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회 예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3.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레 24:1-3)
녹취자 : 김세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구약의 모세를 통해 주신 성막의 등잔불을 켜는 규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하는 도중에 어디에 가든지 그 중앙에는 18평의 회막이 쳐졌습니다. 12평의 성소와 6평의 지성소로 나누어지는 중간에는 휘장이 들이어져 있었고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그 등잔불을 켜게 되어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회막은 물 돼지 가죽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오는 빛이 완전히 차단된 가운데 완벽한 어두움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서 등잔불을 켰던 것입니다. 그 불빛을 이용해서 제사장과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을 거기에서 섬길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줍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세상의 일상적인 상식의 빛으로만 운영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의해서 움직여지게 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이 등잔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했는데 그 기름으로 사용될 올리브유를 조달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지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백성들에 명하여 그 순결한 감람유를 가져오게 하는 것인데, 그 순결한 감람유가 바로 등잔불을 밝히는데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론의 자손의 임무는 바로 이 등잔을 언제나 잘 간검하여 언제든지 이 불빛을 환하게 비춰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임무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모두들 열심히 목회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오늘 우리들은 그저 열심히 하면 그것이 목회이고 또 그것이 성공의 비결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몰아내야 할 게으름과 나태함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극을 통해서 게으름을 추출하고 부지런히 무엇을 하든지 열심 있게 헌신함으로써 목회 사역에 이바지 하여야 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방향이 올바르지 않으면 힘이 많은 것이 해로울 때가 있듯이 방향이 올바르지 않으면 열심있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교회를 그릇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본질적인 원리를 바로 잡아야 가야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목회자는 목회를 하고 신학자는 신학을 공부한다는 식의 이렇게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사실은 최근에 와서 생긴 것이지 기독교의 전통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16세기에 성학들의 전통을 알 고 있을 것입니다. ‘디바인’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들은 목회와 신학을 겸비한 지성인들이었고 지성인들이면서도 그들은 철저하게 목회에 헌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키더민스터(Kidderminster)의 리차드 백스터는 개혁파 정통 주의 시대의 한 신학자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 분이 고등학교 밖에 못 나왔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분은 개혁파 정통주의 역사에 있어서 옳고 그름에 대하고에 대해서는 많은 논박이 있지만 형이상학과 철학의 부문에서 상당한 기여를 한 사람으로 그렇게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최근에는 그의 형이상학과 토마스 깜파넬라라고 하는 이태리 사상가에 기반 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들이 일어나면서 더더욱 그의 사상의 체계들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conversion이라든지 혹은 Christian Directory 같은 매우 실천적인 책, 심지어 그의 책에는 귀신들린 자를 구별하고 그것을 쫓아내는 방법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Christian Directory까지 쓸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저 깊은 형이상학 같은 문제에까지 담론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지 않습니까. 이러한 전통은 17, 18세기에 이어지고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사실은 20세기 초반 올드 프린스톤까지 목회와 신학을 겸비하는 것이 목회자의 이상적인 표상이라고 하는 것들이 지지되고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의 걸출한 신학자들의 명단은 걸출한 설교자의 명단과 거의 일치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이러한 전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노가다 목회를 지양하고 그리고 우리가 목회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신학자 혹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자세를 잃지 말고 우리들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매겨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이제 목회자로서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자기 자신 안에 그리고 사랑하는 교회 안에 그리고 또 이 세상을 향하여 진리의 빛을 책임 맡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 진리가 아닌데 그 교회가 expension 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수많은 사람이 모여도 그들이 하나님으로 가득차지 않는다면 그 많은 군중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겠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알리는 향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문제를 아주 사려 깊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들이 의심할 수 없이 적용할 수 있는 적용점이 이 본문에는 세 가지가 나온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불빛입니다. 이 빛은 명백히 진리의 빛입니다. 여러분들은 존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이제 마틴 부처와 함께 목회를 할 때 제네바에서 그를 다시 목회자로 와달라는 초청을 보낸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결국은 안 가려고 하였지만 마틴 부처가 심하게 책망하는 책망을 받고 그는, 칼빈은 마지 못하는 마음으로 제네바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응답하는 편지를 모두 쓴 후에 편지봉투를 쓰고 그 위에다가 인봉을 하면서 거기에 새긴 인장을 여러분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lux pots tenebras <어두움 후에는 빛이> 라고 하는 문장이었습니다. 이것이 목사의 임무입니다. 한 목사가 그 교회에 오기 전 많은 사람들이 그 목사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전까지는 어두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를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닫고 그리고 천국의 복음을 들었을 때 그 어두움은 물러가고 그는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빛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목사의 가장 중요한 직무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빛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진리의 힘 보다는 목회의 방법을 신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진리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고민하기 보다는 이 세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 많이 고민을 합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가 어떻게 되었으면 생각하느냐에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지역 주민들에게 앙케이트를 내고 어떠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것은 편의점을 설립하는 정신이지 교회를 세우는 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맨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 진리에 사무친 한 사람의 설교자 혹은 전도자의 마음을 통해서 교회는 세워지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진리의 찬란한 빛을 너무나 깊이 지각하기 때문에 그 빛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그 진리를 외치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이 그 진리의 빛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무엇인가 기여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신적인 강제력을 진리에 의해서 느낌으로써 한 교회는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성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세상에서는 교회의 영광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진리에 사무친 한 사람 성도의 밝은 빛은 진리와 관계 없는 수많은 다수와 비교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캄캄한 어두운 그 장막 속에 드디어 등잔에 불이 켜지면 찬란한 빛이 등잔을 등잔불에서 나와 성소를 두루 밝힙니다. 그 빛을 의지하여 제사장은 주님을 섬기는 여러 동작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의 직무는 바로 그 진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눈은 진리에 헐떡이는 그러한 마음이 되어야 하고 오늘 이 진리를 깨닫고 거지처럼 죽는 하루를 이 진리를 모르는 채 제왕처럼 천년을 살다가 죽는 것 보다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경을 탐구하고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변증하고 또 변호하였던 신학적인 기록들을 추적해 나아가며 그 진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우리의 삶이 진실해 지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성공이 진실의 가치를 대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영광이 정직의 가치를 대체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어렸을 때 자랄 때에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너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우리는 늘 이렇게 어른들이 쓰다듬어 주면서 우리를 위해 빌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이 교회에서 조차도 무시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슬픈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교회가 진리라고 하는 Veritas를 굳게 붙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진리라고 하는 절대 기준을 자신을 끊임없이 적용한 결과가 바로 진실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진리에 대한 가치 기준이 분명하지 않으니 Verum, 진실에 대한 열망이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도덕적인 수준이 세상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고 도덕을 개선해 보고자 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덕은 신본주의적인 도덕이지 인본주의적인 개선의 도덕이 아닌 것입니다. 진리가 굳게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성경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은 명백히 진리입니다. 비록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에 비하여 종속적인 진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는 진리를 이미 경험하고 만나고 숨 쉬고 있는 사람처럼 담대하고 확신 있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선포하는 주일날 예배시간 설교가 감동이 있고 진지하기 위해서는 일주일 동안 그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목회자의 피어린 몸부림이 있을 때 그 한 시간의 설교가 진리에 대한 증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구도자가 아닌 목회자들이 교회에 포진하는 것이 이 모든 타락의 원인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목회자들이 되십시다.
두 번째는 그 등잔의 빛을 밝히게 만들어 주는 기름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의심할 여지도 없이 성령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 혼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령과 함께 역사하며 진리의 고유한 빛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종교 개혁가들이 가톨릭 신학을 거부하고 ‘꿈 메르보’의 신앙을 확증하였던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예전에는 이미 중세 시대의 말기에 와서 여러분들은 말씀의 역사와 동떨어진 성령의 역사를 추구했던 중세 말기 시대의 혼란한 상황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중세 후기에 일어났던 모든 신비주의들이 그러했고 13세기에 일어났던 소위 가톨릭 안에서의 종교개혁 운동이란 것들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탁발 수도사들 비롯해서 많은 종단의 개혁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세웠고 그들은 철저히 그리스도 예수의 모본을 따르고자 복음서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신학자 제임스 오르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의 역사를 회고할 때 아무리 훌륭한 신앙의 주의,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견고한 이론의 토대에 기초하지 않은 사상들은 곧 무너지거나 변질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러분들은 사도바울의 서신도 필요없고 복음서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단순하게 하고 예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따르고자 청빈과 가난을 부르짖었던 많은 수도원 운동들이 후기에 와서 신비주의와 손잡았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도 치우치면 안 되고 이 둘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진리, 성경, 신학 이라고 하는 지적인 기반과 또 하나는 그것들 유효하게 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진리와 함께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불어 닥치는 이 신사도 운동의 바람들 그리고 말도 할 수 없는 황당한 신비주의 운동들 말씀과 믿음을 강조한다고 하면서 일방적인 성령 운동으로 치닫고 있는 이러한 많은 불건전한 신비주의 운동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올바른 성령에 대한 강조가 결핍된 현대의 세속적인 교회에 대한 반동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책임들은 이단을 추종하는 세력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경건을 동반한 진리의 참맛을 보지 못한대서 그 모든 호기심들이 생겨나고 그리고 그 반동으로서 이 모든 불상사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조지 마스튼 교수도 만났고, 데이비드 웨일즈 교수를 만나기로 했습니다만, 토네이도 때문에 못 만났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데이비드 웨일즈의 사부작에 대해서 서로 의논들을 합니다. 여러 학자들 목회자들의 공통적인 이야기가 분석은 너무나도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안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한번 만나면 그것을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물어보기 전에 저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왜 그 웨일즈 교수가 자신을 스스로 칭하기를 현대의 신국론이라고 부를 정도로 해박하게 그 현대 사회와 기독교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면서 그 대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 저는 데이비드 웨일즈 박사의 공헌에 아주 깊이 감사하고 있고, 특별히 그 분을 한국에 소개해준 백금산 목사님과 부흥과 개혁사에도 내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많이 팔아 주었습니다. 지금도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답을 압니다. 그것은 데이비드 웨일즈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얼마전 화란에 개혁신학교의 학장이신 이밍크 박사가 한국에 내한했고 저희 교회에서 설교했고 달콤한 교제를 가졌습니다. 제가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 나라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미국과 영구겡서 다 사라진 개혁파의 유산이 너희 나라에 다 있더라. 어마어마하더라. 내가 그것을 열심히 모으고 있는데 그러한 훌륭한 개혁신학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어떻게 불과 몇 십년 사이에 철저하게 인본주의로 돌아설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딱 하나였습니다. 'Enlightenment' 계몽주의 운동이 확 불어 닥치면서 일시에 그 모든 교회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에 대해서 불신하는 그 사상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I don't think so.'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소극적인 이유이지. 자, 어떤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칩시다. 바이러스가 워낙 세서 감염되었다기 보다는 그 사람 자신이 저항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감염이 안 되었는데 자기는 감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뭘 보여 주냐 하면 표면에 드러나는 역사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할 수 있지만 내면에 깃들여져 있는 따로 있다 이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령의 강력한 갱신의 역사를 동반하는 말씀의 경험이 사라지고 차가운 신학의 tradition 만이남았을 때 그러한 사상이 밀려 들어올 때 쉽게 밀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뇌된 지식이나 설득된 지식은 더 강한 인상을 주는 지식이나 더 치밀한 논리를 가진 이성의 지식에 의해서 정복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무신론자에게, 무신론자와 논쟁을 벌여서 내가 결국 할말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논증할 적수가 못 되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성령 충만한 동안은 돌아서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그의 변증이 나의 신앙의 추어도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그런데 문제는 그 'mystery of piety' 경건의 비밀은 필설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십니까.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 무슨 대안으로서 남겨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분석은 신학자의 몫이지만 그 대안을 실행하는 것은 여러분 목회자의 몫입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나는 다음 세대의 한국교회에 대해서 비관속에 낙관론을 펼치는 사람입니다. 다음 세대에는 국민소득이 3만불 이상 될 것이고 종교적인 무관심이 먹구름처럼 온 나라에 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기독교의 진리가 아니면 해갈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들에게 장중한 개혁신학과 우주전체를 포괄하는 기독교 사상을 전해줄 때 거기에 빨려드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진리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을 모든 사람이 그 설교자의 손을 붙잡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거기에는 준비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17년 열린교회 개척의 간증입니다. 나는 한번도 옆에 있는 교회를 경쟁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상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함께.
마지막으로 이 성령과 말씀을 연결하는 한 지점을 성경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기름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여기에 보면 감람을 찌어낸 순결한 기름이라고 그랬는데 찌어낸 이라는 분사가 히브리어 성경에 까띠뜨라고 나옵니다. 이 단어는 까따뜨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까따뜨는 때리다, crash, 부수다는 그런 뜻이고 까띠뜨는 이 까따뜨의 피동남성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얻어 맞은 crash된 그런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람유를 만드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감람을 잘게 부순 다음에 압착기에 집어 넣고 프레스를 돌리는 것입니다. 위에서부터 큰 돌맹이같은 것들이 꽉 누르면서 찌꺼기는 헝겊에 걸리고 기름이 나오는데 우리들이 최근까지 기름집에서 프레스를 돌려서 참기름, 들기름을 짜는 방식과 거의 유사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성소에서 불을 밝히는데 사용되는 이 기름은 그런 방식으로 착유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냐 하면 절구에 놓고 그 올리브유를 탁 때리는 것입니다. 올리브가 탁 깨지면서 압착하지 않아도 기름이 흘러 나옵니다. 그게 아주 소량입니다. 그 소량을 스푼 같은 것으로 다 모으는 것입니다. 두 기름이 차이가 있느냐. 앞의 기름은 기름 양은 많이 나오는데 압착을 해서 프레스를 했기 때문에 불순물이 섞여서 나옵니다. 그게 좋은 기름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기름을 가지고 바르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데 불을 켜면 그을음이 나옵니다. 그것은 성소에서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탁 깨뜨려서 스스로 쏟아낸 기름을 전부다 소량을 채집해서 어떠한 불순물도 없는 순결한 기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에 등불을 밝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소의 밝힐 등불의 기름을 제조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기가 배운 진리의 말씀을 성령을 힘입어 회중들에게 밝히는 방식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목회자의 자기 깨어짐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개혁 신학을 설교한다고 해서 항상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개혁 신학의 내용 자체가 이 시대에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이야기는 맞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의 시대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상이 개혁사상이긴 하지만 그러나 준비된 사람들에게 개혁사상은 기다렸던 하나님의 진리이기도 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사상을 설교해도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이유는 그 속에 목회자 자신이 자기가 깨뜨려지고 채화된 설교로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그 방식의 문제인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독트리나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모두스 디밴디 꼽삐아 도캔디’라고 말입니다. 직역을 하면 삶의 방식이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진리를 알고 열열하게 살면 그 삶의 방식이 간단해 보이는 가르침을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그에게 감화를 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파이프처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면 꼽삐아 도캔디가 안 됩니다. 그것을 자신 속에서 채화해서 그 속에서 자신이 깨뜨려지고 변화되는 이러한 자기 생성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것들이 자신의 체액을 묻히고 피를 묻혀서 그래서 이 속에서 쏟아져 나올 때 그것이 사람들에게 진리의 울림이 됩니다. 어느 청교도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입에서 나온 말은 잘해야 머리까지 가지만 가슴에 나온 말은 가슴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리의 외침이 사람들의 심중을 울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주일학교 다니는 어느 학생이 고백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저에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선생님도 전도사님도 많이 가르쳐 주셨지만 나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반 선생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가르쳐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을 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믿어졌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내적인 체험이 신학에 있어서, 그리고 말씀 전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개혁신학을 할 때 그 때 정말 이 개혁신학이 얼마나 아름답게 주님의 교회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지 우리가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이런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오늘 세미나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