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 새벽 예배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 20:36-38)
모범적인 삶을 보여줬던 고난의 사람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면서 마지막 남긴 유언과 같은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나 깊이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로 조직된 말씀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실천, 이 두 가지를 강조하고 모든 설교가 끝났을 때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큰 환란과 핍박이 기다린다고 성령님이 증거 하시는데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그 길로 가는 목자와 그를 보내야하는 교인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그 기도가 간절했겠습니까? 모여서 한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맡기고 부탁하면서 아주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두 번째로 한 일이 입을 맞추고 함께 운 것이었습니다. 기도한 것이 신앙을 보여준다면, 이것은 목자와 양떼들 사이에 있었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양떼와 목자로 하여금 이런 깊은 사랑을 느끼게 만들었을까요?
저는 최근에 어느 두 교회를 보았습니다. 두 교회 다 목사님이 쓰러지셨는데 한 교회는 목사님이 쓰러지시고 6개월 만에 어느 정도 회복하시고 다시 말씀을 전하실 수 있는데 많은 교인들이 “건강도 안 좋으신데 그만 두시죠.”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또 한 교회는 목사님이 쓰러지셔서 3년 동안 강단에 못 서셨습니다. 3년 만에 목사님이 거의 완치되셔서 다시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연세가 들면 쓰러지는 병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병들은 금방 회복이 안 됩니다. 그런데 기다린 것입니다. 참 희귀한 경우입니다. 3년씩 그렇게 안 기다려 주거든요. 어느 교회는 돌아오지 못해도 3년씩 기다리고, 어느 교회는 6개월 밖에 안 되었고, 돌아와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데도 교인들이 “힘도 없으신데 그만 두시죠.” 이렇게 말하는데, ‘이 차이는 어디에서 만들어질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같이 기도하고 난 후에 “크게 울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사랑이 얼마나 진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 이제 목자를 이렇게 보내는구나.’ 그리고 바울의 입장에서는 ‘아, 이제 이 세상에서 성도들과의 인연이 끝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크게 울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 되게 만드는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우선 하나가 되고 보자. 그러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뭐든지 하나가 되자. 그러면 뭐든지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입장에서 보면 우선 진리를 공유하는 것이 하나 됨의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진리를 공유하는 것, 진리를 함께 알고, 그 진리를 깊이 사랑하고, 그 진리에 감동을 받는 것이 하나 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은 교인들은 목자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이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진리로 묶여진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청해온 장로들과 함께 긴 시간동안 말씀을 나누고 마지막으로 떠나려고 할 때 눈물을 흘리면서 목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맺어진 관계였기 때문에 하나 됨을 느꼈습니다. 혈통으로 따지면 이방인과 유대인이지만 혈통보다 더 뛰어난 그리스도의 사랑이 진리로 말미암아 이들을 묶어 놓았던 것입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지, 진리가 없이는 사랑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인간적인 기대를 가질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인간적인 상처를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로 하나 되는 것이 모든 사랑의 원천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b) 진리를 통해서 양들이 목자가 누구인지 알고 목자가 양이 누구인지 알면 때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성립됩니다.
마지막으로 보면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목자를 보내면서 장로들은 교회에 대한 더 큰 소명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교회를 정말 붙들어야 할 텐데. 지켜야 될 텐데.’ 하는 사명감과 ‘이제 양떼를 우리가 돌봐야 할 텐데.’ 하는 사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결국 진리를 먹고 자란 장로들의 마음에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사도 바울의 모본을 보면서 올바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렇게 양떼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로 굳게 붙잡혀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사람에 의해서 흔들리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꼭 붙들린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믿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