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랑치 말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
오늘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세 번째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단에 섰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고린도전서 1장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살펴본 진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오직 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설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그 비참한 실패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올바로 서고 그 십자가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중심점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에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렷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들에게 증거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이 십자가에 대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만약에 나에게 인생의 마지막에 있어서 한 시간을 주신다면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할 때 저는 이 말씀을 외치고 아버지께로 가고 싶은 욕망을 느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하는 또 한 가지 말할 수 없는 진리는 십자가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바른 관계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주는 또 하나의 도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이 본문을 통해서 힘주어 고백하고 있는 것은 나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불우의 아름다움 이 고백을 남기기 전에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일에 대해서 먼저 말했습니다. 복음을 버리고 할례를 받으려는 무리들이 자랑에 대해서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태도로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할례를 받는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 육체로 자랑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다가 사도 바울은 그러나라는 말로서 자신은 그들이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는 그것을 전혀 자랑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러나’라는 말이 주는 의미에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래놓고 ‘그러나 내게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그러나’를 중심으로 그 앞에는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이 그러나ㄴ를 중심으로 그 뒤에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한 사람 사도 바울이 ‘내게는’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이 세상의 인간들이 육체를 자랑하고 세상에 속한 것들을 자랑하면서 사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마음을 빼앗기며 이 세상이 주는 것들에 의해서 사랑하고 그것을 자랑하고 있음은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를 알지 아니하는 십자가와 바른 관계에 서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17편에서 다윗은 예리한 신앙적인 통찰로서 이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오, 여호와여! 이 세상에서 저희의 유업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시옵소서, 그들은 죄의 제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많은 재산들을 어떻게 하면 어린아이에게 물려줄까 궁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해서 성경이 거듭거듭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적대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이 세상이요 영적인 일에 대해서 무관심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특징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이 세상 사람들의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저희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들은 자기의 육체를 신처럼 섬기며 육체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부끄럽고 더러운 죄악을 자랑스런 영광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아침에 잠깨어 일어난 시간에서부터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드는 시간까지 온통 땅의 일로만 가득 차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어둡고 이 어둠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한 이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영원한 세상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죽은 이후 자신의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할 줄도 모르는 이 세상의 특징은 육체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신앙을 ‘그러나’ 라는 말을 쓸 때에 바울이 어떤 심경으로 이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가 십자가를 자랑거리로 여긴다고 불후의 아름다운 고백을 남기기 전에 한때 그도 세상 사람들처럼 십자가가 아닌 것들을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는 지난 인생의 시절을 회고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를 꿈꾸던 젊은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육체를 신뢰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몸에 지닌 할례의 표와 몸에 흐르고 있던 유대인들의 혈통의 피와 율법을 지키는 종교적인 뜨거운 열심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알다시피 사도 바울 그는 자고할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난지 팔일 만에 율법의 규례를 따라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베냐민의 지파의 족속이었으며 전통적인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히브리인이면서도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지 않은 자유분방한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그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이 죽는 데에 찬성의 표를 던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위대한 석학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고 그는 웅변의 신이라고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달변가였으며 아데네에서는 스토아학파와 당대의 최고의 철학자들인 에피큐류스 학파와 함께 그들과 논쟁을 해서 그들을 압도할 정도의 철학에 달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고상하게 여겼으며 할 수 있는 대로 이것들을 자랑하려고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가슴에 훈장이 되어서 사도 바울의 가슴 위에 주렁주렁 달려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사람들에게 그 가슴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가슴에 달린 율법의 훈장과 가슴에 달린 유대인의 훈장과 가슴에 달린 놀라운 철학의 지혜와 가슴에 달린 놀라운 지혜와 가슴에 달린 종교적인 열심의 훈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그러나 내게는’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한마디는 이제 바울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원리 아래 다른 것들을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육체를 자랑하는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이 세상이 동의해 줄 수 없는 다른 것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서입니다.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육체를 자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이 자기에게만 일어나는 예외적인 사건이었음을 말합니다.
세상아 너희들이 세상을 자랑하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느냐? 당연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것들이 일반적이고 그런 것 들이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이 세상에서는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성도가 되어진 우리 모두에게는 이처럼 세상은 육체의 정욕을 따르고 세상은 육체를 자랑합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 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가 속해 있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가치의 기준을 따라서 살 뿐만 아니라 세상 자체를 깊이 껴안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살 만하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못 살v곳이라고 욕합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과는 상관이 없이 사람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그 영혼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랑하고 있는 것들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관심거리와 자랑거리를 한 번 보십시오. 그들이 말하는 것들을 귀 기울여보십시오. 그들의 관심은 온통 더 화려한 집, 더 멋진 별장, 더 값비싼 자동차, 더 호화스러운 여행, 더 많은 재산, 더 좋은 직장, 더 짜릿한 쾌락, 더 많은 학벌, 도달하는 명예, 도달하는 권력들... 귀는 들어도 족하지 않고 눈은 보아도 차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속한 세상입니다.
이 세상의 특징은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불같이 타오르고 아무리 태워버리고 삼켜버려도 껴질 줄 모르는 불길과 같은 정욕이야 말로 이 세상의 특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죄악을 저지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나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라고 말함으로써 이 세상과 그 정욕이 한 덩어리 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세상에 대해 타오르는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이 욕망의 불길은 너무나 강렬해서 양식이라는 물로는 끌 수 없습니다. 이 불길은 너무나 뜨거워서 도덕이라는 물로는 불길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 욕망은 너무나 세차게 타올라서 지성이라고 하는 찬물로도 막을 수 없이 타오르고 법으로도 그치게 할 수 정도로 맹렬한 불꽃입니다. 이 정욕의 불길은 드디어 너무나 뜨겁게 타올라서 양심을 불태우고 도덕을 넘어서며 지성의 붕대를 삼켜버립니다. 드디어는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까지 태워버렸습니다.
오늘날 흥청거리는 이 도시의 죄악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은 이 세상의 특징을 먼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은 곧 안목의 정욕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관찰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사건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덴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그것은 한 순간에 보는 시선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안목의 시선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 실과가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금하신 그 범죄케 하는 실과가 보암직했을까요? 왜 먹음직했을까요? 이 안목의 정욕은 이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거룩한 약속을 파괴하고 여러분을 죄악에 떨어진 오류를 범하게 만들었고 죄악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이 죄의 편만한 능력이 이 세상 속에 역사하게 만든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보는 것들은 마음에 속삭이고 속삭인 마음의 속삭임은 행동이 되어서 우리에게 범죄를 행하게 만드게 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부패한 이 도시의 타락상을 보십시오. 끔찍한 일들이 순간의 쾌락을 위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들의 이러한 짓들을 자랑거리로 말하는 것들을 추켜 세워줍니다. 이런 것들을 행하면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돌려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비참하게 폭행하고 때려 죽이는 장면들이 사람들에게 가장 흥미있는 오락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술취하는 것과 간통과 부녀자를 농락하는 과거가 부끄러운 일들이 이 세상에서는 흥밋거리가 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이 실리지 않는 잡지들은 팔리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가슴이 쓰라릴 정도의 엄청난 타락을 이 세상은 우습고 대단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토록 욕망을 서로 충돌을 일으켜서 끔찍한 범죄를 낳습니다. 이 모든 세상의 가공할 타락들은 하나님을 떠난 정욕에서 비롯된 사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요한은 이 세상의 특징을 이 세상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죽음 너머에 있는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육신이 호흡을 계속하고 있는 한 이 세상만이 그들의 관심이고 그들은 이 세상의 것들만 자랑합니다. 명예가 그들에게 자랑거리가 됩니다. 권력과 빼어난 미모와 지식이 그들에게는 자랑거리가 됩니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처참하게 죽어가는 영혼의 외마디 소리들을 이런것들로 감추면서 살아갑니다. 속에는 부패한 영혼이 썩어져 가는데 명예로 치장합니다.권력으로 분 바릅니다. 빼어난 미모로 화장합니다. 아름다운 지식으로 외투를 입힙니다. 많은 재물로서 아름다운 목거리와 팔찌와 귀거리를 합니다. 그러면서 심령 속에 죽어가는 그 신음어린 고통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의 특징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자기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있는 이유를 밝히 말해줍니다. 괜히 사랑한 교조주의가 아닙니다. 어떤 한 교리가 사도 바울로 하여금 거기에 매어 달리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통하여 세상이 내게 못 박혀 지금 있고 그리고 내가 세상에 대하여 또한 못 박혀 지금 있도다’ 주목할 것은 어저께 이 성경을 보면서 너무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기뻐서 뛸 정도로 충격을 받았어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할 때에 그 못 박히고 할 때에 ‘에스타오르 타이’ 영어 성경에는 잘 아시죠. ‘was been cross by' 가 아니라 ’has beencross by'인 현재 완료를 썼어요. 사도 바울이 이 갈라디아서를 쓰기 25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혔어요. 근데 뭐라 그랬냐 하면 그 십자가에 자기도 못박혔고 세상도 못박혔는데 그게 지금도 못박혀있다는 것이에요. 옛날에 못박힌 사건이 현재 완료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못박혀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못박힐 것입니다. 세상이 못 박히고 사도 바울을 못박힌 것은 갈라디아서를 쓴 지금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약 25년 전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 세상은 이 믿는 자를 향하여 못박혔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못박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라고 자기의 믿음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기절한 상태에서 고백했을 때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 모두 아득히 먼 25년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못박혀있고 'has been cross by' 현재 완료동사를 쓰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못박힌 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것은 25년이 넘는 지금까지 그의 삶과 심령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이 사건, 그리고 내가 그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겠노라고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이 사건, 세상의 사랑하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사건은 25년의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는 25년 전에 못박혔고 그 십자가를 영접한 것은 25년 전이었지만 그 때 못박은 자아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못박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도 그 십자가에서 내려온 적이 없이 계속해서 못박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20여년이 지난 세월에 와서도 그의 삶과 심령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 십자가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심오한 영향을 그에게 끼치고 있었고 수많은 자랑거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도록 그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못 박혀 있고 has been cross by 현재 완료로 쓰여진 것이 바로 이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내가 말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이 현재완료의 사건이 되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메마르고 피상적인 신앙생활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has been cross by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으로 그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이처럼 메마르고 우리의 살아가는 신앙의 생활의 그리스도 중심에서 이탈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머리가 희끗 희끗한 반백의 노사도가 피로 물든 예수의 십자가앞에서 세상과 자아가 과거에 못박힌 한번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때 못박힌 그 십자가의 달린 자기와 이세상이 여지껏 계속되고 있다라고 하는 현재완료로 고백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를 거룩한 사도로 만들었고 이믿음이 그로 하여금 세상과 죄를 이기며 육체를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우리가 교회 안에 들어와 보면 한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 버렸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런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분의 십자가가 나의 심령에 굳게 심겨지고 내가 그 분을 구주로 영접하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욕망을 버렸죠, 이제는 세상이 주는 가치 기준을 따라 살지 않기로 결심했죠. 좋은 학벌, 값진 재물, 버렸죠, 버리고 그 댓가로 말미암아 교회로 들어와 있는데 교회속에서는 그것들을 다시 주워 모으고 있어요. 그게 모두 현재 완료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고 그랬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바울이 ‘그러나 내게는’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를 ‘내게’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내게 대하여 못박혀 있고 또 나를 대하여 못박혀 있고, 내가 또한 못박혀 있고 이러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만 합니다. 우리라고 얘기를 안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사람에 대해서 못박혀 있는 일이나 사람이 세상에 대해서 못박혀 있는 이 일이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 예외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살아 있습니다. 격렬하게 움직입니다 결코 그 몸부림을 멈추지 않습니다. 우아한 몸짓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협박어린 목소리로 우리들을 위협해서 그의 노예로 만들기를 원합니다. 달콤한 속삭임으로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악수함으로 죄악에 이끌려 들입니다. 능숙한 말솜씨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자랑 거리에 대해서 설득합니다. 이렇게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인생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모두 세상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을 향한 생명이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세상을 움직이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말하고 붙잡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만큼은 세상은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해서는 세상은 살아있었어요. 그래서 육체를 자랑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은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 엄청난 세상이 그 엄청난 세상이 이 작은 사도 바울 앞에는 죽어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시체가 되어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처럼, 세상은 바울을 말로 유혹하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손짓으로 육체를 자랑하도록 세상의 두 손은 엄청나게 큰 못으로 박혀서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습니다. 10cm가 넘는 커다란 대못으로 누구도 뺄 수 없게 그를 유혹하던 세상의 손은 못박혀서 피 흘리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살도록 그를 꼬이면서 그를 끌고 다니던 세상의 두 발은 그 보다 더 큰 못에 의해서 못 박히고 뼈가 깨어지고 으스어지도록 못박혀 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를 끌고 다닐 수 없도록 되어 버렸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세상을 사랑하게 하던 이 세상은 이처럼 죽어버린 십자가의 시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 )입니다.
바울은 또 하나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못박혀 있노라’ 인간은 언제나 권력을 자랑합니다. 미모를 뽑냅니다. 이 세상의 자랑 속에 가리워져 신음하는 영혼의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여들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세상의 유혹에 장단을 맞추고 육체를 자랑하도록 가르치는 세상의 세상과 함께 짝하면서 살아가고 그 가르침에 혹합니다. 이것은 모두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세상을 자랑하고 그 세상에 속한 육체들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러분 바울에게 있어서 자아는 아까 말씀드린 세상처럼 동일하게 못박혀 있습니다. 육체의 자랑거리를 생각하던 자아의 머리에는 5cm가 넘는 가시들로 이루어진 면류관이 쓰여져서 피 흘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손을 들어 응답하던 그의 두 손에는 뼈가 뿌러지도록 커다란 나무 십자가에 박혀 버렸습니다. 움직일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습니다. 동맥은 끊어져서 피가 흐릅니다. 세상이 부를 때에 그토록 빨리 달려가던 그 의 발은 이제 두 발목을 뚫고 박혀진 어마어마하게 큰 못으로 인해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정욕을 좇아 살아가던 그의 심장은 예리한 창끝이 찌르고 들어왔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찔렀던 그 창처럼 찌르고 들어와서 물과 피를 다 쏟아내었습니다. 바울의 자아는 드디어 머리를 떨구고 죽어버렸습니다. 죽은 채로 계속 달려있는 것입니다. 25년 동안이나 죽어있는 상태로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시체가 되어버렸고 세상이 유혹해도 응답할 수 없는 죽은 시체가 되어서 십자가에 달려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공동체 형제자매들이여, 2000년 전 사도 바울을 이처럼 변화시켰던 십자가의 위대한 능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잘난 가문의 후예이건, 비참한 가문의 사람이건, 십자가는 그따위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삶과 인격이 높은 도덕성을 지녔건 여러분이 공부를 잘하는 수재이건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의롭게 살아서 하나님을 기뻐 찬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건, 혹은 이 시간까지 죄악 가운데 있으면서 사하심을 입지 못해 곤고한 심령이 되어 버렸건 십자가는 동일하게 그것을 관계치 않습니다. 다만 이 십자가는 우리 공동체 가운데 우뚝 서서 말합니다. 지금도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눈물로 전해주고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진실로 믿으면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결코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영혼을 향해 이 세상이 힘차게 유혹어린 몸짓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그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우리를 유혹해 오고 있는 이 세상,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서 나도 너희들에게 속한 것들을 자랑하게 해 달라고 달려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온전히 못박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서 있으나 한 때 못박혔던 세상은 다시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변함없이 서 있으나 한 때 달렸던 내 자아는 다시 살아서 십자가 아래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매 여러분, 세상은 그를 영접치 아니하였고 자기들을 사랑하는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상은 그를 향해 돌을 던졌으며 그를 향해 짓밟았으며 그를 채찍으로 때렸으며 가시관을 씌워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그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우셨고 그가 이 세상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대속물로 드렸습니다. 그 분이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구원을 가르쳤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으며 고통하는 이웃과 함께 고통을 받으며 그들 옆에 있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도대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위해서 뭘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그 분을 버렸고 세상은 그 분을 채찍질 하였고 세상은 그 분을 욕했으며 자기들의 구원의 십자가를 지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람들은 조롱했고 돌을 던졌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왜 그가 그렇게 죽으셔야 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십자가의 그 예수 그리스도, 이런 고결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세상의 손과 악수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서 침 뱉던 그 세상의 입술을 향해서 우리가 입 맞추자고 그에게 나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때리던 채찍을 붙잡던 그 손을 부여잡고 어떻게 그 분을 그토록 미워하던 그 세상의 가슴에 우리를 맡기고 그들의 품에 안길 수 있단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는 것 오늘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저는 이 시간에 중 4세기경에 살았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크리소스톰을 말하고자 합니다. 중 4세기에 부패와 향락의 물결에 잠겨버린 기독교의 중심지 로마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실과 정직과 금욕적인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쳐주던 설교가였습니다. 크리소스톰,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기독교의 중심지였지만은 축척과 타락과 부패의 물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을 죄악 된 곳으로 인도하던 이 부패한 로마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말씀을 외친 그 외침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아서 동부의 뜨거운 태양볕 아래 순교한 사람이었습니다. 목말라 죽어버린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을 사랑치 아니하는 그의 강직함과 깨끗함으로 인하여 많은 종교자들은 핍박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그들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는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피할 수 없는 박해에 직면하면서 그는 드디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를 핍박해 오는 이 세상을 향해 말했습니다. 오! 세상아, 네가 나를 정녕 버리겠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이것이 오늘 십자가가 주는 도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