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에 든 원인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 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았더라”(마 26:58)
녹취자; 이보배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의 가장 커다란 적은 섬김을 방해하는 시련이나 환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가장 커다란 대적은 시험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속에서 시험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부적합한 모든 상태’ 라고 규정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시험이라고 분류하는 상태는 죄에 빠진 상태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율법을 중심으로 생각한 시험의 개념이고, 진정한 시험의 개념 복음을 기준으로 생각한 시험의 개념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의도대로 살기에 적합하지 않게 된 모든 상태’가 시험에 든 상태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뭐 그렇게 정의를 하고 나면은 도대체 시험에 안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말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사람들은 시험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험에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험에 드는 데는 다양한 이유들이 사용됩니다. 물질적인 궁핍이나, 함께 섬기는 사람들 간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부조화나, 혹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받는 오해나, 혹은 나쁜 사람들의 악한 의도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이차적인 원인일 뿐이고,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이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누차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자만했던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 자기의 결심을 지키는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려도 저는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심지어 죽는 데까지 라도 가겠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는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부인 한다’라고 하는 단어는 현실적으로 커다란 배교의 무게를 가지고 다가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중에 어린소자 앞에서도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까지도 부인하는 커다란 씻지 못할 죄과를 남겼습니다. 결국 원인은 두려움 아니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편은 하나도 없이 예수를 대적하는 사람들로 에워싸여 있었고 자기가 철석처럼 믿고 의지 했던 예수님은 체포되어서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심문을 받고 있어서 모든 예수님의 생사가 거기 모인 사람들의 손에 달린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왜 그랬는고 하니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체포되어서 내려오시는데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예수님을 끌고 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왔습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었고 아마도 베드로 한 사람이외에는 예수님을 이렇게 끝까지 따라간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긴 따랐는데 멀지 감지에서 예수님을 따라갔고 일의 결말을 보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에는 중간 이란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따르면 따르고 따르지 않으면 안 따르는 것입니다. 중간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누차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 말씀하셨고,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요 오히려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 또 ‘종교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고난을 받을 것이다’ 라고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는데 무슨 결말을 보겠다는 것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체포와 심문, 처형에 이르는 과정이 객관적인 구경거리가 될 수 있고, 또 아무런 느낌 없이 중립적인 감정으로 일의 결과를 지켜볼 수 있는 성격의 것이겠습니까?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시험에 든 상태에서도 꾸역꾸역 교회에 나와서 하던 일을 할 수 있고요, 심각하게 악에 빠져있는 상태에서도 이런 저런 직분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 충성스럽게 봉사 한다고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은 자신이 예수를 배반 했다는 것과 예수님을 아주 멀리서 따라가고 있으며 그분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 사실이 객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결과는 언제나 깊은 시험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그리스도의 교회와 자신의 신앙에 해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어느 한 순간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이 멀지 감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분께 붙어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 분을 부종하고 그 분께 붙어있는 삶이 되어야 됩니다. 구약성경에 부종하다 하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히브리말로 ‘다바크’ 라는 단어인데 현대 히브리 사람들에게 ‘데베크’ 하는데 풀을 말합니다. 무엇인가 그 목적에 딱 붙어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밀착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한 믿음의 선조들의 마음과 정신의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에드워즈 목사님은 합치, 혹은 일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거룩함의 본질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치된 마음 그분께 딱 붙어 있는 정신의 상태, 이것이 거룩한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뜻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께 딱 붙어 있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몸으로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께 혹은 하나님께 딱 붙어 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증인은 자신의 양심입니다.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고 그렇다고 우리가 완전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심각한 잘못이 없고, 어디에서든 주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상태에 자신이 있는지, 하나님과 자신사이에 심각한 장애가 있어서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있는 상태에 있는지는 본인들이 잘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 가장 큰 자산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보디발은 진리에 있어서는 애굽 왕 바로의 시위대장 이었고 그 영화와 권세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 요셉을 종으로 샀더니 하나님이 그 작은 종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 큰 복을 내리셨습니다. 사람이 볼 때 중심적으로 쓰시는 사람과 하나님이 보실 때 중심적으로 쓰시는 사람은 다릅니다. 여분들이 교회의 지도적인 일꾼들로서 주님께 붙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주님께 붙어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가끔 밖에 나가서 활동을 하다 보면 어디를 가든지 교회이야기입니다. 자기 교회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때로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아픔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의사선생님들이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기가족을 수술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자신이 믿을 만한 친구를 불러서 오히려 수술을 시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너무나 사랑하는 가족인데 그 몸이 나의 가족의 몸이기에 도저히 객관적으로 다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의학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렇게 다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에 상처를 내거나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의사 한분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 선생님이 늘 하던 말씀이 “너희들의 기술로 환자의 몸을 얼마나 이롭게 할까를 생각하지 말고, 너희들이 혹시 잘못해서 환자의 몸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를 먼저 생각하라.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상당한 자생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기만 해도 웬만한 질병이 낫지만, 만약에 그 몸에 원리에 반해서 이 몸에 손해를 입히게 되면 많은 약과 치료와 의술의 행위가 환자를 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깊은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제가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여러분들 앞에 남아 있는 인생이 매우 잛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예상한 계획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데려 가신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생에 있어서 만약에 우리가 방향 없이 인생을 살다가 주께서 부르실 때 간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설립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순식간에 흘러간 것 같고, 지금도 눈을 감으면, 개척할 때 방배동 골목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인생이 뭘 하면서 살아온 인생인가 마지막 주님 앞에 갈 때 여러분들이 회사의 사장이었고, 돈을 벌었고 좋은 음식점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남이 못가 본 여행지에서 즐거운 것을 본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의미가 없습니다. 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심지어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보내는 박수와 갈채도 그 날에는 여러분들을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변증해 주지 못합니다.
오직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만이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이후로 일평생 동안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는지를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떠날 때 사랑하는 교회가 있고 그리고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고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가 있고,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들이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이룬 것 입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것들은 다 이 세상에 두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깊이 새기면서 신앙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제일 간곡히 비는 것은 제발 열렬히 기도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입을 많이 여는 사람들은 사람에게는 조용합니다. 하나님께 입을 열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할 얘기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기도하십시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에 관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교회가 여러분들과 같은 분들이 새벽에 나와서 간절한 기도로 하루를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할 때는 뜨겁게 열렬히, 바둑을 두다가도 져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역사가 있는데 우리에게 맡겨준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서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