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이 침묵할 때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나는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시 38:12-14).
시인이 언젠가 하나님 앞에 진노를 살만한 죄를 짓고 경험한 심적인 상태를 계속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올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짐승을 잡는 데 쓰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올무는 아주 정교한 그런 계획 아래 반드시 그 짐승을 잡을 수 있도록 놓은 덫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거죠. 그런데 오늘 시인은 그런 올무가 자기 앞에 있다고 얘기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친구들도 있었을 것이고 대적들도 있었겠죠? 더군다나 이 사람은 기름부음을 받고 한 나라의 왕이요, 또 싸움터에서는 용맹스런 장수요, 정치가였기 때문에 비록 그가 올바른 길을 걸어갔다고 하더라도 많은 적들이 있었을 거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높은 자리에 있으면 이익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고 가까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혹은 이익 때문에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리는 것 자체가 싫은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지휘가 높지 않고 명예가 높고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을 때 보다는 다른 사람보다 더 명예가 있고 물질을 가지고 있고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대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람 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가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예로부터 그리스 사람들이 이런 지혜와 용기, 사랑 이런 것들이 함께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거죠. 만약에 그런 것이 없다면 많은 제물도 모으지 말고, 사람들 위에서 그들을 위해서 일할 기회도 얻지 말고, 그저 낮은 자리에서 이름도 없이 그렇게 지내는 것이 대적자들을 맞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겠죠. 근데 시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인생을 살 수 없었어요.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잘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 앞에 잘못하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많은 대적자들이 그에게 올무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거죠.
사람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꼭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에만 오는 것은 아니죠. 올바르게 살아가도 아니, 올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그런 사람의 존재는 그릇되게 살아가려고 자기 질서의 원을 그리는 사람들에게는 끝없는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요인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부딪힘이 있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올바르게 살아간다."라고 하는 그것은 그릇된 삶에 질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사랑으로든지 무력으로든지 굴복을 시켜서 올바른 삶의 질서를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그게 올바로 살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나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삶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나만' 이라는 삶은 없어요. 더군다나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신학자가 일평생동안 결심문을 썼는데, 백 몇 가지의 결심문을 쓰는 가운데 처음에 결심문이 "나와 내 이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런 것이 바로 삶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나만 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거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데,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따라서 자기만 올바르게 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올바른 삶의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영향을 미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런 질서를 좋아 하면야 문제가 아니지만 싫어하고 그리고 굴복하지 않으려고 할 때 여기에는 투쟁이 있게 되는 거죠. 그 투쟁을 어떤 방식으로 취하느냐 라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어쨌든 거기에는 투쟁과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라고 하는 거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그것을 사랑으로 잘 이기면서 그러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이기면서 본질적으로 그 사람이 그런 새로운 삶의 질서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기독교적인 정신이겠죠. 그러니까 당연히 많은 반발이 있겠죠.
더군다나 다윗이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기름 부으셔서 세우셨어요. 그렇게 해서 결국은 한 나라의 왕이 되었거든요. 그러면 당연히 예전에 왕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최대의 피해자일 것 아니에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렇게 됐지만 신앙이 없는 그 사람들은 그렇게 인정을 하겠어요? 그러니까 다윗이 상당기간 왕을 지내다가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도망을 갈 때에도 아직까지도 백성들 중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의 집안을 무너뜨린 그 원수가 "너 다윗이다"라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다는 거죠.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실 이런 것은 다윗의 입장에서도 자기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죠. 그렇죠? 자기가 스스로 왕이 된 것 같으면 "난 이런 거 필요 없다. 난 주님의 아름다움만 볼 수 있다면 그게 난 행복이지, 이런 권력 같은 거 상관없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이었죠.
언제나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죄를 범하게 되자 잠재되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거죠. 그리고 그들은 진정으로 다윗이 하나님 앞에 훌륭한 일꾼으로 그 시대 속에서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이렇게 넘어져서 자신들도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버림을 받게 되기를 기다렸던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에서 미끄러지면 원수들이 제일 먼저 박수를 치는 거죠. 영적인 원수들 그리고 또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우리의 삶의 질서를 싫어하고 대적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박수를 치는 거죠.
그런데 다윗이 그러한 삶의 상황을 맞았을 때에 보여준 자기의 반응을 얘기한 거죠. "나는 귀머거리가 되었고 벙어리가 되었고 나는 변박할 말이 없었습니다." 인제 변박한다는 것은 논쟁하는 거죠. "넌 욕을 하는데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네가 몰라서 그렇다. 한번 해볼래?" 이런 식으로 논쟁하지 않았다는 거죠. 자기는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기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라고 호소하는 거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거죠. 그런 의미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대적자들이 나쁘기 때문에 나에게 올무를 놓은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미끄러졌더니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치고 책망하시기 위해서 나의 일평생의 원수들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 때문에 그는 잠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신앙이 아니면 잠잠할 수 없는 거죠.
사람이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사실은 그때 그 사람의 인격이 가장 잘 나타나는 거죠. 평소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원래 기뻐하는 것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전부를 보여주지는 못해요. 그런데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갈 때, 나의 순수성이 의심받을 때, 그리고 수많은 오해 속에서 나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나의 발뒤꿈치를 들고 오히려 나를 물을 때, 그리고 나와 관계를 맺던 많은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는 대적자로 바뀔 때, 그 때에 참을 수 있으면 확실히 그 사람 안에 사랑이 있다는 증거에요. 왜냐하면 참는 것은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참는 것도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하면 환경적으로 참을 수밖에 없게끔 강요당해서 참는 것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참음이라기보다는 용기의 부족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한계를 아는 체념이에요.
진정한 참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보다 높은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나를 공격하는 대적자들은 알지 못하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결말을 아름답게 이루실 것이라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참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견디는 것 그것이 진정한 참음이에요. 이 과정을 통해서 참는 그 사람은 자신 속에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고 또 사랑이 없는지 마음속에 일그러진 분노와 혈기들이 존재하는 지를 보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다윗은 그런 점에서 참 훌륭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은 그것을 감출 수가 없어요. 이 다윗은 이 시를 쓴게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왕이 된 뒤에서 비슷한 일을 많이 격죠. 근데 능히 복수하거나 제압할 수 있는 물리적인 권력이 있을 때조차도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주권을 의지하는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었어요.
예를 들어보면 말이죠. 그 맡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지혜로운 다윗이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예측하지 못했죠. 그 사이에 자기 밑에서 녹을 먹고 함께 나라를 이끌어 가던 수많은 부하들이 변절해서, 반역하는 자기 아들의 편에 서게 된 거죠. 그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그렇죠? 그렇게 반역하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고 공격을 받자 황급히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법궤는 왕권의 상징이었어요. 쉽게 얘기하면 그 법궤를 빼앗기면 하나님이 다윗을 패하고 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셨다고 이렇게 신학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는 도구였단 말이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뭘 건의합니까? "이것을 가지고 도망을 갑시다!" 그러면 여기에 세워지는 왕권은 나라를 차지했어도 정통성이 없다. 이거죠? 이 때 다윗의 고백은 뭐였어요? "놔둬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내가 돌아와서 다시 이 법궤를 볼 것이다." 그러니까 뭐냐하면 이것을 끌고 가서 "봐라 내가 법궤를 가지고 있으니까 아직까지 왕이다." 이러기 보다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주님이 기뻐하셔서 나를 다시 여기 돌아오게 하실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 법궤를 들고 야밤에 도주를 해서 내 왕권의 정통성을 입증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하는 거죠. 도망을 가는 길에 시므이라는 인간이 모레를 뿌리면서 다윗에게 욕을 퍼부었어요. 요압이 단칼에 베어버리겠다고 칼을 빼자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러지 마라 혹시 하나님이 저 인간을 통하여서 욕을 하시는지 누가 알겠느냐? 문제가 되는 것은 나를 욕하는 저 인간이 아니라 나다." 그 뜻이죠.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그 극심한 고난을 만나면서 그는 고난이 심해지고 징계가 도를 더하면 더할수록 사람과 환경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았던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의 그러한 공격과 올무를 놓고 비웃는 모든 모습에 마음을 쓰고 귀를 기울이며 그들과 다투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내가 얼만큼 잘못했는지, 저 원수들이 얼마나 악하고 잘못했는지, 혹은 그 원수들 중에서라도 무엇인가 그들 나름대로 정당한 것이 하나님 앞에 있다면 그 정당함의 분량은 얼마만큼 될 것인지, 그것을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시는데 내가 그들과 논쟁을 해서 이긴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 생긴 거에요.
어느날 어느 목사님께 교회성도가 와서 막 따지더랍니다. 보니까 교회에 대해서 엄청 오해를 하고 있고 자신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더랍니다. 너무 이 성도가 분노하니까 자기가 한 시간에 걸쳐서 그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돌아가는 데 자기 마음은 너무 슬프더랍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의 올바름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 성도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든 인간사가. 그래서 슬픈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요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입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일어난 일처럼 보이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행하게 하시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다윗이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그가 아무리 뛰어난 성도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수시로 우리의 영혼이 찢어지는 것을 경험해요. 영혼의 찢어짐은 곧 감각과 이 세상의 육체적인 욕망, 세상의 물질이나 혹은 이 세상의 보이는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영혼의 관심이 분산되는 것을 가리켜서 영혼의 찢어짐이라고 부르는 거에요. 무질서가 도입되게 되고, 그렇게 될 때에는 우리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가 없는 거죠. 우리 보기에는 하나님 보다 이 세상에서의 누리는 잠시의 평안, 그리고 잠시 동안의 물질적인 복락들, 명예, 이런 것들이 소중해 보이지만은,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경배 대상이신 하나님 자신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인데도 때로는 이런 깊은 시련을, 때로는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아주 작은 죄인데, 이 세상에는 죄인들이 그 보다 흉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는 평안을 주시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작은 죄 거기에는 마치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이 깊은 상처를 주셔서 그래서 온전케 되어 당신을 바라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때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지만 거기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며 그 고통을 통해서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고, 장님이 되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옳다 해도 주님이 그르다고 하시면 소용없습니다. 근데 주님이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그르다고 해도 주님이 옳다고 하시면 충분합니다." 그런 신앙을 갖게끔 만들어 주시는 거에요. 내가 이런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