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번제를 받으실 때에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시 51:19).
51편 시편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보 면은 이상하게 복수로 나옵니다. 그 앞에서는 개인적인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기뻐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갑자기 여기에서 그 제사를 주의 단에 올리는 주체가 복수로 등장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무엇과 관련이 있냐 하면은 13절에 나오는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올 것입니다 라는 기도와 관계가 있는 것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은 결국은 자신의 죄의 문제를 발견하면서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이켜 주시면 그러면 그렇게 자기가 알지 못했던 죄에서 깊이 연루되어 있다가 거기서 하나님이 신령한 방법으로 은혜롭게 자기를 건져주신 그 놀라운 경험을 토대로 알게 된 신앙의 세계, 은혜의 세계,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서 자기처럼 범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칠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 죄인들이 대책 없이 죄에 묶여 있다가 자기를 통해 증거 되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의 역사와 은혜와 죄의 세계의 비밀들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지요. 그리고 이러한 다윗의 기도는 정확히 사실로 이루어지게 되죠. 그래서 후기에 쓰여 진 작품들 이라고 판단되는 그런 시편들을 보 면은 아주 깊은 세계로 들어가요 그래서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파헤치는 그러한 심오한 시편들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뭐 그거를 증거를 제가 여러분들에게 다 제시할 시간은 없는데 하여튼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세계를 아는 지식, 그 다음에 사람을 아는 지식, 사람을 아는 지식은 다시 자기를 아는 지식과 그 다음에 사람 일반을 아는 지식 이 세 가지는 나뉘어 질수가 없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 빛을 통해서 세계를 아는 정확한 지식으로 인도하고 그리고 결국은 세계와 하나님을 인식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 이기 때문에 결국 이 세 가지 지식은 나뉘어 질레야 나뉘어 질 수 없는 것이에요. 더욱이 인간이 자기를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든지 사람 일반에 대해서 아는 것 없이는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아 감에 따라서 자신도 그 안에서 설명이 되는 것이죠. 또 반대로 인간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세계는 경험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통해서 인간 일반이 누구인지를 유추해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이 세 가지 지식은 나뉘어 지 지 않는 것이죠. 만약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인간만을 깊이 탐구 한다면 그것을 통해서 도달되는 인간에 대한 지식은 오류가 많이 있을 수밖에 없게 되고 그리고 참된 앎이라고 말할 수 가 없어요. 그래서 심리학이나 이런 곳에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파헤친 것을 보면 인간을 상당한 부분 많이 파헤칩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의 세계를 영역을 개척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인간을 대해서 파헤쳐서 인간에 대해서 상당부분 알게 되지만은 그러나 정말 인간에게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한 인간에 대한 지식은 감추어져 있기 마련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인간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비례하게 되고 또 자연세계를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비례하게 되는 거죠. 결국은 보면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과 자연을 주신목적, 하나님이 세상을 주신 목적과 자연을 주신 목적과 성경을 주신 목적, 인간을 주신 목적과 신자로 만드신 목적, 그리고 세상을 주신 목적과 그 다음에 교회를 주신 목적, 또 교회를 주신 목적과 하나님의 나라를 주실 목적이 거의 모두 다 같아요. 그리고 결국은 이 자연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는 이 두 가지는 일치를 이루게 마련이지요. 문제는 죄가 들어온 뒤에 혹은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이 두 세계가 일치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서 돌아가는 이 모든 연계를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 하였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들여다보고도 거기에서 성경과 배치되는 수많은 증거를 찾아내고 또 성경을 그렇게 많이 이해하면서도 자연의 세계,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와 불일치하는 장면들을 보게 되고 또 교회를 보면서도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신 목적과 교회를 주신 목적도 일치를 하는데 이것들을 올바로 읽어낼 수 있는 이성의 힘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거기에서 많은 갈등과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결국은 이 시인의 기도는 이러한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게 될 때 이것은 공동체적 사건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의 지식의 빛 아래서 사는 사람들은 결국은 이렇게 범죄 한 과정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심오한 은혜의 세계의 비밀들에 대해서 알게 하셔서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범죄가 없었더라면 알지 못했을 그 심오한 은혜의 세계와 용서의 비밀들을 터득하게 하셨습니다. 시인으로 하여금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금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깊은 자신의 악을 발견하기 전까지의 세계가 신앙의 세계가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는 시기였다면, 이후에는 자신의 죄악과 그리고 자신 속에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심연과 같은 악의 뿌리를 발견한대서 오는 몸부림 그래서 매 순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은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이러한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서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죠. 그래 그것이 어떻게 보면 다윗의 말년을 하나님 앞에 더욱 거룩하게 만들었던 것이죠. 이렇게 해서 결국 시인은 개인의 문제를 통해서 공동체를 보게 되고 자신이 그런 죄에 빠지게 되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그리고 미끄러져 하나님의 도에서 멀어진 수많은 공동체의 가족들이 생각이 났던 것이죠. 그리고 단순히 악한 인간이다 라고 생각했던 그것에서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그런 끔직한 인간 자신의 죄악과 이런 모든 것들을 발견하고 그래서 결국은 이제 자기가 여기에서 돌이키면 어떻게 그 인간을 고치고 치료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매달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죄 있는 자들은 모두 주께 돌아와서 자신과 같이 중심에 통회하고 다시 하나님께 연납되는 공동체적인 헌신의 때를 바라보면서 이 위대한 시편51편을 마무리 하고 있는 것이에요. 여기서도 역시 성도의 범죄가 혹은 성도의 선한 것이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닌 공동체적인 공동체적으로 성내전적으로 연합되어서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칼빈 선생이 항상 자신의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루면서 이러한 공동체적인 봉헌 성내전적인 봉헌으로서의 한사람 한사람의 선행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런 시편의 경험이 많은 참조가 되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범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의 심오한 세계, 죄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보여주어서 결국은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단 조건이 있는데 죄 짓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죄에서 돌이키려는 죄인들에게 이런 일들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고 너무나 커서 우리들이 쉽게 판단할 수 가 없는 것이죠. 요번에 우리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범에 대한 기사를 접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마 그 자신 안에 자기도 어찌 할 수 없는 그런 운명과 같은 살기 살인의 욕구 이런 것들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것이 어떻게 치료 될 수 있을까 과연 개인적으로 그 사람이 그것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는 없지만 그러난 자신의 자의적인 힘으로 자기 안에 있는 그러한 패역한 충동을 넘어 설 수 있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결국은 이 세상에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다 하나님 밖에 없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본성처럼 여겨지는 숙명도 하나님은 바꾸셔서 하나님을 향해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죠. 누군가가 그렇게 외로운 시절에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다면 그의 인생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1960년대에 나이 드신 분은 기억할 것에요. 고재봉이라는 사람 기억할거에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 글을 읽어 볼 기회가 있었어요. 아주 새까만 옛날이에요. 그 당시에 도끼로 여섯 명 인가 일가족을 모두 때려 죽였는데 그게 사실 알고 보니까 죽여야 될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그 사람은 이사 가고 딴 사람을 죽인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사형을 당하지요 그 후에 그가 이제 감옥에서 전도를 받고 깊이 회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사형을 당할 때 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진실했는지 거기 있는 모든 교도관들이 감화를 받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기로 결심한 장면들이 거기 기록돼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죽어 가면서 오히려 자기를 향해 ..총살 당했어요 군인이니까 총살을 시키는데 총을 모두 겨누면서 마지막 할 말이 없냐 그랬더니 저는 너무 행복하고 이 세상 더 살면 뭐 하겠습니까 하나님께로 가는데 자기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거에요. 마지막 순간에 그러면서 자기가 가장 선한 표정을 하면서 그 자기를 쏘려는 사람을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부탁하기를 내가 활짝 웃는 그 순간에 나에게 총을 쏘십시오. 정중하게 애기해요.
그래서 결국은 기쁨 속에서 주님께로 가게 됩니다. 이걸 보면서 결국 인간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그것이 결국은 그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성도에요 그래서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거죠. 우리를 절망하고 낙심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은 환경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더듬어 가면 우리 자신이에요. 그래서 환경은 우리가 바꿀지 모르지 만은 우리 자신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그것을 여기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시인이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심오한 세계를 하나님의 사랑의 큰 크기와 깊이와 넓이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