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8
목 차
사람이 무엇이 관대(시 8:1-4) 95
인간을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시 8:5-9) 100
사람이 무엇이 관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1-4)
온 땅에 가득한 주의 이름을 찬송함
이 시는 탄원의 시가 아니라 찬송시입니다. 찬송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높이는 그야말로 찬양의 시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참 살아 계시다는 것을 경험할 때에는 대부분 자기 개인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기도했더니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야,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라고 느낍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어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 자신의 영혼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배하게 됩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우리들의 경험입니다. 이런 시편은 그 경험이 틀립니다.
오늘 시인이 찬송하는 이유를 보면, 하나님이 하늘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찾아와 주십니까?” 저를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모든 창조세계를 보면서 감격해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를 보면서 감격해합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놀랍게 찬송하면서 살게 만들었던 이유는,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삼라만상 모든 자연세계까지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입니다.
항상 신앙이 우리 종교생활의 틀 속에만 갇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흔적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오묘한 솜씨.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무엇을 입어야 하나? 내일은 무엇을 먹어야하나?’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의식주의 문제가 늘 고민됩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을 근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예수님이 생전 그런 생각 안하시다가 갑자기 근심 많은 사람들을 보니 그런 생각하셨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삼라만상 속에서 하나님을 늘 느끼며 사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편에 찬송시가 갖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굳센 믿음은 사색에 의해서 촉진됩니다. 그래서 믿어야할 것과 내가 아는 것 사이를 끊임없는 사색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가운데에 지적인 친밀성을 우리 마음이 누리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아름다움, 은총의 세계를 깊이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을 따라서 사는 아름다운 삶이 됩니다.
젖먹이의 입으로 악인을 부끄럽게 하심
2절에 젖먹이와 어린 아이의 입으로 보수자들과 악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시며 이는 원수와 보수자의 입을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어린아이들은 무언가를 잘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 배운 잘 모르는 단순한 진리를 어린아이들이 그냥 외울 뿐입니다. “너희들 싸우면 큰 일 난다. 너 나쁜 짓하면 하나님이 다 내려다 보셔.”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일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달과 별을 만드시고 해를 만드시고 들에 핀 백합을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십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 곧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인생에 대해서 가치중립적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언가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면 우리의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렇게 살든지 하나님이 관심이 없으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제 생각을 가지고 사는데 하나님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면 어떤 사람은 거기에 부합하게 사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거기에 부합하지 않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렇게 각각에 대해 판단을 내리실 것 아닙니까? 우리는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안셀무스라는 교부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선악간의 판단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야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실 것이고 나는 그 목적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라는 생각을 안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상 무신론자입니다. 사실상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방법이 둘인데, 하나는 입으로 말하는 방법, 또 하나는 온 몸으로 말하는 방법. 그런데 사실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온 몸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하면서 온 몸으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하나님께서 안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는 그들이 정말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가려내실 것입니다.
권고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저를 권고하시나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권고는 히브리말로 ‘파카드’(dq'P)라는 말인데 ‘잘해라’라는 말이 아니고 방문하는 것,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심방하다’라는 정도의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찾아오시나이까” 똑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저를 생각한다.”라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행법입니다. 시인이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너무 위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뛰어나시고 이 세상을 통치하심에 있어서도 너무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무시했지만 젖먹이와 어린아이들의 입으로 부르는 노래가 보수자들, 원수들에게 그대로 임하게 하셔서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시인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사람이 무엇이 관대” 여기서 사람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만 특별히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언약 백성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주님이 만나기 전까지는 인간이 귀한 것을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인생살이 고달프고 힘들면 자기도 귀해 보이지 않고 이 세상의 인간도 귀해 보이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어떤 미친 녀석이 인생사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승용차를 몰고 여의도 광장으로 가서 마침 주일이었는데 전속력을 밟고 달렸습니다.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까 “세상이 지겨워서, 행복한 사람들이 싫었다.”고 했답니다. 자기가 인생이 불행해지게 되면 사람이 귀한 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도 사라집니다. 고통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몸을 아무렇게나 막 굴립니다. 고통이 많은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으면 몸을 아무렇게나 막 굴립니다.
결론과 적용
그러다가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개별자인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므로 보편적인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습니다. 개별자인 자신을 향한 사랑 때문에 보편자인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서 구제가 나오고 거기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선교가 나옵니다. 그 시인이 그런 경험을 얘기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면 그 사람은 사람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 자체가 교통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인간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5-9)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
하나님이 창조하신 놀라운 우주를 생각하는 것은 시인들이 자주 하는 일이었습니다. 대개 두 가지 목적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를 감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이 커다란 위기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창조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돌아보면서 그분의 위대한 능력을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위대한 세계를 보면 창조주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창조주의 위대한 능력을 찬송하면서 자신을 이러한 고난과 위기와 시련으로부터 건저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천지를 묵상하는 이유였습니다.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라고 감격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지금 왕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씌워지는 관은 명예와 존영의 상징입니다.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며”는 무슨 뜻입니까? 사실 이것은 천사가 아니라 각주에 보면 하나님이라고도 번역이 된다고 나오는데, ‘하나님’입니다. 물론 인간이 천사보다 못한 면이 조금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천상의 세상과 지상의 세계, 두 세계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늘은 천사들로 다스리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천사가 갖는 지위는 이 땅에서 인간이 갖는 지위와 비교가 안 됩니다. 천사는 처음부터 창조될 때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섬기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주시고 인간을 왕처럼 삼으셔서 거기에 그것들을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주셨는데, 하늘나라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신 것이 아니라 천사들로 하여금 하늘나라에서 섬기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천사들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늘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하십니다. 천사들도 여러 등급들이 있어서 하늘나라의 일과 이 땅의 일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돕기는 하지만 천상에서의 천사의 지위는 지상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같지 않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거기에 세우신 것은 마치 제왕과 같은 위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시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교부들은 인간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이 되어간다는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 신이 우리가 많이 발전하고 진보하면 하나님이 된다는 사상은 아니고, 베드로서에 나오는 것과 같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데 하나님을 많이 닮아간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서 마치 하나님이 가지신 성품을 우리들이 더 온전하게 소유해서 하나님 닮은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이 땅에 있는 많은 피조세계들을 다시 노래합니다. 인간이 그것을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것입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그것들을 다스리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해놓으시고 세워 놓으신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다스리고 통치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피조물의 등급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라미드 모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제일 밑에는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것, 무생물들, 그 다음에는 살아있는 것, 식물들, 그 위에 살아있고 지각하는 것, 동물들, 그 위에는 살아있고 지각할 뿐만 아니라 이성이 있어서 인식할 수 있는 것, 인간 이것이 창조세계의 피라미드 질서의 끝에는 인간 위에는 오직 한 분만이 계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각각 이러한 네 가지 질서, 맨 위에 하나님까지 치면 다섯 개의 질서가 있는데 이 하위에 있는 존재물들이 각각 상위에 있는 것들에 이바지 하게끔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물질들은 식물에 이바지하고, 식물은 동물에게 이바지하고, 동물은 인간에게 이바지 하고 인간은 하나님께 이바지하는 것인데, 악(惡)은 이것을 뒤집는 것입니다.
특별히 동물과 식물은 이성을 가진 창조물이 아니니까 도덕적인 판단을 할 수 없지만, 인간부터 시작을 해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갖는 관계, 이런 것들은 도덕적인 판단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평가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백히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즉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한다는 것을 우리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세계를 인간에게 맡기셔서 인간은 왕처럼 이것을 다스리고 유지하고 관리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의 큰 영광을 드러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지위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동물처럼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의 아름다운 영광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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