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중에 드린 기도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7-8).
여기에서는 죄 가운데서 자기를 깨끗게 해달라는 탄원이죠. ‘우슬초’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씻어내는 데에 사용하던 그러한 풀이었다고 그래요. 그러한 그 ‘우슬초’로 자기를 정결케 하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죄를 지은 후에 스스로 느끼는 죄책감, 무엇으로도 씻어지지 않는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이죠. 이러한 죄책감 내지는 죄에 대한 자각이 있어서 그것이 쉽게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죠. 그것을 씻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죠. 죄를 사랑하고 그리고 거기에 집착할 때에는 미리 이러한 그 불결이 느껴지지를 않는 것이에요. 만약에 그것을 충분하게 느낄 수 있다면 아마 시인도 죄에 빠지지 않았겠죠. 그러면 무엇 때문에 왜 이렇게 죄를 짓고 난 다음에야 자기가 이렇게 더럽혀졌다는 것을 느끼고 죄를 짓기 전에 그러한 불결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어떤 죄를 지어서 그 죄가 우리를 더럽히고 불결하게 하기 전에 모든 죄는 먼저 마음에 품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만약에 마음에 품지 않고 그것을 범하게 된다 하면 그 사실은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먼저 마음에 품고 그리고 그것을 자기의 마음 안에서 소원하고 자기 안에서 자라게 하는 그 일이 먼저 있고 나서 그 후에 그러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 일을 행하고 악을 짓기 전에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는 동안에 이미 벌써 마음 안에서는 죄에 대한 어떤 친화적인 성향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일단 그렇게 친화적인 성향이 생겨나고 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나 이러한 것들은 공정하게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이 더럽다는 것도 미리 못 느끼게 되는 것이죠.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일단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를 공정하게 보는 것이 불가능해지잖아요. 우리말로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는 것이잖아요.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 가시게 되면 그제서야 아, 이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을 조금 더 명확하게 보게 되잖아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조금 더 정확하게 본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죠. 물론 이제 싫어하게 되면 옳고 좋은 것이 있는데 싫어하는 감정이 덮어 씌어져서 그 사람을 안 좋게 보게 되는 경우도 물론 있죠. 그렇지만 좋아하기 때문에 못 보는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본다는 것이죠. 에드워즈 목사님이 자기의 글 속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했어요. 누군가가 우리를 비난할 때 그것이 진실인 줄 알자, 그것이 하나님의 목소리인 줄 어떻게 알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이에요. 여기서 시인이 자기가 불결하고 더럽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씻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인식하고 그리고 자기가 더러워졌다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죠. 이야기하면 굉장히 길지만 실제 생각을 해보자면, 이런 이야기인 것이죠. 비록 죄에 대해서 깨닫고 불결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 지라도 그 죄가 불결하고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라도 이것이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과 불결하게 여기는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하게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미 벌써 시인이 죄를 범했고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가 더럽혀졌어요. 그래서 이것이 더럽고 불결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한 그것을 바라고 갈망하는 마음이 함께하는 것이죠. 이 안에서 이 두 가지가 끊임없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싸우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물론 거기에는 결단도 필요하겠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씻어달라고, 내가 눈보다 더 희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간절히 비는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해주십시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죄인에게 즐겁고 기쁜 소리가 무엇이겠어요? 내가 네 죄를 용서한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 아니에요?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탄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에요. 그렇게 될 때에 주님이 꺾으신 뼈,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뼈를 꺾는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 몸살이나 몸에 이상이 오게 되면 제일 먼저 어디부터 통증이 느껴져요? 관절부터 통증이 느껴지죠? 왜냐하면 거기가 바이러스 같은 것이, 제일 맛있고 약한 부분이 관절 같은 부분이에요. 그래서 그 곳으로 확 몰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거기에서 무엇을 좀 뜯어먹으려고 하는 것이에요. 균들이 골고루 퍼지질 않고 한 군데 확 몰려서 그것을 뜯어 먹으려고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니까 거기에서 아주 절실하게 통증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한 데서 몸이 안 좋을 때는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거기에 통증을 일으켜서 깊은 고통을 주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에는 그것이 결국은 그것을 파고들어가면서 그 속에서 가책, 양심의 가책과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두려움, 이러한 것들이 함께 뒤엉키면서 큰 고통을 그 안에 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그러한 것들이 통증과 견디기 힘든 아픔을 주면서, 그것을 여기에서 이야기 할 때 주께서 꺾으신 뼈라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이에요. 그 뼈를 즐겁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니까 다른 무엇, 세상의 무슨 명예나, 재물이나, 기쁨이나, 영광이나, 그러한 것들로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그러한 고통들인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탄원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죠. 이것을 통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이렇게 보면, 범죄한 것은 매우 잘못일 지 모르겠지만, 이 범죄를 통해서 시인은 하나님의 보다 깊은 성품, 태어나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처절하게 용서를 빌며 매달려 본 적이 없거든요, 이것을 통해서 인간의 악함과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자기의 인생, 그리고 인간 모두의 처지, 이러한 복음적 인식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더 없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