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하시는 하나님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찌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시 57:2-3).
교회의 역사를 보면, 찬송가가 아주 많이 작곡되었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 때가 교회가 평안하고 음악가들이 많았던 시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치 않습니다. 찬송가가 많이 작곡된 때는 대부분 전쟁이 있거나 큰 재난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큰 고통을 받을 때입니다. 특별히 찬송시들이 쓰여지게 됩니다. 이것은 고난이 교회로 하여금 얼마나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게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식으로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임하는 많은 고통과 시련은 오히려 잠자던 교회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어 주고, 그래서 하나님의 선포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시인이 똑같이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데, 원래 죄된 인간은 하나님을 부르짖고 사는 것이 본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거듭난 새 본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려고 하만, 남아있어서 강력한 힘을 아직도 발하는 옛 본성은 하나님없는 삶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인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주님 앞에 간구합니다.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고 간구하는 이 시인의 간절하고 절실한 부르짖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악한 자들의 압재로부터 건져주시기 바라는 아주 절실한 기도였고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러한 간절할 부르짖음 속에서 이 시인은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주시리라는 점을 신앙 안에서 확신합니다.
첫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사람에게는 힘든 것과 덜 힘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일을 이루기 위해 큰 능력과 적은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기만 하신다면,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이 시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우 절실하고 간절하게 간구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시되, 어떻게 구원해 주실 것인가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 인자와 진리, 이 두 가지를 보내셔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는 시편에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보내신다는 인자와 진리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이 인자는 히브리말로 헤셋드인데, 이 말이 보여주는 것은 인자의 공로에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성품을 따라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이 시인은 자신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사람은 악인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고, 자신은 그들에게 피해를 받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앞 에 자신의 의롭고 완전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악인에게서 고통을 받는다는 이유로 우리 자신이 갑자기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를 내가 저 악한 사람들보다 의롭기때문에 나를 건져주시고 승리하게 하소서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수들보다 낫게 하나님께 대우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의로움으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때문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들에게 때로는 고난과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는 이처럼 하나님 자신의 성품, 그 거룩하신 속성에 우리를 깊이 젖게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며적인 교통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자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성품을 묵상할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그래서 그 성품의 빛 아래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고난 속에서 기도하게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두 번째는 진리입니다. 히브리발로는 에메트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진리라고 번역을 해야하는 지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의 뜻은 신실함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혹은 신실함으로 번역이 됩니다. 사실 두 가지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신실하다’, ‘믿을 만하다’는 것은 일관성입니다. 믿을만하고 신실한 것, 이것은 일관성입니다. 일관성은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서 꾸준히 같은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마음을 먹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것을 변덕스럽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은 자신 안에서 변하시는 분이 아니싶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항상 동일하게 예측할 수 있게끔 당신의 성품을 따라서 움직이시고 행동하시는 분이고, 당신의 성품을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고 계십니다. 그런 신실하심 때문에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인간은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오늘은 저 사람에 대한 열열한 후원자가 되었다가 내일은 저 사람에 대한 배신자가 되고, 내일은 저 사람에 대한 배신자가 되었지만 또, 모레는 저 사람을 향해 돌아서고 하는 신실함이 없는 마음과 행동을 인간은 얼마든지 합니다. 그가 변하고 움직이고 변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그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니님은 여전히 우리를 이끄시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하심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자와 진리를 보내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란과 시련을 당하면 그 답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예측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눈에 보이는 원수들의 강함을 두려워하지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아브라함 링컨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의 원수의 수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 문제이다.” 우리의 원수가 많던 적던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서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