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의 행복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7)
녹취자: 원수연
김일성 씨가 북한에서 늘 백성들에게 기억에 남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래도 김일성은 백성들을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김일성을 생각할 때마다 늘 떠오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소원이 있었는데 이밥에 소고기 국을 먹으며 기와집에 살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오늘 우리가 들으면 굉장히 썰렁한 이야기입니다. 밥이야 넘쳐나는 것이고 소고기는 몸에 해롭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와집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사실 여러분에게는 지금 그 얘기가 아주 낯설어 보이지만 우리 초등학교 때는 똑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이 6학년 때였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고 학교 창 밖에 볼록 튀어나온 창틀에 눈이 소복이 쌓였는데 내가 창가에 서 있으니까 어떤 친구가 와서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남준아, 저기 하얗게 쌓이는 눈이 쌀가루라면 얼마나 좋겠니?” 요즘 애들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대사를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소고기는 정말 부잣집에서나 먹는 것이었고, 우리나라는 전 세계 없이 돼지고기 값이 소고기 값의 삼분의 일도 안 됩니다. 호주에 갔을 때 사람들 만나면서 우리나라는 고기 값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고 하니까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정말 이상하다, 왜 그러냐, 똑같이 먹고 살 찌는 건데, 생산비가 똑같이 드는데 왜 그렇게 소고기가 더 비싸고 돼지고기가 싸냐?”
어쨌든 우리의 마음속에는 항상 소고기가, 여기 소고기란 말은 안 나오지만 고기가 부의 상징이었고 에너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국민적인 심리를 이용해서 대박을 터트린 게 있었는데 소고기 라면입니다. ‘라면.. 라면.. 라면..’ 그러고 나왔었습니다. 그 라면 공장이 우리 동네에 있었습니다. 삼양라면이.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라면이 처음 나왔는데 사람들이 환장하다시피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냐. 그런데 처음에는 이 라면을 쇼트닝에 튀겼습니다. 소기름에다가.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나쁜 거죠. 그런데 그 소기름에 튀긴 이유가 무엇이냐면 소기름에 튀기니까 소와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라면 부스러진 것을 사다가 그 라면을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탈지면을 하나 준비해 놓고 천천히 가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마어마한 양의 소기름이 나옵니다. 그것을 탈지면으로 빨아들여서 짜고, 짜고, 해가지고 기름은 기름대로 먹고 라면은 라면대로 볶아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소고기 라면이 나오면서 소고기라는 말에 사람들이 깊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먹으면 힘이 불끈 솟는다는 마음으로. 그러면서 소고기 국밥, 그건 원래 족보에 없는 것인데 그런 것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고기를 먹으며’ 라고 하는 것은 제유법입니다. 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기를 먹으면서 부유하게 사는 것, 그것과 대비되는 야채를 먹으면서 사는 것, 이것이 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뚜렷하게 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교를 하는 것이 야채를 먹으며 채소를 먹으며 화목하게 사는 것이 고기를 먹으며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 이유가 무엇이냐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람들과 공감을 하고 소통을 하면서 사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꿈을 갖는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꿈을 가지고 미래에 있을 어떤 놀라운 것들을 기대하면서 오늘을 삽니다. 이것은 인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즐거움이 저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잘 안되어서 못 이루어졌다고 치면 그렇게 살아온 많은 시간과 노력과 그런 삶들은 의미가 현저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위대하고 아주 비상한 일을 꿈꾸면서 거기에 행복의 기준을 두지 말고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반복되는 일상적이고 평상적인 삶 속에서 가치를 느끼고 의미를 느끼고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고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현실 세계 사이의 격차 속에서 만족하지 않고 분투하면서 사는 이것이 미래에 대한 전망이고 꿈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들이 사는 삶 속에 이미 침투해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의 복락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시련을 당하고 어려움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신자의 중요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치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커다란 하나의 불만족인 것처럼, 그리고 이 안에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면서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 두 가지를 함께 발견하게 됩니다. 가난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따라 기도하시는 예수님 속에서는 어떠한 이 생에 대한 만족이나 아니면 이 정도면 됐다 하는 자족감 같은 것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늘 거기에는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갈망이 있고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사시면서 불만으로만 가득 찬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무지한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아파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때문에 감사하시고 또 그들에게 당신을 계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고마워하셨습니다. 이런 삶을 우리들이 본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나 기쁨, 이런 것들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현대에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을 비참하게 죽이면서도 마음에 어떠한 정동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추한 것을 보면 싫다는 정동이 일어나야하고, 나의 표현으로는 추한 것을 보면 고형의 정동이 일어나야 하고 예쁜 것을 보면 애호의 정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비참한 것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뇌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공감하는 데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어디서 느끼냐 하면, 상담하면 진 빠지지 않습니까? 나의 경우에는 코드가 안 맞는 사람을 30분 상담하는 것보다 두 시간 설교하는 것이 훨씬 에너지가 덜 듭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심방하는 일이 굉장히 어려운 이유가 무엇이냐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것보다 앉아서 상담하는 것입니다. 코드가 잘 맞아서 목양이 잘 되는 상담을 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는 심방을 하고 나오면 에너지가 솟습니다. 그런데 코드가 안 맞을 때는 나오면서 머리가 터지는 것 같고 ‘저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에 하나님의 말씀은 안 들었고 이상한 것만 잔뜩 들어있는 저 인간을 어떻게 갈무리를 해야 하나’ 이럴 때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뺏어갑니다.
그러한 것들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기 때문에 일단 정신의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재생산될 수 있는 기능이 저하되게 되면 누구든지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시오패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지켜보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바늘 하나 차이입니다. 정신의 기능이 탈칵하고 망가져버리면 누구든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살인을 하고 끔찍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확실히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사회가 져야 될 책임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더 현대 사회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암시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다툼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야채를 먹는다고 모든 사람들이 화목한 것은 아닙니다. 소고기 먹으면 소처럼 싸우고 돼지고기 먹으면 돼지처럼 욕심 부립니까. 말고기 먹으면 말처럼 달리겠습니까. 아닙니다. 무엇을 보여 주냐면 여기에서는 ‘야채를 먹으며 화목하는 것이’ 이것은 야채 자체가 가난하다는 제유법인 동시에 욕망이 없는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욕망이 없는 삶을 살면 다툼의 이유가 현저히 적어지는데 욕망이 크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한국의 현대 정치사도 보면 김일성-박헌영 관계, 김구-이승만 관계, 이런 것들을 보면 엄청난 야망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난 것입니다. 평화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2인자가 되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박헌영씨가 북으로 넘어갔지만 결국 김일성이 죽이지 않습니까.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일정 부분은 욕망을 만족시킴으로서 행복지수가 올라가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 행복지수 욕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욕구는 항상 죄를 향하거나 범법을 향합니다. 워낙 형편이 안 좋아서 소원이 오늘 저녁 고깃국 한 그릇에 따뜻한 밥 한 그릇 먹고 연탄불 따뜻한 곳에서 자는 것인데 그것을 만족시켜주면 그 다음에는 더 큰 욕망을 계속 원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은 법이 허용할 수 없는 욕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많은 공급에도 불구하고 행복지수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면 욕망의 크기 자체를 줄여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모든 다툼들이 결국은 욕망의 팽창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욕망을 버리고 살아가는 것, 그 그림이 야채를 먹으며 화목한 것, 이것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더 교묘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념을 가지고 있거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타당하다고 설득하기 힘들 때마다 이상과 사상을 끌어들이고 종교적인 가치를 포장해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을 신앙의 적으로 몰고 사상과 이념의 대적자로 간주를 해서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시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는 논리가 아주 뛰어나고 그러면 사람들이 설득이 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설득되어서 그 기준에 맞춰갈 뿐입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살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들 중에 자기가 가장 정당하고 믿었던 것조차도 그 정당하다는 명분 속에 자기의 욕망이 얼마든지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합해서 성찰하고 씻어냄으로써 그렇게 사람들과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야 할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