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시치 아니하시는 마음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시인은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받으시는 제사가 짐승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받치는 제사가 아니라 오히려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매우 커다란 영적인 발견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죠. 다윗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때 만약에 이렇게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이고 그리고 짐승을 죽여서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예전에 다윗이 드린 모든 제사가 이렇게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모두 드려진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예전에 드려진 제사는 한번도 하나님앞에 열납된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렇지가 않죠. 하나님께서는 주님 앞에 드리는 이전의 많은 제사를 받으셨고 중심에 깊이 통회하는 마음이 없어도 그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이 되었습니다. 그 한 예로 솔로몬을 보십시오. 일천번의 번제를 하나님앞에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아주 기쁘게 받으셨는데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기쁘게 그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에게 아주 큰 상급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왜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제물과 중심의 통회하는 마음이 서로 상치되는 것처럼 이것은 받으시고 저것을 거절하셨을까요?이 이유는 하나님이 죄를 지은 사람들을 다루시는 놀라운 지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리고 우리아를 죽게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한 범죄와 악을 행하는 모든 것들에 근원을 더듬어 내려가면, 파고 들어가면 거기에는 그 근원이 있을 텐데 그 근원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죄와 악이 실제 행위로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고통을 줄때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의 죄가 그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그런 행동이 나타나기 전에 그 마음안에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법에 있어서도 어떻게 보면 양심의 자유에 속한 것이죠. 그러나 문제는 행동으로 들어난 모든 것의 뿌리가 마음에 있다는 것이죠. 마치 나무에 매달린 입사귀와 좋은 열매들의 근원이 뿌리에 있는 것처럼 사람이 어떤 악이나 혹은 중심에서 우러 나오는 선을 행하게 될때에는 그 속에 그러한 악과 선을 행할수밖에 없는 모종의 필연성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예요. 그러한 필연성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러한 죄와 악들은 형태를 바꾸어서 시간을 달리해서 계속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서 자신의 몸에 체중을 줄이고 운동을 해보려고 애를 쓰지만 먹기를 워낙 좋아하면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지 시간과 장소만 틀릴뿐이지 계속 먹어댑니다. 먹는 것이 좋으니까. 잠자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그 습성이 깊이 베인 사람들은 낮이고 밤이고 기회가 오면 그런 잠자기 원하는 습성을 실행을 합니다. 남에게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그 속에 있는 그 본성들이 발휘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게 마련이죠. 이 근원을 고치지 않고는 이런 죄와 악들을 금할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사람의 본성을 다루시는 것이죠. 고대의 철학자들도 인간의 본성을 곧 숙명이라고 생각했고 그리고 이 본성은 안바뀌는 것이다라고 믿었어요. 그리고 어떤 한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복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할때에도 사실은 그 사람의 천성과 관련이 있는 거죠. 예를 들어보죠. 우리 흔히 사람이 '아무 아무개는 인덕이 있다.' 그러잖아요. 인덕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좋은 사람이 좋은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돕는데 그런 사람을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만나고 그리고 자주 자주 만나서 도움을 받게 되는 복을 가리켜서 인덕이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인덕이 있는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후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지 인심이 사납고 성질이 아주 거지 같아서 모든 사람이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에게 그러한 인덕이 있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본성의 발휘에 의해서 가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만약에 어떤 사람에게 본성에 있어서 그것이 그 사람의 항로를 정한다라고 생각할때에 어떤 본성은 그 사람 자신에게 책임이 있지만 어떤 본성은 그사람 자신에게는 별로 책임이 없는 그런 본성도 있는거죠. 원래 이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같은 행동을 결정하고 되풀이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과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의 경향이 되는 곳에서 우리의 본성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환경에 의해서도 생겨 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아주 어려운 가정에서 고통을 많이 겪으면서 또 혹은 바르지 않는 것들을 끊임없이 보면서 행동하게 되거나 혹은 부당한 대접을 받게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굽은 성품들이 우리 안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가정이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는 거죠. 어떻게 가정만이겠습니까? 이 모든 인간의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이런 본성이 발휘되고 획득되고 획득된 본성을 유지하고 혹은 이미 있는 본성에 항거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러한 인생으로 이어지는 거라는 거죠. 그래서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그것이 그 사람에게도 아주 그 사람에게도 즐겁고 좋은 성향이 되게 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완성이라고 여겨지는 것이죠. 그러면 보면 우리들이 마땅히 행해야할 신자의 의무들을 다하는 것이 참된 인간으로 가는 길이잖아요? 하나님을 참 예배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이거는 우리의 의무잖아요. 사람이 많이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이 의무가 그 사람에게도 즐거운 것이되고 기쁜것이 되는 거죠. 그래서 성향을 형성하게 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삶인것이예요. 그래서 매 순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근데 이 숙명과 같은 본성이 인간 자신에 의해서는 거의 바뀌지 않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을 근본부터 바꾸어 놓을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것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능력의 일부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바꾸어 놓을수가 있어요. 그것이 중생과 회심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전혀 하나님을 사랑할수 없는 필연적으로 자기밖에 사랑할수밖에 없는 사람의 영혼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을 갖게 만드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버리도록 만들어 주시죠. 이 후에 성화의 삶은 이러한 것에 끊임없는 연속이예요. 그래서 오늘 이 다윗이 한때는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순전화된 사람이었습니다만은 미끄러져서 범죄하게 되었을 때에 다윗은 어느 날 어느시에 이러 이러한 죄를 지은 것이 통절하게 고통이 되었고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씻을 수 없는 이 과거를 후회하는 것으로서 밤을 새웠지만은 하나님의 관심은 그가 지은 일회적인 죄보다 그 죄를 지을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이죄를 짓기 이전에도 다윗에게 있었던 그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뜻을 따라 살려는 성향이 하나님께 문제가 되었던 것이예요. 이것들을 고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어요? 결국은 중심 깊은 곳에서 이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이 본성이 계속 역사할 것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신 지혜로운 방법이 회개라고 하는 방법이예요.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매일 매일 아름다운 정원에 잡초가 돗아나는 것들을 피할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앞에 그릇 행할수밖에 없는 그러한 연약성과 죄성이 있기 때문에 해결책은 하나님앞에 크고 작은 자신의 죄를 끊임없이 회개하는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올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터툴리안 같은 사람은 자기는 회개하기 위해 이따에 태어났다라고까지 말했던 것이예요. 그런 회개하게 하시는 방법이 바로 중심에 깊은 통회예요.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그 근원을 깨달은 후에 그러한 죄를 지은 자신을 정죄하고 미워하고 작별하게 하심으로써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 바로 중심에 통회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중심에 진실한 통회가 이루어질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 친절을 보이지 않으셨어요. 그러나 중심에 깊은 통회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 해 주시고 고치시는 그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죠. 이것이 범죄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죄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고 기도가 단절되고 하는 모든 것들을 내가 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라고 생각하면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그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상이 아니예요. 오히려 그것은 우리를 중심에 깊은 통회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인 것이죠.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다른 표현이라고까지 말했던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에 우리에게 많은 죄와 악한 것들이 있는데 이것을 마음 중심으로 통회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갈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