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징계하실 때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시 39:10-11).
비록 악한 사람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지만, 이 시인은 악한 사람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미워하게 된 것이죠. 그 이유는 악한 사람이 자기에게 악을 행할 때 시선이 거기에만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뜻으로 그런 인간을 자기 옆에 두셔서 고통을 받게 하시는지에 대해서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고 보이는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것은 보이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안 보이는 것들 때문입니다.
이번에 제가 지난 겨울에 책을 한권 완성하고 가을 사경회 때 상호교통 들었잖아요. 그리고 이제 아무래도 제가 자신이 없어서 우리 교회 계시던 집사님 한 분이 있는데, 포항공대에 교수로 있어요. 정윤희 집사라고 있는데, 매년 수소문을 해서 통화를 했어요. "내가 글을 썼는데 아무래도 물리학에 관한 이야기들은 당신이 보고 조언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보냈어요. 2주 만에 읽어보고 나름대로 의견을 가지고 왔는데, 그분 이야기가 그거에요. 글을 보고 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목사님은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서 우리 물리학에서는 이 힘을 어떤 물질을 운동하게 하는 운동력, 요인이라고 말한다 이거죠.
그러면 하나의 물건이 움직일 때 뒤를 돌아보면 자기를 움직이게 하는 요인이 없이 움직이는 물질은 없죠. 틀림없이 바람이 밀든지, 다른 물체가 밀든지, 뭔가 원인이 있었죠? 그러면 그 다음에 또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것도 저절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움직인 것이 있어요. 계속 더듬어 추적을 해 가보세요. 그러면 무엇이 움직였는지. 그 뒤에는 물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이 있다구요. 재미있죠?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해볼께요. 이 성경이 떨어졌어요. 뒤돌아보니깐 이 성경이 이걸 밀었어요. 이걸 왜 밀었나 했더니, 여기에 내 손이 있어요. 손이 왜 밀었나 했더니 내 팔꿈치를 앞으로 쭉 뻗은 거에요. 왜 뻗었나 했더니 이 어깨가 움직이면서 이걸 민 거에요. 그렇게 해서 움직였는데, 그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에요? 내 안에 있는 영혼이 정신을 민 거죠. 영혼이 정신을 민 것까지는 정신세계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물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게 움직인게 신경다발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전기작용과 화학작용을 통해서 이것들이 물질과 만나면서 미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몸의 구조 가운데 신경구조가 가장 복잡하고 베일에 싸여 있어요. 왜냐하면 정신과 육체가 만나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몸을 안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움직이도록 마음을 먹으시거나 그 물질에 대해서 명령하실 때 그 모든 것들이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 안하는 것이 정말 바보같은 생각이라고 하는 거죠. 가슴에 다가오지 않으세요?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너무 자연스럽고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는 거라는 거죠.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이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그 자연의 이치와 똑같이 이 세상의 인간사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그것들이 단지 자연적이 이유 때문에만 우리가 괴로운 건 아니라는 거죠. 개보고 "이 자식" 한다고 해서 개가 우울해 진다거나 견생에 위기를 느끼거나 그러지 않는다 이거죠. 인간은 오늘 굉장히 행복하게 나왔는데, 자기에게 도저히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이 자식" 하면 확 밀려오면서 위기감 같은 게 느껴지고 "내가 왜 사나?" 하는 회의를 느낄 수 있는 거죠. 이런 게 만약에 자기의 부하직원이나 아니면 심지어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인생에 위기를 느끼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밥을 못 먹고, 잠을 못 자고, 때리고 이래서만 고통이 아니죠. 시인이 느끼는 고통도 이런 게 아니겠어요? 지금 배가 고파서 이러는 거에요, 아니면 잠을 못자서 이러는 거에요. 그게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이 자기를 세워 주셔서 나름대로 질서가 잡혀 있었단 말이죠. 근데 이 질서들이 움직이면서 이게 자신에게 고통을 주게 되는 거에요. 자기의 친구였던 사람이 배신자로 변하고, 자기를 섬기던 사람이 변하여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자기 자식이었던 사람이 일어나서 자기의 반역자가 되고, 그리고 자기를 제거하고 왕이 되려고 하고, 하나의 이런 질서의 변화들이 일어나는 거죠. 그럼 그것이 고통이 되는 것에요. 그래서 고통은 저는 고통을 정의하기를 "원하지 않은 자기 주변의 사물들의 질서" 그게 바로 고통의 원인이에요.
그러면 그런 모든 질서와 우리에게 의미를 가진 사물들의 움직임들이 어디서 오겠어요. 주님이 명령하셔서 마지막으로는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실 수가 있다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고 일어나는 많은 질서들의 원저자가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생각이라는 거죠. 변론의 여지가 없는 생각이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뭐에요? 물리학에서는 어떤 물체를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힘의 원천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서 오겠어요? 결국은 뭐냐면 힘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라고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의 움직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에요. 영혼의 움직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에요.
이 시인이 지금 하나님 앞에 깨달은 거에요. 그 인간이 나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해도 결국 알고 보니까,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힘을 보내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것들이 움직이면서 자신에게 깊은 고통을 가져다주는데, 인간은 자기 주변에 정돈 되어 있던 질서들이 움직이며 흔들려 고통을 주게 될 때, 자기가 질서를 이탈했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거에요. 그것을 못 깨달으면 굉장히 커다란 불행이에요. 짐승과 다름없는 수준의 삶을 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가장 행복한 것이 어떤 것이겠어요? 아직 사물들의 질서가 움직이기 전에, 자기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를 이탈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며 참회하거나 돌이키고 말씀을 통해 그것들을 발견할게 될 때, 아직 사물들이 움직이고 춤추기 전에 자신은 끊임없이 자기의 자리로 찾아 가게 되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의 삶은 평안한 거에요.
그러나 그것은 외적인 평안함이지, 내적으로는 평안하지 않죠? 어떻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데서 오는 불안이에요. 그러나 그 불안은 위험스럽고 파괴적인 불안이 아니라, 질서의 이탈로 말미암는 불안이 아니라, 평안하고 안정하며 하나님을 찾아가는 사랑이 가져다주는 불안이에요. 사랑하면 불안해요, 안 불안해요? 사랑하게 되면 불안하죠. 그러니까 맨날 전화통 붙들고 살고, 밤에 잘 때도 품에 안고 자고, 젊은이들이 그러잖아요. 딱 연애하기 시작하면 박수치는 데가 있어요. 이동통신사. 전화 요금이 막 올라가는 거에요. 사랑은 근본적으로 불안한 거에요.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그 대신 파괴적이고 좌절스런 불안이 아니라 온전함을 찾아가는 사랑의 불안이에요. 그리고 그런 불안이 있을 때 인간은 생기가 돌고 생생하게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