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기억하시는 날에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시 56:8-9).
시인이 유리한다고 여기서 표현한 이유는 끊임없이 원수들에게 압제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면서 피해 다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죠. 이미 다윗은 벌써 이전에 왕이 되기 전에 시절에 사울에게 쫓기면서 이런 도피하는 생활을 많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시인은 자기가 유리한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제 우리가 유리한다고 할 때 이것이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서 신앙을 인해서 박해를 받음으로서 유리하는 경우와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 그렇게 하면서 박해를 받으면서 유리하는 경우가 있죠. 영어에는 적절한 표현이 없지만 우리말에는 이 두 가지가 아주 분명하지요. 목적을 찾아가면서 유리하는 것은 우리가 방황한다고 하지만 목적도 없이 떠도는 것은 우리들이 배회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말하자면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허락하신 특별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속에서 신앙을 지키면서 살면서 그러면서 원수의 압제를 인해서 유리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인생에 이러한 방황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미끄러지고 죄짓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악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믿음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끊어진 사람인 것처럼 우리를 홀로 두셔서 방황하고 배회하게 하실 때가 있는 것이죠.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 시인은 아마 많은 눈물을 흘렸던 모양이에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큰 고난은 우리에게 항상 감정의 움직임들을 가져오지요. 그렇게 해서 경험하는 것이 큰 슬픔이요 그리고 고통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기의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아 달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제 생각에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하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올린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 이와 유사한 표현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이 굳이 ‘자신의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으십시오.' 라는 표현을 했을 때에는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죠.
우선 ‘주의 병’이라고 할 때에 이 ‘주의’ 라는 소유격에 우리들이 눈길을 주어 보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우리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병이라고 하는 것은 용량의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떤 특정한 목적으로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자기가 지금 흘리는 이 모든 눈물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그 분량을 채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에 적합하게 되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실제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가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열렬히 간절히 기도해도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직도 가족을 위한 나의 이 기도와 고난이 가득차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똑같은 표현은 아니지만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죠. 내가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나의 육체에 채우려고 한다 이런 표현을 하죠. 그래서 마치 일정 분량 가득 차고 나면 더 이상 그런 고난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표현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인생의 종말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서 우리의 고난과 슬픔의 분량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죠.
또 하나는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흘리는 이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으십시오 라고 할 때에 이것은 향품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죠.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귀한 향유나 혹은 포도주나 이런 값진 액체를 담는데 병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인하여서 이렇게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며 흘리는 눈물이 하나님께 드리는 아주 의미 있는 향품과 같은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흘리는 눈물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하나의 중요한 예물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매번 반복해서 눈물로 드리는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제사라고 묘사를 했습니다. 눈물이 하나님 앞에 고귀한 이유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쏟아 놓는 이 기도는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빚으시든지 충분히 하나님의 손에 의해 빚어지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의 강력한 소원, 마음의 강력한 기대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하는 것은 내가 원수를 인하여 받는 많은 고난이 하나님 앞에 열납 되는 고난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원수를 인하여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그래서 결국 이 고난에 담긴 주님의 뜻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두 가지 소원을 담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는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습니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합니다. 대명사로 나오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것은 바로 앞 절에 있는 내용과 연결을 이루면서 자기의 눈물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눈물 자체가 주님의 책에 기록되었다기 보다는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하나님 앞에 살았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했던 자신의 행위가 기록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얼마든지 가능한 해석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제 성경의 기록들을 미루어보면 하나님이 당신의 책에 기록하는 것은 우리의 어떤 행동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이름이에요. 그래서 구약에서 크게 두 군데에 이런 묘사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말라기 3장에 나타나고 또 하나는 모세의 고백 속에 나타나죠. 자기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는 그런 고백이 나오죠. 그래서 아무래도 두 번째 해석이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이름을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는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당신의 언약백성이며 당신의 자녀입니다. 이런 고백이죠. 그러니 내가 흘리는 이 많은 눈물을 기억하시고 나의 인생을 인도해주십시오 라는 고백을 주님 앞에 드리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 시인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원수들은 물러가고야 말 것이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시인은 이렇게 깊은 인생의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태도를 바꾸셔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태도를 바꾸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무언가를 못 깨닫고 계시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꾸기 위해서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사실 바꾸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생활이고 우리의 믿음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그 일이 짧은 순간에 보면 나쁜 일이고 가슴 아픈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또 우리를 이끌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을 걸어가도록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하시는 일입니다. 자기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고난에 넘치는 삶을 살았지만 그가 잃지 않고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이렇게 자기의 원수들에 의해 압제와 공격을 많이 당하는 괴로운 날에 오히려 주님께 피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소중한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고난과 시련이 넘칠 때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