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시 51:9).
시인이 죄를 짓고 나서 피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그 엄중함을 의식하는 것이었어요. 이것은 양심의 가책으로 나타나죠. 양심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의식 속에 붙어있는 그 죄에 대한 인식이에요. 그래서 두 가지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하나는 자기가 지은 죄의 의미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율법에 비추어봄으로써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이러한 저러한 행동을 했는데, 법을 보니 그 법에 이렇게 저렇게 처벌 받게 되어있을 때 그 처벌이 아직 시행이 되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덜컥 겁이 나겠죠. 그러한 기능을 양심이 한다 이 이야기에요. 그 율법은 시인과 같이 이미 기록된 율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율법을 통해서 그러한 양심의 정죄를 경험하겠죠. 그러나 이제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 마음 안에 이미 법을 심어놓으셨어요. 그래서 선악에 대해서 무엇을 충분히 배우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옳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에는 부모의 눈치를 보죠. 아주 어린 아이들인데도. 스스로 자기가 하고 그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스스로 정죄를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양심의 첫 번째 기능은 그러한 정죄의 기능이에요. 그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사회가 무법천지가 되지 않고 기본적인 것들을 지켜나가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한 정죄의 기능이 있기 위해서는 송사가 필요해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의 법정에서 ‘너는 일년 징역이다’ 이렇게 판단을 내리려면 누군가가 소송을 해야 할 것 아니에요? 누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대요 라고 하는 고발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양심은 끊임없이 고발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에요. 누구를 고발하냐 하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법정에 자기의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고발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마음 속 안에서 굉장히 시끄러운 일들이 아주 번잡하게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한편에서는 고발을 하고, 또 한쪽에서는 변호를 해야 할 것 아니에요? 고발당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변명을 하게 되는 일들이 자기 안에서 같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제 정신이 혼란스러워 지는 것이에요. 단정함이 없고, 아주 혼란스러워 지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죄는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에까지 무질서를 가져오는 것이죠. 그래서 안정되고 안온한 삶이 불가능해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이 악인에게는 평안함이 없나니 그러잖아요. 평안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 속에 끊임없는 혼란이 찾아오는 것이에요. 동의되죠? 그래서 우리들이 볼 때에는 그저, 우리들이 생각할 때에는 대충대충, 그저 넘어가지만 사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이게 한 주먹 밖에 안 되는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이 정신과 영혼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신비하기 짝이 없어요. 그것이 어떻게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가닥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이죠. 제 생각에는 천사들도 이렇게 복잡하지 않을 거에요. 인간이 이렇게 복잡한 것이죠. 불완전하면서도 복잡하기는 하나님을 거의 빼 닮도록 그렇게 복잡한 거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죠. 시인도 그러한 것을 경험을 한 것이죠.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라는 기도가 나오는데, 이게 사실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얼굴을 이렇게 향하실 때에, 바라보실 때에, 두 가지에요. 의로운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악인에게 당신의 심판을 보이시기 위해서 주목하시는 것이죠. 시인은 일평생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의 그러한 존재였어요. 이 죄로 말미암아 시인이 처음으로, 이 고백 상으로는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그 자체에 대해서 큰 두려움, 뒤편에 보면, 주님의 종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 뚜렷한 징표가 성령이었는데 그 성신을 거두실 것 같은, 크고 두려운 위협을 느낄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난 그 경험이 굉장히 컸기 때문에 동일하게 자신이 범죄할 때에 그 하나님의 엄위를 누구보다도 아주 현저하고 뚜렷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그러면서 당신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켜 주십시오 이것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한 죄인이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를 향하여 누그러뜨려지기를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이에요. 처음에는 제사와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이 누그러뜨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결국 진실하게 참회하여 자신의 신념이 주 앞에 깨뜨려지고 변화되는 이것이 없이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이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켜 주십시오 그러니까 내가 죄를 지었지만 그 죄가 문제가 안되어서 주님이 그 죄를 바라보시고 나를 그 죄에 합당하도록 징벌하시려는 그 의도를 거두어주시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죄인은 죄를 범한 인간에게 유일한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죄는 많은 결과들을 만들어내죠. 그리고 그 결과는 항상 고통으로 우리에게 전해져요. 그래서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수많은 고통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것에 대해 적절한 처방을 내리려고 스스로 많은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고통은 한가지 뿌리에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공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에요. 때로는 하나님이 죄를 지은 인간을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같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환경으로 막으실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셔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방어하실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어떠한 경우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그 죄를 물리적인 방법으로 막으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모든 죄인이 하나님의 그러한 의도를 깊이 느끼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 가지 물리적인 방법으로 죄를 막고 그 다음에 그 죄의 문제를 다루실 때에 거기서 느끼는 그 고통의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인간이 애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의 빛 아래서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그 문제를 하나씩 둘씩 해결해 나가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영혼, 정신, 심령의 문제로부터 이러한 죄가 나왔고, 그래서 자기 자신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특별히 복음에 의한 치유를 필요로 한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들이 없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거죠. 그렇지만 어느 순간에 그것을 깨닫게 되요. 그 때 유일한 희망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주시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하나님의 용서는 소극적으로는 지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징벌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지만, 적극적으로는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게 될 때에 하나님과의 사랑은 복구되고 그렇게 되면 죄에 대해 애호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회개하고 있는 죄를 다시 미워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평화에 가장 확실한 표지인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옵소서. ‘도말한다’는 것은 없애버리는 것, 쓸어버리는 것, 또는 닦아버리는 것, 대개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얼룩 같은 것을 씻어 없애는 것, 있는 것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 이게 ‘도말’이에요. 그러한 나의 모든 죄악을 도말해 주시옵소서.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이러한 죄악을 도말해주실 수 있겠어요? 소극적인 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이 시인에게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각종 하나님의 의로운 공의의 표지들, 양심의 가책이라든가, 하나님의 엄위한 심판이라든가, 두려운 송사라든가 하는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깨끗이 치워주셔 달라고 하는 그러한 고백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통절히 회개하면서도 이미 시인 안에 들어온 이 죄는 도덕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이 사람을 계속 죄로 이끄는 것이죠. 그러니까 한번 육체가 이러한 달콤한 정욕에 의해서 얼마나 자기의 육체가 즐거워질 수 있는 지를 깨닫고 나면, 더군다나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관계가 일회성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 된 것이거든요. 이러한 즐거움을 깨닫게 나고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떤 필연성에 이끌려서 그것이 자신의 성품 속에 인이 박혀서 참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몸은 다시 그 죄 가운데로 끌려가는 것이에요. 그것은 어떻게 보면 죄인의 입장에서는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란 말이에요. 마치 술에 인 박힌 사람들이 그 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술에 끌리고,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매 순간 처절하게 이것을 끊어버려야지 하고 결심을 하면서도 그것에 이끌려가는 그것이거든요. 이것이 죄의 강력한 힘이에요. 그래서 죄는 결국 인간의 마음 안에서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죄가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에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죄악이라는 것이 어떤 범죄의 기억이나 죄를 지었다고 하는 죄책이나 이러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이 사람 안에서 행사하고 있는 영향력이에요. 이것은 시인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에요. 그 고백이 바로 엊그제 나왔던,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죄에 강력하게 붙잡혀 있는 그러한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이 죄를 안 지을 수야 없겠지만 누가 나는 정결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고착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고착되면, 진실한 회개,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친밀한 기도생활, 그리고 말씀에 깊이 들어가는 신령한 삶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녀를 기를 때에도 늘 유의하고 보아야 하는 것이 그 그릇된 버릇에 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시인이 하나님 앞에 이러한 것들을 아주 폭넓고 깊게 깨닫게 된 것이죠. 죄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가능했던 것이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생명의 기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과의 단절 속에서 주님 안에 사는 행복을 깨닫게 되고, 주님의 얼굴 앞에서 쫓겨 나면서 그 분의 눈빛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깨닫게 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