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사랑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 1:15)
본문배경
2004.8.24 고신대학교 수련회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분노 섞인 음성으로 심하게 책망하다가 뒤편에 와서 흐느끼는 어조로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급기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라고 말합니다. 이와 비슷한 어조로 사도 요한에 의해 다시 한 번 십자가 사상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각각 달랐으나 그들의 십자가 사상은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목회의 기초는 분투하는 신앙생활에 있음
목회를 준비하는 신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떻게 준비하면 목회를 잘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신앙생활을 잘 하십시오”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돌보아야 할 양떼들은 신학교를 오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잘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생들도 처음에는 신앙이 동기가 되어 신학을 하지만 학업을 마칠 즈음엔 신앙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사라지고 목회자라는 특수한 신분이 될 준비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아무리 열심히 했다 하더라도 좋은 신자가 되기 위한 분투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 사람의 관심사와 양떼의 관심사가 전혀 일치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신앙생활위에 ‘왜 우리가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한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가? 역사적으로 그것을 놓고 사람들이 어떻게 신학적으로 오해하고 잘못된 길을 걸어갔는가? 오늘 내 가슴속에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이 아름다운 체계들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정리해서 형태를 남겨놓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갖고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
사도 요한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목회자나 사도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원리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일차적으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 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도 동일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젊음을 걸고, 심지어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겠다는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습니까? 이 복음을 위해 살고 사역을 위해 죽겠다는 선교와 목회의 사명의 핵심에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아주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이 전부 인 줄 알고 무지와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빛이 비춰지게 되었고, 소경되었던 우리 영혼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내가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껏 자신이 사랑하면 살아왔던 자기 속의 모든 죄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
나 같은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깨닫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으나 그 거룩함과 비참함의 간격을 도저히 메울 수가 없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 눈앞에 밝히 보이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죄에 속한 모든 요구를 율법으로 이루시고 정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고 아버지의 보좌에 이르는 핏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사역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티끌만큼도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전심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으켜 놓으신 중보의 사역을 의지 하는 것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중적 사랑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깊이 엎드려 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죄인의 영혼 속에 물 밀 듯이 밀려들어옵니다. 그 중생의 놀라운 은혜가 심령 속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은혜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효과를 동반합니다. 이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신자는 이중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첫째는 이 은혜를 통해서 전적인 타자(wholly other)로 느껴졌던 하나님이 이 미천한 인간을 깊이 사랑하신다는 부성적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는 그 부성적 사랑에 신자는 필연적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그리스도와 신자의 신비한 연합을 가져오는 동기가 됩니다. 그리고 이 연합을 제공해 주는 유효인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신비적인 연합이 이루어 집니다.
원리적 연합과 실제적 연합
이것은 원리적으로는 중생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한 번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은 항상 접붙여져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깊이 연합되어 있다가도 느슨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깊이 연합되어 있을 때 신자는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신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화)신학대학원 시절 수업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을 해서는 갈등을 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신선한 공기와 단풍을 보며 일반은총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인가 기도실에 가서 기도를 할 것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등 끝에 들어간 기도실에 엎드리자면 간절함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이러한 신비한 연합 속에 있을 때는 항상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신비한 연합 중에서도 이 실제적인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는 결과입니다. 사랑이 연합의 결과가 아니라 반대로 온전히 사랑할 때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청교도들 중의 황태자이며 17세기 복음주의 신학자 존 오웬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동행하는 것은 그러한 신비한 연합 속에서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면서 그 분께 한 없이 사랑을 받고 그 하나님을 한 없이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순종
그러나 오늘 요한이 ‘너희는 세상을 사랑치 말라’라고 말합니다.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 뜻은 이 세상에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사도 자신일지라도 세상을 사랑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중생으로 말미암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여전히 잔존하는 세력들이 남아 있고, 옛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과 또 새롭게 거듭난 사람의 본성이 살아 있습니다. 이 옛 본성은 끊임없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원합니다. 또한 새 본성은 끊임없이 옛 본성과 결별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려는 강한 내적인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두 본성은 끊임없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한한 사죄의 은총과 죄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은혜와 하늘에 속한 자원을 공급해 주실 것을 보증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보증들은 단 하나의 조건을 수반합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신자가 죄를 지어도 이미 거듭난 가운데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지만, 그것은 원리적인 용서이고 실제적으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신자의 마음속에는 현재적인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습니다. 신자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쥐를 뉘우치고 돌아온다면 그는 사죄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한결같이 사죄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은 곧 계명을 순종함으로 나타남
성경은 집요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약에서는 모세 언약을 주실 때 돌로 새겨 주셨으며,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서 그 계명에 더하여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 때에 자신의 백성들에게 바라셨던 모습은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던 지간에 그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광야백성에게 가지고 계셨던 가장 중요한 기대였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많은 신자들에게 가지고 계신 그분의 시선은 일차적으로 한 인간 한 인간의 내면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형제끼리 분쟁이 붙어 유산을 나누어 주게 해 달라고 다가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그들은 소유에 관심이 있었지만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이 아닌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쓰레기들이라고 하는 죄인들을 사랑하신 것은 그들의 마음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지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사랑은 누구를 위한 사랑입니까? 그 사랑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 주님을 통해서 들어오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세기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말합니다.‘고린도전서 13장 - 여기에서 사랑이라고 할 때 이 사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왜 그래야만 합니까? 우리는 천지창조의 목적을 살펴봄으로써 한 사람의 신자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우리가 전심으로 최고의 신앙이 목표가 되는 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당신 자신의 본성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자기에게 있는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바깥으로 흘려보내시려고 하는 경향성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영적인 실재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실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속에서 신성의 영광의 충만함이 창조를 통해서 흘러나왔고, 만물 위에 그 흔적이 많이 묻어져 있어서 그것으로 찬란하게 당신 자신의 영광을 바깥에서 보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조된 세상을 향해서는 당신이 설정한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신성의 영광의 충만함이 흘러나와 창조의 영광의 세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연결을 맺으며 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성한 하늘의 영광을 찬란하게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해서 이러한 영적인 연결은 산산 조각이 나고, 피조물 속에 깃들었던 그 영광은 다시 그 선을 타고 이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의 개념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지셨던 궁극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조건이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 머물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 상태를 계속 지향하게 만들고 싶으셨던 그 상태가 바로 선의 상태인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에 그것들을 바라보시며 하신 말씀에 ‘토브’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그 ‘좋더라’는 단어가 히브리어‘토브’이고 그 의미는 ‘선하였더라’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볼 때에 선(goodness)과 아름다움(beauty)은 일치 합니다. 선한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beauty) 것일 때 그것이 비로써 탁월함(excellency)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신학에서 탁월함(excellency),선(goodness), 아름다움(beauty)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대강령의 삶
‘그런데 이것이 삶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무엇입니까?’이러한 질문에 예수님은 ‘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와 같으니’라는 말은 원천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리키는 대강령은 벽에 박혀있는 못입니다. 그 못이 바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강령이 뭐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가르침과 삶은 그대로 일치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자신을 통해 충만하게 나타났으니까 당신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창조목적을 계승함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이유는 창조해주신 목적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해서 신자는 창조의 목적을 계승하게 됩니다. 구원받지 못했을 때에는 창조의 목적을 알 수가 없고 또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계승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함 것을 흘려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신성의 영광을 반영하면서 찬란한 빛을 드러내 하나님의 본질과 자신의 존재 사이에 영속성을 갖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창조를 통하여 밖으로 드러난 당신의 영광을 바라보시며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그 영광을 보면서 창조주를 기뻐하는 것을 통하여 영광 받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라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열망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57년 그의 논문에서“인간이 하나님 앞에 타락하고 나서 인간에게 가장 커다란 불행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던 인간이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요.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고 두 번째는 영원한 유익을 져버렸다” 그러나 신학을 하는 우리의 중심에는 이 세상 누구도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이러한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붙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신학의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시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부복과 전적인 사랑이 신학의 모든 과정에 필요한 것이며, 우리의 소망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사랑하므로 우리의 죄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 됩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중요한 소명은 바로 여러분들이 가르쳐야하는 양떼들 앞에서 참으로 이 세상에서 죄를 이기고 신자라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 아래서의 현재적 체험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2. 천지창조의 목적과 목회
눅1:15를 모두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 상반절에 나오는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희랍어 성경에 ἔσται μέγα 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를 중심으로 제가 말씀을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렇게 내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때는 바울이 좋은가 했지만 또 언제 보니까 다윗이 훨씬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러다 어느 때 생각해보니까 바울보다는 바나바가 더 훌륭한 것 같기도 하고 다윗보다는 요나단이 훨씬 더 훌륭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여러 성경의 인물 사이를 지조 없이 왔다 갔다 하다가 지금으로부터 한 15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가슴에 꽂히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일은 평생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큰 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오신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고 구약은 이 사람에 대한 예언으로 끝났습니다. 이 사람의 구속사적 위치는 따라서 매우 독특하고 의미심장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가복음에서도 먼저 나오고 뒤이어서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주후 27년경에 소명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정확하게 이 사람의 사역의 연대는 언제 끝났는지 헤아릴 수 없지만 아주 지극히 짧은 기간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그의 평소의 소원대로 자신은 망하고 그리스도는 흥하게 되는 일을 기대하면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동시에 영광스럽게도 자신이 예언한 내용들을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는 것까지 공유하면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장에는 이 사람의 탄생이 얼마나 하나님의 큰 대역사에서 일어났는지를 기적과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그가 태어나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1. ἔσται μέγα ἐνώπιον του κυρίου
오늘 거기에서 성경이 말하기를 그는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ἔσται μέγα ἐνώπιον του κυρίου 주님의 두 눈앞에서 큰 사람이 되며 그리고 뒤이어 메시지가 나오고 있습니다. 주님 눈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이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정말 이 사람의 인생이 큰 자의 인생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당시에 예루살렘에만 일만 팔천 명의 제사장이 있었다고 하니까 사실 내로라 할 만 한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의 당번을 따라서 제사장의 일을 보고 다시 평상시 자기 직업으로 돌아가는 그런 형태 속에서 한 제사장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것입니다. 부모가 모두 연로한 때 태어난 늦둥이였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사람이 예루살렘의 제도권 안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자란 사람으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 사람이 엣세네파에 속한 사람이 아니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엣세네파는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의 뼈도 발굴되는 것을 보아서 거기에는 결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독신이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 사람은 제도권에서 교육받지 않고 광야에서 자랐습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보면 “아이가 자라며 강건하여지고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이라고 하는 말은 παιδίον 이라고 하는 말인데 원래 상태대로 따지자면 영아기 상태를 벗어난 아이를 가르치지만 그러나 마가복음을 비롯한 여러 성경 본문에서 παιδίον이 baby를 의미했기 때문에 역시 누가복음 1:80에서 나오는 그 아이도 아마 child나 boy, girl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이 아이의 상태는 baby의 상태에서 광야로 보내어졌을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광야로 보내져서 아이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양육을 받으면서 자랐던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어떤 학자는 아마 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제도권에 있는 제사장들을 신앙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린 아이를 광야로 보내어서 하스빈과 같은 사람들에게 양육을 받으면서 자라게 했을 것이라고 설명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성경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우리는 어느 쪽이든지 이건 이렇다든지 딱 자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지금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 어린아이가 그렇게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 오실 때쯤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에는 그는 정말 들판에서 자란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약대 털옷을 걸치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들판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 몇 편하고 마지막에 죽는 것도 여왕에게 주는 선물거리가 되기 위해서 목이 잘려졌고 그 목이 쟁반에 바쳐져서 그렇게 일생을 마친 사람이었습니다. 긴 일생을 산 것도 아니고 혁혁한 말씀 사역에 성공을 모아서 그래서 자신이 예언한 위대한 역사가 전개되는 것을 역사 속에서 보고 누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가문의 태생도 그 자가 아니었고 성장 과정은 물론 사역, 그의 죽음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난 자 중에는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2가지 모순 사이를 우리들이 어떤 논리로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단서를 ἐνώπιον του κυρίου 라는 말이 우리에게 제기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이 큰 자가 될 것인데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이나 관점에서 볼 때 큰 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에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우리의 사상의 세계 속에서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두 번째 우리가 버린 세상의 길과 가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는 중요한 사람들, 그리고 뛰어난 사람들들 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많은 학식 그리고 성공이 보장된 미래, 많은 재산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뜻대로 행해주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이 세상에 있는 유한한 자원을 소유하고 있으며 유한한 인간들에게 얼마나 많이 인정받고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는지에 의해서 그 사람의 중요성이 저울질 됩니다. 바로 그런 것을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버린 사람들이 아닙니까?
신학자 김세윤 박사는 자신의 책 속에서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올바르지 않은 태도” 이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계신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또 그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삶을 위해서 스스로 그 목적으로 돌아가는 인간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구원이 우리에게 이중의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신분의 자유를 가져다주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우리에게 마음과 영혼의 놀라운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순종하며 살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범죄의 행위를 저지르지 않으면서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모든 자유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더러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고 하나님의 두 눈앞에서 사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가치를 끝까지 붙들고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어제 말씀드린 창조 목적과 선과 사랑에 관계에 의해서 그는 열심히 살았는데도 하나님 앞에서는 산 적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난 여러분들이 학교적으로 CORAMDEO 란 말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구원만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재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그 어떤 자원이 우리 속에 충만하게 있을 때,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년을 목회를 해 오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전에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이렇게 설교하면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이 세상에 높은 지위가 배설물이래, 이 세상에 많은 재물이 해로운 것이래, 이 세상에 좋은 평판과 즐거움들이 쾌락이 똥이래 사람들은 그 배설물을 나한테나 부어주지”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주님의 눈앞에서 사는 것 그것이 한없이 즐거운 사람들만 CORAMDEO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CORAMDEO의 삶은 내가 이 일을 너무나 하고 싶고 하나님을 속이고 싶은데 그렇지만 이 일을 했다간 요절이 날 걸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그 일을 못하면 그것은 CORAMDEO의 삶이 아닙니다.
진정한 CORAMDEO의 삶은 하나님이 나같이 이 비참한 인간이 하나님의 눈앞에 즐거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할 수 있는 그 마음의 동기,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CORAMDEO의 삶입니다.
진정으로 CORAMDEO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CORAMDEO의 삶을 살면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많이 복 주실 거야 역사는 우리를 몰라주어도 내가 CORAMDEO의 삶을 살면 이후에 역사는 우리를 재평가할 거야’ 그런 생각하면서 역사 앞에서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ἐνώπιον του κυρίου 하나님의 그 시선 앞에서
가장 하나님이 나에게 있기를 원하시는 자리와 상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부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면서 사느냐? 그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신학교에 9년 동안 있으면서 학교를 나 때문에 신학교를 떠난 학생이 200명쯤 됩니다. 내보냈습니다. 전혀 내가 신학의 일을 안 하니까 재앙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마세요. 그 학생 중에는 자동차 세일즈 하는 학생도 있고 파파이스 치킨 집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내 평생소원 이것뿐 햄버거 2인분 그러더니 가서 만들었습니다.
참된 소명은 내가 이 소명을 떠나면 하나님 앞에 벌 받을텐데 하는 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참된 소명이라고 하더라도 맞아 죽을까봐 목회 사역에 들어선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200명 정도를 내가 내보냈습니다. 어떤 학생은 4학년 2학기 졸업을 두 달 남겨놓고 자퇴를 했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자퇴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 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웠으면 넌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면서 사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E. M. Bounds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쓴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늘에서 천사 셋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각각 mission을 받고 이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온 제국을 다스리라는 mission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상금 홀을 받아 가지고 구름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큰 사업가가 되라는 사명을 받고 금빛 주판을 들고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똥 푸는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육군 모자에다 막대기를 껴 가지고 철모에다 그것을 들고 내려온 첫날 왕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금빛 보좌에 앉아서 금 홀을 흔들었고 두 번째 사람은 금빛 주판을 가지고 비단 방석위에 앉아서 큰 사업을 경영했고 세 번째 사람은 추운 겨울 철모에다 막대기 낀 것을 들고 와서 똥구멍에 넣고 풍덩 담갔습니다. 그 세 순간에 첫 번째 일을 그 모든 세 천사의 마음이 각각 달랐겠느냐 ’하는 것이 질문의 요지입니다. 이 mission의 위대한 아름다움은 mission 자체가 무엇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mission을 주신 분에게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막연히 신자들이 심지어는 하나님을 위해 부름을 받은 목회자들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에서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영적 생명이 파괴된 사람들입니다. 그분을 깊이 사랑하고 그분이 너무 사랑스럽고 나는 그분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면 똥을 푸는 일이든 황금 홀을 들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든 주판을 튕기면서 돈 계산을 하는 일이든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천년이나 이천년 동안 계속한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닐텐데 몇 년이나 계속하겠습니까?
여러 분, 여러 분같이 책상에 앉아서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그럴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얼마나 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글을 쓸 수 있을까? 계산하는 시점에 오게 되었습니다. 젊을 때는 모르지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만큼 많은 일을 하다 죽을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습니다.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큰 자가 된다고 했는데 뭐 큰 자가 되었습니까? 그 흔한 M.div 졸업장 하나 없었습니다. 뭐가 큰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사람이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사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그렇게 많이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고 신학교 학자가 되어서 신학교 교수를 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명망이 높은 선생님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선교를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감동적인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것을 기대하면서 목회자가 된다, 선교사가 된다, 신학교 선생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 못 가서 허탈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즐거움은 하나님 한분입니다.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길을 하기 위해서 먼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한없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이고 티끌만도 못한 비참한 인생이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서 엎드려 두려움 속에 떨면서도 그 두려워 떠는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그 사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것이 무엇이냐는 비밀을 아는 그 사람들만 ἐνώπιον του κυρίου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이 어느 날 기도하는 여러분들에게 오셔서 ‘너는 내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다’라고 응답을 해 주실 때 여러분들은 착각하면 안 됩니다. ‘아, 이게 바로 총회장이 되라는 계시인가 보다. 아, 이게 결국은 내가 비록 F선상에 성적이 왔다 갔다 하지만 내가 미래에 이 고신의 총장 한번 해보라는 하나님의 계시인가 보다 아니면 아마 하나님이 나에게 일만 명 교회를 맡겨 주시려나 보다’ 하는 머저리 같은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입맛에 근원하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눈앞에 큰 사람이 되기를 사모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신학교에 가면 젊은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많이 한다고 하는데 가기만하면 나는 거기에 초를 쳐서 꿈을 버리라고 외치는 사람입니다. 그 꿈 때문에 아무것도 안 됩니다. 무슨 꿈을 그렇게 꿉니까? 다 개꿈입니다. vision이라고 하는데 성경적으로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자기 암시적인 자기 계발의 vision이 있고 계시적 vision이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내일은 우리가 큰 도시에 가서 돈을 벌고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은 모두 다 자기 암시적 자기 계발적 vision입니다. 해와 달과 열한별에게 절한 것을 본 것은 계시적 vision입니다.
꿈은 내가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꿈을 꾸고 하나님을 거기다가 껴 맞춥니다. 기도할 때도 자세가 하나님 앞에 죽 엎드려 하나님은 지존하시고 인정하고 자기는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경배의 영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눕혀놓고 팔 꺾기를 합니다. 믿사오니 주여! 인본주의가 신학교에서 제일 많습니다. 버리세요.
정말 죽어도 나오기 싫어하는데 기독교TV에 나왔습니다. 유명한 탈렌트 두 명이 인터뷰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 vision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내 생애의 최고의 vision은 한사람의 진실한 신자가 될텐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방송이 끝날 시간이 되었는데 끝나지 않습니다.
언젠가 지방에 내려갔는데 친구 목사님 한 분이 신실하게 목회를 잘 하시는 분인데 “시골에서 부목사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여기에 무슨 vision이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vision은 무슨 vision이냐? 목사가” 라고 했더니 “그럼 김목사님은 vision이 없는데 방배동에서 땅을 사서 교회를 짓고 옮기고 합니까?” 해서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무엇 하느냐?” 고 해서 “vision은 무슨 얼어 죽을 vision이냐? 애기 낳았으니까 기저귀 사고 학교 들어갔으니까 가방 사는 것이지, 교인들이 많아지니까 할 수 없이 땅도 사고 더 많아졌으니까 교회 땅도 사는 것이지 vision은 무슨 vision이냐? 교인들에게 종종 이야기 한다. 교인들이 반으로 줄어들면 교회 건물 일부를 처분해서 선교단체에 기부하든지 자선 사업에 내놓자고 한다. 필요 없는 공간을 왜 가지고 있나? vision은 무슨 얼어 죽을 vision이냐? 하나님 앞에 기도 많이 해서 서울에 세워주시면 서울 가고 지방에 세워 주시면 지방 가고 낙도에 세워 주시면 낙도 가고 군대가라고 하면 군대 가서 몇 명 보내주시든지 그 영혼들 붙들고 눈물 흘리면서 살다가 피 토하고 죽으면 그것이 vision이지. 무슨 얼어 죽을 vision이냐?” 그랬더니 목사님은 은혜를 덜 받았는데 사모님은 너무나 그 말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모님에게 전화를 해서 김남준 목사님이 참된 vision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우리집 사람입니다.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vision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훌륭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두 눈앞에 먼저 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보세요. 무슨 꿈인들 없었겠습니까? 그 사람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성전에 가서 스랍 가운데 계신 위엄하신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꿈도 박살나고 vision이 다 날라 갔습니다. 그 마지막 남은 고백이 무엇입니까? 화를 당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자들 가운데 있으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망하게 된다는 말이 דבַאָ인데 멸망시킬 때 씁니다. ‘나는 이제 비참하게 멸망을 당했구나.’ 왜? 자기 영광의 빛 앞에서 자기의 비참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신학은 누가 하는 거냐면 그 영광의 빛을 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비결은 거룩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이 세상에 있는 가치와 길을 버릴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내 생애에, 이 세상에 내가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것은 내가 큰 교회 목회자가 되거나 학문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쩔쩔매게 만들 정도로 유능한 학자가 되거나 아니면 선교적인 위업을 뚫는 그런 위대한 선교사가 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그 눈빛 앞에서 사는 즐거움을 누리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해서 주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없는 관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배워야 합니다.
어떤 학생은 공부에 대해서 욕심만 가지고 있는 신학생이 있습니다. 단순히 지적인 욕구가 아니라 야망 비슷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불러서 “목회자로서 너를 보니까 너는 공부도 잘하고 공부에 대한 야망도 가지고 있는데 나는 넌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너를 근본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기가 공부를 하게하고 뭔가 하여튼 너 자신을 준비를 위해서 몸부림치게 만드는 동기가 내가 보기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네 미래에 대한 야망이다. 내가 너에게 하나 묻겠는데 지금 여기서 대답하지 말고 집에 가서 대답해봐라. 네 인생의 계획표가 다 있는데 오늘밤에 하나님이 오셔서 ‘야, 그 계획표 사실 내가 인계 한 게 아니라 네가 짠 것이거든’하고 쭉 찢어버리고 ‘너 저기 낙도가서 몇 백 명 사는 섬인데 거기 예수 믿는 사람 하나도 없다. 너 가서 하꼬방이나 하나 얻어서 그 사람들하고 평생 살다가 거기서 죽어라’ 그래도 아멘 할 수 있겠느냐? 집에 가서 한번 물어보아라.” 그랬더니 심히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모두 정리를 해야 됩니다.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내가 그분 앞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가? 그분 앞에서 살 수 있는 삶이라면 똥을 푸면 어떻고 일평생을 기도해서 본 것 이상하게 죽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정말 주님을 더 잘 알 수 있고 바르게 살아 갈 수 있고 돈 많이 모으게 할 수 있고 더 충심으로 그분을 찬양할 수 있다면 이것 말고 다른 일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님의 부름 앞에서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습니까?
2. ἔσται
동사가 나오는데 ἔσται, 미래입니다. 우리는 항상 유명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다릅니다. 울음소리가 틀린다든가 엄마가 태몽에 우물에 뜬 달을 삼켰다든지, 태어나자마자 아이가 글을 읽었다든지 뭔가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태어났는데 ἔσται μέγα 앞으로 크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오늘 평범한 것은 그렇게 크게 된다는 예언이었는데 실제적으로 세례 요한을 크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럼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던 유명한 학벌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처럼 가말리엘 같은 사람에게서 수학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소와 같은 훌륭한 도시에서 공부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은 있긴 있었겠지만 명함을 내 놓아도 알아줄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 성경에는 이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이 크게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 자체가 철저하게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세워주신 유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신도시 아파트에서 교회를 개척한 것이 아니라 모래바람이 펄펄 일어나는 허허벌판에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단강 건너편 사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의 표현이나 설교는 예루살렘에서 자란 사람처럼 세련되고 박학다식하지 않았으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에는 들을 수 없었던 특징이 있었으니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서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을 찔렀고 그들을 눈물 흘리게 만들었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게 만들었습니다. 강력한 말씀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큰사람이며 작은 사람, 큰사람이 작은 사람
잘잘한 목회자들은 어느 학교 나왔냐? M.div냐? 예과냐? 본과냐? 유학을 했는데 어느 나라에서 했느냐? 유명한 교수에게 지도를 받았냐? 별 볼일 없는 교수에게 지도를 받았냐? 잘잘한 목회자들은 그것을 따지지만 워낙 큰 목회자들에게는 감히 어느 신학교를 나오셨냐고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칼빈이 어느 학교에서 공부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전설적인 18세기의 설교자 죠지 휫필드는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는지 기억하시나요? 프란시스 에스빠리가 그렇게 훌륭한 선교사가 되기 전까지 이름 없는 시골 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무명의 설교자로 지내던 것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13세에 예일대학을 들어가고 17살에 수석으로 졸업을 하고 2년 뒤에 교수가 된 천재의 조나단 에드워즈가 세계적인 사상가가 되기 전까지 시골에 있는 노스햄턴 교회의 부목사로 지냈던 것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워낙 큰 사람이 되면 그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졸업장을 가지고 말하지만 이 사람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를 주님의 면전에 세웁니다. 감히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에 ἔσται μέγα라는 이 예언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선명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비추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그들이 엄청난 영적인 권세를 느끼면서 그 앞에 깊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세례 요한이 양복이 아니라 약대 털옷을 걸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지 않고 광야에서 살아온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고 나온 그 사람 앞에 부복했습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그들의 마음에 회개를 불러일으키므로 말미암아 이사야 40장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고 육체의 모든 아름다움은 꽃과 같도다”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해서 높은 마음은 낮아지고 낮은 마음은 높아져서 찬란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큰 자입니다. 이렇게 큰 자의 핵심은 무엇이냐면 그 사람이 “The Man of the word of GOD”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생각해 보세요.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직업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현존을 세례 요한의 선포 속에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조금 잘 하면 회중들이 설교자의 이름을 기억하지만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나타나면 설교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전부 자기의 영혼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은 자신의 책 “성경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방법”이라고 하는 논리 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이 지상에 당신의 말씀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 세 개를 두셨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는 계시의 책인 성경이요 또 하나는 신자들의 마음이요.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두셨습니다. 마지막 세 개가 무엇이냐면 목회 사역 속에 말씀의 저장고를 두셨습니다. 목회 사역이 무엇이냐면 빌딩 짓고 차사고 기도원 짓고 하다가 나중에 안 되면 납골당까지 만드는 것이 목회가 아니라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풀어서 그들에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빛을 계속해서 비추어 주어서 마지막 죽을 때까지 그 목회사역 속에서 흘러나오는 진리의 빛을 인해서 복음적 현자의 삶을 살도록, 내가 기독교인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현자로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현자는 현자가 되게 하신 지혜롭게 하신 주님이 있었기 때문에 피동적으로 현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밝은 진리의 빛으로 어둠 속에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어둠도 백날 어둠이 아니라 주관적인 어둠과 객관적인 어둠으로 나뉩니다.
객관적인 어둠이란 무엇이냐면 진리를 잘 가르치기만 하면 눈이 뜨여져서 알게 되는 그러한 어둠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내가 눈을 떠서 주의 법의 기이함을 보게 하소서 라는 그런 의미에서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접촉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남아있는 어둠(objective darkness)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객관적 어둠이 아니라 주관적인 어둠입니다. 주관적인 어둠은 죄 때문에 생겨난 어둠입니다. 캄캄한 어둠의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고 영혼이 묘사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갖지 않는 그러면서 하루살이처럼 이 세상에서 아무 의미 없는 허탈한 것에 목을 매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어둠이 생각이라고 하는 영역에 적용이 될 때 에베소서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에는 세 작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생각(mind), 두 번째가 총명(understanding), 세 번째가 마음(heart)입니다. 생명 되신 하나님께로 멀어지고 나면 영혼은 어둠과 캄캄한 세상입니다.
그 어둠이 생각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생각이 blind하게 됩니다. 눈 먼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 의미 없는 허탄한 것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아낌없이 던지며 삽니다.
제가 작년에 피렌체에 갔을 때 기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순교 당한 자리가 있는데 그 앞에 성당이 있습니다. 크지도 않은 작은 문짝이 있는데 150년 동안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났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 가운데서 생각이 눈멀어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아무 가치가 없는데 그 일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불나방처럼 날아드는 것입니다.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understanding)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오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생각으로 하여금 어떤 생각을 받아들일까 말까를 판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생각을 받아들여진 것을 가지고 적용을 해서 다시 판단하는 자료로 삼는 것입니다. 생각은 멀었는데 총명은 뛰어나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판단은 흐리고 마음으로 이 생각을 통해서 들어온 빛을 활용해서 적용을 하고 사용해서 살아갑니다. 영안의 어둠이 가득하게 되면 총명이 흐려지게 되고 결국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마음 안에 지정의의 작용이 있습니다.
처음 창조된 상태에서는 항상 이성이 위입니다. 이성의 상태에서 의지가 자유롭게 되며 그 이성의 통제를 받으면서 감정이 따라오고 그 이성과 감정의 통제를 받으면서 의지가 행해야 되는데 이 감정이 이성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파괴가 됩니다. 결국은 놀랜 의지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사람들에게 참된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들의 상태가 어떠하고 그들을 창조한 분이 어떤 분이며 그들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이제 이 모든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서 선을 이룰 수 있고 그 안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복을 향유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은 현자가 되어야 합니다. 빛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식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얼마나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례 요한을 그렇게 큰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이제껏 들어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찬란한 빛이 비치면서 그들은 그 어둠 속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는 너무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는 것이 축복이기는커녕 자신들에게 진노요 두려움, 징벌이 될 정도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요새 너무 마음 아픈 것은 무엇이냐면 이 똑똑한 젊은 사람들이 나와서 목회를 잘 하기 위해서 세상을 연구를 많이 합니다. 그것의 반만이라도 성경을 연구하면 교회가 변할텐데 심지어 교회를 세우는데 용역회사에 돈을 주고 용역을 주어서 지나가는 사람이 몇 명이고 주민들의 학력이 무엇이고 성향이 무엇인가를 조사합니다. 이것은 외국에서도 편의적으로 쓰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무엇이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빛입니다.
참된 복음의 빛, 하나님께로 온 말씀의 빛, 어차피 몰려든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몰려든 사람을 듣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대신하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건져내서 당신 앞으로 나오게 만듭니다.
그런데 만약에 목회자 자신 속에 이런 어둠이 가득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회 사역을 통해서 더 많은 빛, 더 많은 빛이 끊임없이 부어지면 성도들이 점진하는 계시의 빛 아래서 목양을 받으면서 예전에 발견하지 못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목양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물을 퍼내고 나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목회, 설교 시간에 자꾸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 권면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설교를 받아 적으세요. 교인이 하는 말은 쓸 내용이 없어요. 이래선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말씀의 준비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것과 과정적인 것입니다.
1) 결정적 요인
결정적인 것은 3장에 보면 개인적인 한 시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 인물들이 무엇이냐면 그 시대가 어느 시대인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총체적 배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장엄하게 역사를 설명하고 그 다음에 일어나는 사건이 있었는데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이것이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고 하는 이것은 희랍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번역을 하여 읽으면 구약 성경에나 나오는 모든 선지자들의 소명 기사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소명 기사가 무엇이냐면 ‘싸이예히 하닷바르 엘로힘 엘 혹은 레 혹은 뵈 그리고 사람이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누구누구에게, 누구누구를 향해, 누구누구 속으로, 누구누구 위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고 하는 것은 한번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서 같은 데는 50번 가까이 나옵니다. 그 의미는 다릅니다. 처음 임한 그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선지자로 소명하는 첫째 calling을 포함하고 있는 말씀의 임함입니다.
핵심적으로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호세아서 1장 2절에 보면 צַשֵׁהבְּ הוָהיְ-רדִּ תלַּחַתְּ 직역을 하자면 하나님께서 호세아 속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휙 뻗어나가서 호세아를 관통하고 지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소명 기사의 공통적인 것입니다. 선지자는 다양했지만 한결같이 선지자들에게 필요했습니다. 그 시대를 향해 주시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들에게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넣어주시는 경험은 단지 정보를 전달해 주시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성령을 통해서 그에게 넣어주시는데 매우 영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그발강 가에서 소명을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이상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자기 위에 머물러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과정을 통해서 강력한 견고하게, 거기에서 무엇이 나오냐 하면 말씀 하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 마음을 함께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안에 있는 내적 경향성의 외부적 유출입니다. 흘러나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생명이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 아무것도 느끼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빈말로 우리에게 계시를 전달 해 주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렇게 대하는가? 거기에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참된 말씀의 뜻을 우리들이 계시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열리는 것이지 사람의 사람들에게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누구인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 그분의 강한 권능의 상징에 붙들려서 그분과 함께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말씀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30년 가까운 세월동안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성경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침묵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광야에서 자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키만 크고 몸무게만 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고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기 전에 갓난아기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소명을 받고 광야에 말씀을 외치러 나오기 전까지 돌아다니면서 꿀이나 따 먹고 메뚜기나 잡아먹고 짐승이나 구워먹으면서 일생을 살던 그런 짐승 같은 사람이 어느 날 말씀이 임했고 그래서 그 사람이 불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말하면 상처뿐이라는 것입니다. 귀신도 아무한테나 안갑니다. 자기를 향해서 준비된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사는 사람은 귀신이 들어올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들어가시는데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들어가시겠는가?
세례 요한의 결정적 사건을 말하면 하나님 말씀이 강력히 역사하시고 진짜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성공과 보장 된 장래 이런 것은 안중에 없고 그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목사님께서 그러십니다. “한 곳에서 3년씩만 목회를 하라고 하면 참 할 만 하겠는데, 그러면 죽을 때까지 평생 신선한 설교를 하다 죽을 수 있겠는데…”
3년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한 것밖에는 안 나오나 봅니다. 그것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년이 아니라 5년을 할 수 있으면 무엇 합니까? 오늘날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예배가 아니라 민방위 교육입니다. 11시 예배인데 15분이 되어도 어슬렁어슬렁 걸어옵니다. 오면 앞에서부터 앉는 것이 아니라 앞은 언제나 폭탄 맞은 것처럼 비어 있습니다. 섰다 앉았다 예배드리고 설교 시간에는 가관입니다. 주보 읽는 사람, 핸드폰 들고 뛰어나가는 사람, 벨 울리는 사람, 주보 꺼내놓고 틀린 글씨 찾는 사람, 헌금 낸 액수 가지고 사람하고 곱하기 나누기 해 보는 사람, 졸다가 성경 떨어뜨리는 사람…
나는 목회자로서 확신합니다. "There is no GOD." 하나님 거기에 안 계십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오신다고 해도 말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뭐 할 일이 없어서 민방위 교육처럼 예배드리는 사람, 거기에 하나님이 오시겠습니까?
예배는 성령에 의해서 주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 순서지에 의해서 주관이 됩니다. 목표 자체가 60분 안에 마칩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시간이 모자라면 찬송가 1절만 부르고 마칩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예배당 문이 열렸을 때 공휴일 오후의 햇살이 계단 아래로 내려 쪼입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예배가 끝난 행복감에 계단을 걸어 내려갑니다.
그 예배 시간에 받은바 은혜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내가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이제 피 흘린 그 주님처럼 그렇게 살겠습니다하고 걸어 나가도 세상이 바뀔까 말까인데…
통계에 의하면 100명이 예배드리고 나가는 사람을 예배당 앞에서 물어보니까 95명이 오늘 설교한 본문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약을 설교했는지 구약을 설교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가 다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매주는 그만두고 일년에 한번만이라도 하늘의 능력을 끌어 내려서 교만한 교인들을 거꾸러뜨리는 말씀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면 그들이 그렇게 방자하게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거의 배교에 가까운 예배의 상태입니다. 그 외 예배 시간은 모두 노래 부르고 춤추는 즐거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J. Packer교수는 말하기를 오늘날 기독교인은 스스로 즐거움을 찾다가 망해버린 종교라고 규정했습니다. 진지함과 신기함이 없습니다. 구제도 없습니다. 온갖 종류의 가벼움이 찬물 쏟은 가벼움이 교회당 안에 가득합니다. 그 모든 말장난의 한복판에 말씀을 받지 못한 목회자가 있습니다.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정직하게 묻고 싶어요. 최근에 성경을 읽으면서 거기에서 비추는 진리의 빛을 발견하고 거기에 압도되면서 그 말씀이 점점 선명하게 나를 찔러서 성경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려본 일이 언제입니까?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러 단상에 올라갔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전인격으로 분투할 때 말씀이 되는 것이지 지성의 조금 있는 것을 가지고 꺼내는 것은 말장난입니다. 이 속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시간은 매우 사변적인 되거나 유희적이 됩니다. 찬양은 뜨겁게 기도는 열심히 설교는 짧게, 이것이 은혜로운 예배의 3박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역사를 알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칼빈 시대의 설교는 2시간 가까이 전개되는 설교였습니다. 최근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을 읽으면서 깜짝 놀란 것이 있었습니다. 한편의 설교가 너무 길다는 것입니다. 계산을 해 보니까 어떤 때는 3시간 가까이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마치 설교를 풀어놓으면 논문처럼 전개되는 설교를 청중들이 귀를 기울이고 들었습니다.
4년 2개월 된 아이가 회심을 하였는데 이 아이가 어머님께 교회 언제 가냐고 묻는데 왜? 선생님이 무엇을 준다고 하니? 아니 아직 여섯 밤 더 자야해, 다섯 밤 더 자야해, 네 밤 더 자야해, 너 왜 그렇게 예배당에 가고 싶어 하니? 하고 물으니까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요 하고 대답을 합니다. 대학생도 못 듣는 그 설교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진지함이 없어요. 기독교의 설교는 기본이 기독교의 사상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던 설교를 보면 그 긴 구약의 역사를 설명하다가 결국 마치지 못하고 돌 맞아 죽습니다. 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라고 하는 Christology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Soteriology와 Christology를 외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상이 담기지 않는 설교는 종교적 단문일 뿐입니다.
19세기에 설교의 역사를 보면 대륙에서 얼마나 심각한지 압니까? 한창 합리주의 신학이 일어나서 막 역사하고 있을 때 달려가서 합리주의와 손잡은 사람이 평신도가 아니라 다 강단의 목회자였습니다. 어느 정도가 되냐면 실재 기록에 나오는 것입니다. 독일 설교 상에 나오는 것입니다. 주일 낮 설교 제목을 보면 “감자를 먹는 즐거움” “예방 주사 맞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예수님의 고난 주간쯤 되어서는 설교 제목은 “생매장 되는 것의 위험” “예수님은 왜 결혼을 안 하셨을까?” 심지어는 “돼지는 방목하는 것이 가둬 키우는 것보다 낫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행복” 이것이 실제 문헌에 나오는 주일 낮 예배의 설교입니다.
왜 그럽니까? 이속에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외치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거기에 마치 총에 맞은 짐승이 괴롬에서 신음하는 소리와 같은 고름에 의해서 통과하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됩니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설교자의 마음을 가르고 흐르는 한줄기의 물입니다. 어려운 시절에 독일의 복음주의를 지켰던 헬무트 트리키는 자기의 저작 속에서 한 사람 목회자가 외치는 주일 설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겠는가? 가장 열렬한 인간의 증언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가 6일 동안 그 진리와 함께 치열한 분투의 삶을 살았을 때에만 주일 강단에서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연약한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본 적도 없고 살기 위해서 피 흘려본 적도 없고 그렇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본적도 없고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과 피 흘리면서 분투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강단에 올라가서 온갖 고뇌를 짊어진 것처럼 설교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위선입니다.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언제 성경을 읽다가 ♬우리 죄악과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그 말씀에 깊이 날아와서 박히는, 말씀 외에는 변할 수가 없습니다. 쏟아지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참회하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도살하고 그러면서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을 지나면서 이 죄로 가득 찬 세상에서 속에 있는 내재하고 있는 죄와 분투하면서 살아가면서 수없이 흔들리기 쉬운 자신 안에 모든 약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죄가 가져다주는 모든 의심과 오해에서 벗어납니다. 찬란한 빛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냥 올라가서 말씀할 때는 이 말씀은 자기화 되었습니다. 자기화 되지 않은 것은 꺼내기가 너무 힘듭니다.
배추장사보고 배추이야기 하라고 하면 힘들 것이 없지만 휴대폰의 전자과학을 이야기 하라고 하면 적어 가지고도 안 됩니다.
거의 매일까지는 힘들다 할지라도 성경에 얼굴을 묻고 화살을 맞은 짐승처럼 심란해서 그렇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일들이 일주일에 한번 한달에 한번은 일어나야 합니다. 그 앞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살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하는 고백이 거기서 철저히 생겨나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캄캄한 중세 신학의 어두움에서 헤어나게 되는 비결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시편과 갈라디아서 등등을 강의하게 됩니다. 그 전에 수도사로서 깊이 고민하다가 비텐베르그 대학에 와서도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일생에 잊혀질 수 없는 일생의 귀한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쉬타고피취라고 하는 선배 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뇌하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했더니 쉬타고피취 이야기가 “사람의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형제 로마서를 다시 공부하십시오” 이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로마서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또 한번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기회를 만나게 되는데 랑게라고 하는 수도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은 히브리어와 희랍어에 도사였습니다. 그 사람을 한번 가면 3시간 반이나 되는 거리에 있었던 사람인데도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가서 지독하게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공부하면서 원문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하고 들어가면서 얼마나 성경이 카톨릭의 해석 속에서 철저히 유린 되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는 로란드 베이컨이 쓴 그 전기 속에서 칼빈의 고백이 인용될 때는 이렇게 인용이 됩니다. “그 순간 캄캄한 어둠을 찢고 진리의 빛이 들어왔다. 난 땀구멍이 열렸고 이제껏 보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내가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모든 짐은 벗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마틴 루터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 신학을 공부하려는 많은 후학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한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하고 명상을 하는 것으로 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사람의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향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례 요한은 학벌도 별 일없고 대단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강력한 체험을 가졌습니다. 정도에 있어서는 이 사람과 같은 경험을 동참하기 힘들다 할지라도 같은 종류의 경험들이 우리들에게 날마다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변화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강조한 것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자신의 저작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 그 자체는 신적 저작이므로 탁월한 통일성이 있다. 그러나 이 통일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단일 저작으로서의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감각의 가장 좋은 것은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것이다.”
노년에 탁월한 지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방대한 대작 성경적 신학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Biblica Theology에서 그는 그 긴 천지창조로부터 마지막의 구속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다 문의를 마친 다음 후에 마지막 결론을 내리는데 그것이 마치 신학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인 것처럼 우리의 귀에 마음에 울리면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신학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과 그 모든 것에 관한 학문이며 이 신학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경험의 속에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신학을 연구하는 그 사람은 먼저 성경의 삶을 써야 한다. 성경 말씀을 통해 깊은 감화를 받고 그 속에서 신적 생명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신학을 할 수 있는가?”
자기화 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경을 대해야 합니다. 신학의 책이 아니라 성경 이 자체를 가지고 대하면서 이미 가지고 있는 신학의 범주 안에서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 비밀을 말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눈물과 하나님의 마음 아파하심과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와 이런 것들을 죽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속에 찍혀지도록 깊이 하나님 말씀이 쏟아져야 합니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떠다가 저기를 주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남의 책에서 떠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배달입니다.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가슴에 담고 성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풀어헤쳐서 젖을 먹어야 됩니다.
상추쌈에 돼지고기에 쌈장을 발라서 어린 아이의 입에 쳐 넣으면 죽습니다. 과학적으론 하자가 없습니다. 영양가가 좋은데 자기가 먹고 힘들게 요리해서 힘들게 먹고 힘들게 소화시켜서 진액을 짜서 가슴을 풀어서 지극히 여러분들을 사랑해서 많이 깨달았으니까 조금 나누어 줘 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죄인이지 종이 아닙니다.
칼빈의 별명이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The Servant of the word of GOD. 입니다. 존 오웬의 별명은 The Servant of the gospel of Christ. 자신들이 이렇게 불렀습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이 맨 날 땅 사고 집 사고 납골당 사고 비행기 타고 선교지나 다니고 하는 것이 목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에 큰 감화를 받고 감동을 받도록 합니다. Biblica Theology의 존 오웬은 신학자 안에 내재하고 있는 죄의 위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신자이든 신학자이든 그 사람 안에 있는 죄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내재하는 상태에서 역사한다. 그 역사하는 direction은 너무나 분명하다. 하나님에 대한 반감과 대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선한 상태를 가로막거나 훼방하는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그 어떤 기능을 신학도의 마음속의 죄가 하나이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순결한 삶의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이를 악물고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을 위해서는 온전한 사람이 필요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는 은혜가 필요하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은혜를 성령 자신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하다. 그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방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말할 수 없는 대접을 받습니다. 읽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옵니다. 두려움과 감격 속에서 그 말씀을 일고 깊이 깨달으면 즉각 엎드려야 합니다. 기도나 하고 성령 받는 것만 하려고 하면 못 씁니다. 기도의 간절함 속에서 눈물을 흘릴 때 이 눈이 빛나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성경을 밝히 보게 됩니다. 그것을 찬찬히 읽으면 깨달아집니다. 그것을 끌어안고 그 누구에게 나누어 질 것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들어와서 관통하고 지나가야 합니다. 깊이 들어와서 기도해서 이 말씀이 나를 세우고 건져주는 것을 경험하고 그 다음에 노트를 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펜을 들고 죽 적어 내려갑니다. 그럼 한번만 그렇게 깊이 은혜를 받으면 어떤 때는 6개월 정도 설교할 분량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때에 다시 꼼꼼하게 정리를 하면서 본문을 연구하고 신학적인 참고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고 잘 연구해서 설교를 만들어서 한번 깊이 은혜를 받고 하루만 가는 것이 아니므로 몇 달 동안을 그 문제 속에서 내 삶의 방향을 꺾여집니다. 그래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이 성경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에 깊이 젖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료가 많습니다. 그 중에 어느 주일 하나를 딱 열어요. 꺼내서 한 20주 계속 설교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하시면서 그러셨다고 합니다. 주일이 되어서 성도들이 모두 설교를 듣고 예배를 마치고 떠나갈 때는 “아, 어떻게 하지? 다음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까지는 6일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오늘날 설교에 고갈을 느끼는 설교자들과 얼마나 대조를 이루는가? 쏟아지는 빛을 받으면서 이 교인들이 아직까지도 모르던 신앙의 위대한 세계를 쫙 훑으면서 새로운 빛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고 이것이 끝나기 전에 또 새로운 말씀이 쏟아지고 빛으로 빛으로 온전하게온전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서재에서만 이루어지는 작업입니까? 설교가 무슨 제빵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자의 첫 번째 자격은 그가 구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Pilgrim이 되어야 합니다.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의 교역자를 다 용서할 수 있지만 한가지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추구하지 않는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도와줄 수 있어도 이것은 도와줄 수 없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는 것,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그분을 본받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은 이미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을 지극하게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많은 책은, 성경 이 한 책뿐입니다.
전설적인 설교자는 조지 휫필드는 말하기를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많은 책의 사람이 되기 전에 “One of one book"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한 책이 바로 성경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깊이 읽고 깊이 공부하다 보면 도저히 하나님의 그 계시의 섬세한 부분을 본문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피나게 공부해서 히브리어와 희랍어와 아람어 공부까지 떼어야 합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해야 합니다. 안 되면 살을 깎고 뼈를 갈아서라도 해야 합니다. 기필코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철저히 오늘날은 너무 슬픈 현실이 무엇이냐면 다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싸웁니다. 성경을 가지고 논쟁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성경이 천대받고 있습니다. 마치 성경을 한번도 못 읽은 사람들에게 박사학위를 주던 중세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가 교과서가 되고 성경이 부교재가 되어서 그들의 사상에 풀 텍스트나 제공해 주는 그런 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나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성경을 깊이 사랑하고 거기서 내적인 수준을 터득해 나가야 합니다. 말씀이 어떻게 자신에게 의미를 전달해 주고 그 말씀이 어떻게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지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 속에 살아있게 합니다. 성경 자체를 연구해야 하면서 끊임없이 탐구해야 합니다.
저를 가르쳐주시던 은사이신 고 김희보 박사님은 그런 점에서 탁월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구약을 깊이 공부하셨지만 무슨 신학책을 읽든지 거기에서 나오는 의미 있는 결론은 모두 성경책 난 가장자리에 새까맣게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학 책들은 성경의 종이다. 성경을 섬기기 위해서 있는 책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채플 시간에 올라오시면 원고도 없이 다 낡은 성경 하나 가지고 오셔서 소리 지르지도 않고 천천히 설교하셔도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성경의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에서의 전통입니다.
2) 과정적 요인
과정적 요인도 검토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적으로 임한 것뿐만 아니라 지금 말씀드리는 것처럼 매일매일 성경을 대하면서 생생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총신대 교수님 한 분이 오셔서 역사신학을 하시는 분이신데 강의를 하셨습니다. 의미 있는 책을 한 권 쓰셨는데 참 깊이 있게 잘 쓰신 역사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그 분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 그 분은 한없이 감동을 받았고 더 감사한 것은 이 책을 쓰면서 자기가 거의 7년 동안을 안 빠지고 새벽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어떤 때는 손에 잉크 자국을 남기고 잠드는데도 새벽이면 교회 나와서 엎드려 기도하다가 내 이 저술에 영감을 주시옵소서. 극히 신앙을 하는 자세였습니다. 신학생부터 이런 자세를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습니까? 매일매일 성경 속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추가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한 사람이 말씀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만을 놓고 공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한 사람이 복음에 대해서 알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복음 그 자체만이 아니라 복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성경적 원리에 입각해서 세워지는 복음적 교리의 체계들을 공부하는 것을 포함해서 그래서 그것들을 철저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생은 무릎은 기도하느라고 닳고 팔은 공부하느라고 닳아야 합니다. ‘나는 외과의사다’ 라고 하는 책을 쓴 사람이 외과의사의 조건을 세 개를 들었습니다. 사자 같은 심장, 이것은 무엇이냐면 목회자로 말하면 영성을 입니다. 불굴의 영성! 강력한 하나님과 교통하는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독수리의 눈, 예리한 지성입니다. 성경을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손길, 이것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유하는 기술입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어루만지는 것을 수술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여인의 손길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염통이 어디에 붙었는지 모르는데 여인의 손길만 가지고 무얼 하냐는 것입니다. 또 염통이 어디 붙었는지 잘 아는데 사자 같은 심장이 없습니다. 어느 병원에서 한 사람이 불안하여 서 있는데 어느 간호원이 계속 그러더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옆구리 2cm만 째면 되요. 잠간이면 끝나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 환자가 아니라 의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자 같은 심장과 독수리 같은 예리함, 여인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저도 목회를 하기 전까지는 잘 몰랐습니다. 목회를 하고 신앙을 위한 신학을 공부하면서 느끼게 되는 결론은 최소한 3년, 허락한다면 7년 정도의 생명에 위험을 느낄 정도로 공부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의 이 지능이나 모든 것들을 평균이라고 칠 때 3년이나 7년 정도 저렇게 공부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정도까지 벼랑 끝에까지 가야 합니다.
교의학, 성경 신학, 성경 언어, 고전 언어, 역사 신학 최소한 이 정도라도 이것을 위해서 최소한 3년, 아니면 7년 정도 거의 죽음의 벼랑 끝에 갈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고 나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뜨거운 사랑 하나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가족이나 자녀 중에 하나가 암에 걸려서 누워있는데 부엌칼을 가지고 뛰어 가서 의사가 뭘 좀 안다고 하지만 아무려면 이 아빠만큼 널 사랑하겠느냐? 옷 벗어라 하면 됩니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이유가 어떠하든지 간에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하고 책을 사야 합니다.
목회하기 전에 신학교에 다닐 때에는 책 살 돈이 없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3일씩 4일씩 일주일씩 점심 값을 아끼고 그것을 모았다가 직장에서 점심시간에 막 차 타고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서점에 가서 원서를 하나 사가지고 돌아올 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책 살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한 6개월에 한번씩 서재에 들어가서 책꽂이를 붙들고 한없이 웁니다. 이렇게 많은 지식이 있고 이것들을 내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식들이 내 안에 더 많이 살아 역사하면 내가 진리를 더 옳게 분변 할 수 있고 진리를 더 옳게 분변하면 내가 더 진실한 삶을 살 수 있고 내가 더 진실한 삶을 살면 그 살았던 구도의 삶을 신학적으로 체계화 할 수 있고 그것을 할 수 있으면 성경을 다시 볼 수 있고 성도들에게 더욱 새로운 말씀의 지평을 열어 보일 수 있는데 그래 세월은 너무 많이 흘렀고 지겹도록 쇠퇴하고 목회의 환경은 학문에 전념해서 내 영혼을 위한 지식을 추구하도록 내버려 두지를 않습니다.
오늘 눈에 불을 켜고 성경을 읽다가 한 시간 뒤에는 심방 가방을 들고 나가야 하고 지금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다가 눈물을 씻고 교회 재정에 관한 회계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현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아마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회를 팽개치고 이제 유학을 가겠습니까? 숲 속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서 모든 것은 언제나 가하지만 그것을 특별히 하는 데에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여 삽니다.
오늘도 차타고 오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몸부림 친다고 해도 얼마나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관한 학문을 광범위하게 포괄적으로 깊이 있게 공부하지 못한 내가 이제 이 나이에 얼마나 그 빛을 보겠으며 본 빛을 얼마나 소화하겠으며 소화한 것을 얼마나 나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성도들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성과를 보지 마시고 매일매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저의 걸음걸음을 걸음으로 만족을 하십시오. 어디까지 갈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걸음 한걸음 갑니다.”
그래서 몇 달에 한 번씩 책꽂이 앞에 서서 사다가는 놓았지만 펼칠 때 처음 햇빛을 받는 수많은 책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합니다. 지나가버린 수많은 젊음의 날들 부분적으론 게으름과 게으름이 없고 열심일 때는 가는 방향을 잘못 알아서 너무나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저녁 7시부터 새벽 7시까지 글을 쓰고 있는데 4일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마음대로 안 됩니다. 어떤 의사는 내게 경고합니다. 그러다 돌연사합니다. 겸손해지십시오. 인생의 기간을 수학적으로 나누면 안 됩니다. 나이 많이 먹어서의 10년은 젊었을 때 5년도 안 됩니다. 비효율이 많아요. 신학적인 놀라운 지식이나 신앙적인 탁월한 지혜가 개발되어 있으면 그 gab을 줄일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게 인생을 대처하면 망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을 채찍질해야 합니다. 공부하다가 학교에서 쓰러졌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너무 힘들고 약할 때 우리에게 주님이 계시잖아요. 채플실에 와서 엎드려서 펑펑 눈물을 흘리세요.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너무 약하여 주님도 이런 고난의 길을 가셨죠?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세요. 신학의 정치한 학문들을 신앙적인 풍부한 체험 속에서 하나씩 광대한 세계를 맛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자아상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깊이 있는 신앙의 지식을 깊은 눈물의 기도 속에서 섭취하고 나면 이것이 점점 많아질수록 작은 똑딱배를 타고 파도에 흔들리는 것 같은 신앙생활이었는데 한번 무아지경을 느끼게 됩니다. 도저히 태양을 가로질러 가는 그러나 두말 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심으로 필요로 하는 그런 날을 기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의 과격한 언어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상심에 가까운 부담을 주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때문에 이보다 더 한 고난의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늘 구체적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고백을 여러분 삶 속에서 실현해 가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공급되는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참 빛을 비추고 뜨거운 불을 붙여서 이 어둔 세상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고려신학대학원 2004. 8. 26
3. 천지창조의 목적과 목회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1-42)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입성하셨을 때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하루에 일어난 일은 아니고 이틀 사이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에게 에워싸여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 입성은 엄청나게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때야말로 예수님을 경계하던 종교 지도자들이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군중들이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했고 호산나 다윗을 외쳤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예수님께서 성에 가까이 오시자 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우시며’의 희랍어 단어는 ἔκλαυσεν 입니다. 예수님과 관련하여 눈물을 흘리셨다는 단어가 성경에 2번 나오는데 한번은 ἔκλαυσεν이라고 하는 단어 혹은 그 파생어이고 또 하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던 ἐδάκρυσεν 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의미하지만 여기 나오는 ἔκλαυσεν은 영어의 cry입니다. 큰소리로 목 놓아서 우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들에게 에워싸여서 예루살렘 성 가까이에 오셨을 때에 큰소리를 내어 방성대곡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왜 우셨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목 놓아 우시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함께 따라 가던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시점이 예수님이 우셔야 할 시점이라고 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도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다른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없으니까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밖에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 본문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큰소리로 통곡하며 우신 이유는 성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을 보시고 우시며” 그랬습니다. 여기에 쓰여 진 단어는 ἰδὼν이라고 하는 분사입니다.
그렇게 획일적으로 두 동사가 딱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βλἐπω 라는 동사가 육신의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을 대부분 의미했다면 θεωρἐω 이 동사는 내면을 직관을 가지고 보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대체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바로 그 동사가 여기에 사용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예루살렘 성을 보았고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을 보았는데 양자 사이에 보는 시각은 같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육신의 눈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을 볼 때 통곡하며 울어야 할 어떤 이유도 우뚝 서 있는 예루살렘 성에서 발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 그 이면에 다가 오는 그 무엇을 예수님은 감지 하셨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목 놓아 방성대곡하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보면 예수님은 강철같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회개하는 죄인들에게는 온유하신 분이었지만 뉘우치지 않는 완고한 죄인들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단호하고 강력하신 분이셨습니다. 당신의 생애 동안 어느 한 곳에서도 나약함을 드러내신 적이 없는 강철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무엇을 발견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약한 자가 되어서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계셨으니 이것은 기도의 변형된 형태라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우셨는지 그 이유가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독백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네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으려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목 놓아 우시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뒤로 어떤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고 현재 그 예루살렘에 있는 그 상태에서 무엇인가 예루살렘이 그 속에 서 있는 그 존재의 어떤 상태를 예수님께서 읽어 내시고 그리고 그것이 충분히 통곡하며 우셔야 할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목 놓아 우신 가장 골격적인 이유는 평화에 관한 일을 예루살렘이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이 당시로부터 약 1,500년 전에 출애굽하면서부터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될 성소가 지시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왕권을 펼치시고 거기서 특별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주실 장소가 계시되는데 이동식 성전인 성막의 시절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이라는 곳에 안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학에서 이 예루살렘이 원래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흥미 있는 토론거리입니다. 그러나 이제껏 까지 대충적으로 합의가 되어져 있는 보편적인 의견은 ‘우르’와 ‘샬렘’의 합성어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르’는 고대근동어에서 성을 의미하고 '샬라임'은 히브리어에서 이야기하는 샬렘을 의미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평강의 도성’이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당신과 만나실 중앙화 된 성소를 계시해 주셨을 때 그 성소 속에서 일어나는 가장 의미심장한 핵심적인 사건은 하나님과 평화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 언약관계를 떠나 범죄하여 깨뜨리거나 위협을 하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단칼에 그들을 정리하시고 그들과 언약 맺은 것을 폐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파괴하고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들도 깊이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함으로써 다시 언약관계에 충성을 다하도록 맹세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맺었던 언약이 성소에서 renewal 되기도 하고 언약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던 죄악 된 성품이 innovation을, 쇄신을 그 성소에서 경험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구속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예루살렘이 한 장소로 지정이 됩니다. 그리고 시험은 바로 그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였습니다. 성스러운 땅으로 여겨지면서 그 예루살렘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 예루살렘을 통해서 구체적인 율법이 가르쳐지고 이사야 선지자는 율법이 이 시험에서 나온다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를 통해서 이 세상 나라와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왕권이 사람 왕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유서 깊은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성이 하나님과 관계가 깨뜨려졌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뻔 하였거니와” 여기서 쓰여 진 εἰρήνην는 정확하게 히브리어 םוׂלשָׁ의 희랍어 번역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샬롬(םוׂל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전쟁이 없고 평안한 모든 상태, 갈등과 고통이 없는 모든 평안한 상태를 가리켜서 샬롬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지금도 히브리에 가면 원래 이 샬롬이라고 하는 말은 whole, wholeness의 의미입니다. 지금도 히브리에 가면 빵 가게에 가서 “텐 리 샬롬” 이렇게 말하면 빵을 동그랗게 구운 큰 것을 주고 “텐 리 핫찌”라고 말하면 반을 자른 것을 줍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 םוׂלשָׁ이라고 하는 단어는 εἰρήνην라는 말을 썼지만 사실은 εἰρήνην를 연구해야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םוׂלשָׁ을 연구해야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밑에 깔려있는 생각 자체가 히브리 mind이므로,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할 때 םוׂלשָׁ이라는 것은 온전한 것, 쭈그러지거나 깨지거나 결함이 없이 온전하게 된 상태, whole하게 된 그 상태가 םוׂל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온전한 whole의 개념은 영어의 holy의 개념을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놀라운 상상력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다’ 라고 하는 것은 온전함이라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 사람들의 머리에 있는 자신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Holiness is wholeness.”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저작 전집 제 19권에서 로마서 7장을 해설하는 가운데 24절에 나오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는 그 구절을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화에 있어서 완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사람은 그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를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추구한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perfectness는 결코 이룰 수 없는 goal이지만 경건한 사람들은 그것이 도달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미리 그 완전함을 추구하는 노력을 거두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그의 Holiness가 되는 것이다.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vision을 따라서 혀가 빠지도록 일하는 것, 그것이 Holiness가 아니다. 자기가 가진 꿈을 위해서 지사충성하다가 죽어버리는 것은 일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Holiness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관한 모든 뜻을 다 받아들이는 것, 그 선한 창조의 상태의 기업을 충분히 이어가는 것, 그래서 H. Bavinck는 자기의 창조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모든 세계의 창조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모든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과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한 가지 방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계명을 주시므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복종하고 전방위적으로 순종하되 모든 성실함과 일체의 부지런함으로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그 목적 하나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자기를 다 내주면서 사는 사람, 이것이 바로 피조물인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삶이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라고 하나님만 위해서 살면 무슨 재미로 살아? 이렇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속에 죄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면 되었지, 아무려면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나 같은 피조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 때문에 그곳에서 한없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사상입니다. 여러분이 너무 좋아하는 하나님 주권 사상입니다. Coramdo, Soli Deo의 삶,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거기에 온전히 순복할 때 하나님과의 샬롬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렸을 때는 어떻게 되냐면 그렇게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탈해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깊이 가슴이 아프도록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 참회의 아픔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살았을 때 맛보았던 즐거움을 반드시 능가합니다. 그 하나님을 떠난 창조의 목적을 이탈한 즐거움이 다시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깊이 참회하는 과정을 통하여 죄에 대한 혐오감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라도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다시 샬롬을 누리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께 그런 놀라운 샬롬이 생기게 되면 그 샬롬이 사람들에게로 흘러들어갑니다. 어떤 방식으로 흘러 들어가는가 하면 제일 먼저 자기와 같이 이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마음 아파하고 그들을 돕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샬롬이 흘러들어갑니다. 두 번째는 내가 하나님과 샬롬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넉넉한 자원으로 그 모든 창조주의 부요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향하여 너그러워집니다.
목회자를 만나 보아도 목회가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잘 되고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으면 어디를 가도 너그럽습니다. 밥을 먹어도 밥값을 내려고 하고 무엇인가 선물을 해 주려고 합니다. 교회의 돈도 없고 나가라 들어가라 맨날 그러고 얼마주면 나가겠는가? 매일 싸우고 그러면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너그러운 자리를 펼치는 것입니다.
이때 나타나는 것은 자비, 즉 דסֶחֶ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어주는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평화를 이 예루살렘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뜨려진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무엇을 생각하면서 통곡하시는 것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오래도록 이 예루살렘의 부패를 참으시다가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후 70년에 있었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의 침공이었습니다.
제가 그 날짜를 모두 외우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 용서하십시오.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됩니다. 온 성을 에워싸게 됩니다. 그때가 2월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모든 보급이 차단되고 포위된 상태에서 약 6개월 동안 대치하게 됩니다. 모든 보급이 다 끊어지고 그 성은 비참한 상황이 이르게 됩니다. 6월 17일에는 모든 물자가 끊어져서 늘 드리는 제사조차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 후로부터 안토니오 요새가 점령됩니다. 그 후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 총공격을 받게 되고 예루살렘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참한 살육의 현장으로 변하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속에서 죽었는지 역사 기록에 의하면 피가 도랑이 되어 흘렀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그 속에서 아이를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있었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살육이 아비귀환의 지옥과 같은 광경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아직 아무도 그런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예수님께서 시간을 초월하여 다가오고 있는 그 역사를 아셨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비참하게 멸망하는 그 광경을 미리 보고 계셨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그 예수파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같이 흐릅니다. 예루살렘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 이때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당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도 망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브라이트 같은 학자는 이 문제를 신화적 문제로 발전시켜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상이한 두 신학이 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Main stream을 구성하고 있었고 또 하나는 아주 Minority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Main stream이 무엇이냐 하면 아브라함 언약의 신학입니다. 아주 작은 Minority는 모세 언약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렇게 설명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들 자체가 상충하는 언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언약이 모두 은혜 언약 안에 포함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단, 모세 언약은 전적으로 은혜 언약으로 보느냐 아니면 행위 언약을 약간 포함하고 있는 혼합된 언약이냐에 따라서 신학적인 견해들이 나뉩니다. 어쨌든 커다란 흐름이 모세 언약도 그 아브라함 언약과 함께 은혜 언약에 포함해서 흐릅니다. 그 언약이 사람들에게 실효되는 방식은 좀 다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무조건적인 은총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언약을 맺으실 때 ‘너 똑바로 살아라. 안 그러면 반 죽고 잘 살아 내가 줄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순종을 기대하시면서 은총으로 하나님께 다가가십니다. 이스라엘 구약 백성들이 그 생각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의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계속 떠올렸던 이유가 우리에게 은총만 약속하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무한히 계속되는 은총을 약속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죽음의 칼이 동시에 들어옵니다. 지키면 너희가 살고 내가 너희를 복주고 복주지만 너희들이 이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는 무서운 죽음의 개념이 함께 들어옵니다. 이것은 본래적으로 거절하는 겁니다. 그러나 많은 선지자들의 입장은 그들의 판단에 그들의 용어를 빌자면 많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신학은 오히려 아브라함의 언약을 포함하지만 직접적으로 용서의 언약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한없는 은총이 하나님이시고 용서를 빌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면 얼마든지 용서해 주시고 다시 힘을 주시고 샬롬을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죽음의 칼을 내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희망에 충실한 사람이 됩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이나 이런 사람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이사야 59장에 보면 원래 있었을 명백한 히브리어 본문을 70인 역에서 번역할 때 신학적인 작업을 해서 거기에서 조건적 죽음의 개념을 빼버리고 무조건적 은총의 개념을 집어넣는 그런 방식으로 언약을 풀이하는 해석들이 나옵니다. 이것이 모두 다 은혜된 것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난 오늘날의 시대를 보면서 공정성을 잃어버린 방식으로 기독교 신학을 전파하고 있다 라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다른 것은 다 망해도 예루살렘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에 이런 꿈이 매우 잘못되었다 라는 것을 하나님은 이미 법궤를 매고 블레셋과 싸움에 나갔던 아벡의 전투에서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하나가 안 되었으니까 하나님을 모시고 간다고 하면서 법궤를 가지고 나갔으나 졌어요. 아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야훼의 종교가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지배적인 의미에서 영적인 특성이 아니라 인격적인 의미에서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면 언약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나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당신의 임재를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 해 주십니다.
오늘날 보세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게로 예배 시간을 옮겨 방자하게 살아가는 지혜로 삼아 지혜의 복을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껏 원하는 대로 사는 지혜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택한 백성들의 표가 아니라 버림 받은 백성들의 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예루살렘을 보면서 통곡하면서 우셨습니다. 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았을 뻔 하였거니와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가장 큰 자산이 무엇입니까? 세계에서 제일 큰 신학교를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자산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보면 가난하기도 하고 부하기도 하고 그렇게 삽니다. 저도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데모도 하고 그랬지만 꼬박 교수님 연구실에 앉아서 공부했습니다. 기도하고 하루에 거의 13-14시간 공부했습니다. 공부하고 일어나면 하늘이 돕니다. 몇 번이고 주저앉았습니다. 그때는 뭔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교수가 되면서 여유가 있어지고 무엇을 사 주지만 그런 것들은 다 껍질입니다. 언제 우리가 가장 부요한 삶을 살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평화를 누릴 때입니다.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우리는 바로 그것을 외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이 세상 모든 것과 원수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과 당신을 떠난 말할 수 없는 백성을 향해 오래도록 인내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네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여기에 희랍어 성경을 보면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καὶ 이것은 and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even입니다. 직역을 하면 “너라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오늘날 네 눈에 숨기웠도다” 이스라엘 백성이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될 때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백성을 자랑스러워하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는 모든 피조물이 communication에 의해서 신성의 영혼에 충만한 것을 누리고 있었고 거기에서는 창조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은 만들어 놓고 고정된 창조의 상태에서 영원히 만족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양적인 연결을 통해서 당신의 신적인 영광의 충만한 것을 끊임없이 흘려보낼 때는 뭔가 경향성을 가지고 일정한 방향으로 흘려보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들어가는 신성의 충만한 것의 유출 속에서는 목적론적인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이 중요한 것은 창조하신 세상이 어느 쪽으로 가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영과의 충만한 신성을 그들에게 흘려보내고 그들을 관리해 나가고 인간을 관리해 나가는 지점에 있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리로 이행하고 있기는 했지만 순간순간 하나님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순간순간 완전하면서도 더 완전을 향해서 나가고 있는 완전으로부터의 깨달음으로 완전으로의 이해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움직입니다.
이것을 신학 역사에서 가장 훌륭하게 설명한 사람이 18세기에 경험론적 철학을 렌즈로 해서 이 기독교 역사와 사람을 보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입니다. 천국에 가는 그의 논문에서 “하늘나라는 고정된 상태로 행복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더 찬란하게 증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행복도 계속해서 증진됩니다.” 천국에는 실재에 있어서 아침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영광의 빛을 보면서 성도들은 증진되는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지옥은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형벌이 주어지면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분노가 순간순간 더 그들에게 알려지면서 거기에 더 무서운 양심의 가책과 치열한 형벌이 점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설명하기를 창조의 하나님으로 그 선한 상태를 이탈한 인간의 죄가 무한하기 때문에 형벌 또한 무한대 인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에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 창조하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목적을 향해서 이행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모든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바다에 파도와 들판을 가로지르고 부는 바람소리와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와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반짝임과 아침에 내리는 이슬비 그 아름다움 하나하나가 오케스트라처럼 되어 연주되고 있을 때 인간의 지휘는 무엇이든지 거기에서 연주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어울러서 창조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지휘자였습니다. 이 지휘의 이것을 싫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입니다.
제왕적 가치관이 바로 죄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컨닝하고 도둑질하고 사기치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목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다른 교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태도 그리고 다른 것들로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의 경향, 모든 것들이 다 죄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죄인이라는 사랑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일반 죄 속에서 사람들이 계속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알 수가 없습니다. 어제 설명 드린 것처럼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들을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원한 세상을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영원한 것에 대한 모든 관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대부분의 관심을 잃어버렸고 남아 있는 것은 곡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는 당신의 본질을 훼손했지만 당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알려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가족, 한 민족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계시를 힘입고 그분들에게로부터 오는 감화를 힘입고 영적인 연합을 이루며 살면서 죄와 함께 끊어져버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자원들을 공급받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독특한 윤리를 따르고 독특한 방식의 삶을 살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저들이 왜 다른 사람들이 거의 같은 삶을 사는데 왜 저들은 유별난 삶을 살까 하고 봤더니 그 뒤에 그들과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언약 백성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지식의 담지자(Knowledge better)가 되는 것입니다. 지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택한 것만 가지고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은 다른 도시는 모르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루살렘 너만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알고 평화가 깨뜨려졌을 때 다가온 역사의 뒤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발자국을 헤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많은 도시들에게 외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도스카 라일은 자신의 책 ‘영웅과 그의 시대’에서 “설교단은 이 세상 역사의 뱃머리입니다.”
그래서 한 시대의 교회의 중요한 것은 그 시대를 향해서 금과 나도 있거니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명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이런 고백을 향하여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세상이 도저히 줄 수 없는 것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 자신입니다.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미담이나 만들어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신문 지상이나 오르내려서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그러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 아닙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지식의 담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삶이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부터 말미암았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우리 이 세상의 무지한 죄인들에게 참된 지식의 빛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빛을 담지한 사람들이 동시에 빛의 담지자가 되어서 그 빛을 가로지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빛들로 나타나는 삶들을 살아야 합니다. 빛들로 나타나는 것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궐기대회를 한다고 빛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인지 누가 꾸며낸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교회 역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건한 사람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을 방문했을 때 그때 시대에 교황은 이노센트 2세였다고 합니다. 수도사에게 교황은 큰 창고를 보여주면서 거기에 있는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를 보여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보게 이제 우리는 굳이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어졌네.” 그랬더니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이시여 그러므로 이제 교회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도덕주의는 율법주의보다 더 나쁩니다. 시간이 없어 더 이상 말하지 못하지만 교회 다 말아 먹는 것입니다. 큰일 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지식의 담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본래의 사명이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거의 다 팽개치고 매일 북 치고 장구 치고 사람들 불러 모아서 교회에서 댄스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분명합니다. 세계 선교의 역사를 보면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믿는 백성들에게 물같이 뿌려집니다. 그들이 이것은 주체할 수 없습니다. 배에서 넘쳐나는 것입니다. 물 흐르는 듯이 선교를 나가고 교회를 개척하고 거기서 성경의 말씀을 전해서 넘쳐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은 틀렸어야 될 것 아닙니까? 다른 도시는 잠들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예루살렘은 그러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사명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과의 평화인데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실하였습니다. 이 속에서 오늘날의 교회를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통곡하며 우시는 그 마음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예수님은 그냥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자기 인생의 계획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드리는 것입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역시 하나님 없이 이루어지는 사람들 사이에 그런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서 임하는 놀라운 평강의 상태입니다.
조금 더 설명해 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목제를 드립니다. 화목제를 민족 전체를 위해서 드립니다. 모든 형제들이 어울리면서 먹습니다. 그 공동체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 함께 어울려서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약 공동체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잃어버린 곳에서는 항상 극단적 이기심들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교회에 상채기를 내는 것입니다. 각자 각자가 하나님의 서원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하나님도 자기의 수하에 두려고 하는 제왕적 가치관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경종 같은 것은 자연히 없습니다.
헨리 스쿠걸이라고 하는 경건한 청교도는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 속에서 “한 신자가 진실한 신자인지는 그에게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과 참회를 보고 알게 된다.”
여러분들이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자기의 불순종과 내재하는 죄악, 겉으로 드러난 악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는 참회의 삶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BAD CHRISTIAN입니다.
무언가 하나님이 준 어떤 것을 안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BAD CHRISTIAN, 나쁜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과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어기고 그분을 거슬려 살면서도 참회할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결국은 그 속에 있는 죄가 그의 모든 활동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 죄라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표현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ἔχθρα εἰ θεόν 하나님에 대해서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into GOD 하나님 속속들이 파고들어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입니다. 그가 신학활동을 하든 목회를 하든 찬양사역을 하든 선교를 하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근본적으로 죄들의 본질적인 성격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게 쪼개도 성격이 똑같습니다.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 하지만 늘 듣는 제가 만들어낸 비유가 있습니다. 큰 탱크둘이에 똥을 잔뜩 실고 출렁거리며 차가 지나갑니다. 더럽지요? 뚜껑이 열려서 길거리에 쏟아진다고 생각해보세요. 휴지조각과 더러운 것이 쏟아지며 지나가요. 더러운 그것을 채에 잘 걸려서 물을 만들어 스프레이 넣어서 안개처럼 뿌렸어요. 동일 본질입니다. 작은 것은 양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양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적의입니다.
ἔχθρα εἰ θεόν 정지의 개념이 아니고 이동의 개념입니다. 파고 들어갑니다. 하나님을 속속들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정체입니다. 그것이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참회를 안 합니다. BAD CHRISTIAN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기질이나 혹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서 매일 뼈 절이게 참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일주일에 한번 참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은혜의 상태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분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는데 몇 시간을 기도하는 지 그것은 기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눈물을 흠뻑 쏟아서 마음이 다 짓이겨진 상태가 될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그렇게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철저히 짓이겨진 상태가 되었을 때 히브리말로 עקַבָּ בלֵ의 상태가 되었을 때 바로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통회하는 마음, עקַבָּ בלֵ의 상태가 되었을 때 문자적으로 철저히 짓이겨진 상태가 되어 눈물을 쏟았다 일어날 때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슬려 살고자 하는 어떤 위기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굉장한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런 상태를 사모하면서 우리가 다 그런 상태에 도달하지는 못합니다. 사모하면서 끊임없이 통회하고 깊이 진실한 참회입니다. 죄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지으면서 참회가 잘 안됩니다.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로 모든 사람들이 하늘의 이상에 날아오르는 두 날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는 믿음, 하나는 참회였습니다. 이 두개를 통해서 끊임없이, 이 두개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끊임없는 참회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참회의 눈물을 닦고 나면 항상 굳센 믿음이 생깁니다. 이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참회가 거의 없으니까 한번 하나님의 관계가 망가지면 복원이 안 됩니다. 물론 죽으면 천국은 가지만 우리가 천국 가려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 이런 것이 무엇이든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참회하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이 물밀 듯 밀려옵니다. 그러면 대부분 은혜와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는 나의 구원과 계획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생겨납니다. 제왕적 가치관을 포기하고 피조물의 위치에서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 부복하게 되니까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구를 사귈 때에도 회개안하는 사람하고는 가까이 놀지 마세요. 웃으며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귀기는 사귀지만 깊이 사귀지 마세요. 하나님의 사람 요한 웨슬레가 자기의 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일생동안 시간을 아껴 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과 계속 교제를 해야 되는 사람인지 그러지 말아야 되는 사람인지를 첫 만남에서 판단했다” 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절약하면서 만날 수는 있지만 신앙의 깊은 교분을 나누는 친구로서는 살아있는 사람들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옥스퍼드 Holy clup이야기들이 다 거기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나보다 공부를 못할 수도 있고 교회에서 별로 대접을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능력이 모자라서 남들 좋은 목회지 찾아가는데 계속 찌끄래기처럼 처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이 세상에는 에베레스트 산이나 몽불랑 산과 같이 높은 산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동산들 중에도 아름다운 동산이 너무나 많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가 만약에 진실한 참회를 하고 혼자 채플실에 나와서 흐느끼며 늘 참회합니다. 그런 선생님들을 깊이 존경하고 그런 학우들을 보석처럼 여기면서 가까이 두면 여러분들의 경건에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부지런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갑니다. 그 지식의 담지자가 되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고정적으로 받아서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은 안 됩니다. 그것은 한 달란트 맡은 종입니다. 악하고 불결한 종입니다. 그래서 개혁된 신학은 끊임없이 개혁되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 세대로부터 받아서 그것을 내가 부지런히 빛으로 삼아서 더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진지하게 눈물을 지면서 살아서 더 많은 풍성한 진리를 거기에 보태어서 다음 세대에 전수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가 더 많은 빛의 담지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까? 노가다 목회나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목사를 떼어 버리고 집사나 봉사하다가 죽으십시오.
“너 예루살렘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마저도 몰랐구나.”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모르는 이유입니다. “지금 네 눈에 가려졌도다.” 희랍어로 έκρύβη 수동태입니다. 누가 와서 못 보도록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지성이 소경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어둠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은 영적으로 어둡습니다. 어두우니까 총명의 판단은 흐려지고 생각은 눈멀매 종속되고 마음은 돌같이 굳어져서 웬만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이 웬만큼 만져주셔도 참회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이 세상에 살면서 마른 눈으로는 천국을 볼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죄를 인하여 참회하고 이 세상에서 도처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때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지만 하늘나라를 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가려집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더 궁금한 것은 왜 이렇게 가려지게 되었을까? 이어서 나타나는 기사가 성전 숙정입니다. 비둘기파는 자들을 내어좇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는 장면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면서 이 일을 하시지만 어떻게 보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원래 처음에는 자기가 기르는 짐승들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를 드리는데 때로는 먼 길을 걸어서 와야 합니다. 짐승을 가지고 오려면 먹이, 배설물, 이런 문제가 있고, 오다가 어디 찔려서 상처라도 나면 제물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편리한 방법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사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전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돈 문제도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세 나라 돈이 동시에 통용되었습니다. 헬라, 로마, 히브리 돈이었습니다. 요즘의 말로 표현하자면 히브리돈은 양화였고 헬라 돈과 로마돈은 악화였습니다. 희랍 돈과 로마돈은 명목가치가 실질가치보다 훨씬 높아서 법으로 통용을 강요하였습니다. 히브리 돈은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일치하였습니다. 그래서 명목가치는 만원이라고 그래놓고 실질가치는 오천 원밖에 안 되는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는데, 돈을 가져와서 히브리 돈으로 바꿔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세미나하면 뒤에 와서 책하고 tape을 파는 것이나 비슷한 것이었겠죠? 그렇게 한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그것을 숙정 한 것입니다. 이유는 편한 방법으로 제사를 드리고 편한 방법으로 돈 바꾸는 행태들 때문에 진노한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행위 가운데 숨겨져 있는 탐심과 마음 드림이 없는 제사의 정신, 경배의 정신 때문에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다 내어 쫓았습니다. 더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기도와 결국은 이야기 전개를 죽 보면 하나님과 평화를 잃어버리고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성전이 있습니다. 멸망을 눈앞에 도성 안에는 항상 잠들어 있는 교회가 있기 마련입니다. 잠들어 있는 성전이 있었고 그 성전 한 복판에 있는 영적 문제는 그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이사야 5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알다시피 일반적으로 볼 때 제3, 제4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이사야서를 이사야 선지자의 단일 저작으로 보고 1-39장이 1부이고 40-66장까지가 2부입니다. 1-39장까지는 공교롭게 성경의 구약 39권과 일치하고 40-66장까지는 공교롭게 신약의 27권 성경책과 일치합니다. 39장까지의 분위기와 40장 이후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40장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 내 백성에게 정다이 말하라” 하면서 마치 고통 받는 백성들을 향해서 말할 수 없는 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다가 가셔서 그들을 39장까지가 때렸다면 40장부터는 어루만지시고 싸매시는 하나님의 부성애를 보여줍니다. 53장에서 메시야가 예언이 되고 56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속사의 물결 위에서 찬란한 영광을 보면서 회복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회복되고 온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주의 영광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는 축복된 영적 상태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놀라운 축복의 변화가 구속사적으로 성취되는데 그때에 아주 특이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교회에, 성전에 괄목할만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םיםָּעַהָ־לכְָלְ ארֵקָּיִ הלָּפִתְּ־תיבֵּ יתִיבֵ יכִּ 직역을 하자면 ‘왜냐하면 יכִּ 내 יתִיבֵ 집은 일컬어질 것이다. הלָּפִתְּ־תיבֵּ기도의 집이라 일컬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םיםָּעַהָ־לכְָלְ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함’ 여기에서 이것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뉘앙스가 이렇습니다.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고 번역이 되지만 엄밀하게 보자면 그것보다는 לְ가 목적을 위한 전치사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속의 영광이 나타나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샬롬을 누리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찬란한 영적 번영을 이루게 될 때에 성전에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특징이 일어나는데 그 집이 기도의 집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기도의 집이 되냐면 םיםָּעַהָ־לכְָלְ의 기도의 집이 된다는 구원받을 수많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그 중보기도의 집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 부흥을 제외하고는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운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가 이 세상에 살면서 고도로 성화된 상태가 될 때 그때 그는 주기도문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지 않는 것을 통해서 너무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그 하찮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대적해서 주님의 뜻을 어기며 살아가는 것을 보며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면서 어둔 세상 한복판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example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예수님 생애 전체의 농축판입니다. 예수님 생애는 주기도문이라는 렌즈로 보면 예수님의 찬란한 빛깔로 나옵니다. 이것이 교회의 고유한 사명입니다. 그리고 바로 목회자는 이런 일들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세상, 주님의 창조의 목적을 떠난 세상, 자신의 힘으론 도저히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구속을 이루시고 그들을 위해 형벌을 다 당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 이것을 보고 들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이 세상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그들의 영혼의 고통을 내가 본 것처럼 그렇게 이 세상 한 모퉁이에서 흐느껴 울고 눈물을 씻은 후에는 그 기도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사람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오늘날에도 교회에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자신의 힘으로는 스스로의 죄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회심하지 못한 이 세상, 도시를 위해 가슴이 저미도록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바로 그 불씨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불러주신 사람입니다. 아무렇게나 먹고 생각하고 살면 안 됩니다. 큰일 납니다. 여기에서 기도에 관한 치명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제가 뭔가를 물어 볼 테니까 아멘 그렇게 말해 보세요. 제가 존경하는 스승 존 오웬은 그의 논문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라고 하는 생애적인 논문 속에서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리를 내지 마라. 그대로 따르기에는 동의가 안 되는 면이 있지만, 첫째 대표 기도할 때, 둘째 성령께서 어찌할 수 없이 부르짖지 않을 수 없게 할 때 중요한 강조점은 소리를 내고 안 내고가 아니라 어떤 틀에서 기도하면 안 되고 깊은 내면의 속에서 진심을 담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spiritual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 인도할 때도 우렁찬 소리로 기도해야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조작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호소해서 진심으로 마음에 없는 형식이나 기도문에 따라서가 아니라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기도, 이것이 영혼의 쇄신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신답습니다. 이것은 예외로 합니다. 열렬하게 기도하고 싶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잘 됩니까?
개척교회에서 설교를 한지 1년이 채 안되었을 때입니다. 사명감 하나로 출발했으니까 뭣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한번 올라가면 성경을 다 털어놓고 오려고 하는 것처럼 한번 올라가면 100분, 140분씩 설교를 했습니다. 그 모든 고난을 이기고 성도들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수요예배를 끝났는데 10시 10분이었습니다. 내려오는데 등에 땀이 죽 나고 기운이 없는데 어떤 젊은이가 걸어오더니 “목사님, 저 좀 상담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사실 우리 교인이 아니면 상담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냐?” “저, 총신신대원을 졸업한 학생입니다.” 내 방도 없을 때였으므로 사무실로 들어가 앉았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설교 잘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아라.” “열렬히 기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열렬히 삽니까?” 가만있습니다. “열렬히 살지도 않는데 열렬한 기도가 나옵니까? 집에 가요” 굉장히 슬픈 기색으로 이 청년이 돌아갔습니다. 6개월 후에 소식이 들어왔는데 엄청난 충격을 받고 놀랍게 변화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열렬한 기도를 드리기 싫다. 나는 중언부언 기도하고 싶고 가식적인 기도로 꽉 채우면서 일생을 노나리처럼 살다가 하나님 앞에 찍히고 싶다’는 사람 있겠는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정도 되면 언제가 그렇게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 기도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그리움들이 있을 겁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좀처럼 그때처럼 기도할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은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깊은 자기 성찰과 노련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만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냐면 기도 자체가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영혼의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상태가 순결하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있고 그분의 선한 의지와 목적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서 나 자신의 영혼이 거기에 충만히 영향을 받고 그 영향에 따라서 내가 전적으로 그분께 부종할 때 열렬해지고 싶지 않아도 열렬해 집니다.
가서 산에 올라가서 두 팔 벌리고 소리만 고래고래 지르면 무엇 합니까? 목만 아픕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개혁과 그 찬란한 경건을 가지고 있었던 puritan의 시대로부터 이어져 나오는 소위 말하는reformed legacy 개혁주의 유산들이 보석과 같이 소중한 것들이 굉장히 많은 부분들의 거의 다 실종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정사(scrutiny)라고 것입니다. 거기서 ‘정’은 꼼꼼하다 라고 할 때 정이고 ‘사’는 살피는 것입니다. 기도도 아니고 성경을 읽는 것도 아니고 꼼꼼하게 말씀의 빛으로 자기가 한나절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마치 자기가 아닌 남에 의해서 조사를 받는 것처럼 점검 받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심지어 루이스 밸리 같은 사람은 하루에 3번을 실천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항상 자신의 삶을 살펴가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 역사에서 경건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나무는 무지의 토양위에서는 자란 적이 없습니다. 무지의 토양위에서 잠간 반짝이고 자라는 나무는 열광주의라는 나무입니다. 거룩한 경건은 탄탄한 지성의 토대 위에서 자랍니다. 거기에서 철저하게 이 경건의 비밀이 무엇이고 어떻게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냐고 하는 것들을 그 죄를 이긴 후에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의 계획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철저하게 탐구하는 것이 신학의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입니다.
신앙을 위한 신학이 되어야지 신학을 위한 신앙이 되어선 안 됩니다. 신학을 위해서 신학을 한다고 하면 교리를 위해서 교리를 섬기다가 수많은 사람을 불태워 죽이고 찔러 죽인 카톨릭의 뒤를 따르는 것밖에 무엇이 차이가 납니까? 다 바보 같은 일입니다. 나중에 가면 다 세상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엔 세상의 ground에서 놀았는데 지금은 교회 ground에서 노는 것입니다. ground만 틀려졌지 기본적으로 죄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는 모습은 다 똑같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그 자체가 기본적으로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순결한 상태가 되고 성경적으로 순결은 뭘 비워버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비우려고 아무리 노력을 하지만 비워지지 않습니다.
Regent College의 학생이었습니다. Regent College에는 지금은 계시지 않지만 세계를 움직인 20세기의 복음주의 작가인 J. Packer가 계셨습니다. 강의를 듣는데 로마서 강의를 펼치는데 그분의 탁월한 영성에 의해서 해석되는 로마서의 진리의 파노라마를 보면서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료를 먹으려면 학교에서 나와야 하는데 음료수 파는 그 바로 앞에 도색 잡지가 있어서 슬쩍 쳐다보았는데 가슴에 꽂힌 것이에요. 또 보는데 관심이 증폭되는 것입니다. 그 학생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이 발각난다면, J. Packer의 영광스러운 기독교 교리를 듣고 도색 잡지를 의도적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이상한 여자들 그림을 보면서 상상을 채우고 그것이 지워지지 않아요. 어느 날 이 착한 학생이 이 지구상에서 음료수를 파는 집이 마지막 집이라고 할지라도 그 집에 가지 않을 것을 결심합니다. 그 순간 죄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환희가 일어났는데 저녁때 집에 갔는데도 기도가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길을 이기고 적어도 내가 그런 정도의 똥차하고 박치기를 한 것입니다. 어차피 기도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늘 경험하는 바이지만 이것은 정말 놀랐습니다. 이 죄의 미묘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입니다.
존 오웬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한사람의 경건의 깊이는 남이 인식하지 못하는 내면의 죄를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불 받은 것이 영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순결하게 사는 것이 경건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순전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창조의 목적을 다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는 상태에서 그때에 내 마음의 틀(frame),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하비투스, 이 속에 있는 내 안에 있는 경향성과 하나님이 일하려고 하는 그 지향적인 경향성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때 이 기도는 열렬한 기도가 되어서 흘러나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향이 그 신자에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교통의 삶입니다. 은사를 소유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입니다. 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옵니다.
참된 성도와 거짓된 성도의 차이는 진실 하지 않은 삶의 가치관은 행복입니다. 자기만족적 행복입니다. 이렇게라도 하면 뭔가 나의 행복이 증진될 수 있지 않을까? 관점 자체가 자기 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제왕적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의 표지는 이 세상에서 행복해 지는 것 보다는 이 세상에서 거룩해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거룩해진 그 깊이만큼만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과 실제적인 communion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인 communion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결국 일에 치우는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일에 overload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grace overflowing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속에서 넘쳐나는 사람,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만들어집니다.
은혜는 나에게서 흘러넘치지만 그 은혜의 본질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것이다. 남을 가르쳤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사람이 나의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나 정도 하고는 언제든지 헤어 질 수 있는 사람, 누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원하신다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목회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잊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은 기억되는 것, 그런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로막는 것이 죄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탐욕으로 나타난다. 탐욕과 하나님 앞에 헌신되지 않은 편의주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결국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 내면이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로 있고 그 속에서 내 영혼에 대하여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한 성찰을 하는 것, 이것이 기도의 본무입니다. 성찰이 없는 기도는 이방인에게 드리는 제사행위입니다. 자기 성찰이 없는 기도 행위는 이방신에게 바치는 인본주의적 열광입니다. 헌신 된 것 같아도 결국은 그 사람은 절대로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결국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성찰하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어떻게 믿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끊임없이 목회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을 잘 섬길 궁리를 하고 미래의 비젼도 꿈꾸고 영혼도 돌보고 무엇이든지 다 하지만 그런데 그런 작업이 이루어진 마지막 결과는 자기 밖에 있어서는 안 되고 자기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됨됨이는 결코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됨됨이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었는데 어떤 하나님의 숨결도 느낄 수 없고 하나님의 의해서 이 기도 속에서 거절되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존재적으로 하찮은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구속해 주신 자녀라는 점에서는 존귀한데 지금 너무나 멀리 왔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하찮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막 흘러들어옵니다. 성경을 폈는데 주님의 음성이 막 들립니다.
♬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나는 지금 핍박과 고난으로 가득 찬 상태에 있습니다. 육신도 병들었고 공부도 많이 못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친밀함이 막 부어지는 것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교통의 행복을 느낍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성자로부터 은혜를, 성령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한없는 사랑과 은혜와 위로를 다 경험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그는 하나님 앞에 매우 의미 있는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주님의 구속받은 백성인데 하나님도 차별 대우하시나요? 물론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똑같이 대우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끝까지 그 구원을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많이 성화되고 끊임없이 참회 속에서 자기를 버리고 부패한 자기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주님을 닮으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수없이 기도해도 안 듣는 그 기도를 그 사람이 기도할 때 들어주십니다. 증거가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아합의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을 때에 누가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시선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사람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하늘을 열고 비를 내리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이 나를 유명한 목사로 유명한 선교사로 큰 교회를 하는 일군으로 기타 등등으로 우리를 아무리 불러주어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그것과 아무 관계가 없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ἐνώπιον του κυρίου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두 눈앞에서 What I am? 나의 됨됨이가 현재 무엇인가? 우리 안에 이렇게 비둘기파는 사람들, 돈이나 몇 푼 바꿔서 이익을 착복하려는 탐심,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에 가득한데 거기서 열렬한 기도가 쏟아져 나온다면 성경을 다시 써야합니다. 그러니까 쏟아지는 기도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이 일은 고단한 성화와 인내의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전적인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는 “일생을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서 산 성도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합니다.”
매 순간을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 잃지 않으며 즐겨 고난 길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죄와 유혹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기 위해서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면서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의 모든 핍박을 기꺼이 받으면서 안으로 나는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주께서 오시는 그 날에 흠도 없이 점도 없이 주 앞에 나타나리니 내 신앙의 정절을, 이 모든 순결을 간직한 채 오직 그분, 한 분의 신부로 내가 나타나리라 그런 종말 사상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들을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은 이 기도는 죄죽임의 기도의 열렬함은 죄죽임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기도의 열렬함을 통해서 죄가 죽기도 합니다. 이 reformed 전통 가운데서 이 경건의 유산 가운데서 사라져 버린 것이 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아니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Bible says 하면 논란이 많으나 Calvin said 하면 다 끝납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를 할 때 토를 다는 사람은 자유주의자로 안 찍혀도 Calvin said 했는데 거기에서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하면 찍힙니다. 그렇게 교주처럼 떠받드는 칼빈주의,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공정하게 공부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 분의 성화론, 교회론을 읽어보면 완전히 성화론적 교회론입니다. 결국은 성도가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 고통 하는 세상에서 순결한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동안에 당하는 이 고난을 자기 자신을 성화론적으로 주님 앞에 봉헌하는데 그 성화의 결과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교회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머리이신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피 절이도록 그의 신학에 배어있습니다. 다 어디로 갔는지...
그 중의 중요한 교리가 Doctrine of mortification 정확하게 말하면 Doctrine of mortification indwelling sin in believers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죽임의 교리입니다. 그 죄를 롬8:13에 기초해서 죄를 죽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로부터 기독교 경건에 가장 기초적인 basic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청교도 죠셉 벌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책 속에서 “성도가 그리스도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린 것은 오직 하나 때문이다. 그에게 참된 죄 죽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참된 죄 죽임이 없는 한 그는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현재적으로 느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혼돈스런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한번에 처방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유학한 후배가 나에게 여러분들이 대단히 섭섭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에게 동의를 했습니다. “선배님, 논문을 썼는데 다 객관적인 상태에서 조사를 해 보았는데 보수적인 교단일수록 복음을 전하지 않아요. 회피를 해요. 오히려 순복음 교회에서 복음을 전해요.” 그 사람들은 복음의 비밀까지는 다 몰라도 복음을 많이 전한다고 합니다. 동의하기가 힘들지 않아요? 무엇이 그러냐고 했더니 그쪽에서 나오는 설교집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이야기는 자주 나온다고 합니다. 장로교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아예 사라져 버리고 고난 주간 때 한번 나온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여러분 자신이 혹시 예배를 드리면서 진짜 그리스도 십자가아래서 그 떨어지는 핏방울에 젖어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의 은혜에 사로잡혀서 증거 하는 설교를 듣고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서 울어 본 기억이 얼마나 있습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옥스퍼드 채플에 가서 설교를 하고 나왔을 때 그 연로하신 학장의 부인이 존스 목사님의 손목을 꽉 잡으면서 “제가 이 학교에 온 이래로 여기에 앉아있는 옥스퍼드의 이 지성인들을 죄인이라고 보고 설교하신 분은 당신이 최초였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의 안에 있는 죄를 어떻게 죽이느냐 까지는 내가 지금 말할 수 없지만 은혜는 죄를 죽이고 죄는 은혜를 죽입니다. 기도도 역시 같이 죽는 것입니다. J. Lyle이 자기의 책에서 죄는 들어오는 즉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는데 은혜를 죽이는 일을 합니다. 은혜가 들어오는 즉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죄를 죽이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자 하나님의 은혜를 받자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우리가 그 은혜를 받자 그리고 받은 바 그 은혜 안에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말씀의 빛으로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이렇게 비둘기파는 자들의 상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어 버려야 합니다. 끊임없이 그 은혜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죽일 수 없으니까 성령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의 순종을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시도록 하나님 앞에 깊이 엎드려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오다 보니까 한 시간 기도원을 모집한다고 하는데 그만 두세요! 한 시간 기도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한 시간 가지고 안 됩니다.
목회를 하고 저술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기도를 일방적으로 시간으로 잴 수는 없습니다. 20분도 깊이 기도할 때가 있고 4시간을 엎드려도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생각이 헝클어져서 헤매다가 일어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건강한 이 영혼의 상태를 가졌다고 할 때에 목회 사역을 위한 기본적인 기도시간을 저는 체험적으로 볼 때 3시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새벽에 나와서 깊이 엎드려서 거기서 철저한 참회의 은혜를 경험하고 새벽기도시간에 일어설 때에는 이 설교자의 영혼이 하늘의 이슬에 흠뻑 젖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머리의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음의 감정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렇게 시작해도 하루를 하나님 앞에 영광을 못 돌리는 날이 영광을 돌리는 날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수시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그런 기도 상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남이 알지 못하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아무나 데려다가 교회에 두어도 교육 전도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일하면 그가 일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일하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중입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다가 갑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자신이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선한 목자가 아니면 목회의 길에 들어서서 하나님 마음에 얼마나 많은 못을 박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음은 그대들에게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를 몇 분의 일도 털어 놓지 못했지만 이제 헤어져야 되겠습니다. 다시 언제 만날지 아무런 기약이 없지만 어쨌든 이 조국교회 어느 한 구석에서라도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을 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목회 사역에 깃들인 모든 세속적인 가치관과 하나님 영광이외의 또 다른 더러운 바람들을 모두 십자가 아래 묻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서 온전히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도록 그들의 철저하게 기도의 헌신된 삶을 살고 이 시대의 예언자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