하면서 Scrutiny라는 단어를 씁니다. Scrutiny는 Scrutinize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Scrutiny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정사입니다. 꼼꼼할 정자에다가 살펴볼 사자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미래를 생각하라. 비전을 보여라.’ 라고 이야기하는데 Jeremy Taylor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살아온 삶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삶에 대한 반성이 없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은 대부분 허황하거나 자기 영예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꼼꼼히 정사하는 것입니다. 조지 휫필드도 자기 점검표가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점검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점검표가 ‘나는 오늘도 열렬히 기도했는가?’ Fervently. 그렇게 기도했는가? 그중에 여러 가지가 나오는데 20가지 정도 나오는데 그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나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붙임성 있게 행동했는가?’ ‘나는 오늘 하루도 연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가?’ 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똑같은 삶의 지침과 반성을 요한 웨슬레도 9가지를 가지고 매일매일 반성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기독교 전통에서 적어도 근대 이전까지는 자신이 산 삶을 매 순간 반성하고 정사하는 그것이 기독교인의 기본적인 삶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동양에서 ‘일일삼성이면 그 마음은 명경지수일 것이다.’ 라고 합니다. 삼성은 무엇이냐 하면 하루에 세 번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은 물이 흔들리지 않는 거울과 같을 것이다. 물이 흔들리지 않으면 거울과 똑같아서 굳이 풍경을 보지 않아도 물 위에 풍경화가 보입니다. 이것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 물을 보아서는 풍경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사의 삶입니다.
최근에 홍정길 목사님이 인터뷰하셨는데 ‘교계가 이렇게 개판인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지막 희망은 그저 목사들이 예수 잘 믿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습니다.’라고 담백하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조건 안 믿어지는 것을 쌍시옷 발음을 하면서 ‘믿싸옵니다.’를 외치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기준과 자기의 삶을 대조하면서 어느 것이 잘못된 삶인지 어떤 것이 합당한 삶인지를 생각하면서 합당한 삶은 그것이 자기 안에 있는 Habitus 제2의 본성이 되도록 노력하고 또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은 끊임없이 거기서 어긋나려고 하는 자신의 Habitus 본성을 두드리고 깨서 새로운 본성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의 윤리 편에서 이야기합니다. 뭐냐 하면 ‘어떻게 행동해야겠느냐를 판단할 때 심사숙고해라. 그리고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이것이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는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가? 그다음에 이성에 부합하는가를 생각하고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을 이렇게 판단을 내리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끝나고 나서 교수님이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데 ‘내가 이 밥을 먹어야 하는가?’ 들어갔는데 메뉴판을 보고 ‘이렇게 비싼 것을 내가 먹어도 되는가?’ 이런 것을 심사숙고하면서 결정하기까지 30분을 기다리게 해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 엄정한 지성의 판단을 내리면서 그것이 몸에 배어서 굳이 여기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그 상황에 판단을 반영하는 행동이 나오게끔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습관이 된 덕입니다. 그것이 Habitus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헥시스가 그것입니다. 그 Habitus나 헥시스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퀴즈 하나를 내겠습니다. 태어나서 머리를 빡빡 깎았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밤 가시처럼 자랍니다. 멋을 부리려고 머리를 계속 이쪽으로 쓰다듬었습니다. 그랬더니 머리가 이렇게 기울어졌습니다. 퀴즈를 내겠습니다. 그 사람이 머리를 빡빡 밀었습니다. 내버려 두었습니다. 머리는 옛날처럼 밤 가시처럼 똑바로 올라오겠습니까? 이쪽으로 쓰러져서 올라오겠습니까? 1번입니까? 2번입니까? 2번입니다. 이 모근이 이것을 기억하면서 헥시스가 된 것입니다. 헥시스는 반복적인 실천으로 이루어진 말하자면 성질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진정한 윤리 속에서 살아가는 힘입니다. 그때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성화의 가장 높은 최종적인 단계는 뭐냐 하면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준칙들이 자기도 너무나 행하기에 기쁜 일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살기를 바라시지 않는 그 일이 자신이 너무 하기 싫은 혐오스러운 일이 되도록 자기의 성품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경건한 생활, 거룩한 생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윤리적인 삶을 살면 사람은 도덕을 생각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면 하나님을 묻기 시작합니다. 이해되십니까? 그것이 오늘날 오가고 있는 윤리논쟁에 대한 성경에서 말하는 답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의 가장 중요한 주제 하나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은 크게 Kerygma와 Didache의 문제, Familiarity의 문제, 거룩함과 윤리의 문제 등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어느 한 분야가 아니라 모든 방면에 대해서 Familiarity를 가지고 설교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는데 어떻게 왼쪽 맨 끝부터 시작해서 오른쪽 맨 끝에 있는 360도 모든 시야에 들어오는 삶을 뭐든지 이야기할 때 Familiarity를 가지고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사람의 평소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이 모든 방면에서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나타내라고 했습니다. 그때의 ‘모든 방면’이 지금 이야기하는 All Direction of Life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은 목회자가 아닌 한 성도로서 결국 실제적인 삶의 목표는 자신의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거의 외우다시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는데 그 영광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기독교에서는 하여튼 많이 쓰는 용어일수록 의미를 잘 모르고 씁니다. 영광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청교도 신학자들은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는데 나는 세 가지로 나눕니다. 영광을.
첫째가 뭐냐 하면, 본질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압도하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영광은 성경에서 그냥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퍼키저라는 신학자가 자기의 책 속에서 영광에 대해서 부정신학적인 데피니션(definition)을 내립니다. 부정신학 아십니까?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이 있는데, 긍정신학은 뭐냐 하면 “아버지는 모든 것을 준다, 아버지는 남자다.” 이런 것들이 긍정신학이라면, 부정신학은 “아버지는 애들을 때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자기재산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식의 것을 우리는 부정신학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해서는 사실은 그 데피니션을 내릴 때 하나님과 유사한 것이 있어야지만 긍정 신학적으로 답을 하는데 하나님과 유사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이라고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에 아닌 것들을 계속 깎아내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더 명료해지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부정 신학적 방식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정 신학적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영광은 너무 찬란해서 그것 이외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영광이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발산적인 영광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나 안 계신 곳이 없고 또 어떻게 보면 아무데도 계신 분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어느 특정한 장소를 지정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당신이 장소를 지정하여 거기에 계신 것처럼 효과를 나타내 보여 주십니다. 그게 대표적인 게 모세의 가시떨기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 그리고 성막 위에서 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 불이 내려와서 갈멜산의 장작들을 태워버린다든지 하는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 불 자체가, 구름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그 특정한 장소에 당신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임재라고 이야기하고, 이 임재를 히브리어로 ‘쉐키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가지 용례 이외에 마지막 세 번째 용례가 있는데, 이게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 영광과 관련되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는 영광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이펙티브 글로리(effective glory)라고 하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한 달도 살지를 않았으니까 영어를 하기는 하지만 깊은 뜻은 모르는데, 어쨌든 “I adore you.", 정식으로 말하면 “나는 당신을 찬송한다." 그런 뜻, “찬양한다." 그런 뜻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인정한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인정한다." 그러니까 똑같이, 그 세 번째 범주에 해당하는 영광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영광을 돌릴지어다."라고 하는 그것이 이렇게 돌린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에 영광스러운 분이시고, 피조물들이 그것을 인정하든지 안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항상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항상 영광스러운 분이시지만 그 영광이 거울처럼 인간 세상에 투영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번에도 제임스 망원경이 떠가지고 허블망원경보다도 백배나 더 아주 생생한 과정을 보게 하셨지 않습니까? 보게 하셨는데, 그것이 결국은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혼자 보시던 우주를 모든 인간이 보면서 ‘와!’하고 감탄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못 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자체를 보고서도, 아름다운 것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데,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그 영광을 누리지만 그것을 지성으로 이해하고 반응을 하면서 “그 영광이 주님께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라고 부복할 수 있는 피조물은 인간과 천사 이외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인간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 혹은 천사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가리켜서 영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그 영광이 아주 아름답게 이루어진 것이 그게 천국이고, 천국은 그 영광이 점점 증진해 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돼도 영광은 거기서 멈추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 세상에 천국이 임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속 증진을 하는 것입니다. 매순간마다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새로운 속성과 본질을 보면서 그분을 한없이 경배하게 되는데 매순간 순간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천국의 쾌락은 지성적인 쾌락인 것입니다. 그것을 삶의 모든 방면에서 보면서 자기가 그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기 때문에, 설교자는 모든 방면에 대해서 온전함에 도달한 사람은 아니지만 목표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지 알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훼밀리에러티(familiarity)를 가지고 설교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 사발의 독약을 먹고 피를 토하고 죽어가면서 그게 독약인 줄 모릅니다. 그런데 똑똑한 사람은 혀끝으로 맛을 보고 이게 보약인지 독약인지를 안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삶의 모든 방면에 대해서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탁월했던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의 Resolution이라고 하는 결심문이 있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반성문 같은 것입니다. 하나를 쓸 때마다 금식하면서 씁니다. 나는 이것을 반드시 하겠다, 과식을 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까지 백 몇 십 가지를 일평생 씁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았는가를 끊임없이 맞추어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모든 방면에서, 결혼과 연애부터 시작을 해서, 정치부터 시작을 해서 마지막에는 정직, 절제, 모든 것에 대해서 친밀성을 가지고 설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0분만 더 쓰겠습니다. 질문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10분만 더 쓰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더 설명하고 싶은데 넘어가겠습니다.
마지막에, 그러면 이제 설교자로 하여금 설교자가 되게 하는 그 결정적인 것은 무엇인가?
과일을 보지 않습니까? 과일을 보면, 배를 가운데를 딱 잘라서 보면 마지막에 거기에 하얀 부분이 나오고 그 가운데 씨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씨를 다시 쪼개봅니다. 씨를 쪼개면 그 안에 배아(胚芽)가 들어있습니다. 쌀이 있는데 벼를 심는다고 모두 벼이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이 뭐냐 하면 거기에 씨눈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감자를 심을 때 어떻게 심는지 모르시지요? 감자를 그냥 뚝뚝 자릅니다. 재에다가 묻힙니다. 그리고 제때 땅에다가 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 자른 토막 안에 감자 눈이 있어야 됩니다. 눈이 없으면 그냥 거기서 썩어서 사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그 말씀 속에, 사람들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면 그 밀이 바로 밀대가 되어서 밀이 맺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 밀 대부분은 썩습니다. 없어집니다. 그런데 모두 썩으면 밀 이삭이 안 나옵니다. 뭐가 남습니까? 밀의 눈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밀의 눈이 살아남기 위해서 썩히면서 양식으로 삼는 것이 그 밀의 눈보다도 백배나 더 큰 그 밀알 전체입니다. 그 깊은 비밀이 그 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 밀의 씨눈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나’ 중에서 참된 ‘나’, 그게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is to die is to gain.”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나’ 전체가 죽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진정한 내가 아닌 것이 죽어서 없어져서 양분을 공급하고 사라지고, 내 안에 있는 진정한 내가 사는데 그게 그리스도의 형상이라 이것입니다. 그 뜻이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알의 밀알이 모두 썩는 게 아니라, 그 밀 속에는 썩어야 할 것과 살아나야 할 것이 동시에 그 밀 하나 속에 있는 거라 이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 생명을 일으키는 그 비유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것입니다. 실제적인 문제에 들어가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할 수 있습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온전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온전해야 됩니까? 안 해도 괜찮습니까? 그러면 온전해야 된다는 명제와 온전하지 못하다는 명제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흐느끼는 것입니다. 주(主)는 거기에 도달하셨고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는데, 나는 그 은혜를 활용하여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부분에 있어서?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그리고 거기에서 참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순교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사람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나중에 몬타니스주의에 빠져가지고 곁길로 가지만,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은 사람 아닙니까? 삼위일체를 비롯해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사랑을 충분히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너 만큼 사랑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이 사랑을 잘 설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해야 하는데 거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괴롭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를 미워하고, 예수의 용서를 빌고, 나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결국은 나의 원수까지 사랑하고 싶어서 피를 쏟습니다. 그 사람이 설교할 때 그것이 증언이 되는 거라 이 이야기입니다. 설교의 증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삶의 모든 방면에 대해서 그렇게 훼밀리에러티(familiarity)를 가지고 설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수긍이 됩니까, 안됩니까? 되지요. 왜? 거기에 도달한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미 잡았다함도 아니요 도달했다 함도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잡은 그것을 향하여, 그 푯대를 향하여 내가 달려가고 있다, 그것으로서 나도 온전해져가는 사람으로서 더 온전하지 못한 사람을 향하여 온전함으로 가게끔 설교할 때, 그것은 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친밀성을 가지고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온전한 삶을 추구하게끔, 그러니까 “그 온전한 삶을 살았으면 참 좋겠다.”, ‘했으면’, ‘할 텐데’라고 끝나는 것은 그것은 열망이 아닙니다. 열망은 그것이 성취되기까지 꺾어지지 않는 열정, 그리고 자신의 실존의 비극을 느끼는 것이 열망입니다.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너무 보고 싶어 죽겠습니다. 그런데 덜컥하고 사랑의 관계가 어느 한 편에 의해서 절단이 났습니다. 그러면 뭐냐면, 저 사람은 마음의 정리를 하고 절교를 선언했는데 내 사랑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현실이 끊어졌을 때 그 사랑은 고통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꺾이기 전까지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 고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나의 삶은 누구의 예증이 아닙니다. 그래서 웨스터민스터 총장이 와서 같이 대화를 하는 가운데 내가 워낙 어거스틴을 좋아하고 존 오웬 좋아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아니까 - 존 오웬은 제가 16권을 2권 빼놓고 다 완독했습니다. 거의 20년 걸렸습니다. 노트도 해 놓은 게 이만큼 됩니다. - 이야기를 죽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어거스틴을 너무 존경한다. 내가 천국에 가면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은 어거스틴하고 우리 할머니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죽은 다음에 어거스틴주의자 김남준으로 불리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내가 칼빈을 너무 좋아하지만 내가 죽은 다음에 칼빈니스트 김남준으로 불리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존 오웬을 나는 일평생 담임목사님처럼 생각하고 나는 존오웬 목사님 목회하는 교회의 부목사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지만 내가 죽은 다음에 오웬이안이라고 내가 불려지기를 원하지 않고, 에드워즈를 그렇게 존경했지만 그러나 에드워즈이안이라고 불려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 당신은 뭐라고 불려지기를 원하냐?” “나는 김남준이 살다가 김남준으로 죽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사람들의 삶을 반복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삶은, 그런 위대한 사람들을 나에게 멘토로 주신 이유는 너의 인생을 잘 살아 내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의 인생을 써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죽은 다음에 준이스트(Junist)라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도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쓴 책이나 설교를 읽거나 보면서 “아, 이렇게 하나님을 이해하던 사람도 있었구나. 이런 점에 있어서는 참 본받을 만하기 때문에 나도 이것을 참고삼아서 내 길을 가야되겠다.”라는 사람은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나는 나를 활로우(follow)하는 사람이 나오기를 나는 바라지는 않습니다. 각자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 이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 아까 ‘라비 비엔 오브 더 니’라는 프랑스어 구절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이상적인 삶은 질서 지워진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질서가 지워졌으면 그 질서를 만드는 원천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왕이 있고 통치 철학이 있으면 그것에 의해서 하부까지 다 그 정신이 지배하지 않습니까? 그게 무엇이냐? 그게 경외라 이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랑으로 대치되는 데서 많은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마지막으로 그 경외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경외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가 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그냥 두려운 정도가 아니라, 우리도 두려울 때 있지 않습니까? ‘불합격하면 어떻게 하지?’하는 그런 두려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가 덜덜 덜덜 떨리는 그러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발견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무한하게 높고 위대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자기 자신이 아주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느끼는 감정이 미천(微賤)의 감정입니다. 미(微), 아름다울 미(美)가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그리고 아주 천한 존재라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것 같을 정도로 그렇게 의미가 없는 것 같은 그러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게 하나님의 두려움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그때 인간에는 어떤 종교적인 감정이 생기느냐 하면 토탈 디펜던스(total dependence), 하나님에 대한 총포괄적인 전체적인 의존의 감정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존재 앞에서, 무한대 앞에서 느끼는 자신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수학 기억나시지요? 수학은 뭐냐 하면, 무한대 분의 1은 영(0)이 아니라 영(0)으로 수렴합니다. 왜냐하면 무슨 숫자를 대입해도 무한대분의 엑스(x)는 영(0)으로 수렴합니다. 그러니까 무한대분의 1이나 무한대분의 99억 9,999라고 해도 그것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한대 자체가 이동의 개념이기 때문에, 끝이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0)으로 수렴하는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뭔가 자신의 존재의 중요성, 그리고 이 우주 안에서 무엇인가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중심성 이런 것들이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본질이 뭐냐 하면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자신에 의해서 판단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은 없다.” 옛날에 제가 무신론자로 돌아설 때처럼 “신이 있다고 해도 당신은 내 인생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 내가 허락하지를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행복을 이 우주의 존재의 목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그러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수동태로 읽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 의해 그들 자신처럼 사랑받아야 된다.” 이렇게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여기는 사랑이 없다, 이 교회는 사랑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내가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 사람에 의해서 그런 사랑을 받은 적이 있느냐? 그것을 왜 수동태로 바꿔서 읽느냐 이것입니다. 그것은 수동태로 읽을 게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이 다 능동태로 읽어야 될 정언명령(定言命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아까 가졌던 그런 모든 생각들을 다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 디펜던스(dependence)의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게 경외의 효과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또 하나가 뭐냐 하면, 그렇게 두려우면 도망쳐야 될 텐데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불가해한 경험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서움을 생각하면 자기가 너무 티끌 같은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느끼고 있으나 없으나 무가치하다고 느껴야 되는데, 그것만 느끼면 그래도 살 수 있을 텐데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하시고 나도 사랑합니다. 하나님도 의롭고 나도 의롭습니다. 하나님도 선하시고 나도 선합니다. 왜? 내가 모두 나쁜 짓만 하고 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는 선하다, 나는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을 보고나니까 자기의 의는 쓰레기입니다. 자기의 사랑은 너무 추잡한 사랑입니다. 마치 미슐렌 쓰리스타식당에서 밥을 먹던 사람이 갑자기 초등학생 딸이 비벼온 밥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인 것입니다. 이게.
그런 속에서 도덕적인 완전성을 볼 때 어떤 느낌을 받느냐 하면, 자기가 아까는 미천(微賤)의 감정이라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비참(悲慘)의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불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하는 비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두 가지가 함께 어울리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더럽고 미천한 자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사랑으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두려움을 생각하면 도망치고 싶은데, 그 떨리는 두려움과 함께 여기를 도저히 떠날 수 없게 하는 똑같은 중력으로 강하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이끄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기독교신앙의 윤리의 원천으로서 함께 이야기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부담스러우니까 그냥 완 사이드(one side)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 하나로 다 때려 넣고, 그 다음에 그것이 우리에게 방종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런 거룩함의 체험이 모든 위대한 설교자의 배아(胚芽)입니다. 그러니까 설교학 공부를 잘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신학공부를 제대로 하면 허튼 소리는 안 합니다. 우리 교회에 사실 아무나 설교를 부르지는 않습니다. 외국 분들을 검토를 해 봐서 이 분이면 괜찮겠다 그러면 부릅니다. 그런데 특징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가끔 교회 전체는 안 그런데 부서에서 설교할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이상한 설교를 하고 갔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은 안 부르지만. 왜냐하면,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은혜는 얼마나 받았는지 모르지만 성경을 많이 연구하고 제대로 된 신학교에서 오래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대의를 빗나가지는 않습니다. 와서 맨날 좌파 욕하고 우파 지지하고 이딴 소리나 하고 가는 사람들 보면 학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설교단을 더럽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실수 거의 안 하는데 어쩌다가 이상한 사람이 와서 그렇게 실수를 합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공부를 많이 하십시오. 그러면 허튼소리는 안 합니다. 그런데 한계가 거기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설교학을 전공하는 사람 가운데 설교를 잘하시는 분은 아주 드뭅니다. 범하 교수님 같은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 다닐 때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설교학에 대해서 가르쳐주면 마지막에 결론이 “우리는 저 교수님처럼 설교하지는 말자. 그러면 된다.” 왜? 채플시간이 너무 재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은 공부하는 것은 나름대로 유익이 있고 그것을 빗나가지 않게 해 줍니다. 그것은 내가 확실히 느낍니다. 감동은 떨어지는데 다 듣고 나면 “아, 일리가 있다. 참 그렇게 살아야지.”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잽입니다. 권투에서 잽은 이것은 목표가 뭐냐 하면 사람을 혼란을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잽을 막 하면 정신이 왔다 갔다 할 때 펀치를 날려서 한방에 쓰러트리기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그런데 설교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잽입니다. 그래서 뭐가 뺨이 얼얼하기는 한데 한 번도 맞은 기억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때렸습니다. 그게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의 설교와 공부를 안 한 사람의 설교 차이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안 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먹을 휘두르다가 저 캠퍼스 위에 자기가 쓰러집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는 공부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를 설교자 되게 만드는 것은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의 경외에 대한 체험입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보면, 이사야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던 6장 유명한 기사에서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공부를 판 게아니라, 이전에 물론 다 공부했겠지만, 화룡점정과 같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고 자기가 티끌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지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런, 그 원어가 사실은 그게 ‘파괴되다’ 그런 뜻입니다. 아주 강력한 뜻입니다. 그냥 루인(ruin)이 아니라 디스트로이(destroy)입니다. “화로다 나여 파괴당하게 되었도다.”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그런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는 소명에 대한 응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7장 다음서부터 이사야의 설교 전체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우뚝 서는 주제가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더 글로리 오브 갓(The glory of God)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자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건너뛰어서 신약으로 넘어가면 대표적인 사람이, 아니 그 전에 하나만 더 합시다. 그 앞으로 가면 그렇게 설교자로서 살았던 사람이 모세입니다. 그런데 그의 소명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에서 시작이 되고, 영광에 대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게 된 것입니다. 이쪽으로 넘어가면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혼란을 주셨기 때문에 사실 저는 마음이 굉장히 섭섭한데, 김세윤 박사님 말입니다. 나중에 견인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가게 되는데, 그런데 그분의 박사학위 논문이 ‘The Origin of Paul’s Gospel'입니다. 그것은 그때에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인정받은 아주 탁월한 논문입니다. 그 논문을 쓰기 위해서 유대 문헌까지 모두 섭렵하고 쓰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600페이지나 되는 엄청난 그 논문의 마지막 핵심이 뭔지 아십니까?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이 될 수 있는 껍질을 벗기고 벗기고 벗기고 벗기고 마지막에 들어가면 정 가운데 나오는 것이 다메섹의 체험이다, 그 다메섹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부활하신 예수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거룩함을 경험하고, 그 다음에는 한순간에 눈의 비늘이 벗겨지면서 천지창조서부터 구약의 역사, 자기가 알고 있는 제사와 구약의 전통, 그리고 현재의 유대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앞으로 이것이 어떻게 신약시대가 전개되고 종말이 올 것까지가 한눈에 확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관의 폭발적인 변화입니다. 세계와 역사와 교회와 인류와 우주의 미래를 바라보는 폭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배아(胚芽)였습니다. 그러니까 멈춘 게 아니라 그것과 괘를 같이 하면서, 달리하지는 않습니다. 그 괘를 같이 하면서 그것이 계속 우주적으로 확장되어간 마지막 결정체가 골로새서입니다. 그래서 나는 성 바울의 서신 중 한권만 딱 꼽으라고 하면 1권은 골로새서, 그리고 2권은 에베소서, 로마서는 제 3권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신학적인 수준에 있어서는 로마서는 골로새서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주 우주적이고 어마어마한 그림을 그 속에서 그려내는 것입니다. 철학적이고 완벽한 우주적인, 말하자면 미래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나 아름다운 서신입니다. 그 가슴 뛰는 서신이 그게 사도 바울이 정점에 이르기까지 올라갔을 때 보여 주었던 세계관인데, 그게 다메섹의 체험에서부터 씨앗이 되어서 그게 퍼지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러면서 그를 다 주장했던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그 경외에 의해서 모든 삶들이 질서 지워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욜로(YOLO)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You Only Live Once.” “당신은 오직 한번만 산다.” 그게 지금 유행이지요? 아닙니다. 끝나갑니다. 이 MZ세대에서 욜로가 끝나가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지금 MZ세대에서 욜로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이돌 노래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핑클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하고 거의 같습니다. 핑클은 지금 다 아줌마입니다. 그 핑클의 노래에 취한 사람은 아이돌 케이팝(K-Pop)에 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마치 트로트가 좋다고 하면서 동백아가씨를 부르는 거나 똑같다 이것입니다.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욜로의 시대를 지나서 이제 우리에게 떠오르는 화두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게 학자들이 찾아낸 것이 펌 크라이시스(Perm Crisis)입니다. 펌 혹은 퍼마 크라이시스(Perma Crisis)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펌은 퍼마먼트(permanent)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항구적인 크라이시스, 항구적인 위기의 시기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코로나 펜데믹 이후에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비롯해서 이 엄청난 사태들이 미증유의 경험을 우리에게 안겨다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욜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고, 이것은 마치 영끌해서 부동산 막차 타는 사람입니다. 이런 식의 설교 가지고는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펌 크라이시스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코로나 펜더믹이 일어나고 6개월 사이에 이 세계 금융 자본 시장에서 사라진 돈이 3만 2천 6백조 원이 6개월 만에 사라졌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테슬라에 있는 모스크가 250조를 날렸습니다. 그것을 다 합하면 숫자를 나열할 수도 없을 정도의 자본이 세계에서 증발했고, 자본이 증발한 곳에서는 누군가가 쪽박을 찬 것입니다. 코로나로 650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100만 명 이상 죽어야지 평상시로 돌아올 것이라고 보고, 그동안에 더 죽는 것을 치면 약 800만 내지 900만이 죽어야지 일단 코로나가 어느 정도 관리 가능한 상태가 되는데, 그런데 코로나로 죽은 사람은 병원에서 죽은 사람이 등록이 된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사업이 망해서 자살한 사람, 가세가 무너져서 고통받다가 합병증으로 죽은 사람은 계산에도 안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2천만 명내지 3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펜더믹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 비극을 그대로 안기고 지금에 있는 이 경제 위기와 그 다음에 세계질서가 파괴되고 모두 자국 우선주의로 나가고 있는 이 모든 현재 전개되고 있는 이 세계적인 상황은 언제 끝날는지 기약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많이 보는 사람은 30년이 갈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때 이제 욜로 타령은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 욜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욜로 가지고 해결이 안 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엄청난 위기 앞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그때 결국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떻게 이 현실을 살아낼 것인가, 그리고 이 끔찍한 허무를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 속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무엇을 화두로 던져줄 것인가, 그 화두에 대한, 퍼마 크라이시스에 대한 답을 무엇이라고 우리는 던져줄 것인가? 이것을 고민해야 되는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결국은 어떤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결국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고 인간은 불행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결국은 우리 나름대로 살길을 찾아야 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행복론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행복이다, 그 행복이 목적이고, 나머지 모든 행동은 그 행복에 이바지하게끔 상위, 중위, 하위, 최하위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고,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놓고 볼 때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그 행복이라고 하는 최정점에 무엇을 놓을 것이냐? 현대인에게는 물질적인 풍족함과 평안함이 그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영혼이나 이런 것들은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거기에 놓을 때 그 목표는 성취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불행해 질 것은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이냐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어떤 일을 만나도 우리들이 행운만 만날 수는 없고, 그리스도인이고 비그리스도인이고 똑같이 죽고, 헤어지고, 가슴 아프고, 속 쓰리고, 고통 받고, 눈물 흘리고 통곡하는 것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게 제일 위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고, 그 경외에 의해서 삶의 모든 질서들이 질서 지워진 가운데 자기가 그 질서를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초월한 것입니다. 어차피 죽으면 죽을 수밖에 없고 불행이 온다면 피할 수도 없는데, 그런데 나는 나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간다 이것이지요. 그 삶이 칼빈이 이야기하는 ‘라비 비엔 오브 더 니’의 삶입니다. 그것을 굳게 붙들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 경외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설교자는 설교하는 시간과 살아가는 삶의 시간이 다를 수가 없고 살던 것을 설교하는 것이고 설교하는 것을 사는 것입니다.
후배 하나가 스터디를 하는데 이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혹시 설교하고 났는데 ‘아, 오늘 설교 죽 쒔다.’ 이러시는 적은 없습니까?“ 나도 생각이 안 나는데 그런 질문을 나한테 했다고 합니다. 여러 해 전에. 그리고 내가 답을 했는데 집에 가서 내내 충격을 받았답니다. 나도 생각이 안 나는데, 그 질문을 하니까 한참 동안 내가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나는 한 번도 설교하고 나서 죽 쒔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설교하러 올라갈 때 이 설교를 죽 쑤면 어떻게 하나 하고 근심하는 적도 없었다.”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항상 설교하기 전이나 한 후나 한 염려는 내가 피할 수 없다. 내가 설교를 이렇게 했는데 삶을 죽 쑤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내 설교는 허위입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질문)
(답변) 참 그렇더라고요. 조금만 말씀드리면, 개척하기 전에 저는 원래 구약을 전공했고 학교에서도 교수님들이 저를 적극적으로 구약을 전공을 하고 나중에 학교에서 봉사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구약성경을 3분의 2를 히브리어 성경을 읽었고, 그리고 3학년 때는 모음이 없는 자음 사본으로 히브리어 성경을 읽을 정도로 구약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가서 논문을 쓰고 저도 그런 길을 가려고 했는데 그만 Th. M. 2학년 때인가, 1학년 때입니다. 그러니까 89년도에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청교도에 대해서, 설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설교 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 한주 설교에 약 열다섯 시간 정도를 소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완벽한 원고설교를 5년을 준비하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원고설교를 했는데, 이게 원고설교는 참 좋은데 자유가 좀 떨어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느 순간에 개척하고 나서 한 6개월 하다가 때려치우고 그 다음에는 원고 없이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도 없으면 안 되니까 성경 가장자리에다 한 네 줄 정도 써놓고 프롬프트 스피치(prompt speech)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10년, 한15년 정도 했는데 무엇인가 깊이를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고 그 다음에는 정확성이 좀 떨어집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다시 원고를, 프레임이라고 나는 부르는데 프레임을 좀 상세하게 쓰기 시작을 했고 지금에 와서는 훨씬 더 상세하게 프레임을 씁니다. 그래서 얼개를 쓰고 얼개만 보면서 설교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확실한 것은, 여러분들이 들은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설교는 한편 설교 준비하는데 아주 빨리 끝난 설교가 열두 시간정도 걸렸고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린 설교는 30시간정도 걸렸습니다. 그렇게 아주 피를 쏟아서 최선을 다해서 설교했는데, 요점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원고 없이 설교하느냐 하는데 그건 뭐냐면, 아까 얘기한 것처럼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온몸으로 느낄 때 원고의 필요성은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외운다고 하는데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요. 원고를, 원고라기보다 프레임을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빨간 것으로 고치면 비서가 다시 타이프 해주고 계속 이렇게 하는데, 그것을 보통 10번 하고 많이 할 때는 열일곱 번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동안에 열일곱 번 읽으니까 거의 외우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느끼면서 그 대지(大旨)만 기억하고 그 다음에는 설교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설교할 때에는 조금 부족해도 항상 두 눈이 청중을 향하고 있어야 됩니다. 설교자가 청중으로 두 눈을 향해도 청중은 설교자를 잘 안 쳐다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나마 안 쳐다보면 그러면 눈이 마주치지 않고, 그러면 이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없습니다. 조지 위필드의 얘기에 나오지 않습니까? 위필드가 설교하면 수백 명의 교인이 예배 끝나고 나서 모두 말하기를 목사님이 나만 쳐다보면서 설교했다고 그런답니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 하겠는데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사학을 키우셔야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문학작품이나 아름다운 문장으로 된 설교집, 흔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들을 읽으면서 아주 감탄을 하면서 줄을 그으면서 언젠가는 내가 한번 이것을 변형해서 써먹어 보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자꾸 연습을 하면, 그다음에 최고의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면 만족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게 계속 숙달이 되면 말하는 것 자체를 그냥 필기로 옮기면 글이 될 수 있을 정도의 문장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상당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질문) 이 질문은 아주 인상적인데, 목사님 설교 한편에 피와 살과 영혼을 갈아 넣는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 그것이 행복해 보이시는데 저희도 그렇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답변) 저는 행복이라는 것을, 이번에도 여러분에게 드릴 책이 바로 그 책인데, 여러분들은 이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설교집 하나 냈구나.’ 그럴지 모르지만, 생각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설교집이 아닙니다. 물론 내가 이것을 설교했지만, 최선을 다해서 다시 쓴 것이고 이것은 행복에 대한 탐구입니다. 결국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바깥에 저기 있는 그것이 아니라, 행복의 기초는 사람됨에 있는 것입니다. 나 됨됨이에.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갖거나 혹은 내가 무엇을 얻는데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가 되는 데에 행복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에 따르면, 소유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시편 1편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은’하는 아슐레로 시작되는 단어 ‘마까레호이 호이 푸토코이’로 시작되는 산상수훈 설교의 그 ‘마까리호스’라고 하는 그것이 결국 사람됨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그런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니까, 그런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그것을 더 온전한 사람으로서 추구하면서 가는 그 과정 자체가 행복의 길이고, 그 자체가 즐거움의 길이고, 그리고 이렇게 진리를 탐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그 자체, 그리고 흔들림이 없이 어떤 원천에 질서지어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한없는 행복을 느끼는 것이 어찌 나만의 기쁨이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그런 기쁨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래서 설교를 잘 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생긴 대로 설교를 하십시오. 그 대신 준비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만약에 설교 준비할 때 성경 놓고 포스트잇 노란 종이 하나 놓고 끄적거리면서 메모를 해서 설교를 하러 올라간다면 여러분은 삯군입니다. 그런 진지함 가지고는 붕어빵을 팔아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탐구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실력과 여기에서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하고, 더 중요한 것은 두 가지, 팔꿈치와 무릎 이 두 개가 계속 닳도록, 팔꿈치는 책상 위에서 닿도록 그 다음에 무릎은 강대에서 기도하면서 닳도록 그래서 양쪽의 네 관절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버터야 됩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