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13일 새벽예배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이 구절은 이제 교회역사에서 두고두고 아주 중요한 구절이 되어왔습니다. 왜냐하면 배교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깐 이제 이 구절을 두고 이제 의미가 뭐냐 그리고 배교한 사람들이 이 기준에 따라 다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많은 논란이 있게 됐습니다. 우선 초대 교회 때에는 초대 교회 때에는 사람들이 핍박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믿음을 공개적으로 배반하거든요. 이런 사람들이 다시 신앙으로 돌아 올 수 있느냐 이에 대해서 돌아 올수 있다 라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특별히 우상 숭배나 살인 등등에 아주 끔직한 죄에 대해서는 허락을 안했지만 은 나머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너그러운 태도로 취해서 이제 이게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 후에 사도들에 교회 그 후에 그 다음에 로마 시대에 핍박이 오게 됩니다. 이 때 이제 로바티아니우스 라고 하는 교우가 나와서 이 구절에 의미를 이야기 하면선 이렇게 때문에 이렇게 때문에 그들은 다시 회개 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핍박을 이기지 못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 위기를 모면했던 사람들은 다시 교회에서 받아 들일수 없다 이렇게 단정을 내리죠. 근데 키프리아니우스 라는 교우가 그거는 잘 못 됐다. 그러면서 이제 커다란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키프리아니우스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교회가 너그럽게 받아 들여야 한다 하는 주장을 갖게 됩니다. 근데 그러고 그 후 로마 교회에는 어떤 태도를 취했냐 하면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정확한 해석은 못 내렸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확한 해석을 못 내려서 그래서 이 키프리아니우스의 입장에 사실적으로 서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교회가 의견들이 막 나뉘고 분열되는 그런 거를 택하기 보다는 차라리 이 히브리서 전체가 조금 의심스러운 성경이다. 그래가지고 이 성경 내용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 쪽으로 가서 그래서 교묘하게 거기서 빠져 나오게 됩니다. 근데 이거에 이 구절에 진정한 의미는 뭐냐 하면은 우선 결국 우리가 궁금하게 여기는 건 여기에 나오는 배교자들이 진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 이였는가? 그게 문제거든요. 근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참된 신자는 아니였다 라고 보는 거죠. 그러한 이유는 뭐냐 만약에 참된 신자였다라고 한다면 은 배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빠진다 라고 그러면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 구속이 효과 없다는 이야긴데 이미 영원히 단번에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십자가에 사죄에 공로가 취소가 된다는 쪽으로 논리가 가야되니깐 이거는 논리적으로 그렇게 되면 안된다 이거죠. 그러면 이제 이런 의문이 생기는데 그럼 거듭나지도 못한 사람이 이렇게 하늘에 은사를 맛보고 그 다음에 하늘에 은사를 맛보고 그 다음에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선한 말씀과 내세에 능력을 맛보고 그럴수가 있느냐? 이 부분을 놓고 죠 노엘 같은 사람은 맛보고 라는 단어를 쭉 해석하면서 이게 영어로 말하자면 tasting 인데 이것은 digesting하고 다르다는 거죠. 소화시키는 것과 다르다. 그러면서 여기서 맛보는 것은 그야말로 맛보는 것이지 충분히 소화하고 그것이 영혼속에 들어가서 작용을 일으켜서 완전히 그사람을 새롭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성화에 길을 가게 하고 이게 아니다 이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런 하늘에 은사를 맛보고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거죠. 여기서 하늘에 은사라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보다는 성령을 가리킨 다고 봐요. 하늘로부터 온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맛보고 그리고 거기 또 참여한바 되고 성령이 한 사역에 자기가 참여한게 되죠. 그리고 그 다음에 선한 말씀과 내세에 능력을 맛보았다. 근데 어쨌든 지간에 이 사람은 정말 깊이 변화된 참 진정한 그리스도 인은 아니다. 성화에 의미가 아니라 거듭남에 의미에서도 그러나 항상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을 거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거죠.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가 거듭남에 확신이 있으니깐 그러니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결코 배교할 일은 없다. 그렇게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면은 여기서 이야기 하는 교리적인 문제는 이 사람이 참 신자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가정하고 받아들이면 되고 또 어떤게 있냐면은 이거는 그런 교리를 사용하라고 준게 아니라 가상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라는 경고를 주어서 신자들을 말하자면은 일깨우기 위함이였다 라는 거죠. 근데 어쨌든 지간에 결론은 이거죠. 여기서 나오는 교리적인 문제는 이 사람이 맛보고 그리고 참여한바 되고 그랬지만은 그거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가롯유다 같은 경우 예로 들 수 있잖아요. 진짜 마테복음 10장에서 그런 성령에 놀라운 부으심을 경험하고 그죠? 죽은 자를 일어나게 하고 병든자를 고치고 약한자를 고쳐주는 그런 성령에 권능에 참여한 바 됬잖아요. 그러고 말씀도 듣고 그랬는데 그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잖아요. 마찬가지로 얼마든 그럴 수 있다는 거죠. 그렇게 때문에 자기가 경험한 어떤 신앙에 신비적 경험 체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그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이다 혹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특별히 구원 받은 사람이다. 그렇게 잴 수가 없는 것이다 하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나오는 교리적인 문제는 그렇게 해결을 하고요. 근데 그 제 생각에도 이건 그건 배교한 사람들을 받아 들이고 내치고 하는 그런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주셨다라기 보다는 이 항상 우리가 거꾸로 생각하지 말고 난 거듭났기 때문에 절대로 배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 성경 구절을 주신 목적이 아니에요. 아니라 이것도 성화에 관련된 문제니깐 말이죠. 자기 자신이 그런 끔직한 실패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하는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그리고 배교에 위험을 깊이 느끼면서 두려워하도록 그렇게 우리들이 살아야 하는 거죠. 그 제가 마음 지킴이 교리를 설계하면서 아마 그러겠죠. 배교에 위험을 느껴라 그래서 그리스도 인에 삶을 교리적으로 오해 할까봐 난 배교적 삶에 떨어질 것을 조심해라 그렇게 말씀 드렸는데 사실은 엄밀하게 말하면은 배교할까봐 두려워 하라. 그렇게 말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겁니다. 그 증거가 뭐죠 사도 바울이 그런 진정 속에서 살았죠. 그죠? 이심층에 교리를 확신하고 있었어도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내가 버림을 받을 까봐 두려워 하노라. 그리고 배교에 예들을 제시 하면서 이러이렇게 배교를 했으니깐 너희들도 조심해라. 사도 바울이 그 편지를 받은 사람들에 거듭남을 의심해서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깐 항상 우리들이 그런 생각을 해야한다 이거죠.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에 관심은 천국에 가냐 못 가냐에 말이 달려 있는데 그건 굉장히 중요한 거죠. 그런데 이 거꾸로 이걸 사용하는 거죠. 이게 나중에 이제 죄 죽임에 교리나 신자 안에 있는 잔존하는 죄의 교리 그리고 이번에 설교한 죄와 은혜의 교리 여기에서 모두 문제가 되는데 예를 들면 이거죠. 하나님에 은혜와 사람. 내가 구원받았다 라는 사실 이거를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대로 순서적으로 적용해야 되는데 이걸 거꾸로 적용하는 거죠. 무슨 말씀이냐 하면은 이런 이야기죠. 내가 구원 받았다. 근데 아직까지 죄가 남았다. 열심히 싸운다. 근데 도저히 내 힘으로는 거룩해 질수 없다. 온전한 죄 죽임에 도달할 수 없고 그래서 내 안에는 아직까지도 주님이 나를 슬프게, 내가 주님을 슬프게 하는 요소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너무 괴롭다.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죠. 그럼 하나님이 그 사람이 열심히 죄와 분토하고 하나님에 뜻대로 살려고 했는데도 어떻게 연약함을 그런 것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그 죄를 오히려 사용하셔서 그걸 거룩하게 하시고 그게 하나님에 지혜잖아요. 그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은혜를 베푸시고 그래서 거기서 새 힘을 얻고 그 다음에 죄를 죽이고 이게 순서거든요. 근데 이게 아니라 죄를 짓고 싶어 근제 지금 하나님의 심판과 그 다음에 죄를 짓고 나면은 나중에 오게 될 끔직한 하나님의 진노와 영적인 황페함에 대해서 쭉 떠오르는 거예요. 그때 은혜와 사랑이 교리를 새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용서해 주실거야 이미 다 용서해 주셨는걸 그래가지고 은혜와 사랑에 교리를 자기가 온전하게 사는데 그걸 사용하는게 아니라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죄에 대한 정욕을 실현하는데 그 교리를 사용한다 이거에요. 이런 것들은 모두 악마에 예속. 악마적 사용이라 이거죠. 똑같은 거죠. 내가 구원받았다. 하나님에 놀라운 은혜로 구원 받았다. 이거는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에 전적인 공로다. 그러므로 나는 가치 없는 죄인으로 구원 받았으니깐 바르게 살아야지 배교에 위험이 있느니깐 내가 날 더 지키며 살아야지 그런데도 매 순간 자기를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런 배교를 이기고 살아가게 해 주는 거죠. 근데 거꾸로 거듭난 사람은 배교할 수 없덴다. 난 거듭났다. 그래서 난 괜찮다. 이게 하나님께서 주신 교리를 이를 싱겁게 사용한다 이거죠. 그러면은 잘못된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결론이 이거에요. 항상 우리가 최악에 배교자가 될 그런 가능성을 갖고 있어요. 그건 구원에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구원에 확신이 있는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자신을 지키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