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는 것이 있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녹취자: 김은영
유대인들에게(는) 정해진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기도 시간은 아침, 그다음에 오후, 그다음에 저녁, (즉) 9시, 그다음에 오후 3시, 그리고 해질 때 (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구 시 기도 시간에 올라갔다고 했으니까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갔는데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옛날 성경에 앉은뱅이라고 나옵니다. 앉은뱅이가 있었는데 그 시절에 복지도 제대로 안 돼 있는 상황에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구걸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힘으로 걸을 수도 없으니까 사람들이 메고 와서 구걸하는 장소에 갖다 놔주면 해질 때까지 구걸을 하는데 그때 그래도 수입이 제일 괜찮은 때가 언제냐 하면 사람들이 기도하러 올라가는 그 시간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의식하니까 그래도 뭐라도 좀 이 사람 줘야지만 될 것 같은 양심이 가장 민감한 때를 이용해서 가난한 표정으로 뭘 좀 달라고 그랬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하면서 벌어다 먹고 살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날은 별로 못 버는 때도 있었고 어떤 날은 또 맘씨 좋은 사람이 지금으로 따지면 5만 원짜리 하나 이렇게 넣고 갔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삼겹살이라도 좀 구워 먹고 그러면서 ‘아 참 오늘은 참 좋은 날이다.’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은 다시 배가 고파서 다시 구걸하러 가야 되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에 들어가려 한 (것을 보니까 벌써 그렇게 그) 품새를 보니까 이분들은 지도자들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저렇다면 좀 더 큰돈을 쓰지 않겠느냐.’ 이제 그러는 모습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많았습니다. 왜 어떻게 해서 많았을까요.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두면서 말하자면 통화통색하던 시절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어마어마하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지 이 사람의 한 끼 정도를 해결해 줄 그런 돈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굳이 이렇게 매정하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 것 같습니까? 어떤 뜻에서 그렇게 말했을 거 같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이냐면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구제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는 종교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데, ‘기독교는 인생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다. 그러니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은과 금을 구하되 우리에게는 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우리에게 구하라.’ 그 뜻입니다. 그래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선언을 하면서 뭐라 그러냐 하면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예전 성경에는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비슷합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그럼 우리가 궁금한 것은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일까? 베드로와 요한이 같이 들어가면서 베드로가 은과 금은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이 있다. 그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게 해주는 어떤 복음의 능력이 이 사람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해석하는 것처럼 이건 단순히 신유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병원하고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그것이 내게는 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도 받은 것이다. 그것을 받아서 내 인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나도 너에게 내게 주신 그것을 너에게 준다. 그러면 너희의 인생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리라고 하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서 반성해야 할 점들이 뭐냐 하면 뭔가 근본적인 것을 신앙 속에서 얻으려고 하는 갈망들이 현저히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 인생을 주님께 통째로 드렸으니 당신의 뜻대로 판을 짜시옵소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이미 다 짜놓고 가는 이 판을 다시 쏟지 마시고 그냥 슬슬 도와주기만 하셔서 내가 원하는 뜻들이 잘 이루어져서 행복하게끔만 해주십시오.’ 축구로 말하자면 슛은 내가 쏠 테니 정확하게 패스를 골대 앞에서 나에게 해주십시오. 그것도 내가 능력이 닿는 데까지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미 볼이 날아와서 도저히 잡을 수 없을 것 같고 이미 골라인을 넘어간 것 같았는데 비디오로 판독을 해보니까 공이 10cm 라인에 딱 걸린 거예요. 그것을 돌려서 차서 골대에 집어넣습니다. 그것이 월드 클래스의 축구 선수들의 재능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의 패스는 싫다 이것입니다. 내가 있는 그곳에 내 발을 정확히 맞추셔서 골인을 하게 해 주시고 영광은 내가 받고 협력은 주께서 하시면 내가 받은 영광 중 일부를 주께 떼어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다 정해놓은 인생의 판을 그냥 걸어가면서 주님의 패스나 좀 받아볼까 하고 나오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왜냐하면 이미 다 결정됐습니다. 자기 가는 길은 다 정해졌습니다. ‘나를 근본적으로 바꾸소서.’라고 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그냥 내가 지금 잘하고 있으니까 좀 더 잘 할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주시고 또 내가 조금 했더라도 좀 크게 칭찬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시고, 또 크게 칭찬을 받을 때 뭐 딸려오는 것도 좀 있게 좀 해주십시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인생과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아야 되겠다는 그런 결심 자체가 너무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게 결국은 마음의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내가 내 인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라고 하는 갈망, 내 사역이 사람들을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에 분칠이나 하고 화장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저 사람을 살려야 한다라고 하는 치열한 갈망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태도를 못 갖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경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정확한 기록이 안 나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것은 49살에 돌아가셨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말 천재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이라는 중세 신학의 금자탑을 남깁니다. 이것이 60권입니다. 사람들은 토마스 아퀴나스 하면 『신학대전』밖에 생각을 안합니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420여 권의 책을 씁니다. 그런데 계산을 해봐도 49살에 돌아가셨고, 15살에 수도원의 학교에 들어가니까 그때까지 글을 썼을 리가 없고, 그러면 한 20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해도 29년밖에 안 되는데, 그러면 30년 잡고 450권을 썼다고 하면 1년에 15권을 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한 달에 한 권 써도 12권밖에 안 되니까 한 달에 1.2권 정도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한 권이라는 것이 물론 얇은 것도 있고 두꺼운 것도 있지만 대충 놓고 봐도 분량이 있는데, 그 당시에 음성 녹취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타이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책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쓰는 것이? 그렇습니다. 불가능했을 것 같죠? 어떻게 썼는지 가르쳐 줄까요?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기로는 어떤 식으로 글을 썼을 거라고, 왜냐하면 정상적으로 앉아서 써서는 도저히 그렇게 양산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지금 팔복을 냈는데 제가 거의 한 달을 썼는데, 교정 보는데도 그런데, 또 다른 책도 봐야 되잖아요. 어떻게 그걸 쓸 수 있겠습니까? 그거 못 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면, 방이 있고 여기 방에 필경사들이 쫙 벽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필경사 임성우 필경사는 이사야서 주석 담당입니다. 도현정 필경사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설집 담당입니다. 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간에는 가르치기도 하고 사목도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임성우한테 가서 저기 임 선생 어디까지 했지? 이사야서 6장 2절 하시다 말았습니다. 이렇게 2절이 뭐였지? 그러면 양피지를 보여주잖아요. 그러면 자 이제 시작. 그러면 이제 쓰는 것입니다. 그때는 양피지는 너무 귀하니까 이게 천이나 아니면 파피루스나 이런 거에다가 막 그냥 막 갈겨 쓰는 것입니다. 부르는 것입니다. 막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 잔뜩 받아 씁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서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아주 아주 정성껏 해야 됩니다.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것을 하고 있는 동안에 니코마코스 윤리학 하는 친구한테로 가는 것입니다. 도현정 씨 니코마코스 윤리학 어디까지 했지? 최고선에 대해서 하다가 말았습니다. 그래. 그럼 다 적어. 그리고 여기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를 한 바퀴를 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책들이 쏟아져 나와서 420여 권. (거의) 450권 가까이 책을 쓸 수 있었었던 것입니다.
아퀴나스 집안이 아버지가 군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아주 부유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면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그러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아퀴노 마을의 토마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퀴노라는 마을에서 이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이 나폴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그중에 막내였는데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아퀴나스를 아주 훌륭한 군인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다음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해보니까 이 아이가 맨날 뭘 좀 가르쳐 주려고 칼싸움이라도 시키려고 하면 어느새 그것을 던져버리고 책 들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는 것입니다. 이거 안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돈독해져서 공부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너무 공부를 잘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15살 나이에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냅니다. 거기서 감당할 수 없는 재능을 발견합니다. 이 사람의 어머니가 헬리콥터 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을 최고의 교육을 시켜야지 하고 나폴리 대학에 보냅니다. 나폴리 대학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간 것이 아니라 아들을 멀리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서 나폴리대학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나폴리 대학에 갔을 때 대박 사건을 터트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쓸데없이 한없이 아퀴나스 이야기를 하지?) 그래서 대박 사건을 터트리는데 거기서 그 유명한 알베르트스 마그노스라고 하는 대 알베르토 선생을 만납니다. 이분은 당시의 새로운 사조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완벽하게 마스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르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파리에서. 그런데 거기에서 그 선생님과 공부를 하면서 막 일취월장하는, 거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중세 시대 때는 이제 학생들을 목회자로 훈련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그 훈련이 안 돼서 지금 이렇게 문제거든요. 그런데 반드시 거기에는 토론 시간이 있었습니다. 논쟁 시간이. 그래서 교수가 논제를 주면 그것을 가지고 자기 의견을 개진하고 반론이 주어지면 그것을 논박하는 훈련을 거의 이박삼일 동안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그러니까 기독교의 논제가 있으면 들어올 수 있는 수많은 공격을 다 받고 그것을 다 해명을 하는 것을 교수가 위에서 2박 3일을 다 지켜보면서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얘는 안 되겠구나. 얘는 뛰어나구나. 얘는 보통이구나. 하는 것을 이렇게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퀴나스가 말하자면 토론을 담당하는 학생으로 지명됐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상당히 상급생에서 지명됐는데, 이 어린 토마스에게는 굉장히 영광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이제 유능함을 봐서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 다 토론이 끝나고 그 토론의 결과를 집약을 하는데 이 알베르트 선생이 대노를 한 것입니다. 뭐 대노라는 것은 좀 과장이지만 하여튼 아주 심하게 학생들을 질책을 한 것입니다. 뭐냐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토론을 모두 정리해서 결론을 내렸는데 그것이 교수와 같은 레벨의 수준의 답변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아퀴나스의 앞날에 서광이 비취기 시작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됐는데 파리대학교 교수로 추천이 돼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난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퀴나스가 살았을 때 그때 교황이 보니파스 8세였습니다. 이 사람이 176대 교황이었고 1234년부터 1303년까지 교황의 위에 앉게 됩니다. 그 직전에 했던 사람이 이노센트 3세였습니다. 이 사람이 175대 교황이었고 1198년에서 1216년까지 교황을 했으니까 아퀴나스가 태어난 그다음 해까지 교황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이 아주 치를 떠는 중요한 전통들이 이때 세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선 십자군 파병을 두 번이나 합니다. 이노센트 왕이. 그리고 그 파병을 도왔던 사람이 도왔던 인물 중에 하나가 너무 애석하게도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판단을 잘못해서 유창한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으면서 파병을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오류죠. 그다음에 화채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라드베르트 시우스 바스카시우스 라드베르토스라는 신학자에 의해서 구체화되면서 화채설이 공식 교류로 채택이 됩니다. 화채설이 채택된 것이 이노센트 3세 때였으니까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서는 전통적으로 교회가 지지해 오던 근거가 미약하다고 본 것입니다. 고해 성사도 이노센트 3세 때 들어오고, 경악할 만한 전통이 여기에 세워지게 되는데 그것은 교황무오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황무오설에 대해서 일체 언급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사상적으로 그 당시에는 그것을 모두 따르고 있었지만 이 신학자는 그것을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들과 싸우고 시비를 걸 입장에는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보니파스 8세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 때 와서는 더 경악할, 소위 이야기하는 성전이 세워지게 됩니다. 성전 아시죠? 홀리 트레디션이 세워지는데 우남 쌍땀이라는 트레디션입니다. 우남 쌍땀이 뭐냐 하면 성속의 모든 권리의 꼭대기에 교황이 있어야 된다는 교리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은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닌데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런데 찾아봤는데 잘 안 찾아집니다. 그냥 언제 한번 기회 있으면 도 실장님 좀 한번 좀 찾아봐주십시오. 뭐냐 하면 토마스아퀴나스가 아직 수도사였던 시절에 교황청을 방문을 했는데 보니파스 8세가 아주 천재적이라고 알려진 이 수도사에게 교황청이 얼마나 엄청난 곳인지를 자랑하면서 그를 특별히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고를 여는데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입니다. 그 왕들이 갖다 바친 그 (금은보화). 그러면서 “이보게. 수도사, 이 어마어마한 보물이 보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일세. 그러므로 이제 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그랬더니 아퀴나스가 하는 이야기가 “교황이시여. 그러므로 이제 교회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사실 같지는 않습니다. 원래 영웅적인 인물 뒤에는 신화가 끊임없이 창조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영웅적인 인물도 아닌데 한때 총신의 학생이 와서 ‘교수님 요새 수학하세요?’ 그래서 ‘아니 내가 왜 수학을 해요?’ 그러니까 ‘저희 그 총신에서요. 목사님이 주무실 때마다 수학2의 정석 한 문제씩 풀고 주무신다고 소문이 났어요.’ 수학을 제일 싫어하던 사람인데 신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수도사가 교황에게 그런 식으로 말대꾸를 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이 되는데 어쨌든 야사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함으로써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무엇을 기대하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교회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다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값진 것입니다. 그것을 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처럼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뜨고 암 환자가 암덩어리를 쏟아내서 다시 고침을 받고 하는 그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의 이 허무하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피할 수 없는 이 불행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그 무엇을, 그 복음의 능력을 그 사람에게 주어서 그 사람이 근원적으로 자기를 고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게끔 만들어주는 그 무엇이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관심사는 바로 그것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나의 인생이 근원적으로 바뀌고 저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고쳐 놓을 수 있을까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언젠가는 주일 예배를 좀 빠지더라도 교회 학교에 가서 예배드리는 광경을 보려고 날짜를 계속 잡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성경 공부를 가르치든지 설교를 하든지 다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눈을 보게 해야 됩니다. 그것을 안 하는 것은, 그것을 못하는 것은 결국은 그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무엇을 줄 수 없고, 그리고 듣는 사람은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진리는 놀듯이 그렇게 정신이 흩어진 사람에게는 결코 파악이 안 됩니다. 진리, 알레데이아라는 그리스어가 감추어질 수 없이 드러나 있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의심할 수 없이 드러나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것이 심지어 아무리 미약한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교회학교에게 신신당부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설교를 3분을 해도 괜찮습니다. 애들이 5분밖에 못 견디면 5분에서 설교를 끝내야 됩니다. 그 대신 그 5분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 됩니다. 이들이 참을 수 있는 시간이 5분입니다. 그것을 쏟아부어야 됩니다. 그것이 안 되는 애들을 똑바로 나만 쳐다보라고 회초리를 들고 아무리 야단을 닥달을 해도 걔네들에게 고통의 순간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게 있습니까. 술도 처음엔 반잔도 못 마십니다. 소주. 여자들이. 반잔도 못 마시고 한 입에 대면 막 도리질을 할 정도로 맛이 씁니다. 그런데 그것을 새벽 네 병 먹을 정도로 주량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뭐 말씀을 먹는 거를 주량에 비교하니까 좀 기분이 그렇지만은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그것이 왜 이렇게 주량이 늘어나는 것입니까. 술의 맛을 아는 것입니다.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똑같이 5분 안에 눈동자를 똑바로 하고 나를 보라 이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버벅거리면 안 됩니다. 원고를 가지고 버벅거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러면서 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을 가지고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하면서 전해야 됩니다. 나머지 이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할 것이냐 하는 기술의 문제는 디테일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정근두 목사님이 설교가 무엇이냐 하고 잡지사에서 질문을 했더니 너무 명쾌하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설교를 들은 자가 전할 수 있는 것이 설교다. 하나님의 설교를 듣지 못한 설교자는 결코 설교할 수 없다. 그건 설교가 아니다.’ 내가 들은 설교에 대한 이야기 중에 가장 명쾌한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여기서 학생들에게 5분이 들어가잖아요. 신기하게 얘네들이 6분으로 늘어납니다. 6분에서 7분으로 7분에서 10분으로 늘어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이거 뭐 내가 경험을 안 했으면 이야기를 안 합니다. 내가 집사 때였어요. 25살에 결혼했으니까 25살 때 애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주일날 공과 공부하는 것 갖고는 성에 안 차서 성경공부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애들을 모아놓고 성경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신학적인 지식도 별로 없으니까 내비게이터 성경 공부 교재 갖다 놓고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6학년 아이들과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3시간씩 공부를 하는데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럼 걔네들이 처음부터 그랬을까? 아닙니다. 만화책은 걔들이 그렇게 읽을 수 있어도 국어책도 그렇게 못 읽습니다. 그런데 내비게이터 성경 문제를 풀고 그러는데 욕을 입에다가 달고 사는 녀석이 있었습니다. 터지면 욕입니다. 욕으로 끝냅니다. 그런데 제가 집사 때 성경을 가르치는데 저 뒤에 앉아서 눈물을 글썽이는 게 아니라 계속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입에서 욕이 싹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오늘날 설교학에서 가르치는 방법이나 무슨 무슨 중심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 방법론, 무슨 시대를 읽어라, 뭘 해라 그것 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그것이 아니라, 이 속에서 뿜어져 나온 그 어떤 아우라라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우라입니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하는 이 베드로도 한때는 그것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헤매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다음에도 헤맸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 충만을 받으면서 완전히 바뀌게 되었고 이제는 내게 그 사람에게 있는 그것이 있어서 그것을 못 나눠주는 것이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젯밤에 오종석 교수)라는 분과 통화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만 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오종석 교수님은 누구냐 하면 남편이 아마 김성수 박사 고신의 의대 교수였고 그리고 총장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계로 병원이라고 여러분, 부산에 가면 모든 선교사들을 암을 무료로 수술해 주는 병원이 있습니다. 한 푼도 안 받습니다. 그런데 아주 헌신된 의사들이 아주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의사들이 그렇게 봉사를 합니다. 그 병원 원장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부산대 영문과 교수를 하셨습니다. 이 오종석 권사님은. 그런데 아버지가 누구냐면 오병세 박사입니다. 오병세 박사는 고신대 총장을 하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오병세 박사 이야기를 박희순 목사님을 통해 들으면서 내가 깊이 감동을 받은 것이 말입니다. 그분에 의하면 이분이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오셨다고 합니다. 중학교를 안 다녔다는 것 같습니다. 다니다가 그만뒀는지. 어쨌든지 간에 그래서 고신 본과를 못 들어오고 고신의 예과, 우리로 말하자면 연수원을 들어온 것입니다. 들어와서 1학년을 살다 보니까 신학을 공부하려니까 영어를 모르고는 안 되겠는 것입니다. 지금은 한글로 된 책 무지하게 많아서 사실 영어를 못해도 기본적으로는 웬만한 것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번역이 많이 돼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책이 없으니까 영어를 안 하면 안 되겠다 생각됐는데 ‘I am a boy.’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안 되겠구나 하고 중학교 1학년 교과서를 갖다 놓고 틈틈이 학교에 와서 쉬는 시간에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학생이 3학년 때 학생들을 모아놓고 영어 원서 강독을 강의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여기에 무슨 학위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 안 하니까 과정을 인정해줘서 미국의 대학원을 가고 거기를 마친 다음에 드랍시 인스티튜트라고 하는,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엄청 유명한 유대인들이 하는 대학이었습니다. 박사들을 가르치는 곳, 그 유명한 드랍시, 우리 때는 드랍시 나왔다고 그러면 더 이상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드랍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교수가 된 총장이 교수가 되고 총장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오종석 권사님이 내가 부산에 내려갔을 때 시편 23편을 들으시면서 한없이 생애적인 은혜를 받으신 것입니다. 펑펑 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2년이 되었는데 그분이 우리 테이프 월간 회원이었습니다. 그런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얼마를 내면 주일 설교, 수요일 설교를 포장을 해서 보내드리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남편과 둘이 교수인데, 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 이제 내 설교를 들으면서 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라고 막 그랬는데 설교하다가 말고 이렇게 말씀을 많은 사람이 들어야 되는데 지금 이게 테이프 복사기가 하나밖에 없어서 이걸 못 만들고 있는데 우리가 돈이 없어서 이걸 못 사고 있다고 교회가 뭐 그때 개척교회니까 뭔 돈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거 누가 좀 하나 기증해 주시면 참 좋겠다고 그랬는데 이게 쓱 지나가면 그냥 지나갔을 텐데 이상하게 거기서 테잎이 딱 멈추더랍니다. 그랬더니 이게 리와인드가 되더랍니다. 리와인드가 되더니 우리에게 지금 복사기가 필요합니다. 누가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게 그랬더니 지나갈 줄 알았더니 또 턱 멈추더니 트르륵 리와인드가 되면서 세 번을 반복을 하더랍니다. ‘여보, 삼세번은 완전히 속았어. 아무래도 이거는 우리가 기부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남편이 ‘그게 얼마나 된대?’ 그러니까 나중에 권사님이 알아보고 ‘150만 원이라네.’ 그러니까 ‘그거 꼭 우리가 해야 돼? 당신이 알아서 하쇼.’ 그래서 그 권사님이 그 테이프 복사기를 기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저께 통화를 했는데 그 이야기를 하니까 ‘목사님 그 옛날 걸 기억하고 계세요.’ 하십니다. ‘그럼요 제가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책을 보내드렸더니 ‘연락이 끊어져서 못 했는데.’ 그러더니 그때 심정을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때 150만 원이 30년 전에 150만 원이니까 얼마나 큰 돈이었겠습니까. 그때 제가 교회에서 받는 월급이 100만 원이었는데 150만 원이. 그런데 ‘목사님 그때 제 심정은 단 하나였습니다. 이 시편 23편을 더 많은 사람이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마음 하나로 제가 헌금을 했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것으로 주는 것입니다. 김 목사 것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녹취 원고로 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것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있는 것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 공부를 할 때 모두 나를 봐라 날. 나를 봐라. 그리고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라. 그리고 눈으로 소통하는 사람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시킬 때 마찬가지입니다. 딴짓하는 아이를 교육시키지 말고 그렇게 교육시킬 것 100분을 줄여서 5분으로 만든 다음에 아들아 아빠 눈을 봐라. 아빠 눈을 봐라. 그리고 이 마음에 내게 있는 그것을 넣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받는 사람은 이 사람처럼 일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내게 있는 것 그것이 있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달라고 하십시오. 그것이 사람을 바꾸고 교회를 바꿉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