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9장의 신앙부흥
1. 다니엘의 영적 각성(단9:1-2) ..................................... 2
2. 기도하기를 결심하고(단9:3-4上) .............................. 9
3.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단9:4下-6) ............................ 16
4. 이스라엘의 죄①(단9:12-15) ....................................... 24
5. 이스라엘의 죄②(단9:12-15) ....................................... 32
6.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는시대(단9:16) .................... 39
7. 하나님의 의로우신 분노(단9:16) ............................... 49
8. 다니엘의 기도(단9:16下-17) ....................................... 57
9. 부흥의 본질(단9:17) ..................................................... 61
10. 긍휼을 구하게 하는 각성(단9:18) ........................... 69
11. 들어주소서(단9:19) ...................................................... 73
12. 용서하소서, 행하소서(단9:19下) .............................. 79
1. 다니엘의 영적각성 (단9:1-2)
다니엘서 9장은 대단히 의미깊은 장입니다. 특별히 부흥에 대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9장을 언제부터 설교하고 싶었는데 워낙 덩치가 커가지고 손을 못댔는데 하다가 능력이 미달되어서 여호와의 본문을 심히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중간에 그치고 다시 감당할수 있을 때까지 접어두었다가 설교를 하겠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이 9장을 끝까지 설교할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우선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9장을 볼수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저는 다니엘이 이9장을 적어 내려갈 때 가졋던 똑같은 관점에서 9장을 봐야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특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봐서 자신이 펴나가고자하는 원리를 입증하는 방식으로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들이 유행하고 있는데 그것보다는 성경의 저자가 가졌던 관점, 더 심도 있게 이야기 하자면, 성경의 저자가 성경을 써내려 갈 때 느꼈던 그마음의 설래임 혹은 좌절 혹은 기쁨 혹은 분노 혹은 열망 혹은 가슴 아파함 이런것들을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느끼면서 같은 관점으로 9장을 읽어 내려갈 때, 그때 성경본문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이9장의 대주제는 “주여, 예루살렘에 부흥을”이라는 제목으로 요약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가 다니엘서를 하면서 기억해야될 것은 다니엘이 연대기적으로 기록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주의하셔야 됩니다. 대부분의 성경은 앞장은 뒷장보다 시대가 앞서고 뒷장은 앞장보다 시대가 뒤서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러나 성경이 그 원칙을 모든 성경을 편집할 때 다디켜 나가지 않았어요. 복음서는 대개 시간대로 기록하는데 요한복음은 주제별로 기록을 해요. 그래서 연대가 안맞는다 말이예요. 사무엘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거든요. 하서에서는 주제별로 배열이 되서 나간다 말이예요. 다니엘서 8장을 보며는 다니엘이 기이한 영적 체험을 합니다. 이상을 봐가지고 결국은 여러날동안 혼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이전에도 여러 가지 이상을 봤지만 그러나 이상을 보면서 혼절을 하기까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였는데 그일이 8장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사실은 9장보다 훨씬 10년정도 앞서있는 시대였다 얘기입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전통속에서는 선지자가 분류가 되지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다니엘이 분명하게 예언자중에서 뛰어난 예언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대다수의 청중들을 모아놓고 그다음에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 이거리 저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피를 토하듯이 외친 그런 선지자는 아니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지자로 불리워지기에조금도 부족됨이 없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하나님께서 그 어두운 역사의 시대속에서 역사의 경점이 어느밤에까지 왔는가하는 것들을 말하기를 즐겨하셨던 소수의 상대 가운데 한사람이었다는 점과 그리서 풍부한 이상과 그리고 풍부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예언들을 하나님께로 받았다는 것과 또 하나는 비록 그가 거리를 헤매거나 예루살렘이나 애굽에서 그렇게 외치던 선지자의 그런 모습으로 설교사역을 하진 않았지마는 그러나 언제든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놀라운 역사의 예언의 내용들을 항시 발표하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고 그기회를 주시면 그는 훌륭했던 선지자의 후예답게 누구앞에든지 당당하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말했다는 점에서 볼때에 그가 비록 수많은 청중들을 거느이고 그런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대중적인 설교가의 길을 걸어간 것은 아니지만 여러모양으로 볼 때 이사람은 선지자로 불리워지기에 대단히 합당한 사람이였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읽어드린 1절과 2절속에서도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메시지를 만나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느것을 손대야 될지 잠시 망설이게 되는데 곁가지를 다 쳐버리고 이제 9장에 깔려있는 부흥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향해서 우리들이 한 번 달려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1절에 보니까 역사적인 맥락이 나오는데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이라 했는데 이런것들이 아주 복잡한 역사적인 배경을 깔고 있습니다. 이게뭐냐면 역사는 원래 바벨론 그다음에 메대 바사 그다음에 헬라 로마 이렇게 넘어 가거든요. 근데 바벨론말고 바벨론 다음시대가 메대와 바사 시대가 이루어지는데 바사가 역사속에서 배운 페르시아라는 나라입니다. 메대라는 나라는 역사속에서 나오는 메디아라는 나라예요. 근데 이두나라가, 중간에 여러 가지 역사적인 과정이 있습니다만, 결국은 연합국처럼 공존하게 됩니다.그리고 한왕이 메대와 바사를 함께 다스리는 이런 연합국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그때에 갈대아 나라는 이제 패권을 물려주게 되고 그때에 보며는 여기에 나오는 다리오라는 사람이 6장에 나오는 그 다리오 인거예요. 디리오왕이 여럿 있는데 6장에 나오는 왕이예요. 그래서 다니엘을 사자굴속에 집어 넣어다가 크게 후회했던 그리고 그를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라고 칭해주었던 그왕입니다. 근데 그가 자신의 나라를 고래스라는 사람에게 물려줍니다. 그리고 그는 바벨론지역으로 가서 다시 그나라의 새로운 왕으로 취입하게되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서 이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며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 전까지 다니엘이 어느정도의 영성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아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가자마자 직면했던 궁정에서 나오는 왕의 진미로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에 아마 거기에 틀림없이 율법의 문제가 걸려 있었을 거예요. 그율법에 금한 음식을 먹는다든지 아니면 우상에 제사한 음식이라든지 뭐 이런 등 등에 상정 가능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어쨋든 그것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된다 생각을 했던 모양이예요. 아니면 나라가 이렇게 망했는데 진귀한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하나님앞에 옳지않다는 생각을 했다든지 다양한 문제들이 걸려있기 때문에 하여튼 그것이 제일먼저 다니엘을 비롯한 친구들이 거기에 갔을 때 부닺쳤던 첫 번째 문제였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했던 일이 1장10절에서 뜻을 세우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했다라는 것을 보니까 그것을 먹으면 뭔가 율법적인 문제에 걸리는 같았어요. 그러한 결심을 했던 것을 보아서, 사람이라는 것이 그왕국에 불러다가 좋은 음식 먹여준다는데 싫다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이 더럽혀진다라고 생각되어지니까 이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영예와 권세가 자신에게는 문제꺼리가 됐습니다. 그래서 뜻을 세우는 장면이 나오죠. 이것을 보며는 거기와서 생긴 것이 아니라 평소에 얼마나 그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사모함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그러한 투철한 신앙정신 이런것들이 있기 때문에 뜻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나 우린 이런정도를 유추할수 있을뿐입니다.
그이후에 오히려 다니엘은 정말 약속의 땅으로부터 멀어져 나온 이방의 땅에서 그것도 대접을 받는다고 하지만 포로의 몸으로 와서 물론 높은 지위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피지배국의 백성이라는 딱지는 어디 가서 떨어질수도 없는 것이였죠. 그렇게 들어오게 되어서 이속에서 그는 오히려 영적으로 매우 깊어지고 그리고 여러 가지 이상들을 체험하면서 소위 얘기하는 신령한 사람으로 변해져가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보면서 정말 재미있는 교훈을 도출해내게 되는 것이예요. 그것은 뭐냐면 하나님이 한사람을 영적으로 깊이 성숙시켜서 신령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역사를 움직이는 한 주인공으로 삼으시는 방법이 얼마나 인간이 생각하는 방법하고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사람들은 어떻게 한사람의 지도자, 역사를 움직이는 위인이 생겨난다고 그렇게 뜻하고 있고 또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십쇼. 사람들은 훌륭한 제도, 그제도속에서 받은 공부, 그리고 그의 장래를 장래를 보장해주는 다양한 조건들 이런것들을 통해서 한사람이 훌륭한 지도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니엘이 맨처음에 포로로 끌려왔을 때 그는 아마도 별도의 사람으로 처음부터 선발되어서 끌려갔기보다도 수많은 포로들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정든 고향을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깃들였던 예루살렘성이 파멸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끌려갔을 것입니다. 주전 605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끌려갈때에 다니엘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치욕적인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재연되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단순히 나라를 잃어버린 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려 버리신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느낄수 있는 비참한 영적 절망, 신앙적인 좌절, 평소 가지고 있었던 편협된 신학의 파괴 이런 모든 것들을 총체적으로 경험하면서 인간이 일반적으로 느낄수 있는 좌절 분노 이이상의 말하자면 빛깔 짙은 그런 혼돈의 감정을 가지고 끌려갔을 것입니다. 그속에서 무슨 구원의 여망이 있겠습니까. 바벨론이 지나고 메대가 지나고 메대와 바사가 지나고 그리고 그나라들이 망하고 성하고 다시 왕들이 세워지는 수많은 광경들을 역사속에서 목격했습니다. 어디에도 자기네끼리 나라를 주고 받고 왕들은 바뀌지만 이스라엘이 패권을 차지하고 다시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할 것이라는 소망같은 것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깊은 역사적인 좌절 그리고 유대역사 가운데 가장 캄캄하고 소망이 없는 어두운 밤바다와 같은 시련의 역사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은 그시련의 역사를 통해서 역사를 움직일수 있는 한 사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두워져가는 그역사속에서도 하나님이 비록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지만 하나님이 그백성들을 향해 인자와 자비를 그치지않았다는 사실을 누구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까. 이 사랑하는 선지자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그이름 그대로 ‘다니엘’ 하나님의 판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판단,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판단,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기준,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관점, 역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을 이다니엘에게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그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신 놀라운 증거들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와서 여러 신앙의 체험들을 신령한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 속한 이상들을 보는 놀라운 체험들을 하게됩니다. 그런데 그체험들이 각각 모두 무엇과 관계가 있었나하며는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였어요. 나라가 망하고 다시 서고 왕을 폐하시고 새왕이 지어지고 이런 역사와 깊은 관계에 있는 것들이 였어요.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다니엘이 이렇게 바벨론으로 끌려와서 여러해를 지나면서 하나님이 거듭 보여주시는 수많은 신령한 체험들을 통해서 다니엘은 틀림없이 역사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역사에 대해서.. 놀라운 사실이예요.
오늘날 이교회에 모든 무기력함 그리고 이교회에 말하자면 자기만족적인 어떤 신앙들 이런것들은 어디에서 비롯되냐면 역사에 대한 의식이 결핍이예요. 예수 믿는 신앙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은혜를 받아서 성령이 충만해도 그사람이 이런점에 있어서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의해서 그사람이 세상에 대해서 미칠수 있는 영향은 매우 엄청난 크기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은헤를 받아서 만사형통하고 그래서 복받고 물론 복받죠. 그리고 그걸로 만족하고 감사하고 그러면서 열심히 교회에서 시키는대로 헌금도 하고 복음도 전하고 교회 봉사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시험에 들면 시들먹해지죠. 그러다가 다시 회개하고 회복합니다. 근데 그런식으로 회복과 침체, 회복과 침체를 계속 반복하는데 그자신이 그렇게 역사의식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삶을 계속하고 있는한은 교회가 은혜가 충만해도 그은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흐르질 않아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어느순간에 은혜를 주셔서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칩시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대로 하나님의 교회는 사람으로 충만해지고 모여있는 그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충만되어지게 되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시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고나면 다음에 어떤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아, 좋다. 하나님의 부흥은 교회를 소금창고로 만들기 위해서 부흥을 주시는게 아니예요. 하나님의 부흥은 교회에다가 수천와트의 형광등을 켜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시는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이 교회에 부흥을 주시고 역사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얼굴빛을 돌리실때에는 하나님은 그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역사에 영향을 주시고 싶은거예요. 역사에 영향을 주시고 싶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역사의식이 없다는 이유가 어디서 들어나냐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중요한 교훈이 뜨겁게 와닿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 그나라를 구하라. 그다음에 주기도문 하나도 와닿지 않는 거예요. 예)어느 집회에서 목사님속에는 말씀이 불이 되어 타들어 가는데 그사람들은 너무 냉담해요. 초보운전때라 그땐 잘몰랐는데 나중에 정리하니까 관심의 수준이 맞지 않는거예요. 이사람들은 질식할 것같은 신앙생활에서 숨을 돌리고자하는데 설교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지않는 것은 인생도 아니다 그러니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설교예요. 역사의식 자체가 너무나 결핍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한교회의 회원이 되어서 이조국교회의 일원이 되었다할 때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는 순간 흘러가는 이역사의 물결을 어거하기위해서 부름받은 사람들이예요. 여기가 아멘을 해도 크게 해야할 대목이예요.
말하자면 다니엘이 앞에서 여러번 체험을 하는데도 이게 대부분이 나라가 바뀌는 이야기였거든요. 이9장에 와가지고 말하자면 이바벨론이 그야말로 영적각성이 일어나게 돼요. 나는 확실히 말하기는 이 9장에서 다니엘이 그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하면서 요즘말로 말하자면 시각이 우리와 거의 같아졌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래서 이사람이 여기서 대대적인 영적인 체험을 하게된, 뭐 어마어마한 환상이 보이고 아니면 동물이 보이고 뿔들이 보이는 이런 체험은 아니예요. 근데 놀라운 생애에 잊혀질수 없는 다니엘의 새로운 신학이 수립되는 순간이 9장입니다. 그 9장에서 그 놀라운 각성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언제 그런 각성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한 번 봅시다.
2절 한 번 봅시다. ‘ 곧 그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이게 좀 기이한 느낌이 들지않아요. 이때 이미 선지서라 불리우는 책들이 결합이 되어 가지고 묶여서 이것이 서책이라고 표현된 것이거든요. 그것이 이미 묶여서 돌아다니고 있는 거거든요. 예레미야는 여러분 알다시피 포로로 끌려가기 전서부터 포로로 끌려간 이후로 까지 사역을 했던 그시대에 걸쳐 있는 사람이였단 마이예요. 예레미야는 다니엘에게 친숙했던 사람일까요, 아니면 새까맣게 먼시대 사람일까요? 아주 친숙한 사람이였어요. 그런데 이것이 책으로 묶어져서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예요. 예언서였어요. 근데 지금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온지가 일 이년이 아니라 수십년이 지났습니다. 그랫는데 예레미야 25장에 나오는 이예언을 여기서 말하자면 깨닫게 된거예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예레미야서를 한 번도 못 읽었다 그럴리는 없잖아요. 열린교회 식구들도 일년에 두 번정도 성경을 읽는데 이사람이 그랬을리는 없단 말이예요. 의식없이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성경을 만나게 하신거예요. 그게 예레미야 25장이었습니다. 이걸 딱 보니까 놀라운 역사가 나오는 거예요. 그 역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너희가 망한 것은 죄때문이고 너희가 포로로 끌려간지 70년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될것인데 너희가 돌아오는 그이유는 바벨론의 죄악이 가득 찼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벌할텐데 그들을 벌한 부수적인 효과로 너희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었어요. 이속에서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한축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며는 죄의 문제예요. 죄의 문제. 이게 역사를 모두 읽어 내려가는 한축이예요. 이해를 돕기위해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시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로 하셨으면서 아직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뭐예요. 죄가 아직은 가득 차질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죄가 가득 차기를 기다리시는 것처럼 말씀하셔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누누히 상기시키셨던 것이 무엇이예요. 내가 이땅을 주는 것은 너희가 의로운 백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저놈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심판을 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역사를 이루어가시는 부수적인 열매로서 백성들이 가나안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누누히 강조하시는 거예요. 이게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의 큰 축이예요. 신약이고 구약이고 상관없어요. 이것이 역사를 움직이는 축이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 받고 살아가는 이세상의 나라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죄악이 가득하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다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속에서 그나라를 쓸어버리시는 거예요. 여러분 아직은 많은 역사가 흘러가지는 않았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저는 일제시대 때에 고난을 받았던 대부분의 교회 목사님들의 그공통적으로 왜 우리가 일본에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할 때 교회 거의 모든 지도자들이 공통적인 합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가 무죄한자의 피를 너무 많이 흘렸도다 왜 너무나 많은 선교사들을 죽이고 말하자며는 복음을 위해 이땅에 온 수많은 사람들을 도륙한 그 죄에 대한 값으로 또 6.25 일어나가지고 완전히 사람들이 땅을 다 빼앗기고 부산과 대구지방에 모여 가지고 대규모적인 말하자면 목사들의 각성운동이 일어나게 되요. 그게 삼일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될 때 거기 모여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왜 그 화려하던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을 빼앗기고 우리가 이렇게 말하자면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게 돼었냐고 물었을 때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역사인식이 뭐냐며는 우리의 우상숭배가, 일제시대 신사참배의 죄악이, 해방과 함께 온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린 그역사의 책망을 받고있는 것이라고 하는 합일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때만해도 제가볼때는 그래도 역사인식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항일투쟁을 했던 사람들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반정부 투쟁하는 사람들하고는 신앙의 차원이 틀린거예요. 자유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항일투쟁하고 그러거 아니란 말이예요. 공산당투쟁하고 그런거 아니예요. 거의 모든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역사인식들이 있었단 말이예요. 그런것들이 지금 사라져가고 있는 거죠.
근데 다니엘이 이러한 놀라운 신앙의 체험들을 하는 가운데 귀한 역사인식을 갖게되는데 그것이 뭐냐면 예레미야의 서책을 읽어가면서 그러면서 그는 다른 다라의 흥망을 주관하는 것만 깨달은게 아니라 그모든 나라에 성하고 흥함과 왕이 바뀌는 것과 제국이 멸망하고 부침하는 이모든 역사의 수레바퀴 한 가운데 말하자면 그모든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역사가 있었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죠. 이게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매우 커다란 영적각성이였어요. 이전에도 단순한 생각들은 가지고 있었죠.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으니까 다시는 죄를 짓지말자는 이런 단순한 인식들은 가지고 있었어요. 이9장에 와가지고 예레미야의 서책에서 이스라엘의 바라보면서 그모든 역사를 움직이는 한축을 발견하게 되고 그리고 그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모든 나라를 움직이시는 가운데 모든나라의 역사와 관계 맺고 있는 이스라엘을 움직이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본거예요.
그러면서 이사람이 이9장에서 그런 역사의 인식에 대해서 눈을 뜨면서 무엇을 갈망하게 됐냐 하며는 진정한 부흥에 대한 갈망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여러분,하나님이 다니엘이 이렇게 변화되는 때를, 이런 역사인식에 대해서 각성을 하게 되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근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바꾸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런 방법이 무엇이었냐 하며는 서책을 조용히 읽어가던 순간이였어요. 여러분 다니엘이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그가 늘어가는 퇴직금을 보면서 마음 든든해하고 있었겠습니까. 정권이 바뀌고도 계속 유임, 개각때마다 유임이라고 발표되는 말하자면 내각에 자기명단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서 위로를 삼았을 것입니까. 아니며는 왕이 특별한 때마다 내리는 보너스나 아니면 전토나 이런것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해서 다니엘이 마음이 부요해졌습까. 다니엘은 이미 이런 모든 기쁜들을 바벨론에서 잊어버렸습니다. 이미 자신의 나라의 땅을 잃어버리고 여호와와 교제하던 아름다운 성전을 잃어버리고 자신은 이제 비참한 처지에 와있다는 사실을 눈뜨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었다면 무엇이었겠어요?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참으로 기도하는 것이 위안이였고 또하나의 위안이 있다면 서책을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깨닫는 것이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위로였다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가장 캄캄한 어두움을 지나는 하나님의 사람의 신앙생활의 한방법을 배우게 되는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신앙을 버리고 그리고 형식적인 신앙이 유행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도와 교훈을 우습게 여기고 교회가 교회다워지기를 거절하고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영향을 미치기를 싫어하고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세사을 위해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교회가 쓰임받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진실한 교회의 모습을 잃어 버려가고있는 이어두운 때를 지나는 하나님의 방법들은 교회를 향해 불평하고 역사를 향해 원망하고 세상을 향하여 한을 품고 교회를 향하여 불평과 불만을 늘어 놓으며 그시대를 욕하고 그시대를 멸시하는 것, 이것이 그시대를 지나는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들의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수많은 왕이 갈렸고 그리고 자신의 재산도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관직이 계속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여전히 자기가 가장 유대역사에서 캄캄하고 어두운 밤중에 한지점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궁금한 것은 눈에 보이는 역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였습니다. 예루살렘은 망했고 이스라엘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백성을 버리지 않는 놀라운 하나님의 증거를 예루살렘에서보다도 더 혁혁하고 분명하게 이방의 땅에서 체험하고 깨닫고 보고 느끼고 만졌고 목격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니엘은 실망하고 좌절해서 바벨론 강변에서 시름을 지으며 눈물을 흘리던 다른 백성들과는 다르게 역사의 진정한 회복을 향한 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가장 어두운 역사의 지점을 지나는 하나님의 경건한 자녀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아니하는 이시대와 그리고 교회가 교회가 교회다워지지 않고 있는 이시대, 그래서 하나님이 이땅을 고치시기전에 교회를 고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지 아니하시면 교회가 맛을 잃어버려가고 있다는 모두들 느끼는 이시대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 역사의 밤을 지나고 있습니까? 여러분 역사의 어두운 밤을 우리가 지나고 하나님의 진정한 교회를 향한 다스리심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와 그백성들을 만져주셔야할 그부흥의 필요를 여러분들이 느낍니까? 여러분 그러한 역사의 인식이 언제든지 우리에게 필요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럴때마다 우리는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쓸모없는 일에 우리자신을 소진하는 대신에 다니엘처럼 고요히 기도하고 역사의 한경점에서 우리자신도 그 어두움속에 잠들지 아니하도록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그리고 그억사의 밤이 어디쯤 왔는지를 우리는 깨닫기를 우리는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현실이 좌절스럽게 느껴질수록 말씀을 사모하고 우리 개인적으로 영적인 어두움과 침체가 깊으면 깊을수록 여러분, 다른곳에서는 소망이 있을수 없습니다. 다른곳에서는 회복과 위로와 희망이 있을수 없습니다. 다른어느곳에서 여러분들을 행복하고 그리고 안락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면 속지 마십쇼. 하나님과의 관계로 부터 온 좌절과 절망은 오직 하나님만이 치유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하나님이 좌우하고 계시고 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변화를 하나님이 주장하고 계시다면 우리의 모든 영적인 시선과 신앙의 눈을 여호와 한분께 고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한분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회복과 하나님의 살리시는 그놀라운 소생의 은총을 바라보고 우리가 희망을 가질때에 현실은 우리를 좌절 시킬수 없고 이세상의 모든 악한 형편들이 우리를 낙담하게 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낙담하게 할지라도 우리는 용기를 얻을 것이며 세상이 우리를 좌절시킨다 할지라도 우리로 오히려 위기속에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낙담하지않고 오히려 위기속에서 편안해지고 형통할 때 부요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찬송할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흥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은 많지만 진정으로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던 사람은 소수입니다.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던 사람은 꽤 있었지만 온몸으로 자기가하는 기도처럼 살았던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을 그어두운 역사속에 만났을 때에 다니엘이 하나님을 만나고 기뻐한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만나고 더많이 기뻐하셨든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이러한 일들을 죽어가는 교회와 썩어가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변형의 한방법으로서 성취하기 위해서 이런 사람들을 찾고 계신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에 세상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교회가 소금창고가 되지않기에 세상이 썩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이말씀이 여러분 가슴에 다가오고 있는 그사람들만이라도 소금으로 나타날 때 세상은 그사람들을 통해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어두운 한밤중을 지나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무장한 게릴라들을 모으는 일을 위해서 지략을 짜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바벨론과 그리고 메대 바사의 왕극에 영향을 미칠수 있는 직접적인 정치적인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치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이 이 빛을 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소생시키나 하는 그방법을 그영적인 원리를 영적인 깊은 의미심장한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이미 역사속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투쟁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면 다니엘은 반동분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모든 역사를 한가슴에 쓸어안고 고요히 무릅을 꿇고 하나님앞에 기도합니다. 그나라의 회복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다닳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장씩 넘기며 하나님이 어떻게 그백성들을 선택하셨고 그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어떤뜻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리고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빛을 잃어버리게 되었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백성들을 회복하시고 그 빛을 새롭게 지니게 만들어 주시는 방법도 깨달았습니다. 책을 펼쳐서 깊이 읽으며 그는 하나님앞에 주님이 좌절 하실 때 좌절했고 주님이 기뻐하실 때 함께 기뻐하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역사를 거울 삼아서 이 무너지고 이방인들의 말발굽아래 짚밣혀 초토화된 예루살렘성전을 바라보며 보이는 성전이 황무하게된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볼수조차 좌절시킬수 없다는 사실을 다니엘은 역사속에서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의식이 있는 것을 과시해서 인지는 모르지만, 한숨을 쉬며 교회부패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따라 살지않는 것을 푸념조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것들이 역사의 변혁을 위해서 아무런 소욕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랬고 그백성들도 언제나 그랬습니다. 어디 한 번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치는 하나님의 얼굴 빛으로 인하여 감격해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때가 진정 우리가 역사속에 기다리던 때라고 생각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던 때가 도대체 몇 년이나 있어야 역사속에서 있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동일한 사건 동일한 역사의 반복들을 보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셔야할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는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힘써서 교회를 섬기고 주님을 위해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지만 그러나 역사를 움직이는 축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주님이 그역사를 움직여 주셔야 교회는 변하고 교회가 변해야 세상이 바뀔수 있습니다. 이고백이 바로 어두운 역사를 지나는 한 사람들의 방법입니다. 그들의 위로는 역사속에서 좌절을 느낄때마다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것이고 그들의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며 그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백성들을 살리시는가하는 것을 보이는 교회는 무너졌어도 그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절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들을 저버리지 않을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나 다니엘은 이런하나님과의 만남을 토대로 이예루살렘은 황무하게 되어졌지만 주님의 말씀의 서책을 고요히 넘기며 역사의 어두운 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과 칼을 준비하는 것보다 그는 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펼쳐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깨달은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다니엘이 이것을 보는 순간에 이서책을 앞에 놓고 엎드려서 통곡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년수를 세어보니까, 삼년 남았어요. 이것을 예레매야 서책을 보면서 깨달은 때가 67년이 지나갔을때의 마지막 경점이였어요. 그리고 예레미야의 서책은 칠십년인데 손가락을 세며 꼽아보니까 이제 그치욕스럽던 역사가 다흘러간거야. 다시 한 번 메대의 왕이 바뀌고 갈대아 나라의 다리오가 취임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캄캄한 역사의 한 경점이었는데 말씀을 통해 년수를 헤아려보니 하나님의 위대한 이스라엘의 회복. 너희는 위로하라 내백성을 위로하라. 그들에게 정다이 말하라 이제는 복역의 때가 끝났고 이사야 선지자가 그토록 예언했던 위대한 이스라엘에 회복이 삼년밖에 남지않았다는 사실을 이 다니엘이 발견했을 때 그다니엘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주마등처럼 포로로 끌려온 이후에 스쳐갔던 수많은 역사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포로로 밧줄에 매여 끌려오던 치욕스러운 날도 생각났을 것입니다. 두눈 똑바로 뜨고 예루살렘 성이 불타고 성전이 짚밣히는 그치욕스러운 광경,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던 심정, 그역사의 치욕스런 밤도 기억이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넘겨야 했던 수많은 바벨론 땅에서의 정치적이고 신앙적인 위기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고왔던 얼굴은 이제 완전히 하나님앞에 갈날을 앞둔 백발의 노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팽팽했던 얼굴에는 주름이 생기고 검은 머리는 모두 백발이 되고 이제 밤에 잘 때 손을 품에 넣어볼 때 이미 자기의 육신이 이제 자연적인 연령이 다해 쇠해가고 있음을 이 다니엘은 언제나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20살에 끌려갔었다며는 87세가 될것이고 15살에 끌려가도 82세가 될 고령의 나이였습니다. 역사는 흘러가고 다니엘은 젊은시절부터 지나서 장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모두 지내고 노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지않고 쇠하지않는 꿈이 해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이 선지자의 마음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었습니다. 드디어 역사의 가장 어두운 경점을 지나고 생각하던 그때가 사실은 새벽의 미명이 밝아오는 때였다는 사실을 예레미야서를 통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큰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부흥을 사모하고 나라의 회복을 고대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의 개벽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흔들리며 의식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당신들이 비밀스런 계획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신령한 마음으로 신령한 세계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의 부흥이 이땅에 오길 사모하며 기다리는 그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그사람들에게 자기의 위대한 일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의 위대한 새벽이 밝아온다는 소식은 뉴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 낡은 하나님의 말씀의 책에서 들려왔습니다. 새로운 소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연세드신 많은 분들은 지금도 그순간을 기억한데요. 일본 천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방송을 통해서 발표하던 날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이 그방송을 다낡은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가 언제 부흥할수 있습니까? 언제 조국의 교회가 변화를 맞이하여 이역사를 바꿔 놓을수 있습니까? 여러분, 방송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속에 들어 있습니다. 믿습니까. 그렇게 그말씀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 다니엘은 아마 주여, 이제는 이종이 눈을 감아도 좋사옵나이다. 말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아직도 좌절속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며 희망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 지혜로운 방법으로 역사의 어두운 한 경점을 자나던 이다니엘은 아무도 기대하지않던 캄캄한 밤에 멀리서 울려오는 역사의 새로운 개벽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전심으로 그 어두운 밤에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그나라의 회복을 갈망하던 사람에 주어진 첫 번째 기쁜 소식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모든 일들을 깨닫고 난뒤에 3절에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며’라 했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왜 이렇게 놀라운 은혜의 역사, 가까운 새벽의 역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왜 이런 이상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까? 이젠 그야말로 춤을 추고 노래할때가 아닙니까. 삼년만 기다리면 부흥의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제는 눈물을 닦고 베옷을 벗어버리고 비단옷을 입고 그리고 금식을 치워버리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이제는 역사의 도래를 기다려야 할 때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다니엘은 그모든 음식과 의복을 물리고 베옷을 입고 하나님앞에 금식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왜 다니엘의 결정이어야 했습니까? 다음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2. 기도를 결심하고 (단9:3-4上)
다니엘의 부흥 시리즈의 첫 번을 시작하였습니다. 요지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역사의식을 가져야 된다는 이야기를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너무나 구태의연할뿐만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칼라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의 문제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그 구원이 개인의 차원에 머물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흥이라고 하는 하나의 커다란 개념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와닿지 않은 이유가 결국 무엇이냐며는 신앙의 칼라 아니면 신앙의 무슨 유형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부흥은 결국 무엇을 겨냥하고 있느냐하면 나 개인이 예수를 믿고 변화되는 것, 그것을 넘어서서 이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이세상이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하는 것이예요.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것들에 대한 의식과 생각이 없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냐하면 신앙의 칼라가 틀려서라기보다는 깊이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부흥이라는 큰주제가 대부분의 가슴에 와닿지 않는 이유가 뭐냐면 사람들이 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있어요. 그럼여러분들 잘 생각해보며는 이게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의 만족을 주느냐 생각을 해보십쇼. 자 이런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근데 처음에는 박수치고 찬송도 부르고 헌금도 하고 교회도 잘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시달렸습니다. 사업도 잘안되고 시험보는 것마다 미역국을 먹고 하여튼 하는일마다 되는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결국은 마음이 심난해지게 되었죠. 그래서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삶이 썰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손들고 오게되었습니다. 그걸 가르쳐서 회개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있죠. 그렇게 회개하고 온 사람이 1년도 안되서 또 나가요. 그리고 1년도 못되서 또 돌아옵니까. 그리고 또 나갔다 또 들어왔다가 들락날락 하다가 마지막에는 다 늙어서 주님이 오라하시니까 더 들락거리지도 못하고 이젠 가게됐습니다. 다행히 들어왓을 때 부르셨으면 교회에서 장례식이라도 치르는데 나갔을 때 부르시니까 이건 믿지않는 자손들이 와가지고 촛불키고 구부렁 구부렁 절까지하고 제사밥까지 받아 먹게됐으니...
무슨얘기를 하기위해서 이런 쓸데 없는 것같은 이야기가 필요합니까. 우리의 신앙을 쉽게 생각하면 피곤하기 짝이없는 거예요. 왜 그래요. 집회 갔는데 은혜받을 생각을 안해. 왜 그러냐 물었더니, 받으면 뭘하냐고 그래요. 그래서 무슨 뜻이냐 물었더니 은혜를 잃어버리고 나니까 그다음에는 너무나 고통스럽드래요. 그래서 그렇게 고통스러울바에야 차라리 잃어버릴게 뻔한데 뭐하러 은혜를 받느냐는 거예요. 그것을 넓은 의미에서 이야기하면 개인적으로 그런부흥을 잃어버릴게 뻔한데 뭐하러 그걸 받느냐.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들의 요점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식으로 신앙생활하는 거예요. 가만히 보며는 그러고 인생을 살다가 우리들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십년 사십년 예수를 맏고와서 보니까. 가만히 뒤돌아 보니까. 우리는 우리편 아니예요. 나는 내편이잖아요. 항상 나좋은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남이 악의 없이 환하게 웃으면 그웃음이 함박꽃처럼 보이는게 아니라 웃을 때 이빨에 낀 고추가루가 보이고, 내가 웃을때는 악의없이 신령하게 웃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게 내가 내편이라는 말이예요. 내가 내편에 서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뭔가 이득을 보신 것 같아요.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앞에 효도 한날이 있어요. 육신의 부모에게는 어버이날 꽃이라도 달아드리는데 뭐 우리는 예수를 믿었다고 삼십년 사십년을 자랑하지만 그러나 그인생의모든날들이 사실은 자랑할것이 거의 없는 인생을 살아오잖아요. 이런것들이 결국 무슨문제와 관련있느냐하며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은 예수 믿고 은혜 충만하고 은혜충만하면 어때요? 헌금도 좀하고 그리고 교회도 열심히 섬기고 그러죠. 단지 이런 일들을 위해 하나님이 우릴 예수 믿게 만드신 것이 아니리는 거죠. 그럼 뭐냐? 쉽게 얘기해서 우리 한사람을 에수믿게 만드시어서 예수 믿은 사람들이 함께모여서 그래서 이세상이 변화되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것이예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야무진 꿈을 가지고 계신거예요. 우리가 생각할 때 “야, 이것 기가 막히다. 나같은 사람을 불러서 무슨 역사를 바꾸실려고 그러나” 근데 하나님이 그러시길 원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그다음에는 삶의 지평이 넓어져야 돼요. 그렇지가 않으니까, 예수를 믿었는데도 삶의 계획도 목표도 존재의 의미도 하나도 바뀐게 없어요. 그다음 어떤 이상한 신앙이 나오냐면 예수를 믿었는데 가치도 안변하고 인생관도 안변하고 자기의 목표도 안변하니까 그다음에 뭐가 나오냐니까 예수를 믿고 나는 내갈길 가고 신앙이라는 미명하에 하나님이 내가고 싶어하는 인생의 뒷돈을 대어주시길을 원하는 마음이 된다는 거예요.
자, 구원을 생각해보세요. 예수를 안믿고 있다가 구원을 얻게 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죄악의 수렁속에 꼴각꼴각하고 들어가는 그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손이 펼쳐져서 그를 건져내서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그러냐면 몸밖에 없어 이몸 바칩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거든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생각이 바꿔야 돠잖아요. 왜 생각이 바꿔야 되냐면 나는 이미 죽었다. 이게 세례예요. 나는 이미 죽었다. 난 살아났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면 죽을 목숨을 하나님이 살려 주셨으니 이제는 주님뜻대로 사용하시옵소서. 주님 어떻게 살까요? 이러면서 인생을 시직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예요. 말씀을 듣고 그리고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도 생각은 언제나 자기중심을 떠나지않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복음을 그대로 변형시키지 않고 제시하면 그다음에 드러나는 결과는 뭐냐면 그렇게 예수 믿는 것은 예수 믿는게 아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죠. 근데 하나님의 복음을 복음대로 듣게되면 그런일이 일어나는 거죠. 결국은 그런식으로 듣지않고 복음을 변형해서 말씀을 변형해서 자기의 입맛에 얘기를 하면 그다음에 뭐가 나오냐며는 별의별 신앙이 다 나오는 거예요. 예수 때문에 복받는 일, 그다음에 예수를 힘입어서 자기가 하고자하는 일들을 후원을 받으려는 그런생각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이런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에게는 부흥의 기대가 있을 수 없어요. 왜 그래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처럼만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답을 해보세요. 큰소리로. 우리들이 이렇게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부흥이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전혀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그부흥은 그런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요.
예) 1894년 부흥의 때, 카나다에서의 집회에서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
부흥은 하나님의 축복뿐아니라 심판을 명백하게 보여줘요. 그게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도 교회의 부흥이 충만했을 때 일어난 일들이예요.
자기가 형식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려고하는 사람들에게 만약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며는 버거워서 어디 교회 나오겠어요. 그렇잖아요. 뻥하고 나왔는데 하나님이 ‘너 그렇게 예수 믿어선 아무래도 천당 못가겠다.’ 이런식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막 말씀하셔서 신앙의 모든 잘못된 실체들을 드러내실 때, 그때에 제대로 하나님앞에 설수가 있겠느냐는 거죠. 그러니까, 부흥이라는 주제가 사람들에게 받아 들여지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때문이냐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고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삶인가 하는 것이예요.
여러분 사람이 믿음이 좋아지기를 원해요. 그렇죠. 그거는 우리가 우리인생의 주재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여러분 주권 잡는 거예요. 근데 믿음이 좋아지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원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앞에 여러분 인감도장 다바치는 거예요. 인감도장 호적등본 다바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이 그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맘대로 하시도록 나두시는 것이예요. 그런 삶이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삶이예요. 그게 믿음이 있는 삶이예요. 회사에서 짜르고 싶은 사람을 그만두게하는 방법이 뭐예요. 어느날 불시에 딴사람은 서울로 올려 보내면서 한사람 딱 찍어서 제주도 마라도 가서 근무해하고 발령을 내는 거예요. 그러며는 일 그만두라는 표시구나. 그리고는 난 싫다 그러고는 나오잖아요. 그게 뭐예요. 주권에 복종하기 싫은 거예요. 근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분의 모든 인생을 붙들고 주재권을 행사하실 때 거기에 아멘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되는 거예요. 그게 믿음이 좋아진다는 것이거든요.
오늘 3절을 보니까 ‘네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그랬습니다. 다니엘이 뭘 결심했습니까? 주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기를 결심했습니다. 어떻했을 때 다니엘이 기도하고 간구하기를 결심했습니까?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에 마치리라고 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제 삼사년후며는 이포로시대가 끝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했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회복시키실때가 가까워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속에서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때에 놀라운 회복을 누리며 이방의 빛들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공의와 공법이 이온민족위에 충만하게 흐르던 그러한 부흥의 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던 때가 역사속에 진짜 있었습니다. 그러게 충만했던 하나님의 그은혜가 이스라엘에 미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주시던 그런 영광스런 부흥의 때, 그런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 이 비참한 포로 시대에서 회복해주실 때가 가까워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때에 그가 결심한 것은 기도하고 간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참된 부흥을 사모하는 사람들 그사람들의 특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이신앙의 겉멋이 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흥을 말하고 부흥을 이야기하고 부흥을 사모한다고 말하지마는 그러나 진정으로 부흥을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소망이 진정한 소망이라면 그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구워받았는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백성들을 건져주시고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복되지않고 있습니다. 이 하남님의 의도,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목표와 그리고 그백성들이 놓여있는 그 현실상황속에서 진정을 부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무엇이냐면 기도하는 일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이렇게 하나님앞에 부흥을 자기가 그런 부흥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고 부흥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실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부흥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하다고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무엇이냐면 인간이 어떤 것을 계속 듣다보며는 자신이 착각이라 그럴까 그런거에 빠져드는 들어가는 거예요.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거죠. 자꾸듣다 보며는 그것이 마치 자기가 그런것같이 착각을 하잖아요.
예) 소설을 밤새 읽으며 자신이 주인공인지 착각.
청교도에 대해 계속해서 듣다보면 자신이 청교도가 된 것같은 느낌이 들고 부흥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기가 바로 그부흥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착각을 할 때가 있잖아요.
예)파잠아 입은 어른이 ‘람보’를 보다 너무나 도취 빗자루 들고 뛰어다니고 뒹구는...
소위 얘기하는 대리만족이예요. 가만히 보며는 다니엘을 비롯해 그훌륭한 부흥을 사모하는 어떤사람들 혹은 그런 부흥을 경험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우리가 진짜 사모하리만치 뛰어난 삶을 살았어요. 그리고 우리가 위인들의 전기나 이런것들을 읽을 때마다 우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참투철한 신앙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우린 만니게 됩니다. 그런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는거예요. 나는 갈 수 없는 그아프리카 오지에서 나는 할수없는데 그사람들은 정말 목숨을 내어놓고 정말 죽음을 내어놓고 창칼을 맞아가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수없는데 그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을 위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그런거를 보면서 ‘아, 역시 이 위대한 사람들이구나!’ 문제는 뭐냐면 그러한 위대한 사람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자신은 그사람은 그사람이고 나는 나지 내가 그사람이 된 것은 아니란 말이예요. 부흥에 있어서도 똑같아요.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사모하는 사모하지르 않는지 그것은 말과 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사람의 삶이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추구하지 않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이런 부흥에 눈 떴다고 말하는, 그중에 내책을 읽거나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눈 뜬사람도 많아요. 그러나 대다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자기나름대로 부흥을 사모한다고 그러지만 단지 언어의 유희나 마음의 즐거움을 위해서 청교도들의 이야기들을 들먹거리고 부흥을 위해서 살았던 헌신적인 사람들의 생활을 센치멘탈한 감정으로 들먹이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 대개 문제가 어디 있냐며는 부흥을 많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앞에 기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다니엘은 이스라엘 역사의 장엄한 회복의 소식을 예레미야 서책을 통해 알게 되었을 때 그가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 열심을 하게 되었을까요? 이미 칠십년에 회복되리라 그랬으니까 삼년 기다리면 저절로 될텐데 기도한다고 해서 삼년이 이년을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기도 했겠어요. 그러니까 기도가 소용이 있고 없고의 분제가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백성이 놀랍게 회복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이다니엘은 하나님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부흥을 진심으로 추구하고 그부흥이 진심으로 백성들 속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부흥을 앞당겨 주시옵소서 기도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목적이든간에 하나님앞에 기도해서 그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막히지 않고 그대로 성취되게 해달라고 하나님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간구하지 않을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은 이 기약도 없을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포로생활을 하며 육심 칠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서책을 보면서 삼년밖에 남지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는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의 새벽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새벽이 가까워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는 하나님앞에 전심으로 ‘그렇습니다. 회복의 약속이 우리에게 진정코 이루어져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심으로 부흥을 찾고 추구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는 도전을 받았고 그도전은 기도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다니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 예레미야 서책에 나와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에 대한 약속의 시한을 깨닫게 해주실 때, 그때 기도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가 가까워 왔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켜 주시지 않고 가만히 버려두실때와 얼마나 역사의 커다란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을 이 다니엘이 느꼈기 때문인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이스라엘의 장엄한 회복을 위해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간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잊지마십쇼. 부흥이 한교회에 그리고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한도시에, 한나라에 임해서 역사를 바꿀 때 세상사람들은 언제나 그것이 뜻밖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남은자로 대표될 수 있는 120명의 문도들이 하나님앞에 기도하다가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을 누가도 기록하기를 홀연히 성령이 임했다고 누가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사건은 뜻밖의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대체 얘기할 수 없는 돌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사건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부흥이 돌발적이고 획기적으로 예기치 못한 때에 홀연히 임하기전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부흥이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그렇게 그부흥의 새벽의 때가 이르기를 위해서 역사의 필연에 매달려 기도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기도의 잔이 가득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에 부흥을 주시는 것이 필연이라고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그기도가 가득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부흥을 보내셨고 매달려 기도하지 않던 사람들에게 그부흥은 언제나 홀연히 임하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껫 하나님의 교회에 부흥을 부으시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믿고, 아무도 부흥은 우연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홀여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부흥이 이르기 오래전부터 그부흥이 이를때를 기다렸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셨고 그들은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때에 이다니엘이 어떻게 기도했냐면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며 내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였다’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앞에 그렇게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이것은 무엇 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까? 커다란 재앙이 있을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흔히 하던 풍습이예요. 근데 이스라엘에 재앙이 일어났습니까? 무슨 재앙이 일어났어요.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습니까. 67년전에 일어난 일이예요. 이미 그때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할 사람들은 회개했고 다니엘도 그중에 한사람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 67년의 세월이 지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때가 삼사년 밖에 남지 않은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새삼스럽게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하나님앞에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때문이었습니까? 이다니엘이 다시 한번 깨닫는 것입니다. 뭘 깨달았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67년동안을 이방인에게 종노릇하면서 살아야했던 비참한 역사의 원인이 결국은 민족의 죄악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가 그것을 말하고 있는거거든요. 예레미야가 아무말 안하다가 갑자기 엉뚱하게 너희는 끌려가서 70년 있다가 너희는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예레미야가 눈물로 예언해도 그예언을 거절하고 마지막에는 결국은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해도 깨닫지 못하는 그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미리 예언하면서 이스라엘백성이 죄로 말미암아 망할것임을 예고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그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여기서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그는 자신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앞에 금식하며 자복하고 회개하며 뉘우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솔직히 다니엘의 죄 때문에 망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사람도 죄가 없을 수는 없지만은 그한사람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들이 언제나 기억해야 되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실 때 우리는 개인적으로 다루시니다는 생각을 언제나 해요. 그러나 절대 그렇재 않아요.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다루시는 것과 동시에 오히려 집단적으로 다루시는 거예요.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잘 안하는지 아세요. 그이유는 무엇때문이냐면 나라와 깊은 일체의식을 못 느끼기 때문이예요.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나라의 죄악이 차면 하나님이 손보신다고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던지 안믿던지 마찬가지예요. 이게 바로 역사속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손길이예요. 하나님이 그나라를 말하자면 손보시는 거예요. 나라가 예수 믿는 사람과 섞여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이런일들을 더욱 강하게 하세요. 때로는 이나라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믿지않는 사람들과 나뉘어질수 없어요. 6. 25가 났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포탄속에서 죽어갔어요. 안 믿는 사람에게만 포탄이 떨어졌어요. 날라오다가 믿는 사람에게 내려오면 휙 커브를 틀어서 안 믿는 사람에게 뚝 떨어지는, 여러분들은 그러기를 원하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를 다르시는 섭리가 아니예요. 하나님은 함께 심판하시는 거예요. 민족의 죄악이 차면 민족을 멸하셔요. 그리고 징벌하십니다. 그리고 한가족의 죄악이 차면 그가정을 손보십니다. 교회의 죄악이 차면 그교회를 손보셔요. 도시에 죄악이 가득 차면 그도시를 손보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이고 하나님을 움직이시는 길이예요.
예) 선교보고에서, 지난번 일본 지진 났을 때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성찰하고 회개하는....
여러분,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어마어마한 대형사고, 세상의 역사에도 흔히볼 수 없는 그런 대형사고들이 일어나서 수천명 수백명의 사람들이 땅속에 묻히고, 물속으로 들오가고, 불에타서 공중으로 날라가버리는 사건들을 당하면서 그걸 보고 누가 부주의했기 때문이다. 어느회사가 엉텅리로 지어서 그렇고 어느회사가 돈먹었기 때문에 다리를 엉망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죽었다. 그거는 안믿는 사람들을 역사를 바라 보는고,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면 안 떨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시는 손길이예요. 다른사람들은 그렇게 말할때도 우리는 그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을 읽을려고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다가가는 것이죠.(?)
여러분 이북이 이렇게 커다란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난을 받고 있는 것, 여러분들은 수해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루시는 손길이예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똑같은 역사적인 자료를 대하면서도 그것에 담겨진 새로운 의미를 우리가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한나라에 죄악이 가득 찰때에는 그나라를 징벌하시지만, 그 한나라를 징벌하실 때 그교회가 함께 책망받게 하시는 거예요. 왜? 떨어질수 없으니까. 세상속에서 부름을 받아서 그세상을 하나님앞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세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 다니엘이 금식하며 하나님앞에 틀림없이 울었을 것이예요. 그러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뭐냐며는 다시한번 인식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칠십년동안이나 노예나 다름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하시고 그바벨론의 학대아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게 만드셨는데 지금도 그억압이 풀리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데 이것은 오로지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예요. 그리고 부흥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사람들이 남의 죄의 짐을 지고 중보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거죠. 여러분 정말 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은 자기의 죄와 다른사람의 죄를 구별할 수가 없었어요. 왜? 한 하나님의 지체안에서 일어나는 죄라고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이것은 부흥이 일어날 때 또 부흥이 일어나기 직전에 교홰에 어떤일이 먼저 찾아오는지를 특징적으로 우리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받아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약속을 누리는 삶을 못사는 이유가 무었입니까. 하나님에게 놀라운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은혜가 우리에게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축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할수 없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각양 좋은 것들은 산도, 물도, 벽도, 담도, 환란이나 위험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어떤 고난도 막을수가 없고 오로지 죄에만 이모든 것을 막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흥은 결국은 거룩한 하나님 자신이 찾아오시는 것이거든요. 근데 그거룩한 하나님이 그 죄의 문제가 정결케된 그곳에 찾아오시는 거예요. 죄의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교회속에서 주님이 오시기전에 당신이 오실 길을 사람가운데 내시는 방법은 그가 가지고 있는 죄를 회개시키시는 거예요. 주님이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한교회에 커다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흥이 오기전에 부흥이 들어가는 그통로거 무엇에 의해서 제거 되느냐 하며는 회개에 의해서 제거 되는 거예요. 그리고 부흥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부흥이 오기전에는 회개가 있었고 회개가 오기전에는 무슨일이 먼저 있었어요? 우리가 하나님앞에 어떤것들이 죄인가 하는 것을 들어내 보여주는 깨우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깨닫는 일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깨달은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회개로 말미암아 정결케 되어지는 그 교회와 개인 속에 하나님의 부흥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다니엘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며 하나님앞에 자복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제일먼저 고백한 이야기가 “크고 두려운 주 하나님”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두가지 성품을 함께말하고 있는데 뒤에있는 것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고, 앞에는 큭 두려우신 하나님 그것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이역사의 놀라운 일들을 1,2절에서 크게 깨닫고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역사를 돌아 보면서 다니에은 다시한번 하나님에 대해서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나 하나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와 같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역사를 움직이시고 교회를 움직이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인간으로서는 하나님 위대한 역사의 움직임앞에 단지 초라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을 맞이할 때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겸손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시는 그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면서 그앞에 깊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를 느끼는 거예요. 인간들이 왜 교만해져요? 하나님이 작아보이고 자기가 커보이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앞에 교만해지는 거예요. 그러나 이렇게 각성을 하고 역사를 움직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생각하니까, 자신은 하나님앞에서 티끌같은 존재고 하나님은 크고 하나님은 두려워 해야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엄위하신 큰 두려움이 다니엘의 온몸을 휩싸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잘난 맛에 살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인생을 뒤돌이 보십쇼. 여러분들이 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일들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새을 움직여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라하는 것도 세상의 역사의 큰물줄기속에 튀어오르는 한방울에 물방울에도 지나지 않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모든 역사를 움직여 오신 다니엘은 67년동안을 이렇게 이방의 땅에서 고난을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었을 때 이세상의 역사가 외교사적으로만 판단되고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수많은 갈등과 놀라운 변화의 역사들이 있었는데 그역사를 (?)하는 정치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손이 역사를 붙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남의 나라말고 앞으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요? 남과 북이 지금 이렇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어제신문에서 조그만 일만 있어도 한반도에서는 전면전이 일어날것이라고 아사상태에서 공갈을 치고 있습니다. 남한에 있는 사람들은 설마하면서 휴전선 근처까지 놀러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풍요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번영들을 육체를 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점점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저쪽에는 공산주의가 극성이고 극도의 부패와 일촉측발에 체제의 위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이런 답변을 우리는 가지고 있어아 합니다. 우리가 언제 통일이 되고 전쟁이 일어날까를 알아 맞히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민족을 이렇게 가슴아프게 갈라놓아서 이 반목과 질시와 고통의 역사가 이토록 오랫동안 되도록 만드셨는데 이제 하나님이 왜 고통을 우리민족에게 주셨고 그리고 이제는 이민족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이땅에 복음을 주셨을때에 이땅이 어떤나라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셨는가를답변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일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는것도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의식이 없습니다. 나 그냥 형통하고 그냥 나 잘되고 그냥 하나님이 나 팍팍 밀어주시면 그냥 나도 신나고 그이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다음에는 나는 모르겠다. 다른 사람 어째? 난 모른다. 다른 교회는? 난 상관없어. 이런 생각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오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보십쇼. 다니엘은 얼굴도 알 수 없는 조상들이 지은 죄를 인해서 하나님앞에 회개 하고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의 가장 큰 위기가 다가오는 때에 행하던 왕의 습관과 같이 그렇게 베옷을 입고 금식하고 재를 무릅쓰고 여호와 앞에서 기도하고 그리고 조상들의 죄가 자기의 죄인것처럼 자복하며 하나님앞에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앞에 겸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모든 이스라엘의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이현장을 그는 하나님앞에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제 67년동안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스라엘이 포로기가 끝나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한사람을 깨닫게 하신거예요. 그리고 그어느 한사람이, 분명 동쪽을 향해난 창일것입니다.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성을 향해서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하나님앞에 기도했습니다. 역사의 위대한 수레바퀴가 움직이기전에 한사람이 고요히 무릅을 꿇고 재를 무릅쓰고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통해 역사를 움직이시는 방법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고 그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이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결론이 부흥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왜? 하나님이 폭풍과 같이 해일과 같이 바람과 같이 밀려오는 그런 큰 부흥의 폭풍이 아니면 이시대의 백성들이 주님의 이름만 높이고 하나님만을 위해서 주께만 영광돌리면서 산다는 일들이 불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에 결국은 부흥을 진심으로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전심으로 역사를 깨닫고 부흥을 전심으로 사모하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다바쳐 그러한 역사적인 부흥을 위해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기도하는 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때 그사람은 진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3.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단9:4-6)
지난 시간에는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자복하였다. 그러므로 오늘 이어지는 상당히 긴 9장 전체가 계속해서 뭐가 나오냐하면 다니엘이 하나님앞에 그런 각성을 하게된 이유에 기도가 실려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그 기도를 처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기도에 맨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불러야 기도가 될 것아닙니까 그하나님을 부를 때 오늘다니엘이 부르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그는 뭐라고 하나님을 불러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뭐라고 하나님을 불러죠? “크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우선 그렇게 불러습니다. “크시고 두려워 할 하나님” 이렇게 부르며 그 위대한 부흥을 부르는 기도를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리즈에서는 부흥을 구하는 기도까지 한 번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다니엘이 하나님을 9장에서 새롭게 만나다는 말씀을 이미 첫 시간에 드렸습니다. 영험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은 우선 그 하나님은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하나님이 크시다는 사실 쉽게 얘기 하면 이런 유화적인 표현이 되겠습니다만은 “위대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얼마난 위대하신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서책을 조용히 넘기면서 그는 거기에 기록된 70년후에는 이스라앨이 회복되어 하나님께 다시 광복을 얻게 되리라는 이 놀라운 예언에 말씀을 들으면서 이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다니엘의 지식은 놀라운 진보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여러분들은 생각하십니까 혹시 여러분 하나님은 너무나 친밀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나머지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친구난 이웃집 아저씨정도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혹시 하나님은 아무 생각없이 묵묵히 거기 서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도 하나님께서는 일일이 반응하시지 않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은 그저 적당히 대해도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앞에 기도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기도에 제목들은 때로는 자디잘고 너무나 개인적이고 소소한 것들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크고 높은 기ㅣ도의 제목만이 기독의 제목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놓여 있는 삶의 자리에서 기도를 필요로 하는 다양한 문제들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뢰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고 계십니다. 기도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나 오랜동안을 시시하고 사소하고 그리고 아주 작은것들을 하나님께 구하고 그리고 그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하는 것들을 경험하고 살아오면서 혹시 여러분들은 하나님들이 그렇게 잘아보이지는 않는지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과 자신이 뭔가 대등한 관계에서 어떤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기도 하고 그래서 문가 기도속에서 가만히 보면은 기도를 많이 해가지고 응답을 받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심리이면에는 뭔가 세게 밀어붗여가지고 하나님을 굴복시키겠다는 이런 사행심어린 생각들도 가미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자디잘고 작은일에 간섭하고 계신 것은 사실입니다만은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 그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 하는것들을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드러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디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유가 적합할진 모르지만은 그러나 아마 한나라의 대총령도 집에 돌아가면 평범한 아이들의 아버지나 혹은 할아버지가 되어서 자녀들과 함께 정원에서 뛰어놀고 그리고 윷놀이하고 공굴리기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아이는 단지 그 할아버지가 혹은 아버지가 자기하고 공이나 굴리면서 노는 것이 직업인것처럼 그렇게 생가해서는 않된다는것입니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다니엘이 이스라엘역사 그 역사를 움직이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영적인 각성속에서 깨닫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시고 그 분이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같이 이렇게 미천한 인생들과는 놀아주실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크고 위대하시고 그리고 놀라우신 하나님임니다. 언제가 한 번 신문이나 잡지에 보니까 그런 얘기가 나왔었요. 한국학생이 무심코 고르바초프가 소련 대통령으로 있을 때 편지를 보냈었요. 국민학교 학생이 정말 보냈는데 그 대통령이 편지 답장을 보냈었요. 그러면서 그 학생을 소련으로 한 번 소련으로 초청을 했습니다. 그게 신문에 아주 크게 나왔어요. 여러분 저도 편지를 많이 받습니다. 어제께도 어떤사람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가 답장해도 신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열린하늘에는 내가 압력을 너면 내줄수 있을 거여. 편집장을 설렁탕이라도 사주면서 구슬리면 열린하늘에는 나올지 몰라요. 그러나 일간 신문에는 나오지 않아요. 왜 않나와요? 내가 그 사람들 보기에 커 보이지 않으니까 내가 편지 쓰고 않쓰고는 별로 문제가 되지않습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편지를 써서 사진까지 나왔었요. 한 번 초청한다고 여러분 하나님은 지구의 위대하시고 크신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이 사람이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의 때 만큼 하나님이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현격하게 느껴지는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고 내 삶의 진정한 목자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삶으로 깊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신가하는 것들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함을 체험한 모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정말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되어 주시길 원했습니다. 또 그렇게 하지않고는 살아갈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느끼지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만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찮아 보이고 그리고 자신에 생각이 훨씬 커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만으로 가득찬 사람이 무너져서 하나님앞에 겸비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보다 훨씬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에 지혜가 인생을 이제껏까지 자기에 지식과 방법대로 지혜대로 살아왔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내인생을 움직이고 계신 이 지혜가 훨씬 더 크고 놀라우며 그리고 자신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그런 강한 힙이 바로 자기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크신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것입니다. 그리고 그 크신 하나님을 깊이 인정할 때 비로소 그가 하나님앞에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흥의 때 이외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지를 알지를 못합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늘은 훨씬더 크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 하늘의 일부분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에 낯을 피하고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그 안목을 피하여 능히 살아갈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방법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그리고 인간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의 때는 이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신가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상층하지에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고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한 나라의 역사와 그리고 온 세상을 손에 붙들고 계셔서 당신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고 신앙이 들어가면은 그 다음은 자신의 인생이 자신뜻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거요. 근데 이 깨닫는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거예요. 쉽게 깨달아지지를 않아요. 진짜 많은 고액의 과외비를 내야지 겨우 깨달아지는 것에요. 인간이 몸부림 치고 노력하고 뛰어봐서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한순간에 깨닫고 보니까 자기는 말하자면 어항에 갖힌 붕어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예요. 하나님의 그 손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거예요. 인간의 행복의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믿는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을 리가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인간의 생명이 여호와의 손하나에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친구처럼 놀아드리고 그렇게 때를 쓰고 졸르고 그리고 그 하나님하고 뒹굴고 하는 그렇수 있는 사이가 아니예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이땅에 있어요. 우리는 지극한 죄인이고 하나님은 거룩한 영광 가운데 계신 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뿐만 아니라 경건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신 이해ㅐ에 대한 출발이었습니다. 그는 크신 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산을 좋아 하세요. 바다를 종하하세요. 옛날에 말이 있어요. 인자는 요산이요.지자는 요수라 뭔뜻이냐 하면 마음이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를 좋아한다고 바닷가에 서서보면 첫느낌의 인상이 뭐냐하면 끝이 없다 그걸 느끼죠. 끝이없는 바닷가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냐하며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요. 그래서 저는 바다를 좋아해요. 바닷가에 서면 자신이 한없이 작아보이는 것을 느껴요. 산에서는 산을 올라가 보지도 않았지만 -힘드니까-왜 올라가는지 모드겠어요. 힘들게 전에 교회에서 하번 산을 갔는데 등산을 간다고 말했으면 않갔을텐테 야유회를 간다고 해서 갔거든요. 중간에 빨리 펴놓고 먹었으면 좋겠는데 계속홀라가자는 거예요. 나중엔 중간쯤올라가다가 화가 나잖아요. 막 신경질을 냈어요. 왜 올라가냐고 도로 내려가는데 아무데0나 앉아서 먹지 산에서는 그런걸 잘 못느껴져요. 근데 바닷가에 서면 정말 유행가 가사처럼 한없이 내가 작아 보여요. 왜그래요. 상대무변한 바다를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부두에 서있을때에 정말 빌딩 몇 개를 합쳐놓은 것 같아요. 어마어마 하던 배가 시야에서 멀어져 30분 정도만 달리면 가물가물 하면서 요만한 지푸라기 처럼 보여요. 바다가 얼마나 광대부면하가 하는 것을 보여주지않습니까.더군다나 비행기를 타고 놓이 떠서 지나 가서 배를 보면 더 장관이예요. 정말 바다는 많이 넓고 큽니다. 하나님에게는 그 우리 인간의 눈 앞에도 그 바다가 그렇게 어마어마 하게 커보이는데 하나나은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가 그 바다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습게 보이는 사람마다 바다를 한 번씩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육신의 바다보다도, 물질의 바다보다도 은혜의 바다에 한 번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인가를 새삼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 하나님이 제일 위대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향한 지혜와 정죄와 능력에 있어서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흥회 때에 많은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큰 위대하심을 모두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다니엘은 또 하나님을 뭐라 부르고 있습니까? 어떤 존재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두려워할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두려워 해야할 주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아마 그랬을 겁니다. 에레미아서를 펼쳐서 읽는 동안에 그는 비로소 예전에도 물론 그랬겠지만, 예레미아서를 펼치는 동안에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온 것입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늘 읽다가도 어느 날 똑같은 말씀인데 마음에 새롭게 다가온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예레미아서를 읽는 가운데 새롭게 다가온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정말 두려우신 분이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실은, 망하기 전까지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두 가지 신앙사상이 대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대립을 이루고 있다기보다도, 한가지 사상이 주류를 흐르고 있었는데, 또 한가지 새로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서 그것을 외쳤습니다. 선지자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그 언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향하여 역사 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했던 한 시도가 있고, 또 하나는 신의산?에서 하나님이 십계명을 통해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생각해 보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면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무런 요구조건 없이, 그냥 찾아오셔서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마, 그리고, 내게 너에게 복을 주마, 너의 자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게 해주마, 너로 열방의 아버지가 되게 해주마, 이렇게 하나님이 무조건적인 은혜를 한없이 그에게 베풀어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런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고, 그리고, 까다로운 계약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사상은 무엇이었냐 하면, 예루살렘으로 피하면 안전하다, 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피하면, 안전하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 예루살렘을 멸망되지 않게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이다라는 사상이 바로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오늘도 사람들 속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3장 16절 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것 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 다음 구절은 모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두려워해야 할 분이신 것을 성경이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상의 핵심 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두려워해야 할 주님이라고 오늘 다니엘이 입을 열면서 기도하는 이것은 변화를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전에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알고 있는 진리가운데, 어느 부분이 가슴에 깊이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워 해야할 하나님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아까 말씀드린 두 가지 사상가운데 한가지에 치우쳤던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 이상은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한, 하나님은 그들을 거절치 아니하시고, 용납하시고,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정결케 하고 다시는 그의 죄를 묻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은혜를 주시고, 힘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격려가 필요할 때 격려하시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만 읽으면 안됩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좀더 발전된 신앙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무조건 자비롭고 호의만 가진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십계명의 언약을 통해서, 또 시내산?에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축복과 심판의 길을 아울러 두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가를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바른 길로 네가 내 율법을 지키고 주야로 묵상하고, 그리고, 네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면, 축복해 줄 것이고, 네가 불순종하면은 심판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조건부로 우리를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느냐? 쉽게 얘기하면은, 전반부에는 초기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성숙한 이스라엘은 다루어 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피하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피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두 눈으로 예루살렘성과 그리고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역사가들은 아마 법궤도 그때,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지존한 위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성전이 무너지고 법궤가 찬탈 당하고, 금은 기념?들이 찢겨나가는 그 비참한 광경을 그대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충격을 받은 거에요. 오늘날도 이러한 오류가 우리에게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만약에,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알기만 하더라도 이렇게 불행하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시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반드시 두려워해야 할 분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엄격함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엄격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엄격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이 시간도 인간으로 하여금 방종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만약에 여러분들 마음대로 인생을 살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으로 하나님 앞에 심판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모두 교회에 나와서, 자기의 그 솟아오르는 자아를 죽이고, 꺽고, 여러분, 우리 속의 자아가 죽을 때, 신납니까? 괴롭습니까? 그렇게, 괴로운 가운데 자기 자아를 죽이고 그리고, 말씀 듣고, 깨지고, 누구 말대로, "엄마는 왜 교회 가서 돈 내고 울고 와?"또, 그 다음에는 아들이 그러더랍니다. 목사님이 아마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을 회개하라고 그랬는가 봐요. 아빠는 왜 맨 날 돈 내고 야단만 맞고 오냐는 것입니다. 거기서 깨뜨려집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기가 무너질 때, 너무 쓰리고 아픈 것입니다. 살기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자기를 죽이고, 괴로워 하면서 은혜를 받으며 그냥 순종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불순종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똑같이 대접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순종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축복이 있으면, 불순종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판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칭찬 못 받습니다. 여러분, 가슴 졸이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어떻할까? 기도해도 모르겠으니까, 금식해 금식해도 모르겠으니까, 하나님 앞에 통사정하며 매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는 길이다 라고 하면서 갔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뢰하며 살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왜 다니엘이 두려우신 하나님,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을 자기 손으로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방탕한 길로 걸어가고 나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못 때린다, 이렇게 생각하면은 아이들이 망치는 겁니다. 균형을 이루어야 되요. 그런데, 그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쉽습니다. 능히, 완벽한 균형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두려워 해야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니엘이 어떻게 해서 깨닫게 되었습니까? 역사를 새롭게 보는 눈이 생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모여 말하기를 우리가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못했다고 말하고, 나라가 망한 것은 역적 놈들이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들은 부국강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말했지만은, 그러나, 다니엘이 에레미야서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쓸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계신 성전이 무너지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런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에 죄악이 가득 차게 되면, 하나님이 그 나라를 심판하십니다. 한 민족이 하나님께 계속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계속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십니다.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다니엘은 깊은 두려움에 잠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흥의 때에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 자신에 대한 큰 두려움이 압도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 세상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해도 감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깊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다고 그러는데도, 하나같이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구원받지 못했을 때, 얼마나 비참한 상황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만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울러 또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아주 길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하나님은, 말하자면 긍정적인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해서, 호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분명히 여기서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인자를 베푸시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 속에 선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뜨겁게 다가오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변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주의 계명을 지키는 열심이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리고, 좁은 길로 가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붙들고 세상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능력과 도우심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와 하나님의 사랑과 풍성한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고 맛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습게 여기고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점점 더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곤고케 하는 하나님을 뵈옵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다니엘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과 함께 또 다른 하나님의 한 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읽어보니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이 번뜩거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 죽어 가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은혜를 잊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심으로 깨어서 주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결코 하나님이 예측할 수 없는 변덕스러움으로 그들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실하시고 언약을 지키시며 인자했습니다. 아가페입니다. 끊임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그러한 사람들에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은 이 하나님에게 소망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니엘을 통해서 부흥을 위해 기도하게 하실 때,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다니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다니엘로 하여금 이 부흥을 위한 위대한 기도를 하게 하신 출발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정 부흥을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아는 모든 사람들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흥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부흥을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흥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시고, 그 통치를 사람들이 물으며 살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은 아직 심판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 역사의 암흑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암흑을 이 다니엘은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위를 돌아봐도 백성들에게 대대적인 회개의 조짐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은 이미 나라가 멸망해 버린 것을 기정사실로 알고 자기와 같이 동쪽으로 향하여 난 예루살렘의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나름대로 바벨론 땅에서 자기 자리를 잡고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중에는 자수성가해서 돈을 많이 모은 사람도 있었고, 자기처럼 관직에 꽤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도 있었고, 상업을 해서 재물을 모아서 그 지방의 유지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혹은 노예처럼 종처럼 살아가며 아예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잃어버리고 이방의 종교로 귀화해버린 사람들도 없지 않아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을 돌아보건대, 어디에 다시 하나님의 교회가 뜨겁게 회복될 것이라는 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곳곳에 모두 잠자는 자들뿐이었고, 그리고, 눈이 닿는 곳마다 보이는 모든 사람들은 영적으로 모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에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부흥을 위해 기도했던 사람들은 이 시대의 어떤 변화에 소망을 걸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부흥을 위해 기도했던 사람들은 교회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든지 훌륭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든지, 바로 선 사람들이 있다든지 그런 사람들을 놓고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바?시대에 무릎꿇지 아니한 사람, 다아로? 무릎꿇지 아니한 사람, 실천이 있었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부흥을 고대한 사람들은 그런 실천의 사람들도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기대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이 주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쓰는 언약을 지키시고, 회복의 약속을 지키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인자하신 사랑을 베푸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환경의 변화와 여건의 변화에 따라서 실망하거나 힘을 얻거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부흥의 참된 소망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데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를 했습니다. 오늘 이 다니엘도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고 패역하여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방과 우리의 방백과 우리의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다니엘은 역사가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고, 나라가 모두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서, 하나님의 치열한 진노아래 이렇게 애굽에서 비참한 망명생활을 해야되는 그 처지가 이중적인 죄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범죄했고, 패역하여 행악하였고 반역하였고, 그는 네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범죄하였고 패역하였고 행악하였고 반역하였습니다. 네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미 이것은 다니엘이 행한 일이 아니라 다니엘의 조상들이 행한 위업이었습니다. 악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70년 이후 심판 받은 지 67년이 지난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다시 태어난 이 바벨론의 많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그 죄악과 그 범죄와 그 패역함과 그 반역에 참여한 것처럼 공동체적으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을 앞둔 조짐인 것입니다. 너와 나의 죄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악함과 자기의 비참한 죄와 자신을 하나님 앞에 패역한 모습을 바라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죄와 자신의 죄를 구별하지 않고, 그리고 이 나라가 이처럼 비참한 멸망의 지경에 놓이게 된 이 모든 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우리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무엇을 범죄했습니까? 무엇을 패역하였고, 무엇을 행악하고, 무엇을 반역하였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죄 가운데 살았음을 압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대여?로 모이고 서묘?로 모이고 모든 사람들이 절기를 지키고, 그리고, 성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아무리 패역한 시대에도 언제나 끼여있기 마련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헌신된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고 분노의 불길 아래 타오르는 그 순간에도 거기에는 언제나 경건하고 비교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세였습니다. 경건한 사람들, 다니엘과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았고, 이미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모양으로 범죄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름을 댈 수 없는 수많은 범죄가 있었습니다. 많은 범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것, 우상숭배와 사위과 그리고 살인과 간음과 방탕함과 수많은 위선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악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들은 목록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으로 몰고 갔던 최악의 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죄였습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열방의 불꽃이 되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특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이 기도할 때 누구도 듣지 않았지만,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응답하시고,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이 베푸셨습니다. 죄를 회개할 때, 그 죄의 용서의 표징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셨고, 그리고, 악한 군대들이 쳐들어와서 나라가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 백성들이 마음을 낮추고 겸비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모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역사를 보여주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이시고, 아버지이시고, 주관자이고, 통치자인 것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 세상의 열방 가운데 이렇게 하나님이 가까이 해진 민족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어느 민족에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공급해 달라고 기도할 때, 죄를 이기고 시련을 이기고 역경가운데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줄 때에 그러한 공급을 하나님께 받은 민족이 어디에 있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불러 너희는 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라며 무리하게 요구하신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불러주실 때에는 이 시간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빛답게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을 가리켜서 마른땅이라고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이 어두운 세상을 진정 불꽃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들의 심령 속에 부흥이 일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부르고 계십니다.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를 진심으로 사모하며 그 이름 하나에 생명을 걸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목놓아 우는 사람들을 오늘도 이 시간 하나님 찾아오셔서 메마른 영혼 속에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이 캄캄한 땅에서 불꽃과 같이 치열하게 타오르는 삶으로 살아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불신앙의 시대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우리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말해도 사람들은 농담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세태가 그렇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되겠습니까? 세상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 마음이 오늘 아침에 드린 말씀처럼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이 삶의 목표가 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내 앞에 두지 않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께 모으고, 시대의 커다란 탁류를 돌려놓을 수 있는 가능성이 오로지 하나님 한 분에게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천 만대 일의 싸움이라도 마음이 약해지거나 겁먹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이 범죄하고, 패류하여 어둠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위하여 선을 행하시고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바로 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잘 하면 그것 때문에 부흥이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노력할지라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교회가 새로워진다면, 그것은 이것 때문이 아니라 이것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 세상에 진정한 부흥이 일어날 때, 이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떠나가신 것 같고, 교회를 버린 것 같은 비참한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 앞에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거기에 생명을 걸고, 거기에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역사에 주역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면을 두루보아도 그렇게 목을 걸고 하나님 앞에 주님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게 해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을 찾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찾으시면, 여러분들이 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 발견되면 여러분을 중심적인 인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교회도 새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죄악은 바로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6절에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우리의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은 선지자의 음성을 거절한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많은 세상에 부름은 받았지만, 그러나, 또 죄 많고 우상숭배가 많은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우상을 섬기게 죄악에 빠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선택을 받았는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사는 일은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와 약함을 아십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지만, 구원하실 때, 우리가 일평생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할 것이라고, 우리들한테 기대를 걸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들, 자녀를 낳아놓고, 일평생 여러분들 말 잘 듣고, 유치원에 가서 재롱 잘 떨고, 공부 잘하고, 고등학교 졸업해서 대학교 들어갈 때 즈음 신문에 날거다 라고 생각하는 부모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자식보다 더 불안정한 우리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그런 기대를 안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어도, 여러분들이 한참 있다가 또 딴 짓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누구를 보냈습니까? 선지자를 보낸 겁니다. 딴 짓 하면서도 오늘서부터 몇 년 여태까지 하나님을 잘 믿었으니까, 슬슬 딴 짓을 해볼까? 하고 시작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딴 짓하며 살면 안됩니다 라고 하면, 다른 사람의 얘기인 줄만 알지 자신이 거기에 해당된다고 생각을 안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면 안되는데, 자신이 길이 아닌 길로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안합니다. 그래서 누굴 보냈습니까? 선지자를 보낸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와서 우회적으로 말했습니까? 노골적으로 말했습니까? 너희는 그 길로 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가면 죽는다, 정말이다. 저놈을 죽여라. 그래도, 선지자들은 말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의 법대를 떠난 것이 첫 번째 죄악이었고, 두 번째는 법대를 떠났어도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치실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음성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께 불순종하고자 죄악이 더 크게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니엘은 이 결과로 말미암아 멸망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한 마당에서 이 과거에 이 백성들의 이 죄를 통탄해 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니엘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이 시간에도 주님의 그 크고 위대하심을 그리고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우리들이 알게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선지자와 하나님의 말씀의 음성을 거절하였던 이스라엘과 같았던 우리들을 주님이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나님 우리를 불러주옵소서.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에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리옵나이다. 연약하고 부족한 저희들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오늘도 지켜주시고,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 드리게 하심을 감사 드리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주의 종들이 아버지 하나님 주님을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기를 소원하고,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기를 소원하오니, 주여, 이 시간에도 도와주시고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인자를 베푸시는 주님이시여, 이 시간에도 주님의 은혜를 내려 주시고, 도와주셔야 되겠사옵나이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로 말미암아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라와 그리고, 그 모든 성읍들을 새롭게 건지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시간에도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시고, 역사해 주시옵소서. 저희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하오니, 우리들을 아버지 하나님이여, 구하시고,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주께서 아버지 하나님이여 우리들을 향하여 베푸시는 그 크신 사랑과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성품의 나타남으로 인하여 아버지 하나님이여, 오늘 이 시간에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 이 시간에도 붙들어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부흥들을 경험하며, 그의 말씀으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4. 이스라엘의 죄① (단9:7-13)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 일어날 때만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깊고 그리고 영적인 삶이 풍부할수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찬양의 제목이 고통과 위기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발견된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다니엘을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다니엘은 이제 포로시대가 끝나 가는 그런 상황속에서 약67년여의 포로 세대의 비참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다니엘 자신도 고백하듯이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커다란 고난 가운데 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다니엘도 고백을 했습니다. 근데 이렇게 고백하는 다니엘이 뭐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면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 다시 말해서 수치와 더러운 욕은 우리에게로 돌아오니 오늘 날과 같사옵나이다.”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한 시대의 교회나 혹은 개인적인 영적인 삶이 곤궁하고 그리고 커다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에 그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안 깨달으면 어떻게 됩니까? 안 깨달으면 자기만 손해죠. 그러니까 결국은 마지막에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들이나 교회가 하나님께서 그 교회나 개인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주시는 것. 주권 적으로 가치가 없는 죄인을 불러서 회개 시키는 것처럼 그렇게 가치 없는 인간들에게 은혜 받고 회개하여 참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 갈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제공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은 그러나 기억해야 될 것은 그런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권 적으로 제공해 주실 수 있지만 그 기회를 제공해주셔도 결국은 마지막에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아가고 회복을 누리고 부흥을 맞이하게 될 때 그 고백하는 말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도다.‘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에서 볼 때 인간들 가운데는 그 자기의 분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것이 무슨 말 인고하니 하나님을 향해서 토라진 마음을 갖거나 삐치는 마음을 갖는 것. 인간상 이에서는 그게 통해요. 왜? 가족 중에서도 분명히 내가 잘못한게 없어도 ,’그래 알았다.‘ 그리고 이렇게 풀어주는 그런 의미에서 사람에게는 그런 삐치고 토라지는 것이 통할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것이에요. 결국 이 다니엘이 67년이나 되는 비참한 이스라엘의 역사의 가장 어둡고 캄캄한 그 고난의 계곡을 지나면서 9장1절에서 커다란 역사를 읽으면서 커다랗게 각성했다는 말씀. 첫시간에 드렸죠? 그럴게 커다란 영적인 각성을 체험한 후에 마지막 고백이 뭐냐하면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치와 욕은 우리에게로 돌아옴이나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그렇게 유다가 모두 망해서 발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수치를 당하게 만들어 주신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비난받으실 일어 없다는 것 입니다. 이건 교회 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적으로도 인간들이 목회자나 교인이나 모두 마찬가지에요. 교회가 영적으로 어려울 때는 그 모든 원인을 성도들이나 교역자나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신에게서 찾아야 되요.
근데 교회가 영적으로 어려워지게 되면 교회가 영적으로 충만할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사람들이 같게 ’주여 저 때문이옵니다.‘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요. 그러나 교회가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저 목사 때문에 전도사 때문에 누구 때문에‘ 그러면서 서로 말하자면 영적으로 곤궁한 상태 속에서 서로 붙들고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고 원망하는 일들이 우리 안에 가득 차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참다운 부흥을 필요로 하게되는 때는 이런 영적으로 가장곤궁하고 그리고 영적으로 쇠약해 절대로 쇠약해지고 쇠퇴해질 데로 쇠퇴해져서 이제는 뭔가 더 이상 하나님의 어떤 손길이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없는 그런 깊은 위기에 떨어졌을 때 진정한 부흥을 필요로 하잖아요.
그러니까 참다운 부흥과 회복이라는 것은 쇠퇴와 깊은 침체를 밑그림으로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 밑그림으로 부터 하나의 회복과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렇게 영적일 침체하게 된 가운데는 교회 적으로도 이것이 ’하나님 옳사옵니다. 모든 문제는 우리에게 있사옵니다.’ 이런 용기 있는 고백들이 안 나온단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 적으로도 그런 어떤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매우 힘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개인적 차원에서 생각해 볼까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자신이 커다란 영적인 침체에 들고 어려움에 빠지게 되면은 그 다음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에요. 그리고 말씀에 대한 반발, 그리고 하나님이 의롭고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에 대한 찬송이 사라지게 되는 것예요. 그러니까 결국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진정한 회복과 변화를 위해서 기도할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없게 되면 어떻게 되요? 없게 되면 자신이 그걸 깨달을 때까지 할 수 없이 고생하면서 사는 것밖에는 길이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모든 가난한 마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 어디로 출발되느냐 하면 ‘그 하나님은 의로우시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도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교회 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자신들이 경험하는 커다란 문제나 어려움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체험되는 불만족들이에요. 이런 것들을 다니엘이 껍질을 다시 한 번 깨는 거에요.
그러면서 1절에서 각성한 그 커다란 각성으로 말미암아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사옵나이다!”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여러분들이 개인적 삶의 차원에서도 교회 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이런 것들을 깊이 한 번 묵상하면서 인정해 보도록 권하고 싶어요.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의 그 기도를 한 번 바꿔 보라는 말이죠. 자신이 겪고 있는 불만족이나 고통이나 또는 시련을 당할 수도 있어요. 큰 어려움을 만나거나 난과에 처할 수도이죠. 이때에 그 난관과 시련을 넘어서서 참 의롭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라는 거예요. 그리고 “주께서 나를 이렇게 대우하시는 것이 마땅하옵나이다.” 그렇게 한 번 기도 해보세요. “주님 제가 이런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옵나이다.”
그렇게 한 번 기도해 보세요. “주님 제가 이런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옵나이다. 또 내가 이런 영적인 곤궁함 속에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옵나이다. 당연하옵나이다.” 그렇게 기도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왜 내가 그런 어려움에 처하고 교회가 난관에 처하고 국가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영적인 삶이 곤궁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죄가 생각이 나는 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모든 문제를 교회 적으로나 풀어 가는 가장첩경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하는 거죠.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 고개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이죠. ‘이것은 모두 내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 뭘 하나 발견할 수 있냐하면 이런 게 있어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가잖아요. 근데 어떨 땐 정지 선상에 탁 서잖아요. 그리고 다리가 아프니까 기아를 탁 풀어요. 그리고 나서 출발신호가 떨어지니까 엑셀을 확 밟아요. 분하고 엔진이 돌아가는데 차는 가지 않아요. 마찬가지 에요. 기도는 많이 하고 열심히 수고하고 애를 많이 쓰고 그런다고 해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일단 맞을 때 맞아야돼 자신에 대한 평가 그리고 자신의 지금 현재 상태를 바라보는 정확한 시야가 없는 그런 열심 있는 기도나 안타까운 몸부림 이런 것들은 언제든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불만만을 더 많이 촉발하는 원인이 된다는 거시죠. 그리고 보이는 것이 뭐가 보이냐 하면 ‘나는 이만큼 노력하는 데 하나님은 내게 안 갚아 주시는 구나’ 이런 것들이 계속 우리 속에 쌓여가게 된다는 것이죠. 때문에 고쳐야되요.
그래서 난 교회가 2년이 넘었지만요 계속 반복되는 한가지예요. 그런데도 않고쳐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에요. 모든 것은 깨달음으로 출발한다는 거이에요. 그 이전에는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어저께도 그 교회 가서 집회하면서 그 강도사님 교회에서 집회하면서 그랬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홰 마음을 기울여서 깨닫고 싶어하지 않느냐 그건 동물적인 삶을 사모하기 때문이에요. 동물적 삶을. 이스라엘이 모두 망하게 되었어요. 거기서 이 다니엘은 특공대를 조직하거나 테러분자를 모으 는 일들을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조용히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야를 배워가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새롭게 알아 가는 것이죠. 그 속에서 다니엘은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요. 그게 뭐냐면 ‘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나이다. 찬송 받으시길.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하면서 가장 고난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역사의 한마당에서 이 다니엘은 오늘 불꽃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탄송하는 거예요. 그 찬송이 뭐냐하면 “맞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마땅 하옵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됨으로 맓미암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사옵나이다.” 고백하는 거예요.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거죠. 그리고 9장 16절 이하로 내려가면 9장의 진수가 나오는데 거기서 부터는 다니엘이 정말 피나는 절규 기도보다는 절규와 같은 것으로 그 백성들을 위한 진정한 부흥을 하나님 앞에 기도 합니다. 그런걸 보면 14절까지는 서론이에요.
이제 그렇게 자각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이 다니엘을 결국은 무얼 깨닫게 되었느냐면 어제 지난 시간 얘기와 잠깐 반복이 되는 진 모르겠습니만 죄에 문제를 깊이 깨닫는 거요. 근데 그 죄가 이중적인 죄여. 어떤 의미에서 이중적인 죄냐 하면은 먼저 죄중에 한가지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이 다니엘이 그 나라가 그렇게 비참하게 멸망하게된 상황을 이미 67년 전에 일어난 일을 오늘 반추하면서 그 다니엘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그림이 떠올랐을 것임에 틀림없어요. 그 그림이 무엇이냐 하면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들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이 세상을 훌륭하고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삶은 살아가야 할 존재들인가 하는 것들을 다니엘이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율법을 읽으며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 백성들이 죄 때문에 나라가 망했으니까 이제는 이방의 땅에 있으면서도 죄없이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이 다니엘이 나중에 모함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는 국사를 처리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완벽하고 순결한 삶을 이 사람이 스스로 드러내면서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죠.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9장에서의 커다란 각성을 통해서 이 다니엘은 새롭게 죄의 문제를 보게 되는 거죠.
이 죄의 문제는 둘 사이에 끼어 있어요. 어는 사이에 끼어있냐 하면 하나는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빛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이방의 포로로 끌려 와서 살아가고 있는 그 비참한 삶. 그리고 그 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해주신 영광스러운 삶. 그리고 그사이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매일매일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도 또 다른 삶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가질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다니엘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을 때에 결국 이렇게 67년 동안 포로생활 67년이라는 세월은 이미 포로로 끌려와서 태어난 아이들이 이미 죽고 할아버지가 될 정도의 긴 기간이에요. 그렇게 엄청나게 긴 기간에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에 놀랍게 잘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망했을 때는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예레미야 애가 1장에 보면 성전이 무너져서 그 무너진 성전에서 예레미야는 울고 있는데 사람들은 집에서 보물을 꺼내다가 어떻게 하면 곡식과 바꿀까하며 거리거리를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가득하였다고 예레미야가 눈물로 토로하고 있어요. 그런데 6일이나 7일이 아니라 67년의 세월이 지난 것입니다. 그렇게 강산이 7번 변하는 엄청난 세월이 흘렀을 때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처해진 상황에서 안주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영적으로는 안 그런 줄 아세요? 문가 말이에요. 조금씩이라도 은혜를 받으면서 자신이 자꾸 변화면서 자신이 자꾸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변화를 향한 갈망이 살아있어요. 그러나 계속해서 변화하지 않으면 그런 변화를 전혀 경험하지 못함여 그런 목마름 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누가 그런 실험을 했다 그렇잖아요. 계속 강아지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종을 치니까 종만 치면 침을 흘려요. 마찬가지에요. 신앙생활에서 개인적인 영적은 제로 이와 같이 문제가 해결되는 기미가 조금씩이라도 보이면 갈망을 유지해요. 67년동안, 깜깜한 어두움의 시대가 계속되었어요. 그리고 그 깜깜한 어두움의 시대에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의 대는 끊겼어요. 예려미아가 마지막 꺼져가는 불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사람들이 뭐 대단한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그 나라의 회복을 구하며 그렇치 않았을 거라는 거죠. 그런데 오늘 이 다니엘이 이 9장에서 크게 각성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이방의 포로로 끌려와서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어야 할 백성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거죠. 그러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그 긍휼과 사유하심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어하는 거죠. 그때에 인제 걸리는 문제가 뭐냐하면 죄의 문제요. 그 죄가 이중적인 죈대 첫 번째 죄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한 것이에요. 그래서 비유하자면 하나님의 만남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선지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냐 하면 잠자는 이스라엘을 깨우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이 커다란 교회라고 하는 이 덩치를 가진 이 거인이 수시로 잠이든 거예요. 마치 어떤 사람 표현에 세상 끝날 까지 잠들기로 운명지어진 것처럼 그렇게 푹 잠이 든거에요. 그때마다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그 잠들어 가는 백성들을 깨운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깨울 때에 사람들은 그 말씀에 대해서 깊이 반응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왜 자신을 깨우는가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됐다는 거죠.
그러나 언제나 그런 사람들은 소수였어요. 언제나 소수였지요. 그리고 이런 일들은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말씀을 헛되이 돌아오게 하는 법이 없어요. 진심으로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아서 진심으로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손을 그리워하며 손을 잡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많이 믿어도 특별히 이런 교회나 자신이나 혹은 나라의 신앙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도록 그렇게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고 그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있어요. 반드시 있어요.
한 11월인가요. 저쪽 서대문에 있는 어느 교회 설교를 하러 갔는데 들어가면 느껴져요. 엊그제도 갔다와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사람들은 많이 모이는데 꾀 커요. 교회는 큰데 설교하러 올라갔는데 숨이 턱 막혀요. 제가 여러 번 여러 군데 부흥회를 다니고 집회를 다니는데 늘 하는 게 정해져 있어요. 왜 이렇게 우리 교회에서 하는 것 같이 자유롭게 아무 본문이나 택해서 않느냐 할 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술술술 나오지 않는 교회가 대부분이에요. 결국은 설교자가 그 교회가 낯설기 때문만이 아니라 문제는 사람들이 그렇게 너무 메말라있어요. 근데 설교를 했는데 설교를 계속하면서도 ‘괜히 왔구나’ 돌부처처럼 장승처럼 번 티고 앉아서 근데 졸지도 않아요. 졸아도 은혜를 받아야 졸지 전혀 감각이 없어요. 그래서 설교를 계속했는데 설교하는 중에 몇 사람이 통곡하면서 우는 거예요. 어디든지 잠자는 다수들 말고 깨어있는 소수가 있어요. 또 잠들어있다 하더라도 깨어날 수 있는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예요. 누가 누구를 동물 보듯 해야할지 하나님만이 아시겠죠. 그러니까 눈 하나 달린 동네에 눈 두 개 달린 사람이 들어가니까 동물이 되듯이 어디든지 하나님이 가장 캄캄한 때에라도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내미시면 소수이긴 한 대 그 소수가 그 선을 잡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를 영원히 망하지 않고 보존해 오시는 방법이었어요.
여러분 특별히 교회 역사에서 성경해석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어떤 시대에는 이 해석의 역사가 그야 말로 개판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들의 해석을 들으면 성경을 더 알 수가 없는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대전에 한 번 내려갔는데 연세 많이 드신 할머니 에요. 요새 뭐하냐 출애굽기 강회를 새벽마다 한 대요. 새벽기도 나간 다음 할머니가 하는 말이 그래요 내용이 속속 들어오는데 새벽에 가서 설교를 듣고 나면 실타래처럼 본문이 다 헝클어진다는 것이에요. 그 할머니가 신학을 해겠어요. 뭘했겠어요. 그러한 일들이 역사 속에 많았어요. 어떤 때는 훌륭한 말씀의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서 어디 가든지 사람들이 풍성한 계시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되요. 요즘도 그런 설 교문을 읽으면서 아! 이 설교는 어떻게 적어요 도시 간 이상 계속 했을 설교데 예화하나도 없고 죽되는 지루한 내용들을 그 사람들은 듣는 거에요. 밑에 써놓는데 설교를 다 듣고 나서 사람들이 그 목사를 찾아가서 그 설교를 프린트 해달라고 그렇게 해 가지고 그 설교를 프린트해서 사람들이 나눠갖고 25년 전에 이런 일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 사모함 들이 있던 그런 풍부한 시대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해석 역사를 보면은 때로는 하나님 말씀의 역사가 아주 풍성하고 때로는 아주 가난하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해석하는 그 맥은 끊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층 두텁던 시대는 어떠해요. 허튼 소리하면 그 사람은 아예 교회를 못하는 시대 에요. 그러나 얄팍하던 시대는 어때요. 진리의 말씀을 진리답게 외치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던 시대 에요. 감옥에 끌려가고 불에 태움을 당하고 고난을 받던 그런 시대가 바로 그 시대라는 거죠. 이것은 말하자면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그 두텁기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은 비례해요. 말씀이 풍부하게 해석되는 역사 속에는 깨어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요. 그리고 그것이 아주 경박하던 시대에는 경박한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오늘 이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커다란 각성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커다란 죄악을 뭘 얘기 하냐 하면 선지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가 어디이 있어요? 예레미야가 끝이에요. 그리고 스룹바벨이나 또 에스라나 이런 사람들이 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은 선지자로 분류안해요. 다니엘 자신도 마찬가지에요. 그럼 그건 언제 일이에요. 옛 날에 일어나 일이에요. 옛 날에 예레미야나 그 이전에 이사야나 이런 사람들이 설교를 듣지 않고 배반하던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근데 오늘 그 죄를 회개하고 있는 거에요. 이 얼마나 놀라워요. 이게 바로 하나님 교회의 일치성이에요. 오늘날 말하자면 교회가 하나된다.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 데 하나되는 것은 같이 밥 먹고 논다고 해서 하나되는게 아니에요. 그것은 세 속의 공동체에서나 하나 되는 것이지 교회에서 진정한 하나됨은 정말 개개인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그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의미를 가진 동아리인가 하는 것을 깨 닫는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진정한 하나됨이 안 일어나요.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해요. 율법을 듣지 안하였나이다. 그런데 선지자들의 음성을 듣지 않았다니, 율법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그건 이해가요. 그 백성들이 율법을 안 지켰으니까 그러나 선지자의 음성듣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수 백년 수 십년전에 살다가 다 죽었어요. 남아있는 사람들은 얼마 안돼 근데 그 죄를 지금 뉘우치는 거예요. 심지어는 이제 그 선지자들이 남긴 그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바라보고 그 말씀 속에서 말했다면 자신을 돌이키지 않고 오늘날의 그 민족의 죄를 놓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회개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애통하며 민족의 죄를 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을 때 다니엘의 마음속에 떠올랐던 죄의 그림이 어떤 거였겠어요.
오늘날의 이 백성들의 죄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겠냐는 거죠. 노래방 술집 화투장 도박 나이트 클럽 이런 것들이 떠오르겠어요. 다니엘의 마음 속에는 그런 것들이 떠오른 것이 아니에요. 결국 다양하나 모든 그림은 하나의 초엄을 향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은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 주님이 그 백성들을 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스럽게 하지 않는 것. 주님이 그 백성들을 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와 같애 여호와의 편팔. 구 속의 놀라운 능력 그들에게 보이셔서 그들을 건져내신 거예요. 그런 맥락 속에서 이 다니엘은 ‘하나님은 공의롭다.’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그 거룩한 뜻을 계시 받고 그 뜻대로 살지 않으면 안되리 만치 충분한 대우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 와 같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 것이 예루살렘과 같은 곳에 행하신 것이 딴 데는 없었나이다. 고백하는 이 다니엘의 마음 모든 민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포로의 때가 끝나지 않은 이 고통스러운 역사의 어두운 한 밤중에 그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모든 의로움은 하나님께로 수치는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를 다른 백성들은 그런 놀라운 은혜의 특권들은 받은 적이 없어요. 짐승과 같이 노예 살이 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찾아 오셨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주신거요. 그것도 묘한 대비 아닙니까 그들은 건져 내었다가 그들이 그들을 건져내어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니까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가게 하시는 거예요. 지금 바벨론에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주께서 여호와의 크신 팔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니까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가게 하시는 거예요.
지금 바벨론 에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주께서 여호와의 크신 팔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기 이전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 죄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이 생겨나기 시작한거죠. 결국 여기서 우리는 하나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오늘 지적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어떤 사람은, 우리교회죠. 교회 나와 가지고 ‘맨날 뭐 깨달았다고 울고불고 맨날 사는 게 그게 뭐냐 그렇게 밖에 못사냐’ 여러분! 그렇게 해도 그렇게 밖에 못사는 사람이 그나마도 은혜를 못 받으면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 그건 아무도 몰라요.
인간은 그런 면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게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히브리어에서도 뭘 얘기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배교하는 사람들의 위험에 대해서 말하잖아요. 이방인들과 같이 더러운 죄에 빠지지 말라고 간곡하게 권하는 그 편지를 누가 받았어요. 거룩한 성도들이 받았어요. 고린도 전서 5장에 보면 아비의 아내와 음행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는데 고린도 동네 사람들 얘기하는 거요? 고린도 교회에 교적을 두고 살아가는 세례 받은 교인들 주에 아비의 아내 와 같이 음행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아비의 아내면 누구요? 계모겠죠. 이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게 인간이에요. 그 사람이 은혜를 그렇게 받으니까 개판이지 그나마 은혜도 진심으로 안 받으면 소판처럼 살아갈 사람들이여. 그걸 기억해야 되요. 돼지처럼 살아갈 사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우린 여기서 뭘하나 발견하게 되냐하면 앙상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 선지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던 그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매일매일 우리를 갱신시켜 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말하자면 ‘인면수심’의 사람으로 바뀌어져 가는 거예요. 전 이런 묵상을 한 번 해봤어요. 만화영화에 보면 잘 나오잖아요. 약을 잘못 먹어 마법에 걸리면 얼굴 한쪽이 점점 짐승으로 변해 가는 그런 장면 나오잖아요. 여러분 그게 바로 우리의 영적인 삶속에 아주 잘 적용되요. 그렇게 되어 갈 수 있는 것이에요. 지금 우리가 고상하게 여기 앉아 있지만은 한 일년이나 3년동안이나 하나님 말씀 안 듣고 깨닫는 것 없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아 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참 너무나 비참한 모습이 된다는 거죠.
여려분! 은혜를 잘 받다가 그 은혜를 못 받거나 안 받거나 해 가지고 사람이 깊은 시험에 들면 그러면 얼굴에 나타나는 것 동의 할 수 있어요? 동의하면 한 번 아멘 해보세요. 동의되죠. 여러분도 알 수 있죠. 그러는데 그 사람이 잠깐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을 돌이켜도 그것이 얼굴에 나타나는데 죄의 길을 계속 걸어가면서 하나님을 거슬리는 삶을 살 때 그것이 특징이 되는 거죠. 세상의 화장품으로 화장한 얼굴과 천국의 화장품으로 화장한 얼굴은 틀려요. 두 개다 쓰면 더 좋겠죠. 여러분 우리가 거억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예요. 근데 또 한편으로는 무한하게 거룩하게 살수 있는 가능성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 선택의 기로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죠. 근데 놀라운 사실은 뭐냐하면은 타락한 백성의 마음으로 흘러가는데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는데 거룩해지기 위해 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해요. 믿습니까 왜 그래요. 워낙 죄 많은 세상의 출신이에요. 본바닥 출신이 거기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예수 믿어 가지고 사람들이 악기를 죽 갖다놨는데 드럼 칠 사람이 없어요.
어떤 한 사람이 자기가 치겠다고 예수 믿은 지도 얼마 안 됐는데 기가 막히게 쳐요. ‘야! 숨은 인재가 이었구나.’ 와 신들린 것처럼뭐 했냐니까 나이트 클럽에서 옛날에 그거 쳤데 가닥이 나온 거예요. 여건만 주어지고 기회만 닿은 면 가닥이 할렐루야죠. 근데 정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제가 세례를 받고 4년동안 담배를 피웠거든요. 담배를 뻐끔뻐끔 피면서 성경을 읽었어요. 3일 금식하고 술상 받아먹고 그러다 한 번 술먹고 죽을 뻔 했어요. 하나님의 경고 였던 것 같아요. 그 자리에서 데굴데굴 -3일 금식하고 맥주를 마셨는데-구렀어요. 그날 밤에 눈이 빠지도록 고생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여태까지 안 먹은 거예요. 근데 담배를 끊은지 3년 6개월이 됐는데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누가 담배를 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글로가. 정말 놀라워요. 근데 그게 아침에 그렇게 향기로울 수가 없어요. 3년 6개월이 지났는데 꿈에 한 대식 피우는 거예요. 이렇게 죄가 무서운 거예요. 인간의 육체가 흘러가는 데로 노력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특별한 노력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아주 신속하게 빠져가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너희는 근신하라, 근신하라가 무슨 뜻이에요. 허리띠를 동이고 언제 주인이 올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야지만 이 흘러가는 커다란 죄악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어요. 그걸 말하는 것입니다. 3년 6개월 지났는데도 그 냄새가 몰랐죠. 왠 지 그쪽으로 가고 싶어 가고 나면 ‘후’ 하면 뒤에서 ‘흠’ 하고 참 대단해요. 5년이 넘으니까 골이 아프기 시작 하더라고5년이 넘으니까 마약이 그거의 200배라고 하니 끊는다는 건 불가능 한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는 이유는 바로 그거요. 그렇게 선지자들이 피를 토하듯이 하나님 말씀을 외치게 만드시잖아요. 그 백성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설교 몇 편하고 죽어버리라고 명령하시면 서도 보내 시잖아요. 죽어 그리고 몇 편의 설교를 하고 희생해서 핍박을 받고 죽어 가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타깝게 깨우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선지자의 울부짖음은 하나님의 울부짖음이에요. 그리고 흘린 피는 하나님의 피에요. 하나님의 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에 책망 받을 때 아벨의 피로부터 그 제단 사이에서 죽은 바가랴의 모든 피까지 하나님이 신원하시는 거예요. 그 백성들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 피 값을 모두 백성들에게 들리는 거예요. 그리고 결국 그것은 받아내고야 마는 거에요.
이런 민족적인 심판은 하나님이 언제 실행에 옮기 셨어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심판받은 적이 없어요. 이 역사가 그렇게 오랜 세월 주전 1500년 경부터 시작해서 500년 까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을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보시는 거요. 그리고는 그 인내가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 심판을 실행에 옮기신 거죠. 그것을 당한 그 세대는 얼마나 억울 하겠어요. 앞에 사람이 잘못했는데 왜 우리에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한 덩어리로 이스라엘로 보시는 거예요. 교회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셔서 그 백성들을 깨어 있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여러분 마찬가지예요. 문가 커다란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오늘 하루를 착실하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끈임없이 잠들기 원하고 그리고 세상으로 빠져가길 원하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고백을 해야돼요.
여러분에게 믿음이라는 게 도대체 얼만큼 있어요. 그거 털어먹으려면 하루아침에 털어먹을 수 있는 분량밖에 우리에게 없어요. 그나마 믿음이라도 하나님이 그 믿음의 불씨에 계속 불을 지펴 주시니까 그나마 유지하고 불꽃은 그만두고라도 촛불만큼이라도 가지고 살아가는 건데 뭔가 엄청나게 있는 것 처럼 착각하고 생가하면서 그렇게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세우고 살아간 다면은 그러면은 우리도 그 은혜를 간직하면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은 그만두고 성냥불 만큼 도 살아갈 수가 없어요. 이게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요. 그렇게 때문에 결국 하나님은 그래서 하나님은 이시라엘 백성들을 당신께로 돌이키실 때에 순한 말로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애 돌아와 돌아와 “너 계속 그렇게 안 돌아오면 내가 섭섭하게 생각할 꺼야. 인간적으로 이렇게 말하면 돌아와야 되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돌아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치리라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그런 죄와 어려움 가운데서 건져내기 원하셔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정서를 통해 빚어낼 수 모든 말을 다 토해내요. 어떤때는 하나님이 목 놓아 우시는 음성으로 돌아오라고 혹시 감동을 주면 이놈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애원하는 거예요. 하다가 안되면 어떤 때는 어때요. 무서운 심판을 내리고 그 선지자에 쏟아지는 그 설교속에 서 피 냄새가 나는 피와 같이 번뜩이는 그런 말로 그 백성들의 정서를 자극하고 돌아오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음성을 듣고도 계속 자는 거예요. 잠들은 거에요. 그 다수가 그렇게 깊이 잠들은 거예요. 그러면서 그 조상의 모든 죄악을 인해서 애통하는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는 선지자가 필요가 없는 세상을 꿈꾸시면서 선지자를 보낸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도 이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살아간다면 선지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그러면서 그 조상 때 부터 어떻게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절하였는가 하는 것들은 낱낱이 반추하면서 그 것을 모두 자신이 짊어지며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중적인 죄라고 했는데 그 다음 죄는 무었입니까?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5. 이스라엘의 죄② (단9:12-15)
지난 사간에 하나님 앞에서 크게 애통해하고 회개하고 있는 그 죄악이 있었는데 그 죄악이 이중적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 죄악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이 바벨론으로 끌려와서 포로가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치 아니하고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포로로 끌려오는 비참한 고난을 되었다는 역사적 인식을 이 다니엘이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시편 107편에 나와있는대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곤고함 그리고 인생이 흑암가운데 앉아서 고통을 받게되는 그 모든 원인들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07편 10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사망과 흑암에 앉으며 곤고와 죄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이렇게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나 나라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나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흑암에 앉은 것과 같은 그러한 영적인 어두움 그리고 육신적인 많은 고통과 그 모든 그 괴로운 시련가운데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그 무지하고 범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깨닫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바도 꼭 같은 맥락입니다. 시편 107편은 개인의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다니엘서는 이 민족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그리고 죄를 짓게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곤고하게 하셨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첫 번째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커다란 죄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않고 그 종 선지자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셨다고 하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도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9장에서 그 예레미야의 서책을 읽으면서 그는 새롭게 죄와 하나님의 심판과의 관계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지만은 잊지말아야될 것은 개인이건 교회건 나라건 죄가 가득 차면 하나님께서는 반듯이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지 않는다는 관심과 사랑의 표징을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가 잘못할 때 징벌하시므로서 우리에게 들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놓은 자식이라는 말을 합니다. 해도해도 가망이 없을 사람은 아예 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마르고 그치지 않는다는 증거 여전히 하나님께서 내백성들로 여기시고 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잊지말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인간들이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대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고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마구 짚밣으며 살아도 무기력하게 지켜만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 것같이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생들보다 당신들 자신의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람들에게 발견됩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유인이고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며 무율법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삶에 대해서 두렵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갈려고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방종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깊이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기를 때 무조건 자녀를 칭찬하고 위하고 그리고 아낌없이 주어보십쇼. 마지막에는 여러분들을 향해 주먹을 들것입니다.
예)어느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친 아이의 부모가 가게주인에게
“이까짓거 물어주면 될것아니냐!” .....
절대 어떤 것을 행할 때 부모가 마음 아파하고 진노하는지를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그리고 넘치는 사랑이 있는 부모만이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어떤 사람들이 깨닫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은총과 인자하심을 한없이 감격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하나님의 엄격하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만홀히 여김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그래서 저는 분명히 여러분들에게 두 번째 십계명을 강해하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아무렇게나 살든지 내버려두실 거야, 하나님 내가 어떻게 살든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불순종하든지 하나님은 나를 좋게 대해주실 수밖에 없어. 내게 일어나고 있는 기분 나쁘고 불쾌한 일들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고 재수 없어서 일어난 일이야.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런 분이 아니다. 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을 스스로 만들어내어서 그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그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거예요. 원하는 것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편견으로 된 하나님. 고쳐야되는 것입니다. 절대 고쳐야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예레미야의 서책을 읽으면서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성품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고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묻고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을 청종치않고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멸시하며 거절할 동안에 하나님은 뭐하셨습니까? 우린 하나님 앞에 묻고 싶죠?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묻고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이 엄위로우심대로, 오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모두 인생들보다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보존해야되겠다는 원칙을 지키기를 고수하셨다면 불순종하는 자들은 즉각 심판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마땅히 심판 받아야 마땅하고 율법을 어기면서 살고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 민족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그 목소리를 전해주기위해서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대적하고 미워하고 결국은 그들을 순교하게 만들었던 그 역사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은 뭐하고 계셨습니까? 참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당신의 율법을 거스르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분부하여 가르치고 싶어하시는 그 말씀을 거절하면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참으셨습니까? 하나님에게는 참아야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속에 있는 그 백성들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참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인내를 동반합니다. 참음이 없는 것은 사랑일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참으시는 것입니다.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이 세상에서 존귀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는 것들 불태우고 멸할 권세가 그분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어떤 때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땅을 팔아서 하나님 앞에 바쳐야 되겠다고 그렇게 마음으로 생각하고 성령 앞에 결심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팔고 돈을 손에 넣고 보니까,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 중에 일부를 떼었습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미리 공포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떼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을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누구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행동 때문에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손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행동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시간 사이에 두부부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서 들것에 메여서 교회당을 떠났습니다. 불행히도 이일은 장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던 구약시대가 아니라 은혜가 충만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그야말로 거저 얻는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는 찬란하고 은혜가 충만한 신약교회의 시대였습니다. 우리에게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가 그릇 행하고 불순종하고 죄악가운데 거하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거절하고 하나님 앞에 깨닫기를 거부하고 우리마음대로 고집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렇게 내버려두시는 것이 우리는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인내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율법을 어기고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그리고 우리가 율법을 지키게하기위해 보내주신 선지자의 음성을 거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그토록 참으실 때 참으심의 은혜도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은 돌이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셨던 것과 꼭같은 방식으로 오늘날 우리민족의 역사를 다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이 죄가 많아서 망한 민족은 역사상에 하나도 없어요. 언제나 모자라는 것 때문에 망한 거예요. 그것이 뭐예요? 진정한 회개예요. 그것이 모자라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좌초되고 이스라엘 백성같이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던 신앙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중적인 죄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3절에 나와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모든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 번째 죄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구하지않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불순종한 죄였고, 또 하나는 은총을 간구하지않았던 죄입니다. 그들은 두 가지 면에서 은혜를 구하여야했는데 하나는 죄악을 떠나는 것과 하나는 진리를 깨닫게되는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구해야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정한 부흥은 어떤 기도를 통해서 여명이 밝아오는지 압니까? 개인의 참담한 어려운 지경에서 회복되는 놀라운 영적인 변화의 조짐은 어느때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생각이 바뀔 때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전히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내힘과 내주관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그리고 매일매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그놀라운 은총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자신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이런 은혜를 구하지 않는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 큰 심판으로 몰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 뭐냐하면, 이 교만이에요.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교만한 마음 범사에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고 믿는 이런 교만한 맘, 주님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이 마음은 불신앙만큼이나 하나님께 커다란 진노를 사는 모습이에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용서에 관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이 내게 잘못하면 몇 번을 용서해줘야 하겠습니까? 베드로는 은혜받은김에 한껏 양을 늘려서 일곱 번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일흔 번의 일곱 번씩. 사실은 이 의미는 무한대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무한하게 용서를 해줘야 된다고 가르쳐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에도 그 하나님은 실패한 죄인들의 친구이시고 세상에서 낙인찍힌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 하나님은 자비와 은총으로 그들을 받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은혜주시고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비밀 중에 하나가 사람들을 새로 시작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도저히 가망이 없고 소망이 없는 사람들을 새로 시작하게 만드십니다. 이 세상에 가장 더러운 자와 같이 타락한 자를 바꾸고 고쳐서 성자와 같이 거룩한 여인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없이 여김을 받는 사람을 유능하고 강한 사람으로 만드셔서 하나님 그들을 움직이시는 원동력이 되신 하나님자신의 능력의 부유함을 들어내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취미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부득불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강함이 나의 약한 것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 이라는. 그러나 약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강해지지 않습니다. 타락한 모든 사람이 다윗과 같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주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울과 같은 삶을 산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사울과 같은 변화된 삶을 살아서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에 괴수였던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충성스러운 일군으로 바뀌는 일들은 많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전과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전적으로 죄악을 떠나고 그리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면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다가설 수 없다는 간절한 어린아이와 같이 가나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이기 때문에.....
예) 열심히 한 소설을 쓴 소설가 그러나 그 소설이 잘 안 팔려, 그 작가는 그 소설이 너무도
사랑스러운 모양이에요. 이번에 5년만에 세 번째 이름을 바꿔 다시 펴냄.
그 출판사로 한 청년의 팩스 - 선생님, 한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진심으로 이 독자를 사랑 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미는 그 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절 하지만 누군가는 그 손을 잡아주고 그 손을 붙잡고 일어서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 고 용기를 가지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서 작가의 손은 잡아주는 사람이 이따금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기억해야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내미는 손을 하나님은 땅 끝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거절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럼, 문제는 무엇입니까? 문제는 죄악도 문제지만 더 커다란 문제는 뭐냐면 그 죄악을 더해서 마지막으로는 하나님 그런 분의 은총 없이도 내가 잘사나 봐라. 이러한 삐뚤어진 마음이 하나님 앞에 우리자신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가장 커다란 죄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누누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이름만이 하늘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나라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총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다 나를 무능하다고 말해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너는 무능하다. 너는 나그네와 같은 놈이다.’ ‘그래, 나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사람이다.’ 그렇게 인정받기를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다. 왜 나는 네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나님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그런 한 인생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교적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그리고 비교적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 그것이 그렇게 커다란 차이를 우리가운데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우리를 위해 핍박을 받고 이 땅에서 온유하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죽는 데까지 나아간다 할지라도 천국이 우리의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천국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의를 위해 박해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은 소유하고 있지 못했으면서도 온유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핍박받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셨고, 온유한 자들에게는 땅을 주셨지마는, 심령이 가나한 사람들에게는 천국 그 자체를 주셨습니다. 통째로 모두 주셨던 것입니다. 심령이 가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며 말씀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는 이 역사적인 성취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졌고 동족들은 흩어졌고 지금 자신은 이방의 땅에 포로로 끌려 와있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서 나라가 다 망해버린 다음에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심판의 고통이 끝나지 않게끔 만들고 있는 가장 커다란 불순종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이전에 나라가 있었을 때에는 없었다고 할지라도 이제 나라가 망해버린 이즘에 와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겸비해져야 했습니다. 전에 왕이 있고 군대가 있을 때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나라가 모두 망해서 종의 멍에를 지고 이방의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 비참한 상황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마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면서 이렇게 주님의 은혜, 하나님의 그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간절히 찾으시고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역사를 보면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뽑아서 사용하시는 것에 어떤 원칙을 발견할 수가 없어요. 어떤 때는 정말 무식한 사람들 사용하시기도 해요. 훌륭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해요. 인격적으로 잘 다듬진 사람을 사용하시는가하면 인격적으로 아직 먼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불황무시한 사람에게 성령의 불을 주셔 가지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일으키시기도 하셔요. 통일성이 없어요. 여러분처럼 잘 생긴 사람을 사용하시는가하면 저처럼 못생긴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사람들을 사용하시는데 특별하게 관통되는 일관된 원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누구도 알 수 없어요. 이렇게 앉아서 지금은 여러분들이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설교를 듣고 있지만 그러나 이중에서 이후에 내가 무릎을 꿇고 여러분들을 스승이라고 불러야 될 사람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어요.
그러나 모든 사람을 사용하시는 한 원리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끊임없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없는 부족을 발견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부족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살아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그 은혜만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을 사용해야지만 그런 사람들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이 얼마나 인생들을 사랑하는지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시는 줄을 믿을 수 없다면 나를 봐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라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살리셨다면 너희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는가 이것을 한없이 자랑하고 말하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처하든지 우리는 각기 하나님만을 높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언제나 구하는 사람들이 돼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를 누리며 살 때에도 그 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산다고 한다는 마음을 유지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경건하고 훌륭한 신앙생활을 해 나아갈 때에도 사실은 이 모든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가지로 하나님은 은총을 간구했습니다. 그는 첫째 죄악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그렇게 쉽게 죄를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주는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만들어주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떠나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눈앞의 이익을 버리게 만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을 용납함으로 말미암아 미워하지 않도록 힘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커다란 위기 속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언제나 인간의 간교한 꾀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 이것도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돌이키게 만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죄악을 떠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함을 간구하여야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죄를 떠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지를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죄를 사랑하고 그 불순종의 삶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는 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 깊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고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의 경향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당신의 백성들이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어찌하든지 불순종하며 내 생각을 이루려고 하는 삶보다는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그러한 사모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깨닫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제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던 장면을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침뱉고 때리고 돌을 던지며 욕했습니다.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너를 때린 이가 누구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종일관 대답이 없으신 묵묵부답의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때 수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뒤를 통곡하며 따라왔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는 그 십자가의 고난의 길에서 주먹으로 가슴을 치면서 슬피 울며 예수의 고난을 자기의 고난으로 받아들이며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그러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들을 향해서 그 고난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눈을 들어 그 침묵을 깨뜨리고 중요한 예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잠시후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고 죄 가운데서 떠나려고 하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들을 깨닫는 것입니다. 뭘 말하나 구경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높은 꼭대기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자기가 판단을 해서 뭐든지 해보기를 원하는 이러한 높아진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은혜의 빛 줄기가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속에 서서 목말라서 굶주려서 갈급하여 죽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먼저 절박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돼야하는 것입니다. 부흥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눈뜬 사람들에 의해서 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교회에 생명도 없고 희망도 없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당연히 무엇인가를 베풀어주셔야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 대신에 무엇인가 자신들을 위해서 베풀어주시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은혜를 간구하며 그 은혜를 사모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자식의 빵을 취하여 개에게 줄 수 없다 이렇게 말해도 매달리면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를 먹지 않습니까? 부스러기의 은혜라도 나에게 주이옵소서. 그런 은총을 구하는 마음 이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오늘 성경이 왜 불순종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왜 율법을 불순종하고 그리고 선지자들의 음성에 대해서 불순종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것을 가르쳐서 오늘 성경은 주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을 받고 그렇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음에 이미 심판은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벌하거나 심판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길이 아니에요. 우리가 이점을 기억해야 됩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실 때도 있어요. 그렇죠. 그리고 우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커다란 어려움 속에 우리를 두실 수도 있어요. 그것이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가장 간절한 기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가 있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당면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서 나라를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라의 광복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던 것은 오늘 죄목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것은 어차피 하나님이 70년이란 세월이 흘러야지만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기로 이미 경륜하셨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판에 심판을 더한 가장 커다란 죄악은 깨닫도록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될 사실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인간은 화가 너무 나면 때리면서 말로는 뭐 내가 좋아서 너 대리는 줄 아냐. 사람되라고 때리는 것이지. 그것은 이제 며칠 뒤에 일이지. 지금 화가 나는데 무슨 사람되라고 때립니까? 속에서 확 치받쳐서 너좀 맞아라하고 자식에게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서 때리는 거예요. 대리다가 빗나가면 쫓아가서 똑바로 때리잖아요.
그러니까 학교다닐때도 언제 많이 맞느냐면 가만히 앉아서 맞는 아이들은 선생님이 긍휼이 여겨요. 그런데 피하면 그러면 선생님이 더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심판도 그것도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이죠. 거기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흑암과 곤고함과 시련 가운데 처하면 거기서 마음을 낮추고 생각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에요. 계속 생각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정말 짐승과 같은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깨닫도록 계속해서 강도를 높여 가시는 것이에요.
이게 협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에요. 그러니까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 것이죠? 어찌하여 너희가 불순종하느냐 때리면서도 하나님은 우시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막 때리는 거예요.
여러분 자식들 때리다 울어본적 있죠? 막 때리다가 너죽고 나죽자 그러고 울죠. 왜 때리면서도 부모의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 평생 소원은 이거하나 고쳐서 사람 만들고 싶은데 말을 안 듣는 거예요. 돈으로 고쳐져요? 안 고쳐져요. 생각이 바뀌고 삶에 대한 태도와 철학이 바뀌어야하는데 안 바뀌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 때리시면서
찬송-때리시고 어루만져...
때리시는 거예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간절한 계획이 있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예요. 은혜,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예요.
예 -노태우 대통령이 영국에 갔을 때 개를 먹는 나라는 물러가라고 한 얘기
훈련한 개와 먹이만 주고 기른 개와의 차이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셔요. 나라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절한 하나님의 소원은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짐승과 같은 삶을 면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심판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 우리가 왜 이렇게 심판가운데 있게 되었습니까? 주님 오늘 이처럼 포로로 끌려온 우리의 인생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옵나이까? 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고 매달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신 것입니다. 은혜가 임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는 깨닫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그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대에 진정한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먼저 다니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를 보며 깨달았던 장면이었습니다. 우리의 개인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늘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포로로 끌려가 고통을 받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 우리를 이 민족의 압제와 고난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달라고 부르짖지 않던 사람들이 누가 있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 민족을 왜 이렇게 심판가운데 두셨는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던 이스라엘 백성의 선지자들,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이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깨닫게 했던 그 깨달음을 오늘 이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날이야말로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그리고 국가적으로나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시점에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는다면은 그러면 하나님의 품을 떠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품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은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고백이 없이는 누구도 부흥을 맞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는 시대 (단9:16)
다니엘 9장 16절 한절을 보겠습니다.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쫓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열조의 죄악를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기도합시다......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가운데 다니엘이 그들의 죄에 대해서 두 가지로 했다는 말씀을 두 주간에 걸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중적인 죄악은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율법을 저버린 것이고 또 한가지의 죄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도 진리를 깨닫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쫓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열조의 죄악를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했습니다.
우선 커다란 영적인 각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을 가진 후에 그가 하나님 앞에 구하는 새로운 기도는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거룩한 성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뒷 부분에 나아가서 19절까지 다니엘이 바로 신앙부흥을 구하는 직접적인 기도를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초두에서 오늘 이 다니엘은 하나님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에서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의 이 말 자체가 우리에게 뭔가 이상한 느낌을 줍니다. 그 느낌이 뭐냐면 무슨 분노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었는가 하나님의 무슨 분노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 나라의 국권을 잃어버리고 멸망당하던 시기에 그 예루살렘 최후의 날은 정말 비참했을 겁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능히 이 다니엘이 주의 분노를 거두어 주옵소서 말할 수 있지만 이미 67년 가까운 세월 동안을 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살았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적응하는데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 일제시대 36년 속에서 도저히 이 속에서는 살 수 없다. 그렇게 느끼면서 그렇게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는 그 삶에 대해서 뼈저린 한을 품고 싸웠던 사람들은 전 인구중에서 극소수의 국민들만이 그렇게 살았어요. 독립투사들이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배급주면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월을 67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미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지 사람들은 바벨론의 통치에 적응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올리고 있는 다니엘 자신은 이방의 땅에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무슨 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품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품을 팔아 먹고 혹은 장사를 해서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흩어진 사람들이 된게 바로 이때부터 흩어진 거거든요. 그렇게 해가지고 지금 수 천년의 세월을 내려오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흩어져서 67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이방의 땅에서 20년을 한 대로 본다면 할아버지로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들이 정말 손자로 태어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네 나라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것이 없는 삶을 지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다니엘이 역사를 바라보는 예리한 눈을 보세요. 이 다니엘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벨론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이 역사에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있을 그 때에 이 다니엘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역사를 주의 분노를 한 몸에 받으며 살아가는 그 역사의 현장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다니엘이 부흥을 이제 17절에서 부흥을 기도하는데 부흥을 본격적인 부흥을 기도하기에 앞서서 다니엘이 자기가 놓여있는 그 역사의 무대를 바라보는 이 뛰어나고 놀라운 통찰을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먹고 살고 육 칠십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방의 땅에서 적응을 하면서 살아 왔기 때문에 전혀 자기 자신이 어떤 문제를 못 느끼며 살아왔지만 그러나 이 다니엘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한 없는 진노를 받고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다니엘의 생각이 혹시 치우친 생각은 아닙니까? 이 속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증거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증거로 다니엘이라고 하는 이 포로 중에 끌려온 한 사람을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만드셨
습니다. 그 사실을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 자신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서 가장 캄캄한 유다 역사 한 복판에 서서 그 민족 그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그 민족을 사랑하며 바벨론을 섬기도록 만들어 주신 그 놀라운 일도 역시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죠?
그리고 그 백성들이 이방의 땅에 있으면서도 전혀 진멸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을 살아 남겨 두셨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다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저런 모양으로 이방에 끌려왔으나 지금은 안정된 자리를 터를 잡고 그렇게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이방의 땅에서도 율법이 읽히고 있었고 그리고 이방의 땅에서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은총의 증거들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많은 은총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우리에게 부으신 그 주의 분노를 우리로부터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 주의 거룩한 산으로부터 떠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와서 그 포로의 몸에서부터 수 많은 과정을 거치며 이 커다란 바벨론 땅에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라오는 동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의 증거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행하시는 이 일이 다니엘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민족적인 사건이란 생각을 언제나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이예요. 이것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예요. 민족적인 사건이예요. 다니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여전히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은 이 상황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우리 민족을 여전히 지키고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니엘은 다니엘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던 것은 바벨론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은총을 입고 평화로운 삶이 아니라 무너져 망가진 채로 서있는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시온산이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어서 이방의 땅에서 재상의 자리에까지 이르고 음으로 양으로 내 백성들을 돌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내 백성들 중에 경건한 사람들을 세워서 그래도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을 꿈꾸며 살아가는 신앙적 분위기가 있도록 만들어 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이 바벨론 땅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은 다니엘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이 이렇게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기대를 다니엘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생각하는 그 순간마다 절망처럼 밀려오는 무거운 중압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바벨론 땅에서 이렇게 계속되어도 여전히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었고 시온상은 황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그리고 그 거룩한 시온산은 여전히 이방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다니엘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대한 아주 간단하고 명쾌한 판단을 내리는데 이 시대는 은총의 시대가 아니라 분노의 시대라고 하는 평가였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정말 부흥을 구하던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비관주의자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말할 때에 그들은 위기를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춤추고 마시며 노래할 때에 그들은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모두들 평안하다는 시기에 위기가 왔다는 사실을 감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서서히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대적을 풀의 섶과 같이 사르시고 보름에 쥐불놀이하는 것 봤죠. 잔뜩 말라있는 언덕에다가 논뚜렁에다가 불을 확 붙이면 거침없이 온 언덕을 전부 다 새카맣게 태워 들어가는 이러한 저항할 수 없는 불길 이렇게 하나님께서 대적을 태우시고 그리고 그들을 멸하셔서 새로운 은혜와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이시는 이 일이 바로 부흥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을 소망하면서 우리로서는 하나님 앞에 이 모든 잘못되어 가고 있는 교회와 세상의 상태를 고쳐 놓을 수 있는 어떤 힘이 우리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고백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으로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본 사람들에 의해서만 부흥을 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는 이 은총의 증거들을 세고 있을 때 그는 무너져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그러며 이 시대가 바로 하나님의 분노의 시대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시대를 지나건 간에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서 은혜를 베풀지않으시는 시대는 한 시대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 시대가 모두 깨어있는 교회의 시대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통계표를 안가지고 왔는데 어제 어디서 통계 자료를 받았는데 다른 교단은 말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모든 교단이 공히 94년도에서 95년도 넘어오는 동안에 1퍼센트 이상을 성장한 교단이 하나도 없어요. 수적인 통계로. 수만 가지고 얘기하는 것은 아닌니다만은. 그러나 40년대에 372000명 밖엔 안 되던 기독교 인구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무려 10300000으로 늘어났어요. 그 중에서 가장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던 때가 70년에서 80년 사이입니다. 무려 350프로나 늘어 났습니다. 그러던 것이 85년도 이후로 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통계를 보니까 어떤 결론을 얻게 되었는가 하면 다른 교단 말고 그 중에 한 교단 제가 학교를 졸업한 합동측 교단인데 94년에서 95년 사이에 약 1만명 정도가 줄었어요.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수 만명의 목회자와 그리고 120만명 정도 된다고 보거든요 합동측 교인이 120만명의 성도들이 1년 내내 전도했는데 마지막 결과로는 1만명 이상의 사람이 교회에서 빠져 나간 거예요. 그것이 결론이예요. 이미 오래 전에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선교 상황에서 빌 브라이트 박사인가 하는 분이 미국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16명의 목사와 1천명의 교인을 동원해야 겨우 한 사람을 전도한다고 그러면서 개탄을 했는데 우리는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합해서 합동측 교단에서는 1년에 1만명에 가까운 교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수는 물론 전부는 아니예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복음이 역사하고 생명의 역사가 쉬지 않는 곳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복음을 듣기를 원하고 거듭난 사람들에 의해서 증거를 받아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가득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 교회가 매일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하는 각성과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가에 대한 놀라운 은혜의 간증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생명이 있는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회가 사람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면 두 가지 이유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는 말씀의 올바른 선포를 통해서 잘못된 사람들을 뽑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받는 은혜가 은혜가 아니다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다니엘이 많은 은총의 증거를 보면서 만족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훼파된 예루살렘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고 우리를 향해 분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처럼 여러분 오늘날의 우리의 선교 상황은 먼저 우리의 교회가 결코 축복을 누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은 그러나 그 수만개의 교회가운데서 정말 삼백명 이상 모이는 교회는 정말 삼 사 프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50명 30명 20명 이렇게 모이는 교회들입니다. 그러면 지금 밖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부터 멀어져 있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있는데 교회는 어떻습니까? 점점 비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한다면 세상의 물결이 높고 그리스도가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고통하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에 진정으로 부흥이 필요한 것을 알리실 때에 이렇게 선교적인 깊은 위기가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챙피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마는 사람들은 우리 열린 교회를 대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성공입니까? 나는 우리 교회에서 한 번도 부흥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명씩 이주일에 한명씩 한둘씩 한둘씩 모여서 이 년이 흘러서 백 여명정도 모이는 것을 보고 대성공이요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의 시대가 되었으니까 얼마나 이 시대가 선교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시대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을 보십시오. 세워지는 교회만큼 십자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신도시가 생기면 새카맣게 교회들이 덤벼들지만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아파트 단지에서 남는 교회는 한 두 교회 남고 다 철수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놓여 있는 선교적 상황인 것입니다. 이제는 신학생들도 자기들이 나아가서 개척을 하거나 복음을 전도할 때에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들어서 순식간에 대교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 신학생들 교회를 개척하고 개척한 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이렇게 더딘 교회의 성장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를 세워서 삼 사년이 흘러서 오 육십명 모이는 것이 흉이 아닌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히려 점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빠져 나가서 천주교로 혹은 신앙을 버리거나 혹은 심지어 불교나 무속종교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선교 상황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에 대해서 말하고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본국에서의 선교 상황이 이렇게 심각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들마다 이제 점점 교인들이 줄어들고 있고 뿐만 아니라 모이는 교인을 지키는 교회도 지극히 적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또 늘어나는 교회는 정말 순수한 말씀의 부흥으로 교인들이 늘어나기 보다는 오히려 철새처럼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그러한 교인들로 가득 찬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선교적인 상황이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그러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선교적인 상황을 들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해외선교는 어떻습니까?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역 지역에 파송되어서 열심히 선교하고 그 속에서 열매를 맺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번 한 나라의 기독교 선교사의 한 획을 긋는 장엄하고 위대한 역사 성령이 친히 오셔서 한 도시를 변화시키시고 한 나라를 복음의 도가니로 몰아 넣으시고 한 역사를 하나님의 진리로 말미암아 물줄기를 바꿔 놓으시는 놀랍고 변화있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는 일들이 그쳐가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앞에도 이제 크게 지어 놓은 교회들이 기독교의 한 유물이 되어서 문화재로 지정되고 백성들의 세금으로 관리될 일들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제 온 어떤 편지가 저를 매우 반갑게 했습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인데 영국으로 선교사로 지망해서 훈련받는 코스로 영국으로 갔습니다. 간 지 한 삼년 정도 됐어요. 그러면서 편지가 왔는데
한국에서 여 선교사 한 사람이 와 가지고 같이 기거를 하는데 --설교자는 불꽃처럼 책을 읽는 예화---
나는 믿어지지 않았어요. 여러분 이 말 하면 여러분 믿겠어요. 영국 런던이 어떤 도시였습니까? 거기가 기독교의 중심지예요. 영국이. 그렇지 않아요? 모든 나라가 유혈 혁명을 경험했을 때 부흥운동이 일어나서 혁명 없이 근대화로 간 나라가 그 나라거든요.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아세요. 난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런던 사는 사람이니까. 선교사니까 거짓말하겠어요. ‘교수님 영국의 교회 상황은 너무너무 비참합니다. 런던 인구의 팔 퍼센트 내지 십 퍼센트가 교회를 안 나가고 있다고 해도 놀랄 정도인데 런던 인구의 십 퍼센트가 모슬렘으로 선교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본산지인 영국의 런던 인구의 십 퍼센트가 모슬렘이예요. 어느 정도인지 아세요. 교회당을 크게 지어 놓았는데 운영할 수가 없어요. 성도들이 적으니까 그 헌금 가지고는 교회당이 유지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지가 안 되니까 할 수 없이 교회당을 유지를 못하고 쪼개서 파는 거예요. 근데 그것을 사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그것만을 전문적으로 매입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누구냐면 오일 달러를 들고 들어 온 회교의 선교사들이예요. 막아 가지고 이 쪽에서는 회교 모임 갖고 이 쪽에서는 기독교 모임을 갖는 거예요. 그렇게 피폐해져 가는 거예요.
찰스 스펄젼 목사가 설교할 때 1만 2천명 이상 모이던 그 교회당이 겨우 70명 모여서 예배드리는 그런 신세가 그것도 75년도 이야기예요. 요즘은 45명도 안 모일 거예요. 아마 틀림 없쟌아요. 그렇게 모이는 상황이 되었어요. 그리고 흩어져 빠져 나간 사람들이 잘못된 종교로 빠져들고 있는 거예요. 로이드 죤즈 목사님이 목회하던 그 교회도 로마서 강해할 때 천 2백명이 교회당을 가득 메우고 그 위대한 설교를 들었는데 목사님 바뀌고 나서 2백 5십 명 모이는데 얼마전에는 빈야드 불러다가 집회까지 했데요. 그 유서 깊은 체플에서. 이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선교 상황이라고요. 눈을 들어서 사면을 둘러 보라구요. 우리는 춤추고 노래할 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이러한 이야기가 대부분의 기도교인들에게는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이 더 문제예요.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런던이 무슨 다 회교를 믿든지 다 무슨 불교를 믿든지 내가 오늘 살아 가고 그래도 내가 주일 날 와서 예배 드리고 가는데 내가 무슨 목사요 선교사요 교회에서 무슨 월급을 받아 너무 그렇게 복잡하게 얘기하지 말란 말야 부담주지 말고. 죽어가는 영혼의 소리가 들리지 않냐고? 나만 안 죽으면 됐지 무슨. 누가 그러데요. 당신이 쉬고 있는 이 시간에도 지옥의 불길은 타오릅니다. 너무 원색적으로 나가지 말라 이 얘기예요. 이것이 선교 상황이예요. 모든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느끼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이러한 놀라운 역사들을 이제는 거의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보면 어떻게 하다가 토요일 날 열심히 전도해서 한 명 새로 나오면 그게 대견해 가지고 어쩔 줄 몰라 하쟌아요. 물론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니까 대견하죠.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증거 받으면서도 냉담해져 있는 이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희망을 가지면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선교적으로 깊은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예요.
그러면 외형적인 선교가 아니라 성도들의 내면적인 생활은 어떻습니까? 교회 밖의 상황은 그렇다고 치고 정체 전선이라고 칩시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한 번 보십시다. 여러분 이 시대는요 뭐가 쒸워도 한참 쒸운 시대예요. 아주 깊이 쒸웠어요. 눈꺼플이 서너 꺼플 쒸었어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명백하고 분명한 진리에 대해서도 거의 사람들이 올바른 이해를 못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맛 보는 참된 생명 그것이 무엇인지 그 비밀을 사람들은 알지 못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머리만 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카나다같은 데서 일어나는 극단적인 성령운동 그런 것들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뭣 때문인지 알아요. 여태까지 학교 공부하듯이만 신앙생활을 해 온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는데 앞에다가 이러니까 그 사람이 픽 쓰러지는 거예요. 신앙의 영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거예요. 이러니까 쓰러지는 거예요. 주여 쓰러지게 하옵소서. 안 쓰러지는 것을 보니까 강팍한 모양이로군. 손을 얹고 기도하면 막 깔깔대고 웃으면서 대굴대굴 굴러요. 사람들이 막 기절하고 쓰러져요. 그런게 너무 너무 놀라운 거예요. 어떻게 신앙의 세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아일랜드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할 것 없이 수 많은 전세계 각처에서 비행기를 타고 몰려와서 거기 뭐가 있나 하고 들여다 보는 사람들이 매일 수천명씩 몰려 오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일들이 바로 교회에서 점점 생명이 사라져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이 많이 모여도 교회가 유지가 안 돼요. 헌금을 안 하니까. 은혜가 사라지면 전혀 헌금 안해요.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예요. 내가 이 교회에 다녀도 이 교회에 안해요. 딴 데 갖다 쓸지언정 헌금 안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외면적인 선교의 상황만이 아니라 내적인 영적인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보고 미국 선교사가 개탄을 하는 것이 뭐냐면 여러분 우리 미국 국민은 하나님의 은혜로 삼만불 시대를 누리고 있다는 거예요. 삼만불. 삼만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해외 선교에 쓰는 그 선교비가 미국 전체 일년간 껌 소비량의 액수보다 적다는 거예요. 그야말로 껌 값도 안되는 거예요.
여러분 전 치아가 안 좋아서 그리고 늘 이렇게 집회를 하고 사람들과 말해야 되기 때문에 껌을 늘 차에다 넣어 놓고 다닙니다. 댓 통씩 사서 아예 한꺼번에 넣어 놓고 다니고 탄 사람들에게 나눠 줍니다. 그거요 수월찮게 들어가요. 여러분 한 주일에 두 통 세 통 씩 만 씹는다고 치면 6백원인데 육 사 이십 사 2천 4백원이고 일년이면 2만 4천원에다 약 2만 8천원 정도 되는 돈인데 2만 8천원 씩만 일년에 일천만 교인이 평균적으로 선교헌금 하면 놀라운 액수가 됩니다. 껌 값 만큼도 안해요. 여러분 우리가 텔레비 보는 것만큼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신문 잡지를 보면서 매달리는 만큼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우리 교인들 중엔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유명 인사의 동정을 파악하는 것 만큼 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셨는지에 대해서 성도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최신 유행과 그리고 정보와 심지어 컴퓨터나 이런 것들을 배우는 것과 같은 열심히 성경을 탐구하고 진리의 말씀을 알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사람을 만나고 유명인들과 만나기를 원하는 그런 사모함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하는 이런 간절한 사모함들이 성도들의 삶 속에 자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국내의 정치의 문제가 어떻게 되고 통일이 어떻게 되는가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도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거의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은 어디에서나 넘치도록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서는 한 없이 많은 물질을 쓰고 아낌없이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서는 소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바치는 돈은 얼마나 적은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제가 할 일 없을 때 계산을 많이 하거든요. 산수도 잘 못하는데 그렇게 계산을 해요. 금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먹은 술이 육삼 빌딩 같은 컵에 담으면 몇 컵쯤 될까? 계산을 하는데 나오거든요. 창이 이 쪽에 몇 개고 위에가 몇 개니까 용적을 세 보면 부피가 나오니까 거기하고 통계나온 몇 리터 계산해 보면 대개는 나온단 말이예요. 언젠가 한 번은 계산해 보니까 일 년에 먹는 술이 그걸로 두컵이더라구요. 그런 계산을 쭉 이렇게 해 보는데. 만약에 이 천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두 십일조를 성경적으로 십일조를 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이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일인당 만불이니까 일년에 천불이 들어올 것 아닙니까? 팔십만원이 그렇지 않아요? 팔십만원에 천만이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상상할 수 없는 액수가 나와요. 몇 조가 나오더라구. 그러면 그 돈을 교회가 어떤 일을 위해서 쓰느냐에 따라서 국가의 경제의 흐름이 뒤바뀌는 역사가 일어난다구요. 그러나 교인들은 부유하고 교회는 아주 가난해요. 이게 구라파 교회의 모습이예요. 교인들은 부유해요. 교회는 너무 비참하게 가난해요. 그래서 영어 속담에 as poor as mouse in church 이런 말이 있어요. 교회 안에 있는 쥐 만큼이나 가난하게 사는구려. 그렇게 가난한 시대가 언제예요?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내적으로 충만한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그런 때에요. 우리가 여러분 옛날에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그런데 성도들에게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차고 넘치니까 정말 성도들은 가난해도 교회는 부요해요. 언제든지 선교에 쓸 돈이 있고 나누어 줄 그런 돈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에 역사하고 있을 때 결코 선교사들을 보내가지고 타국에서 거렁뱅이 만들고 품 팔게 만들지 않는다구요. 본국의 교회가 죽어 있으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지요. 근데 우리도 그런 때가 다가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교인들은 거의 십일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감사헌금도 물론이거니와 주일헌금 같은 것으로 이제 겨우 하나님의 교회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러한 시대에 우리가 차츰차츰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득은 점점 늘어나는데 신앙이 없으니까 소득이 늘어나는 것만큼 하나님 앞에 헌금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안 합니다. 저는 확신하기를 신앙이 더 식어지면 이제 구라파에 있는 교회보다 우리나라에 있는 교회들이 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구라파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무엇이 있냐하면 유산을 자손에게 물려 주어야 된다라고 하는 강박관념이 없어요. 개인주의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이 크면 너 이만큼 키워서 공부시켜 놨으면 됐다고 그러고 갑니다. 그러면 그 유산을 가지고 살다가 마지막에 유언할 때에 불우이웃이나 교회를 위해서 써달라고 내놓고 죽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들이 유지가 된다는 거예요. 그나마.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기본적인 국민의 정서 자체가 그렇지를 못하고 사회로 뭘 환원하는 것은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진탕 먹고 쓰다가 그래도 남는 것은 자식들에게 물려 주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마지막엔 자기가 죽을 묘자리까지 파놓고 관까지 다 짜 놓아야지만 속이 풀리는 시대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교회적인 상황은 앞으로 사람들이 은혜가 떨어져서 헌금을 하지 않으면 교회는 정말 어려운 상황이 될 거예요. 네덜란드나 독일 같은 데서 백 년 씩 들여서 교회를 지어 놓은 그 아름다운 교회들이 한 순간에 그것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결국은 교인은 흩어지고 팔아가지고 다 부서져 나가면서 교회가 부서진 그 자리에 나이트 클럽이 들어서고 슈퍼마켙이 들어서는 그런 일들이 역사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들이 바로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제 제가 신학교에 가서 감사패를 받았거든요. 물론 다 낯 간지러운 거지만 그래도 주겠다는데 안 가면 이상하쟌아요. 그래서 가서 받았는데 모여서 근심에 찬 분위기가 이상해서 왜 그럽니까? 그러니까 이번에 신입생들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데요. 무슨 소리예요. 제가 92년도에 갔을 때만 해도 학교가 2 대 1 2.5 대 1은 됐어요. 그런데 이제는 모집하고자 하는 수만큼 학생들이 안 온다는 거예요. 이게 어느 교단에서는 뭐라고 그러냐면 교역자가 백 명이 필요한데 신학생이 백 명이 배출이 안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두 교회를 합칠 수는 없쟌아요. 그러니까 다른 교회에서 교역자를 꿔 와야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제는 그런 점에서 매력을 점점 잃어가는 시대가 되는 거예요. 성도들이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신학교에 사람들이 몰려도 그 중에 가짜가 수없이 많은데 신학교에 오는 사람이 아예 적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정원을 간신히 채우는 상황이 되니까 무자격한 사람들이 다 떨어질 사람들이 매달려 가지고 거기 들어와 가지고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목회를 하고 그렇게 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는가 한 번 생각을 해 보라는 거지요. 여러분들은 바보같은 목회자들의 목양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될 지도 모른다고. 영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모든 면에 있어서 말이예요. 이러한 악한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인 삶에서도 여러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 생활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예요. 그러니까 신앙생활 그 자체가 자기의 인생에 뭔가 도움을 주고 움직일 것이라는 기대가 사라져가지 시작하는 이것이 바로 뭐냐하면 후기 종교 시대예요. 그래서 구라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뭐예여요. 태어나면 다 크리스챤이예요. 종교가 뭐냐고 하면 다 기독교예요. 그 기준이 뭐냐하면 세례를 어디서 받았는가? 유아세례를 받고 그 때 한 번 교회에 오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할 때 시집 장가 갈 때 그 사람들은 목사님 모시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 다음에 어때요. 죽은 다음에 장례식 지날 때 교회로 오는 거죠. 그러니까 마피아니 무슨 뭐 깡패짓 하고 살아가고 그러던 사람들도 꼭 죽을 때는 목사 불러다가 거룩하게 해 놓고 그리고 장례식 치르고 하는 것 여러분 보쟎아요. 그게 자기네들 속에는 종교적인 분위기를 그 자체에 대해서 아주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어요. 무슨 프라이드를 가질 게 있어요. 여러분 국회 시작할 때 기도 안해도 괜찮고 대통령 취임할 때 성경책에 손 얹고 선서하고 그러고 대통령 시작 안해도 괜챦고 관공서에서 예배드리고 시작하지 않아도 괜챦아요. 그런게 무슨 문제예요. 실제적인 삶이 신앙이 없고 실제적인 내면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를 거의 잃어 버리고 살아가는 삶 속에서 형식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이거죠.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형식적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으로 안일하게 여기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그런 어두운 시대를 우리들이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교회 집회를 갔는데 요즘 집회를 다니면 이상한 게 초창기에 은혜 받았던 설교들을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져요. 좀 강도가 높은 설교들이죠. 그런데 설교가 다 끝났는데 다른 사람들은 뭐 일상적인데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들이예요. 머리가 하얀 노인들이예요. 한 칠순 팔순은 되 보이는데 진심으로 걸어나와서 손을 잡아요. 뭐 말은 안 하지만 그 속에서 저는 뭔가 야릇한 감정을 느껴요. 뭐냐하면 우리는 옛 시대의 교회에 울려 퍼졌던 그 장엄한 복음들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부른 찬송 가운데서 뭐라고 했습니까?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저 성전 돌같이 긴하게 하소서. 주 구원하신 능력을 누구를 구원해? 구원하셨던 그 놀라운 능력을 주 구원하신 능력을 주 구원하신 능력을 끝날까지 주옵소서. 그것이 경건한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였어요. 이런 것들을 통해 교회가 교회된다고 믿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이런 면들에 있어서 우리들이 허하고 채워지지 않는 삶을 사니까 기독교의 미명하에 사람들이 자꾸 그 껍질을 쓰고 딴 일을 하는 거예요. 어느 교회에 가니까 교회 믿는 사람들끼리 골프 모임까지 생겨나더래요. 그게 교회에서 해야 될 일이예요? 그러니까 기독교 형식 속에 있으니까 가서 춤바람나고 타락할 순 없으니까 삼삼오오 모여가지고 교우들끼리 단체를 만들어서 에어로빅 배우러 다니고 골프치러 다니고 보드 타러 나니고 낚시하러 다니고 이게 전부다 말기 시대에 일어나는 현상들이예요.
로이드 죤즈 목사님이 맨처음에 소명을 받고 교회에 부임했을 때 그 교회에 가니까 수 많은 스포츠 클럽들이 있더래요. 교회안에. 골프 동호인 모임 클리켓 동호인 모임 아니면 뭐 피씨 통신 동호인 모임 이런게 요즘으로 말하자면 그런 거 아니예요. 에어로빅 배우러 다니는 사람들 무리 가자마자 한 일이 그거 다 없애 버리는 것이었어요.
여러분 그 일 자체가 나쁜 일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관심이 사라지니까 인간들이 자기의 인간의 욕심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세속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교회를 활용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교회에다 신용 협동 조합 차려 놓고 거기서 돈 대부해 주고 또 띠어 먹고 가 가지고 고소하고 이런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모두 교회를 통해서 뭔가 신령한 것들이 자신 속에 채워지는 이런 영적인 변화와 새로운 삶을 교회를 통해서 제시받지 못하니까 이렇게 기독교라는 미명하에 사람들은 그 교회의 틀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만족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만족을 느끼면서 살아 가려고 하는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양이 거룩해도 그 속에 그 거룩한 모양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을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그들의 심령을 바꿔놓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그들의 마음의 잘못된 경향을 파괴하고 고치고 돌이키는 변화의 역사가 심령 속에 일어나지 아니하면 언제나 거룩한 기회들은 속된 욕망을 만족시키는 그러한 기회로 활용하며 살아가게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점점 참된 기독교의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이 있는데 그 목사님을 이번에 저희 동기 한사람이 가서 목사님 이제 외국에서 공부하다 돌아 왔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목사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요? 딴 건 다해도 부목사는 하지 말래요. 부목사 없으면 한국 교회 어떻게 해요. 그런데 하지 말래요. 왜 그래요? 부목사에게 시키는 일을 보면 하면 안 될 정도라는 것이지요. 교회에다 크게 당회장실 만들어 놓고 소명을 받아가지고 선지자의 후예의 길을 걷는다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교회에다가 이게 당회장실인지 구청장실인지 모르게 말이예요 현황판을 다 붙여 놓고 소명받은 선지자의 후예라는 사람들이 매일 스케줄을 따라서 심방하고 거기와서 심방 갖다 왔다고 스티커 붙이고 앉아 있다 이거죠. 그게 보험회사에서 고객관리하는 거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차츰차츰 늘어나는 숫자에 만족하고 안일한 삶을 살아가고 조그만 둥주리에 앉아서 안락한 삶과 편안한 교회의 환경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만들기를 원하셨던 그런 교회의 모습이냐 하는 것이예요. 뭔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분명한 목적을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살아져 가야 된다고 하는 분명한 인식들이 거의 없는 것이예요.
여러분 이렇게 예수 믿다가 지옥의 아랫목에서 만나서 동창회 할 사람 많아요. 사실상 배교에 가까운 시대를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예요. 그 속에 무슨 생명이 있고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가 죄인임을 확인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세례받고 면사포 쓰고 결혼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쳐지겠느냐는 것이예요. 성경은 그런 구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요.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늘어나는 사람들의 숫자만 가지고 만족해하면서 대견해하고 살아간다고 하는 이런 사실들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부끄러움과 상처를 안겨 주고 있는 것이예요.
여러분 그것 뿐만 아닙니다. 저는 외적인 선교의 상황과 내적인 교인의 생명에 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만 또 교인들과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식 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이 상황이 정말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한 상황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증거해주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어떤 소설가가 소설을 한 편 썼는데 고 평론가 그 사람은 죽어라 하고 자기만 쫓아 다니면서 혹평을 하는 사람이예요. 그런데 그 사람 또 글 쓸 기회도 많아요. 이상하게 자기가 뭐만 내 놓으면 혹평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깊이 귀 기울여 듣고 그 다음에는 고쳐서 다시 써 냈더니 또 쫓아 다니면서 또 비평을 하는 거예요. 하도 화가 나니까 나중에는 전화를 걸어서 만났데요.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 줄 알아요? 원고하고 펜하고 주면서 네가 써 봐라. 쓸 수 있나 한 번 해 봐라. 똑같은 심경으로 무릎을 꿇으면서 제가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정말 뭔가 가슴이 갑갑한 상황을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예요. 말씀을 듣거나 평신도들도 기독교에 대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리고 그것밖에 없는 줄 알고 그것을 붙들고 아집을 붙들고 아집의 신앙화지. 그러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이 마치 주관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같이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터지는 것같은 답답함을 느껴요. 주님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너희가 어떻게 나를 인져야(?) 내가 누구이고 너희들이 어떻게 나를 섬기고 어떻게 나를 기념하며 이 험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은밀하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도 들을 수 있도록 우뢰와 같은 큰 소리로 말씀해 주셨는데 사람들은 도무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어느 학생 하나가 제 방을 찾아왔어요. 학교에 있을 때 일이에요. 교수님 지난 학기에 제가 교수님의 선지자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 강의를 들으면서 깊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어이 또 제자 하나 태어났구나 그리고 그 때는 참 반가운 마음으로 어 그래 참 잘했다고 그러면서 이제 졸업반인데 뭘 할 거냐 그랫더니 난 그래서 당연히 교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제가 이 땅 어디에서든지 오직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개척을 하겠다든지 선교를 간다든지 뭐 난 그런 얘기를 할 줄 알았더니 교수님 제가 원숭이를 하나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웬 원숭이냐 그랬더니 30분동안 그 얘기를 듣다가 너무 황당하고 복장이 터져서 내가 그 다음서부터는 만나서 인사해도 내가 인사도 안 받아요. 저걸 내가 삼 사년 동안 가르켰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때부터 들으면 아마 찔릴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원숭이를 사겟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원숭이를 뭐할려고 사냐? 원숭이하고 버스를 한 대 사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뭐 어떻게 할 거냐? 버스를 개조해서 무대가 달린 버스를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뭘 얘기를 할려고 하나 그랬더니 원숭이가 2백만원 쯤 되고 버스는 1억 쯤 된대요. 그래서 그 정도 돈은 자기가 있다는 거예요. 전도사가 꽤 부자구나 내가 그랬지. 그거를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니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니까 그 원숭이한테 절해라 그러면 절도 하고 뛰어라 그러면 뛴대요. 그래 뭐라고 그러냐면 교수님 그렇게 할 때 애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는지 아십니까? 그래서 그건 내가 안해 봤으니까 얼마나 많이 모이는지 알 리가 없지. 그래서 애들이 모이면 뭘 할거냐? 무슨 답이 거기에 나올 줄 알았죠. 그랬더니 좋은 얘기 많이 해 줄 거래요. 그 사람이 선지자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강의를 한 학기 들으면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니 가슴이 답답해요. 춤추고 노래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줄 알고 온통 거기에 미쳐있는 사람도 있어요. 목에 핏대를 세우고 돌아다니면서 시골에서 무하고 배추까지 뽑아 가지고 다니면서 이거 안 팔아 주면 기독교인이 아니라 이러고 돌아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이거예요. 뭘 말하기 위해서 이럽니까?
주님이 명백하고 분명하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려 주셨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는 그러한 절망적인 시대에는 진리에 대한 이러한 곡해가 만연하게 되는 것이예요. 어디에 가도 정말 참된 진리의 말씀을 듣기가 어려워지고 참된 진리를 가르쳐 주면 이단과 같다는 그런 시대가 다가오는 것이 바로 말기에 일어나는 기독교 말기의 현상들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당이 커지고 그리고 기독교 인구가 늘어나는 것 이건 아무것도 아니예요.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그 어둡고 타락한 시대에 선지자들처럼 일어난 종교 개혁자들이 몸 버려 투쟁하며 싸우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습니다. 누구의 손에 의해서? 기독교 국가에서 크리스챤에 의해가지고 소명받은 사람들이 순교했어요.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요. 한 나라의 기독교 씨를 말려 버리려면 국교로 만들어 버리면 씨가 말라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복음을 처음 받았을 때 우리는 핍박과 박해와 고난을 견디고 이기며 피 묻은 복음을 파수했어요. 내가 예수를 믿고 세례 받았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씨족으로부터 쫓겨남을 당하였습니다. 호적을 파가지고 떠나야 했습니다. 파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따라서 살려고 결심했어요. 아무도 이제 우리의 신앙을 박해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훌륭하고 좋은 신앙들을 잃어버려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곡해되고 선교의 상황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단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교회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예요.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뭘 보고 우리의 미래가 희망과 약속된 축복으로 넘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이 다니엘이 통곡하면서 이 역사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 이유라 이겁니다.
무엇을 누리지 않으면서 이 사람이 살았겠어요. 그러나 이 역사의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 그는 정말 이 조국의 미래가 암담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거예요. 놓여 있는 그 깊은 위기와 고통스러운 상황을 보면 내가 부분적으로 누리고 있는 이 하나님의 은총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예요.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새벽을 앞 당겼던 사람들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거예요. 봐라 오늘도 한 명이나 우리 교인이 늘어났어. 그런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어는 누가 은혜를 받고 교회를 하나 세웠대. 그는 무너져가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교회의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하시는 변화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때에 이런 역사를 허락해 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기뻐하실 때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예요. 하나님이 교회 그 자체를 기뻐하실 때에 개인 그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할 때 그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안해서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불쾌한 감정을 갖고 계신데 빙빙 돌아가면 안돼요. 본론으로 돌아가야 돼요. 하나님 뭐가 잘못됐습니까? 어떻게 하여야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여야지만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본론으로 들어가야 돼요.
어줍쟌은 봉사나 헌금 몇 푼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땜질할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예요. 정말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그 자체를 기뻐하지 않으시는데 그 교회에서 선한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일어나겠느냐는 것이지요. 교회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셔도 그 교회속에서 은혜받고 변화받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어요. 나는 오래전에 최악의 영적인 상황 속에 있는 교회 속에서 최고의 은혜를 누리면서 산 적이 있어요. 나 혼자만. 그것을 통해서 뭘 보게 되냐면 하나님이 교회를 기뻐하지 아니하셔도 그 속에 있는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한 은혜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받게 되는 것이예요. 그래서 교회가 이런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은총의 역사가 부분적으로 일어날 때 거기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대접해 주실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을 인해 대견해 하면 안 되고 오히려 뭘 봐야 되냐면 주님이 이렇게 슬퍼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구나 하는 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보아야 하는 것이예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때에 교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걸어나가는 것.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진리가 깃들어 있는 교회속에 들어와서 일 년 이년 삼 년 사 년 십년 씩 교회를 다녔는데 전혀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진리를 따라서 살고 싶어하는 사모함조차도 생겨나지 않고 있는 저 딱딱하고 굳어져버린 저 영혼들 오히려 진리에 대해서 면역이 되어버린 강팍해져가는 이 영혼들 보면서 뭘 느낍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신다면 어떻게 저런 일들이 일어나겠는가? 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되지 않습니까? 허 놀라운 일이야 오늘 한 사람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구원을 얻었어. 그것이 아니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어.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은혜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던 시대에 하나님이 그 교회를 기뻐하던 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언제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조금 있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불러서 주님을 영접하라고 촉구하지만 그러나 은혜가 넘치는 시대에는 죄인들이 소리치며 하나님을 향해 나를 영접하여 주시옵소서 외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깊은 위기와 깊은 좌절스러운 상황을 우리는 선교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서 은총을 버리신 증거를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은 먼저 깊은 좌절이고 절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복스러운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 절망이 하나님 앞에 복스러운 것일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7. 하나님의 의로우신 분노 (단9:16)
지난 주에 16절 하다가 말았는데 16절 한 절만 우리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 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 아멘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시대를 바라보는 두가지 시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한 쪽으로는 이 시대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시대이다. 또 한 쪽으로는 이 시대가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 시대인가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예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하고 그리고 그러니까 우리에게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고 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리고 주님 앞에 귀한 은혜를 받은 것들이 물론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교회 전체를 보고 또 세계 교회 전체를 본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조건들은 많이 남아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교회가 타락하고 혹은 교회가 교회답게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교회들을 통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가장 작은 조각이라도 전해지게 하시고 그래서 나름대로 사람들이 예수 믿게 하시는 그런 은혜로운 역사들이 이제껏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인제 그런 것들이 점점점점점점 감소되고 있어요. 이런 점들에 대해서 우리는 선교적인 전망에서 이 시대가 하나님의 부흥을 필요로 하고 있다라고 하는 이런 생각도 우리들은 또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난하고 궁핍하고 너무나 못 살던 시대였기 때문에 예수 믿고 기도 많이 하면 복받는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이 세상에서 자기의 번영을 위해서라도 너무나 의지할 데가 없이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신앙을 의지하려고 하는 그런 면도 사실 없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백 명에게 물어보면 그 중에 적어도 70명 이상은 나는 중산층이라고 대답하는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어요. 사람들은 이제 지금도 극단적인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사회 전체를 흘러가는 대부분의 기류로 볼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풍족하고 부요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 이렇게 보면은 얼굴에 정말 때가 쫙 빠졌어요. 다 근사해요. 여기에 앉은 사람 다 보세요. 나만 이렇게 뙈죄죄하지. 정말 다 보면은 한 인물 다 났어요. 정말이예요. 가난한 나라에다 여러분 갖다 놓으면 전부다 미인이예요. 허예요. 얼굴이 수도물에 세수를 해서 그런지. 하여튼 이렇게 부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준다고 하여도 일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차가 하도 더러워서 차를 몰고 가다가 식당 앞에 세워놓고 세차하는 아저씨가 있길래 이거 세차 좀 해 주시오. 나 밥 먹고 나올 동안. 안 합니다. 그래서 아니 왜 안 하냐고. 근무시간이 끝났습니다. 그래서 시계를 보니까 5시 1분이야. 그래서 아니 근무시간이 몇 시냐고. 5시래요. 그래서 그런가보다. 그럼 이 세차하는 사람 주인이 누구요. 내가 주인이요.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5분만 물 끼얹으면 적어도 오 륙천원 벌 수 있는데 5시 지나니까 안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잠시 쉬는 것이 낫지 그까짓거 돈 벌면 뭐하냐.
사람들이 이제 이러한 세상이 되었어요.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 이제는 예수를 믿으면 복 받는다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는 안돼요. 그러니까 여러분 눈 여겨 보시지 않았겠지만 요즘에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선교를 하는 패턴이 10년 전하고는 엄청나게 틀려요. 10년 전에는 무엇이었었냐면 예수 믿으면 형통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정말 간절한 문제였어요. 그리고 생존선상에서 10년 10년내지 그 10년 전쯤 이 때 정말 사람들에겐 갈급한 문제였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니까 사람들이 다양한 동기로 교회에 몰려 와서 정말 수 많은 간증도 만들어내는 거예요. 뭐 땅을 그냥 호박밭을 샀는데 어느 날 옆에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땅부자가 됐다든지 수많은 간증들이 나왔지만 그 간증들 가만히 들어보면 새마을 성공수기하고 비슷한 간증들이 교회 속에서 수없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래도 어때요. 인간이 하도 미련하고 미약하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부동산 투기해서 번 돈 가지고 십일조하고 복부인들 복 차고 다니면서 해 가지고 그렇게 해 가지고 그 십일조를 교회가 가지고 교회를 또 세우고 이러면서 역사가 흘러왔어요.
그런데 이제는 오시면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복에 대한 갈망이 이제 없어요. 이제는 뭐냐하면 이미 많은 복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 안전했으면 좋은 거예요. 이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예요. 이제 안전했으면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보험같은 것들이 엄청나게 인제 사회가 선진화되기 시작하면서 보험 같은 것들이 엄청나게 팔려나가는 거예요. 외국에 발을 들여 놓으면은 공항에 발을 내리는 순간서부터 거의 모든 것들이 다 보험으로 이렇게 연결이 되어 있는거죠. 하다못해 자전거를 빌려 타고 보트를 빌려 타고 하다못해 놀이기구를 타도 다 보험이 되어 있는 거예요. 모든 공연장에 들어가건 뭐하건 다 보험과 연결이 되어 있어요. 뭐예요. 이제는 많은 돈을 벌고 복을 받고 하는 그런 것들이 관심사가 아니라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안전하게 지키면서 사는 거예요. 그 안전에 대한 갈망이예요.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이런 속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제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향유하며 즐기며 살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복 줄테니까 오라는 거 가지고 꼬여가지고는 복 줄테니까 교회 나오라는 것 가지고는 이제는 그 울타리 속에서 안락을 벗 삼아서 편안하게 살아 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 내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제 교회에서 뭐 여러 가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그런 다양한 시도들을 하게 되는 것이예요. 그래서 교회 안에다가 뭐 스포츠 클럽을 만들고 꽃꽂이 교실을 만들고 무슨 서예 쓰는 뭐 가르쳐 줄테니까 오라고 하고 뜨개질 가르쳐 줄테니까 오라고 그러고 이런 식으로 하면서 사람들을 어찌하든지 간에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이예요.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그 축복하시는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진노하시는 시대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거의 진정한 회심을 보기 어려워졌어요. 오늘 저녁에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을 다루면서 그 얘기를 좀 하려고 그러는데. 교회에는 진정한 회심이 일어나지 않으면은 좋은 교리를 붙들고 훌륭한 신앙의 표준을 따라고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요. 그런데 이런 일들이 지금 우리나라 교회 속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즘의 전도패턴은 이제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에 와서도 교회에 오면 혼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즐거울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가능성들 그러한 엔조이 시키는 요소들을 교회가 제시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거기에 가면 사귐이 있고 거기에 가면 노래가 있고 거기에 가면 뭐가 있는 .. 그렇게 사람들이 인제 말하자면 몰려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하면 그 교회를 한 동아리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그 속에서 뭔가를 향유하게 만들어줄 것인가 하는 것들이 말하자면 전도의 초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분노하시던 시대에 교회가 세상을 향해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결국은 교회가 선교의 열이 왕성하면서 그러면서 교회를 엄청나게 짓습니다. 그리고 인제 언젠가는 그 교회가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무너져나가는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던 시대의 일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하냐면 그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과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해달라고. 지금 이 사람 기도하고 있는 사람은 바벨론에 있는 사람이예요. 솔직히 말해서 최근에 이 사람이 예루살렘 성에 가 보았을 리도 없는데 뭐라고 말하냐면 바벨론에 있는 우리 동포들을 어떻게 착취와 압박 가운데서 건져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비현실적인 기도예요. 예루살렘 근간에 가 보지도 못한 그 예루살렘과 그리고 하나님의 그 거룩한 산에서 시온산에서 이런 하나님의 분노가 떠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의 공의를 따라 이루어달라는 것이죠. 공의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미쉬파트인데 여기서 쓰여진 단어는 미쉬파트가 아니라 쩨데카라는 단어예요. 그래서 이것은 번역을 하면 차라리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쫓아서 이렇게 번역을 했으면 훨씬 좋았을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좇아서 주의 예루살렘과 그리고 주의 거룩한 산에서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분노를 떠나가게 해 달라 이거죠. 결국은 뭐냐면 교회의 회복을 향한 갈망이예요. 교회의 회복을 향한 갈망. 그러니가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향해서 축복을 막으실 수도 있고 그 축복을 여실 수도 있는 그 천국의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냐하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 나머지 사람들은 역사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아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역사를 위해서 기도하면 이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데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이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들이예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의 악을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있는 소수의 불의를 인해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나라를 가장 사랑하고 이 나라의 역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은 무엇이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똑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는 이 일은 세상 사람이 세상을 직접 섬기는 일들과는 다른 일이예요.
지난 번에 부산에 저자와의 만남 특강을 내려 갔는데 그런 질문은 사실은 목사님들보다도 이 젊은 학생들한테 많이 받아요. 뭐냐하면 그 분이 질문하는 건 아니지만 무슨 얘기를 하느냐면 우리의 민중들이 그 민주화의 과정에서 수없이 피 흘리고 돌에 맞아서 혹은 최루탄에 맞아서 그렇게 피흘리고 죽어가고 분신하고 뛰어내려 죽어갈 때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후일의 역사가 물으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런 질문을 얘기를 하면은 젊은 사람들은 막 깜빡 죽지요. 지금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리며 쓰러져 가는데 교회 앉아서 찬양이나 하고 기도나 하면 다냐 이러는 거지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는 그 점을 말하기 전에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야 돼요. 내 형을 명하여 재산을 나누어 가지게 하소서.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내가 언제나 너희의 재산을 나누어주는 재판장으로 누가 나를 삼았느냐.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진정한 관심이 무엇인가 보여 주었어요. 무슨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냐하면 그렇게 누군가가 재산을 나누어주고 하는 일들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이 세상을 변혁시키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들이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면 이 조국은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공의를 구하고 따라서 살면 그 한 사람 그 몇 사람들에 의해서 나라가 움직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엎으실 때에도 그 수많은 소돔과 고모라 성의 불의한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열 사람의 의인이 없기 때문에 그 성을 엎으셨어요. 결국 예루살렘 성이 망하게 된 것도 예레미야가 온 거리를 돌아 다니면 한 사람의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망하게 된 것이예요. 그러니까 이 나라와 민족의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고 그 하나님은 그 백성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사를 움직여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한 시대를 향하여 분노하실 때 그 분노는 교회에 나타난다는 것이예요. 교회에 어떻게.. 교회에 나타나는데 그 나타나는 대부분의 모습들이 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예요. 뭐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믿지 않는 교회가 다 문을 닫게 되고 신실하게 설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가서 결국은 교역자의 봉급을 못 받아서 문을 닫게 되어 버린다든지 이렇게 철칙처럼 하나님의 법칙이 움직여지면 그러면 둘 중의 하나겠죠. 바른 교회들만 서게 되든가 아니면 교회가 하나도 없어지든가. 둘 중의 하나겠죠. 그러나 이 세상은 원래 이게 인간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하나님의 다양한 섭리들이 있어서 이 세상에서 그렇게 바르게 하지 않아도 커지는 교회가 많아요. 그리고 바르게 신앙생활하지 않아도 예수 믿고 잘 먹고 잘사는 사람 많다 이 얘기예요. 그래서 시편 23편의 기자처럼 내가 매일 손을 씻고 정결케하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날마다 실망하는 거예요. 내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내가 하나님 한 분 앞에 목매고 사는데 하나님이 나한테 해 주시는 게 뭐가 있나? 이렇게 생각을 할 정도로 세상은 모순에 가득 찬 세상이예요.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서 쏟아지는 분노는 이렇게 사람이 죽고 부서지고 아니면 폭파가 일어나고 이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하실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교회로 하나님께서 주님의 심판을 당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가 끊어지게 하는 거예요. 경건했던 아버지의 신앙이 도무지 자녀에게 물려지지 않아요. 나의 훌륭한 신앙이 이웃에게 전파되지 않아요. 이전에 우리들이 들었던 그 복음을 교회에서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요. 그리고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가슴속에 매우 공허한 것들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예배를 드리고 나도 진정한 기쁨이 없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체험이 없어요. 그러면서 서서히 자신들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고사되어 가는 거예요. 어두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그 세상과 더불어 싸우고 이기고 승리해야 되겠다는 모든 소망을 포기하면서 그렇게 시대에 떠밀려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사단의 궤계예요. 사단의 목표는 우리의 영생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우리들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과 거의 다름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 주고 그럼으로써 형식으로서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기게 내버려 둬도 우리의 마음과 진심이 자기들을 섬기면 그것으로 만족해하는 것이 사단의 궤계예요. 그런 현장 속에서 우리는신앙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예요. 그리고 이것은 철저하게 믿지 않는 자들 보다도 믿는 자들에게 강하게 역사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든지 유혹하고 그들을 죄가운데로 빠뜨리고 하나님의 은총의 축복에서 영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내신 거룩한 목적과 부름을 따라서 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우리를 축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를 협박하기도 하고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하고 파괴를 주기도 해요. 그러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서으로서의 진정한 맛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의 나라가 확산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데 유용한 도구가 되고 방법이 되도록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편안함을 누리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맛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예요.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이 세상과 교회를 다 옳게 보시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교회와 그 세상이 항상 함께 심판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판을 눈 앞에 둔 한 역사 한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한 교회가 있는 거예요. 그것이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이예요.
하나님은 이런 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일들을 다수가 아니라 소수를 통해서 하시는 거예요. 얼마든지 하실 수 있어요. 그러므로 깨어있는 소수가 되기를 사모해야지 잠들어 있는 다수가 되기를 마음으로 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예요. 아니 뭐 교회에서 월급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삽니까? 나도 누구한테 들은 얘긴데요 설교 테잎을 받아 봤대나 책을 읽어봤대나 그런데 그걸 다 들은 어느 목사님이 그러더래요. 그래 미안하지만 그 교회는 몇 명이나 모입니까?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 개척한지 2년 됐는데 아무아무개 모입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아니 거기가 서울 아닙니까? 서울이죠. 아니 서울에서 그렇게 설교하는데도 사람이 그거를 듣겠다고 옵디까? 그래요.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몰라요.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잠자는 다수가 되고 싶어 했어요. 편한 길을 찾아서 신앙생활하고 싶어 했어요. 왜? 하나님보다는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소수는 진정으로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어요. 언제든지. 지금도 있어요. 이건 누가 만드셔요. 하나님이 만드시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역사의 경점을 지나든지 절망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거기는 하나님이 세우신 깨어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어요. 정말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주위를 한 번 돌아봐요. 정말 그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신앙생활이예요. 거기 하나님이 계셔요?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계셔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이 조나단 에드워드를 준비하면서 며칠동안 그 준비하면서 그런 마음속에 깊은 찔림이 왔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교회를 붙이고 붙이고 붙여서 크게 만들려는 생각을 말고 교회를 깎고 깎고 깎아가지고 순수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소망이 없다는 것이예요. 에드워즈 목사는 목회하러 딱 들어가자 마자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지가 없는 사람은 세례 받아도 나는 성찬을 줄 수 없다고 그랬어요. 다시 가려내는 거예요. 피비린내 나는 핍박이 있었던 것은 뭐 뻔하지 않아요. 오늘 저녁에 나온 사람한테 당신 당신 당신 당신 성찬 받지마. 왜요 그러니까 그렇게 믿어가지고는 안 되겠다 그러고 안 주는 거예요. 기존에 있던 교회에서.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 하나님 앞에서 살아오면서 변화를 경험하면서 70가지 자기는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규칙을 세우는데 그 중에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나와 내 이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두 번째가 뭔지 아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이 세상 사람이 다 안해도 나는 한다 세상 사람과는 상관 없이 나는 그렇게 산다. 깨어 있는 소수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 뭔가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다른 삶을 살아야 돼요. 이것이 교회를 향한 소명이예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만 진정한 참다운 순수한 사랑이 있어요. 하나님의 의가 있는 그 곳에 진정한 사랑이 있어요. 율법에 대한 깊은 경외심이 있는 그 곳에 그 율법을 어긴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것이예요. 믿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좀 딱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희를 싫어하는 첫 번째 증거를 어디에 보여주느냐 교회를 향해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나라의 역사가 파멸로 가기 전에는 반드시 거기에는 교회의 죄악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방의 땅에서 이게 예루살렘도 아닌 이방의 땅에서 이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주의 산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주님의 분노를 떠나게 하옵소서. 그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성전이 이방의 군대에게 훼파된 그 상황은 뭘 보여주냐면 하나님의 거룩함이 무너진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구별해 세우신 그 곳이 무너졌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거룩히 구별하신 그 백성들의 거룩함이 무너졌다는 것 그 거룩함이 무너져서 그 백성들이 그렇게 조공을 드리고 열국의 공주와 같던 자가 조공을 드리고 왕비와 같던 자가 그렇게 비참하게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러한 상황이 되어지게 된 그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버리신 일이 있었고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기 전에 먼저 어떤 일이 있었냐면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린 거예요. 주님은 당신의 거룩함이 훼파될 때 당신의 이름에 대한 거룩함이 훼파될 때 그때 인내가 다하면 반대로 이번에는 인간을 향해 그 거룩함의 선을 지워버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영적으로 축복하시던 때에는 교회와 세상의 구별이 분명해요. 같이 살아가는데 세상과 교회는 떨어질 수가 없거든요. 오늘 예배가 끝나면 여러분 다 돌아가가지고 직장가고 가서 일하고 학교 다니고 집에 가서 빨래하고 그럴 거 아녜요. 동네 사람하고 섞여서 살고 가게집에 가서 콩나물 살 때 5원 10원 깎을려고 하고 이러면서 살아가는 것 아녜요. 세상은 다 이렇게 섞여서 구별이 안되는 거예요. 구분은 되어지지만 그렇게 딱 나누어지지는 않는 것이 세상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때에 그런 구별된 신앙을 분명하게 갖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어디 가든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독특한 맛과 분명한 표가 탁 나요.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 탁 표가 나요. 이게 한 사람의 신앙을 축복하실 때 일어나는 일이예요. 오늘 엄성호 집사님 새차 하나 탁 뽑았잖아요. 택시지만 말이예요. 프린스 좋은 것 탁 뽑고... 차를 다 세워 놓고 그 회사에서 새차 출발하니까 고사드려야 된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난 못 드리겠다. 왜? 난 돼지머리가 축복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 가지고 난 살아야 돼겠다. 그래서 자기 차는 그 고사장에서 빠져 나와가지고 너네끼리 드려라. 예수 믿는 사람은 어디 가든지 분명하게 선을 가지고 살아요.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나요.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축복하지 않으면 선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표리부동하는 거예요. 내게 이익을 계산해 봐서 예수 믿는 사람 표시를 하는 것이 손해 날 때는 내가 예수님 안 믿는 사람처럼 딱 하고 성경책 누런 봉투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도시락처럼 만들어서 말이예요. 그리고 예수믿는 사람이 낳은 것 같으면 그 다음에 예수 믿는 다는 표를 내면서 이런 식으로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예요. 이게 거룩함이 무너진 삶이예요. 영적으로 하나님이 교회를 버리시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 이방 나라에 끌려와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차피 이 세상에서 이렇게 노예 생활을 하다가 죽어도 괜찮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함을 다시 한 번 회복시키시옵소서. 그리고 교회와 예루살렘을 이 세상과 다른 장소로 구별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최대의 기도 제목이 되는 거예요. 이 속에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이 곳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라고 하는 사실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예요.
영국의 어느 교회를 가니까 이렇게 써 있더래요. 문을 열고 탁 들어가자 마자 저런 커다란 성경 구절이 써 있는데 악인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 여호와는 이 전에 계시도다.
교회가 이렇게 이 세상 사람들이 문밖에 10 미터 바깥에 살아갈 때에 거룩함의 구별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신경쓰지 않고 마구 살던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에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테이프 면 바뀜)
.. 있는 최대의 자산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분노가 떠날갈 때에 교회에는 축복이 부어지는 것이예요. 그리고 이것을 이 다니엘은 의를 좇아서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공의는 심판하고 재판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한편으로 악한 것들을 제하고 죄진 것들을 벌하는 것도 하나님의 의지만 주님의 태한 백성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긍휼도 주님의 의라 이 얘기예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의에 호소하고 있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의에 호소해요? 자신들은 아무 의가 없어요. 자신들이 범죄했기 때문에 멸망했고 멸망한 가운데 이방에 흩어져 살면서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삶 자신이 먹고 살고 이 세상에서 자기네 안락한 삶을 위해서 이방의 땅에서 수고하며 종살이하며 살아가고 그 생활을 그냥 즐기고 안주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따라 구하는 거예요. 시편 31편에서 시인이 말했던 것과 같이 여호와여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님 우리가 의롭사오니 우리를 구하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구하시옵소서. 주님의 의로 우리를 구해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 자신을 보아서는 소망이 없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당신의 백성을 향해 맺으신 그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라는 사실만이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되옵나이다.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흥을 구하고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진정으로 기도로 자신을 드렸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선한 상태나 자기 속에 날마다 변화되어 가고 개선되어 가는 자신의 선한 상태가 하나님의 부흥을 이 땅에 불러 내릴 것이라고 하는 이런 기대를 갖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형제와 자매들을 바라보며 변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들에게 하나님의 소망이 있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눈을 들어 보면 그들은 모두 실망과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고 좌절한 그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들이 보았던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던 그 무엇을 기도할 때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라는 것 모든 백성은 하나님을 버렸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났어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 백성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예요. 인간의 변덕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이 사악하고 야곱과 다름없는 사기꾼과 같은 삶에 놀아나지 않는 하나님 그것을 시인은 뭐라고 노래했어요?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주의 진리는 궁창에 가득하다. 그런데 그 진리라는 말이 히브리 말로 에메트예요. 이거는 찬송 부를 때마다 늘 느끼는데 진리가 아니라 신실함으로 번역돼요. 인자하심은 그리고 주의 신실하심은 궁창 위에 가득한 거예요. 그 백성들을 향한 신실하심이 가득한 거예요.
이것이 말하자면 부흥을 추구하고 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유일한 소망이었어요. 세상의 상태를 바라보며 낙망하거나 좌절할 시간이 없어요.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안일하고 나태한 삶을 살며 세상과 타협하고 믿음의 참된 도를 버리고 편한 길을 위해서 영생의 길을 포기하고 넓은 길로 가기 위해서 잠시 이 세상에서의 환영과 이 세상에서 외로워지지 않는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버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길로 가지 말아야 돼요. 모든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갈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좁은 길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리 행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 길로 가야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을 이 땅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구로 쓰여졌던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예요. 공통적인 특징이 뭔지 알아요.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여의도나 아니면 광장에 모여서 부르짖다가 부흥을 맞이한 때는 역사적으로 한 번도 없어요. 정제된 사람들 정화된 사람들 장시간의 변화와 투쟁을 통해서 새로워진 사람들 순결해진 사람들 그리고 삶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를 위해서 살겠다라고 하는 갈망으로 순수하게 되어진 사람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놀라운 변화를 가지고 온 거예요.
17세기에 아일랜드에서 일어났던 부흥은 이런 면에 대해서 탁월한 예증이 되요. 일곱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역사는 그 사람들의 이름도 몰라요.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엄청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했어요. 그게 뭐예요? 이 땅 고쳐 주옵소서.이게 기도제목이예요. 아일랜드 이 넓은 땅을 하나님 고쳐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 깨달아야 할 사실은 뭐냐하면 그 제목이 입에서가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올라오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여러분 아세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예요. 이 속에서 솟아나와서 이 땅 고쳐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쏟아져 나와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더러운 죄악과 때의 찌꺼기들이 태워지는 일들이 있고 나서야 그런 기도제목들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지금 내가 고쳐지기를 바라지 않는데 세상이 고쳐지기를 원한다는 기도가 나올 수 있겠어요. 내가 그 의를 구하지 않으며 사는데 그 나라와 의가 이 땅에 실현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 되는데 그 기도가 나오겠느냐고요? 불가능한 거예요. 제가 하는 얘기가 그거쟎아요.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부흥을 경험한 사람이예요. 맛 보고 있는 사람이예요.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주님의 기도는 영원히 신비에 쌓여 있어요. 그 여섯(?7) 사람이 이 땅 고쳐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예요. 간절히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기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을 하나님이 평신도인데도 설교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가 나아가서 모여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설교했어요.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어요. 이게 17세기 아일랜드의 부흥이예요.
아무리 기도의 제목을 내놔도 이렇게 정화되기 전에는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 다니엘이 지금 다니엘과 같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시대 역사속에서 정말 소수였어요. 그러니까 다니엘이 이렇게 이 나라에서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 영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면서도 그의 모든 꿈은 어디에 있었어요? 예루살렘을 향해 있는 거예요. 이것이 벌써 6장에 나오기 시작해요. 그가 6장에서 누구든지 기도하면 사자굴에 넣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동쪽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예요. 예루살렘을 위해서 뭘 기도했겠어요. 예루살렘에 물가 안정을 주시옵소서. 예루살렘의 총선에 여당쪽에 표를 몰아 주셨으면 좋겠삽나이다. 이런 기도를 했겠어요. 뭘 기도를 했겠느냐구요.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으리만치 자신이 정화되어 가고 변화되어 가는 그런 과정을 겪었던 것이예요. 그러므로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자면 이렇게 되는 것이예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루살렘을 고쳐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없었던 모든 사람들은 회개하여야 했어요. 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심이었기 때문이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뻔질나게 옷입고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헌금 몇 푼하고 앉았다가 돌아가고 교회에서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봉사하고 이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직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교훈이 바로 세상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용하셔서 이 역사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이예요. 죄와 슬픔과 타락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로 말미암아 고통하는 이 세상을 주님의 지식과 의와 희락으로 넘치는 은혜의 해로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이예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회복을 하나님의 의에 호소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선한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의무가 있습니까? 무엇으로 여러분들 하나님 발목으로 잡으셨습니까? 무조건적으로 끊임없이 우리가 범죄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살아도 매일매일 용서해주시고 매일매일 우리를 불쌍하다고 만들어주셔야 할 그러한 의무가 하나님에게 있느냐는 것이지요. 있다면 도대체 하나님보다 높은 어떤 분이 그것을 그 분에게 부여했습니까? 누가 부여했어요? 하나님은 지고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최고의 가치이고 그리고 하나님은 홀로 이 모든 세상 가운데 구별된 창조주로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여호와 참 하나님이십니다. 인간 중에 누구도 그 분에게 그런 부당한 의무를 얹혀드릴 수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세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 속에 가지고 계신 의로우신 성품때문에 이 일을 행하시는 거예요. 주님이 의로우시므로 이 땅에 있는 이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한 번 맺은 언약을 폐기하지 아니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그처럼 역사를 움직이시는 도구로 사용해 주시는 겁니다. 그때 우리의 의지할 바는 하나님의 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과 맺으신 그 언약에 충실하고 신실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예요. 그러므로 부흥을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거예요. 언제든지 부흥이 일어날 때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어요. 하나는 뭐냐하면 깊은 타락을 밑그림에 깔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자력으로 교회가 자력으로 소생할 수 없는 그러한 비참한 상황이 되는 거예요. 도덕적인 타락 그 다음에 교회의 잘못된 신앙생활이 결국은 세상에 영향을 주고 또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요. 그렇게 되어진 가운데서 그 밑그림을 깔고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밑그림 두 개 사이에 밑그림과 교회부흥 그 두 사이에는 뭐가 있었느냐 하면 모두들 절망하고 낙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부여잡고 그 상황속에서 좌절하지 아니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본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신들의 시대에 자기를 위해 역사해 주실 것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기도하면서 늘 무엇을 체험했냐하면 인간적으로 보면 이렇게 기도해봐야 소망이 없는데 그러나 눈감고 기도만 하면 이루어지리라 역사하시리라 그걸 믿었던 사람들이예요. 그런 면에서 궁극적으로 그 사람들이 낙관주의자들이었어요. 현실에서 비관했지만 그러나 진정 하나님 안에서의 낙관을 발견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 낙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제 우리 한국 교회사 속에 뭔가 이렇게 장엄한 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정말이예요.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그 역사의 한 새벽을 열 사람들을 찾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은 이제 진공 상태예요. 이제 무엇으로 승부해요? 그래서 가만히 보면 제자들도 있고 우리 동료들도 있지만 교회가 다 사람들이 떠나요. 천 명 정도만 더 모이는 교회들은 이제 수성을 하는 것이 능수예요. 더구나 강북에 있는 교회는 초긴장이예요. 아파트가 강남에 지어지니까 강남으로 자꾸가니까. 늘어나는 교회는 대부분 이쪽 아래 쪽에 있는 교회들이예요. 그런 속에서도 성장하는 교회들이 있어요. 어떤 교회들인지 아세요? 복음을 외치는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대신 들려주는 교회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며 떠나요. 괜찮아요. 그 사람 어차피 하나님의 자녀 안 될 사람들이니까. 떠나요. 그러나 정말 이 속에 영혼에 그 깊고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지금도 정말 자신의 영혼에 만족만 줄 수 있다면 다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예요.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할 때 새롭게 전도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어야 되요.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만난 ...(끊김)
교회의 변화와 교회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와 맺으신 하나님의 그 신실한 언약 내 백성들이 나를 찾고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들에게 나타날 것이요 그 땅을 고쳐주시리라고 하는 말씀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까지도 3천년이 흘렀어도 우리에게까지도 아직 유효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흥에 대해서 갖는 도전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다니엘의 기도 (단9:16下-17)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페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결코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들 에게 성취 뒤는 것이 아닙니다. 녀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의로움과 근신함입니다. 하니님 께서는 그 백성들이 의럽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으롭게 살기 위헤서는 우리는 남다르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조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가장 미워하고 있는 죄가 나태예요.
신앙적으로 나태한 사람들은 이미 믿음을 배반한 자예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선 생생해야해요. 나태야 말로 무지에 이르는 큰 죄악에 이르는 지름길 이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살라고 하실 때 그것은 가만히 있으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얻어지는 그런게 아니예요. 순간순간 주님을 택할것인가 세상을 택할것인가 믿음을 따라 살것인가 죄악을 벗하여 살것인가 순간순간 결단하는 것이예요. 이것이 피곤한 사람들은 이미 살기를 하나님 앞에 싫어하는 사람들 이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오늘날 우리들 앞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마귀가 우리에게 행한 성공적인 일은 무기력과 무관심과 무지와 태만과 나태를 심어 준 것이예요.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위해서 노력하려고 하지 않아요. 지신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답에 사는 것인가 그런 것은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면 우리가 지금 당장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고 해서 내게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여러분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을 에굽에서 건져 내셨을 때 그들은 에굽에서 하나님이 자그들을 건져내신 이 사건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건 인지를 깨닫지 못함으로 그들에겐 찬송이 사라졌고 비참한 길을 걸어가게 됬던 것이예요.
왜 그 광야의 길을만나나 먹으면서 끊임없이 왜적들에게 시달리면서 그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그것이 그들의 큰 원망거리 였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에굽이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들을 위하여 놀라운 가나안을 유업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그 광야 길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할수 있었고 파도치는 홍해를 건너서 하나님을 천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심각한 일은 나태와 무기력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속에 깊이 깔려있어요....
이거 여러분 독가스처럼 스며들어 가지고 우리를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원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그런 의로운 삶을 성취해 갔는가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특별히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투쟁하는 삶을 살았어요.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들에게 의로운 삶을 사기 위해서는 그렇게 싸우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싸우되 아직까지는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는 아니하였도다.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또 다른 삶은 무엇인고 하니 근신하는 삶입니다. 두 가지가 사실은 십계명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두 힘이 되요.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근신하는 삶을 사는 것이예요. 무슨 얘기냐면 살인하기 위해서 노력 한 필요가 없어요. 우리 마음이 흘러 가는 대로 내버려두면 사람을 미워하고 살인하는 것이에요. 간음하기 위해서 노력 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만히 내 육체가 원하는 데로 제어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되는 거예요. 거짓말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탐내기 위해서도 역시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엔 우리의 근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끈임 없이 이렇게 노력하며 이렇게 근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사람들이 이렇게 의로움과 근신함을 추구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에 그들 앞에 있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이것을 우리가 부흥과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는가?
우리의 신앙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지식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바에 따라서 사람들은 그 인식에 메이는 신앙생활을 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 신앙이 뛰어난 사람을 보면은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저 사람이 알고있는 하나님과 내가 알고있는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다니엘이 9장에서 각성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역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같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 이 다니엘이 황폐한 성을 바라보다가 만나게 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우리는 이점을 먼저 기억 해야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가시나무 떨기 사이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이 실로 40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홀로 두셨던 이 모세를 찾아오셔서 그에게 거룩한 모세의 소명 이스라엘의 민족을 구원 해내는 영광스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의 약속을 모세에게 가르쳐주고 약속 해 주시는 달콤한 대화가 있기 이전에 먼저 모세는 불을 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뵈옵기 이전에 그는 불 가운데 나타난 사자는 뵈어야 했습니다. 타지 않는 불꽃이 가시나무 떨기를 태우지 않는 그 영적인 불길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광경을 그는 목격 해야했습니다. 40여 년이 넘는 세월을 미디안에서 살았고 광야에서 생활 했지만은 그러나 그렇게 이상한 불꽃이 치열하게 타오르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암시 해 주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이끄는 하나님의 친절한 구원의 음성을 듣기 전에 먼저 불꽃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하나님께서 폭풍과 바람과 번개와 이런 것들로 구름으로 나타나신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엄위와 영광과 권능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발견하고 세미한 음성을 듣기 전에 먼저 폭풍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그 가운데 당신의 성품을 보이시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렇게 우리의 지식에 묶여서 우리가 원하는 데로 행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닐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인식 속에서 묶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 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과 피조물이 가까이에서 범할 수 없는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법괘를 수레에 지고 갈 때에 법괘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손을 대었던 사람이 단숨에 죽은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여호와께서 멸하시지 아니하신 불을 옮겨 담다가 사람들은 제단에서 솟구치는 불길에 태워져서 죽임을 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전설 속에 나오는 하나님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 오늘날 또 하나님은 이 시간도 당신이 원하는 시대에 당신이 원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원하는 나라에 오셔서 심판하시고 당신의 나라 삼기 위해서 당신의 혁혁한 심판과 공의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여기서 하나님의 분노를 목격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제껏 듣고 본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뵈옵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에 대해서 지난 시간 자세히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오는 말하기를 지기 예루살렘과 자기의 백성이 사면에 이는 자에게 수욕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은 단지 나라가 광복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이 갈데아 나라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그런 정치적인 압박과 핍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로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셨을 때에 그들을 통해서 이루시기를 뜻하는 것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다니엘이 말 하기를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치를 받음이니이다. 이것이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은 이 세상에서 둘러싸인 수많은 대적들에게 수치와 모욕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수치와 모욕을 받으면서 살아갈 백성들이 아니라 그 수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에 무든 백성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민족으로 시기 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부리시고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시기 나게 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이 이스라엘이 이방에 있는 많은 사면의 백성들에게 멸시꺼리가 된 것은 오늘 다니엘이 말하는 대로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그의 백성들이 죄 가운데 있을 때에 그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모욕꺼리가 되게 함으로써 일 단계의 심판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 번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 해 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매일매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배풀어 주시는 참된 은혜와 사랑을 힘입어서 충만하고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해 나가지 못할 때 우리는 신앙 모든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으리가 하나님과 사귀며 주님의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며 살아나갈 때 승리할 수 있었던 많은 문제들에 있어서 패배합니다. 그리고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던 많은 승리의 삶들이 악한 세력들에게 짓밟히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열매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온전한 열매를 맺는데 실패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택함을 받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를 통해 맺기를 원하셨던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지 못할 때에 우리는 많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간계가 잘못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심령이 기쁨과 행복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연구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등지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리고 내가 너를 인정하노라 하는 하나님의 인정 해 주시는 은혜 그 사랑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나는 견딜만해 라고 생각하는 것은 본인들의 문제고 성경은 하나님이 백성의 진정한 기쁨이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며 매일매일 승리하며 살아가는 삶을 실패할 때 그 때 거기에는 반드시 실패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많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죄에 대한 묵상은 하나님의 영과에 대한 묵상만큼이나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교묘하게 우리의 삶속에 들어와서 혈관 구석구석까지 죄는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암의 종류...
죄는 어떠한 실체로 우리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는 우리의 혈관 구석구석에 다니는 암 세포와 같이 지는 우리의 구석구석이 삶에 파고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이 일어날 때 사람들이 가장 커다랗게 각성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에 많은 사람들을 깨우는 설교가 무엇이냐면 죄에 대한 설교예요.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오직 죄 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 가운데 있게되면 첫째로 생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래요.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에요. 참다운 기쁨 그리고 참다운 회계 진정한 생명 이런 것들이 사라져가기 시작되는 것이에요. 그 현장이 바로 사단이 이기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나 개인적으로나 파고 들어오는 세력을 타파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회계의 눈물과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불입니다. 밑둥이 다 썩는데 위에서 북치고 꽹과리 치면 무엇하겠어요. 잎에는 물을 주고 그리고 수없이 비료를 주고 그러면 뭐하겠어요 밑둥이 썩어들어 가는데 ...죄는 우리의 삶을 이렇게 파괴하며 들어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교회가 그렇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설교 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죄 가운데 있게 될 때에 가장 뚜렷한 것은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제 이방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교회가 그래서 때때로 교회를 살리시기 위해서 생명을 부어 주시는데 그 생명을 현격하게 쏟아 부어주시는 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부어 주시는데 그 방법이 무엇이냐면 따라서 죄에 대한 회계를 통해서 부어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회계 하고나면 찬송소리가 달라져요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면서 부르기 시작 해요 . 하나님을 찬송 하면서 영원 깊은 곳에서 을리는 찬양으로 을리기를 원한단 말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용서하는 표징 이예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 해 주실때에 우선 용서 받을때는 기쁨이메요. 그리고 감격이예요. 이감격이 오늘 이 이스라엘백성이 범죄한 것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셨는데 그것은 생기를 잃어버리게 하시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지만 그러나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과 같은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예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의 백성들을 향해서 역사 하시는 생명의 역사가 그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어질 때 이 다니엘은 이제 굉장히 긴 시간에 걸처서 그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역서를 보는 새로운 시야를 가지고 죄의 문제를 가지고 영적인 문제를 다룬 다음에 그다음에 17절서부터 본격적인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하온즉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페한 성소에 비추소서 ...하나님 앞에 기고 하고있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 그 기도의 내용의 특이성을 한 번 주목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황페한 성소에 비추어 달라고 기도 하고있습니다. 기도가 너무 어렵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궁극적으로 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었고 메대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에 세움을 입던 해에 다니엘이 이와같은 지금의 각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다니엘의 기도는 당연히 조국의 기도입니다. 특히 이 이방나라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백성들을 고토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이 얼굴 빛을 예루살렘과 그 백성에게 비추어 주옵소서 항페한 성소에 주님의 얼굴빛을 비추어달라고 기도 하고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흥의 영적인 특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기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은 하나님이 그 얼굴을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추어 주심으로써 가능하다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다시금 이스라엘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얼굴빛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비추십니다. 그 눈은 두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는 사악한 자들을 징벌키위해 찾으시고 자기를 전심으로 찾는 자들에게 은혜 주시기 위헤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선지자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 에게 하나님이 해주실수 있는 최고의 일이 다시금 그 얼굴빛을 그의 백성들에게 비추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 하고있는 것입니다.
예)도시의 범죄를 막기위해 밤에 가로등 의 수를 배로 늘림...
따라서 역적으로 하나님이 그 백설들에게 얼굴빛을 돌리시면 어두움 속에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찬송을 부르면서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빙언하면서 이방신에게 절할사람이 있겠느냔 말이예요. 문제는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을 등지는 페역한 행위들이 생겨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당신의 임제를 떠나가게 하시는 일들이 먼저 그들에게 일어난다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사회의 도덕의 문제를 가지고 개탄하면서 이것들을 해결키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 하지만 그러니까 형벌을 더 강하게 하면 좀더 나아지기는 할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면 인간 속에있는 기회만 주어지면 범죄 하려는 이 타락한 마음 그 자체는 법으로 변화시킬 수 없어요. 하나님이 오늘 이 다니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백성 다와지는가 그건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빛을 그 백성들 에게 비추어 주실 때 하나님의 백성다와질 수있습니다. 우리 개인적으로 신앙생활 하면서 보더라도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기도하면서 새 힘을 얻을때에는 주님을 위해서 사는 일들이 고통스럽고 큰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워요. 그러나 은혜가 떨어졌는데 은혜 받은 사람처럼 살려니까 그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예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있어서나 개인에게 있어서나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있어서나 그 백성들에게 얼굴빛을 비추시는 그러한 신령한 하나님이의 은혜를 통해서 교회는 맨 처음의 세울때의 이러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 모습을 비로서 회복하게 되는 것이예요. 하나님이 백성들, 개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힘 그 원동력을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공급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예요. 물론 이런 기도는 별다른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흔히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날 수 없거나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예요. 부흥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당신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도록 하기위해서 꼭 필요한 그 힘이 자신들에게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부터 부어지기를 사모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 부흥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자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잘 할수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는 먼저 소망을 같기전에 깊이 절망 했습니다. 이제 이처럼 나라가 망하고 망한 가운데 에서도 하나님을 찾지않고 살아가고 여전히 죄에서 따나지 않는 생활을 보면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망한다는 것은 이 다나엘에게 의미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오직 하나 만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이 그 마음에 부흥을 주신 사람들 이에요. 그래서 마음에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놀라운 부흥을 주셔서 이렇게 부흥을 누리며 살아가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슬픈것인가 하는것을 깊이.느끼게 한사람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바로 그런사람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수있는 가장 시급한 일은 하나님 앞에 정직해 지면서 주님의 도음을 정말 필요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예요. 주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런 사모하는 마음 이런 기도를 정말 능력있게 하는 것입니다.
9. 부흥의 본질 (단9:17)
다니엘이 하나님앞에 기도한 17절의 기도는 이후에 이어지는 그 모든 다니엘의 부흥을 위한 기도가운데 총론적인 기도에 해당합니다.
총론적인 기도라고 해서 기도를 대충한다거나 열심히 안 한다거나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 부흥을 위해서 기도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처럼 황당하고 현실성이 없는 기도가 없습니다.
오늘 다니엘은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어 달라고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피부에 와서 부딛치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바벨론에서의 비인간적인 학대라든지, 고향을 잃어 버리고 살아가는 흩어진 유대인들의 그 비참한 생활상이라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어도 예배할 장소를 찾지 못한 성전이 없는 형편이라든지. 혹은 그들이 하나님앞에 살아 가기를 원하지만 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처럼 풍부하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는 종들이 없는 것들이 바벨론에서 살아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현실적이고, 직접적이고 피부에 부딛치는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니엘은 바벨론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두고 온 하나님의 성소, 이미 다 황폐해서 제사가 그쳐 버리고, 이방인들의 말발굽아래에 짓밟혀서 폐허가 되어버린 그 황페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흥을 위한 기도는 이렇게 현실에 대한 민감한 감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뜬구름을 잡는 것과 같은 기도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말고 기억해야 될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 기도야말로 다른 모든 것들의 핵심이 되는 기도이고, 이 기도가 없이는 다른 모든 기도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다니엘이 오늘 하나님앞에 황폐한 주의 성소에 주의 얼굴 빛을 비추어 달라고 말하고 있는데, 당시에 바벨론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 다니엘의 기도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니엘 역시 이런 기도를 할 수있게 된 것도 9장에서의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전에도 이런 비슷한 기도를 했겠지만 9장에서 대대적인 예레미야서를 통한 각성을 통해서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면서 기도의 세계가 장엄하게 열렸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의 깊이와 넓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깊이와 넓이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우리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고, 그 기도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않은가 하는 것은 그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바벨론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기도는 피부에 부딛치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성소가 황폐하게 된 것이 67년 전의 일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이 전부터 하나님의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차피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고, 바벨론에서 이렇게 살아가는데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앞에 제사가 드려지고, 안 드려지고, 성전이 다시 부흥하고, 안하고 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무슨 영향을 주느냐하는 것입니다. 실지로 그들이 부딛치고 있는 문제는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노예로 잡혀 온 포로에 대한 학대의 문제라든지, 아니면 요즈음 용어를 빌리자면 이민 온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라든지, 아니면 그 속에서 바벨론 사람들의 압제를 받으며 살아 가고 있는 비참한 정황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다니엘이 이렇게 주의 얼굴 빛을 황폐한 주의 성소에 비추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현실적으로 부딛쳐있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노예로 끌려 온 포로들에 대한 처우에 관한 대대적인 바벨론의 법 개정이 이루어져서 그들의 지위가 높아졌고, 정당한 임금을 받게되고, 어디서든지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아 갈 수 있게되고, 어디서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롭게 모여서 종교적인 회합을 가질 수 있는 이런 외국인의 종교적인 자유에 대한 특례법들이 생겨나서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이루어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신앙관 자체가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신앙관으로 바꾸어져야 됩니다. 이것이 바꾸어지지 않으면 참된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서 진정으로 행복해진다고 하는 것이 잘못된 자기 만족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는데, 그 백성들이 빛을 잃어버리니까 하나님께서 징벌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앙하던 예루살렘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그런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도 그것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그 심판의 불같은 시련을 통해서 그 속에서 남은 자들을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한사람 한사람도 소중하지만, 당신 자신의 이름을 거기에 두신 택한 하나님의 백성, 요즈음으로 말하면 교회라고하는 이것도 개인 한사람 한사람의 가치보다 훨씬 하나님앞에 소중하고 존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교회를 위한 것이면, 교회에 속한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때로는 교회에 속한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개인에게 불이익이 되는 일들이 돌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셔서 심판으로 몰아가신 이유도 그것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끝내자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빛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한 이방가운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그 빛을 회복하게 하시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택한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역사적으로 유혹을 받아 왔습니다. 고신도와 평신도를 갈라놓고 높은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이 따로 있고, 대충 사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두가지 기준을 제시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고신도들은 그런 삶을 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지위를 누리면서 평신도들을 지배하고, 평신도들은 노예처럼 살아가는 댓가로 대충 살아가도 용납받는 이런 이중의 윤리를 하나님앞에서 가지고 살아 갈려고 유혹 받았던 것이 교회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라는 말 자체가 좋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앞에서 한가지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특별한 책무를 맡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무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로써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의무를 지고 있으며, 어두운 세상에 우리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인생에 신앙의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예수를 안 믿고 죄가운데에서 편안하게 살아 가고 있지만, 일단 예수를 믿기로 결심을 하고 거듭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나면, 대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내실 때에 우리가 사랑스럽고 고귀해서 구원해 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내신 다음에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대로 안 살면 행복도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행복도 두번째이고, 아들도 두번째입니다. 가장 하나님앞에 귀한 것은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당신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이루어야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으로 일관해서 뜻을 이루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신 성소를 초토화시키고, 그 백성들을 끌려가게 만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 악한 사람들만 쪽집게처럼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6.25때 공산군이 쳐들어와서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교회가 죽어 갈 때,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들만 쪽집게처럼 골라서 죽이시고,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시킨 것이 아니라, 똑같이 죽어 갔습니다.
경건한 사람들, 불경건한 사람들, 신앙을 가진 사람들, 불신앙의 사람들이 모두 죽어 갔습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로 작정하시면, 그 다음은 개인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시고 다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진정한 소망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달려 있으며,. 그 사람들이 빛으로 살아가면, 역사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각을 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그 빛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 빛을 드러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들어 놓으셨고, 그렇게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실적으로, 몸으로 부딛친 모든 문제에 대해서 완전한 해결과 좋은 일들이 일어 났다고 해서 그들이 이방의 빛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의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선한 대접을 받으면서 노예이지만, 노예가 아니라 동녀처럼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도록 그런 정도의 은혜를 베풀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지 않고 세상과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인해 대단히 자신들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다른 많은 기관들이 이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교회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을 때 교회도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은과 금과같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선한 윤리와 도덕과 선한 행실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교회가 스스로 자랑스러워 합니다. 교회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감동적인 선행을 창조하고, 아름다운 미담이나 만들어 내는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기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을 행하고, 하나님앞에 바르게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이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본받으면서 살아가니까 유익을 받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에 보내신 것과, 이 세상을 택하신 것과, 심판을 받게 신 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유일한 통로로 삼으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교회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기만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여기에서 교회는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물러서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빛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당신을 드러 낼 수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과 역사를 통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잘못 가지고 있었던 것은 재림 신앙입니다. 재림 신앙이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은 죄많은 곳이고, 괴로움만 많은 곳이기 때문에 여기에 사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그러니까 속히 떠나야 된다라고 하는 타계적인 신앙을 만들어 줍니다. 이런 신앙이 오늘날 특히 기도원에 잘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업을 해도 적응을 못하고, 직장생활을 해도 적응을 못하고, 인간관계에서도 적응을 못합니다. 적응을 하는 곳은 오직 교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무슨 소금입니까? 소금은 부패한 곳에 뿌려져야 됩니다.
우리는 모두 다 나름대로 성경에 입각한 독특한 신앙의 철학을 가지고, 훌륭하게 적응을 해야 됩니다. 직장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 당당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불법만 행하지 말고, 승진도 빨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직장생활을 해보면, 대개 신앙이 좋은 사람이 승진에 관심이 없는데, 그것은 세상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승진 자체와 올라가는 봉급과 높아지는 권세를 탐하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중심적으로 쓰실 수 있는 인물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앞에 때를 기다리며 간절히 자신을 지켰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민족을 구원하시고 역사를 바꿔 놓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민족과 역사를 구원하는 데는 보디발의 종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높이시고, 역사의 중심을 움직일 수 있는 구심점으로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높아진 지위와 훌륭해진 자신의 입지를 인해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고백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이 나를 악을 선으로 바꾸고, 하나님이 나를 높이신 것은 당신과 당신의 가족과 이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나를 바로의 구원자로 삼으셨나이다.” 이것이 자기의 출세를 바라보는 요셉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고위 공직자를 해야 되며, 그런 사람들이 우두머리로 다스리고 있는 관청에서는 부패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것이 빛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다니엘의 이 기도가 황폐한 성소에 주의 얼굴 빛을 비추어 달라고 하는 것이 다른 모든 기도보다도 그에게는 가장 시급한 기도였습니다. 추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에 진실한 것이 없이 이 기도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상적인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다니엘의 이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 기도는 다니엘속에서 드러났던 하나님 자신의 간절한 열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 다니엘 속에 와서 기도한 것입니다. 이 기도가 모든 기도제목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기도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어 달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두가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소에 대한 다니엘의 판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오늘 황폐한 성소에 얼굴 빛을 비추어 달라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황폐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은 역사로 인해서 고민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위해서 고민하고, 모든 이 후에 이루어 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 고뇌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이 포로로 끌려 온 사람들이 어떻게 이 악한 이방인의 땅에서 믿음을 지키며, 신앙으로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다양한 모든 고민들을 다 했는데 마지막 핵심 자리에 오게 된 것은 성소였습니다. 이 황폐한 성소는 황폐해 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과 관련지어서 역사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때가 두번이 있었는데, 하나는 불레셋과의 전쟁이 벌어질 때 아벡의 전투에서 법궤를 빼앗긴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아벡의 전투에서 이미 깨달았어야 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승세가 기우는 것을 자신들이 생각하면서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보하고, 굳히기 위해서 법궤를 들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이 법궤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임재해 계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법궤를 들고 나가면, 하나님이 마치 왕이 마차를 타고 전쟁에 임하는 것같은, 하나님 자신의 친전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싸움에는 지고, 법궤는 빼앗겼고 그들은 대패했습니다.
두번째로, 성전이 무너졌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가 황폐하던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고 있는 성전의 외관의 모양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바로메타가 되었습니다.
학개 선지자가 당시에 짓다 만 성전을 바라보면서, 깊은 탄식을 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성전을 짓고 싶어하는 건축가적인 열망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전이 황폐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황폐해 진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애통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황폐한 성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앞에 기도하게 된 것이 다니엘의 역사 인식이었습니다. 모든 역사의 수레바퀴 한가운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소가 있었고, 그 속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었는데, 황폐하게 된 것을 보면서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는 새로운 시각으로 교회를 보아야 됩니다. 이제는 제사가 존재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어디에서든지 예배할 때가 온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서 있는지, 안 서 있는지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를 바라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들을 누리면서, 이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바라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다니엘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을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주의 얼굴 빛이라고 하는 신학적인 개념이 제일 처음 나오는 곳이 민수기 6장 23절부터 27절까지입니다. 그 기도가 구약의 축도입니다. 정확히 번역을 하면 “나는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너를 향하여 비추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며 나는 여호와가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축도였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이 그 얼굴을 이스라엘에게로 향하심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속에서 두 가지 이유에서 이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굴 빛을 비추십니다.
하나는 그들의 죄를 발견하고 진노하기 위하여 그들을 주목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에게 축복하시기 위해서 대면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얼굴 빛이라는 속에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들이 이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고 계실 그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비쳐오는 빛을 우리가 충만히 받고 있을 때는 충만하게 빛을 드러내게 되고, 그 역할들을 다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주십니다. 다니엘이 주의 얼굴 빛을... 이라고 말한 것은 이미 이 다니엘이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왜 택하셨고, 그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이방의 땅에서 그들을 불러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놀라운 이유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얼굴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들에게 영적인 은혜를 내리지 않으면, 그들이 결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신령한 은혜임을 확신하면서 근본적으로 사람들을 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을 교회가 사모해야 됩니다. 그것만이 교회가 교회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입장에서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진정으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올바른 교회를 해 나갈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목회자가 교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인간적인 긍휼함이고, 또하나는 신적인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부어질 때 이러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백성들을 불꽃처럼 살게하게 위한 부흥의 열정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62장에서 이사야는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 즉” 하며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로서 느끼는 최고의 괴로움입니다.
요즈음 특히 “불꽃처럼” 이라는 책이 불꽃처럼 팔려 나가면서 저는 이 목회 현장에 대해서 느끼는 부담감이 큽니다. 이것은 하나님앞에서 내 인간적인 열심으로 잘 해 보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인식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목양을 하게 하시는데 내 교회에서 이 백성들이 불꽃처럼 사는 것은 아니더라도 우선 그렇게 살아야 된다라고하는 강한 사모함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이 책들이 전부 다 거짓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초판을 찍었는데 발간한지 두주만에 다 매진이 되고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와서 보고싶어 합니다.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제 설교가 아니라 제 설교를 통해서 나타난 교인들의 변화된 생각과 변화된 모습을 보고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남의 교회를 위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예증을 위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생각하고 넘어가야 될 사실은 우리는 우리가 아니면 누구인가가 이 시대속에서 하나님이 왜 교회를 택하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분노가 창궐한 이 시대를 어떻게 하나님앞에 살아가야 되는가 하는 것들을 우리들이 보여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러가서 침륜에 빠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에게는 대안이 없습니다.
앞에는 출렁거리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바로가 보낸 애굽의 병사들이 병거를 타고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상한 가슴을 부여안고 우리야말로 이 광야와 이 바닷물과 노도와같이 달려드는 대적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서 우리는 가련한 백성이 되었도다하고 서로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안은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서 우리앞에 홍해를 열고 우리가 그 마른 땅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너편 언덕에서 우리를 추격해 오던 악한 세력들이 그 홍해의 물결에 휘감겨서 가랑잎처럼 떠도는 것을 우리의 눈으로 목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거기에서 미리암의 소고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던 이백만명의 성가대의 장엄한 찬송을 우리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이것은 김목사의 사상이나 목회철학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사람들은 한 순간에 놀랍게 깨어났다가는 다시 그 다음에는 더 절망적으로 깊이 잠에 빠져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앞에 옳은 사람이라고 인정 받을 수 없습니다. 회복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맛을 보고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사람들은 이제 여러분들이 원하는 때에 그렇게 쉽게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제가 하나님앞에 은혜를 받고 본격적으로 설교사역을 시작한 지가 8년이 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고,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지푸라기와 같은 나를 들어서 다양한 역사들을 일으키시는 현장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여러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생 자체가 완전히 송두리채 뒤바꿔진 경험들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사람들 중에는 상당수가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앞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한 때는 비췸을 얻어서 하나님앞에 정오의 햇살과 같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주의 백성들로 나타났지만 지금은 물러가 침륜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5년, 6년, 7년의 세월이 지나갔는데도 지금도 만나보면 아직도 곤고함가운데 그 때에 물러가 침륜에 빠진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도 없고 진정한 만족도 없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굳게 지켜야 됩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그 얼굴 빛을 당신의 교회에 비춰 주심으로써만 교회는 교회답게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될 수 있다는 이 간단하고 단순한 성경의 좌우명을 일편단심으로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어두움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요. 그들은 온통 살아가는 모든 삶과 모든 신앙을 아는 참된 지식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서 무엇이 무엇인지 도대체 분간을 못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는가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밖에는 생각나지 못하는 사람, 천국에 가는 티겟 밖에는 생각 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가 변혁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홀로 역사하심으로써가 아니라 그 백성들을 위해서 먼저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하나님의 계획들을 성취해 나가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과 하나님의 주신 것을 끝까지 붙들고 물러가지 아니하고 외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를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불꽃은 이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방송에서 메스컴 타는 것이 불꽃이 아닙니다. 불꽃처럼 살아도 세상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해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가면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하는 사람, 하나님을 생각 하는 사람, 그를 볼때마다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일 없이는 그를 쳐다 볼 수 없게끔 만들어 주는 이런 사람이 불꽃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불꽃처럼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 유명한 자 같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는 무명한 자 같았고, 버린 자 같았고, 만물의 찌끼와 같았으나 하나님앞에서는 불꽃처럼 살았던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하나님앞에 살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앞에 삶이 변혁되지 않으면, 우리의 간구하고 아는 것이 모두 말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다니엘에게 주신 기도 제목이 주님의 얼굴 빛을 비춰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의 빛을 그 성소에 비춰주시옵소서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소를 일으켜 세우시면, 그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을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일으켜 세우시면, 그 시대의 역사를 다시한번 은혜 베푸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인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다니엘은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 주시기를, 주를 위하여 이 일을 하시기를 하나님앞에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 시대에 어떻게 우리를 들어서 이 민족과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렵니까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민족은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역사는 완전한 흑암을 헤매고 있지만 다니엘은 그 어두운 시대에 유일하게 하나님이 다니엘을 향해서 문을 열어 주시고 마지막 때에 위대하게 될 일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 역사를 바라보면서 다니엘이 얼마나 흐느끼고 울었겠습니까? 말씀을 펼쳤을 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는데 주여! 어느 때나 이스라엘이 회복되겠나이까? 3년 남았단다 내가 이 민족을 다시 일으키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모든 것들을 소유하면서 그렇게 민족을 가슴에 부여안고 역사를 한 품에 끌어안고 하나님앞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지극히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할 말만 있으면, 다니엘을 불러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존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 긍휼을 구하게 하는 각성 (단9: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패된 상황과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지난 시간과 그리고 지지난 시간 두시간에 걸쳐 앞절 두절을 이야기 했습니다. 다니엘은 우리가 알고있는 평범한 상식으론 이해하수 없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때로는 성경속에 우리가 이해 못하는 그러한 기도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그것까지는 시편에 많이 나오니까 이해가 가지요. 그러나 그뒤에 눈을 떠서 누구보고 눈을 뜨라는 것입니까? 하나님보고 뜨라는 것입니다. 성경 에서는 하나님은 감찰하실뿐 아니라 졸짇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 이십니다. 근데 그 하나님보고 눈을 뜨라고 그렇게 기도해요 . 성경을 읽다보면 정 반데되는 이야기가 나올때가 있죠. 하나님은 시험치 않으신다고 나오다가 창세기에 가면 하나님이 시험 하신다가 나오고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하다가 시편에 가면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인데 눈을 뜨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거죠.. 이러한 표현은 불손하고 신성모독적인 이야기죠.. 이러한 부분들을 우리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표현만을 주시하면 안되요.. 그러한 표현을 쓸수밝에 없었던 성경 기록자의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해요. 그 마음이 되어서 그 성경에 얼핏보면 상반되는 표현을 하지 앟으면 안되었던 그 저자의 마음을 읽으면서 되내어보면 그 의미가 정 반대로 나와있는 묘사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수 잇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이 장면들을 알기위해서 우리들은 눈을떠서 무엇을 보라고 요청하고 있는지 무엇을 주십사고 요청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대상을 먼저 살펴보면 우리가 좀더 자세히 알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을떠서 첫째는 우리의 황폐한 성과 두 번째는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시옵소서 하고 두가지를 위해서 다니엘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황페한 상황입니다. 아것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있는 이스라엘의 백성과유다에 남아있는 백성들을 위한 기도 였습니다. 사람을 향한 기도였죠? 그리고 또 하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시옵소서 .. 마치 예루살렘 으로부터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예루살렘이 바로 옆에 있는 것 처럼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잇습니다. 그래서 눈을 뜨라는 이야기는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눈을 뜨라고 하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 다니엘 자신은 9장에 와서 커다란 예례미아서를 보면서 커다란 영적 체험을 격으면서 이전에 볼수 없었던 세로은 시각으로 역사와 그리고 자신들의 신앙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그 광경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겨났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누차에 걸쳐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까다니엘이 하나님앞에 영적을 각성하고 나니까 기도의 제목들이 돌출되고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그 광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눈을 떠서 보라고 하는 이 의미는 하나님에 대해서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속에서 일어난 갑작스런 그것을 통해서 이전에는 문제로 삼지 않고 깊은 기도제목이 되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다니엘 자신의 깊은 변화를 반영하고 있느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러분들이 기도생활을 하면서 기도생활 자체가 힘들고 지지부진해 지는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해도 깊이 다가오지도 않고 처음에는 가슴에 다가왔던 기도의 제목들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또 응답 되었는지 본인도 모르고 그러는 속에서 무디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럴때에 결국은 변화가 필요한데 그 변화는 어떤 변화냐 하면은 하나님 앞에 어쪄면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길 원하시는 것과 내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거리가 있는지를 한 번을 생각을 해야합니다. 전향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가슴에 부딫히는 순서대로 말하게 되어있고 가슴에 자극을 주는 그 순서대로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그래서 기도할 때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하면은 벌써 소리가 공중에서 빙글빙글도는 그런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 마음, 기도제목 이 모든 것들이 나누어 지거나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어있는 모습이 되는 것이예요. 그래서 이 다니엘이 눈을 떠서 보아달라고 하나님께 요청 하는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주무셔서 눈을 떠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이새롭게하나님앞에변화를받으면서 떠오른게 된 기도 제목들은 충격적이고 갑작스런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 제목들이 될 수 있는가? 그런 것들이 깊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변화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만이 변화된 기도를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사람들은 변화된 기도의 제목 속에서 살아갑니다.여러분들이 만약에 신앙 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하고 더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 했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다른 기도의 제목 다른 사람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기도의 제목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는 뜨겁고 간절하게 여러분들의 기도 제목으로 와 닿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앞에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게속해서 새로운 기도 제목들에 대해서 새롭게 도전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특별히 느끼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자녀를 길러요. 저도 자녀를 기릅니다. 아이가 내일모래 시험이예요. 그리서 부모의 마음은 얘가 어떻게 하면은 시험을 잘 볼수 있겠는 가로 생각이 가득 차 있습니다. 자녀는 와가지고 시험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고 와서 오토바이 , 자전거 ,장난감 사주세요 한단 말이지요.그러면서 계속 조르는 거예요. 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부모에게서 배웠어요. 끈질기게 메달리면 부모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반든시 주신다. 그리고 계속해서 끈질기게 부모의 관심과는 상관이 없는 제목들을 가지고 와서 조르는 거예요. 그런데 자꾸그러면 나중에는 화가 난다구요.왜? 사람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어야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뭘 기도해야 되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 앞에 잘못된 믿음과 잘못된 관계는 내버려두고 무조건 믿고 말하자면 저돌적으로 메달리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하나님앞에 저돌적으로 메달려서 된다는일은 하나님앞에 올바를 관계를 가지고 바르게 하나님앞에 기도의 제목을 찾아갈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끈질기게 봐주는 것이예요. 기도의 제목이 잘못된 것을 하나님앞에 가지고 나아가면서 끈질기게 메달리는 것은 하나님앞에 고집이라고 불려지는 것이예요. 어떨 때 보면은 하나님꼐서 나에게 정말 기뻐하시고 원하시고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어떤 것을 기도 한때는 깊이 기도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힘껏 밀어주시는 기도가 나오는 것이예요. 그게 워냐면 성령이 기뻐하시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기 때문이예요. 그때는 그렇게 기도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 자신을 놀랍게 변화시켜가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생각과 관심의 촛점이 변화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난 우리 교회를 목회 하면서도 언젠간 그런걸 할려고 그래요.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듣고 변화되야지만 변화된 기도를 자신이 할 것 아니예요. 근데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기위해 기회를 주면 꼭 기가막히게 은혜 받아야할 사람들만 빠져 나간단 말이예요.하나님이 우리를 바라 보실때에 우리에게 일방적인 믿음도 중요 하지만은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시는 동일한 마음을 갖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과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보시는 가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지신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 해 주고 싶어하는 그 기도의 제목들로 우리의 기도 제목들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말이에요 우리가 관심을 갖고 간절히 사모하는 바가 하나님이 원하고 바라시는 바 하고는 전혀 다를 수도 있는 것이예요
우리는 이것만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면 잘 믿을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마음은 내가 그걸 해결 안해주니까 니가 지금 이만큼 이라도 나를 찾지 그것마저 해결해 주면은 너는 아마 내게서 멀리 떠날거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이 아니라 정말 다른 기도의 제목들을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나중에 그 기도의 제목에 열심히 매달리고 그담에는 내가 생각하고 내 인생을 향해서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응답되고 이루어지는 것들을 보게되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지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말씀 하시는 것이지요. 그 이야기는 기도 안해도 너희들이 정말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러면 그 모든들은 기도를 안해도 너희에게 보태준다.. 그 증거가 뭐예요 너희에게 있어야 할것이 무엇인지 하늘에서는 다 아시느니라 ..그러니까 이 눈을 떠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사태를 보게 해달라고 하는 이기도는 다니엘 자신이 이것을 보게 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찬송 이예요 .그리고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그 눈을 떠서 황패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컽는 그 성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우선 그렇게 해놓고 그가 하나님께로 보게 해달라고 해놓고 그러니까 스스로 각성된 부분들이 뭐냐 하면은 우리의 상황 무슨 상황 어제 오늘 아침에 벌어진 상황이 아니잖아요.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었어요? 67년이라 하는 긴 세월동안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되어왔어요. 그렇게 긴 세월이 되풀이 되어 오면서 그 자신들이 이미 오랫동안 격어오게 된 그 황페한 상황 그 자리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 하셨어요. 그러니까 부흥 이라는 것은 먼저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예요. 고래로 위대한 건축이 일어난 곳에 신앙의 부흥이 생긴적이 없어요. 왜그래요? 왜 하나님 께서는 위대한 부흥을 산상이나 토굴이나 지하실 방이나 시골의 교회당이나 이런데에서 부흥이 오게 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이예요? 정말 부흥이 일어났던 도시는 이름이 없는 도시에요. 그리고 시골에 있는 교회였어요 그리고 어느 다락방 어는 골방 즉 사람들이 주목해즐수 없는 그러한 교회당에서 공간에서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교회당 그런곳에서 주목받는 부흥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름을 기억 해 주지 않는 하찮은 장소 그리고 사람들이 기억도 하지 못하는 이러한 곳에서 부흥이 일어났어요. 그러한 사황속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죠? 우리들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것이예요. 오늘 이 다니엘이 자신들의 이 상황을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였어요?.우리는 황페한 상황 이옵나이다. 무얼 보고? 포로로 끌려와 있는 그런 비참한 형편을 보고 이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포로로 끌려와 있는 이러한 상황를 보고 자신들을 비참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나라 사람을 보고 말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사라진 말하자연 신앙생활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에서 잊혀져 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신앙 이런 것들이 바로 황페 하게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예요. 그리고 이러한 황페하게된상황들이 솔로몬 말기 에서부터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의 역대 왕들을 거치면서 멸망하기 직전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생기 잃어버린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교회가 하나님 앞에 황페하게 되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때는 정처할 곳도 없이 이나라 저나라에사정하며싸우며 지나기도 했고 했지만은 그들속에 분명히 신앙이 살아있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들이 땅 한평 없이 광야에 서 유리하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지만은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을 황페한 사람 아라고 부르지 않아요.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예요. 구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부터 나타았던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하고있는 놀라운 증표들을 여러분들은 기엇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부터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속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려주고 싶으셨어요. 그래서 법괴를 지고 요단에 발을 들여 놀때에 무리이 마르는 역사가 일어닜습니다. 그 일은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 수많은 가나안에 살고있는 수많응 사람들 에게 간담을 서늘케한 놀라운 충격적인 사건 이였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한 형편 이었습니까? 땅 한평도 없었습니다. 왕도 없고 땅도 없고 변변한 무기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리고성 과의 싸움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이제 매일매일 나와서 여호수와의 명령에 따라서 성을 돌고 있을 때 그들은 성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땅에 처들어 와서 그렇게 높은 성 그 튼튼한 성을 돌고 잇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이 세상에서 뭐 내놀만한 것들이 있었겠습니까? 이제는 그들 에게는 굴림할 왕도 넓은 영토도 없었고 그렇다고 에굽을 떠나서 홍해를 건너 도망칠 때에 자신들을 추격 해 왔던 강려한 군사력의 상징인 병거 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 여년의 세월 동안 하나님이 공급 해 주시는 만나를 먹고 그리고 하나님이 공급 해주는 신발도 신고 당신이 공급 해 주시는 의복을 입고 그러면서 살아 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백성들을 결코 황페한 백성이라고 부르지 않응 것이에요. 솔로몬 시대를 생각 해 보십시오. 그는 드디어 아버지가 준비한 수많은 금과 은과 그리고 수많응 백향목과 아름다운 장식물 로써 정말 역사에 기록이 남을만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후 그가 타락하게 되고 수많은 이방의 신을 섬기는 여인네들이 궁중에 기거 하면서 혼합주의의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여호와의 도를 경외하는 신앙은 쌔까맣게 잊혀져 가고 잇었습니다. 이러한 사황이 게속 되고잇는 그러한 때에 여러분 그들에게는 훌륭한 성장 유능한 왕 넓은 영토 수많응 백성 모두 잇었으나 그 백성을 우리는 황페한 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니엘이 이렇에 변화를 받고 자신이 놓여있단 역사적인 현장을 정확한 하나님의 현장으로 바라볼 수 있었덩 것처럼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들이 이 시대와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 히기느냐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갓니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무엇이라고 생각 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기는 어떻게 봐 그냥 살면 되는거지 ....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예요. 그것을 가르쳐 성경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예요.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이 이 교회를 어껗게 생각 하실까? 하나님이 이 조국의 교회들을 어떻게 보실까?하는 것들을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단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았기 때분입니다 .다니멜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사람 이었 습니다. 그러나 9장에서 이러한 영적인 변화를 예래미아를 깊이 경험 하면서 역사를 보는 안목이 열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들의 처지가 황페하게 된 .상황임을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을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성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의심 할것없이 이스라엘 성입니다. 그 앞에다가 수식어구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일컽는 성을 보옵소서...그러니까 하나님이 다니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다니엘이 변화를 받고 그 시대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같게 되니까 예루살렘은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가 열린 것이예요. 말하자면 하나님의 이름과 그 백성들의 영적인 사태의 사징이라고 할수 있는 예루살렘의 성전과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예요. 그래요 하나님의 백성의 목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예요. 그리고 그 이름은 그의 백성들과 땔수 없는 하나로 연관된 것입니다. 부인할 수 없이 하나가 되어 버렀습니다. 나눌네야 나눌 수 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높임을 받든지 멸시를 받든지 그것응 하나님의 교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계속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이 교회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 교회가 부페하고 타락하면 세상의 사람들은 부페와 타락의 원용이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로 더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맏지 않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유와 구실을 찾고 핑계를 찾아 사람들은 거기서 이유와 구실과 핑계를 찾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지에 대해서 그들은 장황아게 떠벌일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성이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 그것이 무슨 뜻입니따? 성을 볼적마다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이 성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인데 근데 지금 예루살렘 상은 어떻게 됬습니까? 바벨론에게 멸망 되어 모두 파괴되어 버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로 일컫는 성 이예요. 그래서 언제든지 사람들은 멸앙 당한 성을 바라보며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볼 때 하나님에 대해서 흥미 없던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하나님에 대해서 들먹 거립니까? 아무 생각 없이 차타고 지나가다가 하나님이 생각나서 들먹거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고 , 교회를 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고 우리가 지나갈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볼때마다 누구를 생각해요? 하나님을 생각해요. 그들은 믿는 자들에게 욕을 하면서도 우리를 볼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해요. 이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컫는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니엘은 우리가 주 앞에 간구 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의를 의지한여 함이옵나이다 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니엘 이 깊이 각성하고 변화된 가운데에 하나님 앞에 주님의 눈에 들어난 하난님의 교횡와 백성들을 위해 기도 할 때에 다니엑이 자신의 의를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참된 부흥을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장벽은 죄가 아니라 죄가있어도 회개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역사 해요. 근데 자기의 의 내가 하나님 앞에 제법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는 이런 자긍심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말씀 사역을 하면서도 가만히 보면ㅓ 끝까지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착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착실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뢰하는 사람 들은 변화가 되는데 대게 자기가 충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속에는 항상 무엇이 있냐면 자만심이 있어요. 자기의 의 그러니까 자기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의 정석이라고 생각 하는 이러한 마음 이런 것들이 깊이 지리를 잡고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 하지만 그러나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아요. 그리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이 아니면 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절박한 그런 기도로 나아갈 수 없어요 불가능한 것이예요. 그러니까 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의입니다. 다이엘의 입장에서 가만히 생각 해보면 그는 장래가 총망되는 젊은이 로서 어쩌면 왕족 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왔지요. 그리고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 하기까지 실로 오랜 수십년의 세월을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상층부의 영화를 누리면서 살았을 지도 몰라요. 그런데 다니엘이 과연 자신의 영에와 열광을 위해서 무엇을 축적하고 탐했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 이었다면 하루에 세 번 기도하기 위해서 사자 굴속에 들어가는 어리석은 행동으 하지 않았을 것이예요.그러나 오늘 다니엘이 그 모든 신실한 삶이 보이지 않는 것이예요. 황페한 백성이 그리고 그 앞에서 무너진 성을 볼때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우리는 범죄 하였다... 그러니까 지체들의 죄악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으로운 행위 같은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예요.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우리가 이렇게 간구 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옵나이다. 그 무슨 뜻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몸부림 치듯이 하나님 앞에 기도 하고간구 하지만은 그러나 주님에게 이렇게 우리가 간구 하고 기도 한다는 것으로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만 하는 기도는 없습니다. 그러며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가도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이런 자기 의가 충만하게 있는곳 그런 곳에는 결코 부흥이 일어나지 않아요. 자신의 행위와 자신의 삶을 너무나 대견스럽게 여기고 있는 그곳에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예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오로지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인정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가고싶은 마음이 10%밖에 없었던 집회. 설교자는 불꽃처럼의 간증에 나온 집회 밥도 주지 않았던 집회...
.
이러한 지신들의 의가 주님의 긍휼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하는 것이에요. 이런것들이 부흥을 추구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모두가 죄인이고 그리고 하나님앞에 회개하고 거룩하심 앞에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원색적 복음의 메시지가 이 시대에 환영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에요. 왜? 그것처럼 부흥을 갈망하고 그 속에서 들어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 시간에 우리가 다시 한 번 주님이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눈을 떠야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또 우리의 주의에 혹은 나 자신에 황페 하여버린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주의 이름 과 결탁 되어서 주님의 이름이 언급 될 때마다 주님의 이름이 언급될수밖에 없는 은헤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신앙생활 하면서 말로는 부흥을 구하고 변화를 구하고 하나님의 교화와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의가 우리 속에 깊이 쌓여서 더 이상 우리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뢰하고 바라보면서 그 긍휼을 의지 하면서 나아가는 절대 의존적인 신앙이 더 이상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있는 우리의 의로 말미암아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봄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어리석음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에 부흥은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그리고 늘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 하면서도 역시 하나님이 이 위대한 일들을 아루시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실때에 이런 변화가 있을것이라는 것이예요 . 그래서 참된 희망은 나의 선한 상태나 변화된 상태를 보고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정말 소망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 넘어에계신거룩한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이시고 역사해 주시리라는 이런 간절한 소망속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1. 들어주소서 (단9:19)
우선 이 19절로써 다니엘이 9장에서 경험하였던 영적 각성과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가 일단락 됩니다. 그런데 우린 이 19절에서 바로 이러한 부흥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의 장엄한 클라이막스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19절에서 특별히 앞에 18절 19절을 물론이거니와 특별히 이 19절에서 다니엘이 기도하는 모습을 묵상해보기를 제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냥 읽어나가지 마시고 이런 부분에서는 깊이 생각을 해보세요. 그리고 다니엘이 기도한 이 내용들이 우리의 기도가 되도록 하나님 앞에 그렇게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모든 생각들을 이 진리의 말씀에 깊이 젖어들어가도록 그렇게 한번 만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다니엘은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그렇게 별로 논리적이지도 않는 말로 그저 생각나는대로 자신의 마음에 부딪치는 순서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럿이 바로 들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주여 들어주소서 또 주여 들어주소서라고 두번 반복해서 하나님 앞에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뿐만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들으시는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은 범사에 듣기를 사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요.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두루 살피시면서 전심으로 자기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기도다운 기도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들어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직감적으로 이 19절에서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들어달라고 혼신의 힘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을 때에 이미 이 다니엘은 평소에 기도하였었던 그 도를 넘어섰습니다. 기도가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영적인 교통의 정도가 매우 특별한 때가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그러나 기도 자체가 하나님께로 부터 깊이 빨려들어가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강한 추진력에 의해서 자신의 영혼의 모든 무게를 실은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을 위해서 우리가 예루살렘과 그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 기도하오니 들어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소서 할 때에 다니엘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한 것은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이였어요. 하나님깨서 들어주시는 것이야말로 다니엘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하고 급한 문제였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주에도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이 들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간구할 때 들으실 수 있께끔 그렇게 분명하게 기도를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들어달라고 간절히 애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 모든 기도가 다 하나님께 들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간절히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먼저 우리의 기도가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먼저는 우리 자신의 시선과 삶이 하나님께로 모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않고 우리의 기도가 능력있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교회를 하면서 이 봄을 94,95,96년 3번에 맞고 있는데, 근데 지난 두해 동안의 봄은 교회로서는 썩 좋지않았어요. 다시말해서 신앙적인 침체가 봄에 상당히 많이 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왜그럴까?하고 생각을 했지요. 그것은 대개 사람들의 마음이 봄이면, 나른해지고, 개을러지기 쉽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봄의 유혹도, 놀러가는 유혹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평생 성도들이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우리의 몸이 교회 나오고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부르면서 사는 이것은 우리 죽는 날까지 계속 될 것이예요. 그렇죠? 이 중에는 교회를 박차고 나가서 하나님을 향하여 세상에 나가 안녕을 고할 사람이 우리 중에는 많지 않습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끈임없이 분산되려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들을 하나님 앞에 모으면서 그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려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1500년 전에 제가 존경하는 유명한 크리소스톰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단한 사람이였습니다. 우선 그의 이름 자체가 황금의 입이 였습니까? 얼마나 뛰어난 웅변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수있지요. 그런데 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설교했던 설교문들을 읽어보면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설교를 해서 로마의 귀족들을 쩔쩔매게 할 정도로 탁월한 설교사역을 하던 사람이였는데, 그의 설교문 중에 뭐가 나오냐 하면은 주일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주 엄중하게 경고하는 그런 메세지가 쏟아져 나와요. “여러분들은 어찌하여, 주일이 되었는데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데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 당시에 제일 흥미있는 경기는 마차경기였는 데 이 마차 경기가 큰 게임이 있으면 집단적으로 교회에 나오지 않고 그 마차 경기를 보러가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아주 심하게 공박하면서 주일을 지키지 않는 그 백성들의 타락한 신앙생활에 대해서 질책하는 장면들을 읽어보았는데, 무슨 생각이 들엇냐 하면 그 때나 이 때나 사람들은 거의 똑같아요. 그때는 마차경기를 보느라고 주일을 지키지 않았지만 오늘날은 야유회가고 놀러가느라고 주일을 지키지 않고, 이유와 구실이 틀릴뿐이지 사람들의 삶은 변하지 않았구나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의 부흥을 위한 기도가 허공 중에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져서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이 땅의 부흥을 보기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구하는 기도가 삶아가는 모습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같이 동일한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하고나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그 기도와 부합하는 삶인지를 깊이 돌아보면서 너 나 할 것 없이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그 기도를 능가하는 삶을 살 때에 그 기도가 위로부터 내리는 특별한 능력을 힘입어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을 아울러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다니엘이 주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들으소서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다니엘은 일찌기 하나님 앞에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였지만은 그러나 이 다니엘은 이 기도를 하는 그 순간에 자신의 모든 삶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분명하게 박혀있었어요. 그 소원도 하나로 분명했어요. 그것은 이제 포로로 끌려온지 67년이 지났고, 이제 3년만 지나면 회복의 때가 오는 데 하나님 어떻게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역사를 움직여 가실 것이옵나이까? 정말 주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당신이 당신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택하신 이유와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바꾸어주시고 변화시켜주소서 하는 간절한 사모함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다니엘은 들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애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설교든 기도든 우리의 생활이든 중요한 것은 양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질인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우리의 많은 기도들이 하나님께로 올라가기도 전에 허공 중에 산산이 흩어져 버리는 이러한 좌절들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서 자기가 이 9장에서 하나님 앞에 올리고 있는 이 기도들이 온전히 이 땅에서 성취되기를 ,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절박한 갈망이 이 다니엘에게는 있었어요. 그는 단순히 하나님 앞에 들어달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이 땅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는 그런 부흥을 달라고 단지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온 몸과 삶으로 그렇게 거룩한 부흥을 갈망하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찢기고 상처나서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회복의 때가 언제인지 기약도 없이 살아온 수많은 날들동안에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향해 베푸셨던 징계를 거두시고 이제는 회복과 소망의 때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으로 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와 함께 이러한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귀 담아서 그 기도를 들어주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살람이 얼마나 있는 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깨서는 이 다니엘의 기도를 보면서 주목해줄만한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다니엘의 모든 삶들이 기도와 하나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은 녹고 있었습니다. 그의 심지는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심령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과 그 역사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내고 그의 영광을 인하여 온 백성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다스리시는 통치의 장엄함 앞에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가하는 것을 알게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이 다니엘의 마음은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끌수 없는 간절한 소망의 불이 다니엘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를 돌아보아도 다니엘의 이 기도를 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그러나 사람을 통해서도 채워질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먹고, 입고, 사는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필요들이 사람을 통해서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고 포로가 된 가운데 비참하게 기약도 없는 삶을 살아온 이 억눌린 백성들이 변화를 받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들어내는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것은 결코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손이 그 백성들에게 나타나서 그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시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다니엘은 이렇게 몸부림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포로의 때가 3년이 남았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여러분이 아시는 것과 같이 포로로 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독립과 나라를 만들어 가지고 돌아온 것은 아니였습니다. 이민족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감동과 감화를 받은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서 부분적으로 이스라엘의 일부가 고토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게 허락해 주는 혜택을 입었을 뿐인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앞에 펼쳐진 수많은 민족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하는 분명한 그림이 이 다니엘의 마음 속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눈을 뜨고 나면 두가지가 깊이 다니엘을 절망시켰습니다. 한가지는 날이 갈수록 더욱 포악해지는 이민족의 지배와 그 속에서 복종하지 아니하면 않될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삶이였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으며 이민족으로부터 아픔을 받고, 고통으로 가득찬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단단해지고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한 심령이 다니엘을 깊이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며칠전에 제가 아주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교수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최근까지 목회를 하셨는데 교수로써 40일 금식기도를 했으니 참 대단하죠. 근데 처음서부터 마지막까지 2시간반 3시간 가까이 되는 제 강의를 경청하시고 그리고 이제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본인 이야기도 그거예요. 목회를 하면서 제일 비참한 일들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거예요. 아!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변하지 않나. 그렇게 않 변하더래요. 설교를 끌어오르는 마음으로 하고 내려오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목사님 설교할 때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왜 좋은 말 내버려 두시고 화를 내세요. 그러면서 좌절이 되는 거예요. 내가 살아서 뭐하나, 그런 느낌이 들정도로 좌절하는 거예요. 칼빈의 설교를 읽어 보니까? 대 칼빈도 동일한 얘기를 해요. 여러분 우리 가운데는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변화도 하나님께로부터 않 받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니엘이 지금 그것을 보며 깊이 절망하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은 이 정도로 하나님께서 각성을 주셔서 그 민족이 진정으로 살아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친 백성으로의 모습을 회복하는 이 길이 하나님의 손이 그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 주시는 것이 부흥이라는 사실을 이 사람들은 백성들이 그렇게 고개를 돌리고, 이 다니엘을 절망시켜도 이 다니엘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였어요. 숙명처럼 그렇게 외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애끓는 탄원을 하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이런 사람으로 운명지어진 것이예요. 하나님께서 오늘 이 다니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거예요. 주여! 들으소서, 들으소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어요. 70년 가까운 역사가 흐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다 신앙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살아왔지만, 그러나 그 백성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로 하여금 다윗왕 때의 그 거룩한 이스라엘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고 다시 그 본토로 돌아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부흥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러나 그 모든 기도는 응답되지 않고, 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67년이라고 하는 비참한 포로의 어둠속을 지내오면서 하나님의 계시조차 없는 캄캄한 어두운 시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이 다니엘은 눈을 뜨고 밖을 보면 하나도 소망이 없는 데, 응답되어질 가망이 전혀 없는 데 67년동안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은 이 기도를 다니엘은 마치 처음하는 기도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들어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을 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사실을 보여 주어서, 그것을 깨닫게 하실 때에 깊은 변화와 깨달음을 가진 사람들은 각기 그 숙명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매여서 사는 것이예요. 여러분 호세아가 나타나서 눈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애원하듯이 흐느끼며 예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호세아의 말을 들었읍니까? 아모스가 나타나서 피를 토하듯이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을 가는 칼날의 소리를 들려 주었지만 누가 그 설교를 듣고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절박하고 애절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전했지만 누가 그 설교를 들었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들은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던 없든 숙명처럼 그것을 외치며 살 수 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들이였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된 것이예요. 모든 선지자들이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으로 설교하고 주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의 심대한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증거할 때 많은 선지자들은 오히려 그 말씀이 온전히 그들 가운데 이루어지는 그런 광경을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그 말씀 증거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돌로 침을 당하고 톱으로 켬을 당하는 비참한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끊임없이 진리의 말씀을 외쳤던 이유는 무엇이예요? 이거는 단순한 충성심이 아니라 그렇게 전하지 않을 수 없도록 숙명처럼 묶여 버린 것입니다. 오늘 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들어달라고 간절히 애원하고 있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런 광경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데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누가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을 들어주십니까? 오늘 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들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하는 바를 마땅하다는 절박하고 간절한 소원에 그 마음과 기도가 하나가 되어서 이 다니엘의 영혼 속에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수문이 열린 것 같은 쏟아나온 그 기도가 하나님을 향해 쏟아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하고 강한 영력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되기까지 다니엘은 9장을 보십시요 계속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께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끝난 거예요. 자, 영적으로 아주 끊임없이 우리가 변화되고 그리고 영적으로 끊임없이 새로와지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해서 우리의 죄악을 씻어내고 그리고 죄를 미워하고 악한 삶에서 변화되어진 삶을 살기를 갈망하는 최종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예요. 그것이예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 그사람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삶과 어떻게 다를까요? 주님, 오시오솝서 하면 오시는 거예요. 주여, 이 땅이 마른 땅이옵나이다 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수많은 사람이 기도해도 내리지 않던 그 비가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던 한 사람 엘리야가 기도할 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이예요. 우리가 하나님께로 부터 한없는 은혜를 입고 영적으로 정말 지나칠 정도의 사람이 된다하더라도 역시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한다든지,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의 변화를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 입어서 이 땅에 변화가 오게 하는 도구로 쓰여지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중심이예요. 바로 그것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동행해 주셔서, 당신과의 임마누엘을 보여 주시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는 삶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우리가 다시말해서 우리를 쳐 복종시키고, 약속을 의지하며 살고,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뭐라고 그러셨어요.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행하던 것을 저도 행할 것이요, 내가 한 일 보다 더 큰 일을 너희가 행할 수 있으리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사도들의 행한 기록들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같은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예요. 왜? 그것이 주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그 성령으로 하여금 하시게 하신 그 일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시려하는 그 일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 들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은 들으시고, 우리도 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 기도를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있게 하나님을 향해 주여 들으시옵소서, 응답하옵소서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는 것이예요. 여러분 그 사람의 삶 자체가 그 사람이 걸어가는 그 길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데 거기서 그가 부르짖을 수 없을 뿐만아니라 그 길 자체를 하나님이 않 기뻐하시는 데 거기서 나를 들어달라고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게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삶이 우리의 인생에 대의가 하나님께 인정 받는 대의가 되어야 하는 것이예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 길, 그리고 내가 마음을 다해서 성위하고자 하는 이 목표, 없는 사람들은 그건 뭔가 많이 잘못 된 것이예요. 왜 살아요? 물을 때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 무엇과도 대치할 수 없는 인생의 소망과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말할 수 있는 사람이예요. 생이 무목적해지고 나면 죽음과 절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시는 삶을 온전히 살아갈 때,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돠 간구에 소원하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오늘 이 다니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대한 회복과 신약의 장엄한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를 거룩한 계시들을 이 선지자에게 끊임없이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랜동안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준비되어온 한 사람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들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과 같아졌고, 그가 부르짖는 바는 하나님이 바라라고 원하시는 바와 꼭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살아가는 삶을 인정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시대의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렇개 때문에 삶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그 기도의 제목들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20,21절을 지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들으시는 영광스러운 응답의 하나님으로 다니엘의 기도실에 찾아오시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들어달라고 간절히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간절히 들어달라고 기도하는 그 사이에 삽입구처럼 튀어들어오는 하나님을 향한 또 하나의 간구가 있는데 바로 용서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12. 용서하소서, 행하소서 (단9:19下)
지난 시간에는 19절을 읽고, 들으소서, 용서하소서, 들으소서 이 말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19절 하반부를 말씀드림으로써 오늘로써 다니엘 9장의 시리즈를 마감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들어주소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뭔가 떠나시거나 하나님께서 않듣고 계시거나 하나님께서 보지않고 계시거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각성하게 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기록될 때에 하나의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기도 하고 사람의 관점에서 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것을 기록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뭔가를 행하신 다음에 “내가 왜 이런 일을 했지, 이것참 하나님인 나로써 이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였다.”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불안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시거나 당신이 행하신 일을 돌이키지 못해서 섭섭해 하시는 분이 안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속에는 때때로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그 일을 후회하시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땅위에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하는 성경의 묘사가 노아의 홍수를 앞두고 성경에 나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한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시지 않는다고 하시다가 22장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렇게 묘사가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혼동하기 쉬운 성경의 묘사들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래서 어느 분이 아주 재미있는 예를 들었어요, 예전에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우리 내일 여기에서 만나자 언제 만날까? 해가 질때 만나자, 그렇지 않으면 언제쯤 다시 올까요? 해가 뜰 때 다시 오라. 사실 해는 뜨거나 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해가 어느 쪽에서 떠서 어느 쪽으로 지죠? 동에서 떠서 서로 지죠. 그러나 사실 과학자들이 들으면 질겁할 얘기죠. 해가 떠요? 뜨지 않아요. 마치 해가 동으로 떠서 서로 진다는 얘기는 제가 우리 김준성 전도사님을 보고서 스스로 돌면서 전도사님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네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을 아무 무리없이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하면 그것을 보면서 그것이 과학적이니 그렇지않니 하는 얘기는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인간의 경험 속에서 우리들이 그렇게 이해해 왔기 때문에 지구가 해가 떠서 돌고 있다 그러면 거짓말 하지마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한거야 하면 그러면 우리는 똑똑하다고 말하지 않고 잘났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구가 자전한다는 얘기는 본질적인 묘사예요, 해가 뜬다고 하는 묘사는 현상적인 묘사예요. 그러니까 성경 속에 그런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깨소서 하나님이여 들으소서. 하나님이 듣지 못하고 계시거나 우리를 주의 깊게 지켜 보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주의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서 각성하는 장면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민하게 깨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해서도 그렇게 동일하게 예민하신 것을 느끼고 뿐만아니라 그렇게 예민하셔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둔감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이나 생각을 예민하게 깊이 통찰하셔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깊은 마음의 속사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길 원하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오고가는 영적이고 동시에 또 인격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들으소서”하는 것도 이런 것이죠. 그래서 부흥이 일어날 때 가장 놀라운 특징 중에 하나는 뭐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예요. 뿐만아니라 죄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둔감한 감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서 거의 기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그런 부흥을 경험하던 시대의 사람들은 그 부흥 아래 놓여 있는 개인들은 죄에 대한 아주 탁월한 감각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늘 성경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들으소서. 들으소서하는 그 사이에 용서하소서하는 것이 나온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단어의 배열 하나 가지고 뭔가 의미를 찾는 다는 것이 말장난 처럼 느껴질 줄 모르지만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용서하소서가 지금 이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다니엘이 그런 하나님에 대한 탁월하고 예민한 감각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다니엘의 마음 속에 와닿게 된 것은 죄의 문제예요. 그러니까 이 죄에 문제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지긋지긋하게 싸워야 할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때는 성령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보다 죄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 더 빨리 성령을 체험하게 하는 지름길일 수도 있어요.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역시 성령을 구하는 것 보다는 죄에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우리 나라에 상당히 영향을 미쳤던 로보트 슐러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한국에 오셔서 교회 성장학 강의를 하시는 가운데 목회자들을 모셔 놓고 이런 특강을 했습니다. 여러분 죄의 문제에 대해서 많이 늘고 늘어지지 마십시요. 죄 보다는 은혜에 대해서 말하십시요. 그렇게 하면서 인제 세미나를 풀어 왔어요. 그런데 그러한 그분의 주장에 관한 한은 반기독교적이고 비복음적이고 반십자가적인 메세지예요. 그래서 이 죄의 문제에 관한 것 만큼 인간이 평생을 두고 씨름해야 할 문제는 없어요. 그 한 증거 중의 하나가 디.엘.무디가 성령의 필요를 간절히 ㅈ느끼면서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도록 6개월 이상 동안을 하나님 앞에 쉬지 않고 기도하죠. 그러나 그가 정말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 것 같은 그런 세기적인 전도자가 되기 위한 성령의 충만한 부으심을 경험한 것은 성령 부어주심을 기도하던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기도제목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를 보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그 기도를 드리고 난 후에 그가 월스트리트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부흥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죄에 대한 기본적인 고찰고 죄에 대한 진지한 탐구 없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실 어떤 은혜와 능력만을 기다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다니엘이 들어주소서 들어주소서하는 이야기는 단지 상징적인 말의 반복이 아닙니다. 여러분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있는 팔이 애굽에 한복판에 나타나서 피,개구리,이,악질,독종,우박,메뚜기 놀라운 열대 재앙으로 애굽을 초토화시키시고 사랑의 하나님이 애굽에 있는 모든 생물 가운데 동물과 사람을 포함해서 처음 난 것들을 모두 쳐 죽이시는 재앙을 일으키시기 까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신적인 행동의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백성을 권념하셨더라. 여기서 들어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청취해 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을 기울여서 행동을 동반하려고 하는 그 의지를 가지고 귀를 기울여 달라고 그렇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적이기 보다는 이 표현이 매우 동양적이예요. 예를 들자면 목사님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 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부탁이 무엇인지 청취해 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그것에 따르는 행함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똑같이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들어주시옵소서. 그렇게 민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길게 기도한 다음에 또 들어달라는 기도를 하는 그 사이에서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나타난 것입니까? 민족적인 죄가 다니엘의 마음 속에 그림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3년 남짓하게 남아있는 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이 다니엘을 각성시키고 다니엘이 이처럼 혼신의 힘으로 나라와 민족의 변화와 부흥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 앞에 다니엘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셨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셨던 그 놀라운 일 다시한번 물붓듯 부어주시고 일으켜 주시는 것이였습니다. 이 일을 위해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들어달라고 애원하면서 즉시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민족을 위한 자기의 기도를 제목을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기 위해 역사하시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이따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향한 끊임없는 명령은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더하면 거룩해 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한고 있는 어떠한 일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없어요. 거룩해지는 방법은 간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거룩하지 않은 것들을 빼어 버리고 나면은 거룩해 지는 것이죠. 이런 소극적인 개념을 우리들이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논하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죄에 대한 민감하신 성령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때에는 죄에 대해서 교회만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때에는 하나님의 축복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도 아주 뚜렷하고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보더라도 성령을 속이고 땅을 팔아서 감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잠시 잠깐 사이에 두 사람이 차례로 시체가 되여서 실려가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부흥이 역사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선교보고를 보면서 마치 사도행전을 읽는 것처럼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뭐냐하면 핍박이 심할 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발견을 하고 밀고를 했어요. 그래서 중공 경찰이 그 사람들을 잡아가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었는 데 이 사람들이 골목을 도망가면서 하나님 살려주시옵소서 막 기도하면서 사람들이 골목으로 도망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참 뛰었는 데 경찰이 달려오지 않아요. 뒤를 돌아보니까 두 사람이 제복을 입고 쫓아왔는 데 마치 동상에 걸린 것 처럼 굳어진 것이예요. 만화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연출된 거예요. 우리는 그런 것들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어떠케해서 일어났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흥의 때에 죄에 대한 놀라운 용서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심판에 대한 분명한 확증들을 또한 주십니다. 부흥의 깊이 눈 뜨게 된 다니엘은 역사적인 전망 속에서 죄의 역할에 대해서 깊이 눈뜨게 된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는 다니엘의 기도를 보면서 우리는 이상한 느낌을 받아요. 그중에 하나는,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죄를 용서해 달라는 선지자들의 기도는 매우 포괄적이예요. 여기서도 무엇을 용서해 달라는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없고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원하고 있습니다. 어떤의미에서 그 사람의 영이 깨어 있고, 부흥을 깊이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다니엘과 같이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해서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야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죄에 대한 그림은 하나하나 머리 속에 생각나서 떠오르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림과 같이 단번에 떠올랐던 것입니다. 뭐냐하면 하나하나 짙어서 묘사할 수 없는 이 세대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그림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것이예요. 그리고 비디오와 같이 떠오른 그 죄악을 하나하나 들지 못하면서도 충분히 그것을 온 마음으로 느끼며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에스라에서도 발견 됩니다. 에스라가 주로 통곡하며 기도했던 가장 커다란 죄, 그가 기도한 후 민족적인 개혁을 시도할 때 부터 그가 기도하면서 도고하지 않으면 않되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잡혼이였습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인이 섞여서 사는 비율법적인 잘못된 잡혼이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이스라엘은 모든 문제에서 깨끗하고 잡혼만 문제가 되었겠습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매우 유기적입니다. 그래서 어느 사회의 어느 한부분이나 죄에 있어서 어떤 한부분만이 문제가 되고 철저하게 줄그러져서 그 한가지만 죄의 꽃 피고 나머지는 정결한 그런 사회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타락하면 전반적으로 죄가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죠. 우리 속에 신앙이 들어오게 되면 교회 생활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직장, 가정, 언어생활, 생각과 우리의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독서까지도 바뀝니다. 예)마약보다 무서운 무협지.
이와같이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예요. 사람이 삶이 신통치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통치 않은 것이예요. 신앙 따로 있고 삶 따로 있고 그럴 수 없다는 것이예요. 그런 모든 관계들이 있기 때문에 이 다니엘이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예요. 이거는 어떤 죄냐 다니엘이 물론 다 말할 수 있지만 주여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 그것은 포괄하는 모든 죄에요. 한두가지 죄가 아니라 그 죄가 얽히고 섥혀서 모든 영향을 그림과 같이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성전 문앞에 엎드려서 이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있을 때 그것은 잡혼의 죄만이 아니예요. 율법을 어긴 그 모든 잘못들을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고 있는 것이예요. 이스라엘은 구석구석 다 썩게 되었어요. 이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부흥의 때에는 죄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깊이 씨름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역시 부흥을 경험했던 사람이였습니다. 잘못된 기독교 신앙이 온 땅에 팽배한 때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때는 카톨릭의 잘못된 성경해석 때문에 거기에 사람들이 갇혀 있어서 하나님의 참된 부흥을 볼 수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구교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유사한 어려움 속에 처해져 있습니다. 예)안식년을 맞은 한 목사님 한국 교회의 성장 소식을 듣고 50교회를 돌아본 후 2교회만 복음을 전하고 있더라고 말함. 결국 그것은 루터 시대에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가 사람을 미혹했듯이 오늘에도 잘못된 복음의 해석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루터도 커다란 부흥을 경험하면서 종교개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 때 그의 가장 커다란 고민의 문제는 무엇이었냐하면 죄의 문제였어요. 실은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하면 않되였거든요. 당시에 가장 중요한 것인 은총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야 됩어요. 어거스틴 이후에 신학의 커다란 주제는 은총에 관한 주제 였거든요. 하나님의 은총, 당시의 카톨릭의 주요 주제인 교회의 권서, 그런 것을 고민했어야 했는 데 이 사람은 전혀 엉뚱하게 죄에 관해 고민했던 것이예요. 그래서 원장에게 수도생활 가운데 물었어요. 원장님 제가 어떻해야 구원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까? 너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라. 금식하고 돌계단을 걷고 고행을 하는 것이예요. 금식을 하고 돌계단을 올라 무릎이 다 깨지고, 그리고 수척한 얼굴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그림을 보면 알지만 루터는 매우 건장한 사람이였으나 죽을 것 같은 고행으로 수척해짐.) 구원 받은 것 같은 거예요. 근데 밥을 먹고 다시 편하게 쉬고 나면 구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속에서 하나님이 도저히 받으 실 수 없는 죄의 열매들이 돗버섯처럼 자라기 시작하는 거예요. 다시 금식하는 거예요. 점점 더 심해지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원장이 공포를 했어요. 루터는 이제 금식을 할 수 없다 그래가지고는 결과로 수도원에서 쫓아내버리고 말았어요. 대학으로 보내 버렸어요. 선생노릇하면 좀 나아질거다. 근데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문제가 이 죄에 관한 문제예요. 그러니까 루터가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은 강의를 하게 되니까, 로마서, 갈라디아서, 학박국,시편 이런 것들을 강의하게 되니까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게 되는 거예요. 그 순간에 그가 무엇을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되냐하면 자기의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이 죄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예요. 그 죄의 해결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예요. 그러면서 그가 고백하는 말이, 어느 한 순간에 하늘이 찢어지면 먹구름을 헤치고 진리의 빛이 내 영혼 속에 흘러 들어왔다 내 영혼은 천국의 환희로 가슴 벅차게 되었다. 그리고는 성경이 모두 다시 보이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가 그러고 나서는 엄청난 양의 설교와 저서를 토해내게 되는 거예요. 그가 기록한 모든 책들이 평범한 필사자가 끊임없이 베껴쓰는 데만 25년이 걸린다고 하니까 그가 남겨놓은 저작이 얼마나 방대한 가 알 수 있죠. 제게 있는 루터 전작이 완전한 전작인지는 모르겠는 데 40권이 넘는 거예요. 그것도 일찍 죽으면서 그랬거든요. 결국은 죄의 문제예요. 죄의 문제가 깊이 씨름해야할 문제예요. 그런데 오늘날은 죄에 대해 쭉 이야기를 하면 비록 당신이요라고 정죄하면서 설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매우 지루해해요. 근데 사실은 지루할 정도로 죄에 대해서 깊이 깊이 공부해야 되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그런 방면에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니엘이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하나의 기도가 무엇이냐 하면 행하소서라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탄원입니다. 부흥이 무엇이냐고 할 때 로이드 죤즈는 하나님이 지나가는 것이 부흥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 다니엘의 표현을 빌어서 부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이 뭔가 당신 자신을 위해서 큰 일을 이례적으로 그 백성들 가운데 행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행할 때 그 존재는 이전에 없는 새로운 존재로 보이는 것이예요. 하나님께서 왜 이 시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담대하게 죄를 짓고 하나님의 율법을 교통법규만도 못하게 살아가는 그 이유가 무엇이예요. 만약에 이 시대에 서울 상공에 비록 시내에서는 아닐찌라도 신령한 구름이 빽빽히 일어나고 불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이 들려오면 사람들이 아마 성경을 읽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할 거예요. 율법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해 아마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거예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사람들은 방종하게 살아가요.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시고 지나가실 때는 사람들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예요. 하나님이 이제가지는 하늘에 고요히 계시던 하나님이였는데,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가만히 계시던 하나님이였는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교회에 내려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행동하시는 거예요. 어떤 사람을 뜨겁게 끌어 안아주셔서, 으스러지도록 안으셔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도록 감격스럽게 만들어 주시기도 하시고 어떤 사람들을 책망해서 그가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새 사람되도록 만들어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강하게 붙잡으셔서 진리의 말씀을 폭포수 처럼 쏟아놓게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만히 계시던 하나님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신앙의 기류가 교회 속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잖아요. 예)순진한 남편 형제와 교사생활에 찌들려 찌들려 늘 가르치려는 아내와의 사이에 한번은 남편이 운동화로 아내를 가두고 실신할 정도로 때린 후(남편의 행하시는 남편임을 보인 후) 가정의 질서가 잡힌 예화.
인식이 달라지는 일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일어나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행하심을 맛본 사람들은 분명히 설교가 틀려요. 정말 틀려요. 나는 오늘도 아침서부터 그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그러면은 설교하는 사람만 틀렸냐하면, 아니예요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틀렸어요. 그래서 제가 마음 속에 오늘날 시대에 그런 위대한 부흥을 본 사람들이 와서 설교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2가지 일이 일어날 거예요. 어떤 사람은 그 설교를 들으며 엄청난 은혜를 받으며 갑자기 자기에게 설교를 해 주었던 수많은 목사들이 난장이처럼 보이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또 한쪽에서는 도저히 그 설교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그룹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그런 높은 수준의 설교를 하면서도 그 설교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영적인 수준을 가진 성도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통하여 그런 놀라운 하나님에대한 인식을 가질 수가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부흥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하심이예요. 누가보더라도 저것은 하나님이 행하고 계시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질 수 있는 그런 행하심이 하나님의 교회에 세상에 신자들의 마음에 불신자들의 심령 속에 동시적으로 일어난 것이예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노랍게 변화받고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나타날 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고 하는 완전한 혁격한 증거들이 매우 분명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예요. 그렇게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사람들의 삶이 바뀌고 그리고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뿐만아니라 다니엘은 지금 놓여 있는 자기의 상황 지금 이제 3년 밖에 놓여 있지 않았어요. 3년 후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부터 고토로 돌아가게 하신 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니까 지켜질 것이예요. 그러나 다니엘에게는 근심이 있었어요. 왜? 돌아가면 뭘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그 고토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면, 하나님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심어놓으신 자리로 돌아가게 하신 다는 것이거든요. 어떤 의미가 있느냐하면 결국은 그 고토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는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든지 않이루어졌든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돌아간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 땅을 주셨을 때 기대하셨던 그 역할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보여 주는 그 역할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한다는 것이였어요. 문제는 뭐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토로 돌아가서 거기 땅이나 갖을려고 집이나 짓고 전토나 찾을려는 사람들이 돌아가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다니엘은 알고 있었던 것이예요. 어떤 의미에서 다니엘은 3년 밖에 남짓 않았다는 사실을 예레미야의 서책에서 발견하고 큰 기쁨을 느낀게 아니라 커다란 위기 의식을 느낀 것이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복역하는 그 가운데서 회복시키시는 일이 3년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동안에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과연 이 민족이 돌아갈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예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예요. 통일에 대한 준비는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예요. 통일되고 나면 백두산에 콘도 짓고 금강산에 캬바레 세우고 그리고 대동강과 백두산 천지에 쓰레기 봉지 널리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어요. 그리고 나가지고는 법적인 제도 장치가 마련되겠지만 그러나 사람들 쫓아올라가지고서 자기 땅, 자기 집, 이북에 두고 온 것 찾으려는 사람 투성이 아니겠어요? 진정한 변혁이 아니예요. 다니엘은 그런 면에서 9장에서의 각성을 통해서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갈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예요.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 보고 뭘 해달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이 백성들이 고토로 돌아갈 그 약속이 도래하였을 때에 우리가 그 고토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빛을 발할 수 있는 그런 백성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은 행하시옵소서.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니고는 않되는 것입니다. 종종 역사 속에서 우리는 싸움을 그런 용감한 장수들과 그리고 그 뒤를 따랐던 병사들의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알프스를 넘는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때, 그들은 넘고 있었습니다. 점점 사람들은 이제 낙오하기 시작했고, 말들은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정상 가까이에 이르자 엄청난 추위가 그들을 몰아쳐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장수가 나아와서 그들의 마음 속에 불을 질렀습니다. 힘내라, 이겨라 이 산만 넘으면 술과 여자들이 모두 너희들의 것이다. 힘을 읽었던 병사들이 다시금 정복에 대한 욕망을, 그 야욕을 스스로 불러일으키면서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이 세상의 욕망은 그런 식으로 불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욕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이 커져버린 욕망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니면 불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목회를 하며 이 사실을 철저하게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을 바꿀 수 있어요. 한때는 앞자리에 앉아서 뜨겁게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어느날 차갑게 변하여서 교회를 않나오는 일들이 있습니다. 누가 그를 돌려 놓을 수 있겠습니까? 찾아가서 우리 사이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간절히 얘기해도 않되는 것입니다. 전도사님이 그러데요. 중등부를 담당하면서 1학년 까지는 하기가 쉽데요. 1학년 때 교회 않나오면 무조건 쫓아가서 햄버거 집에 데려가서 잔뜸 먹인 다음에 내일 교회 나와라 그러면 얘, 그런다는 거예요. 않나오면 선물을 한보따리 사가지고 가서 내일 꼭 나와라, 그러면 나온다는 거예요. 근데 그게 이상하게 2학년 되면서 부터는 않되더라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의 마음을 정말 신령한 신앙의 세계로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것이예요. 이점에 있어서 정말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 제가 또 하나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움직이는가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에 너의 중에 믿는 자를 몇이나 보겠느냐하는 비관적인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되요. 사람들은 견고하지 않아요. 한때 감격했으나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요. 회복은 피나는 투쟁을 통해 회복을 얻었는 데, 물러가는 것은 미끄럼 타듯이 손쉽게 내려가요. 다시 돌아올려면 피눈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할텐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의 가치를 너무나 하잖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돌아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만이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절박하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누가 67년동안이나 끌려와서 살아온, 재산을 늘리고, 소유를 불렸던 그렇게 안락한 생활을 나름대로 터를 잡고 하다가 누가 가겠느냐 이 얘기예요. 고토에 가면은 이방인들의 핍박 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어요. 자기돈 내서 성을 건축하고 성전을 지어야 되요. 누가 촟아 가겠느냐 하는 거죠. 그러니까 다니엘은 행하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행해주시는 이 일을 우리는 부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행하시고 사람들의 회심을 위해서 행하시는 하나님, 사람들의 마음을 견고토록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행하심 이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의 행하심을 목격하면서 생활해 나가야 해요. 매일 살아가는 삶이 간증을 쌓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예요. 그럭저럭 견디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서는 않되는 것입니다. 매일 간증을 쌓으며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행하심은 무엇이였습니까? 여러분들이 지체들 속에 하나님의 행하심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우리가 그 하나님의 행하심을 들을 때 새로운 소망과 용기를 갖게 됩니다. 백성답게 살아가야 할 당연한 의무를 우리 마음 속에 새기게 되는 일도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면서 알게 되고 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이렇게 하나님이 행해달라고 하는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그 영혼들 가운데 행하시면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가장 완악해 보이는 사람도 그 가슴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경험하게 되면 정말 새 사람이 되여서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찬송하는 경이로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신학교 시절의 같이 수학하던 살인범 예화.
하나님의 행하심이 교회 가운데 나타나게 될 때 사람들은 잊혀졌던 문제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예요. 그래서 이렇게 나오죠.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해서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하나님 앞에 이제 무엇을 구하고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행해 주옵소서. 이 다니엘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끔 만들었던 것은 포로로 끌려 왔다거나 아니면 아직도 3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계시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니엘의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해서 받으시는 하나님의 치욕, 하나님의 이름의 멸시가 이제는 종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시고 이 백성과 주님의 이름이 하나가 되어 있으니 그래서 이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변화시켜 주시지 않으면 않됩니다라고 간절히 호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에 있어서 특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인식을 부흥의 시기에 동시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일들이였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깊이 느낀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윤리는 무엇인가 하면 이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그리고 옳은 것이라면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 이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거리였고, 최대의 문제 거리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일은 부흥의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우리의 인생의 있어서 우리가 인생을 바라보고 신앙 생활을 바라보는 시야를 이렇게 하나님 앞에 새롭게 가져야 할 것을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적인 침체로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의 궁핍이나, 또 환경의 위협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매우 많은 아픔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상당수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아픔을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 매우 민감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징계를 받거나 아픔을 당할 때 하나님이 당하시고 계시는 아픔과 고통을 헤아리게 될 때에 자신이 당하고 있는 아픔 같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자식이 잘못해서 때를 때에 이 자녀는 맞으면서 비로소 고통을 경험하게 되지만 몽둥이를 들기까지 부모의 마음 속에는 이미 오래전서부터 자녀들이 전혀 느끼지 못할 때 심한 고통을 느끼고 이 고통 끝에 매를 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픔 하나님의 고통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을 이 다니엘은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서 이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이처럼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행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다니엘에게 있어서 참된 기쁨은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말미암아 더이상 모욕거리가 되지않고 영광을 받는 것이기 때문인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위대한 기도를 위해서 지체치 말라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는 자신의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그 거룩한 이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다급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였습니다. 그것이 곧 자신의 일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을 바라보면서 살아야할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문제에 관해서는 언제나 다급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는 느리고 태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 부흥을 간절히 기도했던 이 사람은 70년 가까이 민족이 당연한 것으로 살아왔던 이 영적인 형편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으면 않되었던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다니엘 9장의 강해를 마치면서 저는 여러분 앞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부탁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은 지체될 수 없는 일이라는 다급한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이를 인하여 우리들이 자신의 문제를 위해서 다급해 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다급해 하며 기도하는 누군가 다니엘의 뒤를 따라가는 한두 사람이 나올 때 그들이 비록 소수와 같다 할 지라도 작은 서말의 누룩이 그 모든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그 소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서말의 밀가루가 되도록 힘쓰지 마시고 한줌의 누룩이 되도록 힘써서 그 거룩한 부흥이 교회를 뒤덥게 하는 데 그 부흥의 역사에 여러분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기록되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