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사라질 때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셀라)”(시 39;11).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큰 고난을 통해서 시인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복을 주셔서 그들로 형통하게끔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려고 애를 많이 써도 자신 안에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많은 악과 그리고 이 더러움들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이 삶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든지 표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정직하게 인식함에 있어서 빈틈이 없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도 알지 못하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사는 일이 불가능하죠. 그게 이러한 죄악 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과 어려움을 허락을 하십니다. 오늘 이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철저히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게 된 것도 역시 그런 고난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일수록 그의 일생은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적인 환경의 어려움의 크기라기보다는 본인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크기에 달려있는 것이죠. 사실 다윗의 인생인 파란만장하였다고 하지만 남이 보기에 한 나라의 임금으로써 일생을 산 사람이었으니까 사실 환경적으로 보자면 그보다 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더 많지 않겠습니까? 다윗의 진정한 고난은 왕위를 잃어버리고, 도망을 다니고, 또 살해자의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서 추격당하는 그런 삶을 살고 하는 거기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죠. 끊임없이 그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환경,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내적으로 받았던 큰 고통, 그것을 우리들이 생각을 해야 하는 거죠.
큰 고난에도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고난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심령이 크게 흔들려서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그러한 마음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루고 싶은 것이 환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의 방식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면 될수록, 그래서 우리의 사고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령해 지면 신령해 질수록, 하나님이 환경으로써 다루셔야할 이유가 점점 줄어드는 거죠.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읽어가는 거죠. 내 삶의 환경이 뿌리째 흔들리고, 물질의 공급의 줄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고, 나를 둘러싼 환경들이 요동치면서 나를 곤두박질치게 만들지 않아도 날마다 기도와 묵상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전수 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런 생활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편에 보니까 사람에게 영광이 있는데 하나님이 징계하시니까 이것을 마치 좀을 먹는 것처럼 잃어버리게 되고 그때에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제일 먼저 이것을 깨달은 계기는 자기 자신에게서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범죄 하기 전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때에는 자신에게 영광이 있었어요. 여기서 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성이에요. 가치, 그리고 그것을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것, 그것을 가리키는 거죠. 그러면 중요성이 있고 가치가 있어서, 또 사람들도 그것을 인정해 주어서 그렇게 자신이 영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주님이 자기를 징계하시니까 좀먹음 같이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다 하는 거죠. 성경에 보면 좀먹는 다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오거든요. 옷이 그래도 있는 줄 알고 한 번 열어봤더니 좀이 슬어서 모두 그 조직을 갉아 먹고 그리고 그 옷은 없어져 버렸어요. 못쓰게 되어 버렸어요. 헤어져버렸어요. 그렇게 해서 그 물건 자체를 못쓰게 된 상황을 가리키는 거죠.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중요성과 가치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왕이면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사람에게 인정받고, 그리고 사람에게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고, 소중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그렇게 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는 바가 아니겠어요? 시인도 인간이니까 그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을 리가 없단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지상에서의 영화나 영광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사실 이것이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존재를 지탱하며 살아가게 하는 아주 중요한 힘이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에게 내가 가치 있고 중요한 존재라고 하는 생각, 사람들에게 내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 또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인정해 준다는 것, 또 내가 내 자신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내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존재와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이에요.
인간의 자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관계를 통해서 입증이 되는 거죠. 그래서 내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나 홀로 있어서 느끼는 것은 쉽지 않아요. 내가 평소에 하던 일 대로 이렇게 올라와서 설교할 때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되는 거죠. 또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누구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거죠. 마찬가지로 이런 관계에 대한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할 때 내가 그 하나님을 의존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이렇게 이 세상에서 변할 수 있는 모든 관계 중심에 하나님과 내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에 거기에서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깨닫고 하게 되는 것이에요.
뭐 길게 얘기할 수 없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도 모르는데, 관계를 통해서 우리 안에 우리가 무엇이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통해서 자기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이게 옳은 게 있는 건지, 그른 게 있는 건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기도하고 이렇게 되는 것이에요. 그때에 이 시인은 사람에게 있는 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 스스로 지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끊임없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죠. 이것을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무엇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 자기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에 자신이 그것을 누리고 또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신앙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러면서 결국은 자신의 모든 영광이 하나님을 의존하여 있고 그리고 그 하나님 때문에 그 영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 속에서 이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요. 그게 뭐냐면 각 사람이 모두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각 사람은 자신의 모든 존재가 하나님 앞에 기대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신앙은 이렇게 큰 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그 사실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게 신앙입니다. 그 때에 나는 하찮아 보이고 주님은 매우 존귀하게 보이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