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5일 새벽예배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시 71:19)
녹취자 : 한지인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만, ‘의’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도 매우 다의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어디에서 ‘의’를 언급하고 있는가를 보면서 다의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새벽시간이라 이 문제를 길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생각을 해보면, 우선 ‘의’라는 것은 옳음입니다. 옳다 그르다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의’는 기준 자체를 가리킵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는 ‘의’이십니다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옳다 그르다의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시는 그 하나님 자체를 가리킵니다.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 하나님은 태양과 같은 분이셔서 수많은 광선을 이 세상에 비추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태양의 광선이 팔분을 지나서 지구에 도착하게 되면 태양에서 비추는 빛이 각종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균과 만나면 살균하는 작용을 하고, 어두움과 만나면 빛을 비추는 작용을 하고, 봄철의 식물과 만나면 싹이 트고 자라게 하는 역할을 하고, 겨울의 얼음과 만나면 얼음을 녹이는 작용을 합니다. 그렇게 많은 피조물들과 만나서 작용을 하게 되는데 그런 작용중의 하나가 ‘의’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 하나님을 보면서 직접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 특별히 인간의 영혼과 그리고 영혼을 가진 인간의 삶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의 강한 속성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그렇게 나타나는 다양한 속성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 자체라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은 공의 자체라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은 은혜 자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식되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의이시다, 하나님은 무엇이시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의’는 하나님 자신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의’는 이 세상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이 모든 우리들 안에 일어나는 일을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해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의지 그 자체를 우리들은 ‘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의 ‘의’는 율법에 부합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의지가 율법을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특히 구약시대에서 이 율법에 부합하는 상태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특별히 시편에 보면 인간이 율법에 온전히 부합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옳으심 때문에 우리가 마치 우리 자신이 율법의 의무를 모두 준수한 것 같은 유익을 얻을 때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의 개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고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구원하기로 한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하나님이 그 법을 따라서 그를 멸망시키시거나 버리시면 인간 편에서는 본인이 어겼기에 할 말이 없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 한번 구원을 받고 선택을 받은 사람이 비록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이런저런 율법에 부합하지 못하는 행동들을 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인간이 완전히 버림을 받게된다면 하나님 자신의 능력이나 사랑의 완전함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그런 염려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지만, 그들이 악을 행하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려고 할 때 모세가 기도했던 것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실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가 자기 백성들을 애굽에서 꺼내었으나 막상 약속대로 가나안으로 인도하려 했더니 능력이 모자라서 중간에 그 백성들을 버렸다는 비난을 받으실 것인데 어찌하시겠습니까‘ 라고 안타깝게 매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모순되지 않으시는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우리가 공로없이 하나님께 혜택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의‘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인간 편에서 보면 그 두 가지, 율법에 합치한 의로움, 그것을 이행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에서 덧입혀주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여겨주시는 그 의. 이렇게 크게 나누면 세 가지이고, 작게 나누면 네 가지로 우리들이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주의 의가 또한 높으십니다. 갑자기 나온 개인적인 이야기들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이야기가 19절에서 도입이 됩니다. 아마도 우리들이 이런저런 땅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벅차면 하늘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 일들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크고 놀랍다고 말할 수 있듯이, 여기에서 시인이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묵시하는 시적인 반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시적인 반전의 내용은, 주의 의가 지극히 높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그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것을 판단하게 하는 기준을 아는데 있어서도 결함이 있기에 개념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무엇인가를 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기준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죄가 그렇게 못 살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이 자유로운 욕망 속에서 우리들이 그 기준을 거부하면서 사는 매일 매일의 결단으로써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의 기준을 아는 것,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우리의 삶과 마음이 거기에 합치하는 것 사이에는 항상 모순이 존재합니다. 부분적으로는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힘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모순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기준이시 때문에 당신 자신이 기준을 지키기위해서 노력을 하셔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의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경향과 속성을 따라서 그냥 사물을 대하고 행동하시고 마음을 먹으시면 그것들이 일관성있게 의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품도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성품도 있고 예수 믿고 거듭난 성품도 있고 아직 남아있어서 내지 않은 죄의 성품도 있습니다. 깨어진 가정에서 자라면서 입은 상처로 말미암아 형성된 본성도 있고, 여러 가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잡한 것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환경들을 통해서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있는대로 바깥으로 쏟아내면서 살면 삶이 개차반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나는 하고 싶어도 또다른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서 하지 말아야 하고, 또 나는 전혀 하기 싫은데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서 하려고 애를 쓰고 살아도 모순투성이의 삶이 됩니다. 그래서 누구도 나는 의롭다, 그래서 나는 의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 그런 묘사가 나오지만, 그것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으로써 사시기만 하면 그런 하나님의 속성이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에 의롭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공식이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은 굳이 아름답게 행동하시거나 아름답게 무엇을 하려고 꾸미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름다움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선을 위해서 노력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 자신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니까 우리에게 의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시인이 주의 의가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땅에서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굳게 하는 것 같고 악인들이 여기저기에서 성향할 때에 하나님의 올바른 도가 꺽여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잠시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이고, 하나님은 여전히 의로우셔서 그래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당신 자신의 그 의로운 성품을 이 세상 위에 두루 비추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시고 주님이 의 자체라는 사실이 오늘 시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위로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자기 자신이 불완전하지만,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에 합치하려고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신 안에 악한 기질이 있고 올바르게 선을 행하며 살려고 할 때에 낙심이 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어디서나 그렇게 선하게 살고자 하는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고 지키시는, 도우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종종 낙심하지만, 그 낙심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선은 하나님의 자기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악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모순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일을 도덕적으로 행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의 어떠하심을 알아가는 것은 그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분을 올바르게 신앙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본받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어떻게 보면 쉽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을 때에만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없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인이 말하는 큰 일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규명할 수는 없습니다. 가깝게 보면 시인 자신이 악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는데 거기에서 자신을 건져주신 것을 대사하고 말할 수 있고, 아니면 갑자기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행하셨던 크고 놀라운 일들, 시편의 다른 곳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꿈꾸는 것 같은 일을 행하셨도다’ 할 때의 그 대사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대사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아주 큰 의로우신 일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둘 다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주와 같겠사옵나이까’ 하는 말은,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이 모든 만물과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탁월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우리 자신이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많은 것들과 우리 주님을 비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모든 것들 위에 뛰어나 완전하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홀로 당신 자신이 당신 자신이 되심대로 우리와 관계를 맺고 또 당신의 생명의 기운을 우리에게 뻗치시지만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당신이 살아계신 효과를 나타내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보고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