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히 고난당할 때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시 59:3).
Ⅰ. 다윗의 인간관
아마도 이 다윗이 사울로부터 받았던 이 모진 미움과 그리고 박해는 아마 다윗으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하는 아주 중요한 계기였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윗이 다윗으로 하여금 인간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는 가장 커다란 세 가지 사건을 든다면 그것은 첫째는 어렸을 때에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건 특히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그 사건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 사울로부터의 그 모진 박해와 고난 그리고 세 번째로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깨달은 사건, 이 세 가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이외에도 자잘한 사건을 든다면 압살롬의 반역사건이라든지 그리고 세바의 반란사건이라든지 그리고 형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어릴 적의 경험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모두 포함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서 깨닫게 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일관성이 있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은 뼈 속까지 깊이 부패한 인간이라는 인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구약에서 이 다윗이 신학자로서의 아주 아름다운 모델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늘위에 높이 들리신 주님과 궁창에 미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아주 놀라운 이 자연과 철학, 신학을 아우르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그러한 학자였지요. 동시에 그러한 자연과 우주와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학문을 아우를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철저하게 개혁신학적인 이해였다는 것이죠. 그게 뭐냐 하면 도저히 스스로 하나님 앞에 돌아갈 수도 없고 설 수 없는 완전하게 부패한 인간 그러한 인간관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죠. 이러한 인간관은 필연적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 즉 하나님의 ‘헤세드’만이 그 언약백성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었단 말이죠. 이러한 희망이 이제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발전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은총을 필요로 하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부각시키게 되는 것이죠. 그것을 이제 이 다윗이 철저하게 깨달은 것이죠. 이런 점에서 다윗은 굉장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이 아주 이상적으로 자연학과 그 다음에 논리와 철학과 신학과 이 모든 것을 담으면서도 결국은 위대하신 하나님과 거룩하신 아버지 그리고 뼛속까지 썩어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아무 힘이 없는 인간,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죠. 아무튼 그러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부패 하나님을 향한 선천적인 대적의 성질을 이 사울과의 관계 속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죠. 그러면서 이제 고백을 하는 것이에요. 자기의 생명을 해하려고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였어요. 그러니까 강한 자가 하나씩 시인을 해치려고 해도 시인에게는 치명적일 텐데 시인은 외톨이가 되어서 도망을 다니는데 강한 자들은 모였어요. 그래서 그를 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고 다윗을 택하셨다는 것뿐이었어요. 그것은 사실 다윗에게 있어서는 스스로 어떻게 자기를 고쳐서 사울의 마음에 들게끔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지요. 다윗이 언제 기름부음을 받겠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왕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까? 그런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니거든요. 그렇게 다윗을 치열하게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원수들이 나를 에워싸고 내 생명을 노리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이것은 나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다윗이 가지고 있는 신앙인격의 미성숙을 보여준다고 해석을 하는데 사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 앞에 누가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시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때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의 허물을 감찰하신다면 누가 주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고백을 하거든요. 그때 선다고 하는 말이 히브리말로 ‘아마드’인데 견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보자고 한다면 누가 하나님의 시선을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이야기입니다.
Ⅱ. 인간의 죄
이런 고백은 다윗에게 있어서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고백이에요. 여기에서 지금 ‘내가 범과가 없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라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죄에 관한 이야기인데 죄 중에서는 성경이 두 개를 이야기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죄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후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런 죄에 물들어있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지성과 감정과 의지 이런 것들이 죄에 확 사로잡혀있다는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죄에 의해서 사로잡혀있어서 마치 사람이 귀신에 들린 것처럼 그렇게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도록 죄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이 전적 타락의 개념이 아니에요. 물론 사람이 상태에 따라서 그렇게 죄에 전적으로 사로잡혀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전적 타락의 개념은 그런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어도 얼마든지 인간이 사고를 하거나 무엇을 느끼거나 할 때에도 왠지 하나님의 뜻으로 가까이 가는 것과 같은 사고나 행동이나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사고기능이나 정서기능이나 의지기능이나 모든 것에 죄가 미치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게 전적타락의 개념이에요. 그 전적 타락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은 악함이 아주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그것보다 좀 덜하고 어떤 사람은 이쪽 방면으로 어떤 사람은 저쪽 방면으로 죄 아래 있는 영향력의 크기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죠. 마치 지문처럼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에요.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들이 생각할 때에 이 시인이 ‘자기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하고 이야기할 때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어떤 죄가 자기에게 절대로 없다고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의미의 죄에 대한 고백이에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죄가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인간의 이해 안에 있고 인간이 피할 수 있는 죄가 있어요. 그것을 성경에서 고범 죄라고 얘기해요. 인간이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짓는 죄, 그런 것이죠.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한 것들은 양심을 심하게 거스르는 죄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묵상할 때 현저하게 모든 죄가 방해를 가져오지만 그러나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에 영향을 끼치지만 그렇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에요. 마치 우리 모두 누구든지 몸속에 균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리고 적당히 균이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요즘에 자라나는 아이들이 면역력이 아주 약해졌다고 하잖아요. 너무 청결한 환경에서 자라서 아이들이 몸이 균하고 싸워본 경험이 별로 없는 것이죠. 그래서 저항력이 약해지거든요. 그렇지만 우리는 넉넉히 살아가거든요. 그러나 이제 많이 들어오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암 같은 경우도 암세포가 우리 몸에 있어도 그렇게 문제가 안 된답니다. 그런데 십만 개가 넘으면, 그게 모이기 시작하면 그게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죠. 어느 정도는 우리들이 가지고 살고 있고 우리 면역력으로 이기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고 또 번식하기고 하고 이렇게 하면서 그냥 살아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바이러스나 혹은 세균이나 이런 병적인 요인이 우리 몸 안에 있을 때에 잘 극복하기만 하면 우리 몸이 그것들을 인해서 싸우는 것이죠.
Ⅲ. 다윗이 당한 고난의 이유
우리들이 잘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자신을 깊이 성찰해보면 우리가 잘했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제 양심을 거스르는 고범 죄, 혹은 실행 죄의 경우에는 우리의 의식 속에 끊임없이 남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현저히 방해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것이 내게는 없습니다.’ 는 뜻이에요. 자기의 절대순결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나는 적어도 일부러 계획을 세워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거나 악을 행한 것이 기억에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럼 원인은 무엇 때문이에요. 인간이 의식할 수도 없는 그 죄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기 보다는 오히려 시인의 이러한 고난은 시인을 해치려고 하는 악인들의 본성적인 악함 때문에 거기에서 비롯되는 다윗의 고난이라고 봐야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이제 이 다윗은 자신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이 악한사람들의 그 악함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비록 죄를 지은바 없지만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그런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