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부활절 연합 조찬 기도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셀라)
주의 도를 땅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중에 알리소서 (시67:1-2)
녹취자 : 박효준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세상에 세워 놓으신 목적은 교회 자신을 위해서 교회를 세워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세워 놓으신 교회는 한 편으로는 영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도입하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처럼 썩게 하시려고 주님의 교회를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돌아가는 선교적인 상황을 보면 우리가 많이 기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1985년도를 기점으로 한국에서 개신교 교도들이 줄기 시작했고, 지금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노화가 촉진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세워 놓으면 사람들이 모이고 교회가 서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은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1년이면 3만개의 교회가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물론 또다시 교회가 세워집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어려운 위기 속에서 오늘 우리 이 말씀을 보면서 주님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목적과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우리로 올바른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이러다가 보니까 교회는 이제 어떻게 하든지 자립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기본적으로 관심사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자신에게 있습니다.
(예화) 언젠가 그 교회가 우리 중에는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씀드립니다. 인덕원에 신호대기를 하기 위해서 차를 세웠는데 옆에 어느 교회 은색 봉고 버스가 와서 섰습니다. 그런데 교회 이름이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나는 교회 였습니다. 물론 교회 이름을 붙이는 거야 목회자 맘이니까 신나는 교회 열나는 교회 뭐든지 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엄밀하게 성경의 기준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교회의 중심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설교하는 것이 선교의 방식이었는데 이제는 은과 금은 교회에도 많으니 내게로 오면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세상에서 얻는 것보다 편하게 얻을 수 있게해주겠다 라는 식으로 선교가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회의 이상과는 전혀 어긋나는 것입니다.
(예화)나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도 어느 책에 역사에 보니까 야사(野史)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잘 아는 경건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교황청을 방문했고 그 때 이노센트 2세라고 기록되어 있는 교황이 교황의 금고 문을 열어 보이면서 이 경건한 수도사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보게 이제 우리는 은과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이제 교회에도 이렇게 많은 부가 있다네’ 그랬더니 이 경건한 수도사가 말하기를 ‘교황이시여 그러므로 교회는 이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도 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그런 기록을 제가 읽었습니다. 마치 그 모습을 방불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어떻게 하든지 현대인들의 맘을 끌기 위해서 우리들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교회를 그들의 구미에 맞게끔 무엇인가 꾸며보려고 애를 많이 쓰는데 그런 속에서 성과를 거두는 교회는 그리 많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의 세속화라고 하는 것은 술 먹고 돈쓰고 타락하고 하는 것이 세속화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세속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의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사람으로 옮겨가는 것을 세속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속화는 18C부터 시작이 되어서 오늘날 까지 집요하게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중심이 하나님이었는데 이제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 바로 이것이 세속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연세 드신 동역자 목사님들이 많이 계시니까 한국 교회의 약 30년전에 기억에 대해서 비록 비교적 명료하게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30년 어간 동안에 우리 한국 교회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놀라운 일이 무엇일까요. 열린교회를 제가 17년 전에 방배동 골목에서 7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지하실에서 개척을 했습니다. 그 때와 지금이 어떻게 달라졌느냐고 말하면 나는 우리 후배들에게 다른 시대라고 나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럴 정도로 17년 정도 어간에 달라졌으니 30년 어간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겠습니까. 그 30년동안에 일어난 아주 괄목한 만한 변화 하나가 강단입니다. 이 강단에서 아주 완벽할 정도로 회심을 외치고, 회개하라고 외치고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피 어린 외침들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게 모르게 파고들어온 인간을 모든 중심으로 삼는 세속주의가 설교자의 마음을 삼켜버린 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중생하고 회심함으로 그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올바로 살라고 가르쳐 주어도 그것은 장애가 있어서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 뛰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는 인식이 우리에게 사라졌습니다. 30년전만 해도 교회가 그렇게 아름답고 탁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교회에 가든지 기본적으로 회개하고 천당가라는 이야기가 살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 40년 쯤 전에도, 40년이 뭡니까 한 45년 50년 가까운 전에도 주일학교 다니면서 그런 복음 성가를 부르던 기억들이 많이 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회개 하고 죄사함과 용서를 얻고 성령의 은혜를 힘입지 않으면 결코 그가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다는 원색적인 복음이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저도 목사기 때문에 남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눈을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양쪽 눈을. 그래서 할 수 없이 병원에 2주 가까이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장님이 된 것도 아닌데 예배를 안드리러 가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병원복을 입고 그리고 옷을 입고 근처에 있는 교회를 갔습니다. 한 교회는 장로교 교회였고 한 교회는 침례교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오전 예배와 오후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를 정말 오랜만에 회중이 되어서 남의 교회에서 설교를 딱 들으면서 끝나고 나오는 길에 마음이 무너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어떻게 저것이 교회에서 울려펴질 설교일 수 있을까?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운동장에서 조회시간에나 할 이야기를 그것을 저렇게 설교를 하고 저 설교를 듣고 누가 예수를 믿겠는가? 아주 마음속에서 몇 일동안 너무 상하고 마음속에 분노가 들었습니다. 그 많은 기독교의 진리가 있는데 부흥강사 말 듣고 헌금 많이 했더니 돈 많이 벌었드라 라는 이야기로 30분 이상을 채우는 목회자를 보면서 다음 시대에 과연 저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을 보면 ‘주의 도를 땅위에 구원을 만방중에 알리소서’ 그랬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히브리 작시법에서 평행 법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가치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도를 만방에 알리고 주의 구원을 이 열방중에 알게 하는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가치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구원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별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천국가는 것도 구원이지만 문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그게 구원입니다. 그러니 예수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관계 없이 방탕하게 살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인이 간절히 열망하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영광을 취하고 나라와 민족이 국가의 번영을 앙망할 때에 언약백성, 언약국가의 소망은 다른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삶이고 주의 도를 만방에 떨치는 삶입니다. 부귀와 영화와 모든 왕권을 누리고 권세를 자랑한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과 관계를 끊는 가운데 살아가면 그것은 사실은 구원이 없는 백성이고 구원이 사라진 나라입니다.
(예화) 몇 주전에 영국에 있는 한인 목회자들 한 15명정도 가 우리 교회에 와서 한 2주 동안 훈련을 받고 갔습니다. 그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작년에 영국 상원회 법안이 하나 올라갔는데 그 법안의 내용이 무엇이였냐면 전도하면 현행범으로 처벌하기로 하는 법률 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놀라운게 무슨 내용을 전도하는 것은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만 겨냥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원회까지 법안이 올라갔는데 다행히 이번엔 부결이 되었는데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자 두 사람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서 목사님 우리 주례를 서주십시오. 했을 때 목사가 무슨 소립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현행범으로 체포됩니다.
이런게 바로 구원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계속 이렇게 우리나라가 이런 식으로 따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속도가 좀 더디기는 하지만 국민 소득이 약 3만 불만 넘어가게 되면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한국 사회가 펼쳐질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제도 신문을 보니까 동성애 다룬 영화를 청소년 관람가로 만들었다고 해서 기독교 계에서 발끈하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이제는 발끈해도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강력한 정신입니다. 이런 속에서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도를 만방에 선포한는 이 일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도를 만방에 선포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고 또 어마어마 하게 많은 교회들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려서 세를 과시하고 이러는 것이 여호와의 도를 만방에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크기를 가지고 자랑을 삼고 모이는 사람들의 권세를 가지고 높이를 삼는 것은 바벨론의 가치이지 예루 살렘의 가치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크고 높은 것이 최고의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지 말고 로마 제국이나 중국 같은 나라 혹은 애굽과 같은 나라를 선택 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가치는 등대의 가치와 같은 것입니다. 등대가 어느 조각가가 아름답게 지었느냐 그 등대의 붙인 타일이 외제냐 국산이냐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녹슨 등대라고 할지라도 어둡고 캄캄한 밤바다에서 반짝이는 불빛으로 항구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수 있으면 그것이 교회의 진정한 가치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그런 가치를 누가 유지 해 갑니까? 성도들이 유지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목회자 자신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진리에 대한 열망이 이 가치를 유지하며 살아가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되었으니 새로운 목회의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언제나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법의 문제이지 근본적인 가치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신학교 다니던 시대를 생각해 보십니다. 저희는 매일 채플을 드렸고 채플 시간마다 우리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즐겨부르던 찬송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부름받아 나선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이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라.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노래했습니다. 생활이 부요해지고 모든 형편이 나아지면서 이러한 절실한 복음의 가치에 대한 확신. 우리의 목회 사역이 언제나 고난의 골짜기를 헤매는 것은 아닙니다. 전 세계에서 한국과 같이 완벽하게 기독교를 신앙할 수 있는 자유를 준 나라는 없습니다. 이렇게 맘 만 먹으면 2층 교회에 신고도 안하고 간판을 올리고 교회를 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이런 완전하고 자유로운 환경 속에 살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잠식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매주 교회에 모이는 교인들을 우리가 세탁해서 내보내지 않으면 안되는 더러운 빨래같은 성도들로 보는 이 목회자의 절실한 심정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등을 두드려 주고 엉덩이를 만져주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이 교회에도 많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서 교회와 세상사이에 차이가 없으니 너희들이 교회온다고 세상에 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화) 저희 노회에 작년에 은퇴하신 연로하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은퇴하기 6개월 전 개인적으로 저를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제가 몇일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요? 한 밤 중이었는데 예수님이 제게 나타나셨습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손에는 목자국이 나있고 머리에는 굵은 가시관을 쓰시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채 나타나셔서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자다가 깜짝 놀라서 깨어서 너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새벽2시에 예배당으로 달려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내가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를 열렬하게 전하지 않은 것을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나는 여기에 우리의 동역자 되시는 목사님들께 가슴의 손을 얹고 우리가 같이 한 번 물어봅시다. 기독교의 생명적인 진리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적이 있습니까? 그래, 존귀와 영광과 권세는 다 버리고 그런것도 없겠지만 내가 혹시 이 목회지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도 다 버리고 날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때문에 그 길을 가겠다 라고 하는 눈물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17년 밖에 안되는 미천한 목회 생활 이지만 완악한 교인들과 생활하면서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땀을 흘리면 교인들은 겨우 움직이고, 목회자가 눈물을 진하게 쏟으면 교인들의 이마에서 겨우 땀방울이 돋고, 목회자가 피를 흘려야지만 교인들이 겨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회에 목양의 길은 자기를 버려 하나님의 도를 알리는 그것이 바로 목회 사역입니다. 그런데 현금(現今)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이 일들을 한 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신문지상에서의 추문들은 언론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에도 많이 기초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목회자들의 잘못도 사실 많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빛내드려도 시원치 않을 우리의 일생이 교회의 삶이 이렇게 주님을 끊임없이 아프게 하는 일들이 교회 속에서 일어나고 우리들이 이미 선포했던 진리, 도를 허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리차드 번 브란트라고 하는 목사님이 루마니아에서 선교를 하셨었습니다. 수 없는 회유로 옥에 갇혀있는 이 목사님을 공산당들, 독재정권이 유혹했습니다. 그 때에 말했던 “내가 당신들의 회유를 받고 돌아서면 이제까지 내가 한 설교 내가 쓴 글들은 일시에 빛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만약 나를 죽여 순교의 길을 가게 한다면 내가 토해놓은 설교와 내가 쓴 글에 내 피가 스며들어 온 땅에 소리칠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거친 이 세상에서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은 교회가 어떻게 ‘주의 도를 땅 위에 구원을 만방에 알리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이 바로 1절에 나와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춰’ 달라고 하는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선교의 이치는 명쾌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먼저 선교된 교회가 선교할 수 있고,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하여 변화된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변화되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설교자가 회개를 외칠 수 없으며 기도하지 않는 설교자가 투명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교회에 특별히 설교자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얼굴 빛을 비추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나오는 이 얼굴 빛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의미하고 언약백성들에게 특별히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상징입니다. 그 얼굴 빛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스랍가운데 계속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참회의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선지자가 되었던 것 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얼굴 빛이 주님의 교회에 충만해 지도록 갈망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목회자인 우리들이 온 맘을 다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우리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흥이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 충만하게 되도록 몸부림 쳐야 합니다. 세속적인 방법으로 이웃교회의 교인들이나 빼앗고 그리고 경쟁심이나 유발하는 세속적인 일에 우리를 헌신하는 대신에 마음과 뜻을 모두 모아 우리의 목회 사역의 가치가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주님이 진리의 등대 처럼 세워놓은 우리의 목회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가 먼저 성도들의 마음을 깨우고 이어서 성도들의 마음을 깨운 그 진리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두루 펼쳐지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 앞에 헌당식을 드릴 때 그는 하나님 앞에 번제를 올렸고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주님의 성전에 가득 채우시고 박석을 깐 땅위에 모든 백성들과 그리고 모든 신하들이 엎드려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제물이 거기에 있었고 하늘에서 내린 불이 그 제물을 살라버리면서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목회자는 바로 그 제물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서 한줌의 재처럼 사라질 제물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거룩한 불에 우리가 태워지고 완전히 바쳐질 때 그 때, 우리의 마음을 비췬 주님의 얼굴 빛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성도들의 가슴속에 부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 까지 맨 처음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골목길에서 주님을 먼저 만났고 그래서 우리는 계획에 없었지만 은혜 받은 주님이 은혜주신 주님이 우리를 목회자가 되도록 불러주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때 그 첫 마음으로 돌아가서 그래서 존귀와 영광은 주님께 돌려드리고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병든 교회와 그리고 거친 이 세상 사이에서 우리의 인생을 마름 해야 되겠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순교할 수 있도록 우리 매일 기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