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 섬김의 날
녹취자 : 허 혜숙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나타난 창조의 세계는 하나님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지성 안에 있는 영원 전부터 이 세계에 대한 창조의 계획이 있었고 그것이 어느 순간에 실행이 되어서 나타났을 때에는 당신의 지성 안에 있던 것들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마음에 있었던 것과 조금 더 다른 것이거나 혹은 마음으로 먹었을 때에는 이러했는데 실제로 창조해 놓고 보니까 저러했다는 둘 사이에 어떤 불량 속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개의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늘 위에는 천상의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아래에는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하나님이 직접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며 통치하셨으나 이 지상의 세계는 하나님을 닮은 영혼과 지성을 가진 인간을 두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지성을 따라 이 세상을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세계 창조에 관한 많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이 시간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세계에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창조되었을 때 그 때 이 모든 것들이 영원에서 왔다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라고 성경에서 여러 차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은 영원 하시다라고 하는 이 명제가 사실은 틀린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영원 하시도다 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술어로서 묘사할 수 없는 그런 존재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삶이 시작 된 이래 영원에 대한 사유는 오직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끊임없이 회기 하는 원적 영원과 또 하나는 끊임없이 앞을 향해 가는 직선적 영원 이 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영원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영원관은 직선적 영원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말은 틀린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절반은 맞는 것이고 절반은 틀린 것이라는 말입니다.
영원을 생각할 때 제 생각으로는 하나로 생각할 수 없고 최소한 이 영원은 존재의 양식을 따라서 둘로 나누어서 우리들이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본체적 영원 essential eternity이고 두 번째로는 효과적 영원 effective eternity입니다. 이것은 적의 분류입니다. 본체적 영원은 영원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효과적 영원은 그 본체적 영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효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본체적 영원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은 시간 속에 묶이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선도 아니고 원도 아니십니다. 즉, 원적인 찰나의 시간이 끊임없이 윤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반복적이고 회기적인 영원도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고, 시작도 없이 끝도 없이 무한히 달려가는 직선적인 영원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설명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모든 시간을 초월하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대 개념, 시간의 대응 개념으로서의 대상은 존재와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존재를 통해서 시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시간의 대 개념으로서 모든 존재는 시간 속에 존재함으로서 시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confession에서 말하기를 ‘시간이라고 하면 모를 것이 없을 것 같은데 막상 시간에 관해서 말하라고 하면 저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 시간의 신비를 노래했습니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시간 속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들이 존재함으로서 시간이 도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대상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사물들을 창조하시기 때문에 따라오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존재하는 것 없이는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물이 있으면 그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사물은 시간상으로 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하는 사이에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현재라고 하는 것은 아주 방막의 시간입니다.
누구도 잴 수 없는 그 방막의 무한대의 시간에 그 방막을 어떤 존재가 그것을 누리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한 문장이 끝나기 전에 현재가 끊임없이 과거로 줄달음질치면서 단어와 단어의 연결을 통해 사상이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할 때에 그 사물은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기 때문에 그 존재를 누릴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 때문에 누릴 수가 없고 방막의 현재만 누릴 수 있는데 그 방막의 현재는 그야말로 무한소의 시간으로 끊임없이 과거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막의 현재가 미래에서 과거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겨우 자신의 존재를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막의 현재 속에서 살면서도 우리 같은 인간은 오늘 우리가 괴소 성을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내가 어제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존재라고 느껴지지 않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만나는 이런 물건, 사랑하는 학우들, 모두 방막의 현재를 달려가면서 아주 무한소의 시간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인데도 낯설지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영원 안에 있는 기억 이라는 기능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 존재가 누리는 시간은 방막의 현재인데 그 방막의 현재는 우리의 영혼 안에 무한한 영상과 기억들을 남기면서 사라져갑니다.
그래서 실제로 시간은 사라져가 버렸는데도 시간에 대한 기억들이 남아서 마치 자신의 존재를 누리고 있는 것 같은 두터운 인식의 그 층 차들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방막의 현재만을 누릴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미래도 과거도 없고 오직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물의 생성과 마지막 소멸에 이르는 전과정을 하나님이 한 번에 보시고 한 번에 누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고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마지막에는 그에게로 돌아가고 영원한 세계로 진입할 것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선적 영원이나 원적 회기의 영원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자신 자체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존재에 있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 없었던 것들이 없고, 또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이 바깥으로 나타났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이 동시에 또 하나님 안에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으시다는 패러독스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 자체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으로 있는 분이시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이 시간의 영향을 받아서 스스로 감소하시거나 혹은 시간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이 깎여 나가시거나 혹은 시간 속에서 방막의 현재를 누림으로 당신 자신의 전 존재, 사물의 전존재를 함께 누리시지 못하시는 그런 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실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본체적 영원입니다.
그 다음에 효과적인 영원은 영원 자체는 아닌데 영원하도록 존재하는 사물들이 있습니다.
자, 여러분 주위에 있는 것들 가운데 영원이 존재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서 봉사하려고 합니까? 다시 기회를 주겠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영혼입니다.
그것은 영원합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있다라고 할 때 바위가 있다라고 하는 것과 물이 있다고 하는 것과, 기체가 있다고 하는 것과, 민주주의나 사랑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각각 틀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있는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형이상학적인 가치도 아주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손으로 잡힐 수 있는 물리적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영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영원하시다고 하는 것과 우리의 영혼이 영원하다고 하는 것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고 하는 것과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다고 하는 것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하다고 하는 것과 공법은 영원하고 정의는 영원하다고 하는 것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무시무종하신 영원하고 인간의 영혼을 비롯한 하나님이 영원하게 만드신 모든 사물들은 유시무종한 영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원한 존재이시고 나머지 영원한 사물들이 있는데 인간의 영혼이라든지 하늘나라에서의 천사들이라든지, 혹은 하늘나라에도 영혼과 천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이라든지 육신과 영혼에게 필요한 하늘나라의 여러 인간과 천사들이 아닌 또 다른 사물들도 존재합니다. 그런 것들도 영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자기 안에 영원하게 하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세계 속에서 모든 사물들이 하나님 자신의 능력에 그 분의 무한함에 자신의 존재를 위탁하고 있듯이 또한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하게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영원한 존재의 능력을 하나님 자신에게 덕 입고 있기 때문에 영원한 것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저는 효과적 영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원 그 자체는 우리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효과적 영원들,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효과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효과적인 영원입니다.
이러한 논리의 틀 속에서 이 세상에는 많은 사물들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첫째가 가시적 사물들입니다.
이런 것들과 영원, 그리고 시간이 갖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사물들은 우리의 육체의 감각기관, 그것들을 통해서 파악되어서 그리고 그것들이 지각되고 지각 된 것들이 최종적으로 우리 안에서 인식이 되어서 어떤 사물들인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물들은 그 존재에 대한 판단을 인간의 육체의 감각기관에 의지하기 때문에 가시적 사물들이라고 우리들이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가시적 사물들은 시간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시간은 좀처럼 파악되지 않고 시간은 어떤 존재가 자기를 허물어 버림으로서 측정되는 것이 시간입니다.
즉 어떤 뜻이냐 하면 혼자서 살아갈 때에는 자신이 자기의 얼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월이 많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친구를 만납니다.
한 30년 만에 만나면 내 마음속에는 그 형제가 이십대의 기억이 선명한데 30년 후에 만나고 나면 지금 보이는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그 형제에 대한 인상이 20년 전에 내 마음에 찍힌 정지 된 영상과 비교 될 때 매우 틀린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틀림의 정체가 부패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부패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꽃이 있으면 꽃이 봉오리로 있을 때에도 꽃이고 활짝 피었을 때에도 꽃이고 시들어서 꽃이 이파리가 시커멓게 되었을 때에도 꽃인데 가장 꽃다운 것은 세 번의 시기 중에서 두 번째 시기입니다.
자존심이 좀 상하는 이야기인데 사람의 육체만으로 말하자면 가장 사람다움으로 꽉 찼을 때에는 18, 19, 20, 21세 그 때입니다.
그 이전에는 완전성에서 미달, 그 이후에는 완전성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육체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패라고 하는 것을 나는 존재에 대한 비존재에 대한 침투다라고 정의합니다.
존재하는 것들이 스스로 자기를 허물어버리는 것을 통해서 시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시간의 개념은 존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이 구강 안에 수많은 미생물들이 존재합니다.
그 미생물들은 잠깐 동안에도 수없이 태어나고 죽고 하면서 우리의 이 구강을 텁텁하게 만듭니다.
그런 미생물에게 있어서 1년이라고 하는 것과 높은 하늘에 떠있는 별들의 세계에서의 1년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시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존재가 어떤 존재냐에 따라서 그 가변성 여부, 즉 비존재에 의해서 침투당하는 존재의 여부에 의해서 시간의 길이는 달라집니다. 그것을 발견해 낸 사람이 아인슈타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상대성 원리로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정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사물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허물면서 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허물어지지 않은 완전한 존재라고 한다면 그를 통해서는 시간을 측정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허물고 마지막에는 있는 상태에서 없는 상태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 사물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유명한 말을 합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제공하지만 시간은 우리에게 그것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이것을 사랑하라고 제시해 주지만 시간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사랑이 없는 것을 향한 사랑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영혼을 가진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이 있는 상태에서 없음을 향해 달려가는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불행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작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와서 자기 사랑에 대해서 말씀 드렸음니다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기사랑 하면 그것은 대부분 특별한 설명이 붙지 않는 한 그것은 공정한 자기사랑이 아니라 자기의 육체에 대한 사랑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있고 육신의 감각기관에 현혹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진리의 참 된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자기의 부패한 육신밖에는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아주 사랑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 나의 육신도 있음에서 없음으로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이 계속되면 언젠가는 사랑은 끊임없이 계속되는데 언젠가는 나의 육신도 없음을 향해서 달려가서 마지막에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존재는 없어지고 사랑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허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철학을 능가하는 아주 뛰어난 하나님 자신의 존재적인 명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엘리에 에쉐르 엘리에’ 이 짧은 시간에 이 위대한 구절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다 이것이 좋은 번역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중 좋은 해석 중의 하나가 ‘I am being what I am being' 나는 존재하고 있는 자로서 존재하고 있는 중이다 진행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있는 존재를 향한 사랑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사랑해도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랑이 대상을 잃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은 사실은 대상 소식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영원에 대한 관점이 기독교적인 윤리와 이 모든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형이상학적인 토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욕망이 다른 욕망보다 가치가 있고 어떤 대상을 향한 사랑이 어떤 대상을 향한 사랑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 모든 판단의 기준은 영원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가치가 도입되지 않고는 파악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에 대한 사랑보다는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이 훨씬 더 중요한 의의와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사랑보다는 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훨씬 더 깊은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몇 주 전에 아주 중요한 기사가 뉴욕 타임지에 실린 기사가 실렸습니다. 빈민들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지는 마더테레사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그가 빈민들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은 1979년 11월이었습니다.
석 달 전인 8월에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신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당신에게는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하나님 아버지가 나에게는 존재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당신 안에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친교가 나에게는 없고 혹시 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려고 하면 나는 한 마디의 말도 이을 수 없으리만치 내 혀는 입에 붙어버립니다.
이 무한한 거리감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타임즈 기자는 마지막에 ‘아마도 마더 테레사는 죽을 때까지 이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맺었습니다.
놀랍죠?
목회라고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죄 된 욕망 감각적인 사물들로 인한 현혹 때문에 끊임없이 영원한 것들을 버리고 한시적인 것들을 향해 달음질치려고 하는 인간들을 영원에 대한 감각을 불어넣어서 참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똑같은 한 인간으로서 자기 안에 있는 죄와 분투하고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지는 인간의 길을 걸으면서도 동시에 그는 아주 분명하게 궁극적으로는 그 영원히 있는 존재이신 하나님 자신을 사모하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진정한 생명을 누리며 살려고 하는 구도의 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도이신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삶입니다. 그
런 도의 화신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이 곧 도 에임입니다.
그리고 그 도에의 삶이 사실은 이전에 많은 사역자들이 말했던 예지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예수를 알고 그 분께 자신을 합치시키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가리켜서 도열의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도열의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여야 하고 그런 도열의 삶을 살아가도록 서로를 격려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도위입니다.
도위의 삶을 함께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 그런 참된 진리의 빛을 모르고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께로 회기하지 않는 한 어떠한 행복도 이 잠재적인 세상 사물 가운데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지혜자의 마음으로 이런 인간의 비참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지혜자인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인간이 참으로 어떻게 살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것을 보여주시는 것을 체험하고 그것을 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적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며 또한 목회자여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가지적 사물입니다.
이것은 우리 육신의 몸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으로 보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지성으로 사유되어서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천국은 천국 안에 있습니까? 시간을 초월합니까?
여러분들이 금세에 태어나셨으니까 다행인데 약 천 년 전에 태어났으면 화형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시간의 사유에 대해서는 어설픕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것은 하나님 한 분 외에 아무도 시간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물론 거기에서 감각적인 질료나 아니면 사유적인 질료들이 시간을 초월하느냐 초월하지 못하느냐에 대한 논쟁들은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하나님 이외에는 시간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제가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명제가 이 존재에 관한 명제입니다.
성부가 계셨는데 사실은 ‘계셨는데’라는 말을 쓰면 안 됩니다.
성부가 존재하는데 그 성부에게서 성자가 낳으시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발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명제를 가지고 풀면 이런 논리가 성립됩니다. 성부 혼자 계시다가 잠시 후에는 성부와 성자가 계시다가 그 후에 성령이 낳으심으로서 비로소 삼위일체가 되셨다.
즉 삼위일체는 세 가지 과정을 거쳤는데 일위 일체, 이위 일체, 마지막으로 삼위일체가 되셨다.
이것은 맞아요? 틀려요?
이렇게 분명히 성부에게서 성자,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셨다고 표명하면서도 이렇게 세 단계에 거쳐서 삼위일체가 완성되었다고 하는 명제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시간을 가지고 이것을 설명했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 세계에서는 시간이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하면 앞 뒤 선후의 순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부 혼자 계셨는데 성자를 낳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자 없이 성부가 혼자 존재하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천국의 시간을 초월했다고 하면 하나님과 같은 존재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천국이 먼저냐 하나님이 먼저냐 그런 것을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말이 됩니까? 안 됩니다.
왜냐하면 1일 이전에는 아무것도 창조 된 것이 없습니다.
어떤 교리서에 보니까 원을 그려놓고 알파 해놓고 여기는 창조 해놓고 이쪽은 알파의 영원 그래놓고 거기에다가 영물의 창조 천사들의 타락 했는데 일고의 가치가 없는 교리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들이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과 시간을 다툴 수 없도록 영원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하나님과 동시에 존재하게 됩니다.
천사가 어떻게 하나님과 동시에 존재 할 수가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천국은 시간 안에 묶인다? 시간을 초월한다?
그러면 아까 시간은 존재를 허물면서 겨우 관측이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천국에서도 존재가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져서 스스로를 소멸하는 상황이 발생합니까? 안 합니까? 그러면 어떻게 시간이 존재합니까?
그래서 여기에서 이제 형성의 영원이라고 하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지만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본질은 사람이며 동시에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람의 extension 확장입니다. 자기 확장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에 생명과 사랑을 불어넣어 주셔서 삼위 안에 있는 그 교제의 모상을 이 세계 속에 하나님께서 심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든 것들이 함께 존재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상의 세계에서 당신 자신의 생명과 사랑을 지식과 함께 끊임없이 당신이 창조하셔서 영원한 것들로 만드신 거기에 끊임없이 침투하게 하셔서 그들을 덕 입힙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다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완전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완전한데 어떻게 더 완전해 질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전했습니까? 불완전했습니까? 완전했습니다.
그런데 땅을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는 것은 완전함에 더하는 것입니까? 빼는 것입니까?
완전한데도 더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씨앗이 완전합니까? 불완전합니까? 완전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심으면 자랍니다.
나무가 사람 키만큼 컸습니다. 불완전합니까? 완전합니다. 그런데 더 완전해 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천국은 증진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그것과 대칭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에서는 익숙해지는 것이 없는 환희, 지옥에서는 면역되는 것이 없는 고통이 점진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이론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점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지식을 이렇게 펼쳐서 당신 자신의 지식을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십니다.
그 때에 지적인 환희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세계가 점진합니다.
그 속에서 시간이 측정이 됩니다. 사물이 허물어지지 않아도 시간이 측정됩니다.
그러한 영원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이 어느 순간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통해서 시간 바깥으로 확 쏟아져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전혀 새로운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원 세계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지성과 계획이 시간 속으로 확 쏟아져 나오면서 이미 하나님 안에 있는 원인과 결과의 수많은 고리들이 시간의 세계 속에서 그것들이 죽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에 대한 계획은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간 세계 속에 확 펼쳐졌을 때 하나님은 그것들을 보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진짜 기뻐하신 것이냐? 그렇게 말해서는 신학적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로 인해서 출렁거리는 존재이냐?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용서하시고 마지막에 인용문 하나를 읽겠습니다. 웃지 말고 들으십시오.
안셀무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자비로우시지만 당신 경험에 따르면 자비로우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가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실 때 우리는 당신의 자비의 효과를 느끼지만 당신은 어떠한 정동도 느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불변하시면서도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정동의 작용들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만히 불변하시는데도 우리가 그릇되게 살면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효과가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불변하시면서도 시간 세계 안에 이런 사물들이 창조되었을 때 그것을 보는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너무 기뻐하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모든 것이 작정되어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시간 속에 살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헌신하고 하나님 앞에 한순간 한 순간의 삶을 진실하게 살려고 분투하는 그 모습 자체가 위대한 영원이신 하나님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이 끊임없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 속에 사는 허무한 인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이라고 하는 무대 속에서 한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야할 영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