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드소서. 구원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시 59:1).
Ⅰ.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존재
성경, 특히 시편에 보면 하나님이 드신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또 그렇게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나를 드소서.’ 라는 하나님께 대한 간구의 형태로도 자주 나옵니다. 여기서 든다는 것은 높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엎드려져 있는 것은 비굴한 것이고 그리고 특별히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 엎드려져 있는 것은 엎드린 사람과 흙의 동질화의 개념을 상징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시잖아요?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아팔’이라고 나오는데 이게 사실은 흙덩어리가 아니라 흙먼지에요. 티끌이에요. 흙에서 일어나는 아주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진 그 티끌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이유는 뭐냐 하면 가장 사람들이 하찮게 여길 티끌로 사람을 빚으심으로 자신들이 원래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함이에요. 이후에 인간들이 ‘티끌만도 못한 것이…….’ 아니면 ‘티끌만큼도 나에게는 없다…….’는 표현을 하지요. 크기에 있어서도 티끌은 가장 작은 것이고 가치에 있어서도 아주 작은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는 크기에 있어서도 무한하신 분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는 그 가치에 있어서도 끝이 없으신 무한량하신 분이잖아요. 그 하나님과 완벽한 대조를 이루는 인간으로서 창조하신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인간 존재가 그러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비교해 볼 때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 끝이냐? 아니에요. 오히려 하나님의 맨 끝은 자연의 세계 중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인식도 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그 티끌이 끝일거란 말이에요. 오히려 인간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피조물 가운데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존재에요. 모든 피조물 중 가장 뛰어난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가장 끝에 있는 티끌을 사용하셔서 만드신 것이에요. 티끌을 사용하셔서 만드시는 것이죠. 물론 맨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질료로부터 나왔지만 그 질료 자체는 하나의 반(半) 실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거의 없는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표현했거든요. 그러니까 질료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인간에게 아무리 상기시켜도 질료 그 자체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다는 것을 잘 몰라요. 그래서 결국은 그 무(無)가 아닌 티끌을 사용해서 만듦으로 말미암아서 그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뛰어난 존재이면서 사실은 자기의 본바탕은 티끌에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그런 양면성을 가지고 하신 것이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재료는 그런 티끌인데 하나님이 손으로 빚으시잖아요. 다른 모든 것들은 말씀 한마디로 ‘나오너라.’ 그렇게 해서 창조하시는데 그런데 이 인간은 그렇게 가치 없는 티끌인데 그 티끌을 하나님이 손으로 빚으셔서 사람을 만드시는데 이 사람에게는 이런 존재론적인 이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에요.
Ⅱ. 모든 피조물 위에 높이심
그래서 인간이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용도,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자기인식,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인데……. 이렇게 살아서 되겠는가라는 자기인식,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볼 때에 그런 자기 인식에 기초해서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라는 것, 이 두 가지란 말이죠. 그리고 자기 자신은 정말 티끌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허무한 티끌로부터 빚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에요. 그게 바로 신앙이고 그게 바로 믿음인 것이죠. 그래서 이제 회개하고 이럴 때 그 때 땅에 엎드려지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사실은 성경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 동북아시아의 사고 속에서도 나와요. 그게 황제나 임금에게 간절한 소원이 있거나 커다란 잘못을 했을 때 그 때에 땅바닥에 엎드리는 석고대죄가 있잖아요. 그게 흙의 무가치함과 동질화에요. 그렇게 자기 자신이 내려가는 것이에요. 거기서 하나님이 그를 드시는 것이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높이는 것이에요. 그것이 곧 모든 사물들 위에 높이는 것이에요.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시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매장되시잖아요?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비하의 최하위로 내려가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흙과의 동질화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격으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인격 없이 사람의 인성을 취하시잖아요. 그 인성이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매장되셨다고 하는 것은 흙과의 동질화의 개념에서 그가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지만 육신으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흙과 동일하게 그렇게 무가치하게 취급되셨다는 것이죠. 우리를 존귀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흙과 동질화의 개념으로 무가치해지신 것이죠.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이 구속의 역사는 우리들이 다 연구를 못하고 밝혀내지 못해서 그렇지 이런 놀라운 구속사적인 일치가 아주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결코 우연히 아니라는 것이죠.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에 바로 ‘확’하고 영광스럽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살리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흙까지 내려가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다시 하나님이 드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뭐라고 그래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그렇게 해놓고 이제 ‘이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사 만물을 그 발아래 무릎을 꿇어 주라 시인하게 하셨으니…….’ 하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높이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드시는 것이에요.
1. 높이시기 전에 낮추심
그래서 모든 인간들도 이렇게 흙과 거의 동질하게 엎드려져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드셔서 건지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높이 드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티끌 같은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인 그들을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들로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것이죠. 높이시는 것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지극히 높이시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지극히 낮추시기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높아질 때에는 기뻐하고 감사하고 영광스럽지만 그렇게 계속 높이기만 할 때 인간이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그렇게 느끼니까 하나님이 낮추시는 것이죠. 모든 사람에게 발에 밟히도록 그렇게 낮추실 때도 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내면에서 우리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에요. 우리의 죄를 스스로 발견할 때 지극히 겸비해져서 그래서 나는 아무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이제껏 쌓아올린 의와 영광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런 의식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낮아지게 되는 것이죠. 오늘 시인은 바로 그렇게 땅에 짓밟히는 것 같은 아주 비참한 상황에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왜 그렇게 땅에 엎드려진 것 같은 상황이 되었는지를 고백을 하는데 원수와 자기를 치려는 자들에 의해서 자기가 그렇게 패배하고 힘이 없이 엎드려져 있는 것이죠.
2.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심
우리가 인생을 살고 신앙을 이어가면서 결국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힘이에요. 힘! 우리의 힘이에요. 여러분 이 힘은 육체의 힘과 정신의 힘으로 나누어지겠지만 사실 육체의 힘이 좀 없어도 정신적으로 사람이 깊이 침체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가 맑고 육체의 힘이 잘 보전되어 있으면……. 그런 경우가 있잖아요. 자고나면 몸이 개운한 경우가 있잖아요. 이십대에 그런 일들이 거의 끝나지만 어쨌든 일요일에는 몸살이 나도록 운동을 하고도 푹 쓰러져서 자고 월요일에 일어나면 개운하죠. 그렇게 건강하게 되면 정신도 상당히 많은 격려를 받아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배는 꽉 뭉치고 소화는 안 되고 머리는 안개가 낀 것처럼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온몸이 쑤시고 잠에서 깨어 일어났는데도 좀 한번 푹 쉬고 싶은 이런 마음이 들 때 정신도 침체가 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젊어서의 대부분의 침체는 밖으로부터 들어오고 호기심도 많고 유혹도 많이 받으니까……. 그런데 나이가 많아서 오는 침체는 대부분 안으로부터 온다는 말이에요. 육체의 연약함, 과거의 상처에 대한 기억, 이런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그러면서 자기반성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침체로 가는 것이죠. 그 때에 우리는 가라앉는 것을 경험해요. 그게 바로 육체의 힘이죠.
정신의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의 힘은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발생했을 때 그것을 아주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저 사람이 나에게 무엇인가 무례한 일을 했어요. 그 때 정신의 힘이 많이 있을 때에는 ‘아이 뭐 나를 무시해서 그랬겠어? 바쁘니까 그랬겠지…….’ 혹은 모욕을 받았을 때에도 ‘아이 뭐 내가 싫어서 그랬겠어? 저 사람도 얼마나 마음에 맺힌 것이 많았으면 그랬겠어?’ 이렇게 달리 생각하게 만들어주고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게 정신의 힘이에요. 정신의 위대한 힘이고 정신의 위대한 크기죠.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인생을 올바르게 영위해 나가는데 아주 도움이 되는 것이죠. 도움이 아니라 아주 결정적이죠.
그런데 이제 그런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때가 있어요.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지 않고 잘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미끄러져서라도 당신을 의지하는 것을 더 기뻐하셔요. 그래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섭리가운데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때로는 우리를 미끄러지게 내버려두시고 악을 행하고 죄를 짓도록 우리의 의지를 자유롭게 나두시는 것이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에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져서 흙과 동질화의 존재인 것을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존하고자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죠.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 대한 가장 강력한 의존의 감정을 가질 때에는 오직 하나에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용서받을 수 있는 은총이 오직 그분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영혼이 그분 앞에 열렬히 매달릴 때 그것이 인간이 인간본래 창조된 목적에 가장 합당하도록 인간의 영혼이 움직이고 작용하는 순간이에요. 그것이에요. 그래서 사실은 아담도 이 정도까지는 경험을 못한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큰 섭리 속에서 죄가 들어오게 허락하시고 그 죄 때문에 인간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반역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깊은 경지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온전히 구현해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이 구속의 경륜은 정말 오묘한 것이죠. 그래서 이제 한 사람의 신자가 주님 앞에 깊이 엎드려져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생애적인 회개를 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티끌만큼도 그분을 거슬러 살려는 의지와 소원이 없는 것이에요. 그것을 유지하면서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죠.
우리 안에 있는 내재하는 죄와 끊임없이 가변적인 인간의 마음 때문에 구원은 확실하지만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가변성 때문에 그렇게 어려워지는 것이에요. 그것도 또 그렇게 어려워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매일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불완전함이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높이 드시기를 의지하는 그런 계기가 되는 것이죠. 환경으로 우리를 그렇게 낮추실 때도 있지만 환경이 아무 문제가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보게 하셔서 한없이 낮추시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도 사실은 나쁜 일이 아니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도 모두 좋은 일이 아니에요. 그것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주님을 믿는 것, 주님을 따르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런 못된 사울로부터 이렇게 핍박을 받으면서 죽임을 당할 위협까지 겪게 하시는 것은 능력이 모자라거나 그러셔서가 아니라 이런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공격을 받고 고통을 받게 하심으로써 마지막에 결국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게 하시려고 이런 정신과 신앙의 크기를 갖추게 하셔서 한 나라를 주님의 나라로 이끌게 하시기 위해서 준비시키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무슨 기도인줄 알면 그게 함부로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쓰임 받는 영광의 이면에는 거기에 합당하기 위해서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을 하나님이 그를 다루시는 그런 과정이 있는 것이죠. 오늘 1절까지만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