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자의 정체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시 52:2-5).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악인'이라는 것은 단순히 악을 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의 기반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할 때 두 가지입니다. 바탕이 선한데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다가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있고 바탕 자체가 아예 악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악이 흘러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편은 두 번째 사람들이 악인이라고 규정합니다. 바탕 자체가 악해서 거기에서 악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면 바탕 자체가 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무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반감.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서 사람이 악한 바탕을 가지게 됩니다. 악한 삶이라는 것은 그런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시인이 악한 사람을 지칭하면서 자기에게 끊임없이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는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원수들을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 밝히면서 그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식상으로 보면 자신이 누군가에게 핍박을 받고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만 좀 더 크게 보면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고통을 받는 것이 그 뿌리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인을 괴롭히고 있는 무리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럴수록 하나님께 더 많이 피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도망치는 하나님과의 연합의 계기로 삼는 사람 사이의 대조를 이룹니다. 단순하게 악인으로부터 고통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그 뿌리를 더듬어 가보면 자신은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속해 있고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많은 사람은 그 뿌리 자체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도를 가지고 악인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구도를 가지고 시인들이 악인을 생각한다고 하면 악인에게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고통을 받는 시인들이 해야 할 일은 더 많이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께 속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행실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 그리고 자기를 대적하고 고통을 주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대한 반감과 적대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에서 의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착념하였던 사항입니다. 그러니까 악인에게 미움을 받아서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 악하게 마음을 먹고 그들에게 복수를 하면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자기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악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바깥에서 악인끼리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이러한 구도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반드시 지키시려니와 혹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자신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하나님께로 피하는 사람들이 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윗 같은 경우 원수들에게서 악을 당할 때 오히려 자신의 악을 돌아보고 더 많이 하나님께 속하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께 있을 때 완벽한 승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고, 악인이 자신에게 악을 행할 때 자신이 더욱더 선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 붙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 자체가 악인이 악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하나님 앞에서의 훌륭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인들에게 악을 당할 때 하나님께 호소하라는 가르침이나 사도 바울이 로마서, 고린도서에서 가르치는 가르침들. 악인에게 차라리 악을 당하는 것이 훨씬 낫다. 원수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에도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더욱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하는 가르침들은 시인의 이런 경건한 가르침과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주일에도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라고 사랑의 아홉 번째 특성에 대해서 배웠는데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악을 당했을 때는 악을 악으로 갚을 것을 적극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런 악한 기대를 꿈꾸면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망가집니다. 사실은 누군가를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용서할 때에 가장 큰 유익을 얻는 것은 용서 받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 해주는 그 사람 자신입니다. 그에게 영혼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교회 개척 초기에는 용서에 대한 설교 시리즈가 참 많았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이런 문제에 걸려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많은 교인들의 영혼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면 그 악을 당한 사람이 해를 입는 것보다 더 큰 해를 악을 행하는 우리 자신 속에서 해를 보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면 그 해택을 입는 사람보다 선을 행한 그 자신이 먼저 유익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뿌리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환경이 망가지면 더 좋은 환경을 찾아 가면 되지만 마음이 망가지면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에서 우리에게 만약에 너희의 마음이 등불이 꺼져서 어두우면 무엇으로 그것을 밝게 하겠느냐?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마음에 어두움이 도입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로 피하는 마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이렇게 거친 대우를 받으면서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에 악인들의 정체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말, 생각, 마음에 있는 의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거침없이 자기 마음에 솟구치는 대로 악을 행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춘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그 사람을 해코지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지만 혹시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손으로 그 사람들을 향해 자기에게 행하는 것과 똑같이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의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그들이 영영히 하나님이 너희를 멸하실 것이다. 너를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실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악한 것과 관련하여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두 방향에서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첫째는 이 다윗도 굉장히 오랜 시기에 걸쳐 시를 써 내려가고 이 시를 쓸 때에 그 마음에 영혼에 상태도 각각 달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원수들을 향해 쏟아놓는 격한 감정은 미숙한 신앙에서 비롯된 격정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편 많은 곳에서 시인이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분노를 쏟아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닌 보편적인 악인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기의 이익과 직접적인 관계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쏟아 놓는 많은 비난과 분노는 오히려 거꾸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악인들을 징벌하는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분에 이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다윗이 사울의 일행이 자신에게 악을 행해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의로우신 하나님이 주권가운데서 이들을 다루어주시도록 그렇게 기도합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주님의 주권에 자신의 인생을 맡깁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들이 깊이 감명을 받게 되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면 반드시 악인들에게 에워싸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고통입니다. 하나님께 속하면 속할수록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생겨나는 수많은 갈등과 악인들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고통 속에서 똑같이 악을 생각하고 악을 마음에 품으며 산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큰 불행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에 이 모든 것을 맡깁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통치가 자신의 삶 속에 악한 원수들 속에 실현되기를 기대하면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거기에 신자의 평안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