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자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시 53:4).
하나님이 이 지상의 세계를 굽어 살피실 때에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 찾는 자가 있는 지 보려 하실 때 모두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랬습니다. 이제 4절에서는 불법을 행하고 악한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하나님께서 살피고 계시는 것이죠. 그 때에 여기에 보니까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이게 그러니까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죠. 무슨 뜻인가 하면 죄악을 행하는 자가 지혜가 없냐. 그렇지 않죠. 오히려 이 세상에서 악하게 살아가고 신앙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뱀 같이 지혜롭죠.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이 세상에 살아남는 사람들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의 악한 자들의 지혜가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악한 자들의 지혜가 빛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지혜보다 뛰어날 때가 많은 거에요. 그러니까 그들은 무지한 게 아니라 아주 지혜로운 거죠. 다만 그 지식과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과 지혜가 아니라 자기를 공경하는 지혜와 지식이에요. 그래서 그 지혜와 지식을 따라서 악하게 살아가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 없다 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나 이제 또 한편으로는 무지하뇨 할 때 결국은 무지하다는 답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거죠.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세상의 악한 지혜에서는 이렇게 슬기롭고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공경하고 살아가야 할 기본적인 지혜가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경 맨 앞에 나와 있는 어리석은 자는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하도다 이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모든 방면에서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는 사람이에요. 그게 결국은 무지이죠. 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 되냐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나머지 모든 하위의 판단들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거죠. 자, 내가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행하고 싶으면 하는 거죠. 내게 이익이 돌아오느냐 고통이 돌아오느냐 이것만 영향을 미치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내가 억울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이 나의 억울한 것을 갚아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나는 거죠. 주님의 심판에 맡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게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모든 사물과 인간에 대한 하위의 판단들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불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현혹이에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하게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 예기죠. 그래서 결국 죄악을 행하는 자는 한편으로는 전혀 무지하지 않으며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무지한 사람이 되는 거에요.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그들의 행위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 도다.‘ 여기에서 먹는다는 말이 나오는데 구약성경에서 ’먹는다’라는 동사의 목적어를 사람을 취하게 될 때, 사람을, 혹은 사람을 비유한, ‘네 양을 먹으며’ 이렇게 할 때에 그 때에 그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가진 하나님이 가진 형상을 헤치며 그러면서 그들에게 불법과 불의를 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서 먹는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음식이 있고 먹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먹게 되면 그러면 대상이 되는 음식이나 그런 것들이 먹는 사람에 대해서 항거하거나 불순종하거나 그러지 않잖아요. 아무 힘없이 삼켜지는 것을 가리키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는 힘이 없는 백성들이 힘이 있는 어떤 사람에게 불법과 불의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당하면서 그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에 의해서 파괴되고 고통당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비유한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말에도 그런 거 있잖아요. ‘떡 먹기다’ 누워서 떡 먹기다 그러는데 사실은 누워서 떡 먹는 거 굉장히 힘들어요. 특히 그것이 찰떡일 경우에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왜 그렇게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편안한 자세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거죠. 여기에서도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에요. 쉽게 쉽게 무엇에 의해서 제재 받지도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때에 그렇게 쉽지 않은 거죠. 대표적인 것이 아합의 사건이쟎아요.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이 되게 갖고 싶었죠. 갖고 싶은데 떡 먹듯 먹을 수가 없어요. 왜? 그래도 아합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아는 모종의 지식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애를 끓이면서도 차마 신앙의 일부가 남아 있어서 그 포도원을 강탈할 수가 없어요. 고민하는 것을 보고 이세벨이 그냥 가볍게 쳐 죽이고 그냥 빼앗아 버리죠. 그러면서 “뭘 그렇게 고민합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완전하게 자유로운 거에요. 사실은 그것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죄에 메인 것이고 악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거죠.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랬거든요. 그러면서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것이에요. 하나님을 부른다는 뜻은 뭐냐 하면 예배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창세기 4장에 가 보면 처음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음 기록이 나오는데 에노스가 하나님을 불렀더라. 그게 예배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진지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없는 것이 바로 이 사람의 특징이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은 실제로 이 무지 속에서 자유롭게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을 상하게 하지만 사실은 무지하고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는 죄악에 시달리며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서 일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그 지식의 빛 아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이 되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