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에 선을 행하소서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시 51:18).
중심에 통회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여기에서 고백을 하면서 갑자기 그 엉뚱해 보이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죠.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쌓아 주십시오. 기도하거든요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아 주십시오. 기도하는 거죠. 사실 이 기도는 다윗에 있어서 두 가지 주요한 관심사를 포괄하고 있는 기도에요. 시온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히브리말로 찌온 이라 그러는데 원래 말의 뜻이 요새, 메마른 땅 그런 뜻이에요 원래는 별 뜻이 없어요. 시온은 예루살렘을 둘러쌓고 있는 그 지역을 산지를 가리키는데, 이 시온은 말하자면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있는 종교의 중심지로써 교회를 상징해요. 뒤에 있는 이 예루살렘은 이 종교와 일치를 이루고 있는 왕권이 행사되는 중심지를 가리키는 거죠. 그래서 이 시온과 예루살렘 이 둘은 결국은 다윗에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인 성전과 나라 이 두개를 제유법적으로 보여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이 범죄를 통해서 깊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게 되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교회와 그리고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였어요. 더욱이 이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에서 보 면은 왕인 동시에 선지자였어요. 그러니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온과 관련을 맺고 그리고 예루살렘과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은 이 사람은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의미에서 시온과 즉 종교적인 영역과 종교와 일치를 이루고 있는 이 나라의 통치권자로서 예루살렘과 연관을 맺고 있었던 것이에요.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 하게 될 때에는 비상 하리 만치 자기 자신의 유익과 사랑에 빠져들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옛날에 우리들이 역사를 보 면은 왕의 직무가 얼마나 굉장해요. 왕 한사람이 올바르게 나라를 통치하느냐 안하느냐에 의해서 거기 슬하에 있는 그 수백만, 수천만의 백성들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잖아요. 그리고 만약에 나라가 망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왕가에 속했던 사람들의 목숨은 간곳이 없고 또 살아 남아있다고 한들 치욕의 생애가 죽음과 방불 하잖아요. 그런데도 나라를 돌보지 않고 허탄한 일에 빠지게 될 때에는 비상 하리 만치 자기 자신의 이기심에 빠지게 되는 거죠. 바로 그거에요 다윗이 비록 왕이었고 선지자였지만은 그러한 범죄를 통해서 비상 하리 만치 자기 자신에 집중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실 잠시 시온도 간곳이 없고 예루살렘도 관심이 없었어요, 물론 왕이었으니까 왕으로서 하던 일을 계속 할 수가 있었을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위가 아니잖아요. 그랬는데 하나님 앞에 깊이 통해하고 나니까 비로써 시온의 운명과 예루살렘의 미래가 마음에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떤 신자가 자기 보다는 끊임없이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고 자기보다 자기의 행복보다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번영에 대해서 마음을 쏟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매일 매일 회개하는 사람이라는 거죠. 그러지 않고는 그러한 멘탈리티를 마음을 심성을 정신을 유지 할 수 없는 거죠. 그걸 보여주는 거죠, 죄에 대해서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비상한 비상하게 이루어 졌던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게 되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통회하게 되고 이렇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바라시는 견지에서 질서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때 자신의 이러한 죄과 시온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불순종하거나 악을 행하면 우리 혼자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일을 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될 때 이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가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 시온의 선을 베풀어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통절하게 기도 했던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 선을 베풀어 주시는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이런 지경에 빠지고 보니까 자기 자신이 포함된 시온에 하나님이 선을 베풀어 주시는 것은 그야말로 시온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에 근거한 선일 수가 없는 거죠. 주님의 은택을 구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은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거예요. 가치 없는 죄인에게 덧입히시는 하나님의 호의로 선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 앞에 기도 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보 면은 우리는 이 다윗의 시대와는 비교 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특권과 영적인 잇 점을 가지고 있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시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우리를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니까 그걸 생각하면 이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이 정말 놀라운 거죠.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마다 이렇게 주님의 특별한 은택으로 이 시온의 선을 행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고 또 다윗과는 비교될 수 없는 이점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혜를 베푸시고 주님이 교회에 베푸시는 어떤 특별한 위로와 넘치는 선이 있을 때 그것을 우리의 공로라고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은택이라고 여기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에요. 그러면서 예루살렘 성을 쌓아 주십시오, 라고 하는 거죠. 당시 한 나라의 강성함은 성의 높이와 크기에 달려 있었어요. 그래서 엄청난 나라의 규모나 강성함을 의미할 때 저 큰 성 니느웨 그런 표현이 있죠. 실제로 고대에로 넘어가게 되면 성을 단단히 쌓기만 하면은 사실 공격할 수 없어요. 무기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지금이야 의미가 없죠. 비행기가 뜨면은 그 이상의 것도 전부다 다 날려버리는데 단추 하나 눌으면은 수만 킬로 떨어진 곳에서 목표물을 맞추니까 의미가 없죠. 그래서 이제는 군인들이 성을 쌓고 뭐 튼튼한 집을 짓고 그런 거 소용없어요. 지난번에 한번 오늘날의 전술무기에 대한 것들 다큐멘타리를 일부러 구해서 봤는데 아프카니스탄의 경우에 돌로 만든 산 바위산을 굴을 뚫고 한 60미터쯤 들어가서 사람들이 거기에 탈레반들이 우거하는데 정확하게 맞춰요. 60미터 속에 바위산을 뚫고 굴을 만들었는데 더 잘 죽는다는 거죠 왜냐하면 정확하게 탐지기로 찾아내서 거기 구멍에 다가만 폭탄을 집어넣으면 이 폭탄이 속에 쑥 들어가서 시간을 가지고 터지는데, 터질 때 압력이 이렇게 확 트인 공간에서 하면 압력이 사방으로 공기 속에 퍼져나가잖아 그런데 이게 바위산이야 그러니까 꽝하고 터지 면은 폭탄이 파편이 날아가기 전에 그 압력에 의해서 사람들이 내장이 다 터져서 죽어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요새를 든든히 쌓고 하는 것이 의미기 없지만 이 당시에는 성만 튼튼하게 높이 쌓으면은 공격할 수 가 없어요.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거 보 면은 공격 할 수 있겠어요. 그 입구에 입구가 달려있는 성곽들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성과 성을 잇는 성벽들이 있잖아요, 그 것들은 어떨지 모르지만은 그 앞에 있는 그것들은 도저히 넘을 수 가 없죠, 20미터씩 이상 되는 그런 어마어마한 절벽과 같은 성을 어떻게 점령 할 수 있겠어요 불가능하죠. 그러면서 주님께서 이 언약 공동체의 나라를 강성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고 있는 거죠. 비로써 이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이제는 시온을 염려하고 그리고 예루살렘을 근심하는 참된 선지자와 왕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 거죠.
그러니까 성도의 참된 행복이 이 시온을 위해서 마음을 조리고 예루살렘을 위해서 근심하며 살아가는 것 그자체가 사실은 죽는 것 같으나 사는 것이요 괴롭고 쓰라린 거 같으나 사실은 그 괴로움과 쓰라림 속에 자신의 영혼에 생명이 있다 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한없는 기쁨과 특권으로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생활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생활이어야 하는 것이에요. 이해되죠.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